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동아시아문학의 토포스와 아토포스

상하이 토론회를 참가하고

 

 

진은영 陳恩英

시인.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이 있음. dicht1@hanmail.net

 

 

오직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간, 즉 이웃만이 실제적이죠. 신은 이웃을 통해

우리에게 훼방을 놓고 우리는 이런 신의 활동에 직접 노출되어 있어요.

카프카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가능할까

 

올해 225일, 중국 상하이대학에서 문학이론가 천 쓰허(陳思和), 왕 샤오밍(王曉明)과 본지 편집위원들이 만났다. 두 중국학자의 발표를 듣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창비에서는 2011년 겨울호의 동아시아문학 관련 특집을 중국어로 번역해 자료집을 만들어 사전에 참가자들에게 제공했다.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가능할까?’라는 제목의 자료집에는 다양한 사유를 보여주는 다섯편의 글들이 실렸고, 이 글들의 논지를 수렴하여 밀도있는 토론을 진행시키기 위한 한기욱(韓基煜)의 발제문도 수록됐다. 오랜 고민과 진지한 성찰의 흔적이 가득한 글들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 글들은 막 따낸 이국 과일의 맛처럼 새롭지만 모호했다. 그런데 상하이의 푸둥(浦東)공항에 도착할 무렵, 나는 자료집의 제목을 잘못 읽었음을 알아차렸다. 제목은 ‘동아시아 지역문학이 가능할까?’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였다.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진지한 뉘앙스를 내 무의식이 의혹과 반문의 뉘앙스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 의심과 반문에는 어떤 매혹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에밀 씨오랑(E. Cioran)은 한때의 애국주의적인 마음을 담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프랑스의 운명과 중국의 인구를 가진 루마니아에 대해 꿈꾼다.” 약소민족으로서 고통과 울분에 찬 청년기를 보낸 지식인이라면 많은 인구와 거대한 영토, 제국의 운명을 가진 조국에 대한 바람을 한번쯤은 지녀보았을 법하다. 프랑스의 비교문학자 까자노바(P. Casanova)는 이것을 작은 민족, 작은 문학의 ‘존재론적 열등감’이라고 일축했지만 말이다.

동아시아 담론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까자노바의 말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론이나 동아시아 지역문학이라는 관념은 결국 경제대국 일본과 정치대국 중국에 편승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된다, 그 야심이란 작은 나라 지식인이 지닌 존재론적 열등감의 공격적 표현이다, 그것은 초라한 동시에 위험한 욕망이다 등등. 이런 이유로 나는 중국학자들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했다. 존재론적 열등감과 무관하며 큰 지역적 규모를 지닌 나라의 지식인으로서 그들이 동아시아문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가 이 논의에 또 하나의 중요한 시각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으로서의 중국문학

 

회의는 백영서(白永瑞)의 사회와 백지운(白池雲)・서여명()의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첫 발제자인 천 쓰허는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중국의 국제적 위상 변화와 관련해 언급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생경했던 동아시아론이 이제 의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중국의 경제성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9·11사건 후 미국의 공격이 이슬람세계를 향하는 동안, 중국은 세계화의 국면에서 주도권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로서 실질적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세계로 하여금 우리를 받아들이게 하라’라는 표어로 개방정책을 실행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인들은 더이상 이런 표어를 쓰지 않는다. 이미 자신들이 세계의 부분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문학담론에도 새로운 흐름을 낳았다. 비교문학의 오랜 전통은 현대문학으로서의 영미문학이 주변부에 미친 영향관계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가령 루쉰(魯)이 어떤 유럽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는가가 주된 주제였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광범한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영향관계를 비교하는 연구는 불필요하다. 지난 수십년간의 변화로 인해 중국문학에는 이미 세계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천 쓰허에 따르면, 현대의 국민문학은 모더니티라는 보편성에 대한 문학적 반응이며, 중국뿐 아니라 모든 국민문학에 공동의 보편적 세계문학성이 존재한다. 80년대 중국문학계에서는 중국에 수입된 모더니즘을 두고 정()과 위()의 위계를 문제 삼는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이런 논쟁 자체가 넌센스다. 근원이나 원본을 문제 삼는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출발지의 모더니즘과 다른 도착지의 모더니즘은 그 자체로 근대화의 풍경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구모델에 입각해 문학의 현대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목표보다는 현재의 중국문학에 대한 강조와 관심이 크다.

