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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성부 李盛夫
1942년 광주 출생. 1962년 『현대문학』,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 『백제행』 『전야』 『지리산』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등이 있음.
산길
모든 산길은 조금씩 위를 향해 흘러간다
올라갈수록 무게를 더하면서 느리게 흘러간다
그 사람이 잠 못 이루던 소외의 몸부림 속으로
그 사람의 생애가 파인 주름살 속으로
자꾸 제 몸을 비틀면서 흘러간다
칠부능선쯤에서는 다른 길을 보태 하나가 되고
하나로 흐르다가는 또다른 길을 보태 오르다가
된비얄을 만나 저도 숨이 가쁘다
사는 일이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일 아니라
지름길 따로 있어 나를 혼자 웃게 하는 일 아니라
그저 이렇게 돌거나 휘거나 되풀이하며
위로 흐르는 것임을 길이 가르친다
이것이 굽이마다 나를 돌아보며 가는 나의 알맞은 발걸음이다
그 사람의 무거운 그늘이
죽음을 결행하듯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보면서
산길은 볕을 받아 환하게 흘러간다
깨우치다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도 당당한 듯 서 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 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가야 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다가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눈보라 속으로 나아갔지
어려움의 되풀이가 나에게 새로운 눈 뜨게 했음인가
봉우리에 올라가 되돌아보니
칼바람 속에서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잘 보이고
그것이 큰 재미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꾸 사진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눈 많이 오는 날
이 산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