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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동아시아1)와 분단한국, 현장경험과 몇가지 단상

 

 

이종석 李鐘奭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제32대 통일부 장관 역임. 저서로 『조선로동당연구』 『분단시대의 통일학』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북한-중국 관계: 1945~2000』 등이 있음.  leejong@sejong.org

 

 

젊은시절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만 해도 동북아정치학을 공부하리라 마음먹었다. 동북아정치가 무엇인지 머릿속에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시절이었지만, 공부를 하다보니 동북아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한국정치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정치를 공부하다보니 곧 우리 삶의 질곡 그 자체인 분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정치를 논하는 것이 너무 허구적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북한과 남북관계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뒤 20년간 동아시아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부족한 학문적 소양 덕에 연구영역을 북한-중국 관계 이상으로 확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연하게 찾아온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의 공직생활이 다시금 나를 동북아로 안내했다. 참여정부는 인수위 때부터 국가안보전략을 짜면서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번영이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는 인식을 가졌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정착과 평화번영의 동북아 실현을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웠다. 비록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시행착오도 있었고 부족한 점들도 있었지만, 공직생활2) 내내 북핵문제, 한미관계, 한중관계, 한일 역사문제 등을 주요 과제로 다루면서 이러한 정책방향이 정당했음을 깊이 느꼈다.

 

 

연동하는 동북아, 요구되는 새로운 전략

 

백영서(白永瑞)의 표현대로3) 확실히 동북아(동아시아)는 긴밀하게 연동중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난 그 연동의 모습은 천안함사태나 ‘중국위협’론이 오끼나와에서의 미군기지 이전 반대운동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처럼4) 대체로 부정적이다. 아직도 냉전의 잔재가 도처에서 이 연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냉전의 해체는 이 연동의 에너지를 갈등과 대립에서 평화와 협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예컨대,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남북한의 노력이 성과를 거둘 때마다 그것은 동아시아 곳곳에 화해와 협력의 파장을 일으킨다. 거꾸로 동아시아에서의 평화 증진은 군사적 대치뿐 아니라 정치, 이념, 경제 등에서 대결적・대립적 측면이 매우 큰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동아시아 협력과 통합의 노력이 이 지역의 제반 가치와 질서가 일정하게 공존하고 나아가 수렴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남북간 대립・대결적 요소들도 상대적으로 완화될 수 있는 기회를 맞는 것이다.5) 현재로서는 분단한국과 동아시아의 연동이 냉전회귀적 상호작용이 될지 아니면 협력과 공동체 지향으로 힘을 발휘할지 미지수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방치될 사안이 아니라 우리가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할 문제라는 점은 분명하다.

공직에 있으면서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평화번영을 동시적으로 사고하지 않고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계기는 냉전의 해체와 함께 찾아온 중국의 성장이었다. 경제 분야만 살펴보아도 중국의 성장이 우리의 생활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2008년말 기준으로 동북아 주요 국가들 간의 교역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의 수출대상국 123위가 역내국가인 중국・미국・일본이며, 일본 역시 수출대상국 123위가 중국・미국・한국이다. 중국은 수출대상국 중 미국・일본・한국이 125위를 차지했다. 지리적으로 동북아 밖에 존재하지만 동북아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수입대상국 147위가 중국・일본・한국이었다.6) 이처럼 동북아 역내국가간 경제교류는 엄청난 활력을 보이고 있다. 이런 교류의 활력은 경제를 넘어 사회・문화・인적 교류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변수는 중국과의 협력이다. 한국경제의 경우, 중국이 세계시장의 또다른 축으로 부상하면서 대중(對中) 의존도가 비약적으로 커졌다. 현재 중국은 한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가 되었으며, 이로써 기존의 한미동맹 중심의 대외전략마저 변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표 1> 한국의 중국, 미국, 일본에 대한 수출입 비중 추이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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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이 보여주듯이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8)의 대중수출 의존도는 2005년에 21.8%였으며 2010년에는 25%에 달해 미국, 일본, 유럽에 대한 수출을 합한 규모보다도 컸다. 탈냉전 초기인 1990년 대미수출이 29.7%였던 데 비해 대중수출은 0.9%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한중 경제관계가 얼마나 급격하게 발전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8년 일본의 총수출에서 중국에 대한 수출이 차지한 비중은 5.1%였던 데 비해 2010년에는 그 비중이 19.3%로 늘어났다. 대중수입은 같은 시기 13.1%에서 22.1%로 늘어났다. 이는 일본의 대미무역 총량의 거의 두배에 달하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 한국경제는 교역상대국이 불공정행위를 했다고 판단될 경우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보복이 가능하게 돼 있는 미국의 ‘슈퍼 301조’의 위력 앞에서 공포에 떨던 과거가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1990년대 초반 미국 의존도에 버금가고 있으며 이 비중은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1990년대부터 우리에게 최대의 흑자시장이 되어왔다.

