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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

 

세계문학에 지방정부는 있는가

동아시아문학과 관련하여

 

 

윤지관 尹志寬

문학평론가, 덕성여대 영문과 교수. 전 한국문학번역원장. 평론집으로 『놋쇠하늘 아래서』 『리얼리즘의 옹호』, 편서로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 등이 있음. jkyoon@duksung.ac.kr

 

 

1. 세계문학의 외무부와 지방정부

 

동아시아문학의 위상을 생각해보려는 이 글의 제목, 세계문학과 지방정부의 얼핏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결합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매력적이면서도 함축적인 강연 ‘세계문학은 외무부를 두는가’에 자극받은 것이다. 3년 전 인문사회과학 부문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홀베르그 상을 수상한 제임슨은 기념 심포지엄 기조강연에서 지구화시대에 민족적 차이들의 관계 맺기와 중심 없는 지구적 다양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하나의 문제 혹은 수수께끼로서 세계문학이라는 의제를 다시 부각시켰다. 세계문학은 “이미 정해져 있는 판테온이나 걸작들이 정기적으로 추가되는 상상의 박물관”이 아니라, “투쟁의, 즉 경쟁과 대립의 공간이자 터전”이며, 이 문학투쟁은 무엇보다도 “힘이 강한 언어와 힘이 약한 언어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1)

이같은 제임슨의 관점은 일찍이 비서구 제3세계 국민문학들의 지배적인 특성을 ‘민족적 알레고리’(national allegory)라고 지칭하면서 이를 서구의 시각에서 재단할 수 없다는 주장2)을 펼친 논자로서 당연할 법하고, 서구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 대한 비판이나 조정의 요구가 힘을 얻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특별할 것도 없겠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감지되는 것은 지구화와 더불어 해체되고 있는 혹은 해체되었다는 ‘민족적인 것’의 의미를 복원하려는 의지다. 과연 지구화의 시대에 민족국가는 유효한가, 또 민족적 특수성이 세계라는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물음, 세계문학이라는 의제는 바로 이같은 물음들을 촉발시킨다.

‘민족적인 것’이 서구의 역사경험에서 파시즘과 직결되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해체되거나 버려질 수 없는 것은, 여기에 저항과 변화의 동력인 집단성이 늘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범주는 여전히 살아 있는 힘이며 각 민족의 상이한 구체적 상황과 역사에는 근원적 독특성(radical singularity)이 있어서, 근대성에 도달하는 목적론적인 도상에서의 그 선후를 따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각 민족의 문학 산물들이 저마다 고유성을 인정받고 있다면, 그것이 세계문학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는 경쟁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세계문학을 “위대한 혹은 고전적인 한가지 텍스트의 가치라는 관점이 아니라 민족적 산물들 사이의 관계로” 볼 때, 이 관계는 조화로울 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문학의 장()에서라면 문학의 국제관계를 관장하는 ‘외무부서’가 필요할 법하지 않은가?

그렇더라도 세계문학의 외무부라니, 꽤나 당혹스러운 어법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런데 다양한 국민문학의 산물들이 다양한 세계독자에게 각각의 고유성을 내세우며 나타나게 될 때 그 복잡한 관계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업무가 비유만이 아닌 실제로 생겨날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세계문학을 국민문학들의 연합체로 본다면, 이 연합을 구성하는 각 국민문학들이 상호경쟁하면서 형성하는 관계에는 자국 내의 문학논리나 여건과는 다른 어떤 해외적인 메커니즘이 작용할 수 있다.

제임슨의 이 강연이 필자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하는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봉사하기도 했던 개인적 경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 정부는 국가사업 차원에서 자국 국민문학의 해외 번역과 출판을 지원해왔고 여기에는 국가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정책적인 목적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제임슨이 말하는 세계문학의 외무부서는 국민국가들 사이에 무역상의 역조를 시정한다거나 자국문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세계문학 개념에는 ‘불균등과 정전(正典) 상의 불평등’이 작용하고 ‘근본적 차이와 대립’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문학의 국제관계를 이룩해나가는 일은 각 민족의 특수성을 살리면서 그 문학적 성취들이 패권적인 보편의 틀로 환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정치상의 외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 정교한 수완과 타자에 열려 있는 정신이 필요할 법하다.

