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공감과 연대—21세기, 소설의 운명

 

 

김영찬 金永贊

문학평론가, 계명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저서로 『근대의 불안과 모더니즘』 『비평극장의 유령들』 『비평의 우울』 등이 있음. youngcritic@kmu.ac.kr

 

 

1. 이토록 이상한, 르네쌍스

 

한국소설은 목하 성황중이다. 이른바 ‘장편의 시대’에 걸맞게 장편 연재지면은 다양한 종류의 인터넷 공간과 문예지 등을 중심으로 유례없이 확장되었고, 그에 힘입어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장편소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작품들의 수준도 세간의 우려를 불식하며 조금씩 상향조정되고 있는 듯 보인다. 신경숙(申京淑)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와 공지영(孔枝泳)의 『도가니』(창비 2009), 김애란(金愛爛)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 등 시장에서 화제를 모으며 꾸준히 선전하고 있는 작품들도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이쯤 되면 장편소설의 르네쌍스라 일컬어도 과히 틀리지 않을 듯하다,라고 말하려는 참에, 평론가 김형중(金亨中)의 고약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르네상스치고는 참 이상한 르네상스다.”1)

이상한 르네쌍스? 한국소설이 창조적 갱신의 흔적 없이 고만고만한 작품들을 쏟아내놓으면서 기진맥진해 있는 것이 저 르네쌍스의 정체라는 속내겠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지금 한국소설이 구가하는 ‘이상한 르네쌍스’의 물결이 불러온 의도치 않은 효과는 그것이 밑으로 가라앉아 잘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를 수면 위로 띄워올려 노출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그 무언가란, 바로 작금의 한국소설이 안고 있는 모종의 결여다. 지금 한국소설은 그 결여를 안은 채 이토록 이상한, 어둠의 르네쌍스를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문학현실에 눈 돌리지 않는 정직한 눈을 가진 이라면, 외관상의 활기에 가려져 있는 그 어둠에 무심할 리 없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2000년대 문학이 제 사명을 다한 국면에서 새시대 문학의 도래는 지연되고 있는 와중의 지리멸렬이며, 한국소설이 이른바 ‘장편의 시대’에 제 몸을 맞춰가(야 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발각되고 있는 빈곤과 고통스러운 성장 지체다. 물론 한편으로 몇몇 예외적 작품의 사례를 들어 이 어둠의 존재를 애써 부인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눈 밝혀 보아야 하는 것은 몇몇 개별 작품의 예외적 선전(善戰)이 아니라 (어디서나 흔히 그래왔듯) 그것이 가려버리기 쉬운 집단적 현상의 진실이다.

어찌 보면 앞서 지적한 문제는 한국소설이 제 갈 길을 가는 가운데 겪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시적 현상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면 그런 듯 보이기도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더 깊이 따져보면 그 현상들은 실은 지금 한국소설이 안고 있는 근원의 문제가 특정한 정세적 국면을 맞아 겉으로 노출되는 하나의 증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작 저 어둠을 껴안고 새겨보아야 할 물음은 대략 이런 것일 터다. 이것은 혹 시대적 변화와 외부적 환경의 악화가 문학에 덧씌워놓은 혹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걷힐 과도기적 어둠 따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21세기 한국소설의 존재근거를 되묻기를 요구하는, 그런 어둠이 아닐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어떤 이는 또 너무 앞서간 지나친 비관이라 질책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한기욱(韓基煜)은 현재의 한국문학에 대한 나와 김형중의 비평적 시선을 함께 문제삼으며 한국문학의 위기를 과장하고 장편소설의 장래를 지레 의심하는 암울하고도 비관적인 전망이라 비판한 바 있다.2) 그 글에서 그는 한국문학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만만찮은 성과와 활력”(209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몇몇 작품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한국문학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두 비평가의 비평적 관점과 이론적 구도의 “허실”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일러준다.

