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

 

아름다운 것들의 사라짐 혹은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길은 끝났는데 여행은 시작되었다: 가라따니 코오진의 『세계공화국으로』」 등이 있음. donnard@hanmail.net

 

 

1. 문제 작가에게 수여된 공꾸르상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이 드디어 공꾸르상을 받았다. ‘드디어’라고 말하는 이유는 프랑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작가와 프랑스의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사이에 미묘한 갈등의 역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1994년 『투쟁영역의 확장』(Extension du domaine de la lutte)1)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우엘벡은 1998년 『소립자』(Les Particules élémentaires)로 프랑스 문단에 일명 ‘우엘벡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떠들썩한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뉴요커』(The New Yorker)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올 가을 빠리 사람들은 우엘벡을 지지하는 사람 아니면 반대하는 사람”일 정도로 이 작품에 대한 극단적인 지지와 극단적인 반대 입장이 대립했고, 보수적인 공꾸르상은 그의 작품을 심사후보작에조차 올리지 않았다. 이후 우엘벡이 세번째 소설 『플랫폼』(Plateforme)과 네번째 소설 『어느 섬의 가능성』(La Possibilité dune île)을 발표하면서 사람들은 다시금 그의 공꾸르상 수상을 점치기도 했지만 기대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섯번째 소설 『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로 2010년 공꾸르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일단 공꾸르상을 수상했으니 이제부터는 이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 묻는 질문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우엘벡의 수상 소감에서 드러나듯 공꾸르상과 그의 오래된 악연(?)이 드디어 매듭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우엘벡의 공꾸르상 수상은 프랑스 문단에도 적지 않은 파문을 던졌다. 문학이 일반인의 주요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장편소설이 고만고만한 상업소설과 문단이 평가하는 작품으로 양분된 시대에, 소위 신세대 작가의 대표주자이자 상당한 독자를 거느린 문제적 작가 우엘벡이 공꾸르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의 구별, 그리고 장편소설의 위상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엘벡이 프랑스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작가 중 한명이 되었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작품이 불러일으킨 뜨거운 사회적 논쟁 덕분이다. 그의 소설들은 매번 수많은 논란을 빚어왔고 미디어의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판매부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의 작품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은 어떤 것인가? 우선 우엘벡 자신과 그의 소설이 직접적인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우엘벡은 그의 소설에 실존하는 인물이나 단체를 직접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소립자』 초판에서는 루아양에 존재하는 캠핑장인 ‘가능성의 공간’이 성적 일탈이 난무하는 장소처럼 묘사되었다. 캠핑장 측에서는 이에 대해 항의하면서 출판사를 상대로 책을 회수하여 파기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쌍방은 책의 제2판부터 캠핑장의 이름과 지명을 바꾸는 조건으로 화해했다고 한다.2) 또한 그는 『리르』(Lire) 20009월호 인터뷰에서 이슬람을 “가장 엿 같은 종교”라고 표현해, 이슬람 단체로부터 종교적 증오를 부추기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우엘벡은 자신이 무슬림과 아랍인을 혼동하지 않기 때문에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재판에서도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의 작품에 이슬람을 폄훼하는 발언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논란의 불길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직접적인 소송은 아니더라도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표현들 역시 논란과 추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엘벡은 『소립자』에서 두 형제를 방치하는 무책임한 어머니를 등장시켰는데, 실상 그것은 그 자신의 어머니 이력과 흡사했다. 게다가 그는 1991년 어머니와의 불화 끝에 연락을 끊었고 심지어 어떤 인터뷰에서는 그녀가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자서전을 출간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알렸고, 이는 우엘벡의 이름이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는 또다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회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처럼 보이는 최근작 『지도와 영토』조차 표절 문제로 한바탕 몸살을 앓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몇몇 지명이나 기관에 대한 묘사가 프랑스 위키피디아의 해당 항목과 매우 흡사하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위키피디아 측과 출판사에서 모두 문제삼지 않음으로써 논란은 유야무야 되었지만, 이렇듯 우엘벡의 소설은 끊임없이 논란거리를 제공했고 이러한 ‘잡음’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작가의 사회적 인지도가 상승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들은 어디까지나 저널리즘적인 관심사에 속하는 것이고, 그것이 작품 자체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 내적인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다루고 있는 소재들과 그에 대한 작가의 입장일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소립자』와 『플랫폼』 등에서 ‘섹스 자유주의’라는 문제와 그것에 수반되는 온갖 변태적인 성적 일탈을 다룬다. 그런가 하면 『소립자』와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는 인간복제를 통해 새로운 인간 종()이 탄생하는 상황을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플랫폼』에는 제3세계 섹스관광을 통해 성장하는 관광산업의 종사자들이 등장하며,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는 안락사가 보편화된 사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성적 방종, 인간복제, 매춘과 섹스관광, 안락사 등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만한 소재들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껄끄러운 주제들 자체보다 더욱 논란이 된 것은 이 문제들에 대해 작가 혹은 화자가 취하는 태도다. 우엘벡의 작품에서 이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은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과 크게 어긋난다. 예를 들어 인간복제의 문제를 보자. 올더스 헉슬리(A.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이후로 디스토피아 문학이나 영화 등에서 인간복제라는 주제가 흔히 등장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디스토피아 문학예술에 고유한 아이러니적인 거리를 전제한 것이다. 그런데 우엘벡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거리감각이 종종 실종되며, 심지어 인간복제는 무용하고 파괴적인 성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계기인 것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도덕적 접근을 노골적으로 조롱하기도 한다. 예컨대 『플랫폼』의 한 등장인물은 섹스관광을 비난하는 서구의 언론을 염두에 두면서 ‘위선자들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라고 일축한다. 도덕적인 훈계는 유럽인들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한 소치이며, 몸뚱어리 말고는 팔 수 있는 게 없는 제3세계의 상황에서 ‘인간적 존엄’ 운운하는 것은 무력하거나 심지어 위선적이라는 것이다.