그런 점에서 천 쓰허는 백낙청()의 국민문학-지역문학-세계문학의 연관논의1)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 세계문학 운동이 괴테-맑스적 기획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중국과 일본의 문학을 세계문학의 일부로 인정한 괴테와 달리 맑스는 계급적 관점에서 민족문학의 소멸을 예견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국민문학과 동아시아문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문학을 구성하자는 백낙청의 제안은 맑스를 넘어 괴테로 가는 기획이어야 타당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논평한다.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문학을 규정하는 것의 맹점은 중국문학계가 충분히 경험한 것이다. 그는 이를 중국에서 대만문학을 보는 관점의 변화를 들어 설명한다. 80년대 대만문학의 한 조류인 향토문학은 ‘좋은 문학’으로서 호응이 높았다.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반() 장개석・국민당을 표방하며 중국과의 통일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현재 향토문학 계열의 작가들은 여전히 대만정권에 비판적인 좌파 작가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양안관계에서는 대만 독립파의 노선을 따르기 때문에, 이제 중국에서는 ‘향토문학=좋은 문학’이라는 예전의 등식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천 쓰허의 논의는 중국문학의 발전과 확산을 그 자체로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성취와 동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아시아문학의 세계문학화와 관련해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와 번역의 문제다. 자생적 전통문화나 지역적인 문학이 지역성을 살린 채로 번역되기는 힘들다. 노벨상 같은 세계적 문학상의 수상 결과에 따라 정전(正典)으로의 진입이 결정되고 세계적 유통망을 확보하게 되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와 서양의 평등한 문학적 소통을 위해서는 번역과 언어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아시아문학, 학대받은 자들의 공통감각

 

왕 샤오밍은 천 쓰허와는 다른 각도에서 세계화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동아시아문학의 필요성에 공감한다. 그는 민간 차원에서 일어나는 중국과 일본의 대립과 오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파악한다. 인터넷 상의 민족주의적 논쟁과 국수주의적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 과열되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터넷은 취향과 소비의 유사성을 낳고 있다. 이런 상황은 세계문학의 상황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창조산업을 통해 구현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문학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침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인들은 도스또옙스끼의 소설 제목 ‘학대받은 사람들’처럼 하나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지니고 있는데, 이로 인해 동아시아문학은 이 비가시화된 학대를 가시화하는 문학적 활동으로 구성될 수 있다.

또한 왕 샤오밍은 세계문학의 기초는 공동의 이상과 분열적 현실의 괴리 그 자체라고 본다.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세계문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이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발생하는 문학적 활동이다. 그는 안천(安天)의 글2)이 동아시아문학의 관념성을 지적하는 데 주목하면서, 오히려 이 관념성이 중요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현실이 아니라 관념으로서의 동아시아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력한 이상이 현실을 만드는 것은 동아시아만의 지역적 전통이기도 하다.

또한 천 쓰허가 언급했듯이 세계문학 차원에서 언어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언어는 사람을 분리・단절시키는 체제다. 언어는 각 지역의 차이, 사유와 감정을 보존하는 그릇이다. 언어의 이 보존된 차이가 세계문학의 기초가 된다. 차이가 있기에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에스페란토를 평등한 세계시민성을 실현하는 보편적 언어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상 보편어로 이루어진 문학은 질이 낮다. 그러므로 언어적 장애는 세계문학의 필요조건이다. 왕 샤오밍은 언어적 장애가 소통의 계기를 만들어준다고 본다.

 

 

괴테적인, 그러나 결코 괴테적이지 않은 세계문학

 

