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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린비 2011
‘근거 없음’의 근거
김성호 金成鎬
서울여대 영문과 교수 shkim@swu.ac.kr
밋밋한 제목이 주는 느낌과 달리 이 책은 민주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기술한 입문서도,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을 담은 역사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의 쟁점에 깊숙이 개입해가는 정치적 ‘문건’이랄 수도 없다. 그럼 뭔가? 무엇보다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하나의 사유다. 지적 탐색 또는 모험이라는 뜻의 ‘사유(思惟)’. 그러니까 이 책은, 비록 거기서의 주장과 표현들이 데리다, 들뢰즈, 랑씨에르 등 현대 서구사상가들에게 크게 빚지고 있고 어떤 지점에서는 의존이 지나치다는 인상도 주지만, 기본적으로는 저자 자신의 머리로 민주주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사유의 내실과 현실성을 따져야 마땅하지, 바쁜 세상에 왜 복잡하게 ‘철학하는’ 시늉을 하느냐고 핀잔을 줄 일은 아니다. 입장들은 안 그래도 넘쳐난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오히려 차근차근 자기 입장과 행동의 근거를 찾는 노력, 지젝의 표현을 빌리면 “생각하려는 차가운 결의”(『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창비 2010, 39면)가 아닐까 싶다.
네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은 첫 장에 모두 나와 있다(이어지는 두개의 장은 각기 이론과 현실의 맥락에서 설명을 덧댄 꼴이고 마지막 장은 다소 어설픈 ‘단상’으로, 전체적 구성이 그다지 치밀해 보이지는 않는다). 주장은 세가지다. 첫째, 민주주의의 ‘아르케’(archē, 근거)는 ‘아르케 없음’이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특정 정체(政體)가 아니라 근거의 근거 없음을 드러내는 영원한 실천이다. 둘째, 민주주의의 주체인 데모스(demos, 민중)는 ‘형상 없는’ (비)존재이며, 따라서 정체(正體)를 규정할 수도, 대표(표상)할 수도 없다. 셋째, 민주화투쟁은 다수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아르케를 문제삼는 ‘소수적 투쟁’이다.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음’을 아르케로 지닌다는, 데리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주장은 민주주의와 대의제를 동일시하는 입장을 비판하기 위한 예비동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근거 아래쪽의 ‘심연’에서는 어떤 척도나 원칙도 작동하지 않으며 “우리는 여기서 근거 없이, 자격이나 조건 없이, 우리와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그들과 공동의 삶을 위한 교섭을 벌여야만 한다”(27면). 이는 다양한 정체성의 공존을 이상화하는 다문화주의보다 급진적인 발상인데, 저자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의 근거가 몰락할 위험을 각오하고 비판의 심연에 기꺼이 자신을 개방”(28면)하려는 의지, 혹은 “‘어둠’, ‘잉여’, ‘위반’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세계의 생성과 변화, 다양성을 긍정하는”(30면) 태도를 뜻한다. 민주주의를 정체의 창조적 개방과 연관시키는 이같은 이해는 아나키즘의 전통에 근접하는데, 이는 적어도 현재 우리사회 내의 민주주의 담론의 맥락에서는 참신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책에서 미처 사유되지 않은 문제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근거 없이, 자격이나 조건 없이” (한 민족국가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교섭을 벌여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말해지지 않은 이유에는 인간과 공동체에 관한 어떤 관념-이념-형상이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해방된 ‘인간’(그러나, 엉뚱한 상상인지 모르지만, 소수자가 인조인간이라면 어떨까? 외계인이라면 어떨까?), 그런 ‘인간들’이 조건 없이 공존하는, 외연이 무한히 확장된 ‘공동체’의 관념. 이것이 ‘민주주의의 아르케는 아르케 없음이다’라는 역설적 명제가 성립하는 근거, 즉 아르케다. 이 아르케는 동시에 역사의 (역시 말해지지 않은) 텔로스(telos)인바, 민주화투쟁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이 텔로스와 현실 사이에 성립한다. 그런데 데리다주의자는 어떨지 몰라도 맑스주의자라면 여기서 다시 한가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아르케, 혹은 ‘(아르케 없음이라는) 아르케의 아르케’의 역사성에 관한 질문이다. 어떤 역사적 조건 위에서 이 조건 없는 ‘인간’과 ‘공동체’의 관념이 탄생했을까? 그리고 이 관념은 현실 안에서 어떤 역사적 궤적을 그리게 될 것인가? 이것은 저자 자신에게서 기대할 질문은 아니다. 다만 기왕에 ‘근거’(아르케)와 ‘심연’을 사유할 바에는 자신이 펼치는 사유의 근거에 대해서 좀더 차분히 따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와 연관하여 평등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저자는 ‘심연’에서 “모든 것들은 근거 없이 원초적으로 ‘평등’하〔다〕(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 아니라 ‘법 이전의 평등’, ‘법에 우선하는 평등’이다)”(27면)라고 하면서 여기에 민주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초적 평등’이라니? 그런 게 존재하는가? 따옴표를 치든 말든 ‘평등’이라는 단어를 말한 순간, 저자는 어떤 기준이나 근거, 어떤 법의 관념을 들여온 셈이다.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이 표현에 저자는 incommensurable이라는 영어단어를 병기했다) 누군가와 우리는 ‘평등’할 수 없다. “법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 아마도 차이나는 역량들일 것이고, 이는 “교섭”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영향관계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저자가 “법 이전”의 민주주의, 그를 통한 정체성의 개방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면 이 차이나는 역량들의 관계에 주목했어야 하지 않을까?
