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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

 

달동네 우파를 위한 ‘이중화법’ 특강

한예슬 우화를 솔개와 백조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

 

 

황승현 黃承炫

1976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대중문화평론 당선.

hinno@hanmail.net

 

 

1. 교훈적 우화로 단정하기에 앞서 풀어야 할 의문들

 

자기계발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자기 부리까지 깨버리는 결단력있는 솔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마흔살 먹은 솔개는 부리와 발톱이 뭉툭해진 것에 충격을 받는다. 부리와 발톱이 그 모양이니 사냥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좌파 솔개였다면 부리가 싱싱한 다른 솔개를 향해 공동 사냥을 하자느니 잡은 먹이를 함께 나누자느니 같은 주장이나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정신이 올바로 박힌 솔개는 다르다. 결연한 심정으로 가까운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야호를 외치기도 전에 느닷없이 부리를 바위에 부딪치는 것이다. 정상 등반도 힘들었을 텐데 멀쩡한 부리까지 깨버리려니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하지만 새로운 부리와 발톱을 얻으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깨진 자리에 돋은 새 부리로 헌 발톱까지 모조리 뽑은 완벽주의자 솔개는 그렇게 자기혁신에 성공한다. 새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30년을 더 살아 일흔살까지 꽉 채우는 것이다. 솔개가 사는 곳을 찾아가 고희연이라도 차려드리고 싶을 만큼 감동적인 이야기다. 실로 자기계발의 달인이요 결단력의 화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우등생이 되기 위해 너나없이 분주한 이 나라에서 솔개는 진정 교훈을 주는 생명체다. 재벌과 정부를 미워하는 좌파라면 더더욱 경청해야 할 가슴 벅찬 실화인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거나 정부를 비난하다니 참으로 솔개보다 못한 루저 아닌가. 직원들에게 훈화하시는 사장님과 은행장님 들이 유난히 솔개 이야기를 애용하시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 나라에는 교훈적인 우화1)가 한가지 더 생겼다. 한 여배우가 촬영중에 난데없이 미국으로 출국한 이 이야기는 이미 계몽적 우화로 회자되는 중이다. 언론에 비친 이 ‘한예슬 우화’는 무척 교훈적이다. 책임감을 망각한 젊은 여배우의 경거망동에 관한 타산지석의 우화이자 나는 저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깨달음을 주는 자기계발용 우화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망각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자가 어떤 댓가를 치르는지 보여주는 사필귀정의 우화 말이다.

이 우화의 교훈을 뼛속 깊이 되새기기 전에 잠깐 멈춰 생각해볼 것이 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우화에 따르면 한예슬의 잘못은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다. 하지만 정작 가장 큰 죄가 빠져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계약은 신성하고도 준엄하다. 본인이 일단 체결한 계약에 관한 한 끝까지 책임져야 하니까. 자본주의의 근간인 재산권은 또 어떤가. 한예슬은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려 한 것도 모자라 감히 타인의 재산권과 경제적 이익에 해를 입혔다. 그런데 이상하다. 한예슬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 당연한 죄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수백억대 소송을 당할 것이라는 단발성 기사가 나오긴 했지만 그것도 복귀 후에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계약을 무단으로 파기해 방송국과 제작사에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안길 뻔 했는데 왜 그 부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인가. 한예슬 우화를 타산지석의 교훈적 우화로 결론내리기 전에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방송국과 제작사,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언론은 대체 왜 이 엄청난 대역죄를 묻지 않는가. 한예슬을 비난하는 수많은 목소리에는 거액의 출연료를 받으면서 박봉의 스태프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호통은 있어도 거액의 출연료를 받아놓고 방송국과 제작사에 손실을 입혀서야 되겠느냐는 당연한 지적은 없다.

단지 스태프뿐 아니라 시청자와 국민에게 실망을 줬다거나 직장인에게 박탈감을 줬다는 이야기도 뒤따른다. 이상하다. 수백억대 소송 운운에서 알 수 있듯이 한예슬은 분명 방송국과 제작사에 어마어마한 경제적 손해를 끼칠 뻔하지 않았던가. 촬영이 지연되는 동안 제작비며 관리비도 적잖게 밑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대신 스태프와 국민, 직장인에게 끼친 피해만 걱정한다. 그건 당사자인 방송국과 제작사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있는가. 누가 봐도 제일의 피해자이거늘 왜 방송국과 제작사는 자신의 피해는 언급하지 않고 심지어 직장인 걱정까지 해주고 있는가. 이분들이 이렇게 겸손하고 자애로워도 되는 것인가. 이 의문을 풀기 전까지는 한예슬 우화의 내용과 성격을 어떤 식으로든 단정지을 수 없다. 한 무책임한 여배우의 일탈을 통해 사회생활의 기본자세를 배우는 타산지석의 우화로는 더더욱.

