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김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아카넷 2011

‘유교의 재발견’이 필요한 진짜 이유

 

 

백민정 白敏禎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bearphilo@hanmail.net

 

 

15737외국인 친구들은 내가 유교를 공부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다. 여성의 욕망과 권력을 인정하지 않은 유교에 왜 공을 들이냐는 것이다. 당신이 조선시대 여성으로 태어나면 행복하겠냐고도 묻는다. 애증이 뒤섞인 나의 복잡한 심경을 밝혔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늘 마음이 불편하다. 여기에는 유교라는 사상적・문화적 지반에 선 자신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 그럼에도 유교를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적 요구가 혼재돼 있다. 하지만 언젠가 문제를 돌파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동아시아 유교문명 비평서라고도 할 만한 김상준(金相俊) 교수의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를 살펴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책의 방대한 내용 가운데 중요한 관점의 하나는 저자가 표방하는 ‘중층근대성론’이다. 다중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대안근대성(alternative modernities) 논의의 한계에 주목하며, 저자는 근대성의 역사적 중층을 원형근대성과 식민-피식민근대성, 지구근대성으로 분류한다(50면). 세 층위가 연속적이고 누적적으로 중첩되어 인류사의 근대성이 구성되었다고 본 것이 그가 말하는 중층근대성론의 골자다. 이를 통해 저자는 서구근대의 과학화・합리화・개인화・자본논리 등으로 요약될 수 없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비자유주의적 에토스가 근대성의 흐름에 존재했다고 주장하며 연대성・공공성・박애주의・에코이즘 등을 사례로 든다(54면). 하지만 아쉽게도 책의 전반적 기조는 비자유주의 혹은 비서구근대성의 특질을 명료하게 밝히기보다, 여전히 서구근대의 중요한 특징이 동양에 미리 존재했던 것을 실증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맹자의 땀’이란 제목을 봤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다. 저자는 생물학적 토대로부터 기원한 인간심성의 도덕적 요소를 말하고 있다. “필자가 ‘맹자의 땀’ 이야기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이유는 종교성의 근원을 생생한 몸의 반응으로 설명한 아주 특출한 사례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도덕의 기원은 몸에서, 우리 몸의 땀에서 시작되었다!”(100면) 그러나 타인에 대한 인간의 감성 혹은 윤리적 감각을, 16만년 전 생물학적 기원에서 찾으려는 이같은 시도는 심각한 난점을 갖는다. 진화발전생물학이란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의 윤리적 본성이 정당화될 때, 이 문제는 더이상 어떠한 철학적 논박과 비판, 재구성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게 된다. 더구나 과학으로 포장된 윤리의 선험성에 대한 고찰이 “모든 인간은 이렇다”라는 단일한 절대언명으로 귀결될 때 이것이 초래하는 위험성은 더욱 커진다. 저자는 여러 곳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98~99면). 그러나 이런 태도는 ‘그렇다’라고 인정되지 않는 인간 속성에 대한 독단적 가치평가 및 그에 따른 물리적 교정행위를 수반한다.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선험적 규정도 이념적 폭력을 초래한다는 점을 재고해야 한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관점을 옹호했지만, 이것을 유교만의 고유한 평등화 논리로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유교지식인이 어떤 상태를 성인의 경지로 보았고 누구를 성인으로 인정했으며, 성인군왕聖王은 어떤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았는지에 관한 당대 논의들이다. 수양과 덕성에 따라 인간등급을 분류한 유교의 독특한 신분차별화 전략은 인성의 평가와 관련해 고질적인 자의성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사회에 항상 두 부류의 집단, 즉 수양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전자에 의한 후자의 계도(통치)를 당연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수양된 자가 그렇지 못한 민(民)을 다스릴 권력을 갖는다고 본 유교지배층의 뿌리깊은 엘리트의식은 쉽게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막스 베버 같은 학자들이 유교의 ‘현세초월적’ 측면을 이해 못했기에 유교를 현세적응적, 왕권부합형, 친족종교로 오해했다고 말한다(584면). 종교의 초월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넘어 윤리의 새로운 보편층위를 발견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저자는 유학자들이 견지한 현세초월적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가족주의 한계를 돌파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587면). 하지만 저자의 주장처럼 공자를 비롯한 대표적 유학자들이 공(公)과 인(仁)의 실현을 위해 가족이념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선 저자의 변명이 궁색해 보인다. 왕가의 경우를 포함해 그 범위가 확대된 친족례는 저자도 강조했듯 유교적 예치의 구현과정에서 사대부와 양민의 의식 속에 광범위하게 파고들었다. 예법이 가진 강력한 현실규제력을 무시하고 이 대목에서만 친족주의가 보편적 사랑과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이었다고 말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저자는 종법제로 규제해야 할 왕조체제가 붕괴된 후 친족주의가 힘을 잃고 대신 그곳에 자유주의・민주주의・인민주권 등의 보편이념이 자리잡았다고 말한다(589면).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구왕조가 사라졌다고 해서 수백년 동안 각인된 친족주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다양한 가치를 준거짓는 최종심급의 근본가치가 무엇인지 물으면, 대부분 가족적 유대감을 꼽을 것이다.

