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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장르의 표면장력 위로 질주하는 소설들

 

 

강지희 姜知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동물성을 가진 ‘식물-되기’」가 있음.

iskyyou@hanmail.net

 

 

1. 회의를 회의하는 소설들

 

최근 일련의 작가들은 그간 소위 ‘B급’ 또는 ‘장르문학’이라 얘기되던 외부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호기심과 경계심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1990년대부터 이미 소설은 영화나 게임 같은 대중문화나 정크(junk) 같은 하위문화적 요소를 차용해왔다. 그러나 그간의 소설들이 하위문화에서 기호나 이미지 같은 표층을 부분적으로 빌려와 비트는 데 치중했다면, 최근 소설들은 오히려 장르문학이라는 틀 안에 스스로를 기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래 소설이 잡종적 장르임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혼합되며 몸을 부풀려나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지만,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분리되어 있던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적극적인 만남은 분명 이 시대 새로운 경향임이 틀림없다.

SF(Science fiction) 진영에서 먼저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최근 순수문학 잡지들에 적극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배명훈(裵明勳)뿐 아니라, 탐정소설이나 공포소설의 문법을 상기시키는 이장욱(李章旭)과 최제훈의 몇몇 소설이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우주 출신의 주인공이 외계 함대와 우주전쟁을 벌인다거나, 산장에 고립된 인물들이 알 수 없는 살인마에게 하나씩 살해당하는 상황 등은 SF나 탐정소설에서는 이미 일종의 끌리셰(cliché)가 되었으나 기존 한국문학에서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운 설정이다. 여기에는 주인공이 우주를 택하기까지 지구에서 루저로서 얼마나 지난한 생을 살아야 했는가에 대한 설명도, 살인자의 고뇌도, 살해된 이들에 대한 애도도 없다. 그래서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끌롭스끼(V. Shklovsky)가 말했던 것처럼 게임의 장기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건의 잔혹성과 개체의 개별적인 고통보다는 서사가 진행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펙터클이나 스릴감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장르의 문법이 원심력을 구성하고 있는 이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꼬기또(cogito)에 대한 부정의식을 구심력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계속되는 ‘존재한다. 존재한다. 존재한다……’ 사이에 예측된 실수가 끼어들었다. 빈칸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칸이었다. 그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전원이 계속 공급되는데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존재는 외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그 공백을 대신 채워줄 착각을 구하지 못했다.

배명훈 「안녕, 인공존재!」, 『안녕, 인공존재!』, 북하우스 2010, 132

 

네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봐! 해보라구! 아니면 미친 듯이 생각이라도 하는 거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 그러면 생각하는 넌 남을 거 아냐!

 이장욱 「동경소년」, 『고백의 제왕』, 창비 2010, 36

 

“하루도 처음엔 믿기 힘들었어. 그렇게 생생했던 현실이 모두 자신의 환각이 만들어낸 연극무대였다니. 반면 전혀 기억에도 없는 폐광이니 매몰이니 하는 것들이 자신이 겪은 현실이었다니. 혼란스러웠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걸 의심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의심하는 나 자신까지도 의심해야 했으니까.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된 기분이었지.”

최제훈 「π」,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66

 

위 인용문들에서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까르뜨의 꼬기또 명제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데까르뜨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회의가 절정에 이른 끝에 의심할 수 없는 ‘사유하는 자아’의 확실성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소설들에서 존재는 회의나 사유로써 뚜렷해지고 구원되는 대신 오히려 희미해지며 불확실한 지점으로 내던져진다. 「안녕, 인공존재!」에서 ‘조약’이라는 제품의 존재가 증명되는 때는 역설적이게도 제품이 자신에 대해 사고하기를 멈춘 순간이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완전히 망각된 순간이다. 「동경소년」에서도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유끼를 생각하고 유끼에게도 생각함으로써 존재하기를 강요하지만 그럼에도 유끼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π」의 화자 역시 자신에 대한 사유를 통해 현실과 환각을 구별해낼 수가 없으며 되레 무한히 현실을 재창조할 뿐이다. 이들은 인간의 인식으로 파악 불가능한 지점, 사고하고 행위할수록 모든 상황이 불확실해지고 악화되는 악몽 같은 지점과 마주하고 있다. 이제 소설들은 폐쇄회로에 갇힌 채, 회의로 시작된 모더니즘을 회의하기 시작한다.

