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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작품론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심보선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박수연 朴秀淵
문학평론가. 평론집 『문학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 등이 있음.
pinepond1@hanmail.net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1)은 그 존재 자체로서 이제 막 시작하는 세계에 대한 증언이다. 심보선(沈甫宣)은 「의문들」에서처럼 필사적으로 묻고, 또 묻는다. 실은 모든 시편들이 그 질문에 대한 상상적 답변일 것이다. 최초의 세계에 대한 증언이 질문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 세계는 완성된 것도 완전한 것도 아니다. 그 세계는 “실패할 수 없는 것들을 실패하고/반복될 수 없는 것들을 반복”(「시초」)할 정도로 수많은 오류를 숨겨 가지고 있다. “불가능한 기록”이 그것의 첫 출발점이라고 시인은 써둔다. 그런데, 모든 시집은 맨 처음의 시집이기를 원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들은 각자 자기의 목소리로 맨 처음이기를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눈앞에 없는 사람』이 진정으로 ‘시초’의 열림이기 위해서는 두가지 의미가 작용해야 할 것이다. 첫째, 문학의 자율성 신화에 연결된 시의 존재방식을 전제하기. 사람들은 어쨌든 자율적 개인의 이념에 맞춰 홀로 읽고 해석하는 시의 위치를 전제한다. 그 이전에, 함께 노래 불렸던 자리에서 떠나온 시들이 있는 것인데, 최초라는 언명은 바로 ‘그 이전’이라는 자리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근대적 감성과 자율성의 영역을 벗어나는 글쓰기의 어떤 면모. 이는 심보선 시에 따르면 “자기만의 무질서와 신념으로/자기만의 가난을 구축하”(「시초」)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존재의 현재적 삶을 최종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바람이 있다. 무질서와 신념이라면 그것은 무질서의 질서이고, 가난이 구축된다면 결국 가난의 풍요가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바람은 때로는 부재의 현실을 헤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주어져 있는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무릇 무너뜨리고 헤매는 일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시초의 모습인 법이다.
물론 최초의 시가 언제나 ‘자율성’이라는 이념과 ‘근대적 감성’을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곳의 심보선 시에 대한 규정으로만 충족된다. 그가 써온 일련의 산문, 요컨대 시와 정치에 대해서 그리고 새로운 감성의 개척에 대해서 그가 펼쳐온 일련의 주장이 그 규정을 야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장을 시로 썼을 때 논점을 드러내주는 매우 적절한 작품이 있다.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나’라는 말」 부분
‘나’에서 ‘너’로 이월함으로써 타율성의 과정을 승인하는 사유야말로 시인이 확보하고 있는 삶의 감각적 확장을 증명한다. 이 확장 속에 시인이 선택했던 행동과 언어 들의 총체가 들어 있을 것이다. 일종의 펀(pun) 같은 기법을 고려하여 ‘너는 말이야’를 시적 언어의 성채로 치환하여 읽을 수도 있다. ‘너=말’의 상태를 시인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의 진술방식은 그러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는 언어 하나하나에 강세를 두는 구성법을 택한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위 시의 중간 부분,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를 이면우(李冕雨)의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비 2001)와 대비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빡깜빡” 우는 모습을 본 시인은 다음날 아침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을 본다. 심보선과 이면우 둘 다 흙에 새겨진 삶의 흔적을 의미화한다. 차이가 있다. 이면우는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는 심정으로써 대상에 대한 정서적 관계를 축축하게 심화하고, 심보선은 “나”를 반복함으로써 대상의 논리적 의미를 건조하게 확장시킨다. 즉 이면우는 삶의 진행이 펼치는 모종의 관계성을, 심보선은 그 관계 이전의 존재들의 개체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후자는 이 세대의 공통적 지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젊은 시인들의 ‘건조체 시문법’에 대해서는 특별히 다루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그것은 생경한 언어들이나 선언형 문장에서 도드라지는데, 이러한 언어적 신영토의 개척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 건조체가 특히 잘 드러나는 시 「‘나’라는 말」에는 마침표가 찍혀 있다. 다른 많은 시편들이 마침표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심보선의 글에서 가져오는 것도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시인이라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모든 작품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또다시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1)
시는, 요컨대 시인 자신까지 포함하여, 그칠 수 없는 질문들의 장소이다. 그것은 심지어 ‘마침표’라는 종결행위까지도 의문에 붙이는 것이다. 이를 시적 행위의 능동성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는 몇마디 설명이 필요한 듯 보인다. 심보선은 시적 자율성이라는 감성의 체계가 소멸된다고 이야기하는 시인이다. 실제로 그의 첫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초』, 문학과지성사 2008)과 두번째 시집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자율성에 대한 그의 사유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정한 삶의 벡터가 한 존재의 삶의 과정 전체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자율성에 대한 또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자율성의 소멸은 문학이 또다른 영역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다른 속성의 드러남이라는 논의가 그것이다. 가령, 이면우와 심보선은 삶의 어떤 흔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면우라는 개체가 심보선이라는 개체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조건 속에서 차이나는 부분들의 드러남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율성이란 정말로 있었던 것일까? 문학의 근대적 존재방식이 자율성이라고 믿는 신념의 체계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종의 조건들 속에서 형성되는 신념의 체계가 감성의 체계로 자리잡는 순간이야말로 삶이 시가 되는 순간일 터이다. 자율성이란 통합체로서의 저 삶의 지난함 속에서 환희처럼 찾아지는 부분들의 감각을 최대화한 것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율성이 타율성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자율성이라는 신화가 무너지는 혹은 자율성의 타율성이 문득 되찾아지는 자리가 지금 이곳 시인들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자율성이 근대적 개인의 ‘분할 불가능성’(in-dividuality)이라는 관념을 근거로 해서 실체화된 것이라면, 그 개체의 자율성은 개체를 구성하기도 하고 관통하기도 하는 요소들, 요컨대 개체적 삶이 포괄하는 무수한 내외적 규정들의 능동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운동을 근거로 하는 타율성인 것이다.
