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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권여선 장편 『레가토』

 

권여선과 함께 ‘레가토’를

 

 

심진경 沈眞卿

문학평론가. 199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저서로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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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곳

 

 

“후일담이 어때서?”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오정연. 1979년 대학 입학, 한 학기 만에 휴학, 낙향, 이듬해 1980년 광주에서 돌연 실종. 그녀는 왜 갑자기 휴학했을까? 고향집에는 왜 갔을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아직 살아 있을까? 오정연의 실종을 둘러싼 이 질문들은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소설의 안팎에서 던져진다. 그런데 도대체 오정연은 누구인가? 권여선의 새 장편소설 『레가토』(창비 2012)는 갑자기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을 통해 현재와 단절된 과거의 한때를 소환해 그 시절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계속되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현재의 삶을 직조해왔음을 보여준다. 소설 제목이 ‘레가토’인 것은 그 때문이다. 레가토(legato)란 둘 이상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 연주하는 주법의 기호다. 작가는 말한다.

 

이 소설은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그러다보니 두 시간대가 구성상 단절적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사실 시간이 그렇게 뚝뚝 끊어질 수는 없는 것이죠. 제가 소설 제목을 ‘레가토’로 한 이유도, 비록 현재와 과거 사이에 30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가로놓여 있지만, 그걸 스타카토식으로 끊어서 읽지 말고 레가토식으로 이어서 읽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시간이 이어진다고 해서, 그게 계속 하나의 음만 내어서도 안되고, 어떤 한 음이 지속되는 와중에 다른 음이 새롭게 끼어들고, 그래서 음들이, 시간들이 겹쳐지는 효과가 생기기를 바라고 이 소설을 썼죠.

 

사실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의 제목을 자꾸 ‘레트로’(retro)로 착각했다. ‘레가토’라는 말이 낯설어서 잘못 기억하기도 했거니와, 소설이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하고 소급하는 후일담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기존의 후일담 소설과는 무언가 다르다. 무엇보다 기존 후일담 소설에서 흔히 발견되는 ‘빛나는 과거/타락한 현재’ 같은 도식이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후일담 소설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기존의 관습을 따르기보다 독특한 ‘권여선식 후일담’의 문법을 창조해내고 있다. 실종된 오정연의 행방을 찾는 데 소설의 초점이 맞춰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이 크게 보아 과거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아가는 탐색담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도 그 일례다. 그래서 나는 작가에게 『레가토』가 후일담 형식을 배반하는 후일담 소설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작가의 말인즉 꼭 그런 것은 아니란다.

 

그래도 저는 이 소설이 후일담의 틀에 맞는 면이 많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부터 우리는 후일담 소설을 폄하하고 폐기하고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양식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저는 그게 항상 불만이었어요. 물론 예전에 쏟아져나온 후일담 소설이 모두 바람직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건데, 유독 80년대를 다룬 후일담만 후진 형식인 것처럼 취급하고, 이미 다 마모되어 더이상 생산적으로 기능할 수 없는 양식이라는 암묵적인 판정을 내려버린 거죠. 그런 판정에 대한 제 나름의 불만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쓸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고민과 연결됐죠. 그리고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제대로 된 후일담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어느 시대의 얘기를 쓰든, 자신이 쓰기 전에 이미 양식화된 스타일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스타일을 지나치게 답습하고 고착화시키지만 않는다면, 다시 말해 다양하게 변주하고 진화시킨다면, 언제든 새로운 형식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이 소설을 쓰면서 후일담의 틀이나 형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물론 그 고민의 결과가 유효한지는 앞으로 따져봐야겠죠. 차이가 있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니까요. 저는 이 소설을 후일담이라고 부르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어떤 변주를 했건 『레가토』는 후일담이긴 하거든요.

 

‘후일담이 어때서?’라는 작가의 이 도도한(?) 태도는 ‘후일담적’이라고 부를 법한, 그간 작가가 써온 소설의 어떤 특성을 연상시킨다. 권여선 소설에서 사건은 대개 회고적 시선으로 사후에 기억되고 구성된다. 그래서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은 뒤늦은 사랑, 뒤늦은 실연, 뒤늦은 후회, 뒤늦은 분노를 한다. 과거의 사건이나 관계,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은 언제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사후적으로 (다시) 경험되고 이해된다. 그리고 이때 과거는 언제나 현재의 강박이자 죄의식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레가토』에서도 마찬가지다. 오정연이라는 과거는 전통연구회(전연) 회장인 박인하와 79학번 동기들(준환, 진태, 재현 등)에게 모종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모두 알고도 죄를 짓거나 모르면서 죄지은 사람들이다.

