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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엄기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웅진지식하우스 2011
‘정치적으로 올바른 긍정’의 용도
황승현 黃承炫
문화평론가 hinno@hanmail.net
이 책을 청춘을 위한 자기계발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면에 깃든 태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내면의 잠재력을 계발하라고 독려하는 보통의 자기계발서와 일정한 친연성을 갖는다. 하지만 사회모순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인식을 감안한다면 통념적 의미의 자기계발서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공지향적 긍정담론으로 일관하는 것이 자기계발서의 일반적 경향이니까.
저자는 우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라고 권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고 다만 소소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을 뿐”(46면)지만, 신자유주의적 현실은 이런 소박한 희망도 더이상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의 자기계발서라면 앞으로 다 잘될 거라는 식의 달콤한 위로를 선뜻 건넸겠지만, 저자는 끝까지 침착하다. 다만 용기를 내라고 사려깊게 조언할 뿐이다. 이때의 용기 역시 자기계발서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용기는 성공을 향한 집념이 아니다. “동지/동료가 있기에 생기는”(144면) 연대의 감정이자 연대를 통해 사회적 모순을 돌파하려는 열정이다. 즉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조각낸 사회적 연대를 복원하려는 의지다.
저자의 조언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바로 ‘관계’다. 타인과 맺는 인간적 관계를 통해 희망을 찾고 그 관계 속에서 용기를 얻자는 것이다. 저자가 청춘에게 권하는 것도 멘토(mentor)가 아닌 ‘어른’이다. 이른바 청춘콘서트 같은 무대에 등장하는 멘토가 성공의 사도이자 화신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어른은 정서적인 유대 속에서 청춘을 이끄는 인격적인 존재다. 어른은 “삶에 대한 깨달음”을 경험의 형태로 전수하는 스승이지만, 멘토는 “인생 성공을 향한 롤 모델”일 뿐이니까.
요즘 유행하는 온갖 종류의 청춘콘서트에는 반드시 멘토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형식은 이미 오래전에 ‘성공 간증’이나 ‘긍정 대부흥회’로 변신한 것이 아닐까.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나처럼 성공한다는 자아도취식 성공담이나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긍정만능주의가 강연의 형태로 공공연히 설파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성공의 찬란한 상징인 멘토도 성공을 향해 돌진하는 긍정적 인간형도 없다. 한국사회의 황량한 현실과 이에 마주한 무력한 젊음, 그리고 어렵겠지만 용기를 한번 내보자고 권하는 차분한 조언자가 있을 뿐이다.
저자는 용기를 분노나 냉소를 넘어 “한계에 정면으로 부딪치”(254면)는 의지로 규정한다. 현실에 섣불리 절망하지 말라는 당부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저자가 말하는 용기는 긍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힘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과 맞설 용기”를 낼 수 있으니까. 실제로 이 책의 제목도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다. “그대로 우리 삶에 충실하면 된다”(277면)라는 언급에 이르면 저자가 결국 삶에 대한 긍정에서 용기를 찾으려 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의미의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사회적 문제의식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만 우리 삶을 옹호하자”는 저자의 태도는 분명 ‘정치적으로 올바른’ 긍정이다. 청춘콘서트의 멘토가 장려하는 성공지향적 긍정과 사뭇 비교되지 않는가. 청춘콘서트의 본질적 한계를 정면으로 환기해준다는 데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무엇이 용기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것은 본래 쉽지 않다. 가령 등록금 투쟁을 위해 대학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의 행동은 용기인가 패륜적 폭거인가. 아마도 학생들과 총장님은 무엇이 용기인지에 대해 끝까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용기가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온전하고 명확한 실체로 존재하는 일은 적어도 현실에서는 없다. 개인의 용기를 강조하는 조언은 결국 내면적 심성에서 해결책을 찾자는 주장이다. 이는 분명 추상적 개념에 기대는 처방이다.
보수언론은 88만원세대의 저항을 촉구하는 ‘분노담론’을 386 운동권 출신들의 일방적 선동으로 규정한 바 있다. 청춘의 문제는 스스로 용기를 내어 해결해야지 폭력과 저항을 사주하는 과격세력의 선동에 휘둘려서는 안된다는 식의 물타기에 용기라는 미덕이 동원된 것이다. 이처럼 심성을 중시하는 추상적 담론은 사회적 실천을 외면하는 핑계로 언제든지 변질될 수 있다. 내면의 성숙에만 골몰하는 폐쇄적 개인윤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무분별한 청춘콘서트 열풍의 정서적 해독제로 쓰일 수 있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긍정은 이미 자신의 몫을 다한 것이다. 그 이상의 역할은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해서도 안된다. 분노보다 용기에 방점을 찍는 저자의 조언은 청춘에게 용기를 심어주려는 원론적 격려로 이해해야 옳다. 만일 저자의 진의가 현실에 섣불리 분노하기보다 내면의 용기를 먼저 키우라는 것이라면 이에는 동의할 수 없다. 분노와 용기를 대립시켜 분노를 미숙하고 열등한 개념으로 격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시도는 대개 급진적 저항을 악마화하는 윤리적 편집증으로 귀결된다. 사회모순을 겨냥한 격렬한 저항을 분노에 사로잡힌 폭력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소극적이고 온건한 저항이 용기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우스꽝스러운 역설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용기는 분노와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다. 용기는 분노의 대안이 아니라 분노의 전제일 뿐이다. 내면의 진정한 용기가 뒷받침되지 않는 분노는 곧 사그라지는 일시적 충동에 불과할 테니까.
시위나 파업 같은 물리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작은 실천도 충분히 용기있는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대개 급진적 행동을 회피하는 핑계로 악용될 뿐이다. ‘용기’가 현실적 과제를 우회하는 명분이 된다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긍정’의 가치는 스스로 퇴색될 수밖에 없다. 용기 같은 윤리적 가치는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적 덕목일 뿐 사회적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 정신의 나침반이 아니다. 그걸 인정할 때 비로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