 

 

2. 그들은 왜 방송국과 제작사를 걱정하지 않는가

 

그들은 왜 스태프를 걱정하는가

 

한예슬을 비난하는 목소리에는 대개 스태프에 대한 극진한 애정이 담겨 있다. 왜 그들은 방송국과 제작사 대신 스태프를 걱정하는가. 그동안 천대받아온 스태프를 하필이면 지금 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말한다. 박봉에 시달리는 스태프도 가만히 있는데 거액의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이 촬영을 거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예슬의 잠적이 스태프에게 큰 피해를 끼쳤다고. 의아하다. 스태프의 처지를 그렇게 염려한다면 한예슬을 비난하는 것과 별개로 촬영현장이나 제작관행에도 눈길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예슬과 스태프를 대비시켜 둘 사이의 대립구도를 만들려고 할 뿐 제작관행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한예슬의 높은 출연료 때문에 제작비가 상승했고 그 때문에 스태프의 급여가 줄었다고 주장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한예슬의 출연료뿐 아니라 제작사와 방송국의 수익률도 문제삼아야 한다. 한예슬이 고액의 출연료를 받듯 방송국과 제작사도 천문학적인 광고료와 판권수입, 기타 협찬수익을 벌지 않는가. 스태프의 열악한 박봉과 관련해 한예슬의 출연료를 문제삼겠다면 제작사와 방송국의 수익도 따져야 형평에 맞는다. 한예슬도 결국 그들로부터 고용된 처지 아니던가. 스태프의 월급을 주는 사람은 한예슬이 아니다.

한예슬이 방송국과 제작사에 고분고분했을 경우, 다시 말해 돈 벌어다주는 연예기계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을 경우에도 그들이 스태프의 열악한 처우를 걱정했을까. 따지고 보면 그들이 스태프를 걱정한 것은 한예슬이 방송국과 제작사에 반기를 들었을 때뿐이다. 만일 스태프가 반기를 들었다면 방송국과 제작사는 스태프의 열악한 처우를 걱정하는 대신 그들을 해고했을 것이다.

한예슬 우화를 통해 명확해진 한가지는 스태프는 한예슬이 비난받는 동안에만 주목받았다는 것이다. 스태프는 한예슬을 비난하기 위해 필요한 소품이었을 뿐이다. 스태프도 가만히 있는데 거액을 받는 여배우가 왜 그러느냐는 말은 스태프의 처우 개선을 위한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열악한 처우의 스태프도 침묵하니까 돈 많이 받는 한예슬 너도 침묵하라는 말에 불과하다. 결국 모두를 침묵시키기 위한 고도의 이중화법일 뿐이다. 거액을 받는 여배우도 제작환경에 발언권을 가질 수 없다면 힘없는 스태프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스태프든 한예슬이든 자본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본의 편에 서서 한예슬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은 감추고 싶어한다. 자본의 이익을 방해한 죄 때문이 아니라 스태프를 도외시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한예슬을 비난한 것으로 위장하고 싶어한다. 그들에게 스태프는 한예슬을 이기적인 여배우로 묘사하기 위해 필요한 소품일 뿐이다. 한예슬이 방송국과 제작사의 이익에 조금의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면 그분들은 더이상 스태프를 걱정하지 않으실 테니까.

비정규직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 비정규직에 대한 그들의 극진한 애정은 대개 회사와 충돌하는 정규직 노조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정규직의 파업으로 비정규직의 업무강도가 높아졌다거나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은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처우 향상만 꾀한다는 식의 애절한 걱정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정규직 노조와 회사의 관계가 다시 화기애애해지면, 가령 사장과 노조위원장이 러브샷까지 하면서 무분규를 만천하에 선언하면 비정규직을 걱정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회사와 화기애애해진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의 설립을 방해하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멸시한들 그들은 정규직 노조를 조금도 비난하지 않는다. 정규직 노조가 귀족노조로 비난받을 때는 사용자와 갈등할 때뿐이다. 비정규직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정규직 자녀를 세습 채용하는 황당한 단협을 체결한다 해도, 사용자와 밀월관계를 맺고 있는 한 정규직 노조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새 시대의 노동자상에 걸맞은 선진노조일 뿐이다.