이 글에서는 한기욱의 비판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 세세히 짚어가면서 그에게 일침(一針)을 돌려세울 생각은 없다. 다만 현재의 한국문학을 읽기 위한 나의 이론적·문학사적 구도에 대한 그의 비판이 일종의 ‘덜 읽기’의 (무)의식적 욕망에 이끌리고 있다는 것만은 먼저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가령 한국문학의 현재에 대한 나의 ‘비관’을 타박하는 그의 논리가 우선 그렇다. 그에 따르면, 한국문학의 활력과 장편소설의 장래를 회의하는 나의 비관은 크게 보면 시대구분과 관련된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단절론적 문학사 인식”과 “구조주의 문학관”(213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와 함께, 2000년대 문학의 성격으로 강조한 ‘탈내면의 상상력’의 특징에 부합되지 않는 작가와 작품 들을 “‘살아 있는’ 문학”의 목록에서 제외함으로써 “한국문학의 가용자산”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나의 이론적 “자승자박”이 암울한 비관에 사로잡히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여기에서 드러나는 나의 비평적 입장에 대한 곡해와 그 ‘허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는 현재 한국소설의 문제에 대한 나의 비관적 시선이 대체 무엇을 겨냥하고 있었는지를 보지 못하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 것 같다. 여기서 불가불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문제의 진정한 진전이나 해결은 자화자찬의 낙관이 아니라 직시(直視)의 비관에서부터 힘겹게 시작되는 것이다.”3) 그런 측면에서 한국소설의 현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데까르뜨를 빌리자면) 낙관의 실마리를 붙들기 위한 일종의 ‘의지적 비관’이며 ‘방법적 비관’이다. 그것은 곧 몇몇의 부분적인 성과(그 자체도 다시 따져봐야 할 테지만)를 근거로 “한국소설의 현재 자산은 한결 넉넉해진다”(228면)고 자족해버리기보다, 외면해선 안될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빈곤”4)을 먼저 정직하게 응시하면서 문제를 분명히하는 데서 출발하고자 하는 비평적 에띠드의 표현이라 해도 좋겠다. 근대문학과 근대문학 이후를 갈라보고 동시에 지금 2000년대 문학이 장편의 요구 앞에서 겪는 난경(難境)을 표나게 부각한 것도,5) 지금 한국소설의 자리와 그 앞뒤를 역사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도래할 가능성의 근거를 짚어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니 이것이 한기욱이 주문하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국문학의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비평적인 노력”(209면)과 배치되는 것일 리 없을 터다.

한기욱이 강조하는바 “작품 하나하나의 진가를 사주는 일”(213면)은 물론 그 자체로 소중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성과를 다독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아니 어쩌면 덮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문제가 존재하는 법이다. 지금 장편의 부산한 활기 안에 도사린 난경이 바로 그렇다. 이 난경은 2000년대 문학이 일찌감치 저 자신의 사명을 다했지만 2010년대 문학의 도래는 지연되고 있는 와중의 유난히 오랜 공백 지점에서 발화하는 것이며, (몇몇 예외적인 사례를 다른 맥락에 놓는다면)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답하지 못하는 한국소설의 집단적인 문학적 부진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장편소설의 내실있는 발전”에 의해 자연스레 해소될 수 있는 “양적 팽창의 허실”(215면)쯤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장편의 가능성을 위협하는 한국소설의 결여가 낳은 불가피한 증상이다. ‘희망의 근거’를 찾아가기 위한 첫걸음은 목전의 부분적인 성과에 자족하기 앞서 장편의 양적 팽창이 의도치 않게 노출시킨 이 증상의 근원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이후 한국소설이 시대의 아들로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를, 그럼으로써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가늠해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가늠자를 통해 볼 때에야 비로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작품들의 성과가 눈금 어디쯤에 위치하는지도 보다 분명해질 터다. 장편의 가능성의 근거 또한 그렇다.

 

 

2. 애도, 불가능한

 

