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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언론자유와 우상타파를 위한 불퇴전의 삶
故 리영희 선생 1주기를 추모하며
최영묵 崔榮默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저서로 『시민미디어론』 『한국방송정책론』 등이 있음.
cm3188@hanmail.net
리영희(李泳禧) 선생이 망월동으로 가신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 가을 선생이 한양대로 복직하셨다. 운 좋게도 졸업학기에 선생의 ‘신문평론’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형형한 눈빛으로 분노를 삭이며 명쾌하게 강의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고지 7매 내외의 보고서를 제출하면 빨간 볼펜으로 빽빽하게 수정해 의견을 보태서 돌려주시곤 했다. 이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군복무시기를 제외하고 1995년 봄 선생이 정년 퇴임하실 때까지 연구실 조교를 했다.
언론학 교수, 리영희 ‘기자’
선생이 처음 한양대 신문학과에 부임한 것은 1972년 1학기였다. 1971년 10월 위수령(衛戍令) 철회 등을 주장한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합동통신사에서 해직된 직후다. 선생이 언론학 교수가 된 것은 본인의 의지와 큰 상관이 없었다. 권력의 탄압으로 실업자가 된 상황에서 호구지책으로 대학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인 출신이어서 신문방송학과 소속이 됐지만 신문방송학과에는 내가 정열을 토해서 강의할 과목이 적절히 없었어요. 국제보도라든가 한두 강좌가 있을 뿐이에요. (…)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나머지 시간을 전부 밖으로, 즉 격동하는 그 시대의 현실사회가 요구하는 데 쓸 수 있었을 거예요.”1)
선생이 8년여의 해직기간을 거쳐 복직한 1984년 당시 대학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안정기에 접어든 전두환정권은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키고 학원자율화 조치를 취하면서 해직교수도 복직시켰다. “광주민주항쟁을 겪고 난 뒤 전국 대학의 이념적 지형이 거의 한 세기를 뛰어넘은 것과 같은 상태였던 만큼 한양대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특히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그때까지 단 한시간의 정식 강의도 들어보지 못한 사회주의 언론・철학・정책, 맑스주의 이론, 마오 쩌둥 대중언론이론 등 이른바 좌파 매스컴 강좌의 특설을 요구하고 나섰지. (…) 나는 학생들의 대대적 각성의 표현인 이와 같은 지적・사상적 변화에 호응해서 강의시간에 보수적 매스컴 이론과 진보적 이론을 아울러 제시하려 노력했어요.”2)
선생이 한양대 교수가 된 후 초기에 주로 강의한 것은 신문원론이나 국제 커뮤니케이션 과목이었고 복직 이후에는 언론비평이나 언론과 국가, 사회주의 휴머니즘 영역으로 확대된다. 1984년 복직 이후 대학원에서 학생들과 함께 읽고 토론한 책들로는 조지 헤링의 The Pentagon Papers, 월터 브래시 등이 엮은 The Press and the State, 유네스코에서 국제정보 유통문제를 정리한 Many Voices, One World, 엔첸스베르거의 『대중매체와 의식조작』, 제임스 커런 등이 편집한 『현대언론과 사회』 같은 주류 언론학에 대한 ‘대안’ 성격의 책들이 많았다. 퇴니스의 『공동사회와 이익사회』,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맑스・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박원순의 『국가보안법 연구』 같은 휴머니즘 계열의 책도 단골 교재였다.
기자생활이 타의로 좌절된 후 선생이 대학에 와서 주로 고민하고 가르친 것들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기자로서의 고민을 학교로 옮겨와서 강의와 실천으로 대체했을 뿐이다. 하루하루 빠듯하게 지냈던 기자시절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관한 긴 호흡의 글이 늘어났다.
정론직필의 역정(歷程)
알려져 있듯이 선생은 영어교사, 통역장교, 출판사 외판원, 번역가, 대학교수 등 생계를 위해 여러 직업을 가졌지만 1957년 언론계에 투신한 후에는 평생 ‘기자’로 살았다. 7년간의 통역장교 생활을 통해 한국사회의 부패타락상과 수구 기득권세력의 추악한 실체를 경험한 후, 1957년 합동통신사 기자가 된다. 이후 15년간 기자가 어떠해야 하는지 체득했고, 한평생 ‘언관(言官)’의 정신과 춘추필법의 자세로 추호의 흐트러짐도 없이 살았다.