그들이 비정규직을 걱정하는 것은 회사와 정규직 노조가 갈등관계에 놓였을 때뿐이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노조에 대한 비난을 극대화시키는 소품으로서 가치가 있을 때뿐이다. 자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을 대변하는 차원에서 정규직 노조를 비난하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다. 자본과 노동자 간의 노동문제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으로 치환하여 자본을 면책시키는 교묘한 이중화법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이 고용하는가.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것은 자본이다.

그들은 또한 고액연봉의 노동자들은 파업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친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궁금하다. 그렇다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파업하면 괜찮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전경의 방패 모서리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척추가 찍혀도 국가경제를 위해 불법파업을 엄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애국자가 바로 그분들이니까.

그들은 무상급식은 부자급식이기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부유층 자녀에게 급식을 하는 것은 가난한 자에게 돌아갈 자원을 낭비하는 셈이라는 말이다. 차라리 어느 보일러회사 회장님이 올리셨다는 사내 게시판 공지글이 더 솔직하다. 복지가 의무가 되면 곧 빨갱이 세상이 오게 될 거라고 회장님께선 땅이 꺼져라 걱정하시지 않았던가. 그렇다, 빨갱이. 역시 본질을 꿰뚫어보시는 분들이 사용하는 어휘는 남다르다.2)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그들은 왜 회장님처럼 솔직하게 빨갱이 세상을 걱정하지 않는가. 왜 난데없이 부자급식을 염려하는가.

급식이 딱한 처지의 아이들을 긍휼히 여겨 베푸는 시혜라면 아이들의 눈동자부터 다를 것이다. 부자들의 세금으로 가난한 우리에게 공짜밥을 주시다니 이런 감사한 일이 있는가.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그 절절한 고마움이 담겨야 한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겸손함이 담겨야 한다. 가진 자를 원망하기보다 감사해야 하고 이렇게 공짜밥이라도 먹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급식이 같은 또래 누구나 누리는 권리라면 눈동자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미안함도 무안함도 사라진 평범한 눈동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급식비를 내는 부자 아이의 눈치를 보며 밥을 더 달라고 할 때 그 눈에 담길 무안함은 이제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그 무안한 눈동자를 두고두고 보고 싶으신 것이다. 복지가 국가의 의무가 될 때, 그래서 누구나 고개 뻣뻣이 들고 권리로서 복지를 요구할 때 그들은 더이상 무안한 눈동자를 볼 수 없다. 그들은 미안함이 걷힌 아이들의 평범한 눈동자를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의 아이들이 부자 아이들과 똑같이 먹다니. 나아가 그것을 권리로 당당히 요구하게 되다니. 그래서 회장님이 빨갱이 세상이 왔다고 그렇게 탄식하셨으리라.

부자급식은 안된다며 가난한 집 자녀를 그렇게 걱정하는 분들이 그 아이들이 복지를 권리로서 누리는 걸 반대하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한예슬을 비난하기 위해 스태프를 걱정하듯, 무상급식을 반대하기 위해 가난한 집 자녀를 걱정하는 것이다. 부자의 자녀가 아니라 빈자의 자녀를 위해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위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가난한 아이들의 평범한 눈동자를 견딜 수 없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은 왜 국민을 걱정하는가

 

한예슬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한예슬이 시청자와의 약속을 어겼다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아들이 죽었음에도 촬영장을 지켰다는 선배 여배우의 사례를 들며 한예슬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때 시청자와의 약속은 슬그머니 국민과의 약속으로 격상된다. 그들은 왜 한예슬이 가장 확실하게 어긴 약속은 애써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한예슬이 국민과의 약속보다 먼저 어긴 것은 방송국이나 제작사와의 계약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왜 방송국과 제작사의 피해나 손실은 끝내 언급하지 않을까.

그들은 한예슬이 단순한 계약위반에 그치지 않고 국민적 약속까지 저버린 부도덕한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송국과 제작사의 경제적 이익을 방해했다는 말은 실수로라도 입밖에 꺼내지 않는다. 한예슬을 비난할 때 시청자와 국민이 등장하듯 노동자를 비난할 때엔 국가경제가 등장한다. 비정규직이 도저히 이런 급여로는 살 수 없다며 파업을 감행한다면 그 즉시 국가경제를 볼모로 자신의 이익만 탐하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될 것이다.

