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다시 동아시아를 말한다
연동하는 동아시아, 문제로서의 한반도
담론과 연대운동의 20년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 국학연구원장.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중국현대대학문화연구』 『思想東亞: 韓半島視覺的歷史與實踐』 등이 있음. baik2385@hanmail.net
1. 왜 지금도 동아시아인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자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인 2010년은 동아시아 시민사회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성찰하고 연대운동을 벌인 해였다. 그러나 그에 역행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 해이기도 했다. 3월 한반도 서해에서 발생한 천안함사건과 11월 연평도 포격사건 및 센까꾸열도(尖閣列島, 중국명 釣魚島땨오위따오) 주변에서의 중일 충돌사건의 여파로 동아시아 국가간 갈등이 고조되었다. 2011년에 갓 들어선 지금도 팽팽한 긴장이 여전히 동아시아를 휘감고 있다. 그나마 워싱턴에서 열린 1월 19일(현지시간) 미중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절충적 합의가 이뤄졌고, 그에 부응해 남북회담이 재개될 듯한 조짐이 보여 다행이다. 그러나 한·미·일에서 북한·중국 위협론이 엄존하고, 중국에서는 대륙이 미국에 포위당했다는 위기감이 미일동맹위협론을 부추기는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이런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신냉전론’이 세를 얻는 반면 ‘공동체론’은 힘을 잃는 듯하다. 이 지역을 주도하던 미국 패권이 쇠퇴하는 동시에 중국이 부상하는 세력 전이로 인해 지역질서가 불안정해지면서 갈등이 상존하고 있다. 이 구조적 현상은 한반도의 긴장이 한미일 동맹을 강화함과 동시에 북중관계를 긴밀하게 만듦으로써 더욱 격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관련국가들 간의 긴장을 이념과 가치관의 대립, 곧 ‘신냉전’으로 몰고가려는 사회세력들의 움직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물론 한국이나 일본도 (적어도 경제면에서라도) 중국과 상호의존을 더해가고 있는 구조적 조건에서 예전 같은 진영간 대립상태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우므로 ‘신냉전’이 도래할 근거는 약하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내에서 다양한 수준의 상호의존·협력이 깊고 넓게 진행되고 있음도 쉽게 확인된다. 일본의 동아시아공동체평의회는 2010년에 간행된 백서에서 2005년 이후 2010년까지 동아시아에서 지역통합이 착실히 진전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비록 정치적 구조, 곧 제도화의 진전도를 측정하는 기준에서는 미흡하지만, 무역·투자·금융·정치·안전보장·문화교류 등 기능분야별 및 이념·가치관 통합의 진전도를 기준으로 볼 때 주목할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1
필자가 나라 안팎에서 직접 경험한 바에 한정해도 동아시아 담론과 연대운동에서 활기찬 진전이 있었다.2 바야흐로 동아시아는 긴밀하게 연동하는 중이다. 문제는 ‘연동하는 동아시아’3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지 선택하는 일이다. 신냉전인가, 공동체인가?
바로 이 연동하는 동아시아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인간해방의 길을 찾으려는 것이 1990년대 초부터 필자(와 창비)가 주창해온 동아시아 담론이다. 그렇다면 바로 오늘의 국면에서야말로 이 담론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 아닐까.
돌아보면 한국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출현한 1990년대 초부터 근 20년이 되어가는4 지금, 그것은 “지난 20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영역의 가장 현실적인 쟁점들과 결부되며 파급력을 발휘해”왔기에 “풍년처럼 보이지만 실은 버블인지도 모른다”는 진단도 있다.5 그 진단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는 따로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한국의 동아시아론을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평가받는 ‘창비그룹’의 일원인 필자로서는 보람보다도 책임감을 느낀다. 그러니 그 성과가 다양한 담론의 갈래—그중 ‘거품’도 더러 있을 법하다— 속에서6 어떤 차별성 내지 의의가 있는지, 또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의 동아시아론은 정세론과 문명론(또는 사상과제)을 아우르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지역의 시대상황에 밀착하여 그날그날의 현실에 충실하되 긴 안목의 시야를 견지하려 노력해온 창비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논의는 기존의 동아시아론이 인문학과 사회과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틀에 따라 심각하게 분화된 한계를 넘어서 탈분과학문적 연구와 글쓰기를 현장의 실천경험과 결합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그 시도를 요즈음 ‘사회인문학’의 길로 구상하고 실천하는 중이다.7
이런 자세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장기 과제와 중·단기 과제를 동시에 사고하면서 그것을 일관된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것은 한국 동아시아론의 지적 계보에 뿌리내린 것임에 주의를 환기하고 싶다.
2. 동아시아론의 지적 계보와 새로운 상황
1990년대초 우리 지식인사회에서 동아시아가 ‘발견’되고 동아시아 담론이 대두한 중요한 배경은 흔히 지적되듯 그즈음의 사회주의권 몰락과 냉전의 종언이다. 특히 냉전기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접속은 동아시아를 상상할 수 있게 한 핵심적 추동력이었다. 냉전기 분단체제 아래서 한반도의 남반부에 제한되었던 ‘반국(半國)적’인 지리적 상상력이 1992년 중국과의 수교를 전후해 동아시아로 확장해갔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발전과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진전에 힘입어 종래의 민족민주운동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이 또한 동아시아로 열린 상상력을 촉진한 내재적 요인이었다.
필자는 이에 덧붙여 한국사상사의 계보 속의 내재적 연속성을 중시한다. 다만 한국인의 동아시아 인식의 체계적인 계보학을 만드는 것이 이 글의 목표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필자 등의 동아시아론에 직접 이어지는 두가지 싹만을 강조하겠다.