합동통신사에서 강제 해직된 후 한양대에서 24년(실제로는 16년) 동안 교수로 재직했지만 진실 기록자로서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故 송건호(宋建鎬) 선생의 회고담이다. “본래 그는 언론인이고 지금도 언론계에서 같이 일하고 있지만 그래서 그를 보고 이교수라고 부르기가 좀 어색하다. 그가 학교로 가게 된 것은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 공화당 독재 때 언론계에서 추방되다시피 해서 부득이하게 가게 되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정열은 지금도 언론계에서 떠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3)
물론 선생이 본래부터 기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우연히 신입생 모집공고를 보고 국립해양대학교에 입학했듯이, 언론계에 투신하게 것도 전적으로 우연, 아니 ‘운명’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만 7년을 장교로 복무하고 소령으로 예편한 후 화장실에서 우연히 기자모집 공고를 보고 합동통신사에 지원하여 ‘꼴찌로’ 합격한다. 이후 15년간 합동통신사와 조선일보사에서 외신부기자, 외신부장, 정치부기자, 논설위원을 지낸다.
선생이 기자로 재직하던 195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한국사회는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파시즘체제였다. 경향신문 폐간, 3・15부정선거, 4・19혁명, 5・16군사쿠데타, 한일국교정상화, 베트남전 파병, 위수령, 10월유신으로 이어지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선생은 이 시기 역사의 현장에서 진실 보도를 선도한 한국언론의 ‘자존심’이었다. 박정희정권의 회유와 협박, 연행과 구속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정권의 부패타락, 미국의 패권주의, 베트남전의 진실, 한일국교정상화의 굴욕에 대해 기자로서 진실을 기록했다.
연합통신과 조선일보뿐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나 『뉴 리퍼블릭』 같은 미국 유수의 미디어에도 수시로 기고했다. 당시 선생은 당대의 특종기자로 낙양의 지가를 올렸지만 박정희정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첫 특종은 1961년 11월 박정희 미국방문 수행취재 과정에서 터뜨린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파병 등을 밀약한 ‘박정희-케네디 회담의 비밀’에 관한 기사였다. 또한 외신부에서 정치부로 옮긴 선생은 1962년 홍수 등으로 한국이 심각한 식량난에 봉착했음에도 미국의 식량원조가 지연되는 이유를 추적하다 주한 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그레고리 핸더슨을 만나 실마리를 찾는다. 미국이 원조를 미루는 까닭은 민정이양이 지체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 기사로 군사정권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1964년 조선일보사 외신부로 직장을 옮긴 이후에도 특종은 이어졌다. 비동맹회의에서의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논의’ 관련 보도와 일본의 유사시 한반도 군사개입 씨나리오와 모의훈련에 관련된 ‘미쯔야(三矢)계획’ 폭로기사가 대표적이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에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베트남전의 진실 규명을 위해 헌신한다. ‘통킹만사건’의 진실 등을 최초로 탐사 보도하던 시절은 기자 리영희 삶의 절정이었다. “그 모든 ‘특종’적 또는 ‘예언’적 글들은 한마디로 진실을 추구하려는 집념의 결정이었다. 이 한가지만은 평생에 자랑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나인데도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4) 이후 선생은 군사정권의 압박으로 조선일보사에서 강제 퇴직당한 후 생계를 위해 서적외판원으로 일한다.
‘생존’을 위한 6개월여의 외판원 체험은 선생이 마음을 다시 추스르는 계기가 된다. 이후 합동통신사 외신부장으로 복직했지만 그 생활은 길지 않았다. 이미 선생은 이 무렵부터 한 언론사 기자가 아니라 지식인(논객)으로서 글을 쓰고 사회에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유와 관점, 세계사의 흐름과 국내정세의 변화를 보는 안목은 언론사의 울타리에 갇혀 있기에는 너무 깊고 높고 넓었다.5) 이후 학교로 옮긴 선생은 더 예리해진 필봉과 사회참여를 통해 ‘우상’과 ‘전쟁’을 벌인다.
언론의 자유와 우상타파라는 ‘신앙’
선생은 1957년 이후 54년을 ‘현장 언론인’으로 살았다. 우상타파와 언론자유 확대를 위해 헌신한 기자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선생의 언론관, 언론사상의 핵심은 언론・출판의 자유라는 ‘신앙’, 이론과 실천으로서 진실을 기록한다는 ‘정신’, 언론 현실과 언론인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압축된다.