이런 부정의식과 장르문학적 문법이 만나면서 근래 소설들에서 증발된 듯 보였던 서사성이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우주전쟁이 벌어지는 배명훈의 소설에서, 인물들이 작가를 농락하며 이야기가 무한히 증식해가는 최제훈의 소설에서, 유령 같은 비존재가 출몰하는 이장욱의 소설에서 서사는 여러개의 공을 빠르게 던지고 받는 저글링처럼 긴장감 속에서 흥미롭게 진행된다. 지금 이 시대 한국의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전세계 어디서나 통용될 법한 무국적성을 드러내는 이들의 소설은 2000년대 ‘무중력’이라는 수사 속에서 읽혔던 김중혁(金重赫), 편혜영(片惠英), 한유주(韓裕周) 등의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탈역사적·탈현실적 감각과 상상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마니아적 취향이 가미된 무용지물의 상상력도, 문명의 종말과 가까운 묵시록적 세계상도, 서사를 허물면서 나아가는 실험적인 소설작법도 아니다. 이들의 소설이 우주와 살인사건과 유령 등을 경유해서 다다르는 곳은 ‘없음〔無〕’의 지점이다. 우주는 공허하게 비어 있으며, 작가는 실재하지 않으며, 죽음은 끝내 대면할 수 없다는 사유와 재현의 불가능성이 소설 뒤편에 까끌까끌하게 남아 있다. 어떤 언어로도 포섭되지 않는 이런 공백의 지점이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도록 추동한다. 장르라는 표면장력을 빌려 지금 소설들은 새로운 문학의 도로를 질주하고 있는 중이다.

 

 

2. 무한한 우주에서 계속되는 이야기: 배명훈 「청혼」

 

SF 작가로 먼저 이름을 알린 배명훈의 단편집 『안녕, 인공존재』는 인물들의 대화가 던져주는 소소한 유머와 어쩐지 애잔함을 안겨주는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배명훈의 소설에는 분명 SF의 외장이 있고 우주에 관련된 온갖 과학적 지식이 지적인 즐거움을 던져주지만 이것이 중핵에 놓여 있지는 않다. 많은 SF에서 펼쳐왔던 유토피아적/디스토피아적 세계관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우주는 기존의 현실세계에서는 해법을 찾기 불가능한 문제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결말에서 우주에 자리한 ‘기중신’이 느닷없이 등장해 자살하는 남자를 구해주고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가능케 해준다거나(「크레인, 크레인」), 사랑하는 아내의 코골이 문제가 반지 모양의 ‘우주 침대’를 마련하면서 해결된다(「마리오의 침대」). 분명 사랑스러운 이야기지만, 인물들이 윤리적 고민으로 고투하기 이전에 우주를 경유하는 서술자에 의해 손쉽게 상황이 풀려버린다는 혐의를 지우기는 어렵다.

그런데 중편 「청혼」(『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에서는 우주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문제를 ‘발생’시키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일단 지구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소설 한복판에 우주의 관점이 들어서면서 안과 밖, 주체와 타자를 구별하는 이분법이 해체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우주의 무중력이 아니라 지구의 중력이고, 우주의 무방향성이 아니라 지구의 뚜렷한 상하분별 가능성이다. 우주 출신인 주인공이 지구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중력에 개의치 않고 움직이는 지구인들에게 놀라 말한다. “쟤들 뭐냐? 완전 외계인이잖아!”(23면)

다소 복잡한 얼개를 지닌 「청혼」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예언서에 따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전함을 만든 지구인들이 차원의 문 너머에서 나타난 외계 전함과 전투를 벌이는 우주전쟁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주전쟁이라는 말이 다소 낯익은 서사들을 상기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기존의 SF처럼 투쟁해야 하는 ‘적’으로서의 외계와 환대해야 할 ‘친구’로서의 외계라는 이분법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익숙한 장르적 관습을 배반한다. 처음에 지구인들이 외계 전함에 대항하기 위해 거대한 함대를 만들 때, 싸워야 할 적, 타자는 명백히 외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무기로 무장한 적 함대와의 전투가 계속되면서 의심은 내부로 향한다. 적 함대는 우주 저편이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온 것이며, 그 미래의 함선은 사령관 ‘데 나다’(de nada)의 반란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음모가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타자의 타자’를 상정하는 편집증적 음모론이 탄생한다. ‘데 나다’라는 이름에 대해 극단적으로 갈리는 해석들—“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텅 빈 우주공간을 전부 소유하고 말겠다”는 야욕—은 편집증적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적과 동지를 자꾸 분별하려 애쓰는 주권자 ‘리델 원수’가 가지고 있는 세권의 바이블 중 하나가 『데 나다 장군의 전술전략지침서』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리델 원수’와 ‘데 나다 장군’이 뚜렷이 분별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적과 동지는 교착상태에 있다. 그래서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 장면에서 나타나는 우스꽝스러운 대치는 필연적이다.

