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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형수 金炯洙
시인, 소설가. 1959년 전남 함평 출생. 1985년 『민중시 2』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 등이 있음. millemi@hanmail.net
오자(誤字)
1
오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오자는 아니다. 다들 오자라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오자였다. 제길, 이름 따위야 어떻든 무슨 상관이람! 하나, 오자는 정의와 도덕과 양심에 입각하여, 마치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기를 서슴지 않는 성품이었다. 이 순간에도 남쪽 가야 사투리의 가운데 토막이 펄쩍펄쩍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니기미, 이런 법이 어딨노.”
인격체를 지목해 오자니 탈자니 하는 게 옳다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세상 이미지의 밑바탕에는 한권의 책이 있다. 어떤 이는 팔만대장경쯤으로 알고, 어떤 이는 대한민국 상식백과로 알며, 어떤 이는 소설 변강쇠 같은 통속물로 알지라도 분명한 것은 모종의 체제를 가리켜 세상이라 한다는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존엄함을 ‘하나의 독자적인 정부’에 비유하는 독트린을 선포하기도 한다. 일개 자아의 무게가 체제의 크기와 맞먹는 영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모두가 서로의 인질이며 일사불란한 세상 관계의 일원일 뿐이다. 오자 이야기는 그래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어떻든 오자에 대한 추억은 위대한 상식과 교양을 자랑하는 서울 시민들의 권태를 달랠 상당한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오자는 늘 일상의 안정을 흔들어왔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보니 좀 난감해지는 바가 없지 않다. 일상의 안정이라 함은 생애의 질서가 어떤 지속적인 흐름을 유지하게 하는 호흡 같은 걸 가리킬 텐데, 그것이 말이 되려면 밥 먹고 똥 싸고 숨 쉬고 자는 게 모두 장기적으로 ‘지금 이대로’일 수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뜻을 모아 당대가 바로 그런 때라고 합의한다 하더라도 오자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세상일을 논하면서 배경에 치우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결코 시대적 배경을 생략하고 말할 수 없다. 6월항쟁을 겪고 서울이 때아닌 이데올로기의 백가쟁명을 맞던 무렵을 기억하는 이들은 알 것이다. 앞뒤 연대기에 흡수되고 만 숱한 연대들처럼 그 시대에도 역시 사람들이 살았다. 왕년의 어느 때보다 기운찬 새가 울고 꽃이 피느라 분주했지만 일용할 양식이 될 열매를 제공한 바 없으니, 그날을 추억하는 것은 아무런 업적을 남기지 못한 빈 가지의 공허를 확인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그 시대의 일들은 모두 5·18 이후 지상의 풍경이 마치 모세의 광야처럼 황량했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냉철한 지식인들도 전두환 시대가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때, 역사가 그 커다란 현실을 젊음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혁명의 밀물은 열정과 반대되는 일체를 밀어버렸다. 그것이 인간을 몰염치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누구나 할 말이 있었고 누구에게나 난폭할 이유가 있었다. 주목할 것은 그 격렬한 활극의 무대를 마음껏 휘젓는 게 무사가 아니라 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인문학적 건각(健脚)들 틈에서 늘 모난 어깨 모서리에 부딪치면서 그때마다 사지가 깨지는 것 같은 스트레스를 참으며 젊음을 보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똑하고 위세당당하고 12시 정각처럼 고개가 꼿꼿한 사람들 속에서 가슴 졸이던 날을 떠올리다보면 초라한 자화상이 오히려 대견해진다. 제길.
“어이, 젊은이가 역작 「배고픈 다리」의 시인인가?”
생면부지에, 고작 한살 많다는 이유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구는 경우를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아주 흔했다. 이를테면 그해 가을 점심나절로 기억된다. 조금 한적한 매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존재감이 없지 않은 문예지에 나의 시가 물경 여섯편이나 발표되는 경사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내내 고대하던 등단을 엉겁결에 한 것이다. 그 책이 버젓이 서점 판매대에 놓여 있다는 전화를 받은 지 세시간 만이었다.
“당신 독자인데, 철길 앞 식당으로 나오시게.”
“누구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름을 꼭 대야 쓰까?”
나는 대번에 오금을 저렸다. 이름을 듣고 보니, 명색은 독자로되 삼류 문청이 아니라 한창 주가가 뛰는 명사인바 당장에 황송하기부터 했다. 혈연, 학연, 지연은커녕 그 언저리에 닿을 꼬투리조차 감촉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후다닥 튀어나가 굽실대기 시작했다.
“난 그대가 따발총이 아니어서 좋아. 한국어는 따발총이라 시 나부랭이들도 항상 다, 다, 다, 다…… 한다, 된다, 없다로 끝난다고. 물론 꼰대들은 말이 되지. 가령 이 뭐시기 같은 자들은 온 산야가 다, 다, 다, 다…… 하는 따발총 소리, 꽹과리 소리, M1소총 소리가 비명, 폭음과 함께 잠시도 그칠 날이 없는 전시체제를 살았으니까.”
