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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국문학의 현재,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

 

한 샤오꿍 韓 少 功

소설가. 1953년 중국 후난성 출생. 대표작으로 『마차오사전』 『보고정부』 『암시』, 산문집 『열렬한 책읽기』 등이 있음.

 

백지운 白 池 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시간』 등이 있음.

 

ⓒ 송곳

ⓒ 송곳

 

백지운 안녕하세요. 글로만 뵙던 한 샤오꿍 선생님과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창비 독자들을 위해 선생님에 대한 간단한 소개부터 드릴까 합니다. 1980년대 ‘뿌리찾기 문학(尋根文學)’이라는 슬로건으로 문단에 등장해서 1996년 『마차오사전(馬橋詞典)』 출간까지, 한 선생님께선 전통과 전위 사이를 오가며 문학적 쇄신을 시도해왔습니다. 90년대 이후에는 격동하는 중국사회의 문화생태를 해부하는 메스로서 ‘산문’ 장르를 새롭게 부활시켰고요. 문학과 삶에 대한 선생님의 깊은 사유와 부단한 실험정신은 문학의 종언과 위기가 심심찮게 회자되는 한국문학계에도 많은 자극을 주리라 생각됩니다. 앞으로 동아시아 문학인들이 서로 지혜를 교환하며 새로운 길을 터가기를 바라는 차에 이런 자리가 마련되어 특히 기쁘네요. 우선 오랜만에 한국에 오셨는데 느낌이 어떠신지요?

韓 少 功 소설가. 1953년 중국 후난성 출생. 대표작으로 『마차오사 전』 『보고정부』 『암시』, 산문 집 『열렬한 책읽기』 등이 있 음.

韓 少 功 소설가. 1953년 중국 후난성 출생. 대표작으로 『마차오사전』 『보고정부』 『암시』, 산문집 『열렬한 책읽기』 등이 있음.

 

한 샤오꿍 저도 기쁩니다. 한국은 이번이 두번째 방문이에요. 10년 전 서남재단에서 초청해서 처음 왔었죠. 한국작가와의 교류는 많지 않지만, 학자들과는 좀 알고 지냅니다. 최원식(崔元植) 백영서(白永瑞) 교수는 10여년 전 뻬이징대학에서 백낙청(白樂晴) 선생 저서의 출간토론회로 만났고, 그후에도 몇번 만나서 아주 친근합니다. 전에도 느꼈지만 서울은 참 큰 도시예요. 관리도 잘돼 있고요. 중국과 시차도 없고 음식맛도 비슷해서, 제게는 집처럼 편안해요.

 

백지운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후난(湖南) 분이시죠. 거기 음식이 한국사람에게도 잘 맞거든요.

 

한 샤오꿍 맵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어떤 분이 저한테 매운 음식 먹을 줄 아느냐고 묻더군요. 당연히 안다고 했죠.(웃음)

 

백지운 후난 음식이 한국 음식보다 더 매운 걸 사람들이 잘 몰라요. 후난은 유명한 작가들도 많이 배출했죠. 띵 링(丁玲)이나 톈 한(田漢) 같은 5·4시기 현대문학의 거장들도 후난 출신이던데요.

 

한 샤오꿍 션 충원(沈從文)도 있고요.

 

백지운 맞아요. 저도 그의 고향인 펑황(鳳凰)에 가 봤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예전에

白 池 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 원 연구교수,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시 간』 등이 있음.

白 池 雲 문학평론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중문학. 역서로 『위미』 『열렬한 책읽기』 『시간』 등이 있음.

그의 소설 『변성(邊城)』을 읽으면서 1920,30년대 그토록 엄혹하던 시절에 어떻게 이런 한폭의 그림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지 의아했었는데, 막상 거기 가보니 이해가 저절로 되더군요. 소설 속 장면이 현실에 그대로 있더라고요. 듣자 하니 선생님도 후난으로 귀향하셨다면서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한 샤오꿍 벌써 11년 됐어요. 매년 절반은 후난 미뤄현(羅縣)에서 지내요. 미뤄강 근처죠. 오랫동안 일해온 하이난성(海南省) 작가협회와 담판을 했어요. 사직하겠대도 안 받아줬거든요. 결국 반반 양보해서 사직 안하는 대신 반년의 자유를 얻었죠. 미뤄에 있으면 농사지으며 노동할 수 있어 좋습니다. 땀 흘리니 건강에 좋죠. 그리고 교수, 편집자, 기자, 작가, 평론가 같은 지식계를 벗어나니 다른 사람들의 생활이 더 잘 보여요.

 

 

중국문학, 지금 어디에 와 있나

 

백지운 그럼, 최근 중국문학 이야기부터 시작해볼까요. 중국문학의 움직임이 양적·질적으로 굉장히 활발해졌습니다. 한국 독서시장에서도 분명 2000년 이후부터 번역이 비약적으로 늘었고, 위화(余華)나 쑤퉁(蘇童)처럼 마니아층을 확보한 작가들도 생겼죠. 그런데 이렇게 밀려드는 중국문학을 수용할 준비가 한국독자에겐 충분치 않은 것 같아요. 현대중국의 사회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도 하고, 또 소개된 작가들이 중국문단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잘 모르거든요. 그런 한국독자를 위해, 지금 중국문학의 지형도를 간략히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중국문학은 지금 어디에 와 있나요?

 

한 샤오꿍 대체로 문화혁명 직후인 신시기(1970년대) 이후 10년에서 15년 사이가 중국문학의 전성기였다 할 수 있어요. 그때는 아무나 대충 써도 50만부는 팔았거든요.

 

백지운 50만부요?

 

샤오꿍 문혁 직후라 사람들이 문학에 굶주려 있었거든요. 또 TV나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지금 같지 않았으니 문학이 주요 엔터테인먼트였죠. 다음 시기, 그러니까 1990년대 후기에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출판이 상업화되면서 에로물, 폭력물 같은 저급문학이 주류로 올라섰죠. 거기에 주식하는 법, 연애하는 법, 유학가는 법 같은 이른바 ‘How to’ 씨리즈가 출현했어요. TV와 인터넷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연속극 시청자가 천만, 아니 억대를 넘으면서 문학의 입지는 더 작아졌죠. 그 작아진 문학을, 저는 네가지 색깔로 구분하곤 합니다. 첫째는 ‘옐로우’예요. 돈 먹는 베스트쎌러죠. 돈 색깔이 노랗잖아요. 수적으로는 이 옐로우의 비중이 제일 큽니다. 둘째는 ‘레드’죠. 공산당 기관이 지원하는 혁명역사나 영웅전기 같은 거요. 정부가 투자한 기획상품이 많습니다. 셋째는 ‘블랙’, 서양인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상품입니다. 여기엔 포장된 ‘지하문학’도 있어요. 국외유출이 어렵지도 않은데 일부러 필름으로 떠서 신비한 척, 서양매체에 호들갑을 떠는 거죠. 마지막으로는 ‘화이트’가 있어요. 이른바 ‘순문학’에 가까운 순결한 문학이죠. 모옌(莫言)이나 쑤퉁처럼 예술적·사상적 지향을 지닌 작가들이 여기 속해요. 80년대와 비하면 이들의 시장은 계속 줄기만 했죠. 쑤퉁이 그러더군요. 자기 독자 수가 영(0) 하나씩 없어진다고.(웃음)

 

백지운 쑤퉁은 한국에서도 유명한데, 가장 좋을 땐 얼마 정도 팔렸나요?

 

한 샤오꿍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진 100만부 파는 건 일도 아니었죠. 지금은 10만 정도일 걸요.

