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이집트의 새로운 소설
도시의 변화와 서사형식
싸브리 하피즈 Sabry Hafez
영국 런던대학 아시아・아프리카대(SOAS) 현대아랍문학 및 비교문학 교수. 저서로 The Genesis of Narrative Discourse, The Modern Egyptian Short Story 등이 있음.
기획의 말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에서 촉발된 시민혁명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재스민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이 연쇄반응적 시민봉기에 대한 다양한 각도의 해석작업도 나라 안팎에서 활발하다. 본지는 우리 나름의 대응으로서 싸브리 하피즈의 평론 「이집트의 새로운 소설: 도시의 변화와 서사형식」을 싣는다. 국내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싸브리 하피즈는 현대아랍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아랍권 문학을 서방독자에게 심층적으로 소개해온 활동으로도 성가가 높다. 「이집트의 새로운 소설」에서도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작금의 북아프리카 및 아랍세계의 시민혁명이 평지돌출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모순들이 축적되고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태임을 1990년대 중반 무렵에 대거 등장한 이집트—이집트에만 국한되지는 않는—신예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아랍세계의 시민혁명을 한발 앞서 문학비평으로 예감한 듯한 느낌마저 주는 이 글은 90년대 작가들의 작품이 이집트 사실주의문학은 물론, 서구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모더니즘문학과 어떤 의미에서 구분되는가를 상세한 작품분석을 통해 예시한다. 또한 원초적 폭력, 좌절과 소외, 삶의 방향상실 등으로 점철된 이들 작품의 철저한 전망부재가 어떤 맥락에서 현실변혁을 추동하는 민중의 잠재력과 연관될 수 있는가를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하피즈의 이러한 비평은 이집트 카이로라는 역사적 시공간에 대한 통찰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흥미를 끄는 것은 카이로의 연조가 상이한 도시들과 서사형식의 상동관계를 추적한 대목이다. 글쓰기의 내용 및 형식을 물리적 환경과 함수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저자의 철학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단적인 예로 마구잡이로 개발되어 온갖 종류의 ‘막다른 골목들’을 양산한 카이로의 무계획도시와 90년대 신예작가들의 어지럽고 봉쇄된 서사구조의 상동성(相同性)을 짚어내는 해석이 그렇다. 결론의 마지막 문장, 즉 “‘폐쇄된 지평의 소설’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장르인 것이다”가 간명하게 집약하고 있듯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재 이집트 상황에서 분투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그런 현실상황을 충실하게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기존 소설미학에서도 탈피한 서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는 것이 주된 논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집트의 젊은 작가들이 검열받고 판금되고 또 해외로 망명하는 일련의 사태도 문학의 ‘살아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반증이다. 「이집트의 새로운 소설」에서 촛불항쟁과 용산참사의 기억이 생생한 오늘의 한국문학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그 살아 있음을 증언하는 저자의 메씨지가 실감나기 때문이다. 끝으로 번역을 맡아준 이일수 교수와 감수에 애써준 서정민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께 감사드린다.
유희석・편집위원
*
한때 아랍세계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던 카이로는 이제 이 지역의 사회적 정화조 비슷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 거대도시의 인구는 약 1700만명으로 불어났고, 그 절반이 구시가지와 식민지 시절의 구역을 에워싸며 마구잡이로 늘어선 판자촌에 거주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정권의 자유화정책—인피타흐(infitah) 혹은 개방정책—은 개발주의모델의 붕괴, 심화되는 농업위기 및 가속화된 이촌향도(離村向都)와 맞물려 프랑스인들이 ‘버섯도시’라고 명명한 드넓은 지역을 만들어냈다. 아랍어로 알-마둔 알-아슈와이야(al-madun al-ashwaiyyah)로 불리는 이 지역은 ‘무계획도시’로도 풀이될 수 있다. 여기서 뒷 단어 알-아슈와이야의 어근은 ‘우연’을 뜻한다. 이 지역은 국가가 값싼 영구임대주택 공급을 포기한 후에 개발되었고 이 땅을 넘겨받은 민간개발업체들은 고수익을 창출하는 중산층 또는 준상류층을 위한 집을 짓는 데 주력했다. 빈민계층은 이 사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나 결과는 형편없었다.
지난 30년간 이집트 도시팽창의 60퍼센트는 ‘무계획 거주지’가 차지한다. 이 구역들은 가장 기본적인 상하수도시설이 부족하다. 도로는 응급차량이나 소방차가 드나들 만큼 넓지 못하고 어떤 곳들은 고대도시 메디나의 골목길보다 비좁다. 건물이 아무렇게나 늘어서 있는 탓에 막다른 골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사전계획이 허술하고 택지가 부족한 탓에 녹지나 광장이 들어설 틈이 전혀 없다. 이 지역의 인구밀도는 슬럼가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높다. 인구과밀—어떤 동네는 방 하나에 일곱명이 사는 식으로—은 정상적인 사회적 경계를 붕괴시키기에 이르렀다. 온식구가 단칸방에 살다보니 근친상간이 만연했다. 과거에 근절되었던 질병들, 예컨대 결핵이나 천연두가 지금 퍼지고 있다.1)
1990년 이후 성년이 된 세대는 삼중의 위기, 즉 사회경제・문화・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집트 인구는 1980년 이래 거의 두배로 뛰어 2008년에 8100만명이 되었는데도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예산은 전혀 늘지 않고 있다. 문맹률이 솟구쳐 학교는 재정지원이 절실한 상태다. 학생이 과밀한 대학에서 저임금 강사진은 학점을 높여주는 댓가로 학생들로부터 돈을 갈취하여 소득원으로 삼는다. 건강, 사회보장, 산업기간설비, 교통 같은 다른 공공써비스 부문도 나을 것이 없다. 도적떼 같은 지배계층과 그 패거리가 자행하는 공공부문의 약탈로 인해, 사회구조는 일그러지고 공룡에 비견될 괴물 형상—하나의 작은 머리, 즉 엄청난 부를 소유한 소수의 상류층이 끝없이 몸집을 불려가는 빈민층과 불만세력 위에 군림하는—이 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청년실업률은 75퍼센트를 넘어섰다.