먼저 거론할 것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조선 지식인들이 서구열강의 침략에 맞서 ‘동양 3국의 연대’를 추구하면서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를 하나의 단위로 사고한 움직임이다. 그들은 중화질서의 틀이 해체된 청일전쟁 이후 국가와 민족의 존망을 좌우할 새로운 지역질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했다. 쇠퇴일로에 있던 중국을 천하의 중심이 아닌 동아시아라는 지역을 구성하는 하나의 국가로 상대화하면서 새로 부상한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한 동아시아연대론이 대두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규명한 다른 글이 있으므로,8 여기서는 당시의 동아시아론에 정세론과 문명론(또는 사상과제)을 아우른 특징이 있었음을 새로이 강조하려고 한다. 당시의 동아시아 담론은 동양〔지역〕의 평화와 조선〔국가〕의 독립을 상호연동된 것으로 인식했고 그 정당성을 문명—보편문명으로 끌어올려진 유교든 서양문명이든—에서 구했다.9 예를 들어 안중근(安重根)은 러일전쟁 직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국제정치현실을 분석한 뒤,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현실감각을 갖고 세력균형론을 구상하며 유교의 신의(信義)에 기반하여 ‘동양평화론’을 체계화했다. 또한 중국에 망명한 신채호(申采浩)는 대륙세력 중국과 해양세력 일본의 대외진출이 교차하는 중간지점인 한반도에서 양자를 막는 것이 “유사 이래 조선인의 천직(天職)”임을 주목하고 ‘조선의 독립’을 돕는 것이 ‘동양평화의 요의(要義)’라고 3·1운동 직후 역설했다.10 이렇듯 선인의 인식구조는 단기적 정세분석과 중・장기적 담론을 결합하여 동아시아를 사유한 1990년대 이래의 필자 등의 동아시아 담론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다음으로 1970년대말부터 80년대 전반기에 활발했던 제3세계론도 빼놓을 수 없다. 제3세계론의 내용을 채우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론이 대두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시 주창했던 민중적 민족주의는 서구중심주의를 성찰하고 민족과 민중의 생활에 기반한 저항논리 및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이념이었으며, 제3세계에 대한 관심과 연대의식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1990년대의 변화된 상황에서 민족민주운동을 성찰할 때, 민족주의(의 폐쇄성)를 극복하는 한편 우리에게 가까운 지역과 문명에서부터 제3세계적 문제의식을 관철하기 위해 동아시아를 중시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최원식(崔元植)은 ‘제3세계론의 동아시아적 양식의 창출’로 1980년대초 표현한 바 있다.11 이로써 알 수 있듯이, 1970년대 이래의 민족문학론이 제3세계론과 결합하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론을 싹틔우게 된 하나의 고리는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이다. 말하자면 제3세계론은 “민족문학론 안에 내장된 민족주의라는 인화물질을 적절히 제어할 일종의 지렛대”로 작용했다.12 같은 무렵 김종철(金鍾哲) 역시 제3세계론이 “민족주의가 뜻하는바 역사적 의의와 한계를 아울러 의식하는” 관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13 민족주의 내지 국민국가의 제어라는 관점은 여전히 동아시아 담론을 구성하는 핵심이 된다.
그런데 당시의 제3세계론이 동아시아론으로 발전하는 과정에는 (우리가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는) 또하나의 고리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제기된 제3세계론이 지역 개념이라기보다 민중의 입장에서 지구적 현실을 보는 관점이라는 백낙청(白樂晴)의 문제의식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예컨대 한국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스스로가 제3세계의 일원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당면한 문제들이 바로 전세계 전인류의 문제라는 말로서 중요성을 띠는 것이다. 곧, 세계를 셋으로 갈라놓는 말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로 묶어서 보는 데 그 참뜻이 있는 것이다.”14 이 시각은 우리의 동아시아 담론이 폐쇄적인 지역주의가 아니라 비판적 지역주의로서 세계사의 변혁을 지향하게 만든 효모였다 하겠는데, 앞으로 더 숙성시켜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한국의 사상적 계보15에 단단히 연결된 우리의 동아시아론이 한국 안팎의 정세를 배경으로 1990년대에 대두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둘러보면 그때에 비해 얼마간의 정세 변화를 느끼게 된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G2’니 ‘차이메리카’(Chimerica)로 불리는 중국의 대국굴기(大國崛起)다. 이는 20년 전 중국과 접속하면서 동아시아를 ‘발견’하던 때와 비교하면 대단한 변화로서, 동아시아론이 정면으로 감당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100년 전 중국의 몰락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불안정해졌다면 이번에는 중국의 초강대국화가 구조적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 그렇다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의존하려는 것은 단견이니 동아시아 협력의 틀 속에서 상대해야 한다. 동아시아론을 더 가다듬어야 할 이유가 절박하다.
이것이 당위론에 그치지 않으려면 한반도 나름의 역할이 중요하다. 남북이 스스로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풀어갈 능력을 갖추어 중국이나 미국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양자를 적절히 활용할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2000년 6·15선언에 합의한 남북정상회담 이래 ‘흔들리는 분단체제’가 ‘해체기’로 접어들면서16 우리는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비록 지금 한반도의 긴장이 한껏 고조된 상황이지만 그런 가운데도 그간의 남북화해의 성과는 일상생활에서 실감할 정도로 역력하다. 이 불가역적인 변화도 동아시아론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그밖에 지금까지 한국 안팎에서 이뤄진 동아시아 연대운동의 발전 및 담론의 확산과 심화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것은 앞으로 동아시아론이 진전하는 데 소중한 자양분이자 자극제가 된다.
3. 동아시아의 범위와 동아시아공동체라는 문제
이제부터는 필자의 동아시아론을 구성하는 핵심 논점들을 점검하면서 성찰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그것은 동아시아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부닥치는 (때로는 비판 형식의) 질문들이기도 하다.
