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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다시 동아시아를 말한다
 

작은 섬, 큰 문제*

센까꾸/오위의 역사와 지리

 

 

개번 매코맥 Gavan McCormack

호주국립대 명예교수. 동아시아 역사와 국제관계 연구자로 명성이 높음. 국내 소개된 저서로 『일본, 허울뿐인 풍요』 『종속국가 일본』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 등이 있음.

 

 

‘센까꾸제도의 날’

 

2011114일, 오끼나와(沖繩)의 이시가끼시(石垣市)에서는 ‘센까꾸제도 개척의 날(尖閣諸島開拓の日)’ 기념식이 처음으로 열렸다. 116년 전, 일본에서는 센까꾸(尖閣)로, 중국에서는 오위(釣魚)로 알려진 작은 바위섬들이 일본에 합병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이시가끼시가 이 기념일의 모델로 삼은 것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독도(獨島)와 타께시마(竹島)로 불리는 섬이 100년 전 일본에 합병된 것을 기념해 2005년 시마네현(島根縣) 의회가 제정한 ‘타께시마의 날’이었다. 시마네현의 결정은 한국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시가끼시의 결정이 중국에 불러일으킨 영향 역시 그에 못지않아 보인다.

독도/타께시마와 센까꾸/오위, 이 작은 섬들에 대한 주권행사 문제를 둘러싸고 동아시아는 여전히 갈등상태에 놓여 있다. 두 경우 모두 일본 식민주의, 그리고 미국이 강제한 1945년 이후의 동아시아 냉전질서의 역사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일본은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년 센까꾸/오위를 지배했고, 러일전쟁 중인 1905년 독도/타께시마를 일본 국내로 편입했다. ‘제국 일본’의 붕괴 이후 후자의 지배권은 한국이 갖게 되었고 전자는 27년간의 미국 군사통치를 거쳐 일본으로 갔지만, 주권 문제에 대한 애매한 입장표명은 결과적으로 이후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21세기에 아시아지역의 국가들이 이러한 분쟁들에서 평화롭고 공정한 해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미국의 냉전헤게모니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사건

 

201097일 아침 중국의 트롤어선 민진위(晉漁) 5179호와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일본에서는 센까꾸로, 중국과 대만에서는 오위 또는 오위타이(釣魚台)로 불리는 섬들 인근 해역에서 두차례 충돌했다.1 이 섬들은 일본의 실효지배하에 있지만, 중국과 대만 역시 영유권(領有權)을 주장하고 있다. 어선 선장 잔 치슝(詹其雄)은 순시선의 퇴거명령을 거부했다. 일본측은 어선이 고의로 순시선을 들이받았으므로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정부는 센까꾸제도가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천명했고, 이 사건은 영유권 분쟁 또는 외교적 문제가 아니며 선장은 단지 일본법 위반(공무원의 임무수행 방해) 때문에 조사중인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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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센까꾸 영유에 분쟁의 소지가 없다는 일본의 공식 입장에는 처음부터 많은 의문이 있었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모두)은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지 센까꾸제도를 통치한 미국은 오끼나와의 ‘시정권(施政權)2을 일본에 이양할 당시 센까꾸제도의 귀속에 관해서는 조심스레 애매한 입장을 취했고, 그러한 입장은 이후의 여러 사건들에서도 반복되었다.3 2010년의 충돌사건에서도 미국은 영토 귀속문제는 당사자 간에 해결돼야 한다고 거듭 밝혔다.4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센까꾸제도에 시정권을 행사하고 실효지배한 1972년 이래 일본인 및 외국인의 센까꾸 출입 및 센까꾸 내의 활동이 금지되었기에, 일본정부 역시 센까꾸제도의 귀속이 논쟁거리가 되게끔 행동해왔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 대만 양 정부가 일본의 센까꾸 영유를 부정하고 미국이 일본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거절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센까꾸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에 가깝다.

일본이 이 위기에 대처한 방식은 특징적이고도 흥미로운데, 일본은 어선사건을 중일 양국간의 영토문제를 넘어서 미국과도 관련된 안보문제로 확대시켰다. 923일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일본 외무상은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미 국무장관과 회담한 후 ‘일본의 시정권하에 있는 영역’이 군사적 공격을 받을 경우 미국이 방위의무를 질 것을 규정한 ‘미일안보조약 제5조의 적용범위’에 센까꾸제도가 포함된다는 것을 클린턴 장관이 보증했다고 밝혔다.

