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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2013년체제를 위한 대학개혁의 첫 단추

이기정의 중등교육 개혁론에 덧붙여

 

 

김명환 金明煥

서울대 영문과 교수. 저서로 『지구화시대의 영문학』(공편), 역서로 『죽음과 소녀』 『문학이론입문』(공역) 등이 있음. kmh@snu.ac.kr

 

 

1. 들어가는 말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에 발표된 이기정(李基政)의 「교육의 2013년체제를 만들자」의 교육개혁 제안에 공감한다. 그 이유는 첫째, 공교육 무능이라는 핵심 문제와 대결했고 둘째, 교육관료, 사학소유주 등의 수구세력을 제외하고 범국민적 공감과 연대를 이룰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실행에 옮기기 쉬운 현실적 제안이기 때문이다. 그는 교육문제의 복잡성을 솔직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어떤 목표가 최우선이며 왜 그 목표에 타협이 있을 수 없는지를 명쾌하게 밝힌다.

중등교육 현장의 교실 살리기에 집중하는 한편 이기정은 대학입시를 ‘필요악’으로 인정하는 현실적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대학개혁의 차원에서 상응하는 정책이 없다면 그의 개혁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그가 내세운 3대 정책 중에서 ‘중고등학교 무학년 학점제 단계별 수업’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기존의 내신을 없애고 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므로 대학입시를 포함한 대학개혁 차원의 논의가 불가피하다. 이 글에서는 이기정의 중등교육 개혁을 뒷받침할 대학개혁의 현실적 안을 고민해보려고 한다.1) 즉 다가오는 대선에서 누가 집권하든지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와 사회운동의 힘을 바탕으로 공론화할 방안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2. 본고사 부활론과 고등교육 평준화론이라는 환상

 

현행 대입제도는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누구도 통제하기 어려운 난맥상을 보이면서 입시부정에 가까운 폐해가 속으로 곪아 들어가고 있다. 갈수록 복잡해지는 대학입시는 과거의 제도보다 비용이 더 들고 더 불공정하며,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의 수험생을 혼란과 좌절에 빠뜨리고 있다. 이른바 상위권 대학이나 사회 일각에서는 이런 현실을 꼬집으며 대학별 본고사 부활을 포함한 대입 자율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서울대를 정점으로 수도권의 10여개도 안될 상위권 대학이나 카이스트(KAIST) 등의 이공계 명문대, 전국 각지의 의대를 제외하면 대학별 본고사를 정말 원하는 대학당국이나 교수들은 많지 않다. 본고사가 허용되면 자기 학교의 위상을 고려하여 더 많은 대학들이 시행에 나서겠지만, 내심 자기 학교에 맞는 인재 선발에 본고사가 가장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고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강고한 대학서열구조의 정점에 서 있는 소수의 대학과 인기학과들 외에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을 제도다. 그것은 기여금 입학제도가 도입되면 소수의 대학과 학과들만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과 같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본고사, 기여금 입학제, 고교등급제를 불허하는 교육의 삼불(不)정책은 분명한 현실적 이유가 있는 것이어서 이명박정부도 섣불리 깨뜨리려 들지 않았다. 물론 실제로는 복잡한 전형제도 안에 본고사적 요소가 슬쩍 끼워지기도 하고, 고교등급제 금지는 입학전형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무시되는 형편이다.

특정한 조건이나 전공에 따라 본고사 지필시험이 인재 선발에 효과적일 수 있지만, 과거와 달라진 우리의 사회현실, 교육현실에서 본고사는 일반적인 대안이 결코 아니다.2) 장기적으로 볼 때, 중고교의 내실있는 단계별 수업을 대학 입학관리부서가 잘 모니터링해서 학생부 우수자 전형이나 특기자 전형을 발전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물론 이 과제가 실현하기 어렵고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중등교육 개혁과 (대학입시 정비를 포함한) 대학개혁이 접점을 마련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별 본고사 부활론에는 중등교육의 무능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대학교육의 무능을 은폐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즉 현재도 대학생 1인당 교육비용, 교수 1인당 학생비율 등에서 한국은 주요 선진국은 물론 경제여건이 우리보다 못한 나라들과 비교해도 보잘 것 없는데, 이 진짜 문제는 본고사 부활론 뒤에서 실종되고 만다. 상위권 대학들과 일부 여론 주도층이 본고사의 선별기능이 있어야 대학교육이 정상화된다며 ‘대학 자율화’를 요구하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심하게 말해, 본고사 부활론은 이른바 ‘SKY대학’(서울연세고려대)이나 전국의 의대들이 점수 좋은 인재를 싹쓸이하여 세세연년 자신의 명성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타성의 발로일 뿐이다.