 

백지운 그럼 지금 중국의 베스트쎌러 작가로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

 

한 샤오 한 한(韓寒), 꿔 징밍(郭敬明) 같은 청년작가가 더 잘나가요. 무 쯔메이(木子美)처럼 전문적으로 성(性)을 주제로 쓰는 작가도 있는데 이런 책들은 전문가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시장에선 영향력이 대단해요. 작년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 매년 6천여종의 장편소설이 출판된다고 합니다. 엄청난 양이죠. 하루 평균 10여편이니까. 하지만 문학과 일반인들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어요. 전에 대학에서 문학전공 석·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홍루몽(紅樓夢)』 읽어본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4분의 1쯤 들더군요. 그럼 프랑스 문학작품을 세권 이상 읽어본 사람 손들라 했더니 3분의 1도 안됐어요. 이건 20,30년 전보다 더 퇴보한 거예요. 오히려 문화혁명처럼 폐쇄된 시절에도 중학생이 러시아 소설 열권, 영국·프랑스 소설 열권 읽는 건 별일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지금을 호황기라 할 수 있나요?

 

백지운 한국도 비슷해요. 사회에 대한 고민과 문학적 열정은 같이 가는 면이 있죠.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80년대가 문학적으론 더 풍요로웠던 것 같아요.

 

한 샤오꿍 물질주의, 소비주의 풍조가 인간의 정신공간을 압살하고 있어요. 가장 명시적인 것이 출판의 시장화입니다. 옛날에도 출판사가 이윤을 따졌지만, 전체 이윤을 봤지 지금처럼 책 하나하나에 이문을 보려곤 안했어요. ‘단행본 개별정산제’가 보편화되면서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 시나 학술서가 태반이에요. 이런 제도는 문화를 끌어내립니다. 게다가 인터넷 충격도 기술적 원인 중 하나예요. 인터넷에서 음악 들으면서 주식하고 채팅하는 문화에 길들면서, 조용하게 사색하는 능력을 상실해가거든요.

 

백지운 하지만 바깥에서 보면, 90년대 이래 세계시장에서 중국문학의 지위는 점점 높아지는 것 같은데요. 여기서 말하는 세계는 일단 서구입니다. 최근에는 한국 출판계도 중국문학을 주시하고 있어요. 물론 중국이라는 나라가 부상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면이 있지만, 역시 중국문학 자체가 외국독자에게 주는 흡인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입니다.

 

한 샤오꿍 최근 30년간 많은 중국 작품이 서구에 번역된 건 사실이에요. 특히 80년대 서양은 중국에 아주 각별했죠. 중국을 소련에 공동으로 대항할 준동맹국으로 봤거든요. 당시에는 중국과 무역마찰도 없었고 경제적으로도 위협이 안됐으니까요. 그리고 유럽과 미국도 상승하던 시기라 사회적으로 자신감이 넘쳤고 문화적 시야도 넓었어요. 훌륭한 평론가나 출판인도 꽤 많았고요. 독자 수준도 높았죠. 그래서 비서구문화에도 관심을 가졌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중국이 거대해지고 경제나 문화적으로 마찰이 증가하면서 서양인의 경계대상이 됐어요. 중국에 대한 관심 자체는 커졌지만 그 심리는 80년대와 다르죠. 이를테면 그때는 우리 중국작가들에게 문학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더니, 요즘은 왜 공산당에 더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느냐고 하거든요.(웃음)

 

백지운 말씀 들으니 문화적으로 80년대가 중요했던 것 같네요. 한국인에게 80년대는 시기적으로는 탈냉전이었지만 실감 속에선 여전히 냉전이었거든요. 중국도 구미와 대결상태일 줄 알았는데, 어떤 면에서 중국의 탈냉전은 한국보다 빨랐네요.

 

한 샤오꿍 냉전시대 서양의 주 공격대상은 소련이지 중국이 아니었거든요. 떵 샤오핑(鄧小平)70년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대단한 환영을 받았잖아요. 『타임』(Time) 표지에도 나왔죠. 거의 영웅 대접을 받았어요.

 

백지운 그럼 당시 중국에도 미국과 동맹해서 소련에 대항한다는 관념이 있었나요?

 

한 샤오꿍 그럼요. 중국과 소련은 진작부터 긴장관계였고 간간이 소규모 전투도 있었어요. 마오 쩌뚱(毛澤東), 떵 샤오핑 모두 ‘연미항소(聯美抗蘇)’의 구상이 있었죠.

 

백지운 오히려 90년대 들어 중국에 반미·반서구주의 정서가 강해진 거군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中國可以說不)』 같은 책들이 속출하면서 인터넷에서 내셔널리즘 정서가 격해졌고, 이후 학술계나 대중사회에 ‘중국 내셔널리즘’이 이슈로 떠올랐죠.

 

한 샤오꿍 탈냉전 이후 중국 지식계의 주류는 친미였어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을 쓴 작가는 지식계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그 책도 금서조치됐죠. 그런데 최근 10여년 사이 상황이 좀 바뀌었어요. 주로 티베트와 신장(新疆) 문제, 소련 해체, 아시아와 미국의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친미 성향의 중국인이 감소하는 추세예요. 티베트 문제만 해도, 미국인은 중국인(특히 한족)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국인도 미국인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런 마찰이 커지면서 애초엔 아주 소수파였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같은 목소리가 점점 강대해진 거예요. 최근 미국의 퓨 연구소(The Pew Research Center)가 시행한 세계인의 태도조사(Global Attitudes Project)에 따르면, 중국인의 자국에 대한 만족도가 88%였어요. 39%인 미국을 한참 넘어섰죠. 서양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죠. 여기엔 모종의 오만이나 편견이 작용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전후 중국문학의 격변

 

백지운 아까 네가지 색깔로 중국문단을 개괄하셨잖아요. 그중 앞의 셋은 제쳐두고, ‘화이트 문학’에 대해서 얘기해봤으면 합니다. 지금 한국독자들이 주로 접하는 것이니까요. 선생님께선 그 ‘화이트 문학’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특별히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나 작가가 있나요?

 

한 샤오꿍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마음이 복잡합니다. 정말 큰 희망을 걸고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문제 때문에 실망스럽거든요. 지금 중국문학은 최적의 성장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우선 시장이 크죠. 13억의 인구는 작가를 기르는 두터운 배양토예요. 시장이 크니 번역시장도 방대하죠. 세계 각 나라 문학이 중국에 들어옵니다. 일본이나 한국 문학도 요즘 많이 왔어요. 한국 드라마도 중국에 와서 ‘한류’가 됐잖아요? 둘째는 5천년의 역사예요. 좀 깎아도 최소 3천년이라는 문자기록의 역사가 있죠. 게다가 문자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장점도 있어요. 번체자를 조금만 알면 2,3천년 전의 문장을 읽을 수 있거든요. 거기에 동서남북으로 포진된 56개의 민족, 그들의 다양한 생활이 다 비옥한 문화자원입니다. 셋째는 지난 100년 이래 중국이 겪은 특수한 재난이에요. 대부분 고통스러운 경험이죠. 우리는 극도의 좌경적 사회주의를 겪었고 또 극도의 우경적 자본주의도 거쳤어요. 문제가 많았죠. 하지만 문제가 있어야 문학이 나옵니다. ‘불평즉명(不平則鳴, 고통을 당하면 반항의 소리를 낸다)’ ‘비분출시인(悲憤出詩人, 슬픔과 분노가 시인을 만든다)’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렇게 재난이 빈발한 지난 100년은 문학의 생장에 강력한 동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중국문학에 대해 거는 기대가 정말 큽니다. 훌륭한 작가들도 많이 나왔고요. 모옌, 쑤퉁, 왕 안이(王安憶), 위화, 비 페이위(畢飛宇)도 그렇고, 스 톄셩(史鐵生), 장 청즈(張承志), 뻬이다오(北島), 츠 쯔젠(遲子建) 같은 작가들도 있습니다. 그런 반면, 이 100년간 중국문화가 받은 폐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습니다.

 

백지운 모순이네요. 고통과 재난이 좋은 문학을 만든다고 하셨는데요.

