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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0년대 한국문학을 위하여 2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

평론가, 시인, 문맹자의 문학적 정치들

 

 

심보선 沈甫宣 시인.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초』가 있음. bosobored@gmail.com

 

 

1. 평론가들: 천사-되기의 꿈

 

“모든 것이 한 시인의 고뇌로부터 시작”했다.1) 나에게 이 말은 문학과 정치에 관하여 최근에 평론가들이 한 말 중 가장 눈에 띄었다. 물론 이 평론가(신형철)는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 전체의 기원을 한 시인의 고뇌에 정초시킨 것은 아니리라. 다만 그가 판단하건대 그 논의들이 중요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하나의 기원을 한 시인의 고뇌에서 찾은 것이리라. 사실 다른 몇몇 평론가들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평론가들은 대체로 “해야 한다”라는 정언명령의 형태로 자신들의 의견을 시인들에게 제시했다. 예를 들어 백낙청(白樂晴)은 “말들의 운행”에 천착하는 “특공대의 용맹”(김행숙이나 김언과 같은 소위 실험시를 쓰는 시인들)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에게 “대중과 함께하는 좀더 다양한 공부와 사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권고했다.2) 그리고 아래와 같은 보다 구체적인 권고도 있었다.

시쓰기는 고통받는 이웃에게로, 노동자에게로, 자연에로, 사물에로, 시간에로, 장소에로, 언어에로, 이 모든 것들과 연결된 나 자신에게로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노력과 좌절 사이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서 폭주하는 균열과 전율을 살아내고 기록해야 한다.3)

 

이들은 시인의 고뇌를 “공부와 사업” “노력과 좌절” 같은 다분히 ‘주의주의’(voluntarism)적인 용어들로 표현한다. 어쩌면 이들은 모든 시인이 자기만의 고뇌를 단단한 씨앗처럼 품은 열매이기를, 그리하여 시인 각자가 그 이후 전개될 사건의 유일무이한 기원이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평론가들이 말하는 문학과 정치에 대한 시인의 고뇌는 수학적으로 비유하면 ‘자아로부터 타자로 다가가는 고뇌’라는 벡터(vector)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학적 양과 달리 시인의 고뇌를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는 없다. 어느 시인의 고뇌가 가장 강한가? 개별적 고뇌들을 합하면 공동체의 고뇌가 되는가? 한국 시인들의 고뇌는 외국 시인들의 고뇌에 비해 얼마나 강한가? 그 고뇌가 귀속되는 장소 또한 불분명하다. 그 고뇌는 시인의 내면에 귀속되는가? 시인의 삶에 귀속되는가? 시쓰기라는 행위에 귀속되는가? 혹은 그 모든 것에 동시에 귀속되는가?

이렇듯 고뇌라는 것은 정체불명이다. 실제로 백낙청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정치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작가가 생활에서는 어떻게 실험하고 작품으로는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 정해진 답은 없고, 창작을 위해 어떤 생활을 해야 된다고 강요하는 일은 백해무익이기 쉽다. 이 대목에서도 각자 자기 방식으로 치열한 실험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4) 그러므로 ‘시인들이여,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 식의 포괄적이고 모호한 요청으로 압축되는 주의주의적인 정언명령은 정작 그 명령의 직접적 대상인 시인들의 시쓰기에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평론가들은 실제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는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을 구사하는가? 이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은 혹시 다른 효용을 갖는 것은 아닌가?

평론가들은 문학과 정치에 대한 시인의 고뇌—무엇으로 확정될 수도 없고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벡터값—를 두고 불가능한 셈을 하면서 하나의 우회로를 선택한다. 그것은 특정 시인들의 특정 시들을, 그들의 문학적이고도 정치적인 고뇌에 대한 ‘근삿값’으로 도입하는 일이다. 문학과 정치를 논하는 지면에서 평론가들은 문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두 바람직한 ‘본보기 시’를 선별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정작 주목할 것은 ‘공부하고 사업하고 노력하고 좌절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이 본보기 시의 효용이다. 평론가들은 일군의 시들을 시인의 고뇌를 표상하는 본보기로 선별하고 해석하는데, 이 선별과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가 서로 경합하고 참조하면서 또다른 논의를 이끌어낸다. 이 과정에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는 켜켜이 축적되어 모종의 정당성을 지닌 담론으로 사회화된다. 이것이 바로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의 진정한 효과다. 고뇌라는 불확정적인 공백을 설정한 후 그것을 간접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다양한 텍스트를 도입하는 끊임없는 ‘차연’(diffrance) 속에서 문학과 정치에 대한 평론은 쓰이고 또 쓰이는 것이다.