이를테면 한국문학의 외무부서라 할 한국문학번역원의 존재 자체가 세계문학이 안고 있는 일종의 모순을 증언하고 있다. 그 설립부터 국가재정이 투입된 이 공공기관의 해외사업에는 자국 문학의 뛰어난 성취를 세계독자와 공유한다는 취지의 이면에 세계문학의 공간구성에 전략적으로 개입하여 한참 뒤떨어져 있는 문학부문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국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이것은 세계문학이 국민문학들 혹은 어느 한 국민문학에 소속될 수밖에 없는 개별 작가들로 이루어진 자율적인 질서가 아니라 정치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애초부터 국민국가 사이의 권력관계에 따라 형성된 불평등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제임슨이 말하는 외교부서가 비유를 넘어 실체를 가진다는 사실은 세계문학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보편성의 질서에 포박되어 있음을 새삼 환기시킨다. 제임슨이 최종적으로 던진 물음, 즉 “차이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 맺으며, 민족특수성이 어떻게 보편적이 될 수 있으며, 중심 없는 지구적 복수성이 어떻게 상상될 수 있는지”는 외교로 조정될 문제만이 아니라 현존질서를 심문하고 해체하는 기획을 요구한다. 가령 세계문학을 관장하는 ‘문학적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상정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 국제기구를 움직이고 정책을 좌우하는 힘은 현존하는 유엔이 그런 것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담론이 그렇듯이 동아시아문학론 또한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의 한 방식이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서구중심의 세계문학 질서에 개입하는 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문학론을 생각하자면, 이 지역의 문학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통합되어 있고 대외적으로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으로 떠오른다. 과연 동아시아의 지역문학은 일종의 자치적인 지방정부로서 중앙권력에 맞서고 변화를 추동할 만한 역량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사실 제임슨의 이번 강연은 지구화의 현실에서 민족적인 것의 의미를 되새긴 데 큰 의의가 있지만, 민족단위를 지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광역으로 통합하여 사고하지는 않는다. 비서구권의 국민문학들을 통칭하여 ‘민족적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초기의 관점은 그대로 유지된다. 비서구권의 역사적 체험이 생성한 원한의 정서와 고통의 현실로 인하여 그 문학에는 극히 사적이고 심리적인 이야기도 늘 집단적인 경험과 결합해 있다는 것이다. 세계문학 논의에서 제3세계문학의 특성을 이처럼 통괄해낸 것에는 기존의 제1세계적 관점을 갱신하는 미덕이 있지만, 대신 이 환원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 자신도 말하는 각각의 국민문학의 ‘근원적 독특성’은 물론 가령 동아시아나 아랍 등 비서구권 내에서 광역지역을 사유의 대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3)

가령 그는 루쉰(魯迅)의 「광인일기」나 「아Q정전」을 서구적 근대성의 침투에 대한 중국민족의 반응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꾸바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의 텍스트들과 병치시키지만, 루쉰 문학의 세계문학적 의미는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시각을 확보할 때 더 온전히 살아날 수도 있다. 한 중문학자는 루쉰이 토오꾜오에서 이광수(李光洙)나 홍명희(洪命熹)와 같은 시기에 머물렀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착안하여 근대의 도래에 직면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공통의 운명과 그 반응의 차이를 환기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루쉰의 문학적 대응에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추구와 아울러 탈근대에 대한 지향이 결합된, 말하자면 ‘이중과제’적인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4) 이것이 동아시아의 지역적・문화적 특성과 결합되어 있는지, 혹은 동아시아문학의 핵심 성취가 이같은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지는 논의거리겠으되, 이처럼 지역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은 세계문학의 갱신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보편화하는 서구의 헤게모니에 맞서서 일정한 지역에 토대를 둔 국민문학들의 연대와 소통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세계체제론적 문학론과 주변의 문제

 

세계문학을 일종의 국제기구로 형상화하기로는 ‘문학의 세계공화국’을 내세운 빠스깔 까자노바의 작업이 있다. 까자노바는 부르디외(P. Bourdieu)가 말하는 장(field)의 개념을 세계 차원의 문학영역에 적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문학공화국은 정치적 경계들에서 독립되어 있되 권력관계에 따라 문학의 가치가 평가되고 그 존재가 인증되는 세계로, 자체의 자본과 지방과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권력의 도구는 언어라는 것이다. 이 공화국의 구성원들은 작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며 여기에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서 ‘문학의 그리니치 표준시’가 설정되어 있고 그 중심이 되는 수도는 빠리다. 빠리는 언어의 우월함과 문학적 성취 및 그것을 가능케 한 제반 여건 등 풍부한 문학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특수한 한 민족의 범위를 벗어나 문학세계의 탈민족화된 보편적 수도로 확립되었다.5)

세계공화국의 꿈은 칸트의 영구평화론 이래 근대세계에서 면면히 살아 있는 전통으로 유엔이 그 이념의 한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의 목적은 그 구성원인 국민국가들 사이의 분쟁을 막고 상호협력을 끌어냄으로써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지만, 실제의 규제력은 현재 세계질서 내의 강대국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각 국민국가들이 자신의 주권을 양도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정치체제로서의 세계공화국이 현재로서는 성립되기 어려운 반면6) 문학에서 세계질서는 일정한 가치척도이자 기원으로서의 수도 빠리, 더 넓게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실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까자노바의 세계문학공화국에 지방정부는 존재하는가?