세상이란 이런 어처구니없는 담화로 궁합이 맞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파격을 좋아하는 자들은 지겨운 알리바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다. 하나, 나처럼 소심한 자에게는 남의 호방함을 견디는 것이 편할 리 없다. 첫 작품을 지목해 얼핏 ‘역작’이라는 말을 내비쳤다는 이유로 이토록 당당하게 밥을 사게 하고, 술을 따르게 하며, 근무시간을 까먹게 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나는 모처럼 채용된 모 회사에 말단직원으로 충성하던 참이라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염통과 허파 언저리가 들썩거렸다. 그래, 식사를 마치자 곧 일어서고 싶었다.
“저,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신입사원이라……”
“뭐라 카노? 내가 팬이여. 당신 팬이래니께! 이 섹시한 술잔에 거침없이 입술을 맞춰야지.”
자기 말만 세우는 순 고집불통 같은 위인을 맞아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깊은 격전지에 들어섰는지 실감했다. 동시에, 이 폭력적인 애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는 무일푼 상경 넉달 만에 일자리를 구한 가난한 청춘을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많게는 일주일에 두세번, 적게는 이삼주에 한번.
나는 이같은 위인을, 아니 이같은 위인을 대량생산한 시대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엄한 것은 그가 아니라 그 시대였다. 보잘것없는 빈털터리를 동조하고 마음껏 고무, 찬양해도 되는 ‘폐허’의 자유밖에 없었던 시대, 학생혁명, 군사혁명, 시민혁명 따위의 정변을 줄지어 경험한 민초의 면역력에 값할 정치 주제가 없었다. 천지는 공권력을 업신여기는 풀잎들로 차 있어서 구름 하나도 무사히 건너다니지 못했다. 다들 어떤 방식으로든 시련을 헤쳐갈 매뉴얼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거리는 날마다 증명했다. 목청이 크면 누구나 주인공이었고, 시대정신을 말할 수 있으면 누구나 혁명가였다. 당연히, 점잖은 사람일수록 예기치 못한 시간에 예기치 않은 자리에서 날벼락을 뒤집어쓰기 십상이었다.
그 발원지가 굴레방다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화문에서 마포까지 즐비한 언론사, 출판사 가운데 얌전한 언어로 강철 기질을 벼리는 대장간 같은 것들이 굴레방다리에 모여 있었다. 그래서 자칭 거장들이 넘치고 또 넘쳤던, 삼류 이데올로기의 사령부 중 하나가 도서출판 파랑새인데, 외양은 지식 고물상 같은 창고일지언정 내용은 혁명이론의 백화점이었다. 주위에 얼마나 많은 식솔을 거느렸는지 위정자들은 공안사건만 터졌다 하면 자금줄이 혹시 그곳에 있지나 않을까 수사권을 사용하겠다고 으르렁댔다. 들락거리는 사람도 백면서생이 다수지만, 군사독재가 자기 존속을 꾀하면서 희생시킨 무수히 많은 부상자와 적색 보균자들도 있었다. 그것을 즐기는 문제적 개인들은 저마다 기십, 기백명에 이르는 심복을 거느린 두목들처럼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그 하나하나가 십수개의 구치소에서 금방 쏟아져나온 별들을 맞아 낮술을 마시는 호프집, 통닭집 따위에서 얼마나 허황된 르네상스의 영광을 재현했던가. 굴레방다리 일대는 감옥에서 갓 나온 신선한 투사가 떴다 하면 술집 몇곳이 바닥 청소를 할 만큼 대박이 나기 일쑤였다.
젠장, 기라성이라도 별똥이 하나둘이어야 우열을 가리지. 자고 나면 새로운 감방 소식을 물어오는 신제품이 출시됐다. 전선이든, 전선에 방불한 후방이든 씩씩하게 살아남아서 그저 혁명을 합네, 자백하면 자격증도 증명서도 검증 절차도 없이 투사가 되고 혁명가가 되었다. 본명이 무엇인지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며 저 자신조차 그런 일은 모르는 것처럼 그 이념의 거리를 향유하였다.
명시해두지만 그게 모두 평등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대저 책에는 수많은 활자 병졸을 거느리는 제목 급의 글자가 있고, 남의 이목을 끌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고딕체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자주 고딕체들 속에 포위되었다. 그 경이로운 사면초가의 언저리에는 천하무적 박모를 장기판의 졸로 아는 고수도 여럿이었다. 대표적인 하나가 송모라고 하는 거의 군계일학의 걸작에 속하는 재담가였다. 혁명가적 품성이 문제가 되어 집단성토를 하는 자리에서 그의 언어탄환이 불을 뿜으면 박모쯤의 낭인은 쉽게 장삼이사들의 일부로 평정되곤 했다.
“혁명을 하겠다는 자가 어떻게 진실할 수 있고, 문학을 하는 자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송모 못지않게 파랑새 출판사 사장님도 고단자였으니, 거래처 직원들도 낯짝에서 반창고를 뗄 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출간한 책자가 가끔 경찰서에 압류된다는 중차대한 사실을 앞세워 반혁명적인 발언을 마구 퍼부어도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
“혁명도 혁명당해야지. 개인의 재산이 없다면 개인의 생명도 원천적으로 국가의 소유물이 되고 말아.”
그러나 그 고을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크나큰 영마루는 김이 아니었을까 싶다.
“저 바다를 향해 과거를 묻고 미래를 예측하는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어. 파도의 전망을 논한다고 우주가 달라지나?”