문학과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련의 평론들은 무엇보다 문학제도의 전통적 분할선들—시인과 독자, 시인과 평론가, 시인과 시인, 텍스트와 텍스트,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분리를 문제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단순하고도 명백한 증거는 선별과 해석 대상이 되는 텍스트가 예외없이 등단한 시인들—그것도 대체로 알려진 시인들—의 시라는 사실이다. 제도적 절차를 거쳐 선택된 시인들을 한번 더 걸러낸 뒤 이들의 시에 내리는 평가, 즉 “배제적 합의성”(랑씨에르)이라 부를 수 있는 정식에 따라 문학과 정치라는 테마가 다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새 술은 새 포대에!”라고 재청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새 술”은 없었다. 문학과 정치라는 테마는 문학이라는 술판에서 가장 오래된 술 중의 하나다. 그러나 가장 위험해 보이는 이 술, 문학의 자율적 위상을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독주(毒酒)야말로 실은 ‘문학(술)판’을 다른 (술)판들과 분리시키고 나아가 그 분리로부터 문학(술)판이 사회적 위신을 획득하도록 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해왔다. 어떻게 문학과 정치라는 테마가 문학제도의 ‘분리’를 가져오고 동시에 ‘분리의 이윤’을 문학에 가져다주는가?

 

문학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무지를 추문으로 만든다. 아무러한 반성 없이, 9시에 회사 문에 들어서서, 잡담하고 점심 먹고 5시에 퇴근하는, 그런 일과가 월, 화, 수, 목…… 계속되는 일상인의 무딘 의식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뒤를 보지 못하는 갇힌 의식에, 문학은 그것이 진실된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든다. 아니 더 나아가서 문학은 그것의 존재가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드는 어떤 것이다. (…) 문학은 인간의 실현될 수 없는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드러낸다. 그 거리야말로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이다.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5)

 

위의 인용문은 1977년에 출간된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김현에 따르면 문학은 언제나 꿈과 현실과의 “거리”를 둔 채, 그 거리를 하나의 “척도”로 견지하여 ‘세계의 비참’을 견딜 수 없는 추문으로 드러낸다. 이때 문학은 천사이다. 엄밀히 말하면 천사가 되는 아름답고 불가능한 꿈이다. 어디까지나 꿈이기 때문에 문학의 ‘천사-되기의 꿈’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무능력으로 인해 세계의 비참이 드러난다. 자신을 접근 불가능하고 아름다운 꿈으로 드높임으로써 세계를 더욱 비참하게 폭로하는 것이 문학의 정치이다.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은 그와 거리를 두고(비록 팔은 뻗겠지만) 그가 현실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탈주로에 시선을 던지지 않는다. 문학과 정치에 대한 시인의 고뇌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평론가들은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시인의 노력과 좌절, 공부와 사업을 시 텍스트가 내는 “자체제작 소리”(김수이)를 ‘간접적 증거’로 삼아 판별한다. 그들은 시라는 제작된 꿈에서 천사가 된 시인이 지상을 향하여 다가가려는, 불가능을 가능성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추론적으로 검수한다. 문학이 불가능하고 아름다운 천사-되기의 꿈이라는 믿음, 이 믿음에 따른 텍스트 중심주의, 문학과 현실의 거리두기, 문학과 비문학을 분리하기는 이미 1970년대 김현의 평론에 내장되어 있었으며 2000년대 시를 둘러싼 문학과 정치에 대한 최근의 평론들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규범이자 기제다.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이같은 규범과 분리를 문제삼지 않을 때,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의제인 평등의 문제를 간과하게 된다. 이제 나는 문학과 정치에 대한 그간의 논의를 주로 랑씨에르(J. Rancire)의 이론을 경유하여 살펴볼 텐데, 이때 평등의 문제가 사태를 파악하고 비판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틀이 될 것이다.

 

 

2. 김수영, 진은영: 지게꾼-되기의 시

 

신형철(申亨澈)이 모든 것의 기원, 최초의 고뇌를 시작한 시인으로 진은영(陳恩英)을 호명했을 때,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진은영은 당황하지도 우쭐해하지도 않았으며 다만 진지하게 자신에게 내어진 자리를 거부했다. 진은영은 마치 날아온 화살을 받아 또다른 활로 또다른 과녁을 향해 쏴보내듯이 첫번째 호명을 두번째 호명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논의를 진척시켰다. 진은영은 “모든 것이 한 시인의 고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신형철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이때 한 시인은 자신이 아니라 김수영(金洙暎)이라고 했다. ‘온몸으로 쓰는 시’에 대한 그의 시론이야말로 문학과 정치 논의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진은영은 김수영의 ‘온몸’의 시론을 전유하여 ‘지게꾼-되기의 시’라는 개념을 새로이 제시한다. “지게꾼이라는 타자를 만나는 새로운 방식 속에서 시인은 기존의 분배방식에서 특수한 영역으로 할당된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지게꾼도 시인도 아닌 동시에 지게꾼이며 시인인 존재가 된다. (…) 시는 온몸으로 살아보는 것에 대해 씌어지고, 그렇게 살아본 만큼 씌어진다고 김수영은 확신한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일은 우리의 삶에 ‘살아보는’ 여러 방식을 도입하는 일이다.”6)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다. 온몸으로 살아봄으로써 만들어지는 지게꾼-되기의 시는 어떻게 문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시를 구현할 수 있는가? 시인은 어떻게 텍스트의 문턱 안쪽에 머무르는 천사가 아니라 문학과 현실, 문학과 비문학의 분리를 철폐하고 넘어서는 작인(agency)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지게꾼-되기의 시는 “글 쓰는 나와 이야기하는 나 사이에 어떤 ‘그’, 즉 타율성을 기입하는” 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7) 평론가들이라면, ‘글 쓰는 나’는 실존하는 나이고 ‘이야기하는 나’는 화자인 시인, 즉 천사라고 정의할 것이다. 평론가들의 주의주의적 정언명령에 따르자면 ‘나’는 충분한 고뇌를 거쳐 아름답고 불가능한 꿈의 주인공인 ‘시인-천사’로 변모해야 한다. 평론가들이 보기에 천사-되기의 꿈은 실존하는 나와 시인-천사의 계약이고 평론가의 직분은 그중에서 잘된 계약 결과를 독자들에게 설명해주는 일이다. 이때 계약의 내용은 이렇다. “’천사’는 ‘나’가 고뇌한 만큼, 공부한 만큼, 노력한 만큼, 딱 그만큼 노래할 것을 합의한다.” 그러나 랑씨에르에 따르자면, 문학은 실존하는 나와 시인-천사 사이에 지게꾼이라는 딴사람(‘그’라는 타율성)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둘의 계약과 합의를 해체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문학은 정치의 문제, 평등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와 만난다.