문학의 세계질서에 대한 이같은 인식이 높아진 것은 지구화현상이 강화되어온 1990년대 이후의 세계사적 변환과 관련이 있다. 세계문학이라는 기왕의 범주가 비교문학의 차원을 넘어 이론화하게 된 데는 월러스틴(I. Wallerstein)을 비롯한 세계체제론자들에 빚진 바 크다. 까자노바도 그렇지만 비교문학자인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의 근년의 작업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명실상부하게 수립된 지금의 국면에서 세계문학과 그 역사를 이해하는 통합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하는 점에서 세계문학 논의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공이 있다. 그러나 이 문학의 세계체제론에서 기존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발본적인 혁신이 있는가는 의문이며, 대표적인 세계문학 연구자인 데이비드 댐로쉬처럼 까자노바를 빠리 중심주의라고 간단히 치부하는 것7)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문학 세계공화국의 권력과 자본은 중심부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를테면 동아시아 같은 특수한 성격의 지역이 일정한 권한과 자율성을 가지고 지방정부를 구성할 여지는 없다고 하겠다.

기실 세계문학은 그 개념의 기원에서부터 유럽중심주의에 침윤되어 있다. 이 용어로 타자의 문학에 대한 열린 자세와 외국 작가들 사이의 교류와 연대를 말하고자 했던 괴테에게도 그 세계문학은 대개 유럽문학이었다. 영국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19세기 후반 영국의 대표적인 비평가 매슈 아놀드가 프랑스의 아카데미 설립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처럼 문학평가의 보편적 기준을 수립하고자 한 프랑스문화의 선진성을 영국의 후진적인 편협성에 대비했을 때, 이는 다름아닌 까자노바적인 빠리 중심의 유럽문학 질서에 대한 증언인 셈이며, 유럽 전통의 세계성에 대한 이 인식은 “호머에서부터의 유럽문학 전체와 그 내에서의 자국의 문학 전체가 동시적으로 이루는 질서”를 말한 T.S. 엘리어트로 이어진다.8)

그렇다면 유럽이 세계에 다름아니었던 괴테 시대와는 달리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지구로 확산된 지금의 국면에서 국지의 문학들은 어떻게 세계문학의 영역에 편입되고 있는가? 누구보다도 앞서 세계체제론을 문학연구에 도입하고, “하나이자 불평등한” 세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비교문학 연구의 차원을 높였다고 평가되는 모레띠의 경우에도 서구중심적 시각은 여전하다. 본격적인 세계문학 논쟁의 촉발제가 된 「세계문학에 대한 추측들」을 비롯한 그의 작업에 두드러지는 것은 중심부의 관점에서 세계문학의 지형을 그리는 지도 작성자의 눈이다. 그는 각각의 국민문학들에 대한 면밀한 읽기(close reading)의 실질적 불가능성을 내세워 각 지역 연구자들의 작업에 의존하는 원거리 읽기(distant reading)를 세계문학 구성의 방법론으로 제시한다.9) 필자는 재작년 인도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세계문학담론과 민족문제’를 주제로 발표하면서 모레띠처럼 원거리 독서를 당당히 내세울 수 없는, 서구문학에 대한 면밀한 읽기의 민족문학적 의미를 천착해온 한 변방 출신 비평가의 당혹감을 피력한 적도 있지만,10) 그의 핵심작업 즉 장편소설이라는 서구적 형식의 서사가 어떻게 각 국지로 전파되고 문학적 의미를 얻게 되는가를 탐구하는 작업부터가, 서구적 근대성의 파급과 각 국지에서의 반향이라는 차원에서 세계문학의 형성을 보는 서구중심주의의 소산이다.