비정규직이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몫을 요구하지 않을 때뿐이다. 사용자가 정규직 노조를 향해 열악한 비정규직도 저렇게 묵묵히 일하는데 너희들은 뭐가 그리 불만이냐고 외칠 때만 비정규직은 도덕적 존재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정규직을 무력화하는 소품으로서의 활용가치가 없을 때는 순식간에 부도덕한 자들이 된다.

주류언론은 파업을 불법이라고 비난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국가경제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불법성을 문제 삼다가도 정작 합법파업이 벌어지면 안면을 바꿔 국가경제를 거론하는 것이다. 자본에게 파업은 법질서에 도전하는 불법파업 아니면 국가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부도덕한 파업, 둘뿐이다. 그러나 파업이 발생하면 손실은 불가피하다. 파업이 사장님의 열살배기 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특별 이벤트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이 파업을 노동자의 권한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노동자에게 주어진 마지막 수단이기 때문이다.

국민이나 국가까지 동원되는 도덕성 논쟁은 대개 사안의 본질을 은폐할 뿐이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문제를 윤리적 갈등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한예슬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몰아감으로써 출연료 지급방식이나 출연시간 조정 같은 경제적 쟁점을 희석하는 것이다. 한예슬을 비롯한 연기자들을 옥죄는 자본의 논리는 배우의 윤리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되고 있다. 연기자협회의 성명서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방송사와 제작사는 일정을 최대한 촘촘히 잡아 비용을 줄이자는 생각뿐입니다. 회당 정해진 출연료만 지불하면 되는 현재의 출연료 지급 방식이라면, 하루 10시간 아니라 24시간을 현장에 대기시켜도 제작사나 방송사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연기자들에게 하루 2~3시간 조각잠을 재우고 휴식 없이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예슬씨의 촬영거부가 말하는 실체적 진실입니다.3)

 

도덕성을 문제삼는 윤리론은 대개 정치경제적 쟁점을 은폐하고 국면을 호도한다. 가령, 저개발국의 출산율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가족계획을 세우지 못할 만큼 분별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특별히 아이를 사랑하는 인성을 타고나서도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비용이 부자의 그것보다 실질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양육에 들이는 시간이라는 요소다. 저학력자와 고학력자, 빈곤층과 부유층의 차이는 동일한 시간으로 벌 수 있는 수입의 차이기도 하다. 시간의 기회비용이 다른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될수록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은 윤택해진 여성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시간의 기회비용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식인종의 식사예절이나 검투사의 신사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그것은 사안의 구조적 본질을 은폐하는 데 기여할 뿐이다. 식인종이 포크로 식사를 한다고 교양인으로 대접받을 리 만무하다. 식인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아무리 고상한 식사예절을 지니고 있다 한들 그는 식인종일 뿐이다. 상대방을 죽여야 살아남는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도 마찬가지다. 검투사가 신사도를 지킨다고 해서 그 결투가 도리에 맞다고 할 사람은 없다.

설령 검투사가 살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썼다 한들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검투사에게 신사도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검투사를 둘러싼 구조적 폭력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 검투사에게 강요된 비인간적인 결투는 그 자체로 악이다. 악을 강요해놓고 신사도를 운운하는 건 기만이다. 검투사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사도가 아니라 비인간적인 결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부도덕한 구도 속에 검투사를 몰아넣고 개인적 윤리를 기준으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모순이다. 개인적 윤리를 기준으로 한 도덕적 설교는 대개 인간을 그런 처지로 몰아넣은 구조적 폭력을 묵인한다. 치열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을 개인적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하여 사안의 본질을 감추는 이중화법일 뿐이다.