 

그 장면이 꼭 뭐 같아 보였는지 아니? 거울 같았어. 데 나다 장군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달려드는 감찰군과 적 함대. 감찰군도 똑같이 느꼈을까. 눈앞에 커다란 거울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우리 함대 내에 진짜로 적과 동일시되어야 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건 데 나다 장군과 그의 참모부가 아니라 바로 리델 원수의 감찰군 사령부 자신이라는 걸 말이야.(84면)

 

이 장면은 우리가 상정하는 적의 본질이 실상은 의심하고 있는 주체 안에 있음을, 적은 주체의 일그러진 거울상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이 마지막 전투를 통해 외계 함대와 데 나다 장군이 이끄는 함대는 서로 충돌해 폭발하며 사라진다. 라깡이 “그림은, 확실히, 나의 눈 속에 있다. 그러나 그림 속에 있는 것은 바로 나다”(슬라보예 지젝 『이라크』, 박대진·박제철·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4, 89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자. 적으로 상정했던 두 대상이 실체를 확인하기 전에 대폭발로 한꺼번에 사라지는 이 장면에서 타자(적)를 상정함으로써 공고해졌던 주체 역시 함께 허물어진다. 우주에는 대기가 없어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도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는 사실은 소설 속에서 몇차례에 걸쳐 나타나는 우주전쟁이 사실 내면에서 소리 없이 벌어지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주목해야 할 것은 리델 원수가 멋대로 추정했던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이 충돌함으로써 음모론이 무화되고 우주의 텅 빈 공간만이 남는 순간이다. 이는 『타워』(오멜라스 2009)에서 권력의 구조를 드러내는 술병이 빈 통으로 밝혀지던 것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배명훈은 세계 안의 치열한 권력다툼과 온갖 전쟁과 음모론을 한꺼풀만 벗겨내면 거기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텅 빈 공백일 뿐이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전쟁이라는 사태는 기실 무한한 우주의 무시무시한 공허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도착적으로 자신의 적대자를 요청하는 나약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문제는 음모론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 대상이 기꺼이 자살적 수행으로 의심의 고리를 잘라버렸음에도 이 모든 사태가 멈춰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술자인 ‘나’는 지구에 있는 연인에게 그간 자신이 바라본 사건의 진실과 함께 사랑을 고백하는 청혼의 편지를 남긴 채 파멸의 신전을 향해 날아가길 택한다. 이때 주인공은 루카치가 말한 서사시적 정신을 체현한 주인공처럼 보인다. 파멸의 신전을 향해 날아가는 임무가 데 나다 장군이 죽으면서 “이제 이건 내 운명이 돼버”렸다고 설명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소설의 이론』에서 인용된 “나는 내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라는 브라우닝(R. Browning)의 희곡 구절과 상통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탐색’(quest)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적이 섬멸되고 연인에게 청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자신의 구애를 미래로 끝없이 지연시키며 파멸의 신전으로 향하는 주인공으로 인해 이야기는 다시 알 수 없는 외부의 적 함대와 대치해야 하는 소설의 서두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원히 순환되며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것만 같다.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듯 보이는 이 마지막 결단에도 불구하고 우주 함대가 지구 출신과 우주 태생, 그 두 인류 사이에 놓여 있던 장벽을 깨부쉈다는 사실은 기본적으로 이 소설이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전제를 상기시키며 따뜻하게 다가온다. 우주 출신인 남자가 사랑하는 지구인 여자에게 “같은 우주에 갇혀 사는데도 우리는 전혀 다른 우주에서 사는 것 같구나” 하고 놀라면서도 “서로 경계하기보다는 맞춰갈 여지가 많이 남아 있잖아. 서로 상대편 세상으로 찾아가서 서로의 우주를 배울 수도 있고 말이야”(22면)라고 말할 때, 이 담백한 사랑의 말이 본격문학을 향한 SF 장르문학의 구애와 같은 느낌이 든다면 지나칠까. 청혼은 미래로 계속 유예되고 있는 중이지만 무한한 우주에 적이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배명훈의 소설 속에서 우주와 지구 사이의 심리적 거리와 함께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3. 죽음을 비켜가며 계속되는 이야기: 이장욱 「곡란」