인간의 말이 수사법 하나로 힘을 쓰는 건 아니다. 다들 자신의 무용담을 지렛대로 삼아 설득력을 만들었다. 김을 만날 수 있는 자리는 언제나 방만한 술좌석뿐이지만 그가 손익을 달관하는 깊은 정신세계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정히 무찌르고자 한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가 취했을 때 ‘고향’에 대한 동요를 부르면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빠져 눈물범벅이 되고 만다는 설이 구구했다. 고향 상실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마포에는 천하의 용장에다 그 오메가의 오메가들이 셀 수 없이 나타나는 곳이지만 눈을 조금만 크게 뜨면 세상은 끝없는 벌판이요, 우리가 목격한 것은 그 벌판의 한쪽에 있는 야트막한 도랑에 불과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나는 박모 한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틈만 나면 나를 불러 비서처럼 대동하려고 드는지라 한번은 거부할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비군훈련 때문에 그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런 데다 헛힘을 쓰나? 일제가 해체시킨 구한말 군대가 우리 군대여. 부평공단, 마산 창원 공단 할 것 없이 독립군들이 맹활약을 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나는 한번도 투옥된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철책부대에서 그것도 현역 병장으로 전역한 사람인지라 감히 과거사를 입에 담을 수 없었다. 투쟁 경력이 없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초라한 일이었으므로 예비군훈련조차 내놓고 다니지 못하던 터였다.
“예비군은 군법으로 다스린다니까요.”
“난 현역도 거부했네, 이 사람아.”
과연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병역을 면한 자였다. 그게 다른 곳에서는 신상 비밀에 속할지 모르나 꼭지 덜 떨어진 사람들의 나라 굴레방다리에서는 열번을 위세해도 모자랄 훈장감에 속했다.
이쯤 되면 그 시절의 오자가 착륙한 대지의 굴곡과 민심의 지형 따위를 대충 여투어볼 수 있을 것이다.
2
그곳에 등장할 때 오자는 일개 과객의 자태로 존재를 드러냈다. 나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모처럼 덩치 큰 회사에서 발주받은 팸플릿의 제작 담당자가 나였다. 하필 때늦은 휴가를 마친 뒤라 긴장이 풀렸는지 표지 교정을 놓쳐 당장 모가지가 붙어 있을지 말지 모를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개 풀 뜯는 소리에 진배없을 팸플릿의 제목은 ‘신하(臣下)들의 무도곡’이었던가본데 내 눈길이 몇번을 왕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거하(巨下)들의 무도곡’이 되어 있었다. 하필 발견한 시각조차 인쇄 완료 직후라 비상구 없는 외통수가 되었다. 신출내기가 저지른 이 엄청난 사고를 눈감고 지나기에는 회사의 출혈이 너무나 컸다. 인쇄물에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하면 대금 결제를 청하지 못한다는 건 이 업계의 상도의에 속했다. 그리하여 초판 2천부의 인쇄물을 몽땅 폐지로 날렸으니 그 뒷맛이 어떨지는 상상력을 동원할 것도 없다. 인쇄소에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모른다.
그래, 눈이 가물가물하는 상태로 버스에 올라 졸다 깨다 하면서 굴레방다리 앞길에서 내리자 피안이었다. 꿈을 꾸듯 걸을 때 다리가 무겁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터벅터벅 우회전을 하면 북아현동으로 향하는 길이 버들가지처럼 휘어진다. 내가 눈시울을 닦아서인지 그 길은 실컷 울고 난 사람처럼 말끔하였다. 안 그래도 초가을이면 철길 아래로 호박넝쿨이 뻗어내려 행인들의 다리를 감아오르려 한다. 그렇게 괜찮은 시 두어편이 어른대는 장소인데, 그날은 그런 풍경에 맞춤이나 한 듯이 아주 촌스럽게 생긴 머리통이 듬쑥 솟아올라 좌로 5도쯤 기울어져 딱 12시 5분 전 같은 모습으로 허공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걷는 모습을 보니, 오랫동안 타인의 눈길에 다듬어진 흔적이 없었다. 그러고는 길가닥이 휘어서 잘못 보았는지, 아니면 골목이 왼쪽으로 뻗었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 한참을 두리번거리고도 방향을 못 찾았는데, 나는 그걸 보고 갑자기 희열이 솟구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어야, 그쪽은 막혀 있어. 곧장 올라가야지.’
마저 고백하지만 그에게서 오자 이미지를 처음 발굴한 사람이 나라는 건 여태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여튼 그 순간 호화양장본 세계문학전집에서 오자를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강물처럼 흐르던 일상의 호흡이 일거에 단절되는 지점, 숨이 콱 막히는 자리, 남들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걸 만났을 때 구원감을 느낀다. 위안거리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나는 그저 오자를 뽑아내고 싶은 희열을 느끼며 슬금슬금 꼬리를 밟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내가 근무하는 회사 건물 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학교 뒷골목 건물. 2층은 파랑새이고 내가 일하는 직장은 3층의 반쪽을 쓰는데, 내막인즉 2층의 하청업체에 다름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자주 악어새가 악어의 이빨 틈을 들락거리듯 드나들 수 있었다. 그날은 사장님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내내 2층 언저리를 돌고 있었다. 그러다 수상자가 호출되어 나왔을 때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바로 건물 앞에서 사라진 5분 전 머리통이 나타났던 것이다.