한중 경제관계에 내재한 양국간 교역 불균등성은 한국경제의 대중 취약성을 배가시키고 있다. 중국은 우리의 최대 수출시장인 반면, 중국에 한국은 5위의 수출시장에 불과하다. 지난 10년간 중국의 대한(對韓)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4.5% 안팎에 머물렀다. 한국의 대중수출 비중의 6분의 1밖에 안된다. 바로 이 불균형이 한국을 중국의 경제상황뿐 아니라 대내외정책 면에서도 매우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나라로 만들고 있다.

비록 단순한 비교지만 한중, 일중, 미중 간의 교역증대 추세는 이제 동북아가 중국과 한・미・일이 대립하는 동맹질서만으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급속히 증가하는 경제적 교류와 협력, 그리고 사회적・문화적 교류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물론 그 질서는 동북아 국가들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중국경제에 대한 의존이 비정상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이 경제적 불균형성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든지 아니면 중국과의 유기적 관계 증대를 전제로 한 새로운 대외전략구조를 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중 경제관계의 구조적 취약성을 당장 극복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좋으나 싫으나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을 조화롭게 배치할 수 있는 동북아 다자협력의 구도를 짜는 데 적극적이며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것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생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동북아 평화번영은 한반도 평화번영의 확대된 상을 형성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인식에 기초해서 한반도 평화정착과 동북아 평화번영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한국을 포함한 주요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성장이 동아시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을 직시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도 ‘성장하는 오늘의 중국’을 대하는 데 인색한 것 같다. 즉 중국의 성장을 주로 도전과 위협으로 볼 뿐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을 찾는 일에는 게으른 것이다.

예컨대 한・미・일은 중국의 군사력 신장과 외교적 위상 제고를 보면서 현단계 중국의 경제력과 인구규모에 걸맞은 군사력과 외교적 위상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한 역할과 의무를 부과하려는 노력 대신에 위협 증가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쩌면 이미 초강대국의 문턱에 들어선 유력한 국제행위자로서의 중국과 냉전시대의 호전국가이자 후진국가인 중국 사이에서 후자의 중국을 보고 싶어하는 의도적 착시현상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착시현상은 두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현실에서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대내외적 정책투사능력을 잘못 파악함으로써 대중관계에서 실패를 거듭하게 할 것이다. 둘째, 중국이 자신의 성장에 걸맞게 국제사회에서의 의무와 역할을 해나갈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정말 위험한 초강대국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 스스로 착시증세를 제거하고 중국의 위상과 역할을 정당하게 받아들일 때, 중국의 성장은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 다자협력을 위한 한국의 노력

 

중국의 성장으로 인해 동북아 다자협력질서의 필요성은 더 크게 부각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냉전시대의 진영간 대결구조에서 참혹한 피해를 입은 한반도의 입장에서 냉전질서의 극복은 매우 절실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역대 한국정부는 세계 냉전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던 시기부터 동북아 다자간협력질서의 창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며, 역내에서 다자안보협력질서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주도적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10월에 남북한,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이 참가하여 미・소대립 완화, 일・소간 영토분쟁 해결, 중・소 화해, 남・북한 평화와 안정유지 등 지역안보 문제를 논의하는 동북아평화협의회 창설을 제안했으며, 19945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한국정부는 동북아다자안보대화(NEASED)를 공식 제안하기도 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준비기간인 19982월에는 김종필 당시 자민련 명예총재가 중국 장 쩌민(江澤民) 국가주석에게 김대중 당선자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1975년 헬싱키선언처럼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개국 선언’을 하자는 구상을 전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한국정부의 구상은 당시 당사국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노력은 동북아 다자협력질서가 한국의 국익에 그만큼 필요하다는 인식이 20년 전부터 공유되어왔음을 잘 보여준다.9)