허구적인 본고사 부활론이 극단에 치우쳐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일종의 고등교육 평준화론이 있다. 진보진영에서 지난 10여년간 고심해온 국공립대학 통합네트워크, 국립교양대학 등은 과거에 비해 훨씬 구체화된 것이 사실이며, 현재 제1야당이 정책 토론에 부칠 만큼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방안들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등 걸림돌이 많으며, 고등교육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반박을 물리치기 어려운 수준에 있다. 1974년 박정희정권이 단행한 고교평준화도 후속 조치와 투자가 미흡하여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고, 90년대 이후 평준화 해체의 빌미를 제공했다. 그런데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중등교육도 아닌 고등교육을 대상으로 일종의 평준화를 감행하려면 명분과 현실화 가능성이 모두 확실해야 국민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일부 진보적 논자들은 대학서열구조 철폐와 입시지옥 해결에만 집중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의 현실적인 유지와 발전을 도외시하는가 하면 장기적인 학문정책의 수립 같은 고차원의 전망에 소홀하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지 않으면 ‘대학 하향평준화론’의 프레임에 막혀 아무 진전도 이루지 못할 공산이 크다.

물론 진보적 교육개혁론자들은 OECD 평균 이상의 고등교육 투자, 즉 GDP 1% 이상의 고등교육재정 확보를 통해 상향평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지만, 실제 우리는 고등교육에 투자할 여력이 많지 않다. 당장 4대강사업 등 현 정권이 저지른 일들을 수습하기 위해 상당한 정부재정이 필요할 것이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경기침체와 유로존의 위기로 국내경제의 손실과 이를 보완할 재정상의 요구가 심심치 않게 터져나올 것이다. 또 노인복지, 영유아복지 등 절박할뿐더러 국민적 기대가 한껏 달아오른 사회복지 확대에도 재원이 모자랄 형편이다. 게다가 새누리당이 국회 다수당이라는 현실에서 우리는 국민적 호응을 한층 튼튼하게 얻을 방안을 모색해야 최소한의 재정 확보도 가능한 처지다.

난마처럼 얽힌 현행 입시제도, 퇴영적 향수병의 소산인 대학별 본고사 부활론, 진보진영의 대학개혁론의 세가지가 모두 전폭적인 국민적 지지와 거리가 멀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학개혁의 견지에서 교육 정상화를 위해 첫 단추를 제대로 꿰는 길은 무엇일까?

 

 

3. 중등교육 정상화를 위한 대학입시 정비

 

이기정의 ‘무학년 학점제 단계별 수업’은 중고교 교실 안팎에서 핵심조건을 잘 갖추지 못하면 실패 위험이 높다. 우리 교육문화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정교한 모의실험 등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수준별・단계별 수업이 곧바로 과거의 우열반 체제로 인식되어 학교 안팎에서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더 근본적인 쟁점으로, 단계별 수업은 선진국에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즉 단계별 수업의 효율성만 강조될 때 교육 목표는 우수성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참된 교육과는 거리가 멀어질 염려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단계별 수업에는 뒤처진 학생을 배려하고 학습의욕을 북돋는 맞춤형 교육과 상담도 있어야 하고, 이기정 자신도 강조하는 20명 이하의 학급 규모 유지, 교사들의 노력 배가와 수준 향상 등 까다로운 필요조건이 따른다. 궁극적으로는 단계별 수업이 효율적으로 남들을 누르고 올라가려는 제도가 아니라 학생 각자의 능력과 적성을 발견하기 위한 제도라는 공감대를 교사와 학부모, 사회 전체가 갖는 것이 관건이다.