먼저 기자직을 수행하면서 체득한 것은 언론자유의 필요성에 대한 신앙,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선생은 1977년 8억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의 내용이 반공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된다. 1978년 11월 26일 감옥에서 자신의 저서를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가는 광기의 현실을 통렬하게 질타하는, 4300자에 달하는 상고이유서를 쓴다. 결론 부분이다.
오늘의 현실은 오늘에 앞서는 30년간의 억압적 언론・출판정책의 ‘역사적 결과’입니다. 반공법의 근본적 운영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이상론’이 아닙니다. (…) 적어도 많은 것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있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출판과 언론의 폭넓은 자유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회는 언제까지나 반공법 또는 그와 같은 억압적 법률의 필요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법률과 운용에 개선을 원하지 않는다면, 언론과 출판 등 민주적 내용이 개화하는 사회는 요원한 먼 꿈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6)
상고이유서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유죄판결을 받고 1980년 1월 9일까지 복역한 후 만기 출소한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이 유지되고 있다. 1979년 말 ‘우상’이 피살되었을 때, 그리고 문민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 잠시 야만의 시대가 종식될 기미가 있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이후 ‘신앙’ 단계로 승화한다. 1996년 한 강연회에서 다시 사상의 자유의 필요성을 피력한다.
사상의 자유가 없는 사회에는 문화, 예술이 꽃필 수 없으며, 심지어 가치중립적이라고 하는 과학, 기술도 발전하지 못합니다. 한 예로 문학을 들어봅시다. 노벨문학상이 한국에서 안 나온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활동이란 진정으로 자유로운 생각(사유, 사상)이 보장되는 가운데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광적인 반공사상은 냉전주의와 하나가 되어서 휴머니즘을 왜곡하는 법입니다. 그것들은 다양한 인간 사상을 짓밟으면서 유일한 가치를 강요합니다.7)
동시에 ‘우상’에 도전하는 진실의 기록자로서, 실천으로서의 글쓰기는 필생의 업보였다. 선생은 1977년 『우상과 이성』을 펴내고 두달 만에 구속된다. 책도 바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운명을 예감한 듯 서문에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뉘어져야 할 生命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理性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우상이 사라진 1980년 1월 석방된 직후 우여곡절 끝에 『우상과 이성』 재판(개정판)을 낸다. 이번에는 감격하여 서문을 썼다. “여러해 동안, 입을 다물고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던 사회생활과 인간생활의 진실에 관해서 말이 들려오고 글도 눈에 뜨인다. 이런 날들을 위해서, 나름 몸부림쳐왔던 필자로서는 너무도 벅찬 감격에 할 말을 잃을 뿐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비치던 ‘밝은 햇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해 5월 17일 ‘광주의 배후’로 지목되어 다시 구속된다.
1970년대는 (…) 선택을 강요당했다. 신체적 극한상황에서 강요당하는 선택에서 리영희는 진실과 이성을 택했고 그 선택으로 고난을 자청했다. (…) 리영희의 의도는 현재와 같이 중국에 관한 정보가 풍부하지도 못하고 중국에 관한 연구 자체가 신체적 위협이 되는 한국적 상황에서 바로 그런 한국의 상황을 비판하고 타파하기 위해 중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리영희의 글쓰기는 실천의 표현이 된다. 그게 중요하다. 리영희의 글쓰기는 그의 실천을 드러내며, 이론과 실천의 통일적 표현이다.8)
선생의 글쓰기는 사실 그 자체가 우상파괴를 위한 ‘무기’지만 동시에 그러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말살하려는 부당한 권력에 도전하는, 치열한 실천행위이기도 했다. 그에 따른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단지 글을 썼다는 이유로 아홉번 체포되어 다섯번 구치소에 갔고, 세번 재판을 받았고, 두번 언론사에서 쫓겨났고, 두번 대학에서 해직되었으며, 모두 1012일을 감옥에서 보냈다.
언론과 언론인의 후안무치・기회주의 비판
선생은 전시 군대생활 중에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부패타락상을 목격하며 몸서리쳤고, 15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권력과 언론의 추악한 야합과 언론인의 기회주의에 치를 떨었다. 박정희정권의 폭력통치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인 1971년 『문학과지성』 가을호에 발표한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는 탐사와 천착, 논증과 비판이 돋보이는 기념비적 논문이다.