 

그들은 왜 직장인까지 걱정하는가

 

그들은 드라마 제작현장의 후진성을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한 뒤, 한예슬이 촬영장을 떠난 동기는 이해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직장인까지 걱정한다. 대한민국 직장인이 자기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과연 한예슬처럼 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도 꾹꾹 참아야 하는 직장인이 일터를 박차고 나간 배우를 볼 때 느낄 박탈감까지 염려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직장인을 걱정하는 와중에도 방송국과 제작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직장인 때문에 비난하는 것이지 방송국과 제작사 같은 자본의 이익 때문에 한예슬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듯 말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 수단을 문제삼아 목적까지 부정하는 것도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수단 뒤의 목적을 부정하기 위해 수단을 핑계삼는 것에 불과하다. 수단을 내세워 목적과 본질에 대한 논의를 봉쇄하는 이중화법일 뿐이다. 파업이나 시위가 벌어지면 사회명사들이 주류언론에 등장해 어려운 처지는 이해하지만 폭력을 써서야 되겠느냐고 점잖게 말씀하신다. 궁금한 것은 만일 폭력을 쓰지 않으면 그 이성적인 분들께서 노동자의 주장을 귀담아들으실까 하는 점이다. 아마 우문일 것이다. 그때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으실 테니까.

어차피 자본의 편에 서 있으면서, 노동자가 폭력을 쓰지 않고 공손히 대화를 청해도 어차피 자본의 편을 들 거면서, 온화한 얼굴로 폭력 말고 대화로 풀자고 말씀하신다. 폭력이 문제라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가 폭력을 포기하게 만든 다음, 폭력을 쓰지 않아 다루기 쉬워진 노동자를 간단히 무시하면 되니까. 폭력이 약자의 마지막 무기라는 것은 노동자보다 자본과 그 응원단이 더 잘 알고 있다.

‘폭력만은 안된다’는 지당한 말씀은 다른 모든 방법이 소용이 없어 마지막으로 선택한 방식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씨몬느 베유(Simone Weil)의 말처럼 비폭력은 폭력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할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비폭력은 그 자체로 자명한 것도 정당한 것도 아니다. 주류언론은 대개 폭력을 쓴다는 이유로 문제제기의 목적과 취지마저 격하한다. 폭력을 증오하는 비폭력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폭력의 해악이나 한계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약자의 문제제기를 좌절시키기 위해 폭력을 핑계삼았을 뿐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전경의 군홧발에 머리가 뭉개질 때에는 ‘폭력만은 안된다’는 고매한 말씀을 더이상 들을 수 없으니까.

다만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한예슬의 미국행을 걱정하던 분들을 만족시켜드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미국행이라는 방식이 문제였다며 안타까워하던 그분들의 염려를 풀어드릴 방법은 없다. 한예슬이 미국으로 가지 않고 단순히 촬영을 거부했다면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했을 테니까. 그 다른 방법을 선택해도 그분들의 걱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수단을 찾으면 그들은 이성적인 목소리로 또다른 우아하고 적절한 수단을 찾아보라고 말할 테니까.

한예슬과 방송국 및 제작사 양측 다 잘못했다는 말은 양측의 잘못을 지적하고 파헤치기 위한 말이 아니다. 둘이 똑같으니 서로 문제제기하지 말고 이대로 현상 유지하자는 것에 다름아니다. 한국정치를 한탄하는 분들은 대개, 제대로 된 우파가 없지만 제대로 된 좌파도 없다고 훈계한다. 진정 서민을 위하는 좌파 역시 없다며 좌우 구분이 무의미하거나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다 마찬가지라며 정치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화법이다. 당연히 논의해야 할 정치적 쟁점을 무의미한 것으로 기정사실화함으로써 그에 관한 토론과 논쟁을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쟁점을 회피하고 무력화하는 데 이용된다면, 양비론(兩非論)은 이미 양비론마저도 될 수 없다. 쟁점화를 원하지 않는 특정 상대방을 교묘하게 편드는 논리일 뿐이다.

이론에 관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의 통찰에 기대어 말하자면, 정치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상대방의 정치적 주장에 대한 반감과 자신의 정치적 주장에 대한 망각을 의미할 뿐이다. 정면으로 쟁점을 논의할 경우 이길 자신이 없을 때 양비론을 빙자한 위장된 이중화법이 조용히 등장하는 것이다. 한예슬이 제기한 방송제작 환경의 난맥상을 부인할 수 없게 되자 무작정 방송자본 편을 들기보다 모두 다 문제라며 영리하게 논점을 흐리려는 것처럼.