 

 

죄의식, 타인에 대한 절절한 공감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죄의식이 달콤한 체념이나 자기연민과 결합함으로써 왜곡된 자기보호 장치로 전락하는 병리적 성격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죄와 그에 대한 민감한 자의식은 그들이 죄를 깨달은 이후에 더이상 죄짓지 않고 살게 하는 (혹은 살고 싶어하는) 최소한의 윤리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 나아가 그러한 죄의식은 그들에게 역사적 성찰과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모든 시절의 청춘이 그러하듯 그들 또한 조국과 민중이라는 대의명분과 시대의 부름에 응해 투쟁했지만, 어쩌면 그 순수성과 맹목성 때문에 바로 옆의 누군가가 겪었을 고통과 슬픔은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다는 아픈 자책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소설에서 실종된 오정연을 찾는 일련의 과정은 투쟁의 와중에 혹여나 잘못한 것은 무엇이며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실수와 상실이 우리에게 어떤 후유증을 남겼는지 그 진실을 아프게 직시하는 과정이다. 정연의 숨겨진 사연을 찾아가다 문득 자기 죄를 깨닫게 되는 진태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우리의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좀 길지만 인용한다.

 

그들은 수태한 그녀의 몸에서 탐식과 게으름을 읽었고, 새끼를 감싸는 예민한 정신에서 비굴과 타협을 보았다. 그들은 그녀가 휴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느 면에선 마음이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 나 죽고 싶다 진태야…… 그의 기억 속에서 정연은 아직도 여름 땡볕에 검게 탄 주근깨박이 얼굴로 울고 있었다. 육즙처럼 붉은 기름이 흘러내리는 장떡을 베어먹고, 냄비에 가라앉은 꽁치 살점을 숟가락으로 퍼올리고, 닭날개 세 토막을 깨끗이 발라먹고 있었다. 그들이 그 시절 그녀와 나눈 것은 무엇이었나. 그들은 저마다 무엇이 그토록 다급하고 분주해 그녀의 변화를 살피지 못했는가. 왜 임신한 그녀가 마지막 닭날개 한조각도 다 먹고 가지 못하도록 매섭게 다그쳤는가. 통닭집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떠날 때 그녀의 눈빛에 담긴 비애와 슬픔을 왜 일제히 외면했는가. 왜 그들은 그토록 메마르고 무지한 정신으로, 왜 그렇게 근본적인 단절의 포즈를 고수했나. 왜 그렇게 동화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을 품었으며 왜 그렇게 자신들의 무효성을 앞당기기 위해 날뛰었는가. 그녀의 조각배가 죽음의 해협을 지날 때 그들의 배는 어디쯤 항해하고 있었나. 모든 시대의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디서건 제 운명을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광적인 과잉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한 시절을 살아냈을 따름인데, 신진태, 그를 구성하는 기억의 허구는 무엇인가. 이게 바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판도라의 상자였나. (391~92면)

 

자기의 과거에서 죄를 발견하는 영혼이야말로 가장 순결한 영혼이죠. 오히려 아무 죄가 없다고 우기는 둔감한 인간들이, 죄란 죄는 모조리 다 짓고 다니면서 자기합리화에만 능한 무리죠. 모든 인간관계에는 언제나 피해와 가해의 입장이 있기 마련인데, 피해자는 무조건 불쌍하고 가해자는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피해자가 상처를 통해 자기추동의 힘을 얻을 수도 있고, 또 가해자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파괴적 죄의식에 시달릴 수도 있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 나쁜 짓이 자기에게 정확히 징벌로 돌아오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인간이 제가 보기에는 가장 윤리적이에요. 예를 들어 청춘의 시기에는 너무 에너지가 넘쳐나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잘못했는지, 누구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았는지가 불분명한 상태로 서로 얽혀서 정돈이 안 되죠. 그러다 어느순간 불현듯 오는 거죠. 아무리 무심하거나 무감한 인간에게라도 언젠가는 한번, 자기고뇌와 열정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행위에 대한 반성 혹은 책임이 뒤통수를 매섭게 후려치는 날이 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명랑하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가진 진태도, 정연이 다 먹지 못한 닭날개 한조각 때문에 돌아버리잖아요. 제가 보기에 사실 진태는 아무 죄가 없어요. 그러나 진태가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오래전에 정연이 겪었을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순간, 자기 안에서 죄를 발견하게 되거든요. 우리 다 같이 반성하고 용서하고 뭉치자는 식의 주의주의적 죄의식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자기를 찢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타인에 대한 절절한 공감의 힘만이 자기 죄를 진정으로 직시할 수 있게 해주죠.