 

한 샤오꿍 문화에는 누적이 필요한데 지금 중국엔 그게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으니까요. 첫번째 대규모 문화자살이 문화대혁명이었죠. 그땐 독서 자체가 위험행위였어요. ‘혁명 독존’으로 대학은 문 닫고 서점도 텅 비었죠. 문화사막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시장경제입니다. 온 사회가 미친 듯 배금주의로 내달렸어요. 교수나 대학생도 책을 내던지고 시장으로 달려갔으니까요. 문화의 정신은 추락했고 전사회가 영혼과 도덕의 공황상태에 빠졌어요. 앞 시기가 광적 ‘권위주의’라면 뒤의 시기는 광적 ‘배금주의’라 할 수 있어요. 양자는 서로 반하는 것 같지만, 문화를 부정하고 망쳤다는 점에선 같아요. 사실, 중국작가들 먹고살 만합니다. 일단 시장이 크니까요. 그런데도 모이면 통 문학 이야기를 안해요. 주식이나 골동품, 쇼핑 이야기뿐이죠.

 

백지운 문혁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들어보고 싶네요. 좀전에 당시 학생들의 독서 소양이 지금보다 나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때처럼 책을 읽을 수 없던 시절에, 특히 외국작품은 어떻게 읽었나요?

 

한 샤오꿍 50,60년대 중국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폐쇄적이지 않았어요. 프랑스, 러시아, 영미권, 이딸리아, 북유럽 각 문학에 모두 내로라하는 번역가들이 있었거든요. 문혁 전에는 모두 공식적으로 출판됐고 문혁 중에도 ‘내부 독서물’이라 해서 몇백종은 나왔죠. 겉표지를 감춘 일명 ‘회피서(灰皮書)’라는 건데, 하이에크(F. Hayek)나 쏠제니찐(A. Solzhenitsyn) 같은 반공인사의 저작도 포함돼 있었어요. 물론 이런 책들은 고급간부나 지식인에게 공급되는 거였지만 사실 일반 사회에도 널리 유포되었죠. 금서조치된 책도 도서관에 가면 다 있었어요. 당시 저 같은 중학생도 맘만 먹으면 훔쳐낼 수 있었거든요.

 

백지운 그렇군요. 오래전 영문판으로 나온 선생님 인터뷰를 보니까, 중국작가들이 대체로 20세기 상반기까진 소련문학을 모범으로 삼다가 후에 소련과 대립하면서 구미문학을 향하게 됐다고 하셨더군요. 그 전환지점이 80년대인 줄 알았는데 50,60년대부터 이미 시작됐군요.

 

한 샤오꿍 문혁 전까진 양쪽 모두에서 영향을 받았어요. 그래도 더 큰 스승은 역시 소련이었죠. 그런데 소련문학엔 프랑스문학에서 받은 영향이 크거든요. 그래서 중국독자들도 프랑스문학을 좋아했죠. 지청(知靑,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 195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자원 또는 강제로 농촌으로 내려가 노동을 했던 청년들을 뜻함) 시절에는 위고, 발자끄, 모빠쌍, 아버지 뒤마 같은 프랑스작가들이 결코 낯설지 않았어요. 문혁이 끝난 이후에 많은 청년들의 주요 독서대상이 초현실주의, 부조리, 의식의 흐름 같은 구미 모더니즘 문학으로 바뀌었죠. 이번에 한국에 같이 온 까오 싱젠(高行健)80년대 서구 모더니즘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에요.

 

백지운 조금 전 요즘 작가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걸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최근 중국의 젊은 세대 중 특히 눈여겨보는 작가가 있나요?

 

한 샤오꿍 저는 요즘 유행하는 빠링허우(80, 1980년 이후 출생한 세대), 주링허우(90後) 중에서 정말 우수한 작가들이 나오길 바라고 있어요. 우수하다는 건 문화적 소양이 두텁고 사회적 경륜이 풍부한 걸 말하죠. 그런 사람들이 큰 나무로 자라주길 바라요. 물론 그들이 정말 그렇게 성장한다면 우리 세대는 굶어죽겠죠.(웃음)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밥을 먹고 사는 건, 전적으로 그들이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너무 급하게, 너무 무더기로 베스트쎌러 작가가 됐어요. 전에 어떤 중학생 하나가 찾아와서 USB를 내밀면서 자기 작품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뭐 단편 한둘 있겠거니 하고 열어봤더니, 글쎄 장편이 장장 일곱편이었어요. 당나라에 대한 것 하나, 명나라에 대한 것 하나, 거기에 우주인, 기계인간까지.(웃음) 나중에 아는 웹프로그래머한테 들었는데 인터넷에 그런 소설이 수천만이래요. ‘근’으로 달아 팔 정도랍디다. 그들은 왜 좀더 느리고 진중하게 쓰지 않을까요, 왜 자신에게 더 엄격한 기준을 대지 않을까요?

 

 

동아시아 소설전통과 현대성

 

백지운 그렇게 써내는 것만도 정말 대단하네요.(웃음) 그럼, 이제 선생님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볼까요. 제가 산문집 『열렬한 책읽기(閱讀的年輪)(2008)를 번역할 때만 해도 선생님 책이 국내에 소개되기 전이었죠. 그 책 출간 직전에 장편소설 『마차오사전』이 나왔고, 재작년엔 산문집 『산남수북(山南水北)』이 나왔습니다. 베스트쎌러라곤 할 수 없지만,(웃음) 요즘 책에서 느끼기 힘든 깊이와 감동을 느꼈다는 독자들이 많아요. 선생님 글은 중국 문학이나 사회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더라구요. 『마차오사전』도 반응이 괜찮았어요. 특히 ‘사전’이라는 형식이 주목을 많이 끌었죠. 그런 형식을 구상하시게 된 특별한 배경이 있나요?

 

한 샤오꿍 제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전국의 대학이 다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우리 6학년생들은 농촌으로 가서 지청 생활을 했어요. 저도 6년간 노동을 했죠. 그때 간 곳이 지금 사는 미뤄현이에요. 그런데 저도 후난 사람인데 거기 말을 글쎄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나중에 대학에서 언어학 수업을 들을 때 음운지도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죠. 유독 후난성에만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더군요. 말하자면 후난 방언이 유달리 복잡했던 거예요. 거기 말 중 “십리마다 말이 셋(十里有三音)”이라는 게 있어요. 그렇게 열여섯살에 ‘다언어’적 상황을 체험하면서 틈틈이 ‘비교언어학’ 공부를 했죠. 말이 언어학이지 혼자 시골에서 거기 말과 내가 아는 말을 비교하면서 정리해보는 거예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흥미로운 문제가 떠올랐어요. 어떤 단어는 다른 언어체계에서 그에 정확하게 합치하는 단어가 없다는 거예요. 백지운 선생도 번역을 해봤으니 분명 그런 경험이 있겠죠.

 

백지운 맞아요. 특히 중국어엔 한국어에 없는 표현이 많아요. 그 반대도 그렇고요.

 

한 샤오꿍 몽골에 갔을 때 보니까 거기엔 말에 대한 단어가 정말 많더군요. 한살짜리 말, 두살짜리 말에 다 각기 단어가 있어요. 미뤄현에서 6년을 지내면서 언어와 언어가 결코 대등하지 않다는 걸 알았죠. 언어 뒤에 생활이 있고 이야기, 사람 그리고 특정한 역사와 문화가 있기 때문이에요. 60년대 서양에 ‘언어학적 전환’이라는 중요한 철학논쟁이 있었어요. 비트겐슈타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철학 문제는 언어 문제라고 생각했죠. 그걸 저의 미뤄현 경험과 연결시키면서, 어떤 역사나 삶에 대해 알려면 언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사전을 하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농촌의 생활사전을요.