 

이장욱의 소설은 불면의 밤에 씌어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물들은 스위치 끄듯 몸을 끌 수 있길 바라며 의사를 찾고, 친구에게 수면제를 부탁한다. 카프카는 거듭 말한 바 있다. “이 소름끼치는 불면의 밤이 없다면 대개는 글을 쓰지 못하리라.” 레비나스(E. Levinas)는 불면 상태가 밤 그 자체만큼이나 익명적이라고 말했다. 불면 속에 깨어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밤 자체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게끔 하는 불면의 상태는 주체가 없는 상태이다. 자전소설로 발표된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문학동네』 2010년 여름호)에는 이 익명의 밤과 조우하는 경이롭고 공포스러운 순간이 있다. 주인공 ‘나’는 존재하지 않는 6층에서 쿵쿵거리며 박자를 맞추는 발소리를 계속해서 듣다가 결국 참지 못해 그곳을 찾아가는데, 빈방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댄써가 춤을 추고 있고 갑자기 발소리가 커진다.

 

탁, 타탁, 타타타탁.

탁, 타탁, 타타타탁.

무심결에 내 몸까지 리듬에 휩쓸리는 느낌이었다. 근육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내 발을 바라보았다. 음악 소리에 맞추어 두 발이 꿈틀거렸다.(336면)

 

‘무심결에’ 리듬에 맞추어 ‘제 마음대로’ 일어나는 이 꿈틀거림은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닌 상태를 노출한다. 자기 의지에 따른 움직임이 아니라 자율신경반사처럼 자신도 모르게 구부러지거나 비틀리는 것을 보여주는 동사 ‘꿈틀거림’은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처럼 보인다. 「곡란」(『고백의 제왕』)에서 한 인물이 “꿈틀거리는 게 인간만 있는 건 아니니까……”라 말할 때, 인간은 꿈틀거림으로 강렬하게 존재하는 동시에, 한순간에만 간신히 발생하는 비틀린 몸짓으로 인해 인간 아닌 존재들과 다를 바 없는 무엇으로 강등된다. 여기 지금 빈방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탁, 타탁, 타타타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딘가 ‘들린’ 듯한 움직임 속에 휩쓸려 사라지는 중이다. 그런데 이 비자의적인 춤은 어딘지 불면의 상태와 닮아 있지 않은가. 잠에 대한 의지가 관철되지 않는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주체는 흐릿해지며 유령처럼 변해간다. “이것은 누구의 악몽인가?”라는 말이 울려퍼진다. 이장욱의 소설은 시공간이 비스듬히 엇나가고 중첩되는 “아르마딜로 공간” 속에서 주체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꿈틀”거리며 희미해지는 악몽 같은 정황들을 포착해왔다.

이러한 주체 없음이 극단화된 사태가 바로 죽음일 것이다. 「곡란」에서 “죽음을 대면하는 소설”을 쓰겠다는 소설 속 ‘고희성’의 불가능한 욕망은 이 소설을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다 마침내 파국으로 넘쳐흐르게 한다. 이야기는 이렇다. 인터넷 자살 싸이트에서 만난 네 인물이 자살을 결행하기 위해 조그만 시골 도시의 여관으로 향한다. 그런데 여관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디 ‘DEATH’가 다른 길로 빠져나가버린다. 죽음을 대면하러 가는 그들은 약속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렇게 이미 죽음을 잃어버린다. 블랑쇼(M. Blanchot)는 우리가 죽음의 순간이라 부르는 것은 극단적인 왜곡, 지나친 구부러짐, 그것을 넘어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모든 것이 돌아서는 한계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들이 찾아가는 여관 ‘목란’의 간판 전구가 떨어져나가 ‘목’자가 ‘곡’자가 되는 것은 이 공간이 결정적인 것이 결락되어 ‘구부러지는〔曲〕’ 지점에 위치해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죽음은 이미 상실되었으므로, 혹은 무심하게 이미 스쳐지나갔으므로 곡란 202호실에는 죽음과 대면하는 소설을 완성할 수 없는 작가의 난관만이 남아 있다.