동북아 다자안보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2005년경부터였다. 20059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모인 6자회담 참가국들은 제4차 회담 공동성명에서 “6자가 동북아시아에서의 안보협력 증진을 위한 방안과 수단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이어서 20051117일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서는 “양국 정상은 역내 안보문제에 공동 대처하기 위하여 지역다자안보대화 및 협력 메커니즘을 발전시키기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두 합의를 통해서 동북아에서 당사국들 간에 다자안보 문제가 최초로 의제화되었다. 이는 그동안 동북아 다자간 안보대화에 비교적 소극적이던 미국의 입장이 전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두 합의는 한국정부가 한미동맹 발전과 함께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축을 국가전략으로 추진할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일련의 변화 속에서 2007213합의에서 6자회담 참가국들은 동북아 평화・안보체제 형성을 논의할 실무그룹을 설치하기로 했다.10)

한편 참여정부는 동북아 다자안보의 전제라 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국정과제로 삼으면서 그 실현을 위한 장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북핵문제로 인해 이를 국제사회에 실천적으로 의제화할 계기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46자회담 개최 직전인 20057월 중순 미국이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의향이 있음을 한국측에 밝혀왔다. 이에 우리 정부는 미국의 제안을 환영하고 이를 의제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때 정부는 한반도 문제가 지나치게 국제화되는 것을 차단하면서도 북핵문제의 진전과 병행하여 한반도에서 평화를 증진하고, 북핵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순기능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정부는 7월 하순에 6자회담 한국대표단이 준수해야 할 평화체제 관련 지침을 마련했다. 여기에서 평화체제 논의가 제46자회담에서 제기되면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적극 대응하되, 구체적인 협의는 6자회담보다는 당사국간 별도의 협의틀에서 진행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는 별도의 포럼에서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논의가 전개될 때 우리 입장에서 최소한 다음 두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지침을 세웠다. 첫째,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논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주한미군 주둔은 근본적으로 한미 양자간의 사안이며, 북미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더욱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평화협정 후 ‘휴전선’에서 ‘남북한 경계선’으로 바뀔 분단선은 남북이 공동 관리해야 한다. 평화협정은 한국전쟁으로 성립한 주한유엔군사령부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정전선(停戰線)으로서 휴전선이 소멸된 상황이라면 남북의 경계선을 한국군과 북한군이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 정부는 이 두 원칙이 지켜지는 한 한국의 참여를 전제로 평화체제 논의의 형식에 대해서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입장을 수립했다.11)

이러한 정부 입장 아래 평화체제 관련 논의의 공론화에 적극 임한 결과 9·19공동성명 제4항에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제를 구축하기 위한 별도의 포럼을 만들어 협의하기로 한 합의사항을 명기할 수 있었다.

 

 

균형자론과 구질서 수혜자들의 공격

 

중국의 성장이라는 새로운 동북아 정세변화는 한국의 국가전략이 동맹구조에서 동북아 다자협력질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당위’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필연적 노선’으로 바꿔놓았다. 이제 우리가 동북아에서 최소한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을 균형적으로 사고하며 평화공영의 협력구조를 만드는 일은 더이상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미동맹을 종교적 신념처럼 여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이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사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라는 최고의 국익 실현을 위해 우리가 한미동맹을 맺은 것이지만, 60여년간 심화되어온 의존적 동맹관계는 심리적으로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한미동맹을 목적 그 자체로 인식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더욱이 냉전과 한미동맹이라는 구질서의 수혜자로 살아온 기득권층에 다자협력의 구도는 못마땅하기 그지없어 보일 것이다. 그들은 달라진 정세와 변화된 국익에 맞추어 균형외교를 실현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한다. 나아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균형외교를 주장하는 이들을 여지없이 반미세력으로 매도하며 사실상 국가이익을 좀먹고 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천명한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이들의 비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노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한 것은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대통령은 2005년초 일련의 연설에서 우리나라가 동북아의 ‘세력균형자’ 혹은 ‘균형자’ 역할을 해나가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그는 3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 군은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번영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자로서 이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 동북아시아의 안보협력구조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한미동맹의 토대 위에서 주변국들과 더욱 긴밀히 협력을 강화해나갈 것입니다.

 

위의 발언은 주로 군사적 측면을 부각하고 있지만 322일의 육군 3사관학교 치사는 노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이 평화번영의 동북아를 향한 종합적인 국가전략 담론임을 보여준다.