 

백지운 『마차오사전』의 서사형식은 확실히 언어와 관계가 깊어요. 그런데 다른 탐색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소설과 산문을 결합하는 시도죠. 『마차오사전』에서 인상 깊었던 대목 중, ‘주도성 소설’ 속의 주도적 인물, 주도적 줄거리, 주도적 플롯이야말로 주도성의 패권이라는 말이 있어요. 거기서 ‘주도성 소설’이란 서양의 근대소설(novel)을 말하겠죠. 선생님에겐 근대소설과 다른, ‘대안적 소설’에 대한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한 샤오꿍 제가 아는 한, 소설엔 두개의 서로 다른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스트 산문’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 희곡’이에요. 동아시아엔 진작부터 종이가 있었죠. 중국에는 기원전 서한(西漢)시대부터 있었어요. 종이가 있으니 문자가 발달했죠. 한대(漢代) 작가들은 대부분 수십만 내지 수백만자의 저작물이 있어요. 놀랍죠. 컴퓨터를 쓰는 우리도 그렇게 쓰기 힘든데. 그땐 교육이나 문학이 정말 발달했어요. 반면, 서양은 다른 길을 갔죠. 13세기에 와서야 종이를 만들었거든요. 그전엔 비싼 양피지를 썼어요. 그러니 그들의 문화전파 수단은 주로 구전이었습니다. 서사시나 극 같은 구전문학이 발달했죠. 구전문학과 서사문학은 많이 달라요. 구전문학은 관중을 염두에 두죠, 식자(識者)든 문맹이든. 그러니까 작품전개의 흥미가 아주 중요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 인물과 플롯에 공을 들여야 관중이 몰입하거든요. 서사문학은 그렇지 않죠. 문인을 상대로 쓰니까요. 대중이 아닌 ‘소중(小衆)’, 심지어는 오로지 자기의 ‘지음(知音)’을 위해 쓰죠. 지음을 못 만나면 ‘명산(名山)에 묻는’ 거예요(司馬遷 「報任少卿書」, 『史記』). 희곡에서 태어난 유럽소설은 대부분 인물, 플롯, 주제를 주 요소로 삼아요. 당시 스페인문학, 프랑스문학, 영문학 같은 대어종(大語種) 문학들은 대부분 극화된 풍격을 띱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소설전통은 달라요. 『사기(史記)』에 수록된 서사는 훌륭하지만 산문에 가깝죠. 뒤에 나온 『서유기(西遊記)』나 『삼국연의(三國演義)』 같은 중국 4대 명저도, 우리는 소설이라 생각하지만, 5·4시기 미국유학에서 갓 돌아온 후 스(胡適)는 엄밀하게 말해 그건 소설이 아니라고 했어요. 왜 그랬겠어요? 그가 꺼내든 잣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이었거든요. 거기다 대면 중국소설은 너무 느슨하고 제멋대로인 거죠.

 

백지운 후 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생님의 『마차오사전』도 소설이 아니겠죠.

 

한 샤오꿍 맞아요. 산문화된 데다 인물에 일관성이 없으니까요. 앞에서 나온 사람이 뒤에 없거나 뒤에는 있는데 앞에 찾아보면 없죠.(웃음) 청대에 나온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설부(說部)’라는 항목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소설에 해당하죠. 그런데 이 설부에 수록된 문헌 중 90퍼센트가 요즘 사람의 눈에는 산문이에요. 왜냐면 중국의 소설과 산문은 원래 뒤섞여 있었거든요. ‘분가’한 게 고작 100년 정돕니다. 후 스처럼 서양적 관념에 젖은 사람이 소설의 개념 정리를 새로 한 것도 그런 이유죠. 물론 나쁠 건 없습니다. 우리가 유럽적인 소설을 쓰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문학은 다양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포스트 산문’ 전통을 재발견해서 활용하는 것, 그래서 산문과 소설을 교접하는 것도 해보는 거예요.

 

백지운 말씀은 해보는 거라고 하셨지만, 제가 보기엔 기존 소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영혼의 소리」라는 글의 첫 문장이 “소설이 죽어간다”였는데, 그 울림이 오랫동안 남더군요. 제가 보기엔 선생님은 『마차오사전』을 통해 ‘소설(문학)의 죽음’이라는 지금의 현실을 타개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신 것 같아요.

 

한 샤오꿍 원래 고대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선 소설과 산문을 구분하지 않았어요. 문(文)·사(史)·철(哲)이 하나였죠. 우리의 뇌는 논리와 이론으로 사물을 확연하게 분별할 때도 있지만, 형상이나 디테일로 묘사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어요. 그런 게 문학이에요. 개념과 형상이 뒤죽박죽되는 건 사실 매우 정상이에요. 사람이 온종일 이론적으로 분석만 하거나, 온종일 묘사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마 다 지겨워서 내빼고 말 거예요. 반면, 요즘 학문은 너무 세분화되고 있어요. 인재가 아니라 ‘전재(專才)’를 만들죠. 예를 들어 누가 ‘철학을 전공한다’ 하면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서양철학을 전공한다’고 해도 역시 사기꾼 취급을 받죠. 더 자세하게, 적어도 ‘헤겔철학을 한다’거나 ‘하이데거 전공이다’ 정도는 해줘야 인정해줍니다. 이렇게 전문화될수록 지식은 더 좁아져요. 그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종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생기지 않겠어요?

 

백지운 문학이 다 그렇지만 특히 소설은 다양한 형식들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마차오사전』을 읽으면서 저는 바흐찐(M. Bakhtin)의 대화이론을 연상했어요. 바흐찐은 소설 속에 다양한 장르, 언어, 신념체계들이 대립적으로 공존한다고 했잖아요. 그런 다성성이 『마차오사전』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죠.

 

한 샤오꿍 소설에는 늘 ‘주선율(主線律)의 패권’이 존재합니다. 단일서사의 논리관계를 형성하죠. 어떤 사람이 죽었다면, 그 원인은 살인이고 거기엔 살해동기가 있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죽은 데는 다른 원인도 있을지 모르죠. 그리고 그 원인은 단선적 논리 속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고요. 사물의 변화과정에 꼭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만 있는 건 아닙니다. 복수(複數)의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있을 수 있죠. 포스트 희곡적 소설양식은 그런 복잡성을 은폐하기 쉬워요.

 

백지운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차오사전』 같은 작품은 따라읽기 힘든 면이 있어요. 일관된 플롯이나 인물성격이 없으니까요. 일회성으로 등장하고 말 것 같던 인물들도 나중에 보면 큰 그물 안에 다 연결돼 있더라구요. 그런 파편적이고 단속적인 관계를 시야에 넣으면서 독서하는 게 익숙지 않죠. 앞에서 나온 인물이 한참 만에 다시 나오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거든요. 저도 읽으면서 사람이름 찾느라 애먹었어요. 『마차오사전』 다음판을 찍을 땐 꼭 인명색인을 넣었으면 합니다.(웃음)

 

샤오꿍 생활이라는 건 원래 완정(完整)하지 않아요. 그런 파편성이야말로 생활의 진실의 일부죠. 오늘 내가 길에서 사람 하날 만났다 치죠. 그 사람을 앞으로 다신 못 만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인상을 남김으로써 내 생활의 일부가 될 수도 있죠. 이런 파편성이야말로 진실이에요. 잘라내어선 안되는 거예요.

 

 

지방, 중국문화의 해체적 재구성의 축

 

백지운 이쯤에서 ‘지방성’ 이야기를 더 해봤으면 합니다. 다른 글을 봐도, 선생님께서 방언, 혹은 지방성을 중시하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엔 북방을 중심으로 구성된 중국문화에 대한 어떤 발언이 들어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이를테면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를 각각 ‘용’과 ‘새’로 대비하면서, ‘용’에 덧씌워진 권위적 상징성을 벗겨내는 시도들이 작품에 종종 나와요. 중심과 권위에 대한 이런 해체는 일면 포스트모더니즘과 가깝죠. 하지만 『열렬한 책읽기』에 실린 글들을 보면 또 분명하게 포스트모더니즘과 거리를 두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다소 모순이 느껴집니다. 분명 선생님께는 중심에 대항하는 해체적 사고가 짙게 존재하는데, 그러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시니까요.

