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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달자 愼達子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봉헌문자』『겨울축제』『아버지의 빛』『오래 말하는 사이』등이 있음. dalja7@hanmail.net
여명(黎明)
날이 밝아온다
어둠이 어둠에게 무슨 긴밀한 전갈을 하는지
어둠이 몸을 엷게 펴면서 가볍게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저 얕푸른 어둠의 속살은 산을 오르기 위한 제의인가
바라보면 점점 사라지는 옷자락이 허공을 닦으며 가고 있다
그저 눈뜨면 오는 것이라고 믿었던
새벽을 데려오는 일에
몸을 구부리는 예불이 삼천배로 지나갔다
어디서인가 광대한 빛을 들어올리는 소리 들린다
어둠들이 몇천개의 강을 건너며 팔에 힘을 키웠는지
빛을 들어올리는 무리들의 뒤에서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빛을 밀어올리는 순간
어둠의 몸체 안에서 터지는 소리와
세상의 잎들이 어둠을 내려놓는 소리들이
종소리가 되어 먼 곳까지 새벽을 마중나가고 있다
더 큰 힘으로 몸을 부풀리고 빛을 끌어올리는
캄캄한 것들의 중력을 보아라
아버지가 이른 새벽 집 둘레를 한바퀴 서서히 돌면
집 둘레에 환하게 해가 떠오르듯
어둠들의 행렬은 거대한 빛을 들어올리는 작업 중이다
어둠은 빛에 밀려간 것이 아니라 빛을 밀어올리느라
그렇게 바삐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어둠은 새벽의 옷을 걸치고 대문 안을 들어서고 있다
범종 친다
벽을 친다 자정에 치는 이 범종……
누구나 이 시간에 마음의 고비를 넘기기 위해
창을 열었다 닫고 서랍을 열었다 닫고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책을 폈다 닫았다 하지만
저 여자 안방의 벽을 친다
맨발로 어둠을 밟고 나가 몰래 산사의 범종을 치듯
경건히 애절하게 온몸으로 범종 친다
범종 속으로 들어가기나 할 듯
범종 속으로 들어가 비명이 되기라도 할 듯
범종 속으로 들어가 범종이 되기라도 할 듯
천둥으로 박살나 흩어지기라도 할 듯
저 여자 어둠 속에서 눈 붉다
범종소리 너무 골깊게 쳤는지 절룩거리며
가다가는 모두 되돌아온다
닿아야 할 곳을 아직도 모르는지 그 소리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지
맺힌 것을 풀다가 더 엉켜버렸는지
여자의 주먹이 벽을 쳐 번쩍 터지는 꽃불 속으로
돌아왔다 다시 내쫓긴다 여자 밖의 세상은 미동도 없다
저 여자 마음의 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벽과 눕는 것을 배워야겠다
주먹이 아니라 입술을 대는 것을 익혀야 할 것 같다
밤 익을수록 고요 깊어 주먹의 피도 가벼워지는 시간
밤새 켜 있던 불온한 불빛도 서서히 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