클린턴이 실제로 어떤 언급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불과 몇주일 전만 해도 미국은 일본의 센까꾸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는 데 소극적이라는 보도가 있었다.5 미 국무부는 9월 회담을 앞두고 마에하라가 말한 약속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변인 성명에서는 중일 양국 당사자끼리 영토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며 “우리는 센까꾸의 귀속에 관해 어느 쪽에도 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6 그러나 몇주 후 호놀룰루에서 열린 마에하라 외무상과의 합동기자회견에서 클린턴 장관은 센까꾸제도가 안보조약 제5조의 적용범위에 포함된다고 단언했다.7 불과 한달여 사이에, 분명 일본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가운데 미국은 센까꾸의 법적 소유권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겠다던 기존 방침을 뒤집고 전쟁까지도 포함하는 무력사용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애매한 지원을 이끌어냈음에도 일본의 결의는 이내 무너졌다. 925일 칸 나오또(菅直人) 정권은 갑작스럽게 잔 선장을 석방했다. 일본정부측은 선장의 석방이 ‘지방검찰청의 자체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지만, 실상은 정반대임을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즉 선장의 석방은 내각 수뇌부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국제사회’가 일본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보도가 주조를 이뤘다. 또한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경계가 미일동맹에 기초한 ‘봉쇄’를 재천명하게 한 바탕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사건 몇주일 후 『뉴욕타임즈』는 중국이 “점차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호전적이고 초국가주의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중국관을 지지했으며, 서구의 주요 언론은 ‘중국’이라는 말 앞에 ‘호전적’이나 ‘오만한’ 같은 형용사들을 붙이기 시작했다.8 흡사 냉전시대로 되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키따자와 토시미(北澤俊美) 방위상이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아시아 각국 수도를 방문했을 때, 일본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국방장관은 없었다.9 마에하라 외무상이 구글의 지도 써비스에서 중국식 명칭(오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항의했을 때 구글은 명칭 변경을 거절했고, 이렇게 미디어를 입막음하려는 뻔한 시도는 그에 대한 불신으로 되돌아왔다.10 또한 선장 석방이라는 일본의 ‘굴욕적 패배’—『뉴욕타임즈』가 925일자로 보도했듯이—는 주변국가들에 일본이 센까꾸에 대한 주권을 소리높여 주장할 뿐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는 없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다.

그러나 충돌사건으로 고조된 내셔널리즘과 두려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잔 선장의 석방 이후 중일 양국에서는 시위가 잇따랐다. 타블로이드지 『석간후지(夕刊フジ)』는 101일 일본정부의 ‘저자세 외교’를 비난하고, “일본이 센까꾸제도에서 양보한다면 중국은 그 다음으로 오끼나와를 뺏으러 온다”(사꾸라이 요시櫻井よし子)라든지 “중국의 방식은 폭력단과 다를 바 없다. 일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한다면 티베트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시하라 신따로石原愼太郞 토오꾜오도 지사)이라는 우파논객들의 논평을 게재했다. 타모가미 토시오(田母神俊雄) 전 자위대 항공막료장은 현재 민간단체 ‘힘내라 일본! 전국행동위원회(頑張れ日本!全國行動委員會)’의 회장인데, 그도 오끼나와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면서 “중국은 오끼나와 본섬 지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도 방위를 강화할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일본 내 좌・우의 정치적 견해차마저 사라져, 언론 전체가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렇듯 폭넓게 형성된 미디어에서의 국민적 합의는 센까꾸제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한편, 일본의 영토에 대한 중국의 위협에 맞설 미일동맹의 중요성을 확신한다.

일본 자유주의 언론의 원로이자, 뻬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주필 후나바시 요오이찌(船橋洋一)는 일본이 외교적으로 서툴렀던 반면 중국은 ‘외교적 충격과 공포 작전’을 채택함으로써 이웃 사이인 중일 양대국의 관계를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처럼 황량하게 만들어버렸다고 논평했다.11 후나바시의 글은 언뜻 보면 자유주의적 지식인이 정중하게 중국의 이해를 구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중일관계를 ‘그라운드 제로’로 후퇴시킨 책임을 중국에만 묻는 그의 주장은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국제적 영향력의 확대를 경계하는 일본 내의 폭넓은 반중감정을 반영하고 있다.