「‘나’라는 말」에서 마침표가 찍힌다는 것은 주어진 사태에 대한 종결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지 않다는 것은 ‘비종결의 종결’(바흐찐)을 이룬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심보선이 나와 너에 대해 어떤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보여주는 최대치의 변모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타자와 분리되어 홀로 자족하는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전에 이런 시를 쓴 때도 있는 것이다.
너는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었다
너는 나의 실패를 유혹하여 성공으로 이끌었다
너는 예술의 종언과 타락한 언어와 젖은 욕망과 무너지는 세계와 불가능한 미래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것도 단 한줄의 문장으로!)
그리하여 너는 세계에 대하여 무애자유를 얻었다
(…)
너는 나를 자주 안아준다
너는 나를 매번 감동시킨다
너는 나를 키운 소문의 진원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몸인 자웅동체
애인을 닮은 새와 새를 닮은 애인이 합쳐진 반인반수
그렇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너를 떠난다
너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이제 안녕
—「너」(『슬픔이 없는 십오초』) 부분
이 시는 ‘나’와는 다른 ‘너’를 주제로 삼는다. 앞서 인용한 「‘나’라는 말」에서 ‘나=너’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여기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나와 너의 단절이다. 그 ‘너’는 누구인가. 나를 뛰어넘은 존재, 세계에 대해 자유로운 존재다. 그는 자웅동체이고 반인반수라는 점에서 세계의 모든 것이다. 이러한 ‘너’로부터 떠나고 단절된다는 것은 요컨대 분할 불가능한 개인에 대한 시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적 선언이며, 따라서 시인의 사유다. 시인이 불가능을 시도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너는 유일무이한 시인”이라고 진술되는 순간, 그 ‘너’가 곧 ‘나’임을 알아채기란 어렵지 않다. 따라서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지만, 너와 나가 서로 포함관계라는 사실을 독자들은 충분히 의미화하게 된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너는 내가 아니다”라고 강조할 때, 시는 타자의 윤리학을 외면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나=너’라는 이미 익숙하거나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주어 ‘나’가 대상적 목적어 ‘너’를 떠남으로써 대상 자체를 지우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후에 살아남는 것은 ‘너’와 맺었거나 맺게 될 관계를 부정하는 ‘나’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여기에는 모든 존재의 ‘실재적인 실존형식인 개체성’(발리바르)에 대한 편향적 과신이 있었을 것이다. 자율성 신화가 집요하게, 부정적 전제의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 난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타율성에 대한 다른 명칭으로서의 자율성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두권의 시집, 두편의 시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너」에는 단절이 있고 「‘나’라는 말」에는 연계가 있다. 개체는 자율성에서 타율성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자율성이 타율성의 또다른 이름이었음을 아는 순간, 하나의 개체 안에 무수한 인과연관이 있음을 아는 순간, 감성체계는 또다른 감성체계의 속성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감성체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달리하는 것이다. 무수한 인과연관이라는 조건이야말로 자율성의 타율성을 전면화하는 것인데, 요컨대 이것은 맥락 속에서 변증법적일 수도 있고 탈구성적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간교한 것은 그 속성의 드러남을, 때로는 타자 망각의 흐름 속에서 단일성으로 강조하고 때로는 집요하게 복수성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규정하는 것이 삶의 조건들의 실체적 운동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간을 유물론적으로 감싸고 있는 대상들의 향방일 것이다. 그 대상들은 물론 시인에게는 시적 대상이다. 새로운 감성의 정치가 아니라 정치적 소재의 시적 언어가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는 것이다.
용산참사로부터 시작하여 크고작은, 권력의 독재적 통치가 야기한 사회적 사건들이 있었고, 그 사건들에 심보선 시인이 참여해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런 면모가 강하게 담긴 작품이 「집」이나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같은 시일 텐데, 여기에는 새로운 언어 개척의 기미가 물론 있다. 이것은 예전의 정치적 시편들과 많이 다르다. 많은 젊은 시인들의 용산 시편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것이 시인을 규정하는 타자로서의 용산을 노래한 것인가 아니면 용산에 얽힌 시인들의 사변을 노래한 것인가이리라.
이와 함께 새 언어의 개척에 열심인 그의 시가 좀더 축축하게 정서적으로 구성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와 다른 세대의 소망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좀 뜬금없는 요청이지만, 기대되는 시인에게 한명의 독자가 시 일반의 미래와 관련하여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이때 정서는 물론 낯선 정서이다. 그리고 시는 무엇보다도 정서적 연대로 귀결된다. 서정시가 동일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그 동일성을 꿈꾸도록 하는 차이화의 조건들 속에서 차이를 넘는 행위를 통해 때로는 가시적이고 때로는 비가시적인 공동체를 그려본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정서적 차이들로 인한 적대의 시간에 의해 오래 앓아왔는데, 젊은 시인들의 낯선 정서는 그 적대를 어떻게 비적대의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시적 재료이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 낯선 정서가 더 깊고 넓게 독자들을 움직일 수 있는가이리라. 건조체 시문법으로 축축한 정서를 새겨넣기가 얼마나 가능한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심보선이 좋은 시인이라면 이 낯선 정서에 대한 바람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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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7, 452면. 인용문은 심보선 「‘삶의 시 되기’와 ‘시의 삶 되기’」(『사이』 9호,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2010)에서 가져온 것이다. 요컨대 이 말은 심보선이 간접적으로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