‘근대문학의 끝과 그 이후’에 대한 나의 입론을 비판하는 한기욱의 문제제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가 ‘덜 읽은’ 그 지점의 문제를 보다 구체화하는 것이 2010년대 장편소설의 가능성을 헤아려보는 일과 무관하지 않은 까닭이다. 한기욱은 장편에 대한 나의 회의가 애초 근대문학이 이제는 끝났다는 섣부른(?) 판단에서 온다고 보는 듯하다. 그가 나의 비평에서 “‘근대문학’의 죽음을 얼른 기정사실화하고 ‘근대문학’과 ‘그 이후의 문학’을 단절시키려는 의지가 유난히 강하다”(210면)는 것을 애써 적발해내려고 하는 것도 그런 속내에서겠다. 그러나 역사의 연속과 단절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한국에서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나의 진단은 2000년대 이후 문학현실과 작품의 실상이 보여주는 큰 흐름의 점검을 통해 이른 귀납적 판단이지, 그의 말처럼 “단절을 고집”(213면)하는 비평적 의지 따위가 앞섰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근대문학의 죽음을 애도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에게는 한낱 근대문학과 결별하려는 섣부른 단절의 의지쯤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그것은 보다 중층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애도란 결국 역사화다. 20세기 내내 제 역할을 다해왔던 역사적 형태로서 근대문학을 역사화하는 것은, 21세기 한국문학에 주어진 몫을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종요로운 일이다. 21세기 한국문학은 그 자신의 지향과 존재방식에서 전체 사회의 문제를 상상력의 근간으로 삼는 지난 세기의 ‘근대문학’과 확연히 다른 특성을 보여주는 까닭이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의 애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근대문학’이 ‘문학’으로서 갖는 어떤 특성(뒤에서 얘기한다)은 ‘근대문학’ 이후에도 문학이(특히 장편이) 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버릴 수 없는 가능성의 조건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 또한 어차피 근대의 아들임을 부정할 수 없는 이상, 그것은 불가피한 운명이다. ‘근대문학’에 대한 애도가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문학을 향한 우울의 태도”를 속 깊이 감춘 것이어야 한다는 형용모순적인 진술을 굳이 무릅쓴 것은 그 때문이다.8) 다시 말하면,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이 장편의 영역에서 그 자신을 꽃피울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애도의 불가능성이라는 그 자신의 운명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7)

이것은 한편으로 2000년대 이후의 문학이 안고 있는 결여를 의식한 요청이기도 한데, 더 나가기 전에 잠시 에둘러 한기욱의 고언을 먼저 들어보자. 이것은 나의 이른바 ‘단절론’에 대한 비판이지만, 애초 겨냥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암시적인 측면이 없지 않은 까닭이다. 나의 문학사 시대구분을 두고 그는 말한다.

 

김영찬의 단절론은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을 옳게 설정했는가의 문제도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따른 단 하나의 결정적인 ‘단절’과 그로 말미암은 ‘구조적 변화’만 강조할 뿐 주체의 행위와 결합되어 생겨나는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시민사회의 변화와 리듬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영찬 자신이 2000년대 소설의 특징으로 일관되게 강조해온 ‘탈내면의 상상력’과 ‘왜소하고 체념적인 주체’란 것도 이런 고착적인 시대인식과 구조주의 문학관의 반영인 면이 있다.(212~13면. 강조는 인용자)

 

2000년대 문학은 IMF 외환위기 이후 더욱 철저화된 근대로의 사회구조적 변화와 그것을 내면화한 한국사회의 집단무의식 혹은 망딸리떼(mentalité)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문학이 ‘근대문학’으로서의 사명을 내려놓고 ‘근대문학 이후의 문학’으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한기욱은 그런 시대구분이 “주체의 행위와 결합되어 생겨나는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시민사회의 변화와 리듬”을 핵심요인으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질책하지만, 그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책임은 오히려 그들에게 있다. 무슨 얘긴가?

왜냐하면 바로 그것, 즉 주체가 개입해 만들어내는 역사적 사건들과 시민사회의 주체적 변화와는 무관하게 그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간 것이 다름아닌 2000년대 문학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문학은 그런 의미의 주체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2000년대 문학에서 현실과의 긴장은 느슨하게 유지되고 있었을 뿐, 그리고 그 현실이라는 것도 항상-이미 주어진 운명적인 어떤 것으로서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을 뿐, 그에 대한 주체적 대응이나 현실의 역동에 대한 관심은 애당초 2000년대 문학주체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현실과 대결하기보다 그 표면 위를 미끄러지면서 유희하며, 현실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 고착된 현실을 자기식으로 견뎌내는 자기충일적 방법론에 충실하다. 2000년대 문학의 성과는 흥미롭게도 그런 바탕 위에서 꽃필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 성과를 낳은 바로 그 문학적 태도와 지향이야말로 돌아보면 그 스스로 ‘근대문학’과의 단절을 선언하는 의식지 않은 자기주장이었던 셈이다.