 

문학과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부분들의 셈 위에 그리고 합의하고 동의하는 신체들의 완결성 위에 이중인화됨으로써 어떤 신체와도 일치하지 않는, 교환 가능한 사물들의 특성들도 아니고 교환관계의 협약들도 아닌 말(mots)로 이루어진 존재들, 신체 없는 존재들의 존재를 창시한다. 이 독특한 존재의 핵심에 모든 자아를 자기 자신과 분리하는 타율성이라는 특질이 있다. 그렇지만 이 타율성이라는 특질은 바로 평등의 특질이며, 이 평등은 언제나 은밀하게 공동체를 가로질렀다. 왜냐하면 평등은 공동체 내의 신체들의 어떤 분배에서도 정당화된 자리를 갖지 않으며,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언제나 국지적으로만 신체들을 그들의 장소 바깥에, 그들의 고유함 바깥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평등은 문학이나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를 수 있는 부유하는 존재 형태로, 또 어떤 특성도 사라지지 않은 채 부인될 수 있는 존재들, 독특한 다수성들—신체들과 호칭들의 관계체계는 이 다수성들 때문에 여기저기로 자리 옮겨진다—이 존재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 형태로 사회체 안에 효과를 만들어낸다.8)

 

이렇듯 지게꾼-되기의 시는 “합의하고 동의하는 신체들”로 이루어진 치안적 질서 사이를 은밀하게 가로지르면서, “말로 이루어진 존재들, 신체 없는 존재들”이 거주할 시간과 장소를 설립하고 채우면서, 자신의 고유한 정치를 수행한다. 지게꾼-되기의 시에서 문제는, 시라는 텍스트의 제작만이 아니다. 이때 관건은 그 시쓰기가 지게꾼이 되는 기존의 방식과 단절된 새로운 지게꾼-되기를 작동시키는가, 그렇게 존재하게 된 지게꾼이 세계의 비참에 대해 고유한 증언을 발언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발언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분할하여 합의체 안에 기입할 수 있는가이다.

지게꾼-되기의 시는 세계의 비참과 거리를 두고 그것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사-되기의 꿈과 대조된다. “아무도 세계의 모든 비참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그것과 함께 말하며, 그것과 같이 이름들, 독특성들, 새로운 다수성들을 발명하는 말하기의 독특성에 눈뜨는 법을 배울 수 있다.”9) 요컨대 지게꾼-되기의 시는 지게꾼이라는 딴사람(타자)의 독특한 말-신체를 구현한다. 그리고 지게꾼-되기라는 말-신체를 구현하는 말하기의 독특성은 곧바로 평등과 관계한다. 말하기의 독특성, “이는 평등을 측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 측정은 가까움과 멂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여기에서 실험되는 정언명령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늘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식으로 행동하라. 이는 곧 끊임없이 측정하고 평가하고 매번 이 가까움과 멂—이것들은 평등한 공동체의 틈새들을 정의한다—을 재창조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이다.”10)

여기서 평등은 단순히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몫을 공정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다. 평등이란 말할 수 있는 신체와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분리를 독특한 말-신체로 철폐하고 그 사이에 새로운 신체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틈새를 기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게꾼-되기의 시가 표명하는 ‘늘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식으로 행동하라’는 실천적 정언명령은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는 주의주의적 정언명령뿐 아니라 ‘지게꾼의 이해관계와 당신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라’는 현실주의적 정언명령, 그리고 ‘지게꾼의 심장과 당신의 심장을 일치시켜라’는 도덕적 정언명령과도 구별된다. 진은영은 “문학과는 다른(‘딴’) 자리들을 문학의 자리로 만들고 문학을 다른 자리로 만드는 왕복운동”을 제안한다.11) 세계의 비참과 문학 사이의 거리의 견지나 거리의 말소가 아닌 거리의 조절,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면서 독특한 말-신체의 장소, 평등한 공동체의 틈새를 모색하는 왕복운동이야말로 문학의 정치와 민주주의적 글쓰기에 내재하는 고유한 ‘진동’(진은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게꾼-되기의 시는 천사-되기의 꿈과 달리 문학제도를 포함한 치안적 질서 전체의 분할선을 위협한다. 문학은 세계의 비참에 대해 독특하게 말하는 타자를 창안함으로써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은 채 부유하는 새로운 말-신체를 갖게 된다. 말할 수 있는 신체와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분리—시인과 독자의 분리, 문학과 비문학의 분리, 사유와 노동의 분리, 지식인과 대중의 분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를 고수하려는 치안적 질서는 이 새로운 말-신체, 수다스럽게 부유하는 유령이라는 존재 때문에 골치를 썩게 된다. 이 유령과 접촉하고 유령이 되려는 모든 이들은 하나하나 기원이 될 수 있는데, 이때 기원은 심오한 고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아니라 세계의 비참에 대해 말하려는 의지12)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이 작동하는 출발점이다.