모레띠의 세계체제론적 관점의 문학사 기술에서 필자에게 더 인상적인 작업은 근대 이후의 문학사를 ‘세계 텍스트’(world text)의 탄생과 관련하여 규명하려 한 『근대 서사시』(Modern Epic)이다. 여기서 그는 근대 자본주의체제가 성립하고 발전하는 단계에 걸맞은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표현, 즉 세계체제의 모순구조를 반영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해결하는 ‘세계 텍스트’—『파우스트』 『모비딕』에서부터 『황무지』 『율리씨즈』를 거쳐 『백년 동안의 고독』에 이르는—를 호명해낸다. 문학이 세계체제의 형성이라는 장기추세를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은 자칫 소박한 반영론으로 떨어질 위험도 있지만, 근대화의 기획에 총체적으로 대응하는 문학들을 범주화한 점이나 이를 통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해묵은 대립구도를 벗어나고자 한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특히 모더니즘에 대한 그의 관찰은 흥미로운데, 조이스(J. Joyce)의 『율리씨즈』가 그렇듯 모더니즘은 근대성의 족쇄가 더욱 강고해진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반영이자 활력이 상실된 범속성의 극치라는 것이며,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점에서 탁월한 성취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일정한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루카치(G. Lukács)의 논법과도 이어지는 통찰이라고 할 만하다.11)

그러나 그의 문학사 독법이 어디까지나 서구정전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기까지 한 서구대작 중심의 ‘근대 서사시’ 목록에서부터 엿보인다. 그의 초점은 어떻게 근대성의 모순이 모더니즘의 폭발을 낳고 그것이 세계체제의 강고함을 반영하는가에 있지, 제3세계의 구체적 현실과 이 근대형식들의 만남이 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모더니즘만이 아니라 리얼리즘의 갱신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 성과를 산출하고 있는 현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이 대작 목록 말미에 제3세계 작가로는 유일하게 가르시아 마르께스(Gabriel Garcia Márquez)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마술적 리얼리즘’의 텍스트는 서구가 마주친 서사의 한계를 돌파하는 면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세계체제에 포섭되어 서구의 강탈, 즉 제국주의의 역사를 감추고 합법화하는 ‘결백의 수사학’에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 모레띠 자신의 관찰이기도 하다. 세계문학으로서의 보편성을 얻는 일이 곧 악마와의 계약일 수 있으며 그만큼 그 문학이 발원한 민족이나 지역의 정치적 기원을 감추려는 무의식의 소산일 소지도 큰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까자노바로 돌아오게 된다. 유럽중심의 세계문학공화국을 구성해낸 까자노바에서 주변문학의 위상이 중심에서의 거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학의 자산은 본질적으로 민족에 토대를 두되 그 각각의 국민문학에 소속된 작가가 보편성을 얻게 되는 ‘마술과 같은 변환’은 바로 민족으로부터의 도피, 즉 탈민족 과정을 통해서다. 까자노바의 통찰이 돋보이는 대목은 이 변환과정에서 지배질서를 흔드는 문학혁명의 전망이 열린다는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문학세계와 그 외곽들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과격한 불연속성은 단지 주변부의 작가들에게만 인식 가능한데, 이들은 “현재로 진입하는 관문”(옥따비오 빠스의 말을 빌면)을 찾는다는, 그리고 그 중심구역들에 대한 입장권을 얻는다는 그런 목적만으로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문학의 권력균형의 성격과 형태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12)

 

중심부 작가들이 세계문학의 불평등구조에 맹목일 수밖에 없는 데 비해 주변부 작가들이 이를 볼 수 있는 유리한 입지에 서 있다는 지적은 곱씹을 만하다. 주변부의 중남미작가들을 역사의 교외 거주자이자 “근대성의 잔치에 불이 꺼질 무렵에 도착한 틈입자”라고 지칭13)한 옥따비오 빠스(Octavio Paz)는 타자의 시간인 빠리와 런던과 뉴욕의 표준시를 발견하고 자신의 후진성을 자각함으로써 새로운 미적 가능성의 세계를 추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주변부적 관점의 의미에 대한 이같은 까자노바의 인식은 세계문학을 바라보는 제3세계적 시각을 환기시키고, 근대성의 시차에 대한 그의 의미부여는 문학의 혁명을 촉발시키는 어떤 복합국면으로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을 찾아낸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관찰과도 통한다. 그러나 까자노바가 말하는 문학혁명은 제3세계문학의 문제의식과는 상반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시차에 대한 주변부 작가의 자각은 ‘보편적인’ 문학에 근접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탈민족, 탈구체화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제3세계적 관점이 세계를 전체로서 보되 민중적인 시각에서 보자는 것임에 비해, 까자노바의 주변부 시각에는 지역의 구체적인 현실과 그 극복의 운동까지 포함하는 변혁의 원천에 대한 인식이 빠져 있다. 오히려 정치적 기원을 지우는 것이 바로 그 혁신의 내용을 이룬다. 까자노바가 설정한 20세기 문학의 그리니치 표준시는 다름아닌 모더니즘인 셈이다.