따라서 ‘무학년 학점제 단계별 수업’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설계도라는 반박이 쏟아져나오기 쉽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우리 현실은 이런 개혁을 절실하게 요구한다. 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의 기업을 비롯한 각종 조직은 원하는 능력과 자질, 잠재력을 갖춘 인재 발굴에 따른 심각한 비용 상승을 겪게 된다. 또 대학 등 교육기관들은 비효율적이며 기만적인 인재양성 제도를 고수하거나 개혁의 미명 아래 엉뚱한 짓을 되풀이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며 실질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인력의 질과 사회의 객관적 요구 사이의 심각한 괴리는 우리 교육의 질을 무작정 폄하하는 이데올로기적 언설만은 아니다. 아니, 이를 다 제쳐두고라도, 하루걸러 언론에 오르내리는 학교폭력과 자살이라는 끔찍한 현실만 보더라도 충분하지 않은가. 과연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무엇일까?

대입제도의 변화를 교육문제 해결의 미봉책으로 삼아온 것이 우리 교육정책의 깊은 병폐지만, 우선 대입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가장 앞세울 것은 전형제도의 단순화다.

앞서 말했듯이 자율화를 빙자한 복잡한 전형제도는 입시의 객관성을 떨어뜨리고 학생과 학부모를 괴롭히는 고비용의 사회악이다. 따라서 각 대학의 전형제도별로 내신, 수능, 대학별 전형(논술과 면접)의 3대 요소 중 하나가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도록 단순화를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학년 학점제 단계별 수업’을 위한 공간이 더 열릴 것이며, 혁신학교 등의 새로운 교육에서 길러지는 다양한 인재들이 자신에게 맞는 전형을 효율적으로 택해 구김살 없이 성장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전형제도의 단순화는 진정한 다양화이자 자율화인 것이다.

더불어, 이미 내년도 입시에서 총 37만여명의 입학정원 중 4만명 이상을 차지하는 입학사정관제 선발은 전체 정원에서 비율을 정해두든 특정한 전형제도에만 국한하든 그 인원을 철저히 제한해야 한다. 다 소문난 비밀이지만, 복잡한 수시 특기자 전형이나 입학사정관제 전형은 많은 경우에 형평성을 상실하여 입시부정에 가까운 행태를 보인다. 특히 공인영어시험 성적이 종종 과도하게 큰 비중을 차지하여 과잉의 영어교육 투자를 부추기며 편협하고 빈곤한 미국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사회 곳곳에 스며들게 한다.

이대로 둔다면 대입제도의 심각한 불공정성, 이와 유관한 외국어고 등 특목고의 입시부정이나 불투명성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생각해보라. 상위권 대학 입학에 유리한 특목고의 입시가 교육당국의 눈길을 피해 틈만 나면 샛길로 빠지는 것을 어떻게 일일이 감시할까? 전국의 특목고 부정입시는 심심하면 언론을 타지만 근절될 길이 없다.3) 이른바 명문대학의 입시 불공정 역시 심각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강남 출신 학생 우대로 상징되는 사실상의 고교등급제, 영어성적의 과도한 반영, 특기자 전형 요소인 과외활동 평가의 객관성 결여 등 일반 국민도 이미 다 아는 불공정함은 노골적인 부정에 근접해 있다.

반면 이기정식의 중등교육 개혁과 대입제도 개선이 잘 맞물린다면 점차 각 고등학교의 다양한 교과과정과 교육 결과를 대학들이 충실히 평가하여 전형에 반영하게 될 것이고, 거꾸로 대학의 좋은 전형제도가 각 중고교의 교과운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빠르면 3, 4년 안에 선순환 효과가 확인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대학교육이 내실화될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 물론 대학입시 개선을 넘어서는 발본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교육개혁이 본 궤도에 오를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4. 서울대를 포함한 국립대학 연합체제의 모색

 