주요 경제지 『니혼께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은, 중국이 ‘책임있는’ ‘문명대국’이 되도록 일본이 미국 및 유럽과 협력해 중국을 압박하자고 주장했다.12 일본공산당 위원장도 영토수호론에 가세하여 센까꾸제도는 일본의 영토이며 지켜야 한다고 선언하자 현 여당 민주당과 전 여당 자민당 모두 이를 환영했다. 다수의 신문, 잡지에 정치평론을 기고하고 있는 전 외무관료 사또오 마사루(佐藤優)는 아마추어 외교 때문에 일본의 ‘국익’이 훼손되었다고 탄식하며, ‘중국의 제국주의적 자세’에 대해 일본도 ‘제국주의적으로’ 응수해야 한다며 단호한 대응을 촉구했다.13

전 외무성 관료이자 우파임을 자처하는 사또오는, ‘진보적’ 지식인이나 매스컴에서도 인정받는 드문 존재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2010년 현재 사또오는 오끼나와의 신기지건설 반대운동에 참여한 본토측 지지자 중 단연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세까이(世界)』 『주간금요일(週間金曜日)』 및 『류우뀨우신보(琉球新報)』에도 매달 칼럼을 싣고 있다. 그러나 사또오의 신기지 반대 입장과, ‘제국주의적 중국에 일본도 제국주의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된다. 나의 글에서 밝혔듯, 그의 기본적 입장은 일본의 국익 확장이며 헤노꼬(邊野古) 신기지 건설 반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14 그는 미일간 군사협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오끼나와에만 기지를 강요하는 일본정부의 오끼나와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 일본이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중국에 결연히 맞선다면 오끼나와 주둔 미군 또는 자위대의 군비 강화, 특히 중국과 가장 근접한 오끼나와 서부의 섬들(미야꼬宮古, 요나구니與那國 등)의 무력 증강은 불가결해진다.

9월의 센까꾸 소동은 이 ‘국익’우선논리 앞에서 오끼나와 역시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었다. ‘중국 위협’ 인식이 확산될수록 오끼나와의 기지 반대운동은 확실히 약화될 것이다. 어선 충돌사건 직후 오끼나와의 진보적 인사들의 입지가 약화되었듯이, 센까꾸/오위는 방위와 안보 문제에서 오끼나와 주민이 일본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게끔 만드는 구심점이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오끼나와의 미군·자위대 증강배치와 대(對)중국 봉쇄 강화를 오끼나와 주민이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미국과 일본의 국방담당 관료들은 헤노꼬 신기지 건설계획을 폐기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2009년의 ‘하또야마(鳩山) 비전’에서 ‘우애의 바다’로 표현된 동중국해는, 2010년에 ‘긴장과 대립의 바다’로 전락해버렸다.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갖는 정당성과 합법성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제기되지 않고 전후(戰後) 최초로 반중감정이 대중으로까지 확산된 가운데, 일본 내에서는 국익우선주의의 파도가 좌・우파 간의 정치적 대립선마저 삼켜버렸다. 일본의 엘리뜨들은 중국의 입장을 이해할 능력도, 자국을 비판할 능력도 잃어버린 듯 보인다.

 

 

역사

 

이 섬들이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은 오늘날 일본 내에서 거의 보편적 확신에 가깝지만, 실상은 겉보기와 다른 점이 주목된다. 19세기 후반 영국 해군이 이 섬들에 관해 최초로 언급하기까지 센까꾸제도는 일본에서 그 존재조차 인정되지 않았다. 1895년까지 센까꾸는 일본의 영토라고 선언되지 않았고 1900년까지는 센까꾸라는 명칭도 없었으며, 그 명칭은 1950년까지 공식적으로 공표되지 않았다.15

역사적 기록은 현재의 법적 지위를 판정할 하나의 변수일 뿐이지만, 적어도 근세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14세기 이래 중국 문헌은 중국 해안(푸저우福州)과 류우뀨우 사이에 놓인 조공·무역항로상의 중요한 표지로서 이들 섬의 이름을 명기하고 있다. 또한 에도(江戶)시대의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林子平)1785년 작성한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에서 중국의 관례를 따라 센까꾸제도를 중국식 명칭으로 기록하고, 중국 영토로 표기했다.16