물론 모더니즘이 이룩한 혁신의 의미를 부정하기는 힘들고, 복합국면에 대한 페리 앤더슨의 관찰도 모더니즘의 폭발이라는 서구문학의 장관을 역사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러나 서구적 근대성의 유입으로 창출된 주변부의 문학공간에는 이 좁은 의미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낭만주의나 사실주의 등 근대와 대결하는 가운데 탄생한 여타의 근대문학의 자산들이 오히려 더 풍성한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령 근대 초기 한국문학에서 중심부와의 시간적 거리에 대한 이상(李)의 자의식과 초조감14)이 「오감도」라는 실험적인 모더니즘시로 나타났다면, 봉건과 식민체제 그리고 근대적 세계의 만남이라는 복합국면은 염상섭(廉想涉)의 『삼대』와 같은 리얼리즘의 성취를 낳은 것이다.15)

문학에서 대표적인 세계체제론자라고 할 모레띠나 까자노바에게 세계문학은 결국 서구전통의 보편성에 대한 확인이며, 혁신을 통해 도달하는 문학의 새로운 세계질서란 것도 그 정전의 범위를 세계화된 각 국지의 성취들로 확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것은 세계문학을 기존 정전에 새 작품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특수하고 독특한’ 민족적 성취조차 포함하는 국민문학들의 관계로 설정하고자 하는 제임슨의 문제의식에 미치지 못하고, 그들이 원용하는 월러스틴의 인식, 즉 지구적인 차원으로 조직되는 반체제운동의 일환으로 서구보편주의를 극복해나갈 국지의 문화투쟁(“특수주의적 문화적 실체들을 창조・재창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16)도 포괄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문학의 세계체제론자들의 이런 한계 때문에 문학의 지역연대가 세계체제에 저항하는 실천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 글의 문제의식은 더 절실해진다.

 

 

3. 동아시아문학, 현실과 과제

 

월러스틴의 말대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전지구적으로 수립되는 그 완성의 시기가 동시에 위기의 시작이라면,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확산에 대처하는 지역적인 움직임들도 그 위기에 대한 대응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간의 경계를 지우는 지구화가 각 국지의 민족주의를 촉발하고 유럽연합이 그렇듯이 권역별로 국민국가들의 결속이 이루어지는 현상도 목도된다. 동아시아를 사유와 실천의 대상으로 삼는 작금의 동아시아학계의 움직임도 이 자본주의체제의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하자는 것이며, 문학에서 동아시아론을 모색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이 지역의 국민문학들을 동아시아문학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하고 이를 기존 세계문학의 구조를 혁신할 동력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수월해 보이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개념부터가 좁게는 동북아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부터 넓게는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고,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고려하는 경우 미국이나 러시아를 포함하기도 한다. 문학에서 동아시아라면 역시 과거 중화문화권으로 분류될 수 있는 지역, 즉 한·중·일 삼국과 몽골 및 베트남 정도를 포함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도 일정한 독자성을 가진 대만문학이라든가 민족적으로는 남한과 통괄될 수 있지만 같은 국민문학으로 볼 수 없는 북한문학의 경우도 있어서, 동아시아지역에서 세계문학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하나의 문학체제를 형성하는 일에는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가령 유럽문학의 경우 그 지역의 문학전통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고 국민문학들로 분기된 이후에도 일정한 통합성을 유지하였으며, 더구나 자본주의체제가 전지구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이 특정한 지역문학은 세계문학으로 보편화되기까지 하였다. 유럽연합의 형성은 이같은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자연스러운 데 비해, 동아시아 범주의 경우에는 이 지역 각 민족들의 반응이나 태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단적으로 말해 동아시아의 주축인 한·중·일 삼국만 하더라도 중국이 스스로 중화(中華)로 여기는 사고가 여전하고 일본은 해양세력이면서도 동아시아를 패권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어, 이들과 더불어 지역 주민의식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실천의 과제이기도 하다. 문학에서도 이 지역의 국민문학들은 동아시아라는 단위로 세계문학과 관계 맺기보다 각각 정도의 차이가 있는 대로 개별 국민문학으로서 기존의 세계문학의 체계를 지향하고 또 거기에 결합되어 있다. 가령 세계문학의 등용문처럼 상징화되어 있고 실제 그만한 권력도 가지고 있는 노벨문학상의 수상을 위해 각 국민문학의 대표주자들은 오랫동안 경쟁관계에 있어왔고 어느정도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최근 들어 동아시아를 사유와 실천의 대상으로 삼는 활동이 점차 내실을 얻어가고 있는 상황은 이 지역의 문학적 연대와 실천을 위해서 고무적인 변화라고 할 것이다. 동아시아를 서구패권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삼고자 할 때 과거의 동아시아가 하나의 독립된 우주, 즉 화이사상(華夷思想)을 이념으로 하고 조공체제를 구조로 하는 중국중심의 공동체적 질서였음이 흔히 강조된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와는 독립된 이 질서는 강압적이고 경쟁적인 국민국가들의 관계가 아니라 호혜관계였다는 것이며, 최근의 동아시아 관련 심포지엄에서는 앞으로 동아시아에 이를 재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시되기도 했다. 국민국가들로 이루어진 현재의 세계체제에서 동아시아 국가간의 관계를 전근대체제로 복원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은 우선 짚을 수 있겠지만, 현재 그 경제적 규모와 정치적 위상에서 비서구의 어느 지역보다도 더 큰 세계사적 비중을 가지는 이 지역의 향배는 세계체제의 미래에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럴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동아시아의 정치적・경제적 비중에 비추면 세계문학에서의 그 위상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종의 불균형이다. 한국이나 베트남 등 상대적으로 소국에 해당하는 나라들의 문학은 물론이지만, 근대 이후의 문학에 관한 한 중국이나 일본의 문학도 가령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문학들이 얻게 된 지분에 비하면 세계문학공화국에서 변방으로 밀려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만 하더라도 미겔 아스뚜리아스(Miguel Asturias, 과테말라), 빠블로 네루다(Pablo Neruda, 칠레), 가르시아 마르께스(콜롬비아), 옥따비오 빠스(멕시코),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페루)로 이어지는 중남미문학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서사양식이 약화되고 모더니즘의 활력이 쇠퇴하던 서구문학의 한계를 돌파하는 성과로 부각되면서 새로운 정전의 목록에 추가되었다. 이보다는 통합지역으로서의 의미가 크지 않지만 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쎄네갈), 응구기(Ngũgĩ wa Thiongo, 케냐), 월레 쏘잉카(Oluwole Soyinka, 나이지리아)와 아체베(Chinua Achebe, 나이지리아),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 남아공)와 쿳시(John Coetzee, 남아공)로 대변되는 아프리카문학도 탈식민주의의 성행과 맞물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문학의 새로운 정전으로 편입된다.

