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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작품론

 

사랑의 불수의근(不隨意筋)

김애란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강동호 康棟晧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을 위한, 타자를 위한 변론: 박민규론」 「실패의 존재론: 김현의 문학론을 읽는 방법」 등이 있음. finh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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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金愛爛)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 이하 『두근두근』)은 생의 싱그러움만으로 스스로를 맹렬히 증명하는 청춘에 대한 찬가다.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는 박동하는 생의 기미로 때로는 야살스레 설레어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뻐근하게 조여오는 생의 지리멸렬에 아파하면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이토록 애잔하면서도 찬란한 계절의 색에 물들어 있었음을 절감할 것이다. 어느새 제멋대로 퍼져나가는 청춘의 감염력에 장악되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밀도 높은 긍정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이것은 가장 어린 부모와 가장 늙은 자식의 이야기다.”(7면) 나이는 열일곱이지만 “아버지도 이제 다 컸구나”(48면)라고 되바라지게 말할 수 있는 아이, 하지만 조로증(早老症)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신체나이는 80세에 이른, 죽음을 앞둔 소년 한아름이 화자로서 이야기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 소년이 한때의 청춘의 열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을 낳은 어수룩한 부모의 옛이야기를 상상한다. 부모보다 더 어른스러운 자식, 자식보다 더 철없는 부모라는 구도는 이제 김애란의 표장(標章)이라고 할 정도로 그녀가 가장 능란하게 다루는 전매특허다. 거기에 더해 가족 삼각형의 도식을 유머러스하게 비틀고 ‘나’의 기원을 긍정적인 환상으로 복원함으로써 자아의 상처를 다스리는 태도까지. 이 모든 특징들이 김애란 소설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일종의 근본 태도라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딘지 석연치가 않다. 이번 장편에서도 이전의 단편소설들을 관류하는 주제의식이 연속되고 그 형상화 방식이 반복된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인상이 가시지 않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서사의 구도와 특징 그리고 1인칭 화자의 유머러스한 태도까지 모든 것이 건재하지만, 김애란 소설이 거느리고 있던 정념의 질감이 근본적인 층위에서 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가? 얼핏 보면 기왕의 김애란식 주제와 모티프의 총결산처럼 보이는 텍스트지만, 이 모든 것들이 한데로 모이는 과정에서 화학적 변용이 발생하여 이전과 비슷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를 내장한 서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우선 몇가지 눈에 띄는 변화의 표지를 나열해보자.

