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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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춤』이 있음. agbai@naver.com

 

 

 

개밥바라기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배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때가 되어도 집은 조용하다

매일 누워 운신을 못하는 노인의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있다.

초저녁 창문에 먼 데 낑낑대는 소리,

노인은 툇마루 속 구덩이에서 귀를 쫑긋대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배고픈 개의 밥바라기 별을 올려다본다.

까실한 개의 혓바닥이 금이 간 허리에 느껴진다.

깨진 토기 같은 피부

초저녁 맑은 허기가 핥고 지나간다.

 

 

 

기관차 묘지

수문통 3

 

정신이 위장처럼 맑았다

되새김질하면 소의 연한 위장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기관차가 지나갔다

검은 콜타르가 침목 위에서 햇볕에 진득진득 녹아 붙고 있었다

소년들은 레일에 못을 올려놓고 기관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 거리엔 늘 공장 담벼락을 넘어오는 소음이 있었다

그건 주머니 속에 손을 찌르고 다니는 소년들이 만지작거리던

칼처럼 납작해진 못이거나,

프레스에 손이 눌린 공원(工員)들의 피냄새를 맡고

철길에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던 장미의 긴 행렬이거나,

가슴속에 먼저 자라던 가시거나 남들을 찌르기 전에

자신의 속을 찌르고 마는 날카로운 성장의 추억이었다

그 거리를 떠돌던 소년들의 정신은 위장(胃腸)과 흡사해서

철길을 걸어 공장으로 가는

몸에선 늘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철길의 끝에

기적처럼 바다가 있었다 기관차는 바다 앞에 멈춰섰고

그건 죽음을 향해 숲속으로 들어가는 코끼리의 행렬과 같았다

그 바다엔 기관차 묘지가 있었으나

아직까지 누구도 코끼리 무덤을 목격하지 못했듯

발견된 것은 상아 같은 녹슨 철근뿐이었다

잔업이 있는 날엔 밤늦게 소년들이 술에 취해

기계들을 바다에 밀어 빠뜨리고

쇳냄새가 선창가를 떠돌았다

문득 심호흡을 하면 욕지거리들 속에 되새김질의 나른함이 밀려왔고

가끔 바다에서 기계 소음이 들려왔다

튼튼한 파도가 방파제를 거세게 때린 뒤

밤하늘에 장밋빛 피거품이 흘러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