물론 지난 세기 ‘근대문학사’의 각각의 시대는 하나같이 “주체의 행위와 결합되어 생겨나는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시민사회의 변화와 리듬”에 영향받아 이전 시대와 선을 그어왔다. 그러나 2000년대 문학의 시대는 그렇게 오지 않았다. 2000년대 문학의 정신은 IMF 외환위기 이후 ‘불완전한 근대’의 종식과 망딸리떼의 변화가 강제한 ‘구조적 효과’였으며, 그것은 뚜렷한 역사적·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한 주체적 대응이 아닌, 오직 지난 세기의 문학적 관습을 교란하고 일탈하는 문학 내적인 자율적 운동을 자양분으로 해서만 자신의 시대를 다른 시대와 변별했다. 무엇보다 현실의 역사적 변화 가능성과 주체적 대응에 무심한 2000년대 문학의 성격 자체가 그 바탕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2000년대의 문학주체가 지난 세기의 작가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더이상 상상력으로써 사회 전체의 문제를 고민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차라리 자신의 영역 바깥에 무관심한 분화된 직업적 전문인에 가까워졌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9) 따라서 한기욱이 한사코 강조하는 저 주체적 요인을 고려할 여지를 거부하는 것이 다름아닌 2000년대 문학이다. 그리고 거꾸로 그것이야말로 그 자체(‘근대문학’과의) 단절의 필연적인 증상이다. 그러니, 문제는 이런 것이다. 현실에서 근대가 제기하는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되, 그 문제를 상상력으로써 떠맡아온 문학의 역사적 형태로서 ‘근대문학’은 끝났다.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의 결여는 바로 거기에서 발생한다. 그 결여는 (누차 지적해왔던 것처럼) 특히 단편의 영역에서 그 자신을 꽃피운 역설적인 자양이었으나, 장편의 요구에 맞닥뜨렸을 때 그것은 그 자신의 한계를 극적으로 노출한다. 왜냐하면 장편이란 시대와 호흡하는 장르이며 그런 의미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불가피하게 근대의 문제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편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이즈음의 젊은 문학 대다수가 점점 문학의 타율성을 의식하지 않는 자율성의 폐쇄회로에 그 자신을 가두고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 있거니와(「문학 뒤에 오는 것」, 45~48면), 이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고착되어버린 자기세계의 복제와 반복은 그것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몇몇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장편의 부진과 그와 무관하지 않을 단편의 지리멸렬이라는 집단적 증상이다.

 

 

3. 초대, 응답 없는

 