『뉴욕 타임스』의 용기는 반사적으로 우리 언론의 두가지 유형을 연상시킨다. 하나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유형이고, 또 하나는 ‘이제는 비밀을 말할 수 있다’는 유형이다. 전자는 (…) 상황의 변동이 생기자 말하지 않은 비굴은 제쳐놓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내세우는 유형이다. 지식인과 언론의 소임에 이처럼 모독적인 유형은 없다. (…) ‘비화(秘話)’ 언론도 마찬가지다. (…) 오늘의 사실을 오늘에 규명하지 않고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비화 읽을거리의 자료로 생각하는 한, 통치계급의 횡포는 계속되고 대중은 암흑을 더듬는 상태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9)
이 글은 선생의 첫 저서이자 출세작인 『전환시대의 논리』의 권두논문으로 실렸다. ‘나도 알고 있었다’며 반성을 모르는 파렴치한 언론과 언론인은 오늘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비화 언론’은 얼핏 진실추구에 나름대로 앞장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정치권력이나 시류의 변화에 편승하는 전형적인 기회주의라는 점에서 파렴치한 언론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사회에 이러한 후안무치 언론인과 비화 언론인이 양산된 것은 권력의 강압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권력도 언론과 대립각을 세우고 갈등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한국 언론인들이 자초한 측면이 더 두드러진다. 선생은 1975년 발표한 「편집국 민주주의」에서 기자직의 역사적 사명과 언론인의 대오각성 필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언론을 망치는 것도 언론인 자신이고 언론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언론인 자신의 이념과 생활의 자세입니다. 권력이란 동서의 양과 시대의 고금을 가릴 것 없이 민중의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그 본성이라면, 민중의 편에 서는 언론기관과 기자의 직업적 본성은 기본적으로는 권력과의 대립관계입니다. 이 기본적 관계 위에서 그밖의 구체적・특수적 관계가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잘못 파악하여 특수・구체적 관계를 기본적・일반적 관계에 우선시키는 인식의 곤란과 심지어 전도를 일으킬 때 언론인은 자유언론의 사형집행자로 타락하고 맙니다.10)
선생이 언론계에 있을 때 함께 현장을 누비던 대다수의 언론인이 정계로 진출하거나 학계로 가서 독재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곡학아세의 요설로 부역을 일삼았다는 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국 언론인의 ‘해바라기’ 성향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바 없고, 오늘도 한국의 유력 신문과 방송사의 종사자 중 많은 사람들이 ‘출세’를 위해 권력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슷한 시기에 『창조』에 실린 「기자풍토 종횡기」라는 글의 문제의식은 더 직접적이다. 1970년대 초반 언론인을 지배하고 있던 냉전논리와 흑백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다수의 기자들이 ‘중공(中共)’이라는 말만 들으면 즉각적으로 ‘기아’ ‘괴뢰’ ‘피골상접’ ‘야만’ ‘무과학’ ‘반란’ ‘정권타도’ ‘침략’ ‘호전’ 등을 떠올리도록 훈련된 조건반사의 토끼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다. 이 글의 말미에서는 “기자가 마련하지 못한 것을 민중이 스스로 쟁취하려 하고 있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다음은 『제민일보』 1990년 6월 2일자에 실린 창간특집 인터뷰 기사 중 일부다. 22년 전의 말이지만 오히려 현시점에서의 울림이 더 절절하다.
