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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 인터뷰

 

어딘지 무표정하고 갸우뚱하면서도 화가 날 만큼 슬픈

 

 

이장욱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 출간.

 

 

 

 

ⓒ 송곳

ⓒ 송곳

 




이 사람, 만나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낯을 가리고 그리 사교적이지 못한 내 성정으로는 드문 경우였다. 그게 「오뚝이와 지빠귀」의 앞 몇단락을 처음 읽었을 때였는지, 무표정하면서도 어딘지 갸우뚱한 그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그의 생각을 알고 싶고 교우관계와 세계관이 궁금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한 서너시간쯤 말똥말똥 얼굴이나 쳐다보았으면 좋겠다. 술 한잔이 곁에 있으면 더 좋겠지. 그런데 이 사람, 술 좋아할까? 그런 맹한 생각.

그러다 덜컥, 황정은을 만났다. 물론 첫 만남이었다. 그냥 말똥말똥 얼굴이나 쳐다보았어도 좋았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황정은이 누구인가? 독특한 “애도와 증언의 소설”(복도훈), “근래의 한국소설이 도달한 가장 윤리적인 절망과 희망”(신형철), “사실주의를 초과하는 사실성”(한기욱)의 소설로 명명된, 그리하여 문학의 혁신과 문학의 정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드문 텍스트의 작가가 아닌가.

다만 나는 이 모든 평들을 지우고 그를 마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희미하고 갸우뚱한 그의 인물들과, 그 인물들의 기기묘묘한 말들의 리듬과, 그 리듬 속에 배어 있는 슬픔들만이 오래 남았으므로. 약속장소인 인문까페 창비에 나타난 작가의 첫인상은 뭐랄까, 작고 노랗고 춥고…… 역시나 갸우뚱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런데도 어딘지 알 수 없는 단단한 것이 저 안에 오밀조밀 채워져 있는 듯한,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애독자의 자리에서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

 

이장욱 두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우선 근황이 어떠신지요? 요즘 인터넷 문학라디오 「문장의 소리」 진행자로도 활동하고 계신데.

 

황정은 「문장의 소리」는 이번주에 2011년 마지막 녹음을 마쳤어요. 요즘은 별로 외출하지 않고 소설 쓰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장욱 차분하고 정감있는 진행이 좋더군요. 2010년에 장편소설 『의 그림자』를 낸 이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집입니다. 작가로서 장편을 쓸 때와 단편을 쓸 때 느낌이 많이 다를 텐데요.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출간.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소설『百의 그림자』,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출간.

 

황정은 장편을 쓸 때는 역시 지구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페이스 조절에도 신경써야 하고요. 단편은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자’라고 생각하면 딱 일어설 수 있는데 장편은 중간에 일어나기 참 애매할 때가 있어요. 페이스 조절을 하려고 일정한 분량으로 매일 쓰는데, 오늘 잘 풀린다고 너무 나가버리면 이튿날엔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피로해서 작업이 어렵더라고요. 또 장편은 첫 장을 쓰기 전에 본편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짧은 이야기를 쓰게 되고요. 『의 그림자』 때 그랬고 지금 쓰고 있는 원고도 그랬으니까. 두차례 겪었을 뿐이지만 하여간 저는 그랬습니다. 장편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워밍업 삼아 그런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장욱 첫번째 소설집도 그랬지만 두번째 소설집도 황정은만의 문장이라고 할 만한 게 돋보여요. 인물의 대화나 문장의 호흡, 리듬, 특유의 음악성 등이 매력적입니다.

 

황정은 고맙습니다. 제 소설에 음악성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좋아요. 읽거나 쓸 때 묵독보다는 음독을 하는 편이라서 그런 습관이 문장에 반영되나 싶기도 하고요. 말에 관한 강박도 좀 있는데 그런 면이 리듬으로 읽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이장욱 이번 소설집의 「낙하하다」에 있는 “누가 누가 누가 없어요 나와 나와 나와 충돌해줘” 같은 문장의 리듬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이나 안타까움은 쉽게 잊히지 않을 듯해요. 「야행(夜行)」에는 책책책 하고 돌아가는 시계가 나오고 「대니 드비토」에는 잔잔잔 하고 돌아가는 냉장고가 나옵니다. 이런 사소한 의성어에서조차 스타일의 독특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느껴져요.

