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작가조명 | 인터뷰
아모르 문디(Amour Mundi), 세상이라는 이름의 연인
심보선 沈甫宣
시인.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초』 『눈앞에 없는 사람』이 있음.
고봉준 高奉準
문학평론가.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이 있음.
2008년, 등단 14년 만에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출간할 때만 해도 심보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시 시단(詩壇)은 이른바 ‘미래파’라고 불리는 새로운 감수성을 사이에 두고 첨예한 신경전을 펼친 뒤였으나, 삶의 시간을 따라 적층되는 슬픔과 그것을 조용히 응시하는 개인의 쓸쓸한 내면을 서정적인 언어로 표현한 그의 첫 시집은 차라리 90년대에 가까워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언어들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감염’에 가까웠다. 그리고 2009년 5월, 나는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과 민주주의의 위기가 만든 새로운 정치적 장에서 우연히 심보선 시인을 만났다. 억압된 것의 반복적 귀환이었을까? 90년대 문학이 청산해버린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사유해야 하는 고독한 시간 속에서 심보선은 누구보다 분주하게 발걸음을 옮겨다녔고, 그의 걸음이 도달하는 모든 장소들은 즉각적으로 시의 터전이 되었다. 두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은 이 발걸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난 몇년간 그가 내디딘 발걸음이 오로지 한 개인만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과 집단, 문학과 정치, 고독과 연대의 시간을 넘나들면서 쓴 그의 시들을 앞에 놓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시집의 부(部) 제목들인 ‘들’과 ‘둘’은 ‘집단’이라는 오래된 이름이 도달할 수 없는 ‘텅 빈 우정’의 형식인 동시에, 세상의 슬픔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시쓰기가 도달한 ‘관계’에 관한 새로운 상상은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
고봉준 두번째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시가 많이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첫 시집은 자괴감과 부끄러움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 삶이라는 시간을 치욕스럽게 여기는 사람의 내밀한 세계를 읽는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번 시집에는 개인의 흔적보다는 ‘우리’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전반적으로 일인칭의 독백이라기보다 타인에게 말을 걸고, 손을 잡으려 하고, 온기를 느끼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온기라는 것이 기존의 공동체와는 다른 성격임은 말할 것도 없고요. 시의 한구절을 빌리자면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 같다고나 할까요?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 사이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심보선 첫 시집은 혼자서 외롭게 쓴 것이에요. 등단 이후 나는 문외한이다, 재능이 없다, 나는 시인답지 않다, 그래도 써야지, 하면서 근근이 썼죠. 삶은 버겁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공부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굉장히 위축되던 때 자기치유의 방편으로 시를 썼어요. 두번째 시집의 시를 쓸 때는 몸이 분주했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고, 그 와중에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을 찾아서 했죠. 그 방향은 혼자의 결정이 아니라 대화와 만남 속에서 나왔고요. 그래서 혼자 썼지만 실은 같이 썼다고 표현하죠.
고봉준 두번째 시집의 1, 2부 제목이 각각 ‘들’과 ‘둘’입니다. 이 복수형이 통상적인 ‘우리’나 ‘공동체’와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는 듯해요. 심보선 시인이 생각하는 ‘우리’ 또는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요?
심보선 원래 제목 후보가 ‘들/둘’이었어요. ‘들’을 ‘둘’로 나눈다, ‘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둘’의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죠. 물론 편의상 ‘들’에는 ‘우리’ 이야기를 넣고 ‘둘’에는 소위 연애시를 넣었지만, ‘둘’ 속에 ‘들’이 있고 ‘들’ 속에 ‘둘’이 있는, ‘둘’과 ‘들’이 겹치면서도 어긋나는 식의 무언가를 생각했죠. 단단한 덩어리가 아니라 불안한 관계로 채워진 공동체. 저는 그 공동체의 토대를 우정이나 사랑이라 부르곤 해요. 제 시 「새」를 보면 “날아가지 마”와 “날아갈 것이다”가 함께 있습니다. 이 둘이 공존하는 공동체인 셈이죠.