 

 

희생양을 배반하는 희생양

 

『레가토』에서 가장 분명한 가해/피해의 관계는 박인하와 오정연에게서 나타난다. 사실 박인하가 오정연을 강간하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참과 굴욕, 모욕과 학대로 맺어진 이들의 관계는 서사가 진행되면서 모종의 형질변화를 겪는다. 이제 가해자는 더이상 가해자만은 아니게 되고, 피해자 또한 더이상 피해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박인하는 자기가 저지른 끔찍한 죄를 끊임없이 환기하고 고백하는 자기모멸의 제의를 통해 자기파괴적인 방식으로나마 삶의 동력을 얻는다. 오정연 또한 바로 그순간 흘린 ‘한 티스푼의 피’와 그 피로 태어난 딸을 통해 투쟁의 힘을 얻는다. 소설에서 오정연이 희생양이면서도 희생양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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沈眞卿 문학평론가. 199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저서로 『떠도는 목소리들』 『여성, 문학을 가로지르다』 『한국문학과 섹슈얼리티』 등이 있음.

소설에서 오정연은 두번의 폭력과 마주친다. 첫번째가 박인하에 의한 개인적 폭력이라면, 두번째는 광주학살로 상징되는 시대적 폭력이다. 희생양이 등장하는 대개의 소설들에서 이 두가지 폭력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남성의 성적 폭력을 통해 시대적 폭력을 고발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또한 언뜻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수난받는 여성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박인하와 오정연의 가해/피해 관계는 모종의 죄의식과 속죄의식을 통해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가해/피해의 도식에서 벗어난다. 그 결과 오정연은 일방적인 제의적 폭력의 희생양으로 머물지 않는다. 여기에는 오정연이라는 매력적인 인물의 자질도 몫을 보탠다.

 

폭력의 가혹함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양을 더 비참하게 또는 숭고하게 만드는 건 평면적인 방식이겠죠. 제가 소설을 쓰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지점도 오정연에게 어떤 캐릭터를 주느냐 하는 것이었어요. 강간당하고 총 맞아 쓰러졌다는 점에서 오정연은 분명 희생양이에요. 그런데 정연은 원래 일상적 삶에서 명랑하고 생기가 넘치는 아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하고도 끝끝내 자기만의 활력과 긍정의 힘으로 극복해내죠. 강간을 당하고도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 있는 대신 ‘발딱’ 일어나고, 광주에서도 수술받고 누워 있던 애가 갑자기 ‘쨍’ 하고 뛰쳐나가죠. 끝까지 버티는 인내와 다시 ‘쨍’ 하고 ‘발딱’ 일어나는 활기를 갖고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단순히 희생당하는 수난의 인물 코스프레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생명력이 마지막까지 그녀를 살아 있게 한 거고요.

 

 과연 오정연은 어린아이다운 명랑성과 어른스러운 침착함을 두루 갖춘 인물이다. 두려워하면서도 용감하고, 냉정하면서도 관대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에 대한 선의와 예의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강인한 여성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오정연은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희생양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에 고착되지 않는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짐작과는 다른 소설의 결말(오정연은 광주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으며, 기억상실증으로 지난 일을 모두 잊은 채 빠리에서 그녀의 생명을 구한 프랑스 남자의 사촌동생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정연을 숭고한 희생양이 아닌,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이 될 수 있게 한다. 언뜻 이러한 결말 처리는 실종된 정연에게 죄의식을 지니고 살아온 자들의 소망충족 드라마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렇기에 통속적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오정연이라는 이름에 죄의식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위안이자 위로가 될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적인 작가’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권여선에게 그런 식의 닫힌 결말은 모호한 열린 결말보다 쓰기가 훨씬 어려웠을 터다.

 

사실 결말이 장편에서 워낙 중요하니까 저도 여러 버전으로 생각을 했어요. 제가 지적이라고 오해받기 때문에 더 그랬죠. 결말도 뭔가 쉽지 않게, 끈적하게, 책을 덮고 나서도 기분이 답답하고 더럽게 가자, 그런 욕망도 있었어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만큼 괴롭혔으니 이제 그만 쉬게 해주자, 위로해주자, 하는 마음도 있었죠. 또 저 스스로 이제 그만 죄를 내려놓고 싶은, 최소한의 위로라도 받고 싶은 이기심도 있었고요. 그래서 복잡하게 꼰다든가 애매모호하게 처리하기보다는 손쉬운 듯 보이지만 헐겁게나마 매듭을 지은 거죠.