물론 일본의 경우 근현대문학도 세계문학에서 일정한 지분을 얻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문학이 아프리카나 중남미 같은 이른바 제3세계권의 다른 지역문학들보다 더 주변에 위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문학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언어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것은 자명하다. 중남미와 아프리카 많은 나라의 문학이 영어 프랑스어 에스빠냐어 뽀르뚜갈어라는 유럽 주요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주류 세계문학권에 쉽게 융합된 반면, 동아시아는 고유한 민족어로 각각의 국민문학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중심어로의 번역이라는 매개가 없이는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에스빠냐어든 영어나 프랑스어든 지역의 공통어가 존재하는 위의 두 지역과는 달리 동아시아에는 공통의 지역어도 존재하지 않거니와, 기원을 공유하는 유럽의 언어들과는 달리 언어가 매우 상이하여 서로의 국민문학 또한 번역을 매개로 해서만 교환될 수 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국민문학이 주목받고 정전화되는 과정에는 이 중심부 언어의 사용과도 유관한 이 지역들의 탈식민지적 상황, 즉 오랜 서양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서 서구의 제도가 이식되고 서양 본국과의 교류가 문학지식인들을 포함한 엘리뜨 지배계급에게 일상화되어 있었던 사정이 있었다. 중남미문학의 경우 진작부터 유럽 아방가르드의 유입과 그 영향 그리고 해당 작가들의 잦은 해외여행 및 서구문학계와의 교류나 본국 평단에의 접근성과 출판활동이라는, 세계문학장 내에서의 ‘자본’이 큰 작용을 하였다.17) 이 두 지역의 문학을 일률적으로 보기는 어렵겠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점은 고려하더라도, 적어도 세계문학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유럽보편주의라는 기성이념을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의식은 미흡했다고 할 수 있고, 때로는 탈식민의 이름으로 정착된 문화제국주의의 한 양상으로 비칠 여지조차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문학은 말하자면 중남미문학과는 다른 경로를 밟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문학의 자장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그 빈약함이 오히려 문학의 기존질서를 흔들 위력을 숨기고 있다는 역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서구적 근대성이 밀려오는 과정에서도 견고한 고유 민족어가 확립되어 있고 여기에서 발원하는 문화자원이 풍성하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지역은 문학에서 유럽 중심주의 내지 보편주의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문학 외적인 조건으로 동아시아가 세계 자본주의체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 어느때보다 증대하고 있다는 사정, 이것과 맞물려 문학시장, 특히 세계문학의 번역시장이 활성화되어 있고 이것이 일정한 수준을 가진 독서층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문학자산이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번역을 통한 공유과정의 미비 때문에 세계문학에 진입하는 데 장애가 있었다면, 백낙청()의 표현처럼 이 한계는 여건만 갖추어지면 ‘급격히 개선될 여지’도 있을 법하다.18)