 

 

3. 이중화법의 최종 표적, 달동네 우파

 

반미(反美)를 외치면서 자기 자식은 미국유학을 보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좌파에 대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주류언론의 칼럼에서 좌파의 이중성을 거론하며 항상 드는 예시니까. 그들은 묻는다. 왜 반미를 주장하면서 자식은 미국유학을 보내느냐고. 그런데 그들의 비아냥을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만일 반미를 말하면서 자식을 미국에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언행일치하겠다며 자식을 미국 근처에도 보내지 않는 반미주의자는 어떻게 되느냔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 언행일치의 반미주의자에 동조할 것인가? 당연히 아닐 것이다. 어차피 비난할 것 아닌가? 당신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명실상부한 반미니 나도 당신을 따라 반미를 하겠소, 이럴 것인가? 그때는 도리어 뼛속까지 반미라며 손가락질할 것 아닌가.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다는 건, 우파가 반미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실은 미국에 비판적 시각을 지닌 정도에 불과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의 상당수 자국민도 미국의 현체제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 않은가. 이 경우는 오히려 반미라는 수사가 과장이었음을 우파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만일 명실상부한 반미주의자가 미국유학을 보냈다면 그것은 반미주의자들의 부도덕을 입증하는 사례라기보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사회가 미국에 중독되어 있다는 징표라고 봐야 한다. 반미주의자를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내면의 미국 중심주의를 더욱 비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주류언론과 우파가 미국유학이 지니는 식민성이나 계층간 위화감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유명 대학 서너군데에 합격했다는 자랑스러운 한국 고교생의 인터뷰를 빠뜨리지 않는 곳이 주류언론이니까. 그들이 자식을 미국유학 보내지 못한 서민의 박탈감을 걱정하는 건 좌파가 자식을 미국유학 보냈을 때뿐이다. 좌파만 아니라면 아무리 호화판 미국유학을 보낸다 한들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좌파를 비난하는 경우를 빼고는, 그들이 유학을 가지 못한 가난한 서민의 자식을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러한 이중화법의 변종은 다양하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하는 영화인에게 그러는 당신은 왜 외제차를 모느냐고 비난하거나, 고교 평준화를 지지하는 지식인에게 왜 자식은 특목고에 보내느냐고 따지는 것 모두 이에 속한다.

‘반미 하면서 자식들 미국유학은 왜 보내느냐’는 질문이 한 단어로 압축된 것이 바로 ‘강남좌파’다. 강남좌파는 사실 많은 수식어가 생략된 단어다. 이 단어는 ‘반미 하면서 자식들 미국유학 보내는 겉 다르고 속 다른, 강남 사는 좌파’의 준말이니까. 이상한 것은 강남좌파의 대척점에 있는 ‘달동네 우파’라는 단어는 회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이상할 것도 없다. 이 나라는 ‘좌익사범’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우익사범’이라는 단어는 없는 나라니까.

‘달동네 우파’ 대신 ‘강남좌파’라는 단어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이중화법임을 시사한다. 강남좌파는 애초부터 달동네 우파를 염두에 두고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동원한 표현이다. 좌파는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겉으로만 서민을 걱정하는 위선자이며 서민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파라는 주장을 ‘강남좌파’라는 레토릭에 집약한 것이다.

강남좌파가 간혹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건 좌파에 대한 인식이 비약적으로 호전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강남적인 것’에 대한 우파적 선망 때문이다. 강북우파보다 강남우파가 대접받듯 좌파도 강남사람같은 세련미를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강남적인 것에 대한 선망 때문에 조롱의 의미였던 강남좌파가 긍정적 의미를 획득한 아이러니컬한 상황일 뿐이다.

이러한 이중화법의 최종 표적은 누구인가. 바로 달동네 우파다. 그렇다면 달동네 우파를 향해 이중화법을 구사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자본과 그 응원단이다. 이중화법에는 달동네 서민의 좌파화를 저지하려는 살뜰한 배려가 담겨 있다. 달동네 서민이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대신 좌파를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에겐 이중화법이 필요하다.

자본의 편임을 들키지 않고 실질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이중화법만이 달동네 서민이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품는 사태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 그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달동네 우파의 상은 바로 어려운 처지에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자기계발에 적극적인 서민이다. 가진 자를 겨냥한 좌파의 선동에 흔들리지 않는 건전한 서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전혀 불만 없는 긍정적인 서민 말이다.

그들은 절대 본론을 꺼내지 않는다. 자본을 편드는 말을 한마디 꺼내지 않고서도 자본에 맞선 자들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중화법은 파업을 직접 비난하지 않으면서 파업을 좌절시키는 수완이자, 가난한 자를 걱정하면서 복지를 결정적으로 후퇴시키는 기술이기도 하다. 달동네 우파를 겨냥한 이중화법에 맞서야 할 이유다.