목 안으로 삼킬 수도, 입 밖으로 뱉을 수도 없는 이 죽음이라는 불가능을 입에 문 채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불가능한 죽음을 상연하는 202호실 안의 정황을 몰래 엿듣는 ‘김상태’의 독특한 위치다. 소설에서 고희성이 중년남성 ‘코끼리’, 여성 ‘스몰’과 함께 여관에 들어오는 것을 의심스럽게 지켜본 주인 김상태는 행여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일어날까봐 도청기에서 이들을 감시한다. 그는 언뜻 202호실의 내부 이야기를 바깥의 독자에게 전달하는 액자서술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잡음이 끼어드는 도청기에서 김상태가 듣는 소리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이 불분명한 말들뿐이다. 김상태는 해석되지 못한 채 기표의 표면 위에서만 맴도는 대화의 나열들에서 기껏 “코끼리는 코가 긴 짐승이지”라는 무의미한 문장 하나만을 간신히 잡아내고는 곯아떨어진다. 그럼으로써 그가 202호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논리화하고 재배치해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서술자일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김상태가 무심하게 잠들어 있는 동안 202호실 안의 고희성은 어떻게든 죽음을 지연해보려고 필사적으로 고투한다. 그런데 이 대비되는 ‘무심’과 ‘필사’의 태도는 어딘지 낯익지 않은가.

 

죽음에게는 죽음만이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죽음은 삶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 아닐까. 죽음은 죽음 자체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만 충만한 것은 아닐까. (…)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 쓴다는 건 허망한 일이 아닌가. 삶으로 회귀하지 않는 죽음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186면)

 

김상태의 이름이 존재의 현전 자체를 보여주는 ‘상태(狀態)’이며, 202호실 안에 있는 고희성의 아이디가 대상이 부재하는 ‘메아리’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대비되는 태도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메아리는 소리가 지워져가며 간신히 남기는 잔여물이다. 죽음과 대면하기 위해 곡란에 왔지만 어떻게든 죽음을 지연해보려는 고희성의 ‘희성(希聲, 희구하는 목소리)’은 김상태의 잠으로 인해 바깥으로 뻗어가지 못한 채 오직 안에서 울리는 ‘메아리’가 되어간다. 그런데 무언가 뒤집힌 느낌이 있다. 깊이 잠이 든 김상태가 있음의 순수한 수동성에 자신을 맡긴 채 죽음과 닮아가고 있다면, 고희성은 죽음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죽음에 몰입하지도 도망치지도 못한 채 삶을 향해 꿈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이다. 죽음을 만류하는 지지부진한 언사들을 중단하지 못하는 고희성의 말은 무한한 긍정의 웅얼거림이, 삶에 대한 이상한 깊이와 충만을 내포하고 있는 메아리가 되어간다.

그래서 킬킬거리는 웃음소리에 깨어난 김상태가 202호실의 문을 열었을 때 목격하는 기괴한 풍경은 불가능한 죽음의 한가운데에서 되돌아온 삶의 어떤 기미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게 대체 무슨 사단인지 알 수 없었다. 잠깐 조는 동안에 이 많은 사람들이 여관에 들어왔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저기 누워 있는 노인네는 뭐고, 구석의 저 세 남자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노인은 흰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고, 방 한켠의 세 남자는 여전히 모형 비행선에 열중해 있었다. 옆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흰 비행선은 거의 다 만들어진 것 같았지만, 왠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204면)

 

여기에는 예전에 202호실을 거쳐갔던 투숙객들이 모두 한데 모여 있다.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라고 강조했던 김상태가 목격하고 있는 이 존재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현재로 되돌아온 과거는 결국 유령이 아닌가. 이 유령들은 지금 고요한 카니발을 펼치는 중이다. “거의 다 만들어진 것 같았지만, 왠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흰 비행선의 조립은 현재로부터 무한히 멀어져가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곡란 202호실은 무한히 지연된 현재가 무수히 겹쳐짐으로써 누구도 ‘내가 있다’(to be)고 말할 수 없게 하는 텅 빈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불가능한 죽음 앞에 무한히 미끄러져가는 현재는 자아의 내재성을 파열시키고, 익명적인 유령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며 열린다. 무한히.