 

한 샤오꿍 중심 해체와 권위 전복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정은 분명 긍정적이에요. 아까 말한 방언 같은 경우도, 사실 원래 모든 언어가 다 방언이었잖아요. 영국의 한 언어학자는 푸퉁화(普通話, 표준 중국어)가 ‘군대어’(the language of army)라고 했어요. 사실 ‘푸퉁화’는 권력화과정이 낳은 정치적 산물이에요. 1949년 푸퉁화를 확정할 때 국가회의에서 투표를 했는데 서남관화(西南官話, 쓰촨 충칭 윈난 등지의 표준어)—떵 샤오핑이 쓰는 말이죠—와 북방관화(뻬이징과 동북지역 등지의 표준어) 차이가 단 세표였대요. 그러니까 하마터면 쓰촨(四川) 말이 표준어가 됐을 수도 있었던 거죠. 그렇게 보면 표준어의 중심성과 권위는 필연적인 게 아니죠. 방언의 반역성에도 근거가 있고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표준어는 영어예요. 통상 영어 단어가 50만개쯤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영국과 무관합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참여했어요. 말하자면 ‘영어라는 방언’은 영미 두 지구적 패권국의 역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적 방법은 이런 역사적 진상을 통찰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때론 너무 극단적이에요. 모든 의미와 가치를 다 부정하잖아요. 그렇게 가면 결국은 그들이 반대하는 적과 같은 길을 가게 돼요. 상대주의를 절대화하는 게 결국 절대주의니까요.

 

백지운 방언과 관련해서 선생님 문학과 남방문화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합니다. 고대부터 중국은 북방엔 『시경(詩經)』, 남방엔 『초사(楚辭)』라 하여 남북의 문화적 기질 차이가 분명했죠. 선생님 작품엔 『초사』로 대표되는,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남방문화의 수맥이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한 샤오 중국의 고대문화는 대부분 황허(黃河) 유역의 문인에 의해 기록됐어요. 공자와 맹자의 고향인 샨뚱(山東)도 황허 하류잖아요. 진(秦)나라·한나라 수도 시안(西安)도 북방이고요. 그때 남방에도 우수한 문화가 있었지만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지 않았던 거예요. 송대에 와서야 달라졌어요. 몽골이나 투르크 같은 강대한 유목민족이 북방을 점령하면서 한족들이 남방으로 쫓겨왔거든요. 난징(南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후난에도 학교를 세웠죠. 창샤(長沙)에 있는 웨루서원(岳麓書院) 같은 유명한 서원도 그때 생겼고요. 그러니까 우리의 남방문화도 분명 중화문명의 일부입니다. 다만 오랫동안 야만세계로, 주변문화로 은폐되었을 뿐이죠.

 

백지운 이런 구분이 가능할지 모르겠는데, 선생님 글을 보면 유가(儒家)보다는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물론 유가 전반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역시 노장(老莊)이나 불교에 대한 애호가 선생님의 사상과 문학의 중요한 원천인 것 같아요.

 

한 샤오꿍 유가라는 개념은 때론 너무 넓어요. 중국 고대문화를 다 유가문화라고 하기도 하거든요. 작은 개념으로서 유가는 도가, 법가(法家) 들과 구별되는 작은 학파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유가는 개념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큰 유가, 작은 유가를 구별 안하거든요. 중국 고대문화의 대표가 유가라는 말도 사실 적절치 않죠. 불가도 있잖아요? 게다가 2천년 동안 유가엔 많은 변화가 있어서, 이미 유가는 하나가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선 저도 유가사상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작은 유가에 한해서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죠. 이를테면 유가엔 과한 엘리뜨주의가 있어서 정치, 사회, 윤리에 치우쳐 있습니다. 생명철학, 인식론, 방법론에 관해서는 도가의 장자나 노자, 아니면 묵자(墨子)가 더 흥미롭죠.

 

백지운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노자, 장자가 다 남방 사람이잖아요.(웃음) 아무래도 선생님은 남방이라는 지역이나 문화에 어떤 혈연적인 유대가 있는 것 같네요.

 

한 샤오꿍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상고시대의 초(楚)나라예요.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늘 쓰는 말 중 “주에 복종하지 않는다(不服周)”라는 게 있어요. 상대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죠. 그런데 왜 ‘주(周)’라는 글자가 나올까요? 여기서 ‘주’는 주천자(周天子), 그러니까 기원전 주나라 중앙정부를 뜻하죠. ‘주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건 (남방 사람에게) 북방의 주천자가 겁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어릴 때부터 그 말을 들었는데 그게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몰랐어요. 2천년 전에 쓰던 말이 지금까지 통용되는 거죠. 정말 재미있어요.

 

백지운 그럼 지금도 그 말이 같은 의미로 쓰이나요?

 

한 샤오꿍 지금도 민간에선 많이 쓰는데, 자유분방하고 권위에 굴하지 않고, 심지어는 무법자 같은 뜻으로도 써요. 약간 무정부주의적 뉘앙스도 있어요. 남방 사람들의 기질을 잘 보여주죠.

 

백지운 재미있네요. 그런 남방의 자유분방한 기질이 선생님 작품에 녹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문제는 ‘문학과 정치’라는 주제와도 연결될 것 같습니다. 문학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고답적이긴 하지만, 요즘처럼 문학의 위치가 어지러운 때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중국의 경우, 작가나 지식인이 사회에 발언하기가 더 쉽지 않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글에는 때로 아주 직설적인 비판도 담겨 있어요. 더 중요한 건, 그런 비판이 외부 (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단순한 ‘반정부’나 ‘반공’으로 이해되기를 거부하신다는 거예요. 『마차오사전』에서 시골 사람들이 맛있는 건 전부 ‘달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서양 사람들은 중국인의 반항을 죄다 ‘반공’으로 귀결시킨다고 질책하셨는데, 그건 서양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종종 빠지는 함정이에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입장이 좀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서양인이 기대하는 식이 아닌, 중국 지식인이 해야 할 반항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시는 건가요?

 

한 샤오꿍 좀전에 극단적 권위주의와 배금주의에 대해 말했었죠. 권력과 자본이야말로 중국사회의 두 병통이에요. 양자가 결합된 ‘권위적 자본주의’, 바로 여기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장기적 과제죠. 하지만 중국과 서구는 역사나 문화 면에서 많이 달라요. 증상을 보면서 처방을 해야지, 일반적인 약방을 내려선 안됩니다. 이를테면, 서양인은 종족 문제에 특히 민감해요. 유대인에 대해 말 잘못했다간 감옥 가거나 최소한 밥그릇을 잃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그 정돈 아니죠. 한국도 비슷할 거예요. 반면, 중국인이 특별히 중시하는 건 가족이에요. 고대에는 세금을 ‘사람’이 아닌 ‘호(戶)’ 단위로 매겼죠. 얼마 전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봤어요.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누군가에게 빚을 많이 졌대요. 그 채무를 부모와 형제가 대신 갚았다더군요. 서양에선 그럴 의무가 없겠죠. 개인의 채권과 채무는 가족과 무관하니까. 이게 바로 서양의 ‘개인본위’예요. 그럼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합니까? ‘가족본위’에도 물론 문제가 많아요.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죠. 부채를 대신 갚는 게 미덕이 아니라곤 할 수 없잖아요. 오직 서양 법률의 각도에서 그걸 한심하다고 비웃는다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영어의 인칭대명사 중 ‘나’(I)만 대문자로 쓰는데, 거기 내포된 문화관념에 문제가 없다곤 할 수 없어요. 자칫하면 과잉된 자기본위, 자기연민, 자아폐쇄 같은 걸 낳아요.

 

백지운 『마차오사전』과 『산남수북』을 보면서 중국 인민에 대한 선생님의 관찰이 정말 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합리적인 것 같지만 그들에게도 일관된 삶의 태도와 논리가 있더군요. 국가와 정부에 대해 무력한 것 같지만 나름의 관점과 대처방식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마차오 사람들이 기억하는 1948년은 ‘국공내전’이라는 국가의 공식 기억과 달랐어요. 공산당과 국민당을 기억하는 방식도 아주 구체적이고요. 이데올로기에 쉽게 좌우되지 않아요. 그걸 보면, 어떤 완강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그들 나름의 저항이 삶에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서양인이 상상하는 ‘반공’과 분명 차이가 있죠. 그 차이가 미묘하지만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 샤오꿍 그래요. 생활은 복잡하고 이데올로기는 단순하거든요. 이데올로기는 시비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흑백논리죠. 하지만 실제 인민의 생활은 아주 복잡해요. 그래서 문학이 유리합니다.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걸 그려내니까 이데올로기의 단순성에서 최대한 벗어날 수 있어요.