최근 민주통합당이 일종의 ‘국립대학 연합체제’4)를 당의 정책으로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한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전까지 이런 차원의 대학개혁은 일부 진보적 학자들이나 진보정당이 거론했을 뿐인데, 이제 제1야당까지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큰 진전이 이루어진 셈이다. 민주당의 대선주자 중 하나는 ‘서울대-지방거점국립대 혁신네트워크’라는 이름의 대선공약까지 앞장서 내세웠다. 야권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필요한 재정을 확보해낼 의지만 가진다면 한국교육을 일신할 출발점이 마련될 수도 있다. 말을 바꿔, 국민에게 설득력있는 교육개혁 비전을 보여줄 때 대선 승리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구언론은 이 정책 토론을 ‘서울대 폐지론’으로 왜곡하여 맹공을 가함으로써 민주통합당을 곤혹스럽게 했다. 수구언론의 공격이 악의적이고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서울대 폐지론’의 프레임이 제법 먹혀든다는 것은 국립대학 연합체제의 구상이 난제라는 사실과 함께 아직도 진보개혁진영의 논의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무르익지 않았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서울대가 남다른 위상과 특권적 지위 탓에 국립대학을 하나로 묶는 개혁방안에서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필렬(李必烈), 김종엽(金鍾曄) 등은 아예 서울대를 빼고 국립대학 연합체제를 구축하는 발상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5) 그러한 발언의 취지는 쉽게 이해하지만, 서울대를 뺀 국립대학 연합체제 구축은 치명적인 결함을 안게 된다. 우선 지역 국립대학의 경쟁력과 선호도가 현저히 떨어진 상황에서 서울대를 뺀 국립대학 연합체제는 수도권의 학생은 물론이고 지역의 학생에게도 매력이 없다. 더구나 법인화 이후 사실상 사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서울대를 방치함으로써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파괴하는 쪽으로 더욱 기울어가게 된다. 서울대를 뺀다면 국립대학 연합체제는 개혁으로서 좌초할 것이 뻔히 예상되며, 기껏해야 지방 국립대학에 대한 지원 강화에 그칠 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국립대학 연합체제는 서울대를 포함해야 한다. 그래야 대학입시의 폐단을 해결할 수 있고 대학서열체제도 무너뜨릴 수 있다. 나아가 서울대를 포함한 참여 대학들이 진정으로 학문적 경쟁력을 기를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이 개혁안이 ‘대학 하향평준화’의 프레임을 벗어나 다수 국민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립대학 연합체제가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국가경쟁력의 유지와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지 선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바로 그 점에서 국립대학이 연합체제를 구축하더라도 공동선발에 더해 공동학위 수여까지 겸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연합체제가 공동선발을 시행하여 학생들을 적절하게 캠퍼스 별로 배정한 후에 일정한 시점, 예컨대 2학년 말의 전공선택 시점에서는 (이미 다양한 특성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립대학 중의 하나를 택하여 그 대학의 학위를 받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 과정에서 특정 대학이나 전공분야에 지원자가 몰릴 경우에는 선발과정을 거치는 것이 타당하며, 이를 통해 연합체제 안의 각 국립대학이 선의의 경쟁을 하게끔 유도함으로써 선순환 효과를 노려야 한다. 이때 경쟁이 치열해지면 공정한 양질의 경쟁이 아니라 학점 위주의 경쟁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이에 대비한 보완책도 필요하다.

국립대학 연합체제가 아직 국민의 입장에서 피부에 와닿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개혁안에 대해 흔히 나오는 반론들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그 기본적 구상을 구체적으로 살피려 한다.

우선, 국립대학 연합체제의 공동선발로 입학한 학생들이 2학년을 마치고 전공선택을 할 시점에는 어차피 서울대를 가기 위한 ‘입시경쟁’이 벌어지므로 2년간 또 하나의 입시를 유예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기정의 주장대로 공정한 경쟁이 어느 단계에서는 불가피하듯이, 대학 2년 동안 교양교육, 기초교육을 얼마나 충실히 받았는가를 선발기준으로 삼는 경쟁이라면 그것은 최소한 현재의 입시보다는 낫다. 더불어 서울대 학부를 이른바 인기학과가 아닌 기초학문 중심으로 강화해간다는 전제를 둔다면 선발과정의 부작용은 한층 완화될 것이다.6)

그럼에도 2013학년도 기준으로 10개 거점국립대학 정원 41000여명에서 서울대 정원 3100여명을 대학 2학년 말에 뽑는 경쟁이라면 131이 넘는 경쟁률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과거의 관성이 작용하여 연합체제의 1, 2학년들이 학점경쟁에 휘말림으로써 하고 싶은 공부에 2년간 몰두하며 우수한 인재로 성장하기 어렵다.