한편 문화부문은 편협한 전시주의적 무대로 변질되었고, 공적 검열관들—문화부 장관으로 장기 재직한 파루크 후스니(Farouk Husni, 2011년 시민혁명 직후 물러남—옮긴이)가 대표적이다—과 특히 의회와 상업성 신문에서 자임하고 나선 사적 검열관들이 장악하고 있다.2) 정치부문의 경우, 1981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긴급조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부패한 의회가 매년 어김없이 갱신하고 있다. 악명높은 이집트의 수형제도는 ‘특별송환법’(테러혐의자 등을 고문 등이 가능한 국가로 무단 이송하는 미 CIA의 조치—옮긴이)을 따르는 미국과 영국, 여타 유럽 국가의 국민들에게도 적용돼왔다. 1979년 사다트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에 일방적으로 합의한 이래 이집트 국민의 정서는, 외세와 결탁하여 미국과 이스라엘이 행한 최악의 잔혹행위, 그리고 그에 따른 전쟁—레바논 침공, ‘사막의 폭풍’ 작전,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점령—을 ‘사실상’ 지원해온 정치적 지배집단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역 강국으로서의 이집트가 주변화됨으로써 젊은 세대의 좌절과 수치심은 깊어지고 있다.
새롭게 괄목할 만한 젊은 이집트 작가들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같은 불길한 현실에서다. 이들의 작품은 확립된 규범과 근본적으로 단절되었고, 아랍문화와 그 사회에 대해 일련의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다. 형식면에서 이 작품들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강렬한 질문, 그리고 모든 것이 영락해버린 불합리하고 기만에 찬 현실을 반영하는 서사적·언어적 파편화를 특징으로 한다. 분량은 대개 150면을 넘지 않을 정도로 짧은 편이며, 이집트 사실주의 소설의 전형인 세대가 이어지는 대하소설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고립된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인다. 그 서사는 묘사되는 세상에 조롱의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그 속에는 어떤 위기의식 같은 것이 스며 있다. 주인공들은 어떤 변화도 도모할 힘이 없이 현재에 갇혀 있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주자로는 싸미르 가리브 알리(Samir Gharib Ali), 마흐무드 하미드(Mahmud Hamid), 와일 라자브(Wail Rajab), 아흐마드 가리브(Ahmad Gharib), 문타씨르 알-까파슈(Muntasir al-Qaffash), 아티프 쑬라이만(Atif Sulayman), 마이 알-틸미싸니(May al-Tilmisani), 야씨르 샤반(Yasser Shaaban), 무스타파 지크리(Mustafa Zikri), 누라 아민(Nura Amin) 등이 있다. 지금까지 100여편은 족히 넘는 이런 유형의 소설이 출간되었다. 1995년 무렵에 처음 등장한 이래, 이들 작가군에게는 ‘1990년 세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집트 문학계는 사실상 이구동성으로 이들 작품을 비판했다. 영향력있는 카이로의 신문 『알-아크바르』(Al-Akhbar)와 그 자매주간지 『아크바르 알-아다브』(Akhbar al-Adab)를 선두로, 문학계는 오랫동안 이 신진작가군에 반대하는 운동을 지속해왔다. 주요 문학월간지 『이브다』(Ibda)는 처음부터 이들 작품의 출판을 거부했다. 신진작가들에게는 형편없는 교육, 허무주의, 방향성 상실, 공공 현안에 대한 무관심, 육체에 대한 강박적 집착, 빈약한 문체, 부실한 문법, 부적절한 서사기술 그리고 완전한 이해불능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 일군의 작품과 이들 작품이 당대 아랍문학에 제시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한 소상한 비평적 검토는 거의 없었고, 작품이 발생한 좀더 넓은 정치사회적 맥락을 탐구하는 지속적인 노력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본론에서 나는 이 새로운 이집트 소설의 범위와 그 공통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러한 작품을 장르적 분류의 바깥에서, 즉 자유롭게 떠다니며 장르적 분류를 가로지르는(trans-generic) 텍스트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나는 이 새로운 소설들이 실상 일련의 뚜렷한 서사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이 특징은 이전의 사실주의나 모더니즘 형식 모두와의 결별을 시사하는 것이며 텍스트가 외부세계와 관련되는 방식, 즉 재현규칙이 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작품의 실제적 배경이 무엇이든 카이로에 늘어선 빈민가와 이들 소설이 형식상의 상동관계들(homologies)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3)
새로운 장르?