첫째, 아버지와 어머니의 현실에서의 결합. 그간 이 작가가 가족을 다룬 텍스트들을 읽어보면, 소설 속 사건이 일어나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대개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 한 인물이 없기 마련이었다. 그녀의 가족서사는 언제나 아비 또는 어미의 부재를 바탕으로 씌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달려라, 아비』(창비 2005)에서는 대부분의 서사가 아버지를 복원하는 작업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의 경우에는 서술자의 욕망이 어머니에 대한 회상과 애도에 집중되었다.1) 그리하여 서로 결여의 방식으로 현존하는 아버지(혹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의 경우는 농담과 위트로 어머니는 모성에 대한 공감과 연민으로 전경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애란의 이 아비/어미 상은 이번 장편에서도 반복되지만, 서사의 초점이 더이상 그들의 부재에 맞춰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새로운 욕망을 담은 이야기가 시작됨을 예고한다. 당면한 생의 부재에, 그러니까 미래와 현재를 박탈당한 아름이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김애란의 『두근두근』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둘째, 1인칭 서술자의 심리적 상황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김애란의 유머에 나타나는 형질변화는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알다시피 유머는 김애란 소설에서 비장의 기술 중 하나다. 아니, 그녀의 유머는 단순히 기술이라는 말로 설명되기에는 부족한데,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그것은 김애란의 주인공들이 상처입은 자신의 생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정신승리법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머는 자아의 승리를 의미할 뿐 아니라 쾌락원칙의 개가, 즉 현실적 조건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관철시킬 수 있는 쾌락원칙의 개가를 의미”하고 “유머를 보이는 사람은 자신을 어른의 위치에 놓음으로써,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다른 사람들은 아이처럼 취급하면서 우월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지적2)은 그녀가 이전 단편들에서 선보였던 자아의 태도를 떠올려보면 상당히 절묘한 데가 있다. 부모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로 자아를 고취시키는 저 정신의 비약운동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기제가 바로 유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의 유머를 한아름에게 혹은 한아름이 처한 상황에 적용하려는 순간, 석연치 않음이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 인물이 더이상 정신적인 비약만으로는 스스로의 처지를 방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머가 도약의 운동을 통해 얻어지는 주관의 만족 같은 것이라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한아름의 괜찮다는 포즈(유머)는 주변 사람들의 전적인 동의와 웃음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없게 된다. 끔찍한 상처와 고통을 지닌 이가 심지어 자신의 상처를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마치 모두가 알고 있지만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진실(아름의 죽음)을 환기하는 것과 같아서 일순간 주변을 어색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예컨대 아름의 집에서 그를 돕기 위한 성금 모급방송 촬영이 진행될 때 문득문득 형성되는 서먹한 분위기는 그와 관련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더이상 김애란식 정신승리법이 동일하게 유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그것은 『두근두근』에서의 소설적 정념이 도약의 환희나 추락의 절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미묘한 높이의 감정적 등고선(고도)에서 형성됨을 가리킨다. 자아의 비약은 더이상 부모가 되는 것, 어른보다 더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을 가리킬 수 없다. 때문에 이번 소설에서 의미심장한 이미지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다음과 같은 상상 장면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내가 한번씩 점프할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것. 팔십이었다가 육십이었다가 열일곱이 되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진짜 내 나이가 되는 것.”(146면)

셋째, 유예된 기원이 마침내 씌어졌다. 이것은 결정적 차이이자 『두근두근』의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다. 기원에 대한 물음은 『달려라, 아비』에서 좀더 집중적으로 탐문되었지만, 그에 대한 적극적인 기술은 다소 지연되었음을 기억하자. 예컨대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말해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대면서 정작 아버지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올 때 그것을 동화적인 상상으로 대체하는 1인칭 화자의 전략을 목격한 바 있다. 욕망이라는 것이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는 지연구조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기원을 상상하면서 끝내 그 진실을 직접 쓰지 않는 것은 자아의 영악한, 방어적인 자기보존술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름에게는 이같은 지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쾌락이 더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그가 유예를 통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기원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욕망에 절박함과 간절함이 더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재하는 부모의 자리를 상상적으로 복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하려는 자아의 의지가 초점화되기에 이른다. 그러니 앞서 말한 것처럼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의 협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물론 기억에 의존하는 모든 과거 이야기가 그렇듯,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귀가 잘 안 맞”고 “기억하는 것도 조금씩 어긋났고, 해석하는 것도 달랐”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한아름이라는 인물로 하여금 “나는 이야기의 편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 그러니까 한편의 소설이 씌어지게 하는 중요한 틈으로 작용한다(93면).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 이야기를, 소설을 써야만 했을까? 아름의 소설이 두번 씌어졌고, 그중 한번은 지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자.3) 즉 두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있고, 각 버전마다 작동하는 욕망의 기제가 조금씩 다른 것이다. 첫번째 버전은 아름이가 삭제해버렸기에 온전한 형태로 확인할 방법은 없으나, 10면과 104면에서 마치 돌림노래처럼 같은 내용(“바람이 불면, 내 속 낱말카드가 조그맣게 회오리친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1부까지 기술되는 10대 시절의 부모 대수와 미라의 이야기가 그 지워진 판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연극무대 속 또 하나의 무대처럼, 대수와 미라의 삶을 생동감있게 상연한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첫번째 명제. 소설은 타인의 삶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부모에게 선물을 주려는 아름이의 의지와 욕망이다.