다시, 문제는 장편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장편의 활성화가 ‘바깥에 의해 강제된 인위적인 활성화’이며 그 ‘바깥’이 출판씨스템의 요구였음을 일전에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10) 실은 이것은 진실의 절반만 말한 것이다. “작금의 장편소설 붐은 한국문학의 ‘안’(작가와 비평가와 독자)과 ‘바깥’(출판시장)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에 가깝다”(216면)는 한기욱의 지적은 그런 측면에서 일면 정당하다. 그러나 진실의 진짜 절반은 사실 다른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현실에서 한국소설에 제기되는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의 요구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진실의 진짜 절반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장편의 활성화를 강제하는, 그리하여 한국소설의 도전을 요청하는 또하나의 ‘바깥’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 바깥은 말할 것도 없이 문학 외적 현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지금 우리 앞에 급속하게 가시화되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시대감각의 변화다. IMF 외환위기 이후 사회의 시장전체주의적 재편을 겪으며 출구 없는 자본의 철창 속에서 내면화된 불안과 강박, 체념과 절망 같은 대중적 집단의식의 패러다임이, 그것을 넘어 또다른 어떤 것으로 전환되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배경에 있는 것이 비록 많은 부분 이명박정부 들어 유난히 극심해진 ‘먹고사는 일’의 간난(艱難)이 촉발한 경제주의적·즉자적 분노임은 틀림없으나, 그것 또한 불안과 체념을 넘어서는 새로운 망딸리떼의 형성에 하나의 밑천이 되어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야당연합의 승리로 끝난 이번 서울시장 선거과정에서 행동으로 드러난 대중의식의 흐름은 어쩌면 그 가능성의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바로 포스트-IMF시대의 종언의 가능성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유난히 부각된 SNS의 의미는 그 가능성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소통과 공감, 공유와 연대의 시대감각이다.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장르로서 장편을 호출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시대감각이다. 따라서 진실의 진짜 절반은 지금 한국소설에 제기되는 장편의 요구가 단순히 문학 내적인 필요나 출판씨스템의 강제라는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이러한 시대감각과 망딸리떼의 점진적 변화와 맞물린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이 ‘장편의 시대’는 문학인과 출판시장의 요구와 시대적 변화의 징후가 뜻하지 않게 어느 시점에서 절묘하게 만나 만들어진 드라마틱한 교차의 산물이다. 단순하게 잘라 말하면, 시대정신의 변화가 한국소설에 장편을 요구한다. 그것은 비유컨대 한국사회가 자기 극장의 무대 위로 이제는 올라와 함께하기를 한국소설에 권유하는 초대장이다. 이 초대에 한사코 응하지 않는다면야 할 수 없겠지만, 이후 장편이 장편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라면 이것은 거부해서는 안될 초대다. 왜 그런가? 시장바닥의 장르로서 장편의 태생과 운명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편은 그렇게 말들이 관계 맺고 감정이 교환되는 시장바닥(소통과 공감의 네트워크) 속에서만 비로소 저 자신을 완성하는(혹은 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지금은 죽고 없는 ‘근대문학’에 대한 사후적 요청이라 해석할 수는 없다. 역사는 불가역적인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장편의 경연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의 한국소설이 이 요청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의 문제이며, 또 그것을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혁신하고 체력을 단련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이는 ‘근대문학’ 이후를 살아가는 한국소설이 근대적 의미의 장편(novel)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장편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제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한국소설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많은 장편들의 부진도 따져보면 이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 대다수 젊은 작가들이 발표하는 장편의 부진이 일시적인 성장통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대결의 자의식을 결여한 2000년대 이후 문학의 유전자와 장편이라는 장르의 어긋남에서 비롯되는 구조적·미학적 곤경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문학 뒤에 오는 것, 37~42면 참조) 그런데 지금 젊은 작가들이 발표하는 장편의 대다수는 이런 곤경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피해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김형중이 ‘퀼트소설’ 혹은 ‘무한소설’이라 칭한 윤성희(尹成姬)의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이 그 적절한 사례다.11) 『구경꾼들』에 나타나는 작은 이야기들의 무한증식이란 어떤 측면에서 새로운 장르의 시도라기보다 이 작가가 단편의 영역에서 기존에 구축한 견고한 세계를 보존한 채 장편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 고안해낸 일종의 고육(苦肉)의 방법에 가깝다. 이 작품을 논하는 자리에서 김형중이 “최소한 지금 시기 한국의 ‘장편소설’이란 개념이 원고의 분량 (그리고 그것이 주는 몇가지 경제적 잇점) 외에 별다른 내포를 지시하지 않는 개념이 되었”12)다고 이야기할 때, 그는 사실 멀찍이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일례로 이기호(李起昊)의 『사과는 잘해요』(현대문학 2009)와 편혜영(片惠英)의 『재와 빨강』(창비 2010), 그리고 김중혁(金重赫)의 『좀비들』(창비 2010)과 『미스터 모노레일』(문학동네 2011)2000년대 문학의 대표주자였던 젊은 작가들의 장편이 각기 형태는 달라도 거개가 기존 단편들의 조합이나 확장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을 보더라도 이는 하나의 집합적 현상임이 분명하다.