당일 수상자는 얼굴 없는 작가였다. 젊은 나이에 8년을 감옥에서 보낸 위인을 구경하기 위해 관계자는 물론 각종 언론사 기자들, 동종의 도반들의 이목까지 집중되었다. 근대문학 100년 동안 누구도 그처럼 파격적인 예우를 받으며 등단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첫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연이어 작품이 회자되는 바람에 올챙이 시절도 없이 곧장 신예에서 문제작가로 직행했으며, 그 눈빛을 노출시키지 않은 신비주의에 힘입어 대번에 중견이 되었다. 엉뚱한 소리지만 나는 그가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남미의 게릴라 두목 같은 이미지로 계속 낙양의 지가를 올렸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렇게 야무진 꿈이라니! 오자가 종달새 같은 생명의 약동을 참을 수준이었으면 아마도 걸음새부터 달랐을 것이며, 오자로 불리는 일 또한 안 생겼을 것이다.
하여튼 그런 대단한 시상식 현장이라 다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작가의 생김새에 대한 궁금증으로 숨이 막히고 있었다. 아마도 세련된 차림에 러시아의 테러리스트 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을걸,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세상에! 난로 위에서 한창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오르던 주전자에서 김이 푸욱, 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락없는 공무원 복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발소 냄새가 가시지 않은 기름머리에서 광이 번쩍번쩍하는 구두까지, 고상하게 말해 그로테스크한 정도가 거의 숨통이 막히도록 목을 꼭 채운 나비넥타이 그대로여서 보는 이를 한없이 질식하게 만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산적 같은 면상에 화장을 하되 정치 지도자들이 이미지를 순화하느라 슬쩍 분을 바르는 식이 아니라 배우가 연극 무대에 오르기 위해서 덕지덕지 회칠을 입힌 얼굴 같았다. 그때 누군가 김이 푹 빠진다는 듯이 외쳤다.
“음마, 드라마에 귀순용사로 출연하려고 분장한 사람 같네.”
그때 객석에서 헛바람을 뿜은 이를 뭐라 위로하면 좋을까. 진정한 혁명가를 기대했다가 식상한 반동의 형상을 마주한 까닭에 다들 환상의 거울이 쨍그랑 깨지고 마는, 거의 테러 수준의 정서적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낭만적 감성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꼬집지 않을 수 없다. 공무원 같은 수상자의 입에서 당선자 소감이 흘러나오는 순간 혁명에 대한 배신감 역시 제대로 허물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는 참말로 휴전선을 볼 때마다 똥을 싸고 싶습니더. 이기 다 우상 아인교. 반세기 동안이나 집단 무의식에 시달리고도 괘안십니꺼? 분단의식은 우리 삶 속에 정착되다 못해 점점 신성시되다가 어느 순간 신이 된 긴데, 인자 마 우상숭배를 중단하입시더.”
자리가 끝나고 지적 창조의 현장에 맞춘 복장과 표정을 갖춘 당대의 당혹한 문사들은 우르르 몰려나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둘러 술을 들고 나면 실망시킨 댓가를 되돌려줄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럴 임자로 쉽게 예견되는 장수가 김모였다. 누구나 김모의 표정을 보면 공습의 강도를 알 수 있었다. 그날도, 해방의 언어에 저토록 향기가 흐르지 않을 수 있다면 해방이고 나발이고 집어치우자 하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뒤에 틀림없을 순서로, 먼저 고개를 모로 틀어 “공무원이 시방 내 앞에 있네” 그리고 고개를 바로 세워 “이 사람, 공무원이구만” 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찔러대기를 1박 2일쯤 하면 천하의 장사라도 배겨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같은 참담한 무안 주기를 1박 2일이 아니라 2박 3일에서 3박 4일까지 끌고, 나중에 만났을 때 다시 그런다는 것을 안다면 누구라도 겸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그날은 오자가 술상무를 하는 날이라, 불가불 김모의 먹잇감이 되는 수밖에 없겠다, 초면에 안됐지만 하는 수 없다고들 생각해두었다. 한참 후, 파랑새 편집장이 오자를 데리고 와 식당을 한바퀴 돌며 참석자들을 마치 오래된 제국의 문화유적지를 설명하듯이 여차저차 안내를 하자 오자가 반색을 하더니 직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안겨들었다.
“다르마 선생님? 아이고, 지가 팬입니더. 달달 외울 때까지 읽었심더.”
김모였다. 나는 창졸간에 김모가 당황하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마치 법력이 높은 스님에게 감춰진 왕년의 화류계 경력이 곧 드러나려는 찰나 같았다고나 할까? 무소유 철학의 대명사처럼 된 처지이지만 김도 한때는 베스트셀러로 명성을 날리던 추억이 있어서 되새김질하기가 끔찍한 모양이었다. 그 고통스러운 알몸을 가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든가본데 오자는 적확히 그 지점을 찍어서 거의 난도질에 가까운 존경심을 퍼부었던 것이다.
“햐, 다르마 선생님, 주인공이 와 글케 멋진교?”
“만행이네, 만행. 어이 청년!”
김모도 처음에는 반전을 기도했으나 오자는 그게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어린이의 천진난만에 순진무구함까지 얹어서 김모가 감춘 이상한 업적에 진정으로 감격하여 거듭거듭, 그것도 목소리가 하도 커서 온 식당이 다 듣게 경의를 올린 것이다.