다만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동아시아의 문학을 말하는 것이 그 이름으로 유럽중심의 정전체계에 더 많은 지분을 얻자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일원적인 세계문학의 구조를 혁신할 수 있는 틀을 창출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문학을 ‘정기적으로’ 정전목록이 추가되는 판테온으로 보는 관례를 넘어 ‘중심 없는 지구적 복수성’의 가능성을 상상해보자는 제임슨의 제안이 다시 한번 환기된다. 동아시아문학의 지향은 바로 이런 상상의 한 방식이 아니겠는가? 만약 어느정도 자율적이고 독립성도 있는 동아시아의 문학적 지역정부가 성립한다면 문학의 세계공화국의 패권구도도 해체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 법하다.

기존의 보편성에 편입되지 않고 각 국민문학의 특수성이 온전히 살아 있는 그런 세계문학의 질서를 창조하는 일에 동아시아가 기여하려면 이 지역에서부터 국민문학들 사이의 소통과 연대, 즉 괴테적인 의미에서의 세계문학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 중엽 동아시아담론이 주창된 이후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의 대화와 교류가 활발해지는 추세에 있고, 아울러 아시아 문학인들의 만남의 기회가 현저히 증가한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일은 고무적인 변화 가운데 하나지만, 그렇더라도 동아시아문학의 진정한 연대에 도달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중요한 장애 내지 여건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은 이 ‘동아시아 문학정부’의 문제의식에 대한 절박성이나 체감도가 가령 한·중·일의 경우에 현저히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중국의 주요작가들은 개별적인 교류를 넘어선 동아시아적인 유대감이 그리 크지 않고 심지어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미약하다.19) 일본 현대문학 또한 이미 세계시장의 판도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위상을 얻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 문학이 기존 세계문학의 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데 비해 한국문학은 최근의 괄목할 만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서구 주요 세계문학선집에서는 존재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동아시아 삼국 문학의 교류에서도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일본문학의 번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져왔고, 더 근래에 들어서는 중국문학의 대표적인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 반면, 한국문학이 이 양국에 소개되는 정도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해도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지 않나 한다. 이 현저한 불균형이 삼국의 문학을 동아시아적인 시각에서 통합해서 사고하고자 하는 합당한 노력에 균열을 일으키고, 동아시아담론이 그렇듯이 동아시아문학론 또한 한국이 중심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위와 현실 사이의 이 격차에서 역시 세계문학 질서의 재편을 통한 반체제적 문학운동이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처럼 동아시아 국민문학들 사이의 불균등, 혹은 어떤 점에서는 그 내부에서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형성이야말로 동아시아문학을 수립하려는 노력에 실천성을 부여하고 있다. 중국의 학자 쑨 꺼(孫歌)는 수년 전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의 의미를 말하는 가운데 “중국의 경우 ‘동아시아 지역적 개념’이 수용되기 어렵고 중국 지식계는 동아시아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 “아시아 문제는 문화대국의 주변부, 즉 주변국가에 해당하는 곳에서 진정한 문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20) 흥미롭게도 그는 1990년대 이래 동아시아담론의 진원지이자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는 『창작과비평』이 기획한 2011년 봄호 특집 ‘다시 동아시아를 생각한다’에 기고한 「민중시각과 민중연대」에서, 백낙청의 한반도 분단체제 인식과 그 극복논리를 높이 평가하고 여기에 내재된 민중적 시각이 가령 냉전의 참혹한 희생물인 일본의 오끼나와와 타이완의 진먼따오(金門島) 주민들의 고통 및 항거와 “살아 있는 민중의 생활감각”으로 맺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에 대한 쑨 꺼 자신의 문제의식이 진전되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동아시아문학에서 각 국민문학들의 교류가 어떤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시사한다. 세계문학에서도 그렇듯이 동아시아에서도 문학지형의 혁신은 주변에서부터 그리고 주변부적 관점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출판시장에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를 비롯한 일본문학의 성세에 이어서 최근 활력을 얻고 있는 중국문학이 대거 유입되고 있는 현상도 부정적으로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문학계가 동아시아문학의 현장에 그만큼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자원들의 축적을 바탕으로 지역의 문학운동을 견인해나갈 책무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주변적이고 민중적인 시각에 입각한 동아시아문학의 형성을 장기기획으로 삼는 비평이라면 오히려 더 나아가서 동아시아의 문학을 현장비평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노력도 있어야 할 법하다. 동아시아문학의 자율적인 질서로서 세계문학의 지방정부라는 비유는 현재로서는 꿈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구화하는 현실에서 문학인들의 연대와 소통을 통해 각 국지에 남아 있는 창조적 역량을 모아내고 이를 체제변혁의 에너지로 전환해나가는, 이른바 체제극복운동으로서의 세계문학의 기획을 동아시아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현실화할 전망도 서서히 생겨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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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redric Jameson, “Does World Literature Have a Foreign Office?,” Keynote Speech at 2008 Holberg Prize Symposium(http://www.holbergprisen.no/fredric-r-jameson/holbergprisens-symposium-2008.html).