중국공산당조차 자본주의의 세계화에 이바지하게 된 지금 이 세계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문학적 가능성은 무엇일까? 백낙청은 문학의 고유한 이념성을 통해 근본적 운동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만 그 가능성이 열린다고 확신한다. 천 쓰허는 개방적인 세계문학을 강조한 괴테적 기획만으로도 충분히 문학의 이념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백낙청은 괴테의 세계문학론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한 개방성이 아니라 운동성이 내포된 세계문학 개념을 제기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계화의 초기 단계에서 국경을 넘는 빈번한 교류를 체험한 괴테는 지식인과 문학인이 적극적으로 세계문학을 만들어내자고 주장함으로써 문학의 운동적 성격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차는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세계문학을 언급한 내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백낙청은 맑스의 언급을 획일화된 세계문학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볼 경우에만 천 쓰허의 주장이 타당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된 오늘날의 전지구적 문화를 예견하고 그 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학적 경향의 출현을 긍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문학에 대한 그 몇몇 구절들에서 맑스가 의도했던 것은 왕 샤오밍이 언급한 대로 모욕받고 학대받는 이들의 고난을 가시화하는 세계문학이었다. 맑스는 편협한 민족문학이 사라진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곧 차이에 대한 부정은 아니었다. 맑스의 변증법적 스타일을 고려할 때 그 구절들은 자본주의의 성취와 한계에 대한 인식 속에서 혁명운동으로 나아가자는 운동성의 강조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괴테의 세계문학 이념을 긍정하되, 맑스를 부가해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에드워드 싸이드(E. Said)는 『저항의 인문학』(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에서 현대 인문주의의 훌륭한 선구자로 괴테를 들고 있다. 1810년부터 페르시아 시()에 매혹된 괴테는 유럽의 바이마르적 세계와 이슬람 신도들의 세계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고 동료 첼터에게 고백했다. 이 동요로부터 10년 후, 그는 세계문학에 대해 확신한다. 그는 민족문학의 자리는 장엄한 교향곡을 구성하는 세계의 모든 문학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유토피아적 비전을 펼친다.3) 그러나 싸이드는 괴테가 “격변, 심지어는 변화 자체에 대한 혐오, 귀족적 문화에 대한 관심, 전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적 소요’가 근절되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소망”을 지니고 있다고 격렬하게 공격했던 아우어바흐(E. Auerbach)에 공감하면서 괴테적 기획의 한계를 지적한다. 만일 “괴테가 현재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면, 독일문화를 역동적 현재로 가져가기 위해 했을 법한 일을 했더라면” 독일과 유럽, 세계의 현실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4) 이런 측면에서 백낙청은 타자의 이질성으로부터 풍부하게 자극받는 문학적 세계공간이라는 괴테적 이념을 강조하면서도 실천과 변혁의 운동을 일반화하는 맑스적 기획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문학의 토포스와 아토포스

 

장소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토포스’(topos)가 문학에서 수사학 용어로 쓰일 때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고정형이나 진부한 문구라는 뜻이다. ‘topos’에 부정의 접두어 ‘a’를 붙인 ‘아토포스’는 장소를 알 수 없는 곳, 확인되지 않은 곳이라는 의미다. 문학은 아토포스일 때만 세계적이라 불릴 법하다. 문학은 하나의 장소를 잊어버리고 하나의 장소를 떠나고 그리하여 모든 장소를 잃을 때 더욱 보편적으로 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세계문학과 문학의 지역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사유는 일종의 패러독스로 보인다. 무엇 때문에 세계문학의 일환으로서 문학의 토포스, 노골적인 장소성을 지닌 지역문학에 대해 말하는가?

지역문학은 특정 지역 작가들의 경향을 분석하고 그 작품들을 일종의 가족유사성으로 묶어 유형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적・인식적 관심을 넘어서 지역문학이 이념형으로 지향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말은 당혹스러우며 모종의 반문을 자아낸다. ‘아시아’는 서양에 의해 하나의 지역으로 타자화된 단위일 뿐이다. 정작 우리는 특정한 장소성 속에서 이웃으로 존재하지만 사실상 서로를 이웃-괴물로 느낀다. 분쟁과 식민의 경험으로 얼룩진 기억, 냉전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는 군사적 긴장관계가 그런 감응의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이웃-괴물의 감응에 대한 실천적 제안을 위해 최원식(崔元植)은 동아시아와 문학의 날카로운 ‘사이’에 주목한다. 동아시아 ‘지역’과 ‘지역’문학은 공통의 지역이라는 개념으로 무리없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경제협력이 증대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갈등이 날카로워지는 정냉(冷) 현상이 존재한다. 또한 정치 못지않게 문학에서도 문냉(冷)이 심각하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불가능성의 징후로 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 계기로 파악한다. “뜻밖에 문학은 정치만큼 영토적이다. 각 국민문학의 영토성을 탈영토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동아시아의 도래를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이 요구될 터인데 (…) ‘정냉’이 풀려야 ‘문냉’이 풀리고 ‘문냉’이 풀려야 ‘정냉’도 풀린다. 아마도 동아시아문학의 출현은 그 최후의 단계 또는 최고의 단계를 가리킬 것”이다.5)