 

 

4. 작가와 인물이 서로 쫓으며 계속되는 이야기: 최제훈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최제훈의 소설에서 작품 속 인물들은 살아 있는 피조물로 텍스트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자율적인 삶을 산다. 대개의 소설에서 인물과 사건을 창조해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가는 인물보다 한수 위에 있지만, 최제훈의 경우는 이 당연한 사실을 잠시 뒤집어 종횡무진하는 인물들과 한판 술래잡기를 벌인다. 이런 소설관은 그의 첫 작품집 『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 2010)의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에서도 잘 드러난다. 소설집에 실린 모든 단편의 인물들이 여기에 총등장해 흥겹게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토막살인사건 앞에서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키르케: 어쨌든 빨리 머리를 찾아 신원을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장 책장이 열리면 어디선가 펑크가 날 텐데, 임시변통으로 내용을 수정하든가 해야지……

마리아: 어머, 너무 성급하시다. 어쩌면 여기 등장인물이 아닌지도 모르잖아요.

한수연: 흥, 너처럼 말이지?

미셸 페로: 아닐 수도 있지만 대비는 해야겠죠. 인원 파악을 계속합시다. 누군지 확인만 되면 내용 수정은 내가 맡겠소.

메리 셸리: 잠깐, 여기 작가가 한명은 아니죠. 지명도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저의 미천한 재주가 더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코넌 도일: 셸리 여사께서 지명도 운운하시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렇죠, 여기 작가가 한명은 아닙니다. 누군가 살해된 것으로 처리해야 할 테니, 그 방면의 적임자는 바로……

셜록 홈즈: 그럴 필요 없습니다.(279~80면)

 

단편 속 캐릭터들은 각기 하나의 개별적 인격체가 되어 독자와 작가를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한다. 독자에 의해 “책장이 열리면 어디선가 펑크가 날” 것을 걱정하는 이들은 소설 속 인물로서 직업적 소명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반복되는 “여기 작가가 한명은 아니”라는 말은 독점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실제 작가를 절대적인 위치에서 끌어내린다. 바르뜨(R. Barthes)의 말을 빌리자면, 최제훈이라는 작가는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를 배합하고 조립하고 인용하고 베끼는 수많은 ‘필사자’(scripteur) 중 한사람에 불과하다. 인용한 장면에서 마지막 ‘코넌 도일’의 말을 그가 창조한 인물인 ‘셜록 홈즈’가 가로막는 것은 작가-인물의 관계에서 전도된 권력을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지배할 수 없을뿐더러, 제목이 알려주듯 이 사건이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 일어난다는 점에서 독자 역시 작품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최제훈의 작품(work)은 이렇게 그 자체로 무한한 증식을 거듭하는 하나의 괴물이 되어, 고정된 해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탈구성적 텍스트(text)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최제훈 소설의 진짜 동력은 바로 이렇게 “인간의 상상력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속도로 무한히 재창조되는 현실”(「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퀴르발 남작의 성 79)에 맞대응하는 데서 비롯한다. 자신이 창조한 허구가 현실 속에서 몸을 부풀리면서 정작 현실의 일부인 작가 자신이 왜소해진다면, 더 빠른 속도로 허구를 분열시킴으로써 텍스트에서 여러겹으로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도록 하고 궁극에는 이 목소리들의 기원을 찾을 수 없음을 드러내 허구로써 허구를 내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제훈 소설에서 제멋대로 놀아나는 인물들 뒤에는 언제나 이 난장을 뒤에 숨어 킥킥대며 짐짓 즐기는 듯 보이는 작가가 어른거린다.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에서 의문의 변사체가 토막난 채 모아지지만 끝내 ‘머리’와 ‘성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순히 ‘기괴한 초현실주의 육체’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의 등장인물이 작가의 분신 혹은 꼭두각시로서 이성과 욕망이 제거된 존재일 수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끝없는 복제 속에서 기원이 부재하게 되는 이야기는 최제훈의 최근 장편 『일곱개의 고양이 눈』에서 더욱 능수능란하게 펼쳐진다. 인물들은 일인다역으로 출연하는 조연처럼 네편의 연작단편을 자유롭게 오가며 끝나는 순간 계속해서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각각의 단편은 다른 단편에 대한 인유의 체계 속에 존재하면서 기원 혹은 원본으로서의 현실을 부정한다. 소설 속에서 「푸른 수염」 동화에 대해 “만일 아무도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벽에 주렁주렁 걸어놓을 시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 빈방에는 무엇이 있었을까?”(59면)라고 던지는 질문이 이미 암시하고 있는 답처럼, 최제훈은 어떤 이야기라도 그 결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빈방’, 즉 아무것도 없다〔無〕는 사실뿐임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야기 자체에 대한 작가의 사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메타픽션적 사유를 보여주는 원형적인 작품이 바로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이다.