우엘벡의 작품에서 특히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진 내용은 섹스 자유주의와 그로 인해 야기된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60~70년대 좌파운동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소립자』에서 성적 방종이 벌어지는 캠핑장은 자율, 개인적 자유, 직접 민주주의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과거 68세대 그룹이 만든 것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이들 좌파운동은 기존의 권위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기껏 사회의 각 분야에 소비와 향락의 문화를 확산시켰을 뿐이라는 것이 우엘벡의 생각이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 격렬한 사회적 반감이 표출되었음을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엘벡 자신도 자신의 책이 불러온 스캔들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가 스캔들을 일으켰다면, 제가 유전학과 그것의 잠재적인 한계들이라는 주제에 대해 감히 접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습관적인 공포를 유발한 것이지요. 또한 정치라든가 685월에 대해 제가 별로 존경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것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685월을 진정한 정치적 운동이라기보다 향락산업의 승리로 묘사했습니다. 더구나 그 산업은 폭력의 어떤 확산에 일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미디어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68세대가 저의 그런 행동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3)

 

요컨대 우엘벡은 논란이 될 만한 사회적인 주제들을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이나 도덕과 배치되는 파격적인 입장에서 거침없이 묘사함으로써 비판과 혐오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허무주의자’ ‘반동적 인물’ ‘인종차별주의자’ ‘여성혐오론자’ 심지어 ‘우파 아나키스트’ 등 온갖 비난이 따라붙게 되었다.

 

 

2. 데까당스와 비관적 리얼리즘

 

우엘벡의 소설이 비난 못지않게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냈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이 발본적인 시각에서 그동안 감추어진 현실의 실상을 가차없이 묘사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엘벡의 소설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소설의 전통을 상기시키는 면이 없지 않다. 실제로 우엘벡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이 ‘리얼리스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4) 발자끄는 “풍속의 변천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들을 지적하는 것”5)이야말로 소설가의 임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우엘벡은 오늘날 프랑스에서 이러한 명제에 가장 걸맞은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이 무엇보다 현대사회의 변화에 따른 파국적 결과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와 향락산업의 확산에 따라 진정한 인간관계는 점점 더 불가능하게 되고, 열정과 신뢰와 믿음을 위한 자리는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우엘벡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끝내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채 고통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거나 죽는다.

