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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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崔泳美

1961년 서울 출생. 1992년『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으로『서른, 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등이 있음.

 

 

 

가장 쉬운 길

 

 

옛날에 나는,

 

침대 위에서

소파에서

車 안에서

텐트 속에서

지저분한 흙 위에서

미지근한 바위에 누워

흐르는 강물에서

흐르지 않는 물에서

욕조의 비누거품 속에서

차가운 이불 밑에서

있지도 않은 행복을 찾아, 눈을 감았다

 

지금 나는,

식탁에서

눈을 크게 뜨고

날마다 찾아오는 쾌락을

잘게 부수어

구멍으로 밀어넣는다

 

싱싱한 고기의 피 묻은 입술.

 

 

 

2008년 6월, 서울

 

 

광장엔 옛날 사진들이, 피 묻은 신문들이 붙어 있고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도 어쩜! 이십년 전과 똑같지만,

큰길에서 나눠주는 선언문은 그때보다 두껍고 인쇄상태도 좋다

21세기의 IT강국에서 인쇄된 빨간 느낌표는 세련되었고

느긋하게 서 있는 얼굴들은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80년대처럼

분노로 일그러지지 않았다

일회용 컵 안에서 안전하게 타는 촛불처럼 온화한 눈빛.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외치다가 내가 죽을 구호를 모르는 건강한 입술.

어깨에 부딪치는 익명의 팔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내 옆의 젊은이에게 촛불을 건네주고 지하로 들어갔다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

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

친구와 수다를 즐기며 시청에 가까운 식당에서

칼을 들고 연어의 생살을 갈랐다

입 안에 죄의식의 거품을 품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