 

황정은 잔잔잔잔, 하고 돌아가는 냉장고에 관해서는 일전에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일단 저희 집에 그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냉장고가 있었습니다.(웃음) 책책책책,이라거나 잔잔잔잔, 하고 쓰다보면 어라, 하면서 일단 제가 즐거워요. 「야행」에서 시계소리를 쌓은 이유는요, 책, 책, 책, 책, 하는 소리로 머리를 꽉 채워서 그 상황으로부터 자기 ‘멘탈’을 보호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살짝 붕괴해가는 인물을 서술해보고 싶었어요. 「낙하하다」의 경우, 어두운 공간을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어둡고 무한한 공간에서 자기 목소리만 듣다보니 또 그 말을 스스로 받아 되풀이하는…… 이런 막막함이나 권태감, 고독을 표현하고 싶어서 같은 문장을 여러번 반복해 썼어요.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 출간.

李章旭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소설집 『고백의 제왕』 출간.

 

이장욱 어느 글에선가 『의 그림자』를 두고 노래하고 싶어서 쓴 소설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제 경우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나지막한 노랫소리 같은 게 귀에 남았어요. 혼자 부르거나 또는 둘이 가만히 손잡고 부르는 노래라는 느낌도 들고요. 음악성 외에 특유의 환상에 대해서도 궁금한데, 정은씨 소설에 환상적인 요소가 있잖아요? 그런데 많은 작품에서 이게 단지 환상이라기보다는 감각 차원에서 직접적이고 실제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갑자기 키가 줄어든다거나(「오뚝이와 지빠귀」) 아버지가 조용한 모자가 되어버린다거나(「모자」) 하는 것 말이죠. 정말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황정은 그런 느낌이라고 말씀해주시니 말이지만, 실은 저도 정말 환상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거든요. 소설에서 아버지가 난데없이 모자가 되는데, 이게 완전 황당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질 않는 거예요.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요. 「모자」라는 단편의 모티프는 제 아버지였는데, 아버지가 참 모자로구나, 느꼈던 순간의 정서가 강해서 현실과 먼 장면이라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아요. 또 아버지가 지금 외롭다, 쓸쓸하다라고 서술하는 것보다는 모자가 되어서 놓여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아버지의 심정을 더 가깝게 느끼는, 말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느껴지는, 그런 게 있지 않나 생각했어요.

 

이장욱 「낙하하다」에 보면 평면의 정의가 나와요. ‘세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그런데 읽다보면 ‘결국 평면은 어디에?’라는 생각으로 아득해져요. 평면은 사라지고 평면에 대한 정의만으로 팽배한 세계. 환상이란 게 있다면 이런 세계에서 어긋나거나 일탈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황정은 「낙하하다」에서 언급되는 평면에 대한 정의는 「대니 드비토」에도 등장합니다. 말 그대로 평면의 정의인데요, 저는 그 말을 접하고 너무 이상했어요. 무슨 뜻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거예요.(웃음) 분명 평면에 대한 정의라는데 이게 뭐야, 이 문장으로 어떻게 평면을 상상해야 하는 거야, 어떤 평면이야,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더라고요. 「낙하하다」에 등장하는 화자도 마찬가지죠. 내가 왜 떨어져내리고 있는지 모르겠고 내 상태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이렇게 되고 만 상황이니까. 평면의 정의가 주는 당혹감과 충격, 공허함 같은 것들이 이 단편의 화자가 느끼는 심정과 닮지 않았나 싶었어요.

 

이장욱 첫번째 소설집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텐데, 작가 입장에서는 어떤 차이가 가장 크게 느껴지세요?

 

