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종점의 방을 나오는 방법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
윤인로 尹仁魯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파루시아의 역사유물론: 크레인 위의 삶을 위하여」 「꼬뮌의 조건: 버추얼리즘의 문학을 앓기」 등이 있음. inro@naver.com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1)의 「유랑」이라는 시를 여러번 읽었다. 누군가에게는 절절한 시일 거라 생각한다. 어린 핏줄을 떼놓고 서울 금천구 은행나무골목으로, 전라도 경기전 뒷길로 돈 벌러 나간 시인과 그 아내. 그렇게 흩어져 떠돌았던 이들이 “한주일 두주일 만에 만나 뜨겁고 진 밥알처럼 엉겨붙어 잔다.” 그렇게 잠든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내 그 상상은 삶의 피할 수 없는 팍팍함으로 번진다. 밥벌이라는 말, 오차를 허락하지 않는 그 기계적 강박에 대한 관조. “딱따구리 한마리가 뒤통수를 있는 힘껏 뒤로 제꼈다가 괴목(槐木)을 내리찍는다 딱 딱 딱 딱딱 딱 딱딱, 주둥이가 픽픽 돌아가건 말건 뒷골이 울려 쏙 빠지건 말건 한마리 벌레를 위하여 아니, 한마리 버러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니, 한끼 끼니를 위하여 산 입을 울리고 골을 울린다”(「밥벌이」). 한마리 버러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이 문장에 오래도록 눈길을 주게 된다. 몸이 뭉개지고 혼이 빠져나간 누군가에게 절절한 시일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시인이 머무는 곳은 ‘종점’이었다. 종점이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서울로 뛰쳐나왔으되, 끝내 “다시 종점”이었다.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길 범일운수 종점”(「종점」). 그 막장, 그 끝에 엉겨붙어 잠드는 그들의 방이 있다. “겨울에도 선풍기 하나 치울 곳 없는 좁디좁은 단칸방.” 치우지 못한 그 선풍기 밑에 “오마넌”을 넣어두고 정읍 가는 버스에 오른 엄마의 전화 목소리. “나사 돈 쓸 데 있간디”(「어떤 통화」). 종점에서의 삶을 가로지르는 것이 바로 그 엄마다. 시인의 배꼽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입이었”(「배꼽2」)고, 시인의 목젖은 “가장 깊고 긴 잠에 들어야 할 때/꼬옥 물고 자장자장 잠들라고/엄마가 진즉에 물려준 젖”(「목젖」)이었다. 엄마에게 온전한 몸을 받은 시인의 현재는 이렇다. “엄니 벨일 없지라이, 요번에도 또 못 내려갈 것 가튼디요”(「누에2」). 시인이 바라보는 엄마의 삶, 그 의미의 파장이 어디까지 퍼지는지가 내겐 중요해 보인다.
「어떤 품앗이」라는 시. 거기엔 세 여자가 나온다. 구복리댁, 청동댁, 한천댁. 어느날 구복리댁 양반이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9년 뒤, 한천댁 양반이 돌아가셨다. 구복리댁, 청동댁이 두말없이 한천댁 집에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11년 뒤, 청동양반이 돌아가셨다. 한천댁과 구복리댁이 청동댁 집에서 몇날 며칠 자줬다. 그녀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 그렇게 서로를 지키는 것이다. 지키는 것은 지탱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지탱하는 방식은 거창하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간단하고 소박한 것이다. 연대라는 말은 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은 인플레가 심해져, 빈번하지만 속이 비어 가볍다. 연대가 외쳐질 때 그 외침의 이득을 누가 챙기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해진 수상한 이 시절, 고통을 마주하는 저 “별스런 품앗이”의 질박함은 곧바로 삶의 어떤 지혜에 준하는 무엇이 아닌가 한다. 그녀들은 누구인가.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한천댁은 울 어매다.” 시인의 세 어매, 공통의 여성성.
다시, 시인의 엄마들. 그들이 사는 곳은 어디인가. 나흘간의 폭설이 내린 곳이다. 그곳의 풍경. “자두나무 정류장에 나온 이는 자두나무뿐이다//산마을은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하다.” 위의 품앗이, 다시 말해 어떤 질박한 증여의 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현장이 바로 자두나무 정류장이 있는 산마을이다. 그곳은 노루, 물까치, 사슴, 닭 등이 오가는 자연의 근사치다. 이장선거가 끝난 마을회관의 방은 “절절 끓는” 중이고, “벌써 윷판”이 벌어졌다. 그 “닭국 냄새 가득한 방”(「나흘 폭설」)은 서울 금천구 은행나무골목, 그 종점의 옴짝달싹 못하는 방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시인은 닭국 냄새로 가득한 방으로 종점의 엉겨붙어 잠드는 방을 치유하려 한다. 이런 구도는 자본주의적 파편화의 세계에 대항하는 무기로 ‘굿’의 존재론적 일원성을 내세운 장시 「필봉 굿판」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내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닭국의 방은 치료제일 수 있는가, 과연 굿의 세계는 무기일 수 있는가. 시인에게 닭국의 방과 종점의 방, 일원성의 세계와 파편화의 세계란 날카롭게 분리된 채로 인식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이분법적 인식은 종점의 방 안에서 그 밖을 구성하는 방법, 자본주의적 파편성의 세계 안에서 그 밖을 생성하는 태도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몸을 뭉개고 혼을 흩는 밥벌이의 강박 안으로 삶을 체계적으로 환수하는 씨스템에 대항해 시는 어떻게 응전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