우엘벡 소설에서 독특한 점은 (그리고 어쩌면 여기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사회와 풍속의 쇠퇴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상처 입은 인물들의 체험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그의 작품들에는 좁게는 프랑스, 넓게는 서구 산업사회, 더 넓게는 인간의 쇠퇴와 소멸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나타난다. 프랑스는 현대의 산업문명에서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기껏해야 과거의 유산을 이용한 관광국가로 생존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인간들은 부분적이고 직접적인 쾌락으로 결핍을 채우려 한다. 이런 점에서 우엘벡의 소설은 탁월한 데까당스(décadence)의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서구의 ‘쇠퇴’를 명증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퇴폐’적인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포르노그래피라고 종종 비난받는 그의 노골적인 묘사는 이처럼 파편화된 인간관계의 체험 형식에 따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소립자』에서 섹스중독증 환자 같은 성적 집착을 보이는 브뤼노의 경우를 보자. “존재와 존재가 별들 사이의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막막하고 허허로운 공간에서 마주치기만 할 뿐 그들 사이에 어떤 관계도 맺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세계, 그것은 바로 브뤼노의 정신세계였다. 이 세계는 느리고 차가웠다. 그래도 따뜻한 것이 있기는 했다. 여자들의 두 다리 사이에 있는 게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소립자』 91면) 브뤼노가 그토록 성에 집착하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인간관계의 부재와 공허를 메워주는 유일한 방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대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추긴다. “무제한적인 경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섹스의 자유주의는 <절대 빈곤> 현상을 낳는”(『투쟁영역의 확장』 119면) 상황에서, 브뤼노는 성적 투쟁에서 패배한 자의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엘벡 소설에 나타나는 강한 파토스와 비애의 정서는 아마도 이런 패배자들의 원한감정을 염두에 두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엘벡 소설에서 놀라운 점은 사회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가진 문학이 자칫 빠지기 쉬운 위험, 즉 비루한 현실에 비해 내면의 풍요로움을 대립시키거나 미학적인 치장으로 예술작품의 자족성을 강조하려는 유혹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는 그러한 유혹에 빠지기는커녕 사회와 풍속의 퇴락에 따라 빈곤해진 주체의 영혼을 자학적이라고 할 정도로 냉정하게 묘사한다.

 

내 선조들이 보여주었던 지성과 일에 대한 열정을 나는 분명 다 잃었다. 편안한 유럽인으로서 나는 다른 나라들에서 싼 값에 음식과 서비스와 여자들을 산다. 다가올 죽음을 의식하는 퇴폐적인 유럽인으로서, 그리고 이기주의에 완전히 도달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런 것을 마다할 어떠한 이유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는 것과 나와 같은 사람들은 사회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저 살 자격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변화는 닥칠 것이며, 이미 닥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변화에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 (『플랫폼』 302~3면)

 

여기엔 냉소주의에 따르게 마련인 은밀한 자기만족의 제스처조차 찾아볼 수 없다. 우엘벡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는 동시대의 프랑스 작가 베그베데(F. Beigbeder)의 소설 『9990원』(문학사상사 2004)에서 광고업자가 광고업의 위선과 부조리를 폭로할 때, 거기에는 약간의 위악적인 제스처가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위악적인 제스처는 항상 도덕에 대한 일정한 의식을 전제로 하는 법이다. 그런데 우엘벡의 주인공들은 일체의 도덕적 판결에 무관심하고, 평범하고 사실주의적인 언어로 잔인할 만큼 진지하고 냉정하게 쇠퇴와 몰락을 증언한다. 아마 우엘벡의 비관적 리얼리즘이 가진 독특한 특징은 이 점에 있을 것이며, 그것이 우엘벡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자 또한 반감의 원천일 것이다.