고봉준 공동체의 위태로움, 즉 결합도 아니고 분리도 아닌 ‘사이’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시인의 행보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참여라는 방식으로 폭발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자신을 후벼파면서 고독과 맞대면하던 시인이 어느날 갑자기 참여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식으로요.(웃음) 시인에게 불행한 현실을 호소하는 현장이 있다면, 그곳에 나타난다는 것이죠. 공동체가 학문적인 관심에서든 개인적인 관심에서든 문학 또는 문학적 행위로 표현될 때 참여파의 형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상당히 있습니다. 왜 문학적 행위라는 것이 저런 식이어야 하는가, 오히려 미학적인 개입으로 확보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말들입니다. 투쟁현장으로 달려가고, 선언문을 쓰고, 산문을 발표하는 데 대한 암묵적인 비판의 시선이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심보선 그런 비판에는 문학적인 것에 대한 오해가 있어요. 용산참사 농성장에 갔을 때, 저는 이른바 ‘시적인 것’이 텍스트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될 수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예컨대 피켓에 글을 쓰는데 사람들은 나름대로 시적으로 쓰려고 노력해요. 벽에다 시를 쓰기도 했어요. 그밖에 온갖 이미지와 몸짓이 있었죠. 예술은 현장의 에너지와 공간적 구성을 바꿔버렸어요. 그때부터 시는 제게 쓰기만이 아니라 낭송이 되었고, 퍼포먼스가 되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의 교감이 되었고, 액션이 되었습니다. 희망버스에서 저와 송경동 시인, 김선우 시인이 제가 쓴 시를 같이 읽었어요. 이때 이 작품의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 작품은 텍스트인가 하는 질문이 들 수 있겠죠. 그때 그 작품은 셋의 공동창작이었고 낭독 자체가 작품이었어요. 송경동 시인의 절규가 없었다면 청중에게 다가갈 수 없었을 거예요. 텍스트, 소리, 현장의 분위기 등 여러가지가 녹아들어 하나의 작품으로 작동한 거죠. ‘시는 텍스트다’라는 통념이 여기엔 적용되지 않았어요.
고봉준 사람들이 시인에게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시에 대한 자기만의 규정입니다. 그것은 때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바뀌기도 하고 처음부터 완고하게 지켜지기도 합니다. 심보선 시인의 경우는 어떤 방식의 문학수업을 거쳤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텍스트로서의 시를 넘어 액션/액팅으로서의 시까지 오셨는지요? 전범이라든가 영향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심보선 공부, 사람, 체험이 중요한 문학수업이었습니다. 박사논문 쓸 때 인터뷰 대상 가운데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 있었어요. 1970년대 초에 중요한 아시안계 운동단체를 책임졌고, 시 쓰고 그림도 그리는 예술가였죠. 평생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문화운동을 했어요. 그리고 짬짬이 시집을 냈죠. 결코 유명 시인은 아니에요. 이분은 운동에 투신하면서도 계속 시를 써야지, 시집을 내야지, 그런데 언제 쓰지? 하다가 결국 시집을 내요. 얼마 전에도 새 시집을 보내왔더군요. 지금은 온몸에 암이 퍼진 상태라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지역에서 운동을 펼치고 글을 쓰고 있어요. 그분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배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썼던 글인 「‘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창작과비평』 2011년 여름호)에서 이야기한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들은 평생 농사를 지었어요. 이분들도 일하면서 “시 써야지. 시 써야 하는데, 시는 언제 쓰나?” 이러면서 낮에 농사짓고 새벽에 시를 쓰죠. 할머니 한분이 이런 이야기를 시로 썼습니다. 밭 매러 갔는데 시 생각이 나서 밭일을 하나도 못했다, 노을만 멍하니 바라보다 집에 터벅터벅 돌아왔다, 이런 식이에요. 저에게 자극과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은 시와 삶이 긴장 속에서 연결되는 이들이죠. 배웠건 못 배웠건.
고봉준 왜 시라는 장르를 선택했습니까?