2010년에 와서 일본이 센까꾸 문제에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보이는 이면에는, 센까꾸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언젠가 오끼나와까지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일본이 센까꾸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것은 오끼나와를 류우뀨우왕국에서 떼어내어 자국 영토로 확립한 직후에 이루어졌는데, 류우뀨우왕국은 4세기 동안 중국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왕국 통치의 권리를 보장받은 책봉체제 안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미야꼬(宮古)의 어민이 대만에서 살해당하자 일본은 그에 ‘항의해’ 1874년 해군을 대만에 파병했고, 청은 일본 함대의 항해를 군사적으로 저지하지 않았다. 이 파병은 국제법상 청이 일본의 류우뀨우 영유권을 묵인한 증표라고 받아들여진바, 1879년 일본정부는 류우뀨우왕국을 멸망시켜 자국에 편입했다. 근대 일본이 발흥한 시기, 쇠퇴하고 있던 청은 열강에 둘러싸여 외침과 내란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1868년의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변모한 일본은 청의 위기에 편승해 열강의 반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고, 청으로부터 류우뀨우제도를 얻어냈다. 이어서 대만과 센까꾸제도를, 나아가 중국 뚱뻬이(東北) 지방에 손을 뻗어 최후에는 아시아 전역을 전면전으로 몰고갔다.

센까꾸제도 최대의 섬인 우오쯔리섬(魚釣島)에서는 1885년부터 나하(那覇)의 수산업자가 신천옹의 깃털과 바다거북의 등딱지 채집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다.17 이 업자는 정부에 정식으로 토지 임차를 청원했지만 10년이 넘도록 승인을 얻지 못했는데, 그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것이 확실해지자 18951월 내각회의에서 우오쯔리섬과 쿠바섬(久場島)을 오끼나와현 야에야마(八重山)제도에 편입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센까꾸제도가 무인도이며 다른 어떤 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지배한 적이 없다고 간주하여 무주지(無主地) 선점의 원칙에 의거해 센까꾸 영유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당시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하에 있었던 청은 이에 항의하거나 반박할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구나 일본이 센까꾸제도의 영유를 선언한 석달 후 시모노세끼(下關) 조약을 통해 대만을 손에 넣었음을 염두에 두면 말이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 쿄오또대학 교수가 “센까꾸/오위는 대만처럼 강화조약을 통해 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강탈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 승리에 편승해 어떠한 조약 및 교섭에도 의거하지 않고 청에서 훔쳐온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지 40년이 지났다.18 그러나 오늘날 일본 학자들은 일본이 어떠한 상황하에서 센까꾸 영유를 선언했는지는 묵살한 채 일본의 영유가 국제법에 부합한다고 보고 일본의 법과 역사에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 데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후 포츠담 선언에 따라 전시 중 획득한 영토는 모두 반환했지만, 센까꾸제도가 오끼나와의 일부이므로 전쟁에서 강탈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그러한 입장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전근대 시기 류우뀨우 36(琉球三十六島)라고 불린 섬들 중 센까꾸제도는 들어 있지 않았고 1879년에 오끼나와현이 설치되었을 때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오끼나와현 발족 16년 후에야 편입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1945년부터 센까꾸제도는 미군의 실효지배하에 놓였으나,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8UN 아시아극동 경제위원회(ECAFE, 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 조사단이 센까꾸제도 근해에 석유 및 가스의 매장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발표한 후였다. 이듬해인 1969년 미국은 오끼나와 반환에 동의했다. 미국은 센까꾸제도에 관해, 일본에게 이양하는 것은 ‘시정권’이지 ‘주권’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강조했다.

캐나다 워털루대학의 하라 키미에(原貴美惠) 교수는 미국이 ‘센까꾸 문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첫째는 미국이 주도한 쌘프란시스코의 전후처리 강화협정에서 일본과 인접국가들 간 영유권 분쟁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일본과 중국(90%가 공산주의) 간에서는 센까꾸/오위, 일본과 쏘비에뜨(100%가 공산주의) 간에서는 북방영토, 일본과 한반도(50%가 공산주의) 간에서는 독도/타께시마의 영유권에 관해 굳이 다루지 않고 애매하게 처리함에 따라 냉전시기에 이들 영토분쟁이 일본을 서방측에 확실히 묶어두는 쐐기로서, 또는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방벽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19 또한 1972년 미국이 오끼나와의 시정권을 일본에 반환했을 때, 미국의 냉전 정책입안자들은 센까꾸제도의 영유권을 애매하게 남겨둠으로써 센까꾸가 중국을 ‘봉쇄’할 쐐기못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오끼나와 인근에서 중일간에 영토 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방위를 위한 미군의 오끼나와 주둔은 더욱 정당화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20 2010년의 사건은 그들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오끼나와가 일본으로 반환되기 직전 중국과 대만은 센까꾸제도가 자국 영토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격렬하게 대립했다. 이 갈등은 1978년 떵 샤오핑(鄧小平)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이 문제는 일정 기간, 이를테면 10년 정도 보류해도 큰 지장이 없다. 우리 세대는 이 문제에 관해 공통점을 찾아낼 만큼 현명하지 않다. 다음 세대는 좀더 현명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21