첫째는 동아시아라는 지역 명칭과 그 범위의 문제다. 아시아, 아태(亞太, Asia-Pacific), 동양, 동방 등 관련된 지명의 역사적 변천을 검토해보면 바로 드러나듯이, 동아시아란 지리적으로 고정된 경계나 구조를 가진 실체가 아니라, 이 지역을 구성하는 주체의 행위에 따라 유동하는 역사적 구성물이다. 달리 말하면 지역을 호명하는 주체가 수행하는 과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실천과제(또는 프로젝트)로서의 동아시아’인 것이다.17 이 점을 전제해야 동아시아 개념의 모호성 논란이 잦아드는 대신 담론이 예리해지고 연대운동의 대상이 선명해진다.
필자는 ‘동아시아’란 개념을 동북아와 동남아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동적인 것이기에 일찍부터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라는 용어를 키워드로 삼아왔다. 동아시아를 동북아와 동남아를 포괄한 넓은 의미로 쓸 경우 유교문화권 내지 한자문화권으로서의 동질성이 다소 약화될지는 모르나, 경제적·문화적 상호의존성이 증대되는 이 지역의 현실과 역사—중화질서, 대동아공영권 등 동아시아 질서의 역사—가 교차하는 실상을 잘 담아낼 수 있다는 잇점이 있다. 더욱이 동남아를 끌어안음으로써 ‘동북아중심주의’라는 혐의를 벗는 데 도움이 될뿐더러, ‘아세안 방식’(ASEAN way)을 통해 아세안+3 협력체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동남아와 한국의 전략적 연대가 가능해질 것으로18 기대된다.
바로 이 점은 필자의 ‘이중적 주변의 시각’과 연결된다. 그것은 서구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19 탈식민·탈냉전·탈패권의 삼위일체20 과제를 이론적·실천적으로 감당하는 자주적 공간 확보를 위해 제기한 이 시각을 통해 미국(과 그 하위 파트너인 일본)의 패권과 (과거 전통시대에도 그러했듯이) 21세기에 예상되는 동아시아에서의 중국 패권을 동시에 비판할 발판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주변’적 존재란 단순히 주변적 국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주변적 존재로 무시되어온 국가의 틈새에 위치한 무수한 ‘국가 형태를 지니지 않은’ 사회, 그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디아스포라적 존재”21를 포괄하므로 국가 단위의 발상에서 자유로운 사고의 탄력을 얻을 수 있다.
그다음은 동아시아공동체라는 문제다. 필자는 동아시아공동체라기보다는 일국 단위를 넘어 연동하는 동아시아를 하나의 사유 단위로 삼는 ‘동아시아적 시각’을 줄곧 강조해왔다. 그런데 동아시아적 시각을 강조하는 목적이 화해와 평화의 동아시아 미래를 선취하는 실천에 있다 보니 종종 ‘동아시아공동체론자’로 지목되곤 했다. 그래서 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누가 필자에게 동아시아공동체를 추구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예, 아니오’ 둘 다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또는 정책적 차원의 동아시아공동체를 주목한다. 그들은 국가나 자본이 주도하고 정치·경제·문화 영역에서 날로 긴밀하게 상호의존성을 높여가는 지역적 현실(곧 지역화)과 그에 기반한 지역협력체의 제도화(곧 지역주의)에 주로 관심을 기울인다. 이에 비해 인문학자들은 개인들의 자발적 결합체인 공동체 또는 비제도적 네트워크의 구축을 더 중시한다. 앞에서 ‘사회인문학’적 태도를 강조한 데서 드러나듯이 필자는 이런 분기(分岐)현상을 지양한 통합적 시각을 견지하려고 노력한다.22 그래야만 지역화의 구체적 현실과 지역주의 구상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그것이 인간다움을 좀더 충실히 구현하는 지역적 공생사회, 곧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공동체로 향하고 있는지를 (제도와 가치를 통합한 시각에서) 날카롭게 점검하는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제도적 동아시아공동체라기보다 진정한 공동체로 다가가는 과정으로서의 동아시아공동체를 추구한다. 예와 아니오 둘 다라고 대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지역화와 지역주의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간극에서 시민사회가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에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사실상의 지역통합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제도화를 동반하는 공식적인 통합(community), 나아가 연합(union)이 동아시아에서 쉽게 기대되지 않는 데는, 국가간 이익충돌 같은 일반적인 이유 말고도 이 지역의 특수한 사정 곧 중국이 상대적으로 너무 크다는 이유가 작용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렇기 때문에 국가간 협력보다도 민중·시민 중심의 협력이 더 중요해진다. 말하자면 시민참여형 동아시아공동체의 특성이 여느 지역보다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참여형이든 국가주도형이든 동아시아공동체로 가는 길은, 동아시아를 구성하는 국가들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지역통합과정과 개별국가 안에서 구성원 개개인의 참여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의 내부개혁과정이 쌍방향적으로 추동되어야 한다.23 그래야만 동아시아인의 일상생활에서 실감하는 동아시아공동체, 즉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대대로 삶의 수준을 높여주는 진정한 공동체가 나날이 형성중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4. 동아시아론과 분단체제가 만나는 세 층위
이제 이 쌍방향성이 한반도의 현실에서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따져볼 차례다. 한반도를 중시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의 생활터전이어서라기보다, 분단된 한반도가 세계 차원의 패권적 지배체제의 중요한 거점인만큼 이곳에서의 변혁이 세계적 차원의 억압체제에 대한 공격이자 자본주의 세계체제 변혁의 촉매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하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24 그런데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불충분했던 탓인지 종종 ‘한국/한반도 중심주의’의 혐의를 받곤 한다. 이는 뒤에 다시 논하겠는데, 여기서는 우선 한반도라는 장소성, 곧 ‘현장’의 의미에 대해 언급해두고 싶다. 현장이란 와까바야시 치요(若林千代)가 말하듯이 “각각 개별이면서 깊이 서로 연결되어 유동하는 사회나 역사 속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과 밀접한 사회에 있는 실마리를 통해 어떻게 세계의식을 찾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변용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장소다.25 문제는 한반도라는 현장—본 특집에 실린 글에서 쑨 꺼(孫歌)가 표현하기로는 ‘핵심현장’26—에서 구체성에 근거하면서 과연 그로부터 사상적 과제를 끌어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을 ‘창비담론’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바꾸면, “지구적 규모의 장기적인 시간대에 걸친 논의와 중소 규모의 지역, 중·단기의 과제를 동시에 사고하면서 일관된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을 제대로 해왔는지가 될 것이다.27 더욱이 그 작업을 이 글의 주제에 맞게 초점을 맞춘다면 동아시아론과 분단체제론의 상호작용에 대한 규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양자는 류준필(柳浚弼)이 비판하듯이 창비 동아시아론 안에서 ‘외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데 불과한가.28 이제까지 필자의 입장이 불충분하기에 그런 지적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동아시아론이 분단체제론과 결합하여 실천현장에 뿌리내리는 동시에 (세계를 하나로 파악하는) 제3세계적 시각을 효모로 삼아 전지구적 대안을 숙성시키는 데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음은 분명히 밝혀야겠다.