 

 

애타게 정연을 찾아서

 

權汝宣 소설가.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등이 있음.

權汝宣 소설가.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등이 있음.

『레가토』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30여년이나 지난 뒤에 어떤 계기로, 어떤 방법으로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설령 그것을 찾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그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많은 경우 정체성의 확인은 육체에 새겨진 표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발뒤꿈치에 새긴 문신이나 얼굴의 흉터, 엉덩이나 등에 있는 북두칠성 모양의 점 등등. 아니면 쪼개진 하트 목걸이나 똑같은 십자가, 어린 시절에 찍은 사진 등등. 그것들은 ‘갸가 바로 갸’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신원 확인의 중요한 표지이며 우리가 멜로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온 모티프다. 『레가토』에도 그와 방불한 장치가 있다. 예컨대 박인하와 하연의 부녀상봉이라는 에피소드, 그리고 그에 동반되는 정체성 확인의 표지. 예컨대 박인하가 하연을 처음 보았을 때 하연이 입은 “흑백 가로줄무늬 셔츠에 하얀 스커트”는 정연이 실종 직전에 광주에 가면서 입었던 “흰바지에 흑백 가로줄무늬 티셔츠”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하연은 정연을 떠올리게 하는 ‘슬픈 초식동물 같은 표정’을 짓는 ‘동그랗게 튀어나온 이마’의 소유자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둘 사이의 이러한 유사성은 실종된 정연의 행방을 추적하고 하연의 진짜 정체를 확인하는 데 아무런 계기로 작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신원 확인의 표지가 비밀의 중심에 있는 인하와 하연 혹은 정연에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엑스트라에 가까운 주변인물 ‘순구’에게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작품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눈치채겠지만) 소설에서 순구는 세번 등장한다. 박인하가 가르치던 야학생으로 한번, 광주에서 정연을 단검으로 찌른 공수부대원으로 또 한번, 하연이 탄 지하철에서 아내가 읽어주는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틱장애가 있는 중년 남성으로 다시 한번. 어쩌면 이 세명의 인물은 동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애써 이 세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표식을 마련해주는데, 그것은 바로 왼쪽 뺨에 난 화상자국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철 안에서 순구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여성은 그녀가 풍기는 ‘암내’를 통해 정연이 1학년 때 캠퍼스에서 만난 전도사와 같은 인물임이 암시된다. 이들은 소설 속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들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바로 흉터(‘딘둥이’)와 냄새(‘암내’)를 통해 정체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 부분은 제가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인하와 정연의 가해, 피해 문제처럼, 딘둥이인 순구 또한 단순히 가해자로만 규정할 수는 없는 인물이죠. 광주의 직접적 가해자들이 받았을 상처도 하나의 풍경으로 소설 속에 녹여보고 싶었고, 그 이후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그렇게 등장시키기로 했어요. 장편소설에는 워낙 많은 인물들이 들끓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그냥 한번 슥 나왔다 사라지는 인물 천지여서는 또 안되죠.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등장시킬 때마다, 이 사람을 뒤에 또 나오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무리 엑스트라라고 해도 ‘행인1’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뿐만 아니다. 써클룸에 있었던, 낱장이 떨어져나가고 밑줄이 쳐진 세로판형의 낡은 책을 기억하는가. 그 책 또한 소설 속에서 세번 등장한다. 30여년 전 써클룸에 있던 책을 인하가 읽으면서 한번, 인하가 잡혀들어간 뒤 정연이 인하의 하숙방에서 그 책을 발견하면서 또 한번, 하연이 언니(정연) 소유의 오래된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낱장이 흩어진 세로판형의 낡은 책’이라는 표지는 인하와 정연, 하연이 읽은 책이 사실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은연중에 알려준다. 이렇듯 겉보기에 멜로드라마의 장치를 활용하는 듯한 『레가토』는 실제로는 그 장치를 오히려 사소하고 엉뚱한 인물과 사물에 비끄러맴으로써 일반적인 멜로드라마의 관습을 미묘하게 뒤튼다. 또한 그것은 눈에 띄지 않는 인물과 사물에 그들만의 고유한 표지를 마련해주려는 작가의 세심한 배려로 읽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레가토』의 큰 틀은 멜로드라마적 구조다. 예컨대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는 인하와 하연이 실은 부녀지간이었다는 통속적 반전이나, 비밀에 한걸음씩 다가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극적 긴장, 하연의 정체가 밝혀지기까지의 숨김과 드러냄의 극적 구조, 소설의 결말부에서 실종된 정연을 만나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우연들이 바로 그 징표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에는 기존의 단편에서 드러났던 작가의 지적인 상상력과 언어감각, 유머 등이 군데군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장편의 형식 속에서도 이런 특장이 효과적으로 자리잡게 한다.