 

 

3. 문맹자들: 무식한 시인-되기의 시

 

지게꾼-되기의 시는 강제된 노동과 부과된 정체성, 그에 따라 보고 말하고 생각하는 감각의 불평등한 분배로 이루어진 (문학제도를 포함한) 치안적 질서에 독특한 말-신체를 침입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게꾼-되기의 모든 시쓰기가 침입이며 지게꾼-되기의 시를 쓰는 모든 이가 침입자라고 본다면 소위 등단 여부, 작가와 독자의 구분,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 등은 전혀 중요치 않다. 지게꾼-되기의 시쓰기는:

 

말로 행동하는 인간들과 괴로워하고 소란스런 목소리의 인간들, 행동하는 인간들과 단순히 살아갈 뿐인 인간들 간의 구분을 폐기한다. 글쓰기의 민주주의는 소설 속 영웅들의 삶을 전유한다든지, 스스로 작가가 된다든지, 또는 공동 관심사에 대한 토론에 몸소 참여하는 것 등을 통해 각자가 자기 몫을 챙길 수 있는 자유로운 문자체제이다. 이는 저항할 수 없는 사회적 영향력이 아니라 말의 행위, 이 행위가 형태를 만드는 세계와 이 세계를 채우고 있는 인민들의 역량들 간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감성의 분할과 관계된다.13)

 

그렇다면 지게꾼-되기의 시는 앞서 김현이 이야기했던바,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의 무지와 비참을 다만 추문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문학의 정치를 한정시키는 천사-되기의 꿈을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지게꾼-되기의 시는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할당된 자리에 상응하는 보기, 말하기, 생각하기의 한계를 넘어서며 쓰는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게꾼-되기의 시는 김수영의 ‘지게꾼의 시’에 대한 논의조차 문제삼는다. 김수영은 시를 쓰는 지게꾼이 나오지 않는 것은 “여러가지 사회적 조건의 결여” 때문이고 지게꾼이 쓰는 문학은 “장구한 시간이 필요한 자유로운 사회의 실현과 결부되는 문제”이므로, 우선은 “현재의 유파의 한계 내에서라도” “시인의 양심이 엿보이는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14) 그러나 지게꾼-되기의 시는 사회학적 결정론에 반하는 시이다. 지게꾼-되기의 시는 시를 쓸 수 없는 지게꾼이 사회적 조건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쓰는 시, 사회적 조건의 결여를 문제삼으면서 쓰는 시, 문단 내 유파의 한계 바깥에서 쓰는 시, 양심이 아니라 말하려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을 작동시키는 시, 딴사람-되기를 감행하며 쓰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지게꾼의 시와 지게꾼-되기의 시의 구별은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지게꾼이 쓴 시조차 지게꾼-되기의 시인 한에서, 즉 주어진 정체성을 탈전유(disappropriation)하여 말하기의 독특성을 창안하는 한에서, 말할 수 없는 신체를 가졌던 자가 말의 의지와 역량을 작동시켜 자신에게 할당된 감각을 재분할하는 한에서, 자신의 정치를 수행하는 것이다.15) 지게꾼의 시는 지게꾼이 쓰는 시이고 지게꾼-되기의 시는 지게꾼 아닌 시인들이 쓰는 시라는 진은영의 암묵적 가정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치안적 질서의 분할선을 뒷문으로 재도입한다. 그러나 랑씨에르는, 침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말라르메의 시와 노동자의 편지 사이에는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고, 오히려 말라르메가 프롤레타리아들을 흉내냈다고 본다.

 

시인은 해방된 노동자의 자리, 낮에는 빵을 위해 혹독하게 일해야 하고 밤에는 사유와 시의 황금에 전념하면서 두 삶을 살아야 하는 침입자의 자리를 훔친다. 벌써 “엉망진창이 된” 하루 일과와 시작(詩作)을 위해 수면시간을 줄여야 하는 구속감을 진술하는 청년 말라르메의 편지는, 노동의 낮과 사유의 밤을 계속해서 유지시켜야 한다는 급박한 사태에 빠져 있는 프롤레타리아들이 썼던 편지들을 모사하는 것이다.16)

 