“다르마 선생님, 와 자꾸 피하는교?”
김모는 절망의 절망 끝까지 다다른 자의 허망한 눈빛과 도력을 내려놓고 반은 사색이 되어 못내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반전이었다. 굴레방다리에 이렇게 오자가 끼어들자 과거의 영화들이 줄줄이 발겨져 미신이 되었다. 오자는 모든 사건의 배면에 숨은 엄숙한 비밀들을 어린이 같은 질문으로 마구 대낮 아래 소환시켰다. 그의 왕성한 호기심은 배곯아 죽은 귀신 같아서 눈앞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삼켜대었다. 순진성 하나로 혁명깡패였다. 흡사 러시아혁명기의 볼셰비끼 앞에서, 개에게 줘도 뼈다귀조차 물어가지 않을 군대 이야기를 털어서 뒤풀이 자리까지 뒤흔든 파격도 불가피하게 그의 정직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는 오자의 그런 이야기를 숨조차 쉴 수 없는 긴장 속에서 들었다. 그중에서 군대 체험은 둘째갈 수 없는 명작에 속한다.
그가 혁명가를 꿈꾼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이듬해 5·18 계엄확대 반대시위 도중에 유인물을 뿌리다 체포되어 끌려간 곳이 군대인데, 공교롭게도 철책에서 위생병 근무를 하게 된다. 그리고 입대한 뒤 1년이 넘도록, 출애굽기의 모세가 없는 지리멸렬한 행렬처럼 황량하고 권태로 가득 찬 대대 병동을 성토했다. 비극 인식이 없기 때문에 모든 비극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즉자적인 민중의 곁에서 그는 날마다 고독했다. 까뮈의 뫼르소를 충동하던 백사장의 햇살도, 헤밍웨이의 노인이 헤쳐가던 바다도 그에게 와서는 어둠이 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후배가 면회를 와서 지하조직이 경찰에게 급습당한 사실을 통보한다.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삼사주, 길어도 한달이면 누군가 불게 될 것이다. 그는 한계상황에 직면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혼자서라도 가자. 우리는 모두 분단체제가 낳은 미필적 고아들 아닌가.’ 이렇게 무장투쟁으로 나설 것을 결심하자 차라리 홀가분해졌다.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루카치의 말이었다.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자신이라고 그 행복 속을 걷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 그래, 별자리로 길을 찾기로 하고 총과 대검과 수통과 비상식량으로 비축한 건빵을 챙겨 무장을 완료했다. 그리고 모두 점심식사를 하러 간 낮 12시. 멀리서 차 한대가 들어오는 것을 막사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보안대 차량이었다. 머잖아 지프차가 멈추고, 대공초소의 근무자가 불려내려가는 틈을 타서 즉각 철조망을 넘었다. 그리고 기민하게 파견될 수색, 정찰 소대가 이동할 통로를 살핀 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시간에 10킬로씩 두시간에 20킬로를 걸어야 야간작전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계곡 중턱에는 낙엽이 덧쌓여 키를 넘었다. 낮에는 그 속에 숨어서 자고 땅거미가 지면 부스스 일어나 별자리를 쫓아 다녔다. 안전수칙만 지킨다면 옛 고구려 영지에서 가야산 기슭까지 닿을 수 있다는 자신이 섰다. 그러나 그같은 자신감을 확인하는 순간 (여기서 우리는 천재의 멍청함에 대해서, 신의 조롱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새삼 지적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오자는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사소한 허점이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메마른 가랑잎 위로 후드득 빗방울이 듣는 걸 발견한 것이다. 아뿔싸! 그는 황급히 야간 산길을 헤쳐가면서 어느 순간 왼쪽 다리에 매달려 있던 대검이 요대에서 떨어져나간 사실을 알고, 제 발가락이 썩어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참아야 했던 문둥이 시인의 고행을 떠올렸다. 풀섶 틈으로 빗방울이 거꾸러지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겁게 걸린 소총의 어깨띠를 바투 잡았다. 문제는 총이다, 총과 탄창만 무사하면 돼. 그렇게 엿새를 버티고 이레째 되는 밤. 한참을 걷다가 어깨가 가볍게 여겨져 왼손으로 오른쪽을 만져보니 허전했다. 거기 굳건히 있어야 할 소총은 온데간데없고 어깨띠가 빠져나간 빈주먹은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만을 꽉 쥐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얼른 계곡 숲속에 은폐했지만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날이 밝은 후 한참을 망설였다. 다시 나뭇잎 밑으로 기어들 것인가. 위치를 가늠해보니 소속사단이 관할하는 지역은 벗어났다. 이제 그를 잡기 위해 동원된 병력들도 산악수색을 하기보다 그와 연고가 있는 항구와 도시로 헌병을 보내 친척과 지인들을 찾아다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이, 그냥 가자. 밤에 걷는 길을 낮이라고 못 갈 이유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고 산모퉁이를 도는 순간 모퉁이에서 널브러져 쉬고 있는 수색대원들의 복판에 들어서고 말았다. 