최원식에게 지역문학이라는 토포스는 아토포스의 문학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순문학의 쇠퇴는 국민문학의 피로감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동안 갈라파고스적 고립 속에서 서구문학만 바라보던 한중일 세 나라의 형세에서 지역문학은 고립상태를 돌파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다. 이때 지역문학은 특정한 토포스 속에서 유사한 문학적 흐름을 묶어내는 시도가 아니라 국민문학의 협소한 토포스를 월경(越境)하는 시도다. 이런 맥락에서 문학의 접속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국민국가의 선분(線分) 속에서만 작동하던 작가들의 토포스적 개인성에 새로운 전경을 열어준다. 여기서 개인성은 다른 민족과 국가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이해를 넘어서게 해주는 창이다.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국민국가적 이데올로기의 단순성을 돌파하여 세계의 복잡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말을 하고 싶고 한족음식을 먹고 싶어하는 조선족 제자에게서 받은 충격을 언급한다. 관념적 민족의식에 입각해서 조선족을 막연한 동일자로 보았던 시각은 그들이 처한 삶의 환경에 대한 실감나는 이해로 바뀌었다. 이런 분열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차이나는 실존에 대한 인식과 확인이 연대의 기초가 된다. 동아시아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은 국민국가적 정치와 문학의 회로를 순환하는 시각과 사유에 파열을 가하며, 서로의 차이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흐름이 각 국가를 휩쓸면서 남긴 유사한 형태의 삶의 폐허에 함께 직면해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만남의 복합적 감응은 진정한 국제주의 문학의 기초를 형성한다. 문학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인들의 만남은 지역문학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의 공유로부터 시작해 실천적 어젠다로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각종 상()과 제도를 동원하는 자본주의적 출판유통의 흐름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되어가는 세계문학을 대체해야 한다. 동아시아문학을 통해 획득되는 지역주의의 시각은 지역적 이익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특정 계급이 욕구하는 지역적 이익의 생산・유통 회로를 작동불능의 상태로 만드는 민중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문학의 세계시장주의에 맞서는 국제주의적 문학활동이다. 또한 동아시아 지역문학을 통한 국민문학의 월경은 단순히 문학적 아토포스를 촉진하는 활동을 넘어 문학과 정치가 서로 무관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순수모더니즘의 토포스적 이분법을 극복하게 한다.

 

 

동아시아라는 공간의 아토포스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강조가 동남아나 타지역 문학을 배제하고 고유한 문학적 ‘인식틀’로서 동아시아 지역을 부각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는 공간성을 지닌 개념이면서도 확정적 공간성을 넘어서는 아토포스적 개념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와 ‘유동하는 동아시아론’을 펼친 백영서의 논의에서 확인된다. 백영서는 동아시아문학의 이념성 아래 자극받은 연대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동아시아가 근대 일본의 담론 속에서 크게 훼손된 개념이지만 동북아 프로젝트의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관심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연대활동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아토포스적인 연대활동을 방해하는 어려운 장벽들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기욱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갈등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갈등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문학 안에서도 순수/참여 논쟁이 격렬한 형태로 진행되어 문단이 양분되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이념대립이 지역적 문학 연대운동에 의외의 복병이 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중국학자들은 중국이 최근 권위있는 산문상을 대만작가에게 수여한 일례를 들면서 국가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커져 이데올로기 갈등이 약화되는 추세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이처럼 토포스로서의 동아시아는 근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파열이 발생한 곳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과 문화는 매우 난폭한 단절의 계기를 경험했다. 그렇지만 최원식은 동아시아 각국의 유구한 엄숙문학을 기념하고 그 문학들 사이의 영향관계를 조명하여 서구와 선을 긋는 것이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건설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강조한다. 동시에 현재의 자본주의적 창조산업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일종의 감각적・감성적 유사성에 입각해서 동아시아적 공통성을 회복하는 것도 아님을 분명히한다. 근대의 지각변동을 통해 와해된 토포스의 기억을 짜맞춰 하나의 단일 공간을 만드는 것도, 또 전지구화의 원격화나 탈맥락화 현상에 따른 동아시아의 문화산업적 토포스를 확인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 토포스적 흐름을 넘어서는 동아시아 지역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논의는 집약될 수 있다.