몇번의 일탈에도 불구하고 이 ‘신사협정’은 20109월까지 지속되었지만 일본이 중국 어선의 선장을 체포하고 중국의 항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깨지고 말았다.

 

 

결과

 

2010년의 소동에서, 칸 정권은 서태평양과 동아시아에서 미일 합동군사작전에 한층 긴밀히 의존하는 것을 전제로 미국으로부터 센까꾸제도 ‘방위’의 약속을 얻어내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러한 가운데 칸 정권은 명백히 중국을 위협할 의도를 지닌 대규모 군사연습(지역전쟁게임)에 협력했다. 동아시아 공동체 결성을 위한 중일관계 강화를 모색한 하또야마 유끼오(鳩山由紀夫) 정권의 정책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칸 정권하에서 일본은 ‘종속국가’ 상태를 지속하겠다는 자세를 취했다.22

칸 정권이 기존의 ‘북한 위협’에 ‘중국 위협’을 더한 것은 안보문제를 부각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자민당 정권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던 것이다. 20101217일 일본 내각은 ‘신방위대강(新防衛大綱)’을 승인했는데, 이 ‘신방위대강’에서 일본은 종래의 ‘기본적 방위력’을 ‘동적(動的) 방위력’으로 전환하고 미국과의 기존 안보협력을 강화해 동중국해의 센까꾸와 가장 근접한 오끼나와의 이시가끼, 미야꼬, 요나구니 등의 섬에 주둔할 자위대 규모를 증강 배치하게 된다. 군사평론가 마에다 테쯔오(前田哲男)는 이 계획이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일본헌법 9조의 ‘평화’조항에 구속받지 않고 헌법 9조를 실질적으로 개정 내지 폐지할 것이며, 이는 민주당의 안보원칙과 모순된다고 보았다.23 그는 “‘기본적 방위력’에서 ‘동적 방위력’으로의 전환은 전수방위(專守防衛)의 실질적 폐기이며 ‘싸우는 자위대’로의 변모라 할 수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24

칸 정권은 9월 사건 이후 중국(및 북한)의 ‘저지’를 주목적으로 하는 미 해병대의 새로운 기지를 북부 오끼나와에 건설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20109월 이후 중국에 대한 반감과 공포의 소용돌이에 오끼나와도 휘말리면서, 일본정부가 기지 반대투쟁의 약화까지 기대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끼나와현 의회, 그리고 지리적으로 센까꾸와 가장 근접한 이시가끼섬과 미야꼬섬의 지방의회는 센까꾸제도가 이시가끼시에 속하는 일본 고유의 영토이며 일본정부는 ‘의연한’ 태도로 센까꾸제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또한 오끼나와의 저명한 ‘기지 반대’ 인사들이 일본정부의 공식 입장을 지지하며 더욱더 강경한 자세를 주문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분명 일본정부의 관료들을 기쁘게 했을 것이다.

단, 센까꾸/오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오끼나와와 본토의 의견이 일치했다고 해도, 그 속에는 상당한 차이 또한 존재한다. 첫째로, 1945년의 전투를 경험한 오끼나와 주민은 군대가 민간인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했다. 센까꾸를 지킨다 해도, 그곳이 군사화되고 중국과 일본이 적대하는 현장이 된다면 오끼나와의 안전은 증대되기는커녕 더 큰 위협에 처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하 요오이찌(伊波洋一, 2010년 오끼나와현 지사선거에서 현직 지사 나까이마 히로까즈仲井眞弘多에게 패함)가 지적했듯이, 오끼나와 주민은 중국과 오랜 우호관계를 유지한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본토의 공포나 걱정과는 대조적으로 ‘친근함’을 느낀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둘째로, 오끼나와에 있어 센까꾸는 국가 차원의 문제에 앞서 생활과 직결된 곳이다. 센까꾸제도 주변의 해역이 가스 및 석유가 매장된 광구(鑛區)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어장(漁場)으로서 소중한 터전인 것이다. 오끼나와코꾸사이대학(沖繩國際大學)의 사또오 마나부(佐藤學)는 “국경이 ‘개방되어 있다’고 할까, 오끼나와의 장래는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교류하는 장소라는 점에 있다. 어떻게든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오끼나와는 막다른 구석에 몰린다”고 경계를 표한다.