그렇다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공간에서 동아시아론과 분단체제론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단기·중기·장기의 세 층위를 통해 점검해보자.
먼저, 구체적인 정세 분석에 기초해 남한의 단기적 개혁과제를 수행하는 실천이 동아시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그 연관을 절감한 개인적인 체험담을 하나 소개하겠다. 나는 작년 5월 28일, 미・일 두 정부가 오끼나와의 후뗀마(普天間) 미군기지를 오끼나와현 내로 이전하겠다고 공동발표한 데 항의하는 오끼나와 주민 4천여명의 집회와 시가행진의 현장에 있었다. 그때 하또야마(鳩山) 총리가 현외 이전이라는 종래의 공약을 번복하면서 내건 명분이 미군기지가 ‘억지력’ 유지에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억지력의 대상이 북한이고 중국이다. 천안함사건이 발생하자 후뗀마기지 문제로 곤경에 처했던 그는 곧바로 북한 위협론을 내세우며 기지를 오끼나와 현내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는 핑계를 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 한국인이 2000년 남북정상 간에 합의된 6·15선언의 기조에 따라 남북화해를 심화시켰더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오끼나와인의 고통 해결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쓰라리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그들에게 전하자, 그것은 곧 ‘침통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29 그리고 그로부터 반년 후인 지난 11월말 연평도 포격으로 긴장하던 즈음 대만의 진먼따오(金門島)에서 열린 제3차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30에서 오끼나와의 케시까지(ケーシ風) 편집장 오까모또 유끼꼬(岡本由希子)는 한반도의 긴장해소를 위해 오끼나와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어왔다. 동아시아가 서로 연동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그러니 우리는 평화의 동아시아를 위해서도 남북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에 부응하는 화해협력과 재통합의 과정을 계속하면서 그 위험요인들을 관리할 최소한의 장치를 갖추도록 한층더 힘써야 한다. 그것은 남북한이 통일로 가는 ‘중간단계’이자 이 과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장치로서의 국가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이것은 2000년 남북정상이 합의한 6·15선언 제2항에 제시된 것이다—의 조속한 실현이다. 그 틀 안에 북한을 불러들여 체제안전을 보장해주면서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정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에 북쪽을 참여시켜 변혁을 이끌어내는 것만이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 아닐 수 없다.
이 방안이 바로 중기 과제인 복합국가론31과 닿아 있다. 사실 국가간의 결합체인 복합국가 자체는 이미 역사상 연방제와 국가연합 등의 형태로 여러번 등장한 사례가 있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실험중인 복합국가는 독특하게도 국가간의 결합이자 국민국가의 자기전환이라는 한가지 양상을 겸한다. 이것이야말로 6·15선언 이후의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가시화된 셈이다. 그 목표는 남북 어느 한쪽에 의한 흡수통일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실용적이고 창의력있는 실천을 통해 이룩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정치공동체이다. 그것은 ‘붕괴의 위기’에 처한 북한을 ‘흡수하는 통일’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의 견해와는 물론 다르다. 또한 통일이 남한 자본의 헤게모니 구축과 전세계적인 자본주의 포섭과정의 일환이 될까봐 경계하는 일부 좌파나, 민족동질성이라는 당위를 전제한 통일이 개인의 다양성이나 다중적 정체성을 억압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탈민족주의자의 입장과도 거리가 있다. 정태적인 남북 평화공존을 추구한 나머지 한반도의 엄중한 위기에 대한 현실적인 답을 내지 못하는 양자의 입장과는 확연히 구별된다.32 그런데 그것이 어떤 국가형태를 갖출지는 미리 설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목표는 일회적 사건으로 이룩되는 분단극복이 아니라 우리 생활세계에 뿌리내린 분단체제의 극복, 즉 그 적폐를 제거하는 갖가지 개혁작업을 통해 한반도에서 사람다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기 때문이다.