이집트 소설에서 이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 것은 1995년에 후스니 쑬라이만(Husni Sulayman)의 주도로 소규모 독립출판사 다르 샤르끼야트(Dar Sharqiyyat)에서 문제의 단편집 『원안의 선들』(Khutut al Dawair)을 발간하면서부터다. 이 단편집의 작가들, 와일 라자브, 아흐마드 파루끄(Ahmad Faruq), 하이삼 알-위르다니(Haytham al-Wirdani)와 몇몇 작가들은 아랍문어체보다는 구어체에 훨씬 가까운 꾸밈없는 문체, 그리고 ‘큰 현안’에서 벗어나 소소한 일상사에 주목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이는 싸미르 가리브 알리의 첫소설 『잡상인』(Al-Saqqar, 1996)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의 반영웅적 주인공(anti-hero) 야흐야(Yahya)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국영공장이 민영화되는 날벼락을 맞자 정리해고 되기 직전이다. 작품의 배경은 1차 걸프전에 이집트가 참전한 시기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매춘이라는 주제가 반복된다. 야흐야는 자신의 지치지 않는 성욕에 몰두한다. 하지만 만족을 위한 그의 여정에는 짙은 절망이 배어 있다. 이 단편에는 비슷한 연령대의 뿌리뽑힌 인물들—수단과 소말리아 이주자, 정치적 망명자, 난민, 사무직 노동자—로 가득하다. 야흐야의 친구들은 모두 직업이 없고 인생에서 방향성이나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부유한 산유국—젊은 소말리아인 아담이 말한 대로 어떤 가문에서 이름을 따온 나라(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디’는 가문이름임—옮긴이)—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꿈은 걸프전으로 인해, 그리고 오일붐의 종식으로 날아가버렸다. 남성인물들의 세련되고 냉소적인 겉모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금도 바꾸지 못하는 무능으로 말미암아 거짓된 것임이 드러난다.
세명의 강력한 여성인물은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운명으로 고통을 겪는다. 시골여성인 마스투라(Mastura)는 정조를 유린당했다는 낙인이 찍힌 뒤 카이로로 도망친다. 이본느(Yvonne)는 교육받은 중산층 콥트(기독교를 믿는 이집트 원주민—옮긴이)이며 미국에 사는 옛 애인이 영주권을 보내주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린다. 멜린다(Melinda)는 프랑스에서 온 연구원으로 이집트 여성의 실태를 조사하는 중이다. 아랍여성들의 상황을 ‘복수’해주겠다는 의도로 조사에 착수했지만 자기의 해방된 처지를 한껏 과시하는 인물이다. 사랑을 나누면서 자기 조상들의 추문을 잔뜩 들려주는 야흐야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뽈레옹의 함대가 알렉산드리아의 문전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야흐야는 식민지 시절의 ‘제2도시’였던 자말리크(Zamalek)에 있는 멜린다의 호화 아파트와, ‘제3도시’ 알-마둔 알-아슈와이야에 사는 주변부적 처지의 친구들 사이를 오가는데, 이를 통해 인접한 두 세계의 극명한 대조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여인의 널찍한 아파트에서는 어찌 할 바 몰라 조종당하면서도 미로 같은 빈민가 골목은 능숙하게 누빈다. 언제쯤 친구 집을 찾아가야 그를 만날 수 있는지도 거기서는 훤히 꿰고 있다. 마스투라는 ‘개의 늘어진 혓바닥 같은 발코니에서 타르가 뚝뚝 떨어지는, 비좁은 골목길 안의 높고 가느다란 집’ 일층 방에서 마마 지지(Mama Zizi)라는 나이든 룸메이트와 같이 산다. 마마 지지는 말수가 적고 돌아다니지도 않지만 ‘내가 마스투라와 쎅스를 할 때면 그녀는 벽으로 얼굴을 돌리곤 했다.’ 고장난 문 밖에서는 일층에 사는 사람들이 싸우고 욕을 해댄다. 소설의 문체는 거칠고 사실적인데, 예컨대 그 동네 경찰서에서 벌어진 집단 강간사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마치 매일 일어나는 뻔한 사건인 양 묘사한다. ‘마스투라는 침울하고 기운이 쭉 빠진 채 대낮에 돌아왔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 입을 열게 애써보았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잠을 자도록 놔두었다가 잠에서 깨어난 그녀를 나는 꼭 안아주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치 무언가 다른 결과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억압적 관계들을 극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는 전혀 없다. 그저 그들의 견딜 수 없는 삶, ‘억압되고 지친’ 삶을 기록할 따름이다. 여러명의 화자, 중요문장들의 반복과 일종의 순환구조는 거울들이 달린 서사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행동이 세가지 상이한 시간대에 포착되는데, 먼저 화자에 의해 예상되고 다음으로 어떤 다른 인물이 상상해내며 그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에 묘사되기도 하는 식이다. 그 결과, 도저히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겠다는 강한 실감을 자아낸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잡상인』에 대해 『알-아흐람』(Al-Ahram)지의 칼럼니스트 파흐미 후와이디(Fahmi Huwaydi)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이 작품을 두고 ‘이슬람이든 기독교든 종교적인 모든 것과 일체의 도덕적 가치를 파괴하는 악마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글쓰기’라고 하면서 판금을 요구했다. 이 작품을 출간한 이집트출판협회는 책을 회수했고, 저자인 알리는 프랑스로 피신했다. 그의 두번째 소설 『파라오』(Firawn, 2000)에서는 배경이 도시에서 시골로, 즉 이집트 남부지방 가운데 인구가 가장 과밀한 미누피야(Minufiyya)라는 시골지역으로 바뀌었다. 절름발이인 좀도둑 이쌈(Isam)이 그의 친구이자 동료 죄수인 싸이드(Sayyid)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이 친구의 별명이 파라오다. 파라오는 이집트의 정치경찰 마바히스(Mabahith)에 의해 시골의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로 억울한 도망자의 인생을 산다. 그는 생계를 꾸리고 굶주린 식솔을 먹여살리려고 하면서 끊임없이 도망친다. 두 남자는 이집트의 가난한 사람들이 교통편으로 애용하는 열차의 지붕 위로 다니는데, 그러던 중 싸이드가 기차에서 떨어져 서른 초반의 나이에 죽는다. 서사는 파편화되어 있고, 자기반영적이다. 주변으로 내몰려 언제라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이야기 서술을 통해 재연된다. 이 작품도 미누피야 지역 자체가 그렇듯이 온갖 인물로 가득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차적 플롯이라 할 것들이 풍부한 반면, 굵직한 플롯은 없다. 이 작품은 한 부패한 사회를 근과거(近過去)라는 거울에 비춰 그려낸 한폭의 그림과도 같다.