누가 총을 조준할 여지도 없이, 엇, 하고 놀라는 순간 병사 하나가 덮쳤다. 생포된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진지한 이야기를 굴레방다리의 사람들은 흔히 희극소설로 여긴다는 점이다. 나는 그 황당한 일이 이상하게 나의 기억과 자꾸 겹치는 것을 느꼈다. 공비가 출현했을 때 휴가가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했는지 모른다. 입대하기 직전 고아 출신의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 험한 세상에서 둘이서 서로 감싸는 게 큰 위안이었는데, 군에 들어와 재수 없이 전방에 배속되었고 작전상 면회가 금지되는 처분까지 받았다. 애인은 혼자 견디다 못해 미국에 사는 친척에게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날 수 있는 길은 포상휴가밖에 없는데, 마침 공비가 출현해 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문득 그때 발버둥치던 것이 생각나서 떠들어보았는데,
“작대기 두개를 달았을 때 비상이 걸렸어요. 공비가 출현한 거예요. 곧 출동했죠. 철책부대라서 보통 두어시간이면 작전이 종료되는데, 웬걸, 밤새도록 추적했건만 놓쳤지 뭐예요. 공비가 후방으로 남하하면 큰일이라, 눈에 띄면 곧장 사살하라 명 받았어요. 다들 산에서 자고 먹고 죽어라 수색을 하는데, 온 계곡을 더듬어도 꼬리를 잡지 못했어요. 철책부대에서 공비 작전은 땅거미가 깔리기 전에 종료하지 못하면 직계 별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이미 적군의 출현을 막지 못한 전투상황인 거죠. 그 상태로 가을비가 추적대는 산기슭에서 팔일째를 맞는데, 난리가 아니었어요. 졸다가 영창 가는 사람,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 총기를 잃은 사람……”
정확히 이 대목에서 오자가 끼어들었다.
“그거 신유년 일 아인교?”
신유년을 내가 어찌 아는가? 모른다고 퉁명스레 받으려다 얼핏 ‘유’ 자가 끼어 있어 재빨리 속셈을 해보니 그때가 바로 닭띠 해였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그쳐 묻자 그만 오자 인생의 분기점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곧 소속사단으로 이송되었다. 수많은 장교들이 무장공비를 놓친 죄로 승진 문턱에서 강제 예편하게 된 사단장 앞으로 두줄로 도열해 있는 곳에 그가 짐짝처럼 부려졌다. 다들 난폭한 들짐승을 보듯이 흘끔거리는데, 사단장이 조용히 일어서서 지시를 했다.
“고개를 들어봐라.”
헌병에 의해 턱이 들쳐졌다. 사단장이 나직이 묻는다.
“산에서 먹을 건 어떻게 했나? 배고프지?”
오자는 이미 감격에 겨워 답변을 하지 못하는데 사단장이 재차 지시한다.
“데려다 밥 먹이고 씻겨라. 복잡한 눈빛은 아니다.”
그는 엉엉 울어버렸다. 그리고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이내 자신은 무장공비가 아니고 순수한 탈영병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3
다시 말하지만, 오자가 얼마나 국민윤리적인가에 대해 이실직고를 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윤리란 소싯적의 교과서 이름인바 박정희 치하의 ‘도덕’이자 ‘바른생활’에 다름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도덕의 원천이자 사상적 맥락을 오자는 넘쳐나는 기독교정신에서 얻는다는 사실이다.
오자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오자는 내가 자기를 체포하러 다닌 점을 높이 사 ‘전우’라고 부른다. 오자는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고 ‘도시락’이라 불리는 아내와 아들에게 뽀뽀도 잘하고,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도 다닌다. 그가 감옥에서 오래 살았다고 현실부적응자의 고통을 앓을까 안쓰러워하고 동정하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 자가당착일까? 전혀 불행할 줄 모르는 그를 보는 순간 우리는 이내 편견을 수정해야 된다.
그러나 오자는 국가인지 체제인지 하는 것들이 매 국면마다 작동시키는 정치공학 안에서 양심대로 실천하면 삐딱이가 되는 천진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중 각별히 도드라지는 증상이 분단현장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월경증후군’이었다.
“강화도에서 바다 건너 이북을 볼 때마다 개헤엄을 쳐서라도 넘어가보고 싶더만.”
이같은 넋두리를 흘려듣지 않았던지 어느 신문사에서 DMZ 기행을 시켜주었다. 그는 분기탱천해서 썼다. ‘나는 안보의식이 박약해서가 아니라 분단체제에 갇혀 사는 게 답답해서 자꾸 생리현상을 느낀다. 철책이 단 한가닥의 마이크 선뿐인 판문점 군사정전회의장으로 들어갔을 때는 병적일 정도로 오줌을 싸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하필 중국 관광이 유행하여 백두산을 다녀온 사람이 늘고 있었다. 백두산을 왜 뒤꼭지로 가느냐고 모난 소리를 하던 그가 정말로 백두산 관광을 떠날 기회를 맞은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가 북으로 떠난 후에 한 말을 지금도 모두 사실로 믿는다. 나중에 어느 잡지사 기자가 그의 행적을 스케치하면서도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썼다.