황정은 첫번째 단편집에 묶일 소설을 쓰기 전까지는 거의 말을 못하고 살았어요.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는 일년 내내 누구와도 말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땐 발설 자체에 집중했어요. 나도 뭔가를 말할 수 있구나. 게다가 한편 한편 인쇄가 되니까, 이게 너무 신기했어요. 신기해서 막 썼어요.(웃음) 이번 두번째 단편집에 묶인 글들은 『의 그림자』 이후에 쓴 원고가 대부분인데, 가장 큰 변화는 소설을 쓰면서 혹은 쓰고 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한 인간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런 고민을요. 이런 과정이 이번 단편들을 쓸 때 상당히 반영되었고 앞으로 쓸 소설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장욱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중요해졌다는 건 작품에서 사회적・정치적 색채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 측면과도 관련이 있을 듯해요. 물론 첫 소설집이나 『의 그림자』에도 그런 면이 넓게 깔려 있긴 했는데, 뭐랄까 인물들이 수동적이라거나 슬픔에 잠겨 있었거든요. 그런데 단적으로 말해서 이번 소설집의 인물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욕을 하기도 해요. 그 자체가 문장에 탄력을 주고 현실성을 강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씨스템의 전횡에 작가가 좀더 민감해졌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황정은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제가 이렇게 동그라미를 두번째 그려보는 건데요. 예전에는 어떤 중심이 있고, 저는 둥근 궤적을 그리면서 그 중심을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바깥을 향해 등을 돌린 채로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 중심을 여전히 중심으로 두고 있지만, 뒤돌아서 바깥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 중심을 의식하면서 바깥도 살피게 되었다고 할까…… 여전히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지만 전보다는 넓은 궤적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의 그림자』를 발표하고 나서 문학의 사회성이나 정치성에 대해 질문을 더러 받았는데요. 저는 제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뭔가를 하고 있다고 의식한 건 아니었고, 당시 제게 쌓여 있던 이야기를 한 거였거든요. 그런데 그걸 사회성이나 정치성으로 말씀하시니까 문학에서의 사회성은 무엇이고 정치성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마치 어딘가에 따로 떨어져 있는 덩어리들인 것처럼요.

 

이장욱 사회성이나 정치성이라는 개념어로 얘기하긴 하지만, 우리 몸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기운 같은 게 글로 배어나오는 것일 텐데요.

 

황정은 지금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텍스트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저한테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 선배님께서 아까 『의 그림자』가 둘이 가만히 손잡고 부르는 노래 같은 이야기라고 말씀하셔서 찔렸는데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엔 욕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웃음)

 

이장욱 황정은 표 욕설이라…… 기대됩니다.(웃음) 이번엔 「뼈 도둑」 이야기를 해볼게요. 저를 포함해서 이 작품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독자나 평론가가 많을 텐데, 정작 작가 스스로는 실패한 작품이라고 어떤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황정은 「뼈 도둑」은 제가 2011년에 쓴 유일한 소설인데, 발표하고 후회가 많았던 원고였어요. 크게 두가지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하나는 어떤 애도의 형태, 또 하나는 어떤 사회를 거절함. 「뼈 도둑」에 등장하는 인물은, 자기 인생에 의미있는 것을 배척하는 세계와 타협하면 그럭저럭 사회적인 생활을 하겠지만 그런 타협과 섞임을 거부하거든요. 누가 봐도 죽을 것이 뻔한 길을 택해서 연인의 뼈를 훔치러 납골당에 가죠. 결국 이게 어떤 사람에게는 사는 방법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다른 자리에서 보자면 삶에 관한 거절이자 거부라기보다는 단념이 아닌가 싶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본래 좀더 긴 분량으로 써보고 싶었는데 너무 서둘러 나온 이야기이기도 했고요.

 

이장욱 반면 「디디의 우산」은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이면서도 「뼈 도둑」과는 색깔이 좀 달라요. 연대나 사랑, 공동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마지막 장면이 좋았어요. 친구들이 다들 잠들어 있는데 밖에 비가 오잖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우산이 있나 확인을 하러 나가요. 소설은 여기서 끝나는데 참 절묘한 엔딩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우정이라기에도 좀 그렇고, 아주 희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어떤 마음의 연결이랄까…… 마땅한 단어가 없네요.

 

황정은 비 맞고 집에 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하면 너무 길까요?(웃음)

 

이장욱 그렇죠, 그런 마음.(웃음)

 

황정은 「디디의 우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초등학교 동창인데요. 초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은 그후에 사귄 친구들하고 다른 구석이 있어요. 어렸을 때 모습을 봐가지고 언제나 그 모습인 것 같은데 어느날 만나면 너무 나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더 애잔하고 더 잘됐으면 좋겠고…… 이 원고 말미에서, 친구들이 아침에 우산을 쓰고 가야 하는데 우산이 없을까봐 디디가 신발장을 열어보거든요. 그때 디디의 마음, 이게 일단은 제 레벨에서의 연대의 기본, 좀 거창하지만 혁명…… 디디라는 인물이 생각할 수 있는 혁명의 기본이 아닐까 싶었어요.