이들 작품의 뚜렷한 특징 하나는 어떤 정지된 순간 속에서 손에 잡힐 듯한 일상의 세부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와일 라자브의 다섯 장으로 구성된 소설 『공기방울 안에서』(Dakhil Nuqtah Hawaiyyah, 1996)는 가족대하소설의 삼단논법에 기대지 않고 ‘빙산의 일각’에 주력함으로써 삼대(三代)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파라오』에서처럼 이 작품 역시 이집트의 시골지역을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극적이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은 몇개의 사건들이 섬세한 탐구의 대상이 된다. 이 파편들을 통해 독자는 작중 가족의 궤적과 인물들의 운명을 재구성한다. 첫장 「카메라의 찰칵거림」은 중립적 재현을 시사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암묵적 풍자가 가미되어 있고 간결하고 절제된 산문으로 그런 재현의 효과를 상쇄한다. 1912년 발간된 이집트 최초의 위대한 소설이라 할 하이칼(Haykal)의 『자이나브』(Zaynab, ‘사막의 꽃’이란 뜻으로 아랍여성의 이름에 쓰임—옮긴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첫장면은 주인공 무함마드 유수프(Muhammad Yusuf)가 새벽녘에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독자는 곧 그의 세계가 자이나브의 세계, 즉 활짝 열린 지평의 세계와 정반대에 놓여 있음을 깨닫는다. 무함마드는 진보에 대한 부친의 꿈, 그 마지막 단계를 목도하고 있지만 이집트의 야망이 좌절된 쓰라림 속에서 산다. 그의 아들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파편화된 서사는 가족의 해체, 그들이 품었던 포부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집트인의 희망이 좌절되었음을 반영한다.
한편 혼란스런 카이로의 ‘제3도시’를 배경으로 마흐무드 하미드(Mahmud Hamid)의 『금지된 꿈』(Ahlam Muharrama, 2000)은 각기 다른 시점과 수많은 화자를 복잡하게 교차시키면서, 예로부터 강자를 의미하는 푸투와(futuwwa, 전통적인 청년조직을 가리키며 남성다움이란 어원을 가짐—옮긴이)의 귀환을 자세히 다룬다. 그 옛날 푸투와는 기사도와 관대함의 규범에 얽매여 있었지만 새로운 푸투와는 탐욕과 공격성, 종교적 편견으로 똘똘 뭉친 폭력배에 불과하다. 「1978년 9월 17일 일요일」—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조인한 날—이라는 장에서 파르하(Farhah)는 카프르 알-탐마인(Kafr al-Tammain) 구역의 푸투와 우와야스(Uways)에게 겁탈당한다. 아랍소설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여성은 그 나라를 상징한다. 파르하의 가족은 감히 푸투와에게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딸을 살해하여 가족의 더럽혀진 명예를 씻어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다시금 걸프전을 배경으로 삼는다. 파리스(Faris)라는 젊은 기자는 걸프만 현장으로 복귀하기 전 마지막 밤을 카이로의 어느 술집에서 친구들과 보낸다. 작별인사를 나눌 때 지나온 인생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그는—화자인 ‘나’는 여기서 주인공을 ‘너’로 지칭한다—영국 제국주의의 잔해인 카스르 알-닐(Kasr al-Nil) 다리의 어느 사자 석상 아래에서 구토한다. 폭동진압 경찰차가 그들 옆에 멈추어선다. 네명의 젊은 남자가 모여 있다면 이집트의 영구적 긴급조치에 따라 불법집회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파리스는 반항한다. ‘너는 숨을 헐떡이며 침을 뱉고는 말하지, 그냥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하게 놔두란 말이야!’ 또다른 폭동진압 경찰차가 오더니 무장한 안전요원들을 토해낸다.