 

우리 대한민국은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평화세력입니다. 역사 이래로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친 일이 없습니다. 우리야말로 평화를 떳떳하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나갈 것입니다.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주권국가로서의 당연한 권한과 책임을 다해나가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판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동북아에서 평화를 말할 수 있는 역사적・도덕적 정당성 위에 우리의 성장한 능력과 변화한 정세에 맞게 지금 이 지역에 절실히 필요한 평화와 공동번영을 실현하기 위해 균형자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대통령의 언명은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점진적으로 실현해나가겠지만 주로 미래지향적으로 당위적 방향을 언급한 것이었다. 당장 구체적인 계획을 짜서 실현하는 정책의 범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가역량의 신장에 따라 동시에 추구해야 할 동북아에서의 외교안보적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질서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득권층은 “한국 외교안보의 제1축이 한미동맹인데, 이를 파기하겠다는 것인가” “한국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미・중 간에 균형자가 된단 말인가” 등 격렬한 비판을 쏟아냈다. 어떤 이들은 고전적인 세력균형이론까지 거론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가 균형자가 되겠다는 것은 세계를 상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 터전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에서 열강들 사이의 갈등관계를 극복하고 협력과 평화를 구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북아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간난(艱難)의 외세침략을 받아온 우리 민족으로서는 비록 역량이 부족해도 생존과 지역평화를 위해 균형적 역할을 하겠다는 열망을 품고 이를 다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균형자론은 대다수 언론과 지식인들에 의해서 반미와 허장성세로 매도되었다.

그러다보니 참여정부의 대처도 대체로 방어적이었다. 그때 정부는 우리가 말하는 균형자의 핵심은 역사적으로 역내에서 패권적 갈등을 벌인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해 한반도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바 있는 중・일 간에 균형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사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20059월에는 한・중 양국 정부는 협력을 통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919공동성명을 도출해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균형자론에 집요하게 반미의 혐의를 씌우는 보수언론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미국과 동북아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한국이 수행할 수 있는 균형자 역할에 대해서는 가급적 언급을 피했다.

당시 정부에서 이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낀다. 특히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읽고 한국의 생존번영 전략의 방향을 냉철하게 제시한 노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관철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지금 돌이켜보면 균형자론을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답은 좀더 의연하고 간명해야 했다. 우리의 능력범위 내에서 사안에 따라 때로는 중일, 미중, 미중일 사이에서 우리가 중심을 잡고 균형점을 찾고자 노력해가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아무리 비판론자들의 공세가 무자비하더라도 결연하게 대처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요즈음 이 문제를 생각하면 “사안에 따라 범위와 수준을 달리해가며 미국 등 역외국가를 끌어넣기도 하고(6자회담, APEC 등) 제외하기도 하면서(ASEAN+3, 아시아통화기금 구상 등) 동아시아의 지역연대를 점차 강화해나가는 지혜가 요구된다”12)는 백낙청(白樂晴)의 탁견을 원용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동북아 균형자론이 참여정부에서 제기만 되고 보수와 진보가 공유하는 담론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나 그 문제의식은 여전히 정당하며, 지금에 와서는 더욱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번영을 실현해가는 데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발전시켜나가야 할 명제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중국의 성장과 동아시아공동체 추진의 한계

 

많은 이들이 동아시아 평화와 연대를 주장하며 그 최종 목표로 동아시아공동체의 형성을 외친다. 그러나 동아시아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힘찬 주장은 거대 중국의 존재 앞에서 맥이 빠진다. 지리적으로 동남아를 포함해서 동아시아에 위치한 나라들(미국, 러시아 제외) 인구의 60% 이상이 중국 공민(公民)이며, 머지않아 중국은 동아시아 경제에서도 그 정도의 비중을 점유할 것이라는 점에서, 백영서의 우려대로 “100년 전 중국의 몰락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불안정해졌다면 이번에는 중국의 초강대국화가 구조적 불안정성을 증폭시킨다.”13) 거대 중국 앞에서 우리는 동아시아공동체가 실제로 가능한가 혹은 바람직한가, 아니면 아주 느슨한 협력체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원인무효를 선언하는 듯한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華夷秩序)로도 표현되는 조공질서(朝貢秩序)가 일정하게 동아시아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국가관계를 전제로 작동했음을 떠올린다면 국가간, 그리고 국가를 넘어 역내 시민, 민중의 평등하고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동아시아론의 관점에서 다시 부상한 거대 중국의 존재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민에 대해 백낙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나머지’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로 상징되는 역내 국가들 간의 불균형 때문에 유럽연합 같은 상대적으로 공고한 공동체 형성이 어려운 상태라는 점을 인정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적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더욱 담대하고 창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국가가 기본단위로 연합하는 공동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으로 지역주민 위주로 접근할 기회로 살펴가자는 것이다. 물론 국가를 제쳐둔다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들이 연합함으로써 안보・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의 유대를 일거에 강화하는 대신, 분야마다 지역의 현실에 가장 부합하고 주민의 생활상 이익에 충실한 형태와 수준의 협력관계를 다양하게 구현해가자는 것이다.14)