사회는 물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체의 쇠퇴와 타락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우엘벡의 소설들은 그래서 지극히 암울하게 읽히기도 한다. 그에게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결의 전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립자』에서 그는 과학의 발전에 의한 새로운 인간 종의 탄생을 현생 인류의 단점을 극복하는 하나의 유토피아적인 전망처럼 제시한 바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 인류의 종말을 전제로 한 것이고 그 속에는 어떤 기쁨과 즐거움도 없기 때문에 기이한 유토피아인 셈이지만, 적어도 현재의 격렬한 고통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어떤 섬의 가능성』은 이러한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정확히 되짚어가면서 다시 문제 삼는다. 각자 고립된 요새에 틀어박혀 사는 신인류는 폭력적인 인간관계에서 벗어났지만 대신 근본적인 결핍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다니엘25’는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요새에서 나와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갈구하며 황야를 헤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엘벡의 소설은 일체의 전망을 봉쇄하고 있는 것일까? 출구 없는 비관주의는 또다른 형태의 순응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을 최신작 『지도와 영토』에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다.

 

 

3. 『지도와 영토』 혹은 예술을 통한 성찰

 

앞서 지적한 것처럼 우엘벡은 『지도와 영토』를 통해서 공꾸르상을 받게 되었지만, 이 소설에 대한 실망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 작품이 상을 받은 것은 그의 예전 작품들이 보여준 도발적인 성격이 상당부분 제거된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도와 영토』에는 앞선 소설에 등장했던 첨예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성적 자유주의가 낳은 폐해에 대한 고발도 없고, 자유주의적인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풍자와 조롱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우엘벡의 소설치고는 너무 말랑말랑해진 예술가 소설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가 소설의 독특한 자기반영적 속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전작들에 비해 훨씬 현실에 밀착해 있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 ‘제드 마르땡’이라는 예술가의 존재가 작가의 현재적인 실존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미술이라는 장르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현실을 재현하는 행위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서 제드 마르땡은 뚜렷하게 구별되는 작업 단계들을 경과한다. 제1기에서는 미슐랭 지도를 촬영했고, 제2기에서는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온갖 직업들에 종사하는 인물들을 그렸으며, 제3기에서는 사진과 피규어 등이 자연 속에서 훼손되는 과정을 비디오그램으로 표현했다. 세 단계가 가지는 의미는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제드의 공공연한 숭배자인 한 기자가 그의 작업을 신학과 인간 이성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해석한 것이 하나의 힌트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즉 제1기의 작업이 인간적이고 인공적인 것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면(소설 속에서 제1기 작업을 결산하는 전시회의 제목은 ‘지도는 영토보다 흥미롭다’이다), 제2기 작업은 이 인공적인 것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간사회의 구성 부분에 대한 탐구욕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3기 작업은 이렇게 이룩된 인간문명의 운명에 대한 비관적 성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전 소설들에서 미래사회나 독특한 사회집단을 등장시켜 현실의 어떤 경향을 극단적인 형태로 부각시켰다면, 이제 모든 것은 한 예술가의 생애와 그의 작품세계 속에서 조용히 관조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훨씬 가까워졌고 또한 완만해진 이 작품에서도 전작들과의 연속성은 분명하게 발견된다. 우선 이 소설은 예술분야와 관련하여 상당히 뛰어난 풍속사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서 제드 마르땡은 예술가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만, 그 성공은 무엇보다 저널리즘과 홍보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이 날카롭게 포착되고 있다. 심지어 언론의 홍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미술품 구입자들이다. 제드 마르땡의 첫번째 작업의 성공이 언론의 찬사에 힘입은 것이라면 두번째 성공은 부자 구매자들의 방문에 의한 것이었다. “지구상에서 최고로 돈이 많은 사업가들이 미술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건 이미 오래된 얘기죠.”(『지도와 영토』 245면, 이하 인용은 면수만 밝힘) 현대예술이 회화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도 오브제가 설치물이나 행위예술에 비해 보관하기 편하고 되팔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제2기 회화들의 전시 책임자는 제드의 전시회가 끝난 후에 자조적으로 말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시장에서의 성공이 모든 걸 정당화하고 가능하게 하며 모든 이론을 대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어요. 누구도 그보다 더 멀리 내다보지 못해요. 누구도. 절대로요.”(248면) 언제나 그렇듯이 우엘벡은 이러한 사회의 경향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러한 추세에 적응하고 성공을 거둔다. 다만 작품은 사회적 성공에 지극히 무관심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예술작품의 존재 이유가 사회적 성공과는 다른 차원에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이전 작품과 마찬가지로 비관주의 정서 역시 여전하다. 창작활동을 제외한다면 제드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사람과 맺는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연인이지만 직업 때문에 헤어져야 했던 올가, 소원하고 어색한 관계에 있는 아버지, 마지막으로 그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써주기로 하고 그 댓가로 초상화를 받게 되는 작중 작가 우엘벡. 하지만 이전의 작품에서 섹스를 통해 사랑을 발견한 듯이 보였던 모든 연인들의 관계가 결국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깨어지고 말듯이, 『지도와 영토』에서도 제드가 맺는 인간관계는 모두 단절되고 만다. 제드는 올가와 재회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더이상 그녀를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일견 회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아버지와의 관계도, 아버지가 아들의 뜻과 관계없이 홀로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 우엘벡이 어느날 자택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로 발견됨으로써 제드는 유일한 우정의 상대자마저 잃고 만다. 작품을 지배하는 이러한 비관주의는 제드의 제3기 비디오 작업에서 형이상학적인 형태로 반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면 속에서 그 사진들은 켜켜이 쌓인 식물의 사진들 속으로 빨려드는 듯하더니, 얼마간 발버둥치다가 이내 완전히 묻혀버리고 만다.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508~9면)