 

 

맑스적이지 않은, 그러나 너무나 맑스적인 기획

 

동아시아 지역문학을 실천적으로 규정하려 할 때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동아시아라는 단위의 유의미성이다. 동아시아문학이 단순한 전통의 공유를 넘어 현재의 착취에 대한 저항의 지역적 거점을 예비하는 것이라면, 세계화된 착취에 대한 일반적 저항으로 환원되지 않는 동아시아의 독특한 동일성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왕 샤오밍은 이것을 최근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서 찾는다. 지금까지 베트남과 싱가포르를 포함하여 동아시아인은 고도 자본주의를 성장시키는 데 유럽인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여왔다. 식민제국을 통한 유럽식의 자본주의적 팽창과 무관하게, 동아시아는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식민의 경험 속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점에서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자본주의의 문제가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지역이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반자본주의 투쟁은 동아시아 지역의 문제인 동시에 전지구적인 저항의 중요한 고리를 형성한다. 이것이 바로 동아시아문학이 성립될 수밖에 없으며, 또 동아시아문학을 건설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왕 샤오밍은 맑스주의적 전제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맑스는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 관념의 실체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물질적 포석을 깔아준다는 것이다. 왕 샤오밍의 세대는 어릴 적부터 물질적 재부(財富)의 극대화가 인간 자유와 해방의 조건이라는 공산주의의 표어를 배웠다. 그러나 물질 재부의 극대화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공산주의든 인류의 해방이든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절대적 불가능성이 가능하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도처에서 자본주의가 만인을 위한 재부의 극대화는커녕 가장 비참한 궁핍과 고통을 가져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중국은 급속한 발전 속에서 한국과 일본이 이미 겪었던 것보다 더 거대하고 놀라운 규모로 자본주의적 폐해를 겪고 있다. 아프리카나 남미 지역에서는 그 폐해가 동아시아만큼 심각하거나 큰 규모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기획이 맑스주의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점이다. 맑스나 그의 계승자들이 지녔다고 간주되는 지나친 생산력주의적 편향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 그리고 역사 속에서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문학운동의 편협성을 벗어나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여전히 반자본주의적 운동의 관점에서 문학인의 연대와 문학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연대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충분히 맑스주의적인 기획이다.

 

 

‘훨씬 더 가까운 기분’의 문학

 

무척이나 진지했던 장시간의 토론을 참관했던 기억이 멀게만 느껴진다. 어느 대도시 못지않게 화려한 고도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번쩍이던 황푸강(黃浦江)의 야경도 마음의 흐릿한 얼룩같이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생각나는 건 오래전부터 동아시아문학론을 제안해왔던 두 학자의 소박한 이야기다. 오랜 세월 외국문학을 연구해온 학자가 말했다. “동아시아 지식인들과 연대활동이나 교류를 해보면 비용을 비롯해 교류의 용이성이 아주 커요. 언어장벽에도 불구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어요. 나는 유럽이나 영미권 지식인을 만나면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도 늘 실천적 고민을 나누기가 어려웠어요. 학대받는 민중과 동아시아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과도 몇마디 나누고 나면 더이상 이어갈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한국문학을 연구해온 학자가 말했다. “중국이나 일본 지식인들을 만나면 훨씬 가까운 느낌이에요. 동아시아문학이 단순히 옛것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문학의 건설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우린 이미 나누고 있던 왕년의 것이 있어요.”