너는 널 모욕한 자들에게 그대로 되갚아주고 싶지만 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군인들이 너희를 에워싸고 등에 총부리를 겨누는데, 웬 고위급 장교가 차에서 내리자 널 때린 군인은 그치한테 거수경례를 붙이지. 고위급 장교가 그 군인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려.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개머리판으로 널 때리기 시작하지. 넌 비명을 질러. 너희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그 어느 누구도……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반면 아흐마드 알-아이디(Ahmad al-Ayidi)의 『압바스 알-압드 되기』(An Takun Abbas al-Abd)에서 분열적 화자 주인공은 서사의 한계로부터 아예 벗어나려는 다른 인물들의 시도에 직면한다. 작중 화자는 그의 친구 또는 또다른 자아인 압바스 알-압드가 주선한 소개팅을 하다가—사실은 두개의 만남임. 이 세계에서 모든 것은 짝지어 있음—‘전화해요’라는 지시문과 알-아이디의 실제 휴대폰 번호 ‘010-64-090-30’이 카이로의 쇼핑몰 벽에 적혀 있음을 알게 된다. 표준 아랍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잡종 길거리 이집트 방언으로 씌어진 이 신랄한 작품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라는 진술로 시작된다. 결국 이 연쇄적 표리부동성은 온나라가 처한 표리부동성에 기초해 있다. 화자이자 주인공은 ‘네가 타인에게 한 말을 믿지 마라’며 그의 또다른 자아에게 경고한다. ‘이집트에 1967년 패배(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진영의 패배를 가리킴—옮긴이)의 세대가 있다면, 우리는 그 이후 세대이다—잃을 게 없는 세대인 것이다.’
분열되고 자기반영적인 서사가 이 새로운 유파에 속하는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지배한다. 쏘마야 라마단(Somaya Ramadan)의 주목할 만한 작품 『나르시수스의 잎들』(Awraq al-Narjis)은 이 작가군에서 19세기 이래로 근대 아랍문학의 최대 관심사인 서양과의 교류라는 고전적 주제를 다룬 극히 드문 사례다. 이 부류의 대다수 작품들이 소외된 중산층이나 하층민을 다룬 반면, 이 소설은 드물게도 엘리뜨의 세계를 다루며 산산이 쪼개어진 정체성의 모자이크를 통해 그 세계를 포착한다. 마찬가지로 주목할 만한 누라 아민의 첫 소설 『텅빈 장밋빛 드레스』(Qamis Wardi Farigh, 1997)의 경우, 소외되고 파편화된 자아를 생생히 묘사한다. 내가 수고본(手稿本)으로 접한 그녀의 두번째 소설 『텍스트』(Al-Nass, 1998)는 너무도 과감하고 실험적이어서 출판사를 찾기 어려웠다. 세번째 소설 『시계 수집가의 두번째 죽음』(Al-Wafat al-Thaniya Li-Rajul al-Saat, 2001)은 이 신세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하다. 이 작품은 이집트 중산층의 해체를 다루는데, 그중 극히 소수가 신흥 엘리뜨 기업가로 편입한 반면 나머지 대다수는 방황하던 시기를 그려낸다. 주요인물은 작가의 실제 아버지이기도 한 압드 알-무트알 아민(Abd al-Mutal Amin)이다. 누라 아민 그 자신이 화자이자 주인공의 딸로 등장하는데, 그녀에게는 부친상 직후 유일한 유품으로 수집된 손목시계들이 남겨진다. 이 작품은 네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시간’(Hours)에서는 압드 알-무트알 아민의 인생 가운데 다섯개의 시간대를 추려낸다. 그 첫 시간은 1970년에서, 마지막 시간은 1990년대 후반에서이다. ‘분’(Minutes)은 그의 임종 순간과 장례식에 관한 기록이다. ‘초’(Seconds)는 가장 길고 감동적인 부분으로, 누라는 아버지의 자잘한 일상을 통해 건축 하청업자였던 그의 직업의 궤적을 새로이 구성해낸다. 예컨대 아버지의 자동차들, 1970년대 소형 이집트산 람쎄스부터 80년대의 피아뜨, 90년대의 메르쎄데스, 사막에서 고장나버린 그 차까지—아민은 다른 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매서운 겨울밤을 꼬박 새우며 떠돌아다녀야 했다. 마지막 부분인 ‘시간 바깥에서’(Outside Time)는 인피타흐 시대,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눈부신 희망을 품었으나 만연한 부패로 인해 파멸한 애국심 넘치는 가장에 대한 기억을 복원한다. 어떤 장면에서 아민은 관공서가 밀집한 구역의 가장 큰 공사현장에 있는 높은 발판 위로 그의 딸을 끌다시피 데리고 올라가고, 그곳에 그들은 갇히고 만다. 누라는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움직이질 못하고 자신을 아들이라도 되는 양 그 위험한 곳으로 데리고 간 아버지를 원망한다. 아민은 임금지불을 요구하는 노동자들과 격론을 벌인다. 그가 상부에 뒷돈 바치길 거부한다는 것은 곧 그가 임금을 절대 받지 못하리라는 것, 그리고 인피타흐 시절의 많은 공사계획이 그러했듯이 건설중인 그 건물도 결코 완공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이 다양한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구사하는 전략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분명하게는, 하나같이 사실주의 소설의 단선적 서사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그 대신 서사의 파편들을 병치하는 기법을 쓰는데, 이것들은 서사를 관장하는 어떠한 위계나 통일적 플롯 없이 공존한다. 『잡상인』에서 야흐야의 성적 정복이나 『금지된 꿈』에서 폭동진압 경찰이 가하는 무의미한 폭력 같은 것들이다. 둘째로는 사적인 것이 더이상 공적인 것과 변증법적 긴장관계에 놓이거나, 사실주의 또는 모더니즘 소설에서처럼 인물의 내면적 삶을 통해 중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두 요소는 직접적인 적대관계에 있으며 그 결과, 내면적 삶이라는 허구적 공간은 축소된다. 그와 동시에 인물들은 대체로 사회환경 속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자신을 경험한다. ‘우리는 한지붕 아래 이름이 비슷한 이방인들과 살지만, 결국 고독한 세대이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 이 사람은 내 어머니, 저 사람들은 내 형제자매가 맞다. 그러나 식구들 속에서 나는 마치 외국인이 자기가 묵는 호텔의 투숙객을 만나듯 지낼 뿐이다’라고 『압바스 알-압드 되기』의 화자는 말한다. 셋째로 이 소설들은 인식론적 질문들, 예컨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지, 그 속에서 한 개인의 위치를 어떻게 정할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으며, 사실주의 소설에서 보이는 선험적 출발지점들(a priori points for departure)도 전혀 없다. 차라리 이 새로운 아랍소설들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이 서사의 세계란 무엇인가? 이 텍스트들은 어떤 존재양식을 창출하는가?