여전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전작들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면,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어떤 희망의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압도적으로 남녀관계에 집중됐던 이전과 달리 여기에서는 아버지와의 화해라는 주제가 사뭇 진지하게 탐구된다. 실용적인 건축사업가 아버지의 젊은 시절 설계도에서 억눌린 예술가의 꿈과 어린 시절의 상처를 재발견한다는 설정은 다소 진부하고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타인의 내면에 대한 이해의 시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드와 작가 우엘벡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암시되고 있는 우정은 이전의 소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인간관계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들은 종국에 모두 파괴되고 말지만, 다소 단조롭게 느껴졌던 우엘벡의 묵시록적인 세계에 얼마간 구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사회와 화해가 시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예술 자체를 통해서다. 예술가 소설답게 이 작품은 예술가의 작품활동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제드 마르땡은 자기 작업의 의미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말로 표현하는 유형은 아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질문은 던져진다. “제드는 라디오를 껐다. 이제껏 음악을 좋아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은 특히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에 투신하게 된 이유, 심지어 세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언뜻 떠올렸다. 세상은 감동적인 예술의 주제가 되지 못하며, 그 자체로는 특별한 재미도 마력도 없는 이성적 장치로 나타나는데 말이다.”(323면) 이에 대한 대답은 즉각 제시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제드는 교통방송으로 채널을 돌릴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도 회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질문이 아닐까?

지도와 영토에서는 현실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예술의 가능성, 또는 현실과 다른 방식으로 예술이 존재할 사회의 가능성이 검토된다. 현실과 다른 예술의 가능성은 제드의 예술학교 시절 애인이었던 주느비에브의 데쌩과 관련해 암시되고 있다. 그녀는 제드에게서 예술가의 소명을 인정하는 반면에 자신은 ‘그냥 재미로’ 데쌩을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의 천진난만한 그림들은 제드에게 사색의 대상이 된다. “그에겐 뚜렷한 가치가 끊임없이 발견되는 작품들이었다. 이따금씩 어쩌면 예술이란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동물적이라 할, 순수하고 즐거운 활동.”(64면)