그런데 타인의 욕망만으로(설령 그것이 선의라 할지라도), 타인을 기억하는 일만으로 소설은 씌어질 수 없다. 설사 씌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허약한 욕망에 기반을 둔, 그저 잘 씌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이 부모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어머니가 한때 자신을 버리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첫번째 소설을 지운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두번째 명제. 소설은 ‘되살리기’가 아니라 ‘되살기’이다.

실로 소설은 타인을 위한 것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선 자신이 지닌 욕망과의 싸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욕망의 갈등 없이 소설의 세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내가 그 시간을 한번 더 살고 있는 듯한 기분”(57면), 이러한 찰나의 느낌이 단단한 지반 위에 세워지는 데 필요한 것은 아름만의 경험, 아름만의 욕망이다. 생을 관망하고 관조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스스로의 욕망을 내보이는 것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 한아름 자신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었을까? 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서하와의 연애이다.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일순간,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만 같던 청춘의 생동감 넘치는 고동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름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소설’이라 부르기에는 부끄럽지만 ‘소설’ 비슷한 게 되었으면 좋겠는 무언가에 공을 들였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원고라 생각하니 허투루 쓸 수 없었고, 일단 내 맘에도 들었으면 했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나는 내가 그 아이나 부모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259면)

 

“아버지는 사내가 되고 싶은 사내, 여름이 되고 싶은 여름”(329면), “어머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여름을 간섭하는 여름”(330면). 이처럼 자꾸 무엇인가 되고 싶다는 청춘의 욕망이 죽음에 임박하기 직전 아름의 삶에 허락되었기에, 비로소 아름은 자신을, 그리고 청춘시절의 부모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번째 버전 「두근두근 그 여름」은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한아름의 이야기(욕망)로 씌어지기 시작한다.

다시 묻자. 왜 소설인가? 상처와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삶을 비로소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완전한 거짓말도 사실도 아닌 무엇”(57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목표일 수 있지만, 그 진실만 붙잡고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진실로만 이루어진 삶이란 그야말로 실재의 사막에서의 끔찍한 삶에 불과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진실, 아름이의 경우 곧 당면해야 할 죽음을 외면하는 길은 없겠으나, 우리가 그 진실에 당도하기 위해 택한 길은 때로 거짓으로 가득 찬 것일 수 있다. 아마 소설이라는 것의 운명이 그렇지 않을까. 소설은 죽음으로 직행하는 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생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특별한 초월적 기제 없이 아주 사소한 높이로의 정신적 비약만으로도 이 생을 보다 살 만한 것으로 견디게 만들어주는 것인지 모른다. 가령 “너는…… 언제 살고 싶니?”(270면)라는 서하의 물음에 대한 아름의 대답이 담긴 편지는 감동적이다.

 

여러가지 색깔이 뒤섞인 저녁 구름. 그걸 보면 살고 싶어져.

처음 보는 예쁜 단어. 그걸 봐도 나는 살고 싶어지지.

다음은 막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볼게.

학교 운동장에 남은 축구화 자국, 밑줄이 많이 그어진 더러운 교과서, 경기에서 진 뒤 우는 축구선수들, 버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애들, 어머니의 빗에 낀 머리카락, 내 머리맡에서 아버지가 발톱 깎는 소리, 한밤중 윗집 사람이 물 내리는 소리, 매년 반복되는 특징 없는 새해 덕담 (…)

어쨌든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게 나를 두근대게 해.(271~72면)

 