김형중이 말하는 이른바 브리꼴라주나 입체소설 같은 형식의 소설13)은 보통은 사회의 총체적 조망이 더이상 불가능해질 때 어떻게든 나름의 인식적 지도를 그려보려는 안간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편집증적 서사나 해체적 서사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때 장편의 성취를 결정하는 것은 그 형식의 기발함이나 새로움 같은 것이 아니라 안간힘의 그런 형식적 표현이 가까스로 이르게 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한 치’의 통찰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서 그런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안간힘을 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대신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상당부분 형식과 기법에 대한 강박과 자율적 유희의 충동이다. 최제훈의 장편 『일곱 개의 고양이 눈』(자음과모음 2011)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그런 경향은 각각 방식을 달리해 이즈음 젊은 작가들의 장편을 지배한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것이 지금 한국장편의 대표적 경향이라 할 수는 없지만, 몇몇 예외를 제외한다면 현재 발표되고 있는 장편들의 대략적인 집단경향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를 한자리에 놓고 일별해보면, (섣부른 판단일지 모르나) 지금 젊은 작가들의 장편은 소통과 공감의 극장무대 위로 올라오라는 한국사회의 초대에 응할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다. 어째서 그런가?

기존에 구축해놓은 단편의 문제설정과 형식미학을 장편의 영역에 그대로 연장하는 것도, 기법과 형식의 전시와 유희로써 장편의 분량을 감당하려고 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공히 미학적 자기완결성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지향을 놓지 않은 채 그것을 장편이라는 장르 속에서 풀어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시도가 필히 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구축해놓은 자기의 문학적 틀을 해체하고 장편이라는 시장(市場)의 형식 속에서 그것을 새롭게 재구성해가려는 모험의 정신이다. 이때 시장이란 흔히 오해하기 쉬운 것처럼 단지 유통의 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고려한다는 것이 곧 상업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시장은 시대정신과 시대의 감수성이 유통되는 집합적 공간이며, 감정(들)이 연대하고 상상력이 공유되는 공감과 연대의 네트워크다. 장편에 요구되는 ‘문학성’도 고정된 어떤 완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동과 서를 막론하고 우리가 익히 아는 장편의 고전들 대부분이 당대에 이 시장의 요구를 견디며 살아남은 것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 문제는 이런 것이다. 기존의 문단제도 안에 안주해 몸을 사리며 더 큰 소통의 장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지 않는 것, 그리하여 기존의 협소한 문학성의 성채 바깥으로 나아가 다른 세계와 접촉하고 충돌하며 자기를 증명하려는 모험을 꺼리는 것.14) 지금 대다수 젊은 작가들에게서 확인되는 장편의 부진을 초래적 진짜 원인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말해버리고 만다면 목하 선전하고 있는 장편들에게는 필시 무심한 처사가 될 것이다. 그 장편들이 이와 관련하여 짚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더욱이나 그렇다. 장을 넘긴다.

 

 

4. 공감과 연대 그리고,…… 헛손질

 

예의 장편들을 거론하기 전에, 잠시 앞서 지적한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이렇다. 지금 장편의 집단적 부진은 곧 한국소설이 이 시대의 감각과 동떨어져 있으며 이 시대의 정신과 소통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속사정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단 중요한 하나만 짚어둔다. 이는 이즈음의 젊은 작가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문학 혹은 글쓰기와 관련된 어떤 태도와 관련된 것이다. 정신분석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바로 현실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否認)이다. 풀어 말하면 그것은 ‘(현실이 있음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태도로 요약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들의 글쓰기에서 세련된 수사(修辭)건 기법의 틀이건 아니면 텍스트건 간에 미학적(이라고 간주되는) 의장(意匠)의 프레임을 통과하지 않으면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15) 뒤집어보면 이것은 그들의 글쓰기에서 지금 이곳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미학적 고려의 대상으로 통합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편미학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 현실이라는 벡터의 실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시장의 아들로서 장편소설에 제기될 수밖에 없는 소통과 공감의 요구 앞에서 그들의 장편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왜냐하면 소통과 공감이란 현실적 삶의 토대에 대한 감각의 공유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시사하는 바가 걸려 있다.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서는 이미 수다한 논의들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상찬과 비판이 엇갈린 바 있지만, 이 소설의 의미는 작품이 갖는 문학적 가치의 문제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엄마를 부탁해』의 기본적인 틀이 한국형 모성멜로임은 부정할 수 없다. 대개 자기 자신의 결여(그것이 성격이나 신분의 결함이든 행동의 과오든)에서 비롯된 불행한 결과에 대한 회한과 죄의식 혹은 자책이 한국형 멜로의 정서적 자양분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이 등에 업은 자양 또한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예외 없이 유발하는 대중독자들의 ‘눈물’도 바로 그 정서적 포인트에 자극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진짜 득의는 다름아닌 한국형 멜로라는 그 대중적 틀에 힘입어 오는 것인데, ‘엄마’라는 익숙한 대중표상을 통해 우리가 삶의 전장을 헤쳐가느라 부득불 외면하고 돌보지 못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통절한 죄의식을 환기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죄의식의 작동이 그렇게 단순히 대중적 표상으로서의 ‘엄마’를 둘러싼 것으로만 한정되지 않을 수 있는 여지를 작품 자체가 열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작품의 후반부에서 유령이 되어 상처 입은 맨발로 슬리퍼 하나만 꿰어 신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추운 거리를 떠도는 엄마의 이미지에 이 사회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이미지가 오버랩되고 있다는 것이 그 한 사례다.