예술에 대한 이러한 명상은 예술이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중세 기독교의 수공업 전통에 기초하여 예술과 산업의 분리를 극복하려 한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가 문제다. 소설 속에서 윌리엄 모리스는 제드의 아버지와 우엘벡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고리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예술적인 건축을 꿈꾸던 아버지 세대에게 모리스의 책은 필독서에 속했고, 모리스에 대한 제드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이 소설 속 작가 우엘벡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는 이미 불가능함이 입증된 역사 속의 시도가 아닌가? 소설 속에서 제드는 우엘벡에게 묻는다. “선생님께서는 그가 공상가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엘벡은 침묵하다가 대답한다. “모르겠소. (…)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윌리엄 모리스가 제안한 사회모델은 모든 사람이 윌리엄 모리스를 닮은 세상에서라면 전혀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리라는 것이오.”(321면)

우엘벡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 모리스의 유토피아가 실현될 가능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이 변한다면 사회도 변화할 수 있다는 말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순환논리에 빠질 수 있다. 오히려 소설 속에서 이러한 전망은 봉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리스의 유토피아적 예술관 내지 사회관은 ‘장인(匠人)’에 대한 인정과 직결되어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에피소드는 이러한 장인들이 사라지고 있는 불가피한 경향을 보여준다. 소설 초반부에 제드의 난방기를 고쳐주는 크로아티아 배관공이 등장하고, 제드는 그의 뛰어난 진단과 수리 능력에 감탄한다. 문제는 이 배관공의 꿈이었다. 그는 ‘배관공으로’ 썩을 생각은 없다고 털어놓으며 일단 ‘한밑천 잡으면’ 조국 크로아티아의 흐바르섬으로 가서 스쿠터 대여점을 차리겠다고 한다. “제드는 프장드리 거리에 사는 돈이 넘쳐나는 애송이들에게 시끄럽고 멍청한 기계나 대여해주려고 배관공이라는 숭고한 장인의 길을 버리려는 이 남자의 꿈에 인간적으로 깊이 실망했다.”(31면) 한편 소설 후반부에는 오토바이 대여점을 운영하는 장발족 사내가 등장하여 제드에게 크로아티아 배관공을 상기시킨다. 그는 제드에게 자기 그림들을 보여주는데, 그것들은 ‘영웅 판타지’에서 영향을 받은 조악한 것이었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하는 배관공의 장인적인 솜씨가 이미 예술의 수준에 올라 있다면, 반대로 현재에 만족하는 대여점 주인이 보여주는 ‘작품’들은 제드로서는 “드물게 보는 추한 그림이었다.”(498면) 이 에피소드는 어쩌면 산업사회가 사라지고 관광국가로 전락한 프랑스에서 예술이 맞이할 불길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의 복원이나 수공업적인 예술의 이상처럼 『지도와 영토』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희망의 단서들은 우엘벡의 소설에서 기대함직한 전망이라기엔 뭔가 밋밋하고 진부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조금 다른 희망의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제드가 제2기에 그린 직업화 씨리즈에는 「IT산업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라는 그림이 있다. 작품 속 작가 우엘벡은 전시회의 카탈로그에서 이 그림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림을 보면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잡스의 집에서 체스게임을 하고 있다. “자신만의 철저한 진실에 갇힌, 충직한 자본주의자의 순진한 신념으로 가득한” 빌 게이츠가 느긋하게 승리를 예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엘벡의 해석에 따르면 이 그림에는 심오한 역설이 존재한다. 그림의 주인공은 스티브 잡스이며 그의 눈에는 “쥘 베른이 흔히 묘사하는 발명가의 불꽃”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이다. “제드 마르땡이 그려놓은 체스판 위의 형국을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잡스가 반드시 지는 게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가 퀸을 희생하는 대신 세 수만에 비숍-나이트 체크 메이트를 만들 경우 승산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라면 신제품에 대한 전광석화와 같은 직감으로 시장에 돌연 새로운 규범을 제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229면)