다시 강조하여 말하겠다. 지게꾼-되기의 시에 있어 관건은, 시라는 텍스트의 제작만이 아니라 시쓰기가 새로운 지게꾼-되기를 작동시키는가, 세계의 비참을 증언하는 지게꾼의 말-신체를 위한 시간과 장소를 사회적 합의체(문학제도를 포함하여) 안에 기입할 수 있는가이다. 말라르메와 프롤레타리아 모두 침입자인 이유는 휴식을 취해야 할 “밤에 사유와 시의 황금에 전념하면서”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을 와해시키고”,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실존의 조건들과 사회적 질서의 토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17) 결국 시 텍스트 자체뿐 아니라 시쓰기를 위한 시간의 할애와 장소의 확보 또한 침입의 행위에 포함된다. 말라르메나 프롤레타리아, 등단한 시인이나 등단하지 않은 시인 그 모두에게 창작에 필요한 시간과 장소는 여분의 것이 아니라 초과의 것이다. 그들은 그 시간과 장소를 사유와 열정으로 채워넣는다. 지게꾼의 독특한 말-신체란 시간, 장소, 사유, 열정, 쓰기, 살기, 말하기, 행동하기 이 모든 것들의 합이며, 그 합에 또 다시 “하나-더(un-en-plus)의 무한한 가능성”을 더하기를 원함이며, 그럼으로써 “배제적인 합의성의 정식”에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18) 우리는 더,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 더, 더, 더……를 원한다. 우리의 몸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원한다고 말하고, 행동하고, 쓰고, 사는 몸이다. 어쩌면 김수영의 ‘온몸’이란, ‘하나-더’를 무한히 욕망하고 추구하는 몸, 즉 치안적 질서가 할당한 자신의 신체를 끊임없이 초과하려는 말-신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드디어 ‘글을 못 읽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쓴 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됐다. 이제 나는 문맹자였다가 일흔이 넘어 글쓰기를 배운 할머니들이 쓴 시들을 ‘문학의 정치’의 ‘본보기’들로 제시할 것이다. 이 시들은 최근 문학과 정치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 지금까지의 거의 모든 평론이 배제해온 이른바 아마추어라 불리는 이들의 것이다. 시를 천사-되기의 꿈이라고 보는 관점에 따르면 이들은 세계의 비참을 문학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다. 그 관점에 따르면 이들은 시 바깥에 존재해야 하는, 그래서 시라는 천상으로부터 내리쬐는 빛에 의해 자신의 비참한 진실을, 그것도 추문의 형태로만 내보일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이들의 시를 본보기로 제시하는 이유는, 시를 천사-되기의 꿈이라고 보는 관점과 반대로, 문학의 정치를 수행하는 의지와 역량이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귀속되고 발휘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이 증언을 통해 나는 ‘고뇌하는 등단 시인들’만을 본보기로 제시한 그간의 논의들이 배제해온 문제, 말할 수 있는 신체와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분리를 극복하는 문제, 요컨대 문학의 정치를 논함에 있어 가장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평등의 문제를 다뤄볼 것이다.

이 할머니들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고 충청북도 음성에서 평생 농사일로 생계를 이어왔으며 현재 음성 노인복지관에서 시쓰기를 배우고 있다.19) 나는 이들의 시를 ‘무식한 시인-되기’의 시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무식한 시인’이라는 말을 아래의 시에서 빌려왔다.

 

시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

배운 사람이 시를 써 읊는 거지

가이 갸 뒷다리도 모르는 게

백지장 하나

연필 하나 들고

나서는 게 가소롭다

 

꽃밭에서도 벌과 나비가

모두 다 꿀을 따지 못하는 것과 같구나

벌들은 꿀을 한보따리 따도

나비는 꿀도 따지 못하고

꽃에 입만 맞추고 허하게 날아갈 뿐

 

청용도 바다에서 하늘을 오르지

메마른 모래밭에선 오를 수 없듯

배우지 못한 게 죄구나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

아무리 열심히 써도

나중엔

배운 사람만 못한

시, 시를 쓴단다

—한충자 「무식한 시인」(『벌 나비 날아들면 열매 맺는다』, 시갈골문학회 2010) 전문

 

위의 시는 어떻게 문학의 정치를 수행하는가? 첫구절 “시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야/배운 사람이 시를 써 읊는 거지”는 말할 수 있는 신체와 말할 수 없는 신체의 분리라는 치안적 질서를 재확인한다. 그리고 “아무리 따라가려 해도/아무리 열심히 써도/나중엔/배운 사람만 못한/시, 시를 쓴단다”라는 마지막 연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무지로부터 끝내 빠져나올 수 없음을 단언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늙은 문맹자의 슬픈 고백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다면 비참한 현실을 확언하는 시의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 있는 “가이 갸 뒷다리”20) 같은 허구적 말, “꽃밭” “바다” “메마른 모래밭” 같은 허구적 장소들, “벌” “나비” “청용” 같은 허구적 동물들을 상상하는 역량, 그리고 이 모든 것들로 허구적 이야기를 짓는 역량은 도대체 누가 소유한 감성적 역량인가?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무식한 시인’이라는 딴사람이다. 무식한 시인은 ‘쓰는 나(못 배운 자)’와 ‘이야기하는 나(시인)’사이의 합의, 즉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라,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비트겐슈타인적 계약을 해체하고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는’ 딴사람이다. 이 무식한 시인, 딴사람은 한충자와 마찬가지로 문맹자였다가 시를 쓰게 된 이명재의 시에도 등장한다.