『엄마를 부탁해』는 바로 그 죄의식의 정서적 공유를 통해 포스트-IMF시대 대중의 삶의 감각을 건드린다. 그 죄의식이 소환하는 것은 자본주의 무한경쟁의 악무한 속으로 내몰리고 있는, 그럼으로써 (그것이 타인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가치이든) 마땅히 돌봐야 할 것을 돌보지 않고 그것을 어쩔 수 없다 여기며 살아가는 포스트-IMF시대의 자기중심적 삶의 실상에 대한 반성적 감각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망외의 성과는, 그럼으로써 현재의 삶에 대한 반성을 촉발하는 ‘죄의식의 상상적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을 대중적 공감의 네트워크를 가동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작품이 갖는 통속성(혹은 신파성)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그 통속성에 힙입어 일어난 사건이다. 문제의 복잡함은 거기에 있는데, 왜냐하면 작품에서 그것이 우리 삶의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나 어떤 인식적 통찰과 성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는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죄의식에 의해 촉발되는 삶의 반성이 지금의 삶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가치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기에는 그 소박함 자체가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엄마를 부탁해』가 시장에서 구축한 이 소통과 공감의 연대와 작품 자체의 미학적 가치의 미묘한 어긋남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그 교집합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장편의 존재방식을 새롭게 고민해보는 것이겠다.

조금은 다르지만 포스트-IMF시대 대중의 삶의 감각을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작품이 이즈음 다른 젊은 작가들의 장편과 마찬가지로 그 발상이나 방법에서 기존 단편세계의 종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장편미학에 대한 무르익지 않은 고민의 산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작품 후반부의 지지부진도 실은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결함이다. 그런 한계 속에서나마 이 작품이 시장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김애란이 애당초 단편의 영역에서부터 지금 이곳의 젊은 세대가 겪는 삶의 신산(辛酸)에 대한 동세대적 감각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장하기도 전에 이미 늙어버린 조로증 환자 아름을, 채 시작해보기도 전에 이미 주어진 현실의 한계와 불확실한 미래에 갇혀버린 지금 젊은 세대의 알레고리로 읽힐 수밖에 없게 만드는 영민함의 근원도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 소설에서 저 자신이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연민의 방향을 오히려 삶의 짐을 무겁게 짊어진 타인(부모)에게 돌려 생명력으로 빛나는 한때의 기억을 선물하는 아름의 사치스런(!) 행위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의 고통을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으로 역전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눈물겹게 환기한다. 그리고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렇게 무거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위로받아야 할 ‘나’가 오히려 타인을 위로하는 그 ‘사치’가 결국은 자기 삶을 보듬고 감싸안는 더 큰 자기긍정과 별개가 아님을 보여준다. 작품 자체의 구성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장편으로서 갖는 중요한 미덕의 하나는 바로 그 자기긍정이라는 자기배려의 정치를 그렇게 지금 이곳의 삶의 조건에 근거한 공감과 연대의 상상적 기초로 열어놓는다는 데 있다.