그 건설과정에서 구상되고 실천되는 복합국가를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다시 보려고 할 때, 다원사회인 대만의 닝 잉삔(寗應斌)이 ‘복합국가’ 개념을 변용해 내놓은 ‘복합사회’도 숙고할 만하다. 사회의 각종 분단현실을 극복하는 것을 뜻하는 복합사회는 동시에 국가횡단적(trans-national)이기도 한데, 이를 통해 복합국가를 재구성하겠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특히 주변적 소수자들—그는 동성애자의 사례를 든다—을 통한 국민국가의 해체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 단위의 해결을 불신하는 색채가 짙은 그의 주장은 사실 (앞서 말한) ‘이중적 주변의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33 이와 관련해 재일학자 서경식(徐京植)이 말한바 ‘반(半) 국민 또는 반 난민’인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반 난민상태 그대로인 채 보장함으로써 그들이 “동아시아에서 영역을 횡단하는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을 형성할 단서”를 얻게 하라는 주장이 눈에 들어온다.34 단일한 국민국가로의 통일이 아닌 복합국가라면 아이덴티티의 다수성과 유연성을 끌어안는 지향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해 이주노동자·탈북자 등 국가횡단적 경험이 있는 주체들과 중층적으로 연대하여 “기존국가 해체전략이자 한결 개방적이며 주민친화적인 국가기구의 창안작업을 포함하는 분단체제 극복과정”35에 참여하는 것이 곧 복합국가 건설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이 한편으로는 국민국가에 ‘포섭’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36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 지역에서 중요한 ‘국민국가의 존재를 간과한’ 것으로 비판받는다.37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복합국가는 국민국가에의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탈국가화가 아니라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단기적인 국가개혁’38 작업을 통해 복합국가에 도달하는 것이니 그만큼 현실적인 방안이다.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을 통해 남북이 재통합하는 과정에서 국가연합 형태의 복합국가가 될 터이나, 동아시아의 다른 곳에서는 제각기 국민국가의 형성경로에 대응해 ‘이중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복합국가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니 복합국가론(과 결합된 동아시아론)을 ‘한국/한반도 중심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오해가 아닐 수 없다.39
그 오해는, 한국에서 발신한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 담론의 결합이 이미 동아시아에서 하나의 참조체계가 되고 있다는 사실로도 어느정도 불식될 수 있을 것이다.40 대만의 천 꽝싱(陳光興)은 한반도의 남북이 대칭관계인 것과 달리 중국과 대만은 비대칭적 분단상황인 조건의 차이를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양안문제를 새롭게 보는 사고의 틀로 분단체제론을 적극 활용한다. 그는 분단체제 극복이 단순한 통일이 아닌, 새로운 비전을 갖춘 것임을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즉 “분단체제를 극복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자유·민주·시장·사회주의 등의 상상을 넘어서고 분단사회 간의 차이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새로운 형식과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41
또한, 한반도에서 형성되는 국가연합이 동아시아 공동체에 필수적이나 그것은 “동아시아 고유의 지역연대 형성을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을 제공”(강조는 인용자)하는 것일 뿐임을 새삼 강조한 백낙청의 발언도 한국중심주의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주목된다. 복합국가가 동아시아 평화에 선순환적 파급을 가져올 것임을 간명하게 지적한 그의 문장을 인용해보자.
남북한이 느슨하고 개방적인 복합국가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 곧 ‘동아시아연합’으로 이어지거나 중국 또는 일본의 연방국가화를 유도할 공산은 작더라도, 예컨대 티베트나 신장 또는 오끼나와가 훨씬 충실한 자치권을 갖는 지역으로 진화하는 해법을 촉발할 수 있다. 또한 중국 본토와 대만도 명목상 홍콩식 ‘1국2제’를 채택하면서 내용은 남북연합에 근접한 타결책을 찾아내는 데 일조할지도 모른다.42
실제로 이에 호응하여 사까모또 요시까즈(坂本義和)처럼 북한을 빼고 동아시아공동체를 논하는 것이 비현실적임을 단호히 밝히며 남북연합이 동아시아공동체를 위한 ‘패러다임 전환의 중핵의 하나’라고 의미부여하는 사례도 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국가연합의 동아시아적, 더 나아가 세계사적 의미가 아직은 이 지역 지식인사회에서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작년의 천안함사건에서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이어지는 한반도발(發) 긴장은 오히려 ‘연동하는 동아시아’를 절감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니, 그 의미를 한층 적극적으로 규명해야 할 책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이 만남으로써 이것이 장기적으로 전지구적 대안을 모색하는 과제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따져보는 일이 그것을 규명하는 한가지 방편은 된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는 데 한국전쟁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기여했는지, 또 그후로 남북의 분단체제가 세계체제 유지 및 미국의 강경세력이나 군산복합체의 자기재생산에 얼마나 중요한 몫을 하는지를 생각하면, 문제로서의 한반도가 갖는 세계사적 위치가 한눈에 이해될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가 세계 차원의 패권적 지배체제의 ‘핵심현장’인만큼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 패권주의에 균열을 일으키고 미국적 표준을 넘어설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이탈할 수는 없지만) 세계체제를 장기적으로 변혁시키는 촉매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복합국가 건설이라는 ‘하나의 필요조건’을 충족하며 형성될 ‘동아시아 고유의 지역연대’가 지구적 규모의 장기적인 시간대의 현단계인 신자유주의시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검토하는 일이 남았다. 이 물음과 관련하여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유재건(柳在建)의 관점을 원용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유럽·동아시아라는 독자적인 동력을 지니는 세가지의 지정학적 분열을 통해 통합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동아시아가 아직 유동적인 상태에 있으나 ‘모종의 대안적 공동체를 제대로 형성할 때 갖게 될 세계체제 변화의 잠재력은 상상 외로 크다’”는 것이다.44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논구되어야 할 터이나, 여기서 한가지 설명만 덧붙이자면 동아시아가 부상하고 “역동적인 지역주의가 싹터 전지구적인 권력 재구조화”라는 전례 없는 역사단계의 한복판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는 시대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45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장기적 전망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문명론적 차원의 비전을 품어야 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문명적 자산은 당연히 활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발굴된 것은 소국주의(小國主義) 정도가 아닌가 싶다.