여기서 서울대 전공 진입을 각 국립대학의 상위 20~25%의 학생 중에서 추첨하는 방식을 한번 상상해보면 어떨까. 우선 경쟁률이 31 전후로 적절해질뿐더러, 이렇게 뽑은 학생들의 능력과 수준이 살인적 입시경쟁을 뚫고 입학한 후 다수가 학문 탐구 아닌 고시 등 출세지향적 진로 모색에 몰두하는 오늘의 서울대 학생들보다 못하진 않을 것이다. 또 추첨 결과에 따라 지방대학에 머물게 된 우수 학생들도 별로 좌절하지 않을 것이며, 국립대학 간의 성적 동등성에 관한 소모적 시비도 일어나기 어렵다. 지방 캠퍼스의 교수도 좋은 학생을 서울대에 빼앗긴다고 반발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해당 지역의 사립대학이나 다른 국공립대학과 협력하여 지역의 좋은 학생을 발굴하고 전국 최고 수준의 졸업생을 배출하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글에서 추첨제가 유일하거나 최량의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하튼 서울대 당국과 교수진, 동문들이 이런 ‘황당한’ 추첨제마저 진지하게 검토하며 연합체제 동참이 서울대의 경쟁력이 질적으로 도약할 길임을 깨닫느냐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다.

둘째, 서울의 상위권 사립대학과 지역 국립대학 사이의 현실적 격차를 고려할 때, 우수한 학생들이 서울의 사립대로 몰릴 것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즉 설령 서울대가 포함되더라도 국립대학 연합체제는 국립대학의 하향평준화가 될 뿐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수도권 국립대학의 수와 규모는 이 지역에 집중된 인구와 자원에 비해 너무 빈약한 상황이어서 이것이 연합체제 개혁의 걸림돌 중 가장 크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 문제도 긴 안목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서울의 명문 사립대들이 과거의 서울대처럼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되리라는 주장은 현재의 서울대가 가진 유무형의 엄청난 자산과 특권적 지위를 과소평가하는 오류다. 우선 어떤 경우에도 단 하나의 명문 사립대가 지금의 서울대처럼 정점에 서게 될 리 없다. 오히려 사립대들도 저마다 개성을 살리며 발전할 공간이 열릴 것이다. 따라서 학생 유치에서는 다소 불리한 조건에서 명문 사립대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이 사회 전체를 위해 긍정적이라는 대범한 자세가 필요하다.

수도권의 국립대 부족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방안의 하나로 수도권 사립대 중 자격요건을 갖춘 대학이 원하는 경우에 연합체제에 참여하여 공동선발에서 전공 배정까지 함께 운영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해당 사립대의 독자적 전통과 자율성을 존중한다면 참여를 희망할 대학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즉 사립대 중에서 사실상 국공립대로서 기능하는 대학의 비중을 크게 늘려 고등교육이 견지할 공공성의 기반을 넓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 방법까지 미리 고안해두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수 있겠다. 서울대의 심각한 위상저하 없이 지방 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의 성공은 무엇보다 정부의 의지와 실천력에 달려 있다. 물론 서울대와 지역 거점국립대학의 현격한 차이를 생각할 때 후자를 서울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며 한두해에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방대학들이 그동안 받아온 차별과 소외를 해소할 수 있는 정책과 투자로 차근차근 풀어나갈 수 있다.