심보선 처음 글을 쓴 계기는 학창시절 어떤 여자 선생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보여주지도 못했죠. 그런데 시를 쓰면 제가 자유롭게 된다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해방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전공이 문학이 아니니 아무도 저에게 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어떨 때 썼느냐? 돌이켜보면 제가 어딘가에 속해 있을 때, 그것도 굉장히 구속되어 있는데 그 상황에서 너희가 나를 뭘로 보든, 무슨 일을 시키든,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든 나는 나만의 비밀이 있다, 그런 오기가 발동할 때 시가 나왔어요. 정작 나만의 비밀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요. 군대에 있을 때 그랬고, 조직이란 데 속해 있을 때도 그랬어요. 한번은 취직한 뒤에 직장에서 회의를 하는데 너무나 시를 쓰고 싶은 거예요. 회의를 하면서 옆방에 있는 컴퓨터에 왔다 갔다 하면서, 잠깐 나갔다 오겠다, 화장실 다녀오겠다, 전화받고 오겠다, 이러면서 시 한편을 썼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시간과 장소의 구속을 벗어나서 내 맘대로 쓰기’로서의 시, 독특한 제작행위로서의 시에 중독됐다는 사실입니다. 그 행위 속에서 매번 자기 자신도 모르는 ‘딴사람’으로 해방되었던 겁니다.
고봉준 최근 웹진 문지(webzine.moonji.com)에 ‘Mundi의 영향 아래에서’라는 산문 연재도 시작하셨죠? ‘문디(mundi)’라는 단어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사전을 찾아보니 라틴어로 ‘세계’ ‘세상’을 뜻하더군요. 시집에서 ‘문디’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처음엔 ‘아, 세상에 관한 시가 많겠구나’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시집에 실린 시들은 연애시, 연서(戀書)의 형식과 목소리를 지닌 것이 많아요. 얼핏 보면 낯선 결합처럼 보입니다만, 그러한 결합을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심보선 문디는 세계이자 연인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 때, 말이 몸속에서 들끓는다고 봐요. 그런데 그 들끓는 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죠. 하나는 나 너 사랑해, 너 나 사랑해가 무한히 반복되는 식의 연애담이죠. 반면에 그저 대화가 잘 통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회에 대해, 예술에 대해, 인간에 대해 쎄미나하듯 끊임없이 말하죠. 두 경우 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는 열정이 식어서, 다른 하나는 대화 주제가 떨어져서. 하지만 연애담과 쎄미나가 결합될 때 거기서 놀라움이 일어나요. 말이 ‘끊임없이’ 들끓는 거죠. 하지만 이 말은 겨우겨우 이어집니다. 연애담과 쎄미나는 조화를 이루지 않아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위협하죠. 문디는 그렇게 아슬아슬 이어지는 ‘말의 들끓음’을 조장하고 그것을 시로 옮겨 적게 하는 저의 뮤즈입니다.
고봉준 이 시집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문디가 등장하는 시를 좋아하더군요. 즉 대중적인 흡수력이 있어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죠. 혹시 이것이 공(公)/사(私)로 나누어 표상되는 것이 섞여 있어, 공이 공 같지 않고 사가 사 같지 않은, 매우 독특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즉 이것이 두번째 시집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까지는 이런 종류의 목소리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념적으로 참여시나 민중시는 공이지만, 순수한 의미의 시는 골방에 들어앉아서 사를 쌓아가는 방식이니까요. 그것을 깼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 발성법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은 한풀 죽긴 했지만, 여러 문예지에서 ‘시와 정치’를 특집이나 주제비평으로 자주 다루었고 심보선 시인은 6・9작가선언에서 시작해서 용산참사 현장과 희망버스 행사 곳곳에 계셨습니다. 그러한 현장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시와 정치라는 비평계의 흐름이 어떠셨습니까?