 

 

문학은 문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백지운 선생님 작품과 문혁 이야기를 해봤으면 합니다. 1980년대의 선생님 소설은 대개 직간접적으로 문혁을 다루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초기 중·단편이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형식의 전위성과 모던함인데, 그 이야기는 좀 뒤에 하지요. 둘째는 문혁에 대해 제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다는 점이에요. 중국 현대문학 전공자들도 대개 문혁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부용진(芙蓉鎭)」 같은 영화거든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억압을 고발하는 어둡고 우울한 작품들이죠. 그런데 선생님 소설은 다르더군요. 어두운 면이 없진 않지만, 「서편 목초지(西往茅草地)(1980)나 「파란 하늘을 날아(飛過藍天)(1981) 같은 단편은 우선 아주 재미가 있어요. 당시 지청들이 제가 생각한 것처럼 국가에 조종되기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더라고요. 자기주관이 매우 뚜렷하죠. 이를테면 「서편 목초지」의 주인공은 농민 간부의 교조적인 애국심을 조롱하면서 꾀만 부리는데, 그러면서도 자기의 사상적 견실성에 대해 엄격한 면도 있는 모순적 인물이에요. 그런 모순이, 선생님이 문혁에 대해 품고 있는 어떤 생각이 아닐까 해요. 주로 국가의 피해자로서의 개인을 부각했던 당시 상흔문학(傷痕文學)과 달리, 선생님에겐 문혁에 대한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샤오꿍 오랫동안 저는 상흔문학에 불만이었어요. 너무 단순하거든요. 그건 우리의 삶과 역사의 진실이 아니에요. 사실 「부용진」의 원작자가 내 친군데, 그래도 그 영화는 좀 심해요. 마치 문혁에 절대적 선인과 악인이 있는 것처럼 유치하게 그려놨거든요. 애석한 건 세계를 흑백으로 나누는 그 영화의 논리가, 냉전적 사고를 지닌 서양인들에게 쉽게 흡수된다는 점이에요. 문혁은 상층과 하층, 전기와 후기의 상황이 모두 달랐어요. 또 각 정파마다, 개인마다 다면성이 있었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구요. 결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아니었어요. 반항한 사람들의 사상적 자원과 투쟁수단에 큰 문제가 있기도 했죠. 그들이 피해자인 건 맞지만 그 피해가 과장된 건 아닐까요? 혹은 피해자라 해서 그들의 악행이 축소된 면은 없을까요? 냉전적 사고만으로는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요. 몇년 전 그에 대한 글을 하나 썼죠.

 

백지운 저도 읽었어요. 미국 듀크대학에서 발행하는 학술지 『바운더리 2』(boundary 2)에 실린 「문혁은 왜 종결되었나?」(Why Did the Cultural Revolution End?, 2008)죠. 그걸 보고 문혁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구나 생각했죠.

 

한 샤오꿍 그 글에서 말했듯 당시 저항에는 최소한 세 종류가 있었어요. 하나는 조반(造反)형이에요. 처음엔 문혁을 옹호하다가 나중에 자기들이 공격당하니까 전향해서 반항한 경우죠. 둘째는 소외형이에요. 왕 숴(王朔) 소설에 나오는 청년들이 그런 경우죠. 대부분 간부의 자제로, 서양음악 듣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면서 건달처럼 몰려다니는 거예요. 정치에서 떨어져 있지만 간접적으로 반항을 표출한 거죠. 셋째는 계승형입니다. 문혁의 사상이론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들이죠. 그중엔 맑스주의자도 있어요. 그러면서 마오가 틀렸다며 문혁을 격렬히 비판했어요. 톈안먼사건 때도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였죠. 서양인의 냉전논리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게 이런 유형이에요. 맑스주의랑 문혁이 한편인데 왜 맑스주의를 신봉하면서 문혁에 반대하느냐는 거죠. 그들은 그저 문혁이 자기들이 이해하는 그런 모습이길 바라는 거예요.

 

백지운 「파란 하늘을 날아」를 보니까 제가 상상하던 문혁과는 정말 많이 달랐어요. 처음에 원대한 이상을 품고 농촌으로 투신했던 지청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농촌을 떠나가더군요. 결국 연줄도 없고 아첨하는 재주도 없는 주인공만 혼자 달랑 남잖아요. 그런 그에게 먼저 도시로 탈출한 친구가 편지를 보내서, “너는 머리를 멋으로 달고 다니냐, 간부한데 잘 보이지 못하면 밉보여서라도 빠져나와야지”라고 말한 대목은 정말 우습기도 하고…… 그런 장면은 체험 없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요.

 

한 샤오꿍 많은 제 소설 속엔 저의 모습이 들어 있어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문혁의 큰 특징은 권위적 제도와 혁명적 이상의 착종이에요. 권위적 제도는 나쁘지만, 평등을 주장하고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혁명 이상까지 부정할 순 없죠. 「서편 목초지」에 퇴역한 군인이 나오죠. 아주 권위적인 독재자예요. 하지만 그에겐 사회에 대한 넘치는 열정과 인정이 있어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인물이죠. 그 소설이 80년대 발표됐을 때 많은 논쟁이 있었어요. 당시 상흔문학의 주류 속에서 단순한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이런 모순적 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죠.

 

백지운 이상하네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인물은 현실 속에 얼마든지 있잖아요.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까울 것 같은데요.

 

한 샤오꿍 당시 국가정책도 그런 단순화를 독려했어요. 공산당 중앙에서 문혁의 ‘전면부정’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그후 문혁은 금단구역이 됐고, 그 속에서 발생한 복잡한 상황을 논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백지운 「문혁은 왜 종결되었나?」라는 글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문혁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지만 문학의 임무는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거라고요. 제가 본 작품이 얼마 안되지만, 문혁의 심층과 정면대결한 경우는 많지 않아 보여요. 우리로서는 가장 먼저 접한 것이 상흔문학이고, 그다음이 위화의 『인생』 『허삼관 매혈기』 같은 작품이었죠. 상흔문학이 주로 박해받는 지식인을 다뤘다면, 위화는 인민이 문혁의 동란을 어떻게 살아냈나를 보여줬어요. 하지만 정작 문혁의 주역인 홍위병이나 지청은 늘 배경으로만 출현했죠.

 

한 샤오꿍 문혁의 금기화와 악마화가 오히려 문혁 비판을 무력화했어요. 그래서 문혁의 청산이라는 역사적 임무는 지금껏 완수되지 못했죠. 수적으로 문혁을 다룬 작품은 결코 적지 않아요. 하지만 대부분 단순화란 병통을 안고 있죠. 악마화하면 할수록 더 이해할 수 없게 돼요. 이해할 수 없다는 건 바로 인식적 실패를 뜻하죠. 중국에서 문혁이 발발했을 때 인도네시아에도 큰 재난이 있었습니다. 미국·영국·오스트리아가 지원한 쿠데타였는데, 2년 동안 근 100만명이 죽었어요. 그 사건은 몇년 지나 서방언론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지식계에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았죠. 아마 중국인도 95% 이상이 모를 거예요. 냉전이데올로기는 많은 사실을 선택적으로 은폐하거나 단순화·악마화하는 방식으로 처리했어요. 그런 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주류지식인들은 같은 길을 간 겁니다. 사실, 중국의 문혁이든 인도네시아의 학살이든, 심지어 히틀러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해서도 절대 악마화해선 안됩니다. 그런 비판엔 힘이 없어요. 사실을 되돌려주는 것이야말로 비판하는 사람의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거죠.