여행 중 일행은 선양(瀋陽)에서 밤기차를 타고 8시간 후에 압록강변의 소도시에 도착하였다. 고구려의 옛 도시 지안(集安)에 가까워지면서 광활한 만주벌판과 판이하게 다른 오밀조밀한 산과 골짜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멀리 삼나무 숲 뒤편으로 보이는 강 건너가 북한이었다. 그들은 압록강에 닿자 누구라 할 것 없이 흥분하고 있었다. 겨우 50여미터 전방에 있는 북한 땅. 강변에 나가 건너편을 보는 사람은 모두가 한국 관광객이었다. 국경 초소 옆으로 북한과 중국을 잇는 철교가 나오자 일행은 서둘러 다리 위로 올라갔다. 한발 한발 앞으로 가자 중국 공안원이 철교 위의 금을 가리키며 ‘여기를 넘으면 북한 땅’이라고 했다. 다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경쟁적으로 발을 내디뎌 선을 넘었다. 비록 물 위에 떠 있는 철교였지만 북한 땅을 밟았다는 느낌이 그들을 낭만적인 나그네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옌지(延吉)까지 가는 길에 들떠서 흥청망청이었다.
오자가 천하를 품에 안은 듯이 만족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거라면 소주 한병이면 족하다. 옌지에서도 당연히 술집을 찾았다. 북한 식당까지 흘러간 것은 호기에 속했다. 한잔 마시고 거나해지자 식당 종업원들에게 곧장 마포 기질을 발휘한 것은 습관이었다.
“낼 백두산을 올라갈라 카는데 북쪽에서 보는 기 좋은교 중국에서 보는 기 좋은교?”
“말씀에 긴장됩네다. 농을 거두시라요.”
북쪽 언어로 긴장된다는 말은 남쪽 언어로 바쁘다는 뜻이었다.
“북에서 지 책이 출간됐다 아인교. 인세를 받을라 카머 어째야 되는교?”
오자의 집요한 공세에 북한 종업원도 경계심이 풀렸는지 대꾸한다.
“정 그렇다면 임수경처럼 해보시라요.”
식당에 들어선 지 한시간 만에 역도산(북한 양주)을 코가 비뚤어질 만큼 비웠다. 그리고 일행에게 중국 돈 2백원을 건네받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일행이 행방을 물었다. 여종업원이 답한다.
“회령으로 가는 길을 물어서 가르쳐주었시요.”
“에이, 농담이었잖아요. 진짜로 가르쳐주면 안되지.”
술집에서 국경 싼허(三合)까지 가는 동안 그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두만강에 도착하자 택시기사가 강바닥이 얕은 곳을 가르쳐주었다. 그곳은 사람의 왕래가 뜸할 정도로 시골인데다 도로가 두만강변과 나란히 있어서 중국과 조선 간 밀수가 성행하는 곳이었다.
오자라면 헤엄을 못 치는 것쯤은 개의치도 않을 사람이었다. 그냥 뛰어들어 개헤엄을 쳐보려고 허푸대면서 마구 떠내려갔다. 급류에 휘말려서야 자신이 죽을 고비에 선 것을 알았다.
‘글타 캐도 두만강에서 죽으이 행복하네.’
그러다 잠이 들었고 깨었을 때는 북한군 초소 앞이었다.
“손들엇. 꼼짝 마.”
이렇게 경비병들에게 체포되어 곧장 회령시로 옮겨졌다.
회령시에 머무는 동안 그는 한 여관에 억류되었다. 보위부 사람들이 와서 사흘 동안 취조를 하였다. 신분확인이 제대로 안되었던 것이다.
“간나새끼, 소설가라는 걸 등명해야 믿디. 소속기관을 여게 쓰라우. 회장이 누구간?”
“민족문인협회, 회장 최모.”
“남쪽에 민족문인협회가 오딨네? 또 아무리 뒤져도 최모가 회장인 기관은 없어야.”
오자가 소속된 단체는 문인보다 작가라는 말을 쓰고, 조직의 이름도 여섯 글자가 아니라 여덟 글자이며, 모임의 성격도 ‘협회’가 아니라 ‘회의’였건만 오자는 그러한 사실에 단 한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신분을 의심받아 계속 두들겨맞았다. 그뒤 평양에서 파견된 사람이 달래느라 물었다.
“북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들라우.”
“양대헌이요.”
“양대헌이 뉘고?”
“청춘영가 쓴 사람요.”
“그게 어떻게 양대헌이고? 대현이다, 현! 면접할래?”
결국 오자가 남쪽에서 장기수들의 삶을 쓴 작가란 사실이 확인되어 회유하기 시작했다.
“새장가도 보내주고 집도 마련해줄 터이니 평양 색시 만나서 오순도순 살라. 그렇게 통일을 념원하는 사람이 남쪽에서 어떻게 살간?”
“전 기독교도고 아내가 있심더. 백두산이나 가보려고 온 건데, 이제 기냥 돌아가겠심더.”
“여보, 작가 선생! 분단이 장난인 줄 아오?”
그는 거듭해서 남쪽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선생! 지금 제정신이가? 분단이 신격화되었다고 쓴 사람이 백두산 여행 같은 그딴 일로 두만강을 건넨단 말요?”
더이상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오자는 결연한 의지로, 그가 언젠가 무장공비가 아니라 탈영병임을 입증하기 위해 결행했던 무차별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두만강을 건넌 지 십여일 만에 술집에서 사라질 때 입었던 흰색 티셔츠에 반바지 대신 회색 양복에 줄무늬 셔츠를 입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두만강을 건너왔다.