근대문학 이후의 시대에, 문학은 더이상 국가나 민족 같은 상상의 공동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뿐더러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여전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부산한 시장바닥에서 유통되고 형성되는 공감과 정서적 연대의 공동체다. 왜냐하면 지금은 불가피한 ‘장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 ‘장편의 시대’가 한국소설에 요구하는 것은 이제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한 문학의 자발적 고립과 왜소화와의 작별이다. 그것은 소설이 공감과 정서적 연대의 미디어로서 ‘공동의 무대’에 오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시대의 감수성과 공유된 감정(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구르고 충돌하면서 폐쇄적이고 협소하게 물신화된 ‘문학성’을 해체하고 그 지평을 장편의 공간에서 새롭게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장편이란 결국 세계와의 서사적 싸움이다. 그 싸움이 세계에 대한 질문을 열어놓고, 인간에 대한 더 큰 통찰을 유도한다. 우리 앞에 놓인 포스트-IMF시대의 종언의 가능성이 한국소설에 요구하는 것은 바로 그 싸움이다. 그 싸움의 김애란식 다짐을 하나 옮겨본다. “그냥 헛손질, 제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지려고 허우적거렸던 손짓을 계속하고 싶어요.”16)

 

 

-- 

1) 김형중 「장편소설의 적: 최근 장편소설에 관한 단상들」,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254면.

2) 한기욱 「한국문학에 열린 미래를: 현단계 소설비평의 쟁점과 과제」, 『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 앞으로 이 글의 인용은 면수만 밝힘.

3) 김영찬 「문학 뒤에 오는 것」, 『비평의 우울』, 문예중앙 2011, 48면.

4)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131면.

5) 김영찬, 앞의 글 참조.

6) 나의 문학사적 지도 그리기를 두고 한기욱이 신경숙과 공선옥(孔善玉) 등 중견들의 근작을 비롯해 몇몇 작품을 왜 고려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213면)은 실상 무의미한 투정이다. 역사의 흐름은 몇몇 ‘살아 있는’ 예외에 의해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 경향 혹은 우세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역사라는 지도의 등고선은 후자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김애란 김중혁 박민규 등을 두고 그들조차 ‘무력한 주체’의 ‘탈내면의 상상력’이라는 규정에 들어맞지 않는 작가들이라 하는 것을 보면(한기욱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43면의 각주), 2000년대 문학의 성격에 대한 나의 저 규정과 그것이 갖는 함의를 기필코 ‘덜 읽어야만 한다는’ 어떤 불가피한 욕망이 존재하는 것 같다.

7) 김영찬 「끝에서 바라본 한국근대문학」, 앞의 책 33면 참조.

8) 그것은 비평 또한 다르지 않을 터, ‘비평의 우울’은 이 ‘애도 불가능’의 운명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강동호 「불가피의 윤리와 우울의 미래」, 『자음과모음』 2011년 여름호 참조.

9) 이것이 IMF 외환위기 이후 근대(그것은 사회 각 영역의 분화와 전문화를 특징으로 한다)가 보다 철저화되는 과정이 낳은 또다른 부정적 효과의 하나라면 그럴 수 있겠다.

10) 김영찬 「문학 뒤에 오는 것」, 앞의 책 35면.

11) ‘퀼트소설’로서 윤성희의 『구경꾼들』에 대한 논평은 김형중의 앞의 글 참조.

12) 김형중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소설 쓰기: 2011년 여름, 한국 소설의 단면도」, 『문학과사회』 2011년 가을호 224면.

13) 이에 대해서는 김형중의 앞의 글 참조.

14) 나와의 사적인 대화에서 소설가 박민규는 이를 ‘아마복싱’과 ‘프로복싱’의 차이라는 절묘한 비유로 표현했다. 그러고 보면 박민규 소설의 가능성은 비유컨대 스스로 보호장비를 벗고 12라운드의 정글 속으로 뛰어들어 관중의 야유와 함성을 등에 업고 싸우는 ‘프로복서’의 모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15) 지금 젊은 작가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듯 보이는, 이를테면 ‘재현에 대한 공포’도 바로 이와 밀착되어 있는 증상 중 하나다. 특정 형식이나 기법 같은 모종의 미학적 필터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현실의 재현이 ‘문학적인 것’과 거리가 먼 낡은 수법(그럴 리 있겠는가!)이라 생각하는 오해가 그것인데, 김이설의 『환영』(자음과모음 2011)은 바로 이 오해의 지점을 단신으로 돌파해나간 중요한 성취다.

16) 윤성호, 작가 인터뷰 「두근두근 내 인생, 무럭무럭 김애란」, 『창작과비평』 2011년 가을호 4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