 

내 인생 눈뜬장님인데

세상에 태어나 글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가슴속 구석구석은 하고픈 말들로 꽈악 차여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살아가며 돌아보며

기쁜 일들 얼마나 많은데

슬픈 일들 또 얼마나 많았는데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 말들이 철철 넘치는데

눈뜬장님인 나는

어진 것들의 몸부림을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오늘도 살펴보며 새겨보며

어제의 흔적들을 글로 써보려 하나

그러기엔 아직도 아는 게 없다

내 연필 끝이 무디다는 것밖에는

—이명재 「연필 끝이 무디다」, 앞의 시집, 전문

 

이명재도 한충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한 비참인 “눈뜬장님”(문맹자)의 무능력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무식한 시인’은 문맹자로 하여금 ‘꽈악 찬 말들과 철철 넘치는 말들’, 랑씨에르 식으로 표현하면 ‘말들의 초과’, ‘수다스런 말들’을 말하게 한다. “어진 것들의 몸부림을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표현은 마치 에셔의 「그림 그리는 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표현이 에셔의 그림과 다른 점은 두 연필 중 하나는 끝이 무디고 다른 하나는 끝이 날카롭다는 사실이다. 무식한 시인은 이렇게 두개의 연필, 문맹자의 무딘 연필과 시인의 날카로운 연필 사이를 쉼없이 오가는 시쓰기, 그 자신 “어진 것들의 몸부림”인 독특한 말하기의 의지와 역량을 구사한다.

글을 깨친 지 몇해 안되는 칠십대 할머니들이 쓴 시에 등장하는 무식한 시인은 ‘공부와 사업’을 통해 문맹을 극복한 시인도 아니요, ‘노력과 좌절’을 통해 문맹자에게 다가가는 시인도 아니다.21) 무식한 시인은 문맹자와 시인 사이를 왕복운동하면서, 그 둘을 가까이하는 동시에 멀리하면서, 평등의 공동체가 자리할 수 있는 틈새를 측정하고 모색하는 침입자다. 한충자는 낮에 농사를 짓고 밤에는 불을 밝혀 남편도 모르게 수백편의 시를 쓰면서 휴식과 재생산의 밤으로부터 사유와 시쓰기의 밤을 지켜내야 했다. 이렇듯 무식한 시인은 말할 수 없는 신체(못 배운 자, 문맹자)와 말할 수 있는 신체(시인)를 결합하여 치안적 질서가 부과한 정체성과 감각에 침입하는 새로운 말-신체를 창안하고, 그럼으로써 기존의 지배적 분할선을 재분할한다. 그러므로 무식한 시인은 문맹자를 막 벗어나 시를 쓰기 시작한 사람을 지칭하는 ‘실정적’(實定的) 용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순형용으로 이루어진 기호학적 ‘명사’도 아니다. 무식한 시인은 자신이 결박된 세계의 비참을 사유하고 그것에 대해 말함으로써 세계의 비참 밖으로 탈주하는 신체의 ‘동사’이다. 무식한 시인은 배웠건 못 배웠건, 글을 읽건 못 읽건, 누구나 말하려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을 소유하고 발휘할 수 있다는 평등의 전제를 시쓰기를 통해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자이다.

 

 

4. 나가며: 신학적 평면에서 내재적 평면으로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신체—동물, 소리, 영혼, 관념, 언어 등—가 관련하는 두개의 평면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내재적 평면이다. 이 내재적 평면은 “형식을 갖지 않는(non formés) 요소들 사이의 빠름과 느림, 운동과 정지의 관계들”이라는 경도와 “매순간 한 신체를 실행시키는 익명의 어떤 한 (존재의 힘, 변용능력)”의 전체로 이루어진 위도로 짜여 있다. 이 평면은 “언제나 가변적이며, 개체들과 집단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개조되고, 구성되고, 재구성된다.” 두번째 평면은 신학적 평면으로 “천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조직화”, 즉 “신의 정신적 구도, 자연의 가상적 심원(profondeurs) 속에서의 전개, 혹은 한 사회에서의 권력의 조직화”와 상관한다. 이 평면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상관없이, 형식들과 주체들을 통제하는 초월성의 평면”으로, “은폐된 채로 있으며, 결코 주어지는 법도 없고, 그것이 부여한 것을 토대로 단지 추측되고, 유도되고, 추론되어야 한다.”22)