나는 오자가 없는 동안 심심하고 허전한 굴레방다리를 지켰다. 그러다 느닷없이 북녘을 감히 술 취해서 넘었다고 오자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물밀듯 쏟아져나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마포 인근의 호프집들도 손님이 뚝 끊겨 거의 현충일에 준하는 불경기를 맞았다. 오자와의 친분관계를 물을까봐 아무도 술집 출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더욱 시끄러워진 곳은 방귀깨나 뀐다는 이들의 까페였을 것이다. 오자 이야기는 따분한 취객들이 가는 곳마다 쾌재를 연발하게 만드는 사건과 화제의 재료가 되었다. ‘자, 통일 또라이를 위해서 건배!’ 이같은 웃음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대도시 일대의 거의 모든 사무실에서, 또 술집과 편의점 근처에서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옮겨다녔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경사를 만난 듯이 떠들던 한국 언론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오자가 북에서 국경침범자라고 혼나고 정부가 귀국한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후에도 일부 언론은 그의 밀입북과 북한에서의 활동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고, 안 그렇다고 하더라도 끽해야 “감상적 통일론을 가진 한 주사파 작가의 돈 키호테적 행동”이라는 비난을 극악하게 반복했다. 마치 타오르는 화덕에서 양은냄비가 끓듯, 오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진정 월북인가 납치인가?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한 것이다.
하지만 오자는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날 입북 동기를 묻는 기자들에게 단순, 명쾌하게 답했다.
“평소 북을 똑같은 조국이라고 생각했심더. 술을 마시자 너무 가고 싶었심더. 코앞에 있는데 못 갈 기 뭐 있노.”
이같은 사태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유감 표시를 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였다. 오자는 안기부 조사 20일 만에 빼도 박도 못할 ‘간첩’으로 임명되었다. 신고도 하지 않고 북에 갔으니 잠입탈출이요, 김일성 전기를 읽고 독후감을 써내고 김정숙 생가를 방문했으니 고무찬양이요, 옷을 바꿔입고 왔으니 금품수수요, 남한 장기수 현황을 말해줬으니 기밀누설이라는 것. 거기에 또 한가지 놀랄 만한 사실이 더해졌다. 그가 공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 그곳의 장기수를 통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는 것이었다.
하긴 죄가 크기는 크다. 오자가 의도했건 안했건 국경, 이념, 분단 따위는 그 순진한 진정성 앞에 졸지에 허상을 드러내 진짜 미신과 우상이 되어 좌충우돌 희화화되었다. 신성한 분단의 가치를 훼손당한 인사들은 타오르는 분노 앞에 위엄을 잃고 되나 안되나 떠들었지만 그래도 세상은 꼼짝없이 코믹한 만화책이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오자는 그런 소란에 혼난 탓인지 뒤늦게 철들어 말을 잃었다. 대신에 변호사와 공안부 사이에 싸움이 붙었으나 내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복역 중에 교화사로부터 권유를 받고 전향서를 썼어요. 얼마 후 학교에 복학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고, 그는 양심의 자유를 팔아 은전을 입었음을 알고 괴로워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장기수가 양심적으로나마 전향서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노동당에 입당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의를 하자 수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변호사도 그가 입당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죠?
—그와 장기수 사이의 입당은 말로만 이루어진 것일 뿐 노동당에 입당 의사가 전달된 일도 전달하려고 시도한 일도 없고, 그밖의 입당을 위한 어떤 객관적인 행위도 없었잖아요. 이를 발표한 것은 너무 치졸한 선전전 아닙니까?
4
오자 이야기를 하다보니 전말이 너무 커지고 말았다. 그 일로 언젠가 엉뚱한 자리에서 나의 동창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요지는 간단했다. ‘이렇게 많은 것들로 가득 찬 협소한 세상에서 그래도 문명의 소품들을 빽빽하게 채우려면 질서정연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오자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얼마나 숨 막히겠는가. 그래서 새삼 떠올리게 되는데, 세상 이미지의 밑바탕에는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한권의 책이 있다. 오자는 그것을 망가뜨리는 사람이다.
오자 한자 없는 팔만대장경 오천만 글자의 일원인 한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자를 발견하는 게 불편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반듯하게 줄을 서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책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오자를 보는 순간 소름 끼치게 치밀한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나도 그랬고 친구들도 그랬다. 돌이켜보면, 모든 표절이 오자에서 드러난다. 오자는 표절할 수 없다. 그것은 오자의 몸통이 그 자체로 보편성보다 개체성을 크게 갖는 까닭이다.
추신: 나도 낡았나보다. 그 일로 오자가 몇년 형을 받아 얼마를 살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희미한 기억에, 오자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친 사람은 정치인 K이고 그를 변호한 사람은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다가 자살로 생을 마쳤다. 나는 아직도 인쇄대행업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식상하다. 해질녘에 거리를 내려다보면 너무나 질서정연한 세상이 어떻게든 변했으면 좋겠는데, 변화의 기미라곤 보이지 않는다. 저 난공불락의 거리에 가득 찬, 더러는 훌륭하고 더러는 요염한, 어지러운 발걸음들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오자 생각이 문득문득 떠올라 웃을 뿐이다.
제길, 그리운 엉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