한편 유교의 친족관에 대한 관점보다 더 당혹스러운 점은 사실 저자의 여성관이다. 저자는 유교사회 여성들이 남성과 마찬가지의 도덕적 절제력을 소유하고 도덕권력에 참여할 수 있었던 공모와 의미 공유의 양상을 마치 양성평등의 사례인 것처럼 평가하고 있다(277면). 하지만 무엇 때문에 지배적 권력관계에서 남성이 추종한 명예논리를 여성이 그대로 따라야만 하나? 저자는 『열녀전(烈女傳)』의 에피쏘드,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지방영주의 부하였던 구자(丘子)라는 인물의 부인이 남편을 대신해서 자결한 이야기를 소개한다(286~87면). 물론 여성도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남성 혹은 인간의 이름으로 기성에 의해 강요된 원칙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주자학을 비판하며 ‘이(理)’가 사람을 죽인다고 항변한 고전학자도 많았는데,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도덕의 이름으로 이런 주장이 재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모두 그렇다”고 본 저자의 인간본성론, 진화생물학의 이름으로 제안된 선험적 인간학이 이같은 귀결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저자는 지금 세계인들이 동아시아문명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데 아직 누구도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기에 스스로 유교 탐색을 시작했다고 회고한다(12면). 그리고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 통치의 공공성 추구, 민(民)의 복리에 대한 관심, 안정된 항산(恒産) 추구, 국제관계에서의 평화와 공존 추구”(16면)를 유교에서 찾은 문명의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총평한다. “이제 중국의 부상을 계기로 보다 폭넓은 지구적 문명재편의 적극적인 촉매제 역할을 자임해야 할 때다. 천년에 한번 올, 매우 귀한 역사적 호기다.”(595면) 그러나 왜 우리가 서구권의 몰락 그리고 중국의 부상에 편승해서 유교선양운동에 앞장서야 하나? 저자는 “상대가 처참한 실패를 계속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정당성이 확증되는 논리”(593면)를 비판했다. 하지만 ‘유교 거듭남’에 앞장서려는 저자의 태도 역시 이와 유사한 것이 아닐까? 특정한 강대국의 발호, 특히 경제적 부상에 맞물려 사상적・정신적 유산을 재구성하고 재발견하려는 무의식적 욕망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혀왔다. 살아 있는 유학 이념에 대한 분석과 성찰은 사실 어느 때라도 필요하다. 하지만 서구가 부흥하면 유학을 맹공하고 서구가 몰락하면 유학을 부흥시키려는 이같은 지적 관행은 더이상 되풀이되어선 안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는 서구학술사에 대한 어떤 열등감도 없이, 그간의 지적 풍토와 경향, 무의식적 욕망을 비판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강대국의 사상에 부응하여 또다른 지적 패권의 자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발버둥치기보다 오래된 관행에서 거리둘 수 있는 희소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