 

 

전망

 

무인도이기는 하지만 센까꾸/오위는 전략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장소다. 센까꾸제도는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며, 그 영유권은 주변의 수백평방킬로미터에 매장된 방대한 자원의 독점적 사용권과도 직결되어 있다. 영토나 자원 문제에서 무력행사까지 불사할 만큼 갈등을 심화시킬 제로썸(zero-sum)식 접근은 당사자 모두에게 크나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다.

일본 언론은 한결같이 중국을 ‘위협’ 또는 이해 불가능한 ‘타자’로 간주하는 반면, 일본이 센까꾸제도의 영유를 결정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과거 침략의 역사에서 비롯한 중국의 의구심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일본 언론은 일본의 센까꾸 ‘영유’를 당연한 전제로 삼고, 어선 선장이 고의로 순시선을 들이받았는지의 여부나 사고 동영상을 인터넷에 유포한 사람이 누구인지 등을 보도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일본이 떵 샤오핑의 ‘보류’ 협정을 깬 것이나, 일본의 영유권에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하면서 중국을 얕보고 상대하지 않았던 점에 대한 문제제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중국이 외교적인 ‘충격과 공포’로 중일관계를 악화시켰다는 점에 대한 비난에만 치중하고 있다.

또한 ‘중국 때리기’가 불러올 역풍의 가능성에 주목한 논의는 사실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이 오랫동안 부정하거나 불충분한 대처로 일관해온 전쟁책임 문제에 대한 중국의 불신, 일본에서의 난징대학살 부정론 및 우익의 역사서술 개찬 시도, 아시아 차원의 ‘종군위안부’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인 법적 책임 인정 거부, 그리고 일본 수상들(특히 2001~2006년의 코이즈미 준이찌로오小泉純一郞)의 야스꾸니신사(靖國神社) 참배 문제 등이 센까꾸 분쟁을 계기로 표면화될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일은, 반세기 이상에 걸쳐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이 전략적으로 애매하게 남겨둔 ‘봉쇄의 쐐기’를 뽑아내려는 동아시아 각국 정부 및 민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20111월,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이 “오위에 관한 주권문제에 개입할 위치가 아니”라는 입장을 재천명했다. 이 담화에서 일본식이 아닌 중국식 명칭을 사용한 것은 미국의 공식 발표상으로는 거의 최초인데, 이는 일본정부를 대단히 당혹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25

오끼나와에 있어 센까꾸/오위 사건은 일본 본토, 중국, 남북한과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다시금 반추해볼 좋은 기회다. 일찍이 독립 류우뀨우왕국으로서 인접 국가들을 잇는 가교로 활약하고 번영을 누렸던 오끼나와는 1609년과 1879년 두차례에 걸쳐 일본 본토에 강제로 병합되었다.26 결정적이었던 두번째 병합 후 오끼나와와 중국의 오랜 우호관계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오끼나와에 대해 근대사는 가혹했다. 국수주의와 군사주의의 파도가 몰아치는 오늘날 오끼나와가 그 물살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1458년에 주조되어 현재 오끼나와현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만국을 잇는 종’에 새겨진 대로 중국, 남한/북한, 일본 본토 모두와 인접한 오끼나와만의 독특함을 살려 동아시아의 가교 역할에 나선다는 이상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번역 | 정신연세대 사학과 석사과정 졸업

 