필자는 복합국가론이 ‘소국주의와 친화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소국주의 유산이 한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출현했다가 굴절되고 만 역사적 경과를 분석한 바 있다.46 최원식은 이 구상을 “소국주의의 고갱이를 중형국가론에 접목하는 작업”으로 연결시키면서, 소국주의를 통해 “우리 안의 대국주의를 냉철히 의식하면서 그를 제어할 실천적 사유의 틀들을 점검”하자고 제안했다.47 그것은 백낙청이 말한 바 ‘생명지속적 발전’(life-sustaining development), 즉 “어디까지나 생명을 유지하고 북돋는 일을 기본으로 삼고 여기에 합당한 발전의 가능성을 찾자는”48 대안적 문명관, 달리 말하면 좀더 추상도가 높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와 닿아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문명관은 앞으로 더 정교하게 다듬고 풍성히 키워가야 할 텐데, 이때 동아시아의 문명적 유산뿐 아니라 현실의 경험 속에서도 자원을 더 과감하고 창조적으로 찾아내 그 출처에 관계없이 공동의 자산으로 활용하는 일이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런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일본과 중국에서도 장기 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눈길을 끈다. 일본의 대전략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강상중(姜尙中)은, 미일동맹에 의존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미중일 3극구조의 한자리, 곧 대국적 지위를 차지하려는가, 아니면 ‘대국의식’을 버리고 ‘비패권적 중위국가’로서 이웃과 다극적 분산형 안전보장체제와 번영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선도역할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과 연동해서 어떤 국내질서를 짤 것인가를 묻는다.49 또한 중국에서는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기초로 삼기 위해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경험을 보편적 가치로 끌어올리려는 이른바 ‘뻬이징 컨쎈서스’로 일컬어지는 중국모델을 탐색중이다. 그것은 유가나 도가 등의 전통사상에 토대를 두고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도전이자 대안 모색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 지금 칸 나오또(菅直人) 내각은 정권교체 초기 강조하던 동아시아로부터 선회하여 (강상중이 선호한 노선이 아니라) 대국의 길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의 경우, 중국모델이 아직은 국가주도 개혁에서 추진력을 얻는 형편이고 논쟁의 와중에 있다. 그것이 과연 대안모델로서 동아시아의 공동자산이 될 수 있을지는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실사구시적으로 탐구해볼 일이다.
여기서 이를 더 논의할 여유는 없으나, 관건은 이같은 장기목표를 현실 속에서 추구해갈 중・단기 전략을 갖추는가이다. 특히 장기와 단기 과제를 연결시키는 복합국가라는 매개항을 누락시킬 때 불가피하게 추상화하고 관념화하는 오류에 빠지게 됨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5. 복합국가라는 매개항과 현장의 네트워크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을 통해 남북의 국가연합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복합국가가, 동아시아의 다른 곳에서는 “기존국가 해체전략이자 한결 개방적이며 주민친화적인 국가기구의 창안작업”을 통해 각기 다른 형태로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인은 각각의 국민국가 형성의 특성에 대응해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국가개혁작업의 단기 과제를 수행하는 현장 곳곳에서 중기 과제를 수행할 동력을 얻는다.
여기서 두 현장을 소개하고 싶다. 둘 다 국경이란 선(線)을 둘러싼 대립을 면(面)의 공동이용을 통해 국경·영토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발상 전환이 태동하는 곳이다.
하나는 한반도 서해의 평화협력특별지대다. 잘 알려져 있듯이, 현안인 북방한계선(NLL)은 1953년 8월 30일 유엔이 해군력에서 우세한 남한의 북진을 막기 위해 일방적으로 설정한 것으로, 1970년대 들어 북한이 인정하지 않았으나 남한이 실효적 지배를 근거로 사실상 경계를 삼음으로써 해상에 국경선 아닌 국경선으로 그어진 것이다. 그런데 2007년 10월 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 발표됐다. 남북 공동으로 추진하는 서해 협력사업을 통해 북방한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시도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재 이명박정부의 대북강경정책으로 더이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오끼나와와 대만의 일부 도시가 합의한 관광경제권이다. 2009년 4월 15일 대만 동부 세 도시(화롄花蓮·이란宜蘭·타이뚱台東)와 오끼나와의 주변 섬(야에야마제도八重山諸島의 이시가끼시石垣市·타께또미정竹富町·요나구니정與那國町)의 행정책임자들은 ‘관광경제권 국경교류추진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아직은 출입국관리 문제 탓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만 느슨해지면 비국가 도시공동체가 형성될 터이다.
바로 이 점에서 두 사례는 국가개혁작업과 결합된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실현을 위해 분단체제 극복운동이 요구됨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의 진먼 회의에서 오끼나와의 원로지식인 아라사끼 모리떼루(新崎盛輝)가 전망했듯이, ‘관광경제권’이라는 구체적인 과제의 원활한 수행은 ‘핵심현장’인 오끼나와의 자치권 강화를 통해 일본국가 개조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그 배후에 있는 미일동맹에도 파장이 미칠 가능성이 크다. (당장은 오끼나와와 그 주변 섬들을 군사기지로 만들어 중국을 견제하려는 새로운 방위대강을 지난해 12월에 발표한 민주당정부와 대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 이 두 지역의 사례에 그치겠는가. 남북한의 고조된 긴장 속에서도 조업중인 개성공단, 동북아 여러 나라가 참여하게 될 창·지·투(창춘長春·지린吉林·투먼土門) 개발을 비롯한 두만강유역개발 프로젝트, 양안교류의 거점인 진먼의 ‘소삼통(小三通, 통신·통상·통항)’ 등의 사례도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층위는 서로 다르지만, 이런 작업들이 크든 적든 동아시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산되면서 국경횡단적으로 연결된다면 새로운 지역공동체의 기반은 탄탄해진다.