작가는 추리소설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셜록 홈즈’ 씨리즈의 주인공 명탐정 셜록 홈즈를 주인공으로 차용하는데, 소설이 시작하자마자 이 명탐정이 부딪히는 사건은 바로 자신을 창조해낸 작가 ‘코넌 도일’의 살인사건이다. 코넌 도일이란 이름에 대해 전혀 들어본 바 없으며 “의사가 얼마나 한가했으면 그런 서푼짜리 잡문이나 쓰며 지냈겠는가”라고 조롱하는 셜록 홈즈에게 코넌 도일은 자신을 창조한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이미 시체로 변해버린 채 자신의 추리를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자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다. 코넌 도일이 “피조물이 점점 현실의 신화가 되어갈수록 창조주는 모든 가능성을 거세당한 채 신전 한구석의 석상으로 굳어”가는 것을 참지 못해 자기의 무기인 ‘펜’으로 자살한 것이라는 홈즈의 추리는 그리스신화의 피그말리온의 음화(陰畵)가 이 소설에 드리워져 있음을 짐작게 한다.

그런데 홈즈가 “아름답고 완벽한 논리”라 자신했던 첫번째 추리는 마땅히 등장해야 할 ‘칼’ 대신 전날 주방에서 사라진 ‘국자’가 발견됨으로써 경관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전개했던 추리과정이 모두 코넌 도일이 교묘하게 유도해놓은 함정이었음을 눈치챈다. 홈즈가 암호를 해독하자 나타난 ‘To Sherlock Holmes’(셜록 홈즈에게)라는 메씨지는 작가가 자신의 죽음을 걸고 자신의 창조물인 탐정과 술래잡기를 시작하며 보낸 자신만만한 도전장에 다름아니다. 셜록 홈즈는 첫번째 추리의 실패를 곱씹으며 삼일 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사건의 전모를 깨닫게 되지만 이 해결 뒤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명쾌하게 수수께끼를 풀어냈건만 뭔가 개운치가 않아. (…) 내가 사건을 풀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햇살에 한순간 반짝, 빛난 이슬 때문이었어. 마침 그때 연주하던 곡이 「동결」이었고. 마침 연주하던 부분의 가사가 ‘뜨거운 눈물이 눈과 얼음을 녹여’였지. 그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에 얼음 칼이 반짝, 빛났던 거야. 단서를 통한 추론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벼락처럼 내리꽂힌 거라네. 이 일련의 우연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직관적인 해결은 나의 방식이 아닐세. 전혀 아니지. 도일 경이 처음에 나를 교묘하게 속였듯이, 이 우연의 일치마저 누군가의 예견된 시나리오라고 의심하는 건 나의 신경과민이겠지?(78면)

 