심보선 ‘시와 정치’에 대해 쓴 글이 몇편 있긴 합니다만, 『창비』에 쓴 글(「‘천사-되기’에서 ‘무식한 시인-되기’로」)을 빼면 다만 창작자로서 6・9선언에서 체험한 것, 현장에서 느낀 것을 썼습니다. 『창비』에 쓴 글은 문학과 정치에 대해 쓴 가장 이론적인 평문이었는데 랑씨에르(J. Rancière)를 빌려서 썼어요. 문학과 정치에 대한 랑씨에르의 논의에서 핵심은 평등입니다. 이때 평등은 정체성의 인정이나 경제적 몫의 재분배가 아니라, 말할 수 있고 쓸 수 있는 감성적 능력의 평등, 그리고 그것을 통한 평등 공동체의 구성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정치와 문학의 논의를 얼추 따라가다보니, 여전히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를 분할하는 문학제도의 관행이 견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즉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표본으로 삼는 획일적인 논리를 따르고 있죠. 여기서 현장과 삶은 저 멀리에 있습니다. 기존 평론들은 텍스트만을 보지 텍스트가 실제로 작동하는 삶과 현장을 보지 않아요. 시쓰기가 사람들에게 왜 그리 절실한가?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어떤 행복감을 주는가? 그 글에서 저는 ‘무식한 시인’이라는 이들을 소개했는데, 대안적 표본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만은 아니었어요. 시가 삶 속에서 작동하고, 쓰는 주체를 ‘딴사람’으로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시의 정치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죠.
고봉준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대한민국 시인 중에서 가장 바쁘게 사신다고 하더군요. 트위터면 트위터, 현장이면 현장, 다른 개인적인 활동도 하고 계실 텐데, 첫번째와 두번째 시집은 각각 그 당시에 누구와 만나서 어떤 작업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졌으리라 추측합니다. 세번째 시집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체적인 방향이 정해질 것 같은데요.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에 관해 이야기해주시죠.
심보선 사회학도 하고 예술도 전공이고, 그러면서 문학도 하니까 할 일이 많습니다. 시를 쓸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줄어요. 물론 그 모든 체험을 거치면서 시를 쓰고 싶고 쓸 수 있게 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작동하겠죠? 그런데 이 체험은, 창작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냥 두면 사라져버려요. 반대로 한가롭기만 해도 시를 못 쓸 겁니다. 이 딜레마가 저에겐 중요해요. 시는 계속 쓰겠지만 학문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예술과 삶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찾아보고 싶어요. 5차 희망버스에서 김소연 시인, 신해욱 시인과 ‘문학 천막’이라는 프로젝트를 실험해보았어요.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거죠. 무리로부터 잠깐 떨어진 고독한 순간에 여기는 어디인가?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이들과 무엇을 하는가? 나는 여기 왜 있는가? 등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죠. 그 질문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구하게 해주는 것이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학 천막 안에는 책, 펜과 노트, 촛불 등이 구비되어 있었어요. 많은 이들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오랜 시간 머물렀고 자유롭게 무언가를 표현했어요. 이런 기획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해나갈 생각입니다.
고봉준 개인적 체험에서 나온 기획이겠죠?
심보선 체험, 공부, 여러가지가 수렴된 결과인 것 같아요. 물론 활동을 하고 사회에 대해 고민을 해도 시를 쓰는 순간에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 혼자여야 한다,라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순간에도 짬짬이 고독해져야 하는 거죠. 그 시간을 잃어버린다면 시는 못 쓰게 되겠죠. 짬짬이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 일과 시, 연대와 고독 사이의 어떤 지점을 모색하는 것, 거기에서 저의 고유한 작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들’과 ‘둘’. ‘공동체’나 ‘집단’이라는 오래되고 거대한 이름들이 아닌 ‘우정’과 ‘사랑’의 이명(異名)들. 개인과 공동체라는 근대적인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손쉬운 방식이 아니라 고독과 연대의 에너지를 넘나들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확보해가는, 그러면서도 문학을 텍스트 이상의 것으로 확장하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 서둘러 정답을 외쳐대지 않고 조심스럽게 실험적인 발걸음을 내딛는 것.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손쉬운 대답보다는 어려운 질문법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시인이 고독한 이유는 그가 대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숱하게 반복되어왔던 이전의 질문법과 다른 질문법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들’과 ‘둘’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낳았다. 슬그머니 그의 세번째 질문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