 

 

4. 자기계발용 우화라는 거대한 이중화법

 

자기계발의 경전으로 각광을 받던 솔개 이야기는 애석하게도 한낱 우화에 불과하다.4) 하긴 손톱도 아니고 부리를 깬 자리에 어떻게 새 부리가 다시 돋겠는가. 백조가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을 때도 그 발만큼은 쉼없이 움직인다는 이야기 역시 지극히 목적의식적으로 지어낸 우화일 뿐이다.5) 오리든 백조든 공기를 머금은 깃털과 부레 역할의 기낭, 함기골(含氣骨) 덕분에 저절로 물 위에 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편견을 투영한 것이 명백한 이 서툰 우화들이 오랫동안 방방곡곡에 울려퍼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초보적인 자연법칙에도 어긋나는 이런 우화가 자기계발의 진리로 통용되었던 것은 자본과 그 응원단 때문이다. 자본과 그 응원단이 솔개와 백조를 그처럼 사랑한 것은 국민에게 전달하고 싶은 간곡한 메씨지가 있어서다. 정부와 재벌, 체제에 불만을 품지 말고 솔개와 백조처럼 너 스스로를 바꾸고 노력하라. 뼈를 깎는 혁신을 통해 신자유주의 경쟁에 철저히 적응하라.

자기계발 우화는 경쟁을 신성시한다. 나아가 그 신성한 경쟁에서 영웅적으로 승리할 것을 독려한다. 그러나 우화의 교훈대로 경쟁에서 위에 선다고 해서 사회적 생존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온갖 형태의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자는 많지 않으니까. 자본주의의 경쟁은 본래 경쟁에 참여한 자들의 자아성장이 아니라 자본의 효율과 비용절감을 위해 설계된 것이다. 경쟁을 거치면 최적자를 저렴한 비용으로 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에 순응하기 전에 경쟁이 구조적으로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자기계발용 우화는 본래 우파적이다. 스스로 자기계발을 하는 노동자는 자본이 책임져야 하는 직무 교육과 훈련 비용을 절감해주기 때문이다. 일이 좋아 일에 미친 성실한 노동자는 쉽고 싸게 부릴 수 있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자기계발용 우화는 그 자체로 거대한 이중화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한예슬 우화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 한예슬 우화는 직장인에게 책임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자기계발용 우화가 아니다. 한 여배우의 경거망동에 관한 타산지석의 우화도 아니다. 이중화법이 무엇인지, 그것이 달동네 우파를 어떻게 겨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폭로의 우화여야 한다.

자본은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고도 목적을 관철한다. 한예슬 때문에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 방송국과 제작사가 자신의 다급한 처지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듯이. 방송국과 제작사는 자기들 자신이 아니라 스태프와 국민과 직장인을 걱정함으로써 한예슬을 굴복시키지 않았던가. 재벌과 관료, 보수언론은 자신을 걱정하는 법이 없다. 서민을 걱정하고 비정규직을 걱정하기 때문에 무상급식을 반대하고 파업을 반대할 뿐이다.

이제 새롭게 해석된 한예슬 우화를 들고 맞서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솔개와 백조를 닮으라며 호통치고 있을 것이다. 한예슬 우화를 우리 시대의 솔개와 백조에게까지 읽혀야 하는 이유다. 자본이 선전하는 대로 솔개와 백조가 그렇게 결단력있고 자기계발에 능하다면 우화의 속뜻을 읽어내는 것쯤이야 능히 해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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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물이 등장하는 ‘fable’이나 교훈적 비유담 ‘parable’ 모두 우화로 번역된다. 이 글에서는 동물이 등장하든 사람이 등장하든 비유적 의미의 알레고리를 통칭하여 우화로 부른다.

2) 박수진 「귀뚜라미 회장 “오세훈 황산벌싸움 도와야” 사원 공지」, 한겨레 2011.8.18.

3) 「한예슬씨 촬영거부에 즈음한 (사)방송연기자협회 성명서」 2011.8.18.

4) 구본권 「‘솔개식 개혁’의 실체…솔개는 정말 환골탈태를 할까?」, 한겨레 인터넷판 2006.5.9.

5) 최종욱 「동물이야기: 백조의 노력? 진실을 말해주마」, 서울신문 201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