백낙청은 유럽연합 같은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이 낮은 상태에서 무작정 ‘동아시아끼리’만 부르짖을 수도 없다는 현실을 직시한다. 따라서 사안에 따라 범위와 수준을 달리하는 지역연대를 강화하고, 국가 차원의 협력 수준을 높여나가되 동시에 국경선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공간에서의 유대 형성을 적극 추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역설한다.15) 이러한 그의 주장은 동아시아공동체로 나아가는 데 국가 단위의 협력과 통합 못지않은 각급 단위에서의 협력과 통합을 통해 역내 거대국가 혹은 강대국의 국가주의 발호를 막고 평등하고 조화로운 동아시아를 건설해가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미 백낙청의 제안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지만 이를 필자 방식대로 좀더 구체화한다면, 동아시아 각국의 시민사회의 발달과 시민(사회)간의 연대와 협력, 다양한 네트워크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거대 중국의 존재나 경제대국 일본이 존재하는 동아시아에서 위계적 질서를 거부한 새로운 협력과 다양한 지역공동체의 창출을 위해서는 기존의 국민국가와 함께 새로운 동아시아를 이끌 시민들이 만들어내는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각국 시민사회간의 네트워킹은 기존의 국민국가의 위계적 구조를 거부하고 동아시아 내부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역내 시민사회들이 독자적으로 혹은 교류와 연대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민의 힘’이 개별 국민국가의 권력을 견제할 전략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현재 개별 국가들의 권력에 비해 미발달 상태인 이 힘의 확대를 도모할 필요가 있다.16)

한편 동아시아공동체를 향한 길에서 거대 중국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평등과 평화번영의 공동주체로 나서게 하기 위해서는 이상과 같은 쏘프트웨어적 방법론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어떤 거대 국가도 동아시아공동체에서 패권적 행동을 하기 어려운 구조를 만드는 하드웨어적 방법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먼저 고려할 수 있는 것이 미국의 역할이다. 백영서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의존하려는 것은 단견”17)이라고 했다. 원론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미국은 온전한 동아시아 국가는 아니지만 동아시아의 전략적 이해당사자로서 ‘역외에 있는 역내 국가’라고 할 수 있다.18) 따라서 미국의 힘과 경제력이 동아시아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외부자인 미국을 이 지역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역내 국가로서 미국이 정당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문제는 동아시아공동체 형성에 미국의 힘이 긍정적으로 투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주체적 역량이 더 성숙하고 동아시아공동체가 미국의 국익과 부합할 때 어느정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판단된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이 세계전략 수준에서 동아시아를 재단할 위험성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한편 좀더 본질적으로 동아시아의 구성원을 지리적 측면을 감안하면서 일정하게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즉 동아시아와 인접해 있으면서 115천만명의 인구(2010년 기준)를 보유하고 성장 잠재력도 큰 인도를 일정하게 동아시아 질서에 포괄시켜나간다면 거대 중국의 존재가 주는 부담을 일정하게 상쇄시키면서 공동번영을 누릴 기회를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 경우 그렇지 않아도 광대한 동아시아가 더 넓은 지역과 인구, 인종을 포함하게 되어 공동체 형성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아울러 현재 일본정부가 미국과 보조를 맞추며 중국과의 패권적 경쟁선상에서 인도를 동아시아 범주에 넣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 문제가 간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들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동아시아공동체를 사안과 수준에 맞게 탄력적 범위를 갖는 것으로 상정한다면 경우에 따라 인도를 동아시아적 범주에서 사고하는 것도 장기적으로 고려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분단체제 극복과 복합국가론

 