 

이장욱 「디디의 우산」에 보면 주인공이 버스 안에서 ‘혁명’ 하고 혼자 중얼거리고는 스스로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과 연관이 있겠군요. 다른 작품 얘기도 해보죠. 다른 이들의 평가와 다르게 본인이 아끼는 작품이 있잖아요? 제 경우는 제가 체험한 뭔가가 이상한 방식으로 녹아들어 있다거나, 부수적으로 잠깐 나오는 인물한테 묘하게 끌리는 경우가 그렇더군요. 작가 자신으로서는 어떤 작품에 애착이 가세요?

 

황정은 말씀하신 대로 저 역시 ‘체험한 무언가’가 반영이 되는데요. 아버지가 모자가 되었다거나 항아리를 주웠다거나 그림자가 일어섰다거나, 남들이 현실과 관계없어 보인다고 말하는 작품에도 그런 게 자주 반영되는 편이에요. 그러므로 애착이 갈 수밖에 없는 작품은 아무래도 『의 그림자』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겪은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요.

 

이장욱 작가선언69에 참여하신 것이라든가, 그와 관련된 일들 말씀이군요. 이번 소설집 중에서는?

 

황정은 기본적으로 다 애착이 가는데요.(웃음) 「옹기전(甕器傳)」이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고 「대니 드비토」와 「낙하하다」도 다른 의미에서 좋아하고.

 

이장욱 하나하나 얘기해보고 싶지만, 여유가 많지 않네요. 황정은 소설의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저를 포함해서, 찾아볼 독자들이 많을 듯해요.

 

황정은 최근에 엘리자베스 베일리의 『달팽이 안단테』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희귀병으로 투병하면서 달팽이를 관찰하는 내용의 에쎄이인데요. 달팽이에 관한 서술이나 화자의 시선 같은 데서 묘한 일치감을 느꼈어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랬나? 마침 제가 달팽이에 관심을 갖고 있기도 했고요.

 

이장욱 잘 어울리는 것 같다.(웃음)

 

황정은 달팽이하고요? 기왕이면 민달팽이보다는 껍질 있는 달팽이와 어울리고 싶습니다.(웃음)

 

이장욱 앞으로 계획은 어떠세요? 가야금 배우신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황정은 네, 일년 전쯤에 가야금을 두달 정도 배웠어요. 그 뒤로 책을 보면서 혼자 연습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악기라 책으로 배우기엔 한계가 있더라고요. 다시 강습을 받고 싶은데 2012년엔 일년 내내 소설 집필에 집중하고 싶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이장욱 연재 예정은요?

 

황정은 일단은 봄부터 계간 『문학동네』에 경장편 분량으로 원고를 분재합니다. 사실 더 일찍 시작해야 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집필을 못했어요. 그래서 얼마 전(201111월)부터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이장욱 장편인데 일종의 연작을 쓰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황정은 연작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요.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되지만 뉘앙스가 다른 세편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서요. 지금 첫번째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2011.12.23, 서울 마포구 서교동 인문까페 창비).

 

 

짧은 인터뷰가 끝났다. 우리는 술을 마시러 갔다. 말똥말똥 있어도 좋았겠지만, 어쩐지 자꾸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우리는 문학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달팽이에 대해서, 여행에 대해서, 아픈 몸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짧고 간명하고 정감있는, 그런 밤이었다고 적어둔다.

더 오래 이야기했더라면 들어갔을 내용이 많다. 그 가운데는 서정과 서사의 문제도 있고, 폭력이나 사회 씨스템의 문제도 있으며, 문학과 윤리의 모호한 관계도 있다. 그 모든 주제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느낌이 든다. 작가에게 말하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을, 설명을 듣지 않아도 좋을 것을, 공연히 캐물었다는 느낌 말이다. 나에게는 그를 조용한 괄호 안에 넣어두고 싶은 욕심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황정은의 몸이 지닌 리듬, 그 리듬의 매력에 몸을 맡기곤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리듬은 황정은 특유의 무표정하며 갸우뚱한 상상력과 더불어, 그의 기울어진 인물들을, 그 희미하고 선량한 삶들을, 때로 한없이 낙하하는 느낌을, 바로 독자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리듬이 정치적일 수 있을까요? 리듬이? 나는 잠시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황정은의 소설을 가리킬 것이다. 혼잣말인 듯 이렇게 덧붙이면이건 뭐랄까요, 어딘지 무표정하고 갸우뚱하면서도 화가 날 만큼 슬픈, 그런 소설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