한국의 소위 ‘언론’기관 내부의 문제로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광복 후 한번도 자체 숙정을 한 역사가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집단처럼 돼버린 왜곡된 체질에 있습니다. 군정시대에 자리잡은 우리나라 소위 ‘언론’기관은 냉전시대의 일그러진 광신적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의 맹신자로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역대 부패・타락・반민주 정치권력의 시녀역할을 해왔습니다. (…) 이 사회의 보도기관들이 스스로 언론기관 언론인이라는 명칭을 참칭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11)
문민정부 이후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비판은 더욱 구조적 측면을 지향한다. 군사정권의 물리적 탄압이나 생계에 대한 위협이 약해진 상황에서도 기자들의 기회주의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퇴전의 자세로 파시즘체제 끝장냅시다”
선생은 청사(靑史)에 남을 언론인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사상의 은사’였고, ‘의식화의 원흉’이었으며, 한국 지식인의 표상이자 진실교의 ‘교주’였다. 언론학자 강준만(康俊晩)은 선생이 한국사회 사상의 자유 확산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남한체제는 그 자유를 누리려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완전히 말살할 수 없는 체제였다. 남한엔 리영희가 있었지만, 북한엔 리영희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12)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선생은 자신의 글로만 진실을 ‘포교’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 책이나 신문기사, 인터뷰 등을 통해 ‘우상’의 비리 폭로나 진실 전파에 용감하게 나설 경우 전화나 팩스, 우편엽서 등을 통해 즉각 연락하여 공감의 뜻을 표하고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평생을 이어온 선생 특유의 ‘격려 저널리즘’이었다. 특히 선생이 건강상의 이유로 절필을 선언한 후에는 정연주 전 KBS 사장을 비롯하여 부당한 권력과 싸우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격려 전화나 메시지를 전했다. 이 무모한 ‘견인주의자’의 유일한 희망은 진실의 씨앗이 하나둘씩 퍼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이명박정권은 수구언론과 동맹을 꾸려 대한민국을 철저하게 ‘약탈’하고 있다. 힘있는 대부분의 신문사, 방송국은 이 동맹에 편입되었다. 군사정권 같은 강압과 탄압, 구속과 고문이 있던 것도 아니지만 언론과 언론인은 자신의 이익을 찾아 권력에 유착했다. 선생은 MB정권이 들어서고 1년 반쯤 지난 2009년 7월 ‘고별 강연’13)에서 MB정권을 파시즘제제로 규정했다.
지난 일년 반 동안 이명박 통치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반인권적 파시즘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 (…) 역사는 이뤄진 열매 위에 또 하나의 큰 열매가 열리는 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늦추면 언제든 역전되는 것이다. (…) 짧은 10년이지만 우리가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불퇴전(不退轉)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경향신문』 2009.7.2)
MB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제도권・기득권 언론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독자와 시청자가 그들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대오각성해서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식민지시대 이후 과거가 청산되지 않았고, ‘풍향계’보다 빨리 변하는 언론사와 언론인의 기회주의는 이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선생이 말년에 자연인으로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권력자나 언론인을 참칭하는 자들이 아니라 양심과 상식을 공유하는 시민이 직접 나설 때 역사가,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평범한 진실이었다. 선생은 이미 1970년대 초에 시민에 의한 ‘언론자유 쟁취’의 기미를 포착한 바 있다. 지난 2000년 등장하여 모든 시민을 기자로 만든 『오마이뉴스』나 지난해 한국사회 ‘열풍’의 진원지였던 「나는 꼼수다」가 보여주고 있는 언론의 ‘신천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시 시작된 수구 파시즘체제, 언론이 권력의 하수인으로 부역하는 MB정권 말기 상황에서 선생은 그 ‘신천지’의 새주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듯하다.
“이제 리영희의 시대, 기자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쫄지 말고’ 모두 기자가 되어 파시즘체제를 끝장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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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영희・김동춘 대담 「리영희: 냉전이데올로기의 우상에 맞선 이성의 필봉」, 『역사비평』 1995년 여름호, 210면.
2) 리영희・임헌영 대담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2005, 574~75면.
3) 송건호 「정직한 지식인, 고난의 지식인: 영원한 언론인 이영희 선생」, 『李泳禧先生華甲記念文集』, 두레 1989, 17면.
4) 리영희 「『우상과 이성』 일대기」, 『역설의 변증』(1987), 리영희저작집 5, 한길사 2006, 361면.
5) 김삼웅 『리영희 평전: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책보세 2010, 233면.
6) 리영희 「상고이유서」, 『역설의 변증』(1987), 리영희저작집 5, 한길사 2006, 508~509면.
7) 리영희 「전환기 시대 민족지성과 동북아 평화」(강연녹취), 『사회문화리뷰』 1996년 12월호, 강준만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 개마고원 2004, 323면에서 재인용.
8) 김만수 리영희, 살아 있는 신화, 나남 2003, 316~17면.
9)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제2판), 창비 2006, 20~23면.
10) 리영희 「편집국 민주주의」, 『우상과 이성』(개정판), 한길사 1980, 358면.
11) 리영희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자유인, 자유인』, 범우사 1990, 93면.
12) 강준만, 앞의 책 319면.
13)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연대 10주년 기념식’ 강연(200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