이 새로운 장르는 모더니즘 소설처럼 텍스트가 밟아가는 내적 역동성을 그대로 드러내려 애쓰면서 그 자신의 텍스트를 해체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화자들은 틀렸을 수 있고 둘 이상이며 다성(多聲)적이다. 그러나 대개의 모더니즘 소설과는 달리 이들은 행위의 결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두는 ‘자동사형 서술’(intransitive narratives, 주체가 행하는 바의 대상보다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는 서술기법—옮긴이)을 택한다. 마지막으로, 이 텍스트들에서 과거의 소설관행이 없어졌다는 것은, 현실에 어떤 대안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게 아니라 제반 현실에 덧씌워진 일체의 합법성을 벗겨내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문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들은 일상을 표현하는 어휘를 재검토함으로써 그런 삶의 공허함을 입증하고자 한다. 이런 점은 응결성과 균형을 담아낸 수사적 비유로 그득한 아랍고전의 복잡한 리듬을 전혀 습득하지 못한 실패작으로 치부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텍스트들은 오히려 그러한 과거의 폐허를 딛고 파편의 미학을 주조하려는 시도로 읽혀야 마땅하다. 이러한 서사의 세계는 공식적인 문학담론의 잔해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장르의 화자와 주인공들은 기만에 찬 불합리한 질서에 갇힌 채 방향을 상실한 상태다. 그들이 내뱉은 말은 그들이 처한 세상만큼이나 불안정하다.
도시와 필경사
문학형식과 사회현실을 중재하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미묘하고 간접적이며 복잡하기 마련이다. 이집트 소설의 서사전략과 카이로의 변화하는 도시구조 사이의 일련의 상동성(相同性)을 제시하는 일이 양자의 일대일 조응을 상정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그렇긴 해도 케디브 이스마일(Khedive Ismail)—그는 오쓰망(Haussmann)이 프랑스 수도를 재설계할 당시 빠리 유학생이었다—이 출범시킨 1870년대 근대화 기획과 현대 이집트 소설의 전개를 놓고 볼 때 둘 사이의 어떤 진화적 관계를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스마일은 1300년간 조금씩 느린 속도로 개조되어온 고대도시 메디나의 서북쪽 지역에, 널찍한 도로와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주요 간선도로들, 오페라 하우스와 아즈바키야(Azbakiyya) 공원이 있는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했다. 유서깊은 칼리즈 알-미스리(Khalij al-Misry) 도로가 신구 두 도시의 경계선이 된다. 두 도시는 뚜렷이 다른 세계관과 행동방식을 각각 대표하는데, 인구가 밀집한 메디나가 전통질서와 보수적・종교적 외양을 지닌 반면에 ‘제2도시’는 진보・근대성・이성을 믿는 지도자의 신념을 웅변한다. 이 신념은 프랑스 계몽주의에 깊이 감화받은 리파아 알-타흐타위(Rifaah al-Tahtawi)와 그 제자들이 믿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는 무함마드 알-무와일리히(Muhammad al-Muwailihi), 무함마드 후싸인 하이칼(Muhammad Husain Haykal), 타하 후싸인(Taha Husain), 그리고 타우피끄 알-하킴(Tawfiq al-Hakim)에서부터 야흐야 하끼(Yahya Haqqi)와 나깁 마흐푸즈(Naguib Mahfouz)에 이르는 위대한 근현대 이집트 작가들의 글에 담겨 있다. 인간은 개인과 집단 모두에서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 미란돌라(Mirandola)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의 우리는 우리가 되고자 선택한 우리다’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현대 아랍소설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하이칼의 『자이나브』에서 중심주제는 ‘그녀가 되기 원했던 사람’이 될 수 없었던 자이나브의 실패였다. 1947년 출간된 마흐푸즈의 『미다끄 골목』(Middaq Alley)에서 하미다(Hamidah)의 딜레마 역시 ‘그녀가 마음먹었던’ 신여성이 될 수 없다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사실주의 기법의 소설을 개척한 많은 소설가들—무와일리히, 하킴, 하끼, 마흐푸즈—은 구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들의 문학적 재능은 제2도시의 환경에서 계발된 것이다. 이들은 두 세계의 대조적인 리듬과 비전을 담아내며 두 세계를 이어준 통로에서 탄생했다. 메디나에서 신도시로 이주하려면 댓가를 치러야 했다. 『미다끄 골목』에서 하미다는 구도시 골목의 안식처를 벗어나자마자 영국군을 상대하는 매춘부가 된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마흐푸즈의 위대한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은 분투에도 불구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심지어는 더 쇠락하며, 그들 꿈의 좌절이 작품의 실질적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인물들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바꾸기 위해 투쟁한다. 마흐푸즈의 『카이로 삼부작』(Cairo Trilogy, 1956~57)이 지닌 위력의 상당부분은, 주인공 카말(Kamal)이 부친이 소원하는 바가 아니고 스스로 원하는 자신을 쟁취하려는 싸움에서 비롯한다. 