물론 저마다 국민국가 형성 경로가 다르므로 동아시아의 담론이든 연대운동이든 그것이 균일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각기의 현장에서 고투하는 주체들이 겪는 ‘곤혹’이나 ‘자기와의 싸움’50 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자각51까지 공감하며 자기를 성찰해야 진정한 연대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동아시아공동체의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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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アジア共同體評議會編 『東アジア共同體白書 2010』, たちばな出版 2010, 161~63면.↩
- 담론에 대해서는 이후 언급될 ‘지난 20년의 풍년’이란 관찰과 2000년대 들어와 동아시아 인식이 희귀했던 중국에서조차 인식이 확산되는 추세가, 연대운동에 대해서는 『2006 동아시아 연대운동단체 백서』(서남포럼 엮음, 아르케 2006)가 그 근거라 하겠다.↩
- 필자가 말하는 ‘연동’은 일단 야마무로 신이찌(山室信一)가 말한 ‘연쇄’와 구별하기 위해 택한 단어다. 재일학자 조경달의 비판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사상의 연쇄는 ‘일본이 주체이고 아시아는 객체’다(久留島浩・趙景達編 『アジアの國民國家構想』, 靑木書店 2008, 2~3면). 이와 달리 연동은 서로 깊이 연관된 동아시아가 다방향으로 상호작용하는 공간을 서술하는 동시에 주체적인 연대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다.↩
- 한국의 동아시아 담론의 계보를 논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창작과비평』 1993년 봄호 특집 ‘세계 속의 동아시아, 새로운 연대의 모색’을 기점으로 삼는다.↩
- 윤여일 「동아시아란 물음」, 『황해문화』 2010년 겨울호, 306면.↩
- 우리 논단에서의 다양한 분류는, 예를 들어 임우경 「비판적 지역주의로서의 한국 동아시아론의 전개」(『중국현대문학』 40호, 2007), 박승우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담론과 오리엔탈리즘」( 『동아연구』 54호, 2008) 등이 있다.↩
- 사회인문학에 대해서는 졸고 「사회인문학의 지평을 열며: 그 출발점인 ‘공공성의 역사학’」, 『동방학지』 149집(2010.3) 참조.↩
- 졸저 『동아시아의 귀환』, 창작과비평사 2000, 146~98면.↩
- 앙드레 슈미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 정여울 옮김, 휴머니스트 2007, 234~35면.↩
- 최원식・백영서 엮음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창비 2010, 196~214면.↩
- 최원식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 『민족문학의 논리』, 창작과비평사 1988, 368면.↩
- 최원식 「천하삼분지계로서의 동아시아론」,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창비 2010, 64면.↩
- 김종철 「제3세계의 문학과 리얼리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1999, 309면.↩
- 백낙청 「제3세계와 민중문학」, 『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시인사 1979, 178면.↩
- 이 글에서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지만 또다른 싹으로 분단극복 의식이 동아시아론을 불러냈다는 사실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임형택(林熒澤)은 최원식과 함께 『전환기의 동아시아문학』(창작과비평사 1985)을 엮으면서 동아시아적 관점을 제기했을 당시 ‘문제의식의 원천’이 분단문제 인식 또는 ‘통일의 의지’였다고 회고한다(「한국학의 역정과 동아시아 문명론」,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339~40면). 이 책의 머리말에 분단을 해결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동아시아 세계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유기적 이해”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밝혀져 있다.↩
- 1998년에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만든 백낙청에 따르면, 분단체제는 1987년 6월항쟁을 기점으로 동요단계에 들어갔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로 ‘분단체제 자체의 종식’으로 이어질 해체기에 접어들었다고 시기를 구분한다.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45~48면.↩
- 아세안+3(한중일)이 다시 인도・호주・뉴질랜드까지 포함한 ‘동아시아공동체’로 확대되고 있다. 남아시아와 태평양권까지 포함한 ‘동아시아’란 용례가 있을 정도로 지역 명칭은 구성적이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군사안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는 6자회담에서 드러나듯이 미국・러시아까지 포함한 동북아, 도시교류권으로는 ‘황해연합’ ‘황해도시공동체’(김석철) 등 국경을 가로지르는 지역이 다양하게 설정될 수 있다.↩
- 황인원 「확대지향의 동아시아 지역주의와 아세안의 인식과 대응」, 『동아연구』 54호(2008), 59면. ‘아세안 방식’이란 다수결이 아닌 회원국 전원합의제에 의한 의사결정과정을 주로 말한다. 그러다 보니 합의가 쉽지 않은 경우가 생기고 그럴 때 “회원국들의 다양한 정치적 정략적 이해관계를 고려한 비공식적 사적 유대를 통한 문제해결방식”도 활용된다(74면).↩
- ‘이중적 주변의 시각’에 대해서는 정문길 외 엮음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문학과지성사 2004의 서문(졸고 「주변에서 동아시아를 본다는 것」) 참조. 필자가 동북아(즉 좁은 의미의 동아시아)에서 동남아를 포함하는 쪽으로 관심을 확대한 것은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제기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 점을 지적한 것은 박승우, 앞의 글 11면.↩
- 이것은 천 꽝싱이 말한 ‘탈식민・탈냉전・탈제국의 삼위일체’를 다소 변형한 것이다. 탈제국 대신 탈패권을 넣음으로써 중국이 패권을 추구할 경우 그것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 정문길 외 엮음, 앞의 책 36면.↩