권여선의 소설가적 기질이 잘 드러난 사례 하나. 진태와 재현은 중국식 샤브샤브인 훠궈의 ‘허연’ 국물에서 ‘하연’을 연상하고, 그러다가 급기야 ‘오’자가 들어간 말들(오뎅, 오라질, 오미자차, 오골계, 오도리, 오이지, 오대산, 오리무중, 오선지, 그리고 오월)에서 어쩔 수 없이 오정연을 떠올린다. 음운의 유사성의 원리에 기초한 이러한 은유적 룰은 단지 언어유희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정연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태의 다음과 같은 독백, “그러니 나를 놓아라, 오대산아. 그렇게 배고픈 얼굴로, 그렇게 겁먹고 캄캄한 얼굴로 나를 쑥개떡처럼 꽉 움켜쥐고 있지 마라, 오미자야”(310면)는 남겨진 자들의 죄의식이 은유적 룰에 따라 어떻게 환기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이러한 은유적 룰은 소설의 결말부에서 정연이 자신의 진짜 정체를 확인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동하는 것이니, 이 작가의 지적 치밀함은 여일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면 비슷한 걸 떠올리게 되고, 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메우려고 하게 되죠. 은유와 환유도 그런 과정에서 생기는 거잖아요. 물리적인 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나 인식에서도 그런 식의 유사성과 인접성이 작동하고, 그러한 원리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인지하고 서로 연결 짓게 해주는 한, 다시 말해 그게 인간의 기본적인 인지체계인 한, 시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에서 그 두가지 룰은 나름의 방식으로 운용되는 것 같아요.

 

 

후일담의 시기를 지나면서

 

권여선은 “작가로서 앞으로 쭉 글을 쓴다는 전제하에서” 『레가토』로써 자기의 1기가 끝났다(아니, 끝났으면 한다)고 말한다. 앞서 권여선 소설 특유의 후일담적인 성격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지만, 작가는 『푸르른 틈새』에서부터 지금까지가 강박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 감정을 투사하던 시절에 대한 서사화 내지는 작품화의 시기였다면, 이제 『레가토』에서 그런 과정이 나름 매듭지어졌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후일담의 시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그 시절은 지나간 것일까?

 