이 작품에 내재된 근대성의 전제들을 볼 때 우리는 쇠퇴하는 가부장적 권위, 아들의 반항과 손자들의 자유로운 선택, 그리고 이들 각각의 상충하는 이념이 작품의 주제임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전제들은 마흐푸즈 이후 유수프 이드리스(Yusuf Idris), 압드 알-라흐만 알-샤르까위(Abd al-Rahman al-Sharqawi), 파트히 가님(Fathi Ghanim), 라티파 알-자야트(Latifa al-Zayyat)로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 세대’로 이어지는 아랍소설의 궤적 저변에 깔려 있다. 그리하여 널찍한 간선도로들—메디나의 비좁은 골목길과 대조되는—이 있는 제2도시의 도시구조와, 넓은 사회관계망 속에서 플롯을 전개하는 이 사실주의 소설의 직선적인 구조 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카이로의 통치자들은 까스르 알-두바라(Qasr al-Dubarah) 서쪽으로 한층 더 계획적인 도시인 ‘가든 씨티’(Garden City)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이들에게 이집트를 떠나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제2도시’의 성난 중산층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기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도시의 패턴은 비록 현대 도시설계의 원칙을 기초로 삼고 있긴 해도 단선적이지 않으며 원형과 미로로 이루어졌다. 격리공간으로 의도된 이곳이 독립 이후, 즉 국가개발계획의 여러 모순으로 좀더 복잡하고 변형된 형식들이 필요해진 시기가 되어서야 자신의 문학적 표현을 찾아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 결과 내면지향성, 순환구조, 화자의 문제적 위상을 담아내는 모더니즘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나 1960년대 이집트 소설은 사회현실에는 대단히 비판적이었지만 그 본질상 합리적 계몽주의 서사였으며 진보의 이념이 여전히 유효했다.4) 이로써 다시금 도시의 형식과 병치관계가 생겨났다. 60년대 중반까지 근대적인 카이로가 구 메디나를 앞지르고 있었고, 그 전통도시의 상대적 쇠퇴는 나쎄르 체제하에서 세속주의가 득세함에 따라 전통규범의 영향력이 약화된 데 따른 것이었다.
근대성에 등돌리기
이런 상황은 1990년 세대가 도래하기 훨씬 전부터 근본적 변형을 겪고 있었다.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이성의 지배’라는 개념이나 인간의 인식론적 중심성을 거스르고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주변부로 밀려난 젊은이의 일상은 굴욕과 상징적 폭력으로 채워졌다. 장기화된 실업은 누구도 자신을 원치 않으며 청춘이 헛되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냈고, 이는 부조리한 죄의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을 순진하게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출발점은 냉소와 좌절이었다. 이전 세대가 집단적 해결책에 쏟았던 희망은 국민문화의 바로 그 뼛속까지 스며든 부패 때문에 거짓이 되어버렸다. 이집트에서 후기 근대의 전체적 징후들은—언어적인 것에서 시각적인 것으로의 중심 이동, 상업화된 대중매체의 지배—한편으로는 국가에 의한 검열, 다른 한편으로는 겉만 그럴싸하고 부유한 와하비즘(Wahhabism, 꾸란의 교의를 고수하는 엄격한 이슬람주의로, 사우디에서 출현함—옮긴이)으로 인해 더 심화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아랍문학권에서 이른바 ‘추방의 환경’(manakh tarid)을 조직화하면서 입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떠들었다. 이 자체가 독립적인 문화적 실천에 해로운 분위기를 조장했고 그 과정에서 반체제 지식인들이 국외추방되었다. 뒤이은 정부들 역시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이는 캠프데이비드 협정 후 이집트가 소외되고 레바논 내전으로 베이루트가 파괴됨에 따라 발생한 문화공백을 채우기 위해 산유국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가 부상한 때와 시기가 일치한다.
똑같은 역학이 알-마디나 알-아슈와이야의 부흥에 깔려 있다. 카이로의 ‘제3도시’는 어떠한 전체적 설계도 없이 주거위기에 대한 미봉책으로 난개발되었다. 이는 시민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정부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끝내 사라진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 도시는 눈앞의 것들이 전략적이고도 장기적인 것들을 대체하는, 아니 부정하는 상황하에서 태어났다. 빈민굴의 막다른 골목으로 가득 찬 ‘제3도시’의 비합리성이 여기서 비롯된다. 두개의 거대한 비촌비도(非村非都)적 거주지역으로 구성된 이 ‘제3도시’는 시골풍경의 목가적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못 가진 채 ‘제2도시’의 계획화 도시로부터 후퇴하고 있음을, 즉 정치사회적 관계만큼이나 주택에서도 뚜렷한 목적 없이 근대 이전의 형식으로 회귀하고 있음을 뜻한다. ‘제3도시’의 난개발은 근대성에 대한 반동, 그리고 국가이데올로기의 기반이 되는 전통주의적 심지어 근본주의적인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이집트 정치문화의 광범위한 부패, 그리고 사회적・민족적 가치의 전도현상과도 관련된다.