*이 글의 원제는 “Small Islands-Big Problem: Senkaku/Diaoyu and the Weight of History and Geography”로, 『아시아퍼시픽 저널』(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의 기고문을 한국독자를 위해 축약 가필한 것이다. 원문은 http://japanfocus.org/-Gavan-McCormack/3464에서 확인할 수 있다. Gavan McCormack 2011/한국어판 창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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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에서 쓰인 ‘센까꾸’라는 표현은 주권 또는 ‘적절한’ 명칭이란 함의가 없는 것임을 밝혀둔다.
  2. 1945년 이래 오끼나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미국은 1952년 4월 28일부로 발효된 쌘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3조에서 오끼나와에 대한 일본의 ‘잔존주권/잠재주권(residual sovereignty)’은 인정하되 오끼나와에 대한 실제적 통치권, 즉 “행정, 입법, 사법상의 권력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은 미국이 대서양 헌장에서 천명한 새로운 영토지배의 부정 원칙에 따라 오끼나와를 미국의 속령으로 편입하지 않고 명목상 일본의 영토로 남겨두되, 이후 오끼나와를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 제도적 장치였다—옮긴이.
  3.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Routledge 2007. 특히 7장 “The Ryukyus: Okinawa and the Senkaku/Diaoyu disputes”를 참조.
  4. 일본 외무성의 입장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he Basic View on the Sovereignty over the Senkaku Islands,” www.mofa.go.jp/region/asia-paci/senkaku/senkaku.html(검색일 2010.12.17).
  5. “US fudges Senkaku security pact status,” Japan Times, 2010.8.17.
  6. Peter Lee, “High Stakes Gamble as Japan, China and the U.S. Spar in the East and South China Seas,” The Asia-Pacific Journal, 2010.10.25, http://japanfocus.org/-Peter-Lee/3431.
  7. “Joint Press availability,” Department of State, 2010.10.27, http://www.state.gov/secretary/rm/2010/10/150110.htm.
  8. “Taking harder stance toward China, Obama lines up allies,” New York Times, 2010.10.25.
  9. 莫邦富 「日中衝突の余波を擴大させてはならない」, 『世界』 2010년 12월호, 116~23면.
  10. “Senkaku Islands dispute,” Wikipedia, http://en.wikipedia.org/wiki/Senkaku_Islands_dispute (검색일 2010.11.17).
  11. 船橋洋一 「中國の友へ」, 『朝日新聞』 2010.10.6.
  12. 「米歐と協調し中國を責任大國に導いて」, 『日本經濟新聞』 2010.10.1.
  13. 佐藤優 「中國帝國主義に對抗するには」, 『中央公論』 2011년 11월호, 70~81면. 이와 비슷한 논지로 사또오는 중국에 대해 일본이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것을 주장했는데(「本音コラム」, 『東京新聞』 2010.11.26), 여기서 그는 내각 법제국의 기존 평화헌법 해석을 수정해 일본이 미국과의 합동안보작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
  14. 사또오 마사루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Ideas, Identity and Ideology in Contemporary Japan: The Sato Masaru Phenomenon,” The Asia-Pacific Journal, 2010.11.1, http://japanfocus.org/-Gavan-McCormack/3435 참조.
  15. Unryu Suganuma, Sovereign rights and territorial space in Sino-Japanese Relations: Irredentism and the Diaoyu/Senkaku Islands,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0, 88~89면.
  16. Reproduced in Wikipedia, “The Senkaku islands dispute,” sic.
  17. 井上淸 『‘尖閣’列島: 釣魚諸島の史的解明』, 現代評論社 1972, 103면 이하.
  18. 井上淸, 앞의 책 123면.
  19. Kimie Hara, Cold War Frontiers in the Asia-Pacific, Taylor & Francis 2007, 188면.
  20. Kimie Hara, “The post-war Japanese peace treaties and China’s ocean frontier problems,” American Journal of Chinese Studies, vol.11, No.1 (2004.4) 1~24면.
  21. Beijing Review, 1978.11.3.
  22. ‘종속국가’론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졸저 Client State: Japan in the American Embrace, London and New York, 2007, Tokyo, Seoul and Beijing 2008(한국어판 『종속국가 일본』, 이기호·황정아 옮김, 창비 2008) 참조.
  23. 前田哲男 「民主黨政權は‘專守防衛’を葬るのか」, 『世界』 2010년 11월호, 113~20면.
  24. 前田哲男 「爭う自衛隊に變貌」, 『琉球新報』 2010.12.18.
  25. “U.S. neutral over ‘Diaoyu’ sovereignty,” Japan Times, 2011.1.22.
  26. 1609년 큐우슈우 서남부의 사쯔마번(薩摩藩, 현재의 카고시마현 서부지역을 지배한 번)이 약 3천명의 군대를 파견해 류우뀨우왕국을 침공했다. 이후 류우뀨우왕국은 형식상 중국과의 조공관계는 지속했으나 일본의 막번제 국가체제에 편입되어 사쯔마번의 내정간섭을 받아야 했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