주의주의적 평론이 표명하는 천사-되기의 꿈은 신학적 평면 위에서 작동한다. ‘시인-천사의 고뇌’(사실 우리가 그것을 고뇌라 부르건 다른 무엇이라 부르건 아무 상관 없다)는 은폐돼 있고 주어져 있지 않으며 단지 그들이 쓴 텍스트를 통해 추측되고, 유도되고, 추론될 뿐이다. ‘공부와 사업’, ‘노력과 좌절’의 정도와 수준을 평가하고, 선택과 배제의 장치를 가동하여 주체를 호명하며, 그들을 억견(doxa)의 내부로 통합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평론가들은 텍스트에서 다음과 같은 보이지 않는 층위들을 발견해야 한다. “미학적인 것의 문을 열면 그 안에 사회학적인 것의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다시 정치학적인 것의 문이 있다.”23) 평론가들은 이렇게 천상에서 땅으로 단계적으로 하강하는 천사의 숨은 운동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텍스트의 진리값을 계산하여 내놓으면 독자들은 그에 반응하여 광장으로 걸음을 옮길지도 모른다! 미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 사이의 문턱들을 가정하는 이 단계적 발전의 알레고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동반한다. 누가 그 문턱 안에 갇혀 있고 누가 그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평론가들은 또다시 추측하고, 유도하고, 추론할 뿐이다. 분리된 문턱의 한계 안에 감각의 능력을 분배하고,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자와 넘을 수 없는 자를 분리하고,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그렇게 문학적 형식과 주체를 통제하고 조직화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지게꾼-되기의 시, 무식한 시인-되기의 시에 내재하는 익명의 힘들, 말하고자 하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으로 신체를 변용하는 힘들은 내재적 평면 위에서 작동한다. 이 힘들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귀속되고 발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배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작동시킨다. 이 힘들은 신학적 평면의 질서, 즉 형식과 주체를 통제하고 조직화하는 치안적 질서에 맞선다. 여기서 정치적 효과인 평등 공동체의 구성은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언젠가’의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잠재성으로, ‘무에서 유로의’ 창조력이 아니라 ‘느리거나 빠르게, 흩어지거나 모이는’ 구성력으로 드러난다. 텍스트의 진실은 단계적 발전에 따라 미학적인 것으로부터 사회학적인 것을 거쳐 정치학적인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텍스트 안에 숨은 진실, 숨은 천사는 없다. 다만 미학적인 것으로 사회학적인 것에 저항하는 정치학적인 말-신체가 존재하고, 텍스트 내부와 외부를 쉼없이 가로지르며 세계를 개조하고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말-신체의 질주가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는 “전자와 후자의 평면〔신학적 평면과 내재적 평면〕 위에 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방식으로 살지 않고, 동일한 방식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동일한 방식으로 글쓰지 않는다”고 말했다.24) 문학제도 안에 거주해온 ‘우리’는 어느 평면 위에서 살고 사유하고 쓰고 있는가? 서글프게도 대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적 평면 위에서 천상의 천사들을 올려다보았고 그들이 언젠가 거대한 진실의 날개로 지상의 비참을 덮어주리라는 난망한 꿈을 꿔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작 다른 평면 위에서 무수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다른 존재들을 외면해왔다. 수많은 익명의 힘들이 ‘지게꾼-되기’, ‘무식한 시인-되기’, 그밖의 다양한 ‘딴사람-되기’를 감행해온 길고 오랜 모험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왔다. 문학의 정치가 이미 사회체에 내재된 초과로 존재하면서 민주주의적 글쓰기를 실행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 평면에서 저 평면으로 말과 사유와 삶을 자리옮김 하는 일이다. ‘자리를 옮겨라’, 이것은 ‘더 많이 더 잘 고뇌하라’에 대비되는 또 하나의 실천적 정언명령이다. 우리가 ‘딴자리’로 옮겨갈 때, 지상의 수많은 틈새들에서 수많은 시인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이때, 평등에의 옹호는 ‘등단을 했건 안했건, 시를 쓰는 이들은 모두 시인이다’라는 식의 태도, 흔히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 불리는 안이한 태도와 단호하게 결별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보르헤스가 우리 모두는 동시에 활 쏘는 이, 화살, 과녁임을 일깨워줬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활 쏘는 이, 화살, 과녁, 이 모든 다수성들이다. 나아가 우리는 팽팽하고, 날카롭고, 정확한 다수성들이어야 한다. ‘온몸’으로 다수성들이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현재의 노예상태의 비참으로부터 한발짝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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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370면.

2) 백낙청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창작과비평』 2009년 겨울호 37면.

3) 김수이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 그리고」, 『창작과비평』 2010년 겨울호 58면.

4) 백낙청, 앞의 글 37면.

5) 김현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 김현문학전집 1권, 문학과지성사 1991, 52면.

6) 진은영 「한 진지한 시인의 고뇌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10년 여름호 28면.

7) 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길 2008, 208면.

8)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09면.

9)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13면.

10)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13면.

11) 진은영, 앞의 글 29면.

12) 나는 이 글에서 ‘고뇌’ ‘공부와 사업’ ‘노력과 좌절’을 ‘주의주의’적 용어들이라 부르면서 ‘말하려는 의지’와 대비시킨다. 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의주의는 지성에 대해 의지를 맞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의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정신작용으로서의 의지와 ‘말하려는 의지’를 구별하고 싶다. ‘말하려는 의지’는 자끄 랑씨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랑씨에르에 따르면 의지는 “욕망의 긴장”과 “상황의 강제” 등에 의해 발휘되는 힘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때의 의지는 외부와의 긴밀한 관계를 전제로 하되 그것에 제약당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작인이라고 할 수 있다(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양창렬 옮김, 궁리 2008, 29면). 이 점에서 ‘말하려는 의지’는 주체에 내재하는 본질적 속성으로 정의되는 주의주의의 의지와 구별된다.