이렇게 본다면 새로운 이집트 소설의 형식상 특징들과 ‘제3도시’의 난개발적 성격 및 그것이 대변하는 광범위한 곤경 사이의 여러 상동관계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첫번째 상동관계는 자기모순성에서 볼 수 있는데, 이 텍스트들은 독자가 자신을 소설로 대해주길 요청하는 동시에 그 소설이라는 형식에서 나오는 미학적이고도 장르적인 기대를 좌절시킨다. 이 작품들은 아랍인의 굴욕이 자리한 심층구조, 그리고 그 굴욕을 발생시키는 괴로운 사회적 맥락을 인식하고 있음을 예증한다. 이 작품들은 그 안에서 자기자율성이 매우 중요함을 주장하는 한편, 그 자율성의 모순들을 상징적 층위에서 해결하는 데 어떠한 에너지도 낭비하길 거부한다. 자기모순성은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는 텍스트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상정된다. 그로써 아랍세계의 권력구조와의 상동성이 비롯된다. 이 세계에서 국가의 권위는 자유의지와 자주적 기획을 갖춘, 국가적 논리에 따라 ‘타자’에 도전할 능력을 갖춘 실제 권력이 아니라 그 졸렬한 모방,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스스로 합법성이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세계의 국가권력은 권위를 한껏 부풀리고 권력의 허상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면서 그런 진실을 끊임없이 덮으려고 한다. 지난 삼십년간 등장해온 새로운 차원의 국내의 억압과 탄압은 이집트의 정치집단이 워싱턴 측의—이 외국 지배자에게 어떠한 존중도 받지 못하면서—강권에 전례 없이 굴종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이 새로운 소설의 ‘나’는 자신이 무기력하며 모든 지평이 폐쇄된 현재에 갇혀 있음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그 유일한 탈출 전략은 바깥에 실재하는 세상과 존재론적으로 유사한 서사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 서사세계는 외부 세상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기에 어떤 틈새, 즉 폐쇄된 지평에 일종의 파열을 형성해낼 수 있게 된다. 이 새로운 텍스트는 현실의 논리에 어떤 대안적 논리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그 현실의 응집력을 가로막고 독자가 채워넣을 간극과 불연속성의 지대를 창출한다. 그 자연적인 결과로서 서사적 파편화와 병치가 활용되며 이러한 기법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총체성을 거부한다. 또다른 결과는 플롯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다. 전통적인 소설의 주요 관심사라 할 중간부분을 생략하고 시작과 끝으로만 구성되어 삼단논법식 전개의 근간을 뒤흔든다. 이는 서술된 세계에 한층 더 깊은 동요를 일으키고 독자의 방향의식을 뒤흔들어 존재론적 딜레마를 심화시킨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화자의 권위가 감소했다는 인식을 암시한다. 설혹 독자에게 호소—예컨대 ‘전화해주세요’ 같은—한다 해도 대답을 들을 가능성이 없음을 화자는 알고 있다. 글을 쓰는 ‘나’가 텍스트를 통제하는 의식(意識)으로서의 지위를 더이상 확보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작가가 자신이 쓰는 작품의 화자를 더이상 신뢰할 수 없는 것은 작가와 화자 모두가 자주성과 존엄과 그 지역적 역할을 상실한 주변부 국가에 거주하는 종속자적(subaltern) 자아의 변종이기 때문이다. 그로써 위기가 발생하는바, 이때 글을 쓰는 ‘나’는 ‘타자’나 어떤 ‘대의’는 고사하고 자아와의 일체감을 갖기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안에서부터’ 외부현실을 마치 ‘나’의 본질적인 부분인 것처럼 전달하는 동시에 바깥에서, 즉 ‘나’ 자신의 하찮음에 어울리는 주변화된 자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랍의 새로운 소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현실의 가장 세부적인 것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세부적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폐쇄된 지평의 소설’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장르인 것이다.
번역 | 이일수・군산대 영문과 교수
--
* 이 글의 원제는 “The New Egyptian Novel: Urban Transformation and Narrative Form”이며, New Left Review 64, 2010년 7-8월호에 수록된 것을 번역했다. ⓒ Sabry Hafez 2010 / 한국어판 ⓒ 창비 2011
1) 기자(Giza)시의 무니라(Munira) 구역에는 2km2 반경내 약 60만명이 콩나물시루처럼 밀집해 있다. 기자시 서쪽 불라끄 알-다쿠루르(Bulaq al-Dakrur)와 슈르바지(Shurbaji) 구역에는 3km2 내에 90만명이 사는데, 이는 평균잡아 1인당 3m2인 셈이다. 1인당 표준 허용치는 30m2다.
2)Hafez, “The Novel, Politics and Islam: Hayda Haydar’s Banquet for Seaweed,” NLR 5, Sept-Oct 2000.
3) 이 새로운 서사형식은 일종의 범아랍권 현상으로 불릴 만하다.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튀니지, 모로코 등지에서도 이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새 장르가 발현된 사회문화적 맥락을 상세히 포착하고, 둘 간의 상동관계를 입증하기 위하여 논의를 이집트에 국한할 것이다. 따라서 아랍권 전체를 다루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지만 이러한 제한적인 사례연구 역시 이 지역 전반에서 일어나는 바를 설명해줄 수도 있다고 본다.
4)Hafez, “The Egyptian Novel of the Sixties,” Journal of Arabic Literature, VII, 1976, 68~84면. “The Transformation of Reality and the Arabic Novel’s Aesthetic Response,”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LVII, part I, 1994, 93~1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