저 미세한 자취들로부터 삶에의 의지를 주입받는 주인공의 태도에는 엄밀히 말해 개연성 같은 것이라곤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저 무심하게 놓여 있는 객관의 사태들에 인간으로 하여금 살고 싶게 만드는 동력의 원천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얼마쯤은 그런 착각과 오해 속에서 길러지는 존재라서, 이로부터 생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우연이라는 격랑 속에 내던져진 현생의 부조리함까지 껴안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생에의 의지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심장의 근육처럼 내 안에 있으면서 나의 통제를 벗어난 생의 기미들, 장악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타자들의 흔적인지도 모른다. 타자라고? 사실 타자라는 존재야말로 허구적인 것 아닌가.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이 진정 당신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나? 오해와 착각을 감수하려는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서성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더 잘, 아름답게 오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애란의 소설이 내장하고 있는 전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오해에 대한 긍정 혹은 소설적 긍정이라고 불러도 좋다. 말과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관심이야 진작부터 잘 알려진 것이겠으나, 그 긍정의 농도가 장편에 이르러 한층 짙어진 느낌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름이 나중에 서하라는 인물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도, 그래서 그와 서하 사이에 오갔던 감정적 교류가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각한 후에도 이전처럼 소설을 지우지 않았던 것은 바로 오해에 대한 긍정, 욕망에 대한 긍정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우연처럼 찾아오는 이같은 생에 대한 긍정의 근육, 그 불수의근(不隨意筋)에 의해 일으켜진 의지와 욕망의 총체를 일컬어 청춘의 리듬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청춘은 신체적 젊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지속해서 삶의 편으로 되돌리게 만드는, 그 생의 불수의근이 보내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의문이나 찜찜함 같은 것이 남는 사람도 있겠다. 가령 오해에 대한 긍정 자체만으로 문학의 본령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 문학은 아픔의 난마(亂麻)에 허덕이는 세계의 실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문학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믿음임을 감안하면, 김애란이 도달한 긍정의 단계가 손쉬운 화해의 비약처럼 읽힐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김애란의 이번 소설이 그러한 우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춤을 추며 절망과 일전을 벌이겠다는 긍정이, 그리고 자식의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부모에게 슬픔 이상의 정념을 되돌려주려는 아름의 태도는 니체가 비판했던 체념적 수락으로서의 긍정과는 체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만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그의 긍정은 우연적인 고통에 불과한 삶에 필연성의 서사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삶의 균열을 봉합하는 긍정이 아니라(아름은 끝내 자기의 고통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호명하지는 않는다), 그 필연의 부재 자체를 수용하고 급기야 자아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으로까지 받아들이는 긍정, 니체를 해설한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긍정의 긍정’에 가깝다.4)

물론 김애란의 인물들이 좀더 입체적인 생의 국면 속에서도 긍정의 미학을 설득력있게 개진할 수 있을지의 문제가 남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앞으로 그녀가 써나갈 소설들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만 지금과 같이 낙관의 가능성이라는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진창의 현실에서, 긍정을 긍정하려는 김애란의 능력이 희귀하고도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덧붙이자. 그 능력 덕분에 한국문학은 앞으로도 종종 “놀라움인지 노여움인지, 반가움인지 서러움인지 모를”(307면), “누가 들어도 참으로 선동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리듬”(32면)을 느끼면서 스스로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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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에서 어머니로의 전환 양상에 대해서는 심진경 「김애란을 다시 읽는다」, 『세계의문학』 2009년 여름호 참조.

2) 지그문트 프로이트 「유머」, 『예술, 문학, 정신분석』,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2007), 512~13면.

3) 이것은 연재본과 단행본의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다. 단행본과 달리 연재본에서는 「두근두근 그 여름」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1부의 끝부분에서 시작된다. 이 차이가 중요한 것은 개작과정에서 플롯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을 떠받들고 있는 어떤 글쓰기의 욕망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투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에필로그가 한아름이라는 존재의 원초적 탄생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아울러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새로운 시작을 적시하는 것(“바야흐로 진짜 여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은 영원히 반복되는 삶까지 기쁘게 받아들이는 니체적 운명관과 공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