- 비슷한 발상은 일본의 중국전문가 아마꼬 사또시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시아지역통합’ 자체도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필터를 통해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天兒慧 『アジア連合への道』, 筑摩書房 2010, 27면.↩
- 졸고 「평화에 대한 상상력의 조건과 한계: 동아시아공동체론의 성찰」, 『시민과세계』 10호, 2007.↩
- 졸고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46면.↩
- 若林千代 「現代沖繩における‘現場’と‘現場性’」, 뻬이징에서 열린 ‘사상과 현실로서의 아시아・오끼나와 회의’(2008.8.26~29) 발표문.↩
- 쑨 꺼 「민중시각과 민중연대」,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93면.↩
-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 35면.↩
- 류준필의 핵심논점은 양자의 ‘내재적 관련성’이 제대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데 있는 듯하다.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아세아연구138호(2009) 참조.↩
- 胡冬竹 「保釣と反復歸」, 『琉球新報』 2010.9.27.↩
- 제1차 회의에 대해서는 배영대 「진보의 위기와 비판적 지식인의 진로」, 『창작과비평』 2006년 여름호, 제2차 회의에 대해서는 백영서 「한・중・일・대만 ‘비판적 잡지 회의’의 현장에서」, 한겨레신문 2008.5.31 참조.↩
- 이 용어는 일찍이 천관우(千寬宇)에 의해 제기되고(「민족통일을 위한 나의 제언」, 『창조』 1972년 9월호) 백낙청에 의해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구체적 과제로 정리되었다(『흔들리는 분단체제』, 창작과비평사 1998, 193~94, 204면). 필자는 1999년 「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 한국인의 시각」(앞의 졸저에 수록)을 발표할 때 그것을 원용하면서 동아시아에 확대 적용을 시도했다.↩
- 이에 대한 비판은 유재건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 『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 참조.↩
- 寗應斌 「複合社會」, 『臺灣社會硏究季刊』 제71기(2008.9), 276~79면. 그는 ‘이중적 주변의 시각’에 대응해 ‘3중주변의 시각’ 즉 ‘인민 내부의 주변’, 예컨대 남성에 대한 주변인 여성을 강조했다.↩
- 서경식 「‘반 난민’의 위치에서 보이는 것들」, 『난민과 국민 사이』, 돌베개 2006, 235면.↩
- 백낙청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와 녹색담론」, 이남주 엮음 『이중과제론』, 창비 2009, 190면.↩
- 정선태 「동아시아 담론, 배반과 상처의 기억을 넘어서」, 『문학동네』 2004년 여름호, 415면.↩
- 장인성 「한국의 동아시아론과 동아시아 정체성」, 『세계정치』 26집 2호(2005), 17면. 그리고 최장집 역시 국민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한 현실을 과소평가한 탈민족주의라고 비판한다. 「동아시아 공동체의 이념적 기초」, 『아세아연구』 118호(2004), 106~107면.↩
-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논의는 백낙청 「국가주의 극복과 한반도에서의 국가개조 작업」, 창작과비평2011년 봄호 참조.↩
- 국내의 비판론자는 이 글에서 거론된 류준필 정선태 등이 있고, 밖에서는 孫雪岩 「試析韓國學者白永瑞的“東亞論述”」, 『山東師範大學學報(人文社會科學版)』 제54권 제2기(2009) 등이 있다.↩
- 그 현상에 대한 집중보도는 「대만에서 주목받는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한겨레신문 2011.1.27 참조.↩
- 陳光興 「白樂晴的‘超克“分斷體制”’論」, 『臺灣社會硏究季刊』 제74기(2009.6), 30면.↩
- 백낙청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한반도」, 『역사비평』 2010년 가을호, 242면.↩
- 사까모또 요시까즈 「21세기에 ‘동아시아공동체’가 갖는 의미」,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399면. 그밖에 기미야 다다시(木宮正史)는 분단체제가 “한반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까지 포함한, 적어도 동아시아라는 지역에서 성립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분단체제론과 한일 시민사회」,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414면).↩
- 「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 44~45면. 상세한 논의는 유재건 「역사적 실험으로서의 6・15시대」, 『창작과비평』 2006년 봄호 참조.↩
- 마크 쎌던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세 단계」, 『창작과비평』 2009년 여름호. 그는 첫째 중국 중심의 질서인 팍스씨니카 시기(16~19세기), 둘째 분단과 갈등의 시기(1840~1970), 즉 중국의 해체 그리고 일본에 이어 미국이 우위를 차지한 식민주의와 전쟁 및 혁명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시기, 셋째 1970년대 이래 아시아가 부상하고 역동적 지역주의가 싹트는 시기를 세가지 역사적 모델로 제시한다.↩
- 졸저 『동아시아의 귀환』, 24~31면.↩
- 최원식 「대국과 소국의 상호진화」,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29면.↩
- 백낙청 「21세기 한국과 한반도의 발전전략을 위해」, 백낙청 외 『21세기의 한반도 구상』, 창비 2004, 22면.↩
- 姜尙中 「アジアの日本への道」, 武者小路公秀外編, 『新しい‘日本のかたち’:外交・內政・文明戰略』, 藤原書店 2002, 163면.↩
- 이 표현은 첸 리췬의 「중국 국내문제의 냉전시대적 배경」(창작과비평2011년 봄호)에서 따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허 자오티엔도 “아시아 지역 내부적 차원의 곤혹과 고뇌에 대한 이해와 공유”를 미래를 위한 주체적 기반으로 중시한다. 賀照田 「중국혁명과 동아시아 담론」, 『아세아연구』 135호(2009). 이 둘은 모두 강대국화하는 중국에서의 ‘독립적 비판지식인’의 위치를 반영한다.↩
- 오끼나와인은 ‘피해자’면서도 미군기지 반대운동에서 ‘가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자각을 통해 투쟁의 동력을 얻었다. 이에 대해서는 쑨 꺼의 앞의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