데모스의 ‘형상 없음’은 민주주의의 ‘아르케 없음’과 짝을 이루지만, 후자보다 더 현실성이 느껴지는 명제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시민과 외국인이 뒤섞여 있고 ‘존재해서는 안되는’ 미등록 이주자까지 포함하고 있는 데모스는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가 모두 전제하는 ‘인민’이나 ‘주권’ 개념과 양립하기 어려운 ‘형상 없음’의 특징을 띤다. “대의제 민주주의자의 적대자는 인민주권이 곧바로 실현되길 바라는 직접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인민과 주권을 전제하는 상황이 바로 대표, 즉 대의제 도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대의제의 적대자는 대의 불가능한 것, 다시 말해 표상 불가능한 것으로부터 온다”(73면).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주권’의 직접적 관철)의 대안으로 저자가 내세우는 것은 ‘소수적 투쟁’인데, 이는 사회의 지배적 척도에 대항하는 싸움을 뜻한다. 그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거지를 세가지로 특정해 말한다. 첫째, ‘꼬뮨들’. 둘째, 인민이나 국민의 통일성이 깨지는 곳, 즉 이주자, 난민, 빈민, 혹은 “‘인터내셔널’의 운동.” 셋째, 네팔-한국인이나 대학생-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같은 “‘사이 존재’들”(77~78면).
통일된 형상으로서의 ‘인민’이나 ‘주권’이 ‘대표’ 개념에 선행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기초해 형성되었다는 것, 직접민주주의는 어떤 조건 하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 민주주의 투쟁은 ‘소수적 투쟁’이라는 것 등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대한 통념을 뒤집는 그럴듯한 발상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역시 검토되지 않은 전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의구심이 드는 것은 ‘데모스의 힘’에 대한 낙관의 근거다. 저자는 데모스의 힘은 “형상들을 구별하고 자격을 나누는 기준들을 위배하면서”(38면) 나타나며, “데모스야말로 개인을 넘어선 연대의 이름”(39면)이라고 말한다. 물론 언제나 기준에 대한 위배는 있을 것이며, 저자 자신도 언급하는 2000년대의 촛불시위가 보여주듯이 ‘형상 없는’ 다중의 연대가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위배’가 언제나 민주주의의 지향과 결합되지는 않으며(기독교 근본주의자도 종종 사회의 지배적 기준을 ‘위배’한다), ‘위배’가 반드시 “척도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이들과의 ‘연대’를 동반하는 것도 아니고(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은 종종 정규직 노동자의 무관심이나 적개심 속에 진행된다), 또 다중이나 꼬뮨들의 ‘연대’가 특정 정세를 요구할뿐더러 하나의 정세 속에 이루어지는 ‘연대’의 방향은 다양하다(촛불시위가 하나의 ‘연대’라면 시위장소를 선점하겠다고 나선 보수단체와 노인들의 행위도 ‘연대’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위배’를 결정하는 기준, 데모스와 그 적(敵)을 나누는 기준을 요구받고 있다. 다시 말하면 데모스에 대한 믿음은 데모스의 안과 밖을 가르는, 게다가 데모스 안에서도 발견되는 적대의 구조에 대한 성찰과 결합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유가 종교와 구별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화투쟁을 ‘소수적 투쟁’으로 재규정하려는 시도는 그 투쟁이 보편 인류의 역사 안에서 지니는 의의에 대한—투쟁의 ‘근거’에 대한—좀더 차분한 성찰을 동반해야 한다. 그래야 사유가 ‘미결정성’의 허무주의에 갇혔다는 오해를 받지 않고 광범한 설득력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