 

백지운 선생님의 문학에서 문혁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한 샤오꿍 문혁은 제 글의 중요한 자원이에요. 제 청춘기의, 가장 잊지 못할 시간이기도 하고요. 제 부친이 문혁 중에 자살했어요.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났죠. 그래서 어떤 대만작가가 그랬어요. 한 샤오꿍은 문혁에 발언권이 있다고요. 하지만 감정적인 태도로 과거를 대하고 싶진 않습니다. 당시 제 부친을 해쳤던 사람들도 악마는 아니에요. 그들이 그렇게 한 데는 복잡한 원인들이 있으니까요. 진정으로 사회의 병통을 고치려면 먼저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백지운 예전에 저는 지청들이 모두 강제하방된 줄 알았는데 선생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은 부모의 반대도 뿌리치면서 자원하던데요,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한 샤오꿍 대부분은 역시 강제하방이에요. 마지못해 가는 경우가 많았죠. 하지만 일부 이상주의, 영웅주의에 도취되어 자원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저도 그런 경우였죠.

 

백지운 밖에서는 그런 걸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아요. 선친이 문혁 중 박해를 당하셨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자원을 한다는 게……

 

한 샤오꿍 이야기하자면 길어요. 부친이 자살했지만 몇달 후 복권됐죠. 정부에서도 생활보조금이 나왔고요. 이런 일들은 문혁 중에 많았어요. 당시 저는 제 부친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사람들에 대한 감동도 있었고, 또 기필코 혁명을 완수해서 사회의 정의를 되찾겠다는 각오도 있었죠. 솔직히 말하면 문혁 중 저는 어떤 때는 악마였고 어떤 때는 어린양이었어요.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어하잖아요. 문혁이 시작되어 학교도 문 닫고 선생들 비판하니까 신나죠. 그래서 과장된 정치 레떼르를 선생들에게 붙이면서 덩달아 들썩거린 거예요. 이건 제가 했던 악행입니다. 하지만 부친이 박해당할 때 저는 가여운 양이었어요. 또 지고한 이상을 품은 청년이기도 했고요. 하방 중에는 ‘반혁명’분자로 지목되어 감옥에도 갔습니다. 상흔문학의 눈으로 보면 ‘영웅인물’이죠. 그렇게 복잡해요. 많은 중국인들이 다 저처럼 다중적일 거예요.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나

 

백지운 그럼 이제 문혁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이 시작된 80년대 문화적 환경을 다뤄봤으면 합니다. 먼저, 형식실험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으면 해요. 지금도 선생님은 부단히 새로운 실험을 하고 계시지만, 80년대의 작품들은 지금 봐도 상당히 전위적입니다. 「귀거래(歸去來)(1985), 「아빠,빠,빠(爸爸爸)(1985), 「여,여,여자(女女女)(1986) 같은 소설엔 노장사상, 마술적 리얼리즘, 의식의 흐름, 그리고 표현주의 등 동서양의 온갖 형식들이 날카롭게 변주되고 있어요. 그 시절은 중국문학 전반이 그런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실험을 향해 질주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90년대 와서 평범해졌죠. 도대체 80년대에 왜 그런 아방가르드가 성했던 걸까요?

 

한 샤오꿍 문혁 종결 직후 외국의 문예사조와 작품들이 대량으로 밀려왔어요. 그것이 문학 쇄신에 대한 의욕을 자극했죠. 게다가 그때 작가들에겐 시장의 압박이 없었어요. 남들이 알아듣건 말건 상관 안했어요. 그러면서 많은 작가들이 미학적 반성을 했어요. 1949년 이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편협성을 타파할 다양성을 갈구했죠. 이런 생각 속에서 작가들은 ‘무엇을 쓸까’뿐 아니라 ‘어떻게 쓸까’를 주시했어요. 그렇게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너나 할 것 없이 실험에 매진했죠. 어떤 사람들은 상당히 서구적인 스타일로 썼고 또 어떤 사람은 상당히 토속적으로 썼어요. 그러면서 80년대의 번영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왜 90년대 들어 퇴조가 왔느냐? 제 실감으로는 역시 시장이 커다란 압력으로 변했기 때문이에요. 대중의 미적 관습에 도전하는 실험적 작품은 점점 생존하기가 어려워졌거든요. 그리고 서양문학에 대한 소화가 일차적으로 매듭지어진 것도 있어요. 알 거 다 알았고 놀 거 다 놀았으니, 이제 자기 자리를 정돈할 때가 온 거죠. 저도 ‘의식의 흐름’ 같은 걸 가지고 놀아보다가 결국은 관뒀죠. 최근 ‘포스트 산문’적 소설전통에 대한 저의 관심은 외관상으로 보더라도 더이상 서구적인 게 아닙니다.

 

백지운 80년대 당시 선생님이 제창한 ‘뿌리찾기 문학’은 중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역시 모호한 데가 있어요. 일반적으로 ‘뿌리’라고 하면 전통을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당시 선생님의 소설은 지금 감각으로 봐도 굉장히 모던하죠. 전통적 요소도 있지만 ‘현대를 향하여’라는 색채가 확실히 내재하고 있습니다. 80년대라는 시점이 새로운 ‘현대’를 모색하는 때이기도 했고요. 그런 점에서 당시 ‘뿌리찾기’라는 슬로건엔 이율배반적 성격이 있는 것 같아요.

 

한 샤오꿍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어느 유전자 전문가가 말하길, 가장 우수한 유전자는 가장 오래된 것이랍니다. 많은 우수한 유전자들이 고분(古墳)이나 원시 삼림에서 나왔거든요. 하지만 그런 원시종을 식별해내고 출토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유전자기술이 필요하죠. 그러면 그렇게 찾아낸 종은 오래된 건가요? 그렇죠. 현대적 산물인가요? 역시 그래요. 고대와 현대가 서로 얽히고 침투한 것이니까요. 80년대에 제출된 ‘뿌리찾기’는 분명 본토(本土)문화를 의미했어요. 하지만 ‘본토화’야말로 현대화의 산물이에요. 전지구화가 야기한 현상이죠. 우리에게 서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중국이 뭔지 아시아가 뭔지 알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예요. 뽀르뚜갈 작가 뻬쏘아(Fernando Pessoa)가 말했듯 우리가 나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건 바로 우리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백지운 조금 구체적인 질문을 덧붙이고 싶은데요. 산문 「쿤데라의 가벼움」에서 70,80년대 중국에 라틴 붐이 일었다고 하셨잖아요. 한국에서도 그 시기 ‘제3세계’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지하게 진행된 바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문학 및 변혁이론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그에 대한 비판적 지양을 통해 민족문학의 세계문학적 시야를 획득하려는 담론적 시도가 창비에서도 있었지요. 어디선가 모옌도 마술적 리얼리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걸 봤는데, 선생님께 남미문학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요?

 

한 샤오꿍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은 사실 인디언들의 전통적 문화자원을 대량으로 활용한 거예요. 신화, 전설, 미신 같은 걸요. 중국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죠. 엄밀하게 말해 그걸 ‘제3세계문학’이라곤 말할 수 없어요. 유럽문학의 연장, 즉 스페인문학의 지방판이죠. 하지만 좋은 성과를 낸 건 틀림없어요. 20세기의 보기 드문 문학적 고봉(高峯)의 하나죠. 그후에 그런 고봉은 다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정한 세계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백지운 말씀대로 마술적 리얼리즘 이후 특정 문학사조가 지구적 영향력을 지닌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후 한동안은 문학이 일국성 안에 갇혀 있었죠. 그러다, 출판시장의 초국경화 탓도 있지만, 최근 들어 다시 문학의 세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창비에서도 요즘 고민하는 문제인데, 새로 도래할 문학의 세계성은 과거 유럽문학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문학과는 다른 차원에서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한 샤오꿍 맞는 말이에요. 원래 세계문학은 구미문학의 세계화를 뜻했어요. 하지만 이제 각 문학들 간의 평등한 대화의 기제로서 새로운 세계문학 개념을 제출할 때가 됐죠. 동질화와 이질화가 상호 배치하지 않으면서 같이 가는 신국면이 필요합니다. 뭐가 세계고 국제인지, 많은 중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어요. 서양이 세계인 줄 알죠. 한국이나 일본도 비슷할 거예요. 이래서는 대량의 경험과 문화적 자원이 시야에 들어올 수 없어요. 중국의 경우 유럽이나 미국에 대해서는 청산유수면서 바로 옆에 있는 미얀마나 태국, 인도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거든요. 그리고 ‘세계문학’은 절대 동질적인 게 아닙니다. 같음 속에 차이가 있고 차이 속에 같은 게 있어요. 바꿔 말하면 모든 나라의 문학이 같아지는 게 아니라 서로 주고받고 뒤섞이는 과정에서 풍부해지고 성숙해지는 거죠. 그 점에서 저는 기존의 ‘세계문학’과는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요.