역대 한국정부가 대체로 동북아 다자협력구조의 형성에 주도적으로 나선 것과 거의 같은 맥락에서 분단체제의 극복을 열망해온 한국의 지식인들은 선구적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연대를 주창해왔다. 쑨 꺼(孫歌)가 “근래 동아시아에 관한 근본적 사고를 이끌어낸 것도 바로 한국의 사상가”19)라고 평가할 정도로 백낙청, 최원식, 백영서 등 한국의 학자들은 분단체제에 대한 연구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평화와 공동체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접근을 선도적으로 수행해왔다. 물론 세부 내용과 시각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그들은 분단체제의 해소가 한반도 수준에서의 문제 해결을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연대, 나아가 동아시아공동체의 형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 확신 속에서 동아시아의 각 국가 혹은 지역이 지닌 이질적 요소들 간의 공존과 통합에도 참고모델이 될 수 있는 분단체제의 해소방안을 의식적으로 모색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대안이 백낙청이 제창한 시민참여형의 남북연합이며, 그것이 동아시아적 공간과 공유를 시도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것이 복합국가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청은 단순한 지리적 분단의 해소를 넘어서 분단체제의 극복을 통한 통일시대를 위해 기존의 포용정책을 진화론적으로 발전시킨 ‘포용정책 2.0’을 내놓았다. 포용정책 2.0의 핵심내용은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시민참여의 획기적 강화와 남북연합 건설을 향한 의식적 실천이다.20)

백낙청에게 분단체제의 극복은 곧 통일과정에서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국가개조의 작업을 의미하는 분단체제의 극복이 “국가주의를 넘어선 동아시아 건설에 핵심적”21)이라고 본다. 그는 “남북으로 갈라져 준전시상태로 대치하고 있는 한쌍의 분단국가는 평화국가에 대한 거부가 체질화된 안보국가”이며, 이들의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악성이며 억압적”22)이라고 본다. 물론 통일국가 성립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하더라도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 두 결합이 귀결하는 고질적인 문제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백낙청은 국가주의를 극복하며 통일의 길로 나아갈 방법으로 2000년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 제2항에서 합의한 연합제안, 즉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주목한다. 그는 남북이 합의한 이 연합제안에 대해 “완만하고 단계적인 통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권한이 없는 일반시민들이 개입할 공간이 확보된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러한 통일과정은 “민중이 참여하여 새로운 국가기구의 건설 및 진화의 시간표를 결정하고 내용도 결정해가는 ‘시민국가적’ 지향성을 띠는 작업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참여형 통일국가의 형성은 한반도 주민의 생활상 욕구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시민적’ 의제들이 통일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드러날 민족주의적 동력에 의한 민족주의적 의제들과 경쟁하도록 만들 것이라 예상한다. 그는 이 과정이 다양한 국제적 의제들과 맞물리게 될 때,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한반도의 과정에 진전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 지역적·세계적 의의를 지닌다고 전망한다.23) 즉 시민중심의 국가개조를 통해서 등장한 한반도 국가기구의 출현은 동아시아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작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백낙청의 국가주의 극복에 대한 천착은 다른 한편으로 한반도가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걸고 통일될 경우, 이것이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를 자극해서 다양하고 유연한 지역공동체들의 성립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는 반면적(反面的)인 우려도 담고 있다. 동시에 한반도형의 개방적인 복합국가 형태가 출현한다면 그것이 바로 동아시아연합으로 이어지거나 중국 또는 일본의 연방국가화를 유도할 가능성은 적더라도 티베트나 신장(新疆) 또는 오끼나와가 훨씬 충실한 자치권을 갖는 지역으로 진화하는 해법을 촉발시키고 중국 본토와 대만의 관계에서도 국가연합에 근접한 타결책을 찾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24)

결국 백낙청에게 시민참여형의 남북연합은 분단체제 극복의 해법일 뿐 아니라 나아가 동아시아 협력과 연대의 새로운 틀을 제공하는 확산성(擴散性) 대안이다. 그 확산의 매개는 복합국가론이다. 그는 “국가보다는 사람 중심,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 중심으로 한반도의 현실을 보자”며 통일 후의 국가형태에 “단일형 국민국가를 최종목표로 미리 설정할 게 아니라 국가연합, 연방제 등 그때그때 단계적 현실에 알맞은 기구를 한반도 주민들 다수의 실익을 기준으로 창안하자”25)고 복합국가론을 제시했다.