이 ‘훨씬 더 가까운 기분’이 아마 동아시아 지역문학을 제기하게 만든 근본 정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거시적인 제안에 무슨 기분의 중요성을 말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했듯이 ‘기분’(Stimmung)은 중요한 문제다. 세계는 인식에 앞서 기분을 통해 우리에게 열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명료한 형태로 실현되지 않는 어떤 사유나 활동이 엄습하듯 드러나는 열림이다. 두 학자는 젊은 세대가 잘 알지 못할 이웃-괴물로서의 중국과 일본을 경험한 세대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 이웃에게 친밀한 감정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많은 이들이 동아시아 안의 냉담과 갈등을 넘어 공통감각을 형성해가는 지역적 연대나 지역문학이 가능한지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이들의 ‘훨씬 더 가까운 기분’은 그런 회의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불화의 선이해()를 가지고 있다! 불편한 이웃과 만나 불화를 걷어내려는 마음, 서먹함 속에서 공동의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마음은 누군가와 처음으로 만나서 날씨와 블랙티의 맛에 대해 상냥하게 대화하는 마음보다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한다.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이 그저 호감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사이에 무언가 사건이 벌어졌으며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영국의 축구리그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가 유럽 젊은이를 만나 열광에 가까운 일체감을 느끼고 일본 젊은이와는 역사적 이슈로 설전을 벌인다 해도, 그것만으로 전자의 관계에 깃든 점성이 더 높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훨씬 더 가까운 기분’에 대해 여러 종류의 사회과학적 증빙자료를 수집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확산과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지만, 그 실행과정에서 여전히 지역적 블록이 유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원거리 디아스포라가 존재하긴 해도 노동력의 이동과 착취는 가까운 인접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의 가장 큰 비율은 중국 조선족이 차지한다. 착취와 학대가 서구에 의해서만 저질러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인이 동아시아인을 착취하고 학대한다. 학대와 착취가 비슷한 형식으로 동아시아 곳곳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발생한다면 동아시아인은 훨씬 더 유사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동질적 문제의식과 저항의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까워서 싸움이 빈번했던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불화, 가까워서 식민화하고 착취하기 쉬웠으며 여전히 쉬운 동아시아의 동아시아에 대한 학대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해 읽고 쓰고 표현하는 것이 동아시아 지역문학의 가장 중요한 어젠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오래된, 도래할 만남의 문학

 

왕 샤오밍이 서두에서 꺼냈던 견해, 학대받는 이들의 공통감각으로서의 동아시아문학은 그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이 아니다. 그 제안은 ‘우리가 이미 나누고 있던 왕년의 것’이다. 그는 이 아이디어가 19세기말의 중국학자 장 빙린(章炳麟)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량 치차오(梁啓超)를 비롯한 동시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장 빙린의 아시아론의 특징을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아시아는 단지 하나의 지역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황, 억압과 식민화의 공유된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본이 침략자, 식민자가 되는 순간 아시아에 대한 이런 정의로부터 제외되었다.”6) 훨씬 더 가까운 기분을 느꼈던 것은 한국의 학자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토포스를 언급하면서도 그 아토포스적 실천성을 강조하는 한국학자들의 논의에서 왕 샤오밍은 그가 흠모했던 중국 근대 지식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 점에서 동아시아문학은 들뢰즈가 말했던 의미의 문학적 기념비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의 기념비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신체성을 부여하는 지속적인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들려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인간의 고통, 다시 시작되는 인간의 항거, 가차없이 재개되는 투쟁을. 고통이 영원하다고 해서, 혁명이 승리한 뒤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것은 헛된 것인가? 그러나 한 혁명의 성공은 오로지 그 자체 속에 있을 뿐이다. 정확히 말해 그것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진동과 포옹과 열림, 바로 그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항상 생성의 와중에 있는 하나의 기념비를 구성한다. 매번 새로운 방문객들이 돌을 가져다얹는 돌무덤처럼 말이다. 혁명의 승리는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게 하는 새로운 유대들 속에 내재하며 그 속에 있다.”7)

나는 상하이에서 동아시아문학이라는 문학적 기념비에 진심어린 표정으로 돌을 얹는 일군의 사람들을 본 듯하다. 그 풍경은 적어도 내 물음의 뉘앙스를 바꾸어놓았다. ‘동아시아문학이 과연 가능할까?’였던 나의 관조적 의문은 ‘동아시아문학이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라는 다소 개입적인 질문으로 바뀌었다. 이번 만남의 감응은 여기까지. 어떤 이념의 신체를 만들어내는 영원한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들려주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이제부터 자문해볼 생각이다.

 

 

--

1) 백낙청 「세계화와 문학: 세계문학, 국민/민족문학, 지역문학」,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2) 안천 「전후 일본의 문학담론과 아시아적 시각: 역사적 상상력과 자본주의적 상상력」,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3) 에드워드 싸이드 『저항의 인문학』, 김정하 옮김, 마티 2008, 137면.

4) 같은 책 160면.

5) 최원식 「동아시아문학의 현재/미래」,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18면.

6)Wang Xiaoming, “The Concept ofAsiain Modern China: Some Reflections Starting with the 2007 Shanghai Conference,”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11, No. 2, 2010, 199면.

7)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trans. Hugh Tomlinson & Graham Burchell,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176~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