『푸르른 틈새』부터 『레가토』까지를 제1기 작품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시기에는 장편이든 단편이든 ‘후일담적’이라고 부를 법한 복합적인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아요. 과거의 어떤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과, 그런데 결국 놓쳐버렸다는 절망과, 다시 그 일을 곱씹으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된 과거에 대해 느끼는 경악과, 뭐 그런 식의 쳇바퀴 같은 것. 인간이란 늘 현재에 결핍을 느끼기 때문에 과거에서 뭔가를 자꾸 끌어오려고 하지요. 그런데 기억은 깔끔한 청소를 해주는 대신 지저분한 죄의식이나 강박을 낳고, 그게 현재로 계속 침투해 들어와 현재를 교란하고, 그렇게 과거의 습격과 현재의 진압의 불완전한 반복이 제 소설의 테마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쓰려고 작정을 해서가 아니라, 제 안의 무언가가 그런 면만을 보게 했어요. 뭔가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놓친 것 혹은 놓쳤을지도 모를 어떤 것이 저를 자꾸 발광하게 하고, 그 기원을 찾게 하고, 그것만 골똘히 들여다보게 했던 것 같네요. 그건 크게 보면 80년대라는 시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작게 보면 저라는 인간의 자잘한 일상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죠. 그런 ‘찾기’의 구조와 추체험을 통해 달라지는 구성, 배치 등이 제 소설의 후일담적 형식 속에 항존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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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레가토』가 ‘후일담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는 제1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에는 후일담의 한계에 갇히지 않고 지금 삶의 세태를 꼼꼼하게 부조하는 특유의 솜씨와 섬세가 빛을 발한다. 단순한 회고적 시선에 갇히지 않는, 현재의 삶과 인간세사에 대한 세밀한 탐구는 최근 2~3년 동안 발표된 단편들의 두드러진 성과이기도 하다. 특히 「팔도기획」이나 「웬 아이가 보았네」 「소녀의 기도」 「은반지」 같은 작품에서, 작가는 과거에 대한 강박적 회고 대신 다양한 현재의 상황에 벌어진 인간관계와 그들 사이의 권력구조를 기하학적으로 그려가면서 그러한 관계의 그물망이 건져올리는 복잡하게 뒤얽힌 인간만사의 심층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작품에서는 그간 권여선 소설에 자주 등장하던 지적인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통속적인 의식 수준에 머무는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물론 작가 특유의 지적인 유희는 여전하지만 말이다. 권여선 소설의 제2기 단계로의 진입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가 이제부터는 현재에 대해 쓰겠다고 말은 해놓고 어쩌면 과거에 있는 한조각을 찾는 이야기를 계속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제게는 현재에서 시작해서 현재로 끝나는 소설적 상황을 만드는 일이 무척 어렵게 생각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죠. 그냥 소재나 주제를 그렇게 잡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근본적으로 문체에서부터 소설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문제거든요.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사방식을 탐구해야 되는 거죠. 예컨대 현재를 살아나가는 세속적이고 평균적인 관념을 가진 갑남을녀의 얘기를 쓴다고 할 때, 그게 대개는 빤하다는 이유로 배척되는데, 그들이 가진 관념이 빤한 거지 그런 빤한 관념을 가진 개개인에 관한 탐구가 빤한 것은 아니거든요. 평균이라는 건 도대체 뭔가, 그것부터 답이 안 나오니까요. 제가 지금까지는 소수자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작은 리그에서만 꼼지락거렸기 때문에, 세상의 평균적이고 세속적인, 현실을 지배하는 담론이나 인식에 대해서는 대충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았는지도 몰라요. 이제는 그걸 깰 때가 된 거죠. 그걸 깨야만 제가 현재에 뿌리를 내릴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저 혼자만의 리그 속에서 들입다 깊이 파기만 했다면, 이제는 좌로 우로 산지사방으로 움직이면서 새롭게 현실의 넓이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봐요. 되든 안 되든.

 

 

거두절미식 인터뷰를 마치며

 

사실 우리의 인터뷰는 시종일관 머리 떼고 꼬리 떼고 몸통부터 파고드는 ‘거두절미식’이었다. 작가와 처음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우리는 십년 전 한때 ‘세미나’도 같이 하던 사이였다!), 작품 얘기 외에 묻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왜 그렇게 성급하게 단도직입했는지, 인터뷰를 마칠 즈음이 되어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그쯤 되어서야 급하게 연재할 때와 많이 달라진 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작가는 처음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10개의 소제목과 각각의 시간대에 들어갈 정보와 내용이 확정되어 있어서 크게 바뀐 부분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잠시 침묵. 그냥 이쯤에서 끝인사를 나누며 인터뷰를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이해되지 않았던 소설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소설에서 하연은 지하철에서 만난 중년부부(‘딘둥이’ 순구와 ‘암내’ 나는 여자전도사)를 따라 내리고 있는데, 그때 하연을 따라 내리던 깔끔한 수트 차림의 젊은 남자가 하연에게서 암내가 나는 줄 알고 눈살을 찌푸린다. 그런데도 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내린다. 이런 불필요한 장면이 왜 덧붙여졌을까, 하는 나의 질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그 장면은 언뜻 보면 불필요할 수도 있지만, 하연이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윤리감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누명을 쓴 상황이잖아요. 냄새라는 게 정처없이 떠도는 거니까 그 진원지를 확정할 수 없죠. 그렇다면 하연도 그 남자처럼 얼굴을 찌푸린다든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든가 해서 자기는 아니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데, 그걸 안하거든요. 자기에게 씌워진 누명을 부인하지 않는 걸로 봐서 하연은 분명 이 부부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어요. 그 행위와 감정 속에는, 하연의 무의식이 아니라 작품의 무의식, 즉 오정연을 다치게 한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도 살짝 숨어 있죠.

 

용서 치고는 참으로 이상한 방식의 용서다. 그러면서 깨달은 바는 권여선의 문학적 계산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치밀하다는 사실, 그리고 섬세한 윤리감각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레가토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하는 것은 지적 냉철함 뒤에 숨어 그것을 떠받치는 저 선한 의지와 따뜻함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권여선의 소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012.4.16. 인문까페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