본래 탐정소설의 근대성은 탐정의 합리적 추론과정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하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탐정의 ‘무오류성’과 ‘전지전능성’이다. 세계에 대한 총체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고자 하는 계몽이성이 탐정소설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추리의 성공이 “벼락처럼 내리꽂힌” 비인과적 우연성에 절대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탐정소설을 배반한다. 그런데 이 추리의 과정에서 사건들을 취사선택하고 배열함으로써 우연적으로나마 총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셜록 홈즈는 자신을 창조한 코넌 도일에게 한번 속아넘어가고, 그후 작가 최제훈의 예견된 씨나리오에 따라 코넌 도일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낸다. 이는 결국 아무리 날고 기는 인물이라도 작가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에 “이 우연의 일치마저 누군가의 예견된 시나리오”는 아닌지 셜록 홈즈가 자신을 창조해낸 실제 작가를 의식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잠시 도달하지만, 결국 그는 메타적 지평을 넘어 달아나는 대신 그간 자신을 짓눌러온 권태와 무기력이 사라진 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능력에 도취된 채 소설은 마무리된다. 소설 속에서 인물이 스스로의 능력에 도취되면 도취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작가의 권능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래서 「여섯번째 꿈」(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잠이 드는 순간 곧 살인사건이 벌어지기에 어떻게든 잠을 쫓아낼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물들을 몰아넣은 투명한 악마의 정체가 곧 작가처럼 보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정말 악마가 우리의 꿈속을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악마의 꿈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66면)라는 인물들의 대화가 지시하는 바처럼, 소설은 이야기가 주는 쾌감에 중독되어 이야기의 탐욕스러운 포식자가 된 ‘악마-작가’의 손안에서 분열하고 증폭되어간다.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접하고 또 쓰기를 열망하는 책들에 대한 표현들—“무한대로 뻗어나가지만 결코 반복되지 않는 파이처럼”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282면), “마치 유령이 연주하는 변주곡처럼” “내용이 끊임없이 변하는 책”(361)—은 모두 재귀적으로 최제훈이 쓰고 있는 소설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 속에 한발을 들여놓는 순간, 독자인 우리는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는 “폐쇄된 미로”에 갇히는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정색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π」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Café 미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 간판 앞에 다가가면 ‘미로’ 앞에 ‘재’자가 있었음을 확인하게 될 테니까. 이는 어떤 출구를 찾더라도 미로가 다시 시작될 것임을 말해주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재미로’ 행해지는 것일 뿐이라고 능청스러운 작가가 속삭여주는 힌트다.

 

 

5. 서사 해체 이후의 서사

 

적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혹은 너무나 세밀하게 분산되어 있기에 대상을 선정해 싸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시대에 소설이 서사를 지키며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간 소설이라는 격자 내부에서 서사를 해체하는 힘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실험들이 있었고, 이들의 실험 안에서 서사는 알 수 없는 몸짓으로 아름다워지기도 했으나 가독성을 잃으며 독자들과 멀어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멀어진 독자와의 거리보다 더 문제적이었던 것은 전위적인 실험이 반복 속에서 곧잘 그 충격효과를 지속시키지 못하고 낯익은 관념성을 산출하는 순간들이었다. 물론 이는 모든 전위적인 예술이 제도 속으로 포섭되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오래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반대편에서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여기 장르문학의 문법을 빌려오고 있는 소설들은 가장 상투적인 것을 매개로 독자를 창조적으로 배반하고자 한다. 표면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법 자체는 낯익지만 이를 통해 비스듬하게 살아나는 것은 쉽사리 현실에 포섭되지 않는 낯선 잉여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들은 흥미진진한 장르의 즐김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 의미를 해독하려 해도 뚜렷하게 정돈되어 전달되지 못하는 무언가가 여기에 있다. 배명훈에게 그것은 우주라는 미지의 광대한 시공간이 주는 공허고, 이장욱에게는 죽음을 포함해 인간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며, 최제훈에게는 자신이 만들었으나 통제되지 않는 창조물이다. 이야기를 즐기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추동시키는 미스터리한 사건의 수수께끼는 블랙홀처럼 독자를 흡입하는 동시에 무질서의 혼돈 속으로 던져놓는다. 문제가 해결되고 수수께끼가 풀리는 카타르씨스 대신 이성의 간지(奸智)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것을 목도한 데서 오는 갑갑증과 현기증이 남는다. 누가 범인인지를 알아내는 순간, 세계 전체가 불가해한 비극의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것을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오이디푸스의 비극에서 목도한 바 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진정한 악몽이 시작되기에, 중독성있는 게임처럼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된다. 낯익은 서사에 방심하는 순간 허공에 발을 헛디디게 된다. 즐겁고 경쾌한데, 또 어둡고 무섭다. 이 양가적인 감정의 교차가 이 소설들을 손에서 뗄 수 없게 한다. 회의를 거듭한 이후 결국에는 서사로 복귀하기를 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