현재 지역 거점국립대학 교수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열패감과 피해의식을 개혁주체의 열정으로 바꿔내기 위해서는 크게 세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연구와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획기적인 교수 충원, 둘째, 우수 졸업생에 대한 다양한 취업우대 정책, 마지막으로 반값등록금을 넘어서는 대폭의 학비 감면과 장학금 제공이다. 여기에는 몇조원에 상응하는 큰 재정투자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정치권은 개혁의지를 가지고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가령, 지방대 육성사업인 ‘누리사업’의 성과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실효성있는 재정투자 계획이 마련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대학개혁이 수도권 집중과 지역의 낙후라는 고질병을 해결하는 종합적인 국가정책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산적한 과제 중에서 공동선발의 방향과 원칙, 교양교육과 기초교육의 내실화, 지역 거점대학의 학부와 대학원 특성화, 동일 지역 내 사립대학 및 다른 국공립대학과 거점대학의 협력관계 구축, 대입지원자 감소에 따른 대학정원 조정 등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단번에 풀어낼 수는 없다. 우리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들며 사회적 합의가 가장 쉬운 데서 출발해 근본적인 과제들로 나아가는 비전과 실천계획을 가져야 한다. 그 점에서 연 4조원의 투자로 15만개의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이기정의 중등교육 개혁론이 설득력있음을 다시 강조해도 좋겠다. 특히 그의 개혁론은 현장 교사들의 자발성을 대전제로 한다. 이제까지의 교육개혁 시도가 교사들을 개혁의 주체 아닌 대상으로만 취급함으로써 실패의 길을 밟아왔다는 점을 깊이 되새겨야 한다. 대학개혁에서도 거점 국립대학 교수진의 자발성과 개혁의지, 여타의 지방 국공립대학이나 사립대학 교수진의 참여를 북돋워야 성공할 수 있다. 실제로 지방대 교수 중에는 우수함에도 불구하고(심지어는 우수하기 때문에) 서울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에 발을 붙이지 못한 이들이 적지않다. 그들이 각종 불이익과 소외감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해도 새 집권층은 노무현정부 당시의 온갖 어려움이 고스란히 살아나서 자신의 행보를 막아설 것이라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와 교수들의 주체적 노력을 광범위하게 이끌어낼 개혁 청사진을 깊이 고민해야 하며, 이를 통해 국민적 지지와 호응을 견고하게 확보해야 한다. 동시에 명심할 사실은 대입제도 정비처럼 비교적 용이한 과제 하나도 정권교체 없이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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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주로 4년제 일반대학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전문대학 문제라는 중대한 사안은 다루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2) 2년간 수학과 과학을 집중 교육받은 후 이공계로 조기 진학하는 과학고 출신 학생의 선발과정은 본고사와 비슷하며 잠재력보다는 당장의 점수와 실력 위주다. 그러나 실제 이렇게 입학한 학생의 불균형한 학력(및 정서적 미성숙)은 우려할 만하며, 상당수는 일반고 출신보다 수학과 과학 실력이 월등한 탓에 성취동기가 없어 퇴보하기도 한다. 과학고의 대입 위주 교육과 대학의 근시안적 선발정책이 맞물려 장기적으로 한국 이공계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3) 중등교육 개혁의 성공에 고교평준화의 유지와 확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 즉 외국어고, 과학고, 자사고 등 평준화에 역행하는 제도에 대한 전면적 재고의 필요성은 이기정도 강조하며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4) ‘국립대학 연합체제’는 필자가 붙인 잠정적인 명칭이다. 논자에 따라 ‘국공립대학 통합네트워크’ 등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가장 쉽고 간명한 용어가 ‘국립대학 연합체제’일 듯하다.

5) 이필렬 「‘제로톱’ 축구와 국립대 통폐합」, 경향신문 2012.7.5; 김종엽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서 서울대를 빼버리자」, 창비주간논평 2012.7.4.

6) 연합체제의 순항을 위해 서울대는 신입생을 받지 않고 그 입학정원을 지방 국립대에 넘길 수도 있고, 적절한 방식으로 서울대 캠퍼스에 연합체제의 학생들을 받아 1,2학년 교육을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서울대 학부를 기초학문 중심으로 강화하는 과제 역시 간단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구체적 논의를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