13) 자크 랑시에르 『문학의 정치』,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09, 27~28면.

14) 김수영 「생활현실과 시」, 진은영, 앞의 글 25면에서 재인용.

15) 나는 ‘박노해와 백무산이 김수영이 말한 “시를 쓰는 지게꾼”의 전범이며, 이들의 등장이 새로운 미학적 주체의 탄생을 보여준다’는 진은영의 주장에 절반만 동의한다. 노동자문학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평등 공동체를 발명하여 감각의 분할에 저항했다. 그러나 노동자문학은 사회적 조건이 무르익어 탄생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조건을 거슬러 탄생한 것이다. 그 점에서 노동자문학 또한 지게꾼의 시가 아니라 지게꾼-되기의 시라고 봐야 한다. 사실 박노해와 백무산 이전에 “시를 쓰는 지게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이때 독특한 말-신체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지게꾼’일 수도 있고, ‘농사꾼’일 수도 있고, ‘나무꾼’일 수도 있고, ‘그’일 수도 있고, ‘그녀’일 수도 있다. 이들의 시는 발표되지 않았더라도, 종이 위에 쓰이지 않았더라도, 밤에 부엌 바닥에 부지깽이로 남몰래 쓰였다 지워졌을지라도, 새벽에 빈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하는 흙길 위에 나뭇가지로 쓰였다 지워졌을지라도, 그 시가 자신이 처한 비참에 대한 독특한 증언인 한, 지게꾼-되기의 시들이 그로부터 계속해서 출발하고 다시 출발하는,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는, 의지와 역량의 기원들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16)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162면.

17) 자크 랑시에르, 같은 곳. 랑씨에르는 초과하는 말(excess of words), 수다스런 말이 민주주의의 중요 요소라고 보며 이를 문학성(literarity)이라고 칭한다. 이때 문학성이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데 있어서 가용한 말들의 초과; 삶을 생산하는 요건들과 관련된 말들의 초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위 ‘적절한 것’ 자체를 정당화하는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대비되는 말들의 초과를” 뜻한다. Davide Panagia, “Dissenting Words: A Conversation with Jacques Rancire,” Diacritics Vol. 30, Nr. 2, Summer 2000, 115면.

18) 자크 랑시에르, 앞의 책 2008, 214면.

19) 나는 두 할머니의 시쓰기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정혜윤이 쓴 「그런 뒤에야 해피 뉴이어!」(http://hook.hani.co.kr/archives/19299)라는 에쎄이를 통해 알게 됐다. 정혜윤은 직접 취재해서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인생이 시다’(20101231CBS 방송)에 기초해서 이 에쎄이를 썼다.

20) 정혜윤에 따르면 한충자 시인은 자신이 유독 받침에 약하다면서 받침을 뒷다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21) 이들에게도 공부와 사업, 노력과 좌절은 있다. 그러나 이는 주의주의적 평론이 언급하는 ‘대중과 함께하고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고뇌와는 사뭇 다르다. “한충자 할머니는 내가 뭐 시인이 되겠단 생각도 없었고 그저 어디 가서 읽고 쓰고 남의 시도 좀 읽어볼 시간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고만 말한다. 이명재 할머니는 오직 배우는 것만이 부럽다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고, 잠 안 오면 책 읽어야지 뭐 하냐고 말한다.”(정혜윤, 앞의 글) 결국 읽고 쓰고 배울 장소와 시간의 확보가 최우선의 고민거리인 것이다. 시창작 수업은 두 할머니에게 ‘시인의 고뇌’를 학습시킨 것이 아니라 말하려는 의지와 말할 수 있는 감성적 역량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정혜윤은 또다른 일화를 소개한다. “정반헌 할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녀가 요즈음 매일 외치는 구호가 있다. 바로 이 구호다. ‘이대로 늙을 수는 없다!’ ‘내 가슴속엔 젊음만이 있다.’ 그녀는 이 구호를 노트북 앞에도 붙여놓았다. 글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이 구호를 보고 맹세한다. 살아오면서 시 비슷한 것을 써본 적은 없어도 그녀는 다른 것을 써보기는 했었다. 쇠죽을 끓이다가 막대기로 쇠죽에다가, 밥을 짓다가 부지깽이로 흙바닥에. ‘나는 왜 이럴까?’ ‘달아, 달아 너는 내 맘을 아니?’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니?’ ‘나도 교복 입고 학교에 가고 싶구나.’ 이런 것들이었다. 부모에게 말하면 부모가 속상할까봐 친구에게 말하면 미쳤다고 할까봐 속에 담고만 있던 말들이 쇠죽의 뽀글거리는 거품 위에, 부엌의 흙바닥 위에 쓰였다가 사라져갔다.”(정혜윤, 앞의 글) 그렇다면 시창작 수업은 그들이 가져보지 못했던 새로운 말하기의 의지와 역량을 부여했다고 볼 수 없다. 시창작 수업은 그들이 이미 구사해왔던, 오래전에 부엌바닥에 씌어졌다가 사라져간 말하기를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하게끔 도와준 것이다.

22) 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189~90면.

23) 신형철, 앞의 글 385면.

24) 질 들뢰즈, 앞의 책 19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