 

백지운 저도 동감입니다. 세계화 바람은 거세지는데 주변국가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자아폐쇄 상태를 깨고 시야를 넓히는 세계화를 위해서는 동아시아가 좀더 서로를 가까이 참조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재미있는 시도가 있었어요. 한국의 『자음과모음』, 중국의 『샤오숴제(小說界)』, 일본의 『신쪼오(新潮)』가 공동주관하여, 한중일 작가들에게 하나의 키워드를 주고 작품을 쓰게 해서 세 잡지에 동시 게재했죠. 그걸 보니 전지구화의 경험을, 다르지만 또 같이 공유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샤오꿍 의미있는 시도예요. 교류의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죠. 중요한 건 목소리를 내고 명확한 목표와 방향을 정하는 거예요. 기존의 세계문학은 기껏해야 절반, 아니 가짜 세계문학이죠. 서구의 시각만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서구에 대한 묘사나 해석도 오류가 많아요. 비유하자면, 미국경제가 호황일 때 원유가가 배럴당 1달러였어요. 그게 서구의 진실일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가격이 그렇게 낮았던 데는 세계의 절대다수가 석유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었으니까요. 인도인, 일본인, 베트남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석유를 쓰기 시작하면서 원유가는 단번에 100달러까지 올랐죠. 서구 바깥의 상황, 그러니까 석유를 쓰지 않았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면, 서구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거예요. 새로운 세계문학은 반드시 세계의 이런 복잡성을 대면해야 합니다. 이건 결코 반서구주의가 아니에요. 진정한 세계적 시야를 수립하자는 거죠.

 

백지운 좀 민감할 문제일지 모르겠는데, 선생님 글 중 「국경의 이편과 저편」이란 산문이 있죠. 10년 전 서남재단이 개최한 회의에 참석하신 경험을 바탕으로 쓰신 글이에요. 그때, 중국에 아시아 없음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거기엔 두가지 근거가 있었죠. 하나는 1960년대 중국의 제3세계 경험이에요. 미얀마나 베트남 혁명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혁명수출론’으로 변질되면서 결국 그 국가들과 관계가 안 좋아졌거든요. 또 하나는 중국이 이후 세력이 커져서 ‘아시아’를 제기하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정곡을 짚는 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돼요. 중국이 아시아에 대해 갖는 역사적 경험과 실감이 우리와는 정말 다르거든요. 그런만큼 양국간에 신뢰와 공감을 쌓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중국이 동아시아의, 한국의 동반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거예요. 대부분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죠.

 

한 샤오꿍 중국은 땅덩어리가 크니까, 한국이나 일본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해요. 그래서 미국을 끌어오잖아요. 미군이 주둔하니 중국은 또 불쾌하죠. 당신들 만날 동아시아 동아시아 하면서 왜 미국을 데려오느냐 하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제 생각에도 동아시아의 단결은 아주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더 큰 단결을 말해야 해요. 아니면 동남아나 남아시아 사람들이 또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런 단결이 진정으로 현실화되려면 큰 위기에 기대야 해요. 생태위기나 경제위기 같은 거요. 그래야 단결에 대한 바람이 더 절박해져서 장애를 극복하게 되죠.

 

백지운 동아시아가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씀인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중국이 이렇게 상승추세인데 당분간 위기가 올까요?

 

한 샤오꿍 그런 모르는 일이에요. 2008년 전지구적 금융폭풍이 올 줄 누가 알았습니까? 내일 일은 모르는 거예요. 그때 되면 아무도 우릴 안 도와줍니다. 동아시아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세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해요. 하지만 중국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어요. 특히 문화적 혼란과 가치 공황, 정신적 방향상실은 거대한 시한폭탄이에요. 그게 경제적 성과나 정치개혁에 폭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이 시한폭탄에 대해 중국인은 경계가 너무 느슨해요. 경제가 발전했으니 다른 문제가 다 잘 해결될 거라 본다면 너무 순진한 거죠. 남미와 동구 모두 한때 경제가 괜찮았지만 한순간에 무너졌잖아요. 동아시아인은 슬기로운 사람들이니 더 멀리 봐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도 남북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 10년 전 한국에 왔을 땐 남북관계까 괜찮아 보였어요. 그때 판문점에서 전시를 봤는데 북쪽을 공격하거나 자극하는 말이 거의 없더라고요. 그런데 요 몇년 왜 이렇게 대립하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희망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은 데 기탁하는 건 나이브한 거예요. 그 점을 남북한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요.

 

백지운 남북관계 이야기를 하셨는데, 남북관계가 긴장될수록 중국에 대한 경계가 커지죠. 꼭 정치나 외교 차원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서 공존해야 할 파트너에 대한 이해 차원에서 봐도 이런 상황이 긍정적인 것 같진 않습니다. 제가 볼 땐, 중국이라는 국가의 특별한 체질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접근이 관건인 것 같아요. 중국은 국민국가지만 그 내부에는 과거 제국의 운용기제가 여전히 남아 있죠. 물론 영토가 크고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만큼 필연적인 면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접국을 대하는 데도 알게 모르게 제국적인 방식이 개입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서로간에 내셜널리즘적 반목이 불거지곤 하죠. 힘과 크기, 성격이 서로 비대칭적인 국가들 간에 어떻게 평화로운 공존체제를 이뤄낼지, 함께 지혜를 모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샤오꿍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르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죠. 중국과 파키스탄도 종교나 사회제도가 다르지만 잘 지내는 편이고요. 잘 지내고 못 지내는 건 상호존중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지금 중국은 ‘천의 얼굴’을 가진 나라예요. 부패나 빈부격차 같은 어두운 면이 깊고, 말씀하신 제국과 민족주의 문제도 있어요.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얼굴들이 합쳐진 입체가 바로 중국이죠. 앞날을 점칠 순 없겠지만, 만약 중국이 제국이 되어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고 패권을 휘두른다면 그땐 한국도 용감하게 맞서야 해요. 그리고 양심적 중국인도 반드시 그 싸움에 동참해야 하구요. 이를테면 중국이 아프리카에 가서 자원만 사들이고 상품만 팔 뿐 기술을 전수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윤지상주의예요. 식민주의와 다를 게 없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죠. 물론 장기적으로 민족국가체제는 결국 역사에서 퇴장할 거예요. 이미 다국적기업도 생긴 마당에, 다국적 대학·문화단체·종교단체·정치단체 같은 게 안 생기리라 누가 장담합니까? 민족국가라는 형식이 하강하는 때가 오면 동아시아는 대안적 언어로 부상하게 될 거예요. 지금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국경 없는 공동체가 수도 없습니다. 음악 애호가, 자동차 애호가, 아프리카 공부모임 등 각양각색의 커뮤니티가 있죠. 그들은 자기 이웃보다 더 서로 친숙하고, 동포보다 더한 동질감을 서로에게서 찾습니다. 나중에 세계 스포츠대회가 반드시 국가 대항일 거라 장담할 수 있나요? 화이트칼라 대 블루칼라, 동성애자 대 이성애자 대항이 되지 말란 법 있나요? 우리에겐 상상력과 창조력이 필요해요. 민족과 국가가 없는 환상소설을 쓰지 말란 법 있습니까? 재미있을 거예요.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백지운 네. 말씀처럼 우리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타파해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벌써 주어진 시간을 많이 넘겼습니다. 장시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2011.5.24 세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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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는 2011524일 세교연구소에서 중국어로 진행됐으며, 연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송문지씨가 녹취된 내용을 중국어로 기록했고, 백지운 교수가 원고 정리와 한글 번역을 맡았다. 지면사정상 번역과정에서 약간의 축약을 했다. 창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