우엘벡의 작품에서 가장 현실성있는 희망의 실마리는 중세의 수공업적 예술의 이상이 아니라 묘수를 발견하여 자본주의를 갱신할 수 있는 혁신적인 발명가의 열정어린 시선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발명가의 시선은 예술가의 시선과 닮아 있다. 빠리에서 손꼽힐 만큼 아름다운 올가가 보잘것없는 제드에게 반한 이유도 그의 눈빛이 열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그림이 특히 주의를 끄는 이유는, 비록 그림 속이긴 하지만 저물어가는 황혼의 풍경이 우엘벡에게서는 보기 드물게 서정적인 문체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남자의 뒤쪽에 위치한 유리창 너머로, 거의 초현실적이라 할 에메랄드빛 평야가 보였다. 평야는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침엽수림까지 뻗어 있고, 그 뒤로 해안 절벽이 늘어서 있었다. 더 멀리에는 금빛을 띤 적갈색 파도들이 끊임없이 출렁이는 태평양이 펼쳐졌다. 멀리 잔디밭에서는 어린 소녀들이 원반던지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해거름이었다. 마르땡은 캘리포니아의 북쪽에서 기우는 태양이 내뿜는 오렌지빛 향연을 비현실적이리만치 웅장하게 표현했다. 지구의 가장 앞쪽에서 해가 저물고 있었다. (229면)

 

우엘벡이 이렇듯 서정적인 묘사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사라져가는 어떤 꿈과 희망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흥미롭게도 잡스의 시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막연한 이별의 슬픔”이다. 그 슬픔은 산업사회의 소멸을 예감하는 발명가의 슬픔이기도 하지만,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의 소멸을 바라보는 예술가의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 산업사회와 예술의 유비는 제드가 만난 작가 우엘벡의 입을 통해서도 나온다. 우엘벡은 완벽하다고 할 만큼 뛰어난 공산품들이 신상품에 의해 급속히 대체되는 현실에 분개하며 굵은 눈물을 떨군다. 그리고 덧붙인다. “우리 역시 상품이오…… 문화상품. 우리도 곧 한물 간 신세가 될 거요.”(205면)

몰락해가는 우리 사회, 그 속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인간들’을 그리는 것, 채 피어나지 못한 그들의 꿈과 가능성을 그려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엘벡이 비관주의의 전망 속에서 바라본 예술의 존재이유일 것이다. 예술이 항상 세계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필요는 없다. 예술은 종종 묵시록적인 상상력을 통해서도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존재들을 환기시킬 수 있다. 아름다운 것들의 사라짐에 대한 비탄과 고발은 또한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가로 살아남기도 한다. 어쩌면 예술은 아마도 이 아름다운 것들이 언젠가 생환할 수 있기를 기다리는 봉인의 부적과도 같은 것이리라.

 

 

--

1) 우엘벡의 소설은 모두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투쟁영역의 확장』(열린책들 2003), 『소립자』(열린책들 2003), 『플랫폼』(문학동네 2002), 『어느 섬의 가능성』(열린책들 2007), 『지도와 영토』(문학동네 2011). 우엘벡과 베르나르 앙리-레비의 서신 교환을 묶은 책 『공공의 적들』(프로네시스 2010)도 국내에 소개되었다.

2) 『소립자』 140면 역주 참고.

3) 이딸리아 일간지 『라 레뿌블리까』(La Repubblica) 1999년 5월 17일자.

4) 19세기의 리얼리즘 작가들 또한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그리하여 발자끄(H. Balzac)는 그의 소설들이 부도덕하다는 비난에 대해 줄기찬 해명을 했고, 스땅달(Stendhal)은 『적과 흑』에서 소설을 ‘대로 위에 돌아다니는 거울’에 비유하면서 진창을 보여주는 거울을 비난하지 말고, 진창을 비난하거나 진창을 방치하는 관리들을 비난하라고 항변했다. 물론 발자끄나 스땅달의 리얼리즘과 우엘벡의 리얼리즘은 전혀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19세기의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들은 당대의 도덕을 위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으로 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려고 시도했던 반면, 우엘벡에게서는 종합되지 않는 파괴적인 지성만 존재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19세기 초반의 리얼리스트들 역시 당대에는 그런 비난을 받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5) 발자끄, Les Employés 서문(쁠레야드판 Comédie Humaine, t. VII, Gallimard 1977, 8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