2)Fredric Jameson, “Third-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ism,” Social Text No. 15 (Autumn 1986), 65~88면.

3) 또다른 ‘희생’이라면 제3세계문학 내부의 계급갈등 등 다양한 요소를 간과한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아흐마드의 비판 참조. Aijaz Ahmad, “Jamesons Rhetoric of Otherness and theNational Allegory’,” Social Text No. 17 (Fall 1987), 3~25면.

4) 전형준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보는 중국문학』, 서울대출판부 2004, 55~57면 및 140~42면.

5)Pascal Casanova, The World Republic of Letters, trans. M. B. DeVoise, Harvard UP 2004, 3~30면 참조.

6) 카라따니 코오진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7, 223~25면.

7)David Damrosch, What is World Literature?, Princeton UP 2003, 27면.

8) 각각 Matthew Arnold, “The Literary Influence of Academies,” William E. Buckler ed., Prose of the Victorian Period, Boston: Houghton Mifflin Co. 1958, 441~48면, T. S. Eliot, “Tradition and the Individual Talent,” The Sacred Wood: Essays on Poetry and Criticism, London: Methuen & Co. 1920, 49면.

9)Franco Moretti, “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 New Left Review 1, Jan/Feb 2000.

10)Jikwan Yoon, “Discourses on World Literature and the Question of Nation”, 『영미문학연구』 18호(2010. 6.)

11) 윤지관 「근대성의 황혼: 프랑코 모레티의 모더니즘론」, 이상섭 엮음 『문학·역사·사회』, 한국문학사 2001, 380~91면 참조.

12)Passal Casanova, 앞의 책 43면.

13) 옥따비오 빠스의 에쎄이집 고독의 심연(The Labyrinth of Solitude, 1950)에 나오는 대목으로, Pascal Casanova, 앞의 책 92면에서 재인용.

14) 「오감도」가 독자들의 항의로 연재가 중단된 후 이상이 한 말 참조.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져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 권영민 엮음 이상 전집 4: 수필, 뿔 2009, 161면.

15) 중국의 루쉰도 그 예지만 일본의 경우에도 이 시기 모더니즘이 “프루스뜨와 삐란델로의 혁신 전략들만큼이나 입센과 체호프의 리얼리즘과 공유하는 바가 있다”는 지적 참조. “Introduction,” Sara Lawall and Maynard Mack ed., The Norton Anthology of World Literature: The Twentieth Century, W.W. Norton & Co. 2002, 1590면.

16)Immanuel Wallerstein, “The National and the Universal,” Geopolitics and Geoculture: Essays on the Changing World-System, Cambridge UP 1991, 199면.

17) 신정환 「중남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과 탈식민지 문학의 정전화」, 박철 외 『노벨문학상과 한국문학』, 월인 2001, 199~202면.

18) 백낙청 「세계화와 문학: 세계문학, 국민/민족문학, 지역문학」, 『안과밖』 제29호(2010년 하반기), 31면.

19) 가령 2010년 제1회 인천 AALA문학포럼에서 중국작가 류 전윈(劉震雲)의 다음 발언. “유럽중심 문학의 극복이라는 (…)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문학만 가지고 논하자면 중국에서는 유럽이 중심이 된 적이 거의 없다.”

20) 쑨 꺼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창비 2003, 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