복합국가론은 냉전의 유물인 분단체제의 극복과 탈냉전의 결과물인 동아시아 협력과 연대를 매개하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이론적 발전은 주로 백영서가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영서는 복합국가의 개념을 동아시아에 확대 적용하면서 이를 “국민국가에의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26)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그가 묘사하고 싶어하는 복합국가란 국민국가의 중심과 주변적 소수자들이 유기적으로 공존하며 나아가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결합체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반도에서 실험중인 복합국가”를 “독특하게도 국가간의 결합이자 국민국가의 자기전환이라는 한가지 양상을 겸”27)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분단 극복은 단순히 연합국가의 실현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소수자적 주변부가 되지 않으며 나아가 우리 생활 속에 뿌리내린 분단이 낳은 적폐들이 해소될 때 비로소 이름값을 하게 된다.

백영서의 이러한 서술은 기존의 국가 혹은 체제통합의 구상으로 제기되었던 복합국가론을 통합국가(체제) 내부의 개혁으로까지 분명하게 확대함으로써 일정하게 보편적 지역통합이론을 지향하고 있다. 복합국가론을 한반도 중심주의로 오해하는 시각들에 대한 대응적인 측면도 있어 보이는 그의 시도는 복합국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동아시아 연구에 필수적인 역내 통합과 연대를 실천적으로 담아낼 이론적 틀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논의가 다소 규범 지향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론의 보편화 시도로 인해 시민참여형의 남북연합을 의미했던 초기 복합국가의 명증성이 어느정도 희석된다는 느낌도 받는다.

 

 

남북연합론의 현실적 고민과 미래

 

백낙청도 확신하듯이 남북연합은 남북 통합과정에서 북한에 체제에 대한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덜한 방법이다.28) 그의 말대로 남북대치 상황을 전제로 체제를 유지시키려 할 때, 북미간의 적대관계가 청산되고 남북교류가 활발해질수록 북한체제에 가해지는 리스크는 더 클 것이다. 따라서 북한당국도 점차 남북연합이 “통일과정의 엄청난 폭발성과 위험부담을 관리하는 하나의 장치”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필자 역시 북한이 1990년대 접어들면서 이미 남북간의 구심력적 작용이 큰 연방제보다는 이 구심력을 일정하게 통제할 수 있는 연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29) 그 연장선에서 615공동선언 제2항에 합의했다고 보고 있다.

남북연합과 그 전제가 되는 북한체제에 대한 안전보장은 우리가 한반도에서 평화적이며 점진적인 통일을 추구할 경우 거의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다. 특히 북한체제에 대한 안전보장은 평화통일 이전에 남북간 긴장완화와 동아시아 안정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남북간 평화증진과 통일, 동아시아의 평화번영을 위해 우리가 상대하는 북한은 ‘주권적 실체로서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도덕적 잣대로 북한정권을 보면 매우 부정적이지만,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는 북한정권이 운용하는 북한체제와 공존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공존의 기초는 체제안전보장이다. 우리는 부시 행정부 전반기와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을 통해, ‘주권적 실체로서 북한’과 ‘도덕적 잣대로 판단한 북한’을 구별하지 못한 감성적인 대북 강경정책이 어떻게 남북간에 충돌을 일으키고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평화와 안정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보았다.

북한체제에 대한 안전보장은 이처럼 평화와 통일의 과정에서 중요한 전제이며 북한도 이를 원할 수밖에 없는 구조임에도, 우리는 아직 하나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북한체제의 안전보장문제에 대해서 정작 북한이 아직은 우리의 인식과 대조되는 행동과 관성을 보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북한은 내부자원이 고갈되고 외교적으로 고립상태에 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도 외부의 경제적 지원과 체제안전보장을 국가 최대목표로 삼고 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이 목표 달성의 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스스로 호전성을 감소시키고 보다 유화적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남북관계나 북핵 회담에서 북한이 보여주는 태도는 이러한 객관적인 자기 조건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공세적이다. 이러한 태도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북한이 지닌 객관적 조건의 실상과 체제안전보장 요구의 진의를 의심케 한다. 자가당착처럼 느껴지는 이러한 행동은 그동안 펼쳐온 공세적 대외전략의 관성이 남아 있는데다 체제안전보장을 위해 수세적 구걸외교보다는 공세적 도발행위를 뒤섞은 행동이 더 효과적이라는 믿음이 착종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는 체제안전보장이 현단계 북한문제를 푸는 데 핵심이며 남북연합이 이 점에서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지만, 정작 북한의 행위는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부정하는 것처럼 비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체의 객관적 상황과 실제 행동 사이의 부조화가 북한의 체제안전보장 필요성이라는 담론의 설득력을 약화시켜, 남북연합론을 여전히 미래지향점에 머물게 하고 있다.

결국 논리와 사실증명의 긴 회로를 거쳐온 북한체제보장론의 합리성은 북한의 시대착오적 행동으로 아직 본격적인 실천에까지 이르지 못한 느낌이다. 따라서 북한체제보장론을 바탕에 둔 남북연합론이 실천적으로 빛을 보기 위해서는 남한에서의 실천운동 못지않게 그 한축인 북한지도부의 자세 변화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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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초고에 대해 귀중한 코멘트를 해준 창비 편집위원회에 감사드린다.

1) 동아시아를 범주화한다면,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는 중국, 일본, 남북한, 몽골, 러시아, 대만, ASEAN 10개 국가와 역외에 위치한 미국을 포괄하는 경계를 가질 것으로 본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동아시아는 ASEAN 10개 국가를 제외한 중국과 일본, 남북한, 미국이 역동적 관계를 그려내고 있는 동북아지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넓은 의미의 동아시아를 동아시아의 범주로 본다(졸고 「‘동아시아 연구’의 현황과 과제」,  『세종정책연구』 2011-6, 세종연구소 2011 참조). 그러나 이 글에서는 동북아와 동아시아를 필요에 따라 혼용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2)필자는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대통령직 인수위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차장,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3) 백영서 「연동하는 동아시아, 문제로서의 한반도」,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16면.

4) 백영서, 앞의 글 27~28면; 개번 매코맥 「작은 섬, 큰 문제」,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64면.

5) 이종석, 앞의 글 32면.

6) 이종석, 앞의 글 28면.

7) 한국무역협회 무역통계(www.kita.net) 국가별 수출입, IMF, Direction of Trade Statistics Yearbook, 1990-2010의 자료를 기준으로 작성.

8)2010년 우리나라의 무역의존도는 85%에 달했다.

9) 졸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과 한국의 선택」, 『정세와 정책』 20085월호, 세종연구소 2008, 13면.

10) 이종석, 앞의 글 13면.

11) 이종석 「한반도평화체제 구축 논의, 쟁점과 대안 모색」, 『세종정책연구』 제41호, 세종연구소 2008, 13~14면.

12) 白樂晴 「東アヅア共同體 と朝鮮半島, そして日韓連帶」, 『世界』 20105월호, 59면. 이 글은 원래 『세까이』의 청탁으로 집필되어 일본어로 번역 게재되었으며, 그후 필자의 보완을 거쳐 국내 지면에 다시 게재되었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상과 한반도」, 『역사비평』 2010년 가을호 참조—편집자.

13) 백영서, 앞의 글 21면.

14) 白樂晴, 앞의 글 57면.

15) 白樂晴, 앞의 글 59면.

16) 졸고 「‘동아시아 연구’의 현황과 과제」(43~44면)에서 필자는 ‘시민의 힘’을 쏘프트파워, 즉 연성권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용어가 기본적으로 국가의 하드파워를 보완하기 위해 나왔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시민의 힘’으로 고쳐 불렀다. 관련해서 문제점을 지적해준 창비 편집위원회에 감사한다.

17) 백영서, 앞의 글 21면.

18) 필자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이종석, 앞의 글 12~13면.

19) 쑨 꺼 「민중시각과 민중연대」,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83면. 쑨 꺼는 “그들은 이미 동아시아 각 지역의 이론 생산에 효과적인 참조체계를 제공해왔다”고 평가한다.

20) 백낙청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21) 백낙청 「국가주의 극복과 한반도에서의 국가개조작업」,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96면.

22) 백낙청, 앞의 글 98면.

23) 백낙청, 앞의 글 101~102면.

24) 白樂晴 「東アヅア共同體 と朝鮮半島, そして日韓連帶」, 61면.

25) 백낙청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83면.

26) 백영서, 앞의 글 30면.

27) 백영서, 앞의 글 29면.

28) 백낙청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205면.

29) 이종석 『분단시대의 통일학』, 한울아카데미 1998, 129~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