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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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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해진 趙海珍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장편소설 『한없이 멋진 꿈에』 『로기완을 만났다』가 있음. glala95@hanmail.net

 

 

 

홍의 부고

 

 

1

 

개 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안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었다. 손 안에서 만져지는 휴대폰의 질감은 익숙하고도 뚜렷했지만, 안의 귀는 꿈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높은 깃대에 걸린 조잡한 수신기처럼 여전히 휴대폰 벨소리를 개 짖는 소리로 잘못 해독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그때 안은, 검은 개떼에 쫓기다가 유리가 깨진 전화부스를 발견하고는 정신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개들은 끈적끈적한 침을 질질 흘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맹렬하게 짖어댔다. 수화기를 쥐고 있던 안의 두 손은 경련하듯 떨렸고 갑작스러운 요의로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여보세요? 거, 거기 누구 없어요? 마침내 신호음이 지나가고 통화가 연결되어 안이 다급하게 물었을 때, 개들은 순식간에 뿌연 안개 속으로 삼켜지듯 사라져갔다. 개떼뿐 아니라 가로등과 깨진 전화부스와 그때껏 온 힘을 다해 쥐고 있던 수화기도 하얗게 지워지면서 안은 갑자기 텅 빈 들판에 혼자 서 있게 되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은 들판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절망적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어둑한 들판이었지만 하늘엔 극지방의 오로라처럼 초록과 보라의 빛무더기가 겹치고 휘어지며 흘러가는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먼 옛날 세상 끝에 도착한 방랑자가 더이상 갈 곳이 없자 하늘을 찢고 그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이야기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안은 어쩌면 이 이상한 들판의 출구일지도 모르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어보았다. 신비로운 하늘은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듯 가깝게 보였지만 손에 닿지는 않았다. 여보세요? 마침 하늘 저편에서 누군가 굵은 목소리로 신호를 보내왔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들판 끝까지 메아리를 남기며 길게 울려퍼졌다. 담당의인가. 담당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빈 들판을 헤매는 동안의 막막함을 뻔히 알았을 텐데도 이토록 늦게 응답을 보내온 담당의가 안은 못내 서운했다. 늦었어,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무릎을 꿇는데 어느 순간 현실적인 감각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안은 자신의 감정이 비이성적으로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안은 슬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 안의 풍경이 한줌씩 깃든 정방형의 조각들이 허공에서 질서 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눈을 한번 깊이 감았다 뜨자 조각들은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들어갔고 이내 그 이어진 자국마저 감쪽같이 지워졌다. 여보세요? 제 말 안 들립니까?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 너머에서 누군가가 연이어 물어왔다. 꿈속에서처럼 무조건적인 신뢰감을 주는 중저음이긴 했지만 담당의의 목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안은 비로소 꿈이 끝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뇨, 잘 들립니다. 말씀하십시오. 다시 잠들지 않기 위해 이불을 밀치며 안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침부터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는데, 혹시 Y대 산악써클 15기 멤버 아니신가요? 남자의 질문에 침대 밖으로 한쪽 다리를 내놓던 안은 맞은편 벽에 세워진 전신거울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안이 Y대를 나왔고 산악써클에서 활동한 건 사실이지만,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이 넘은데다가 현을 제외하면 써클 동기나 선후배 중에서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한때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해주던 Y대니 산악써클이니 하는 말들이 안은 낯설기만 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잠시 후 안은 조심스럽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아, 저는 홍의 오빱니다. 홍이오? 어젯밤에, 홍이 죽었습니다. 아…… 안은 낮게 신음했다. 월요일 이른 아침, 타인의 부고를 들으며 잠에서 깰 줄은 몰랐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과 남자에게 유감을 표하는 것 중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홍이 이름인지 성인지도 알지 못하니 그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부탁은 그 두 마음 사이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K구에 있는 S병원입니다. 발인은 내일이고요. 안의 문상을 확신이라도 한다는 듯 덧붙여 설명하는 남자의 목소리엔 습기가 없어 불편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남자가 전화를 끊자 때맞춰 알람시계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시계를 들어 알람을 끄는데 침대 옆 콘솔 구석에 일렬로 놓인 하얀색 플라스틱 약통 세개가 눈에 들어왔다. 안은 이주에 한번씩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상담을 받았고, 상담이 끝나면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가서 꼬박꼬박 저 플라스틱 약통을 받아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안은 자정 즈음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 7시에 알람이 울릴 때까지 깨지 않고 단잠을 잤다. 받아온 약을 저렇게 방치해놓은 건 수면장애가 사라졌음을 몸이 먼저 감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대개 머리보다 민감하고 별다른 노력 없이도 알아서 변화에 적응하지 않던가. 다음 상담은 이틀 후였다. 담당의에게 수면장애가 완치되었음을 밝히는 게 당연한 절차인 줄 알면서도 안은 그 당연함이 새삼스러웠다. 오히려 이틀 후면 담당의를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문득 마음이 설레었다. 안에게 담당의는 연체니 압류니 하는 단어를 빼놓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실제로 그는 안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 습관뿐 아니라, 칼이나 가위 같은 뾰족한 사물에 근원적인 공포를 갖고 있다는 것이나 발꿈치가 매끈하고 분홍빛인 여자에게 강한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것까지. 담당의라면 간밤의 제법 생생한 꿈과 기억나지 않는 대학동창의 죽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상상을 숨김없이 토로한다 해도 차분히 그 모든 이야기를 경청해줄 터였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썰렁한 빈소를 지킬 가족과 의례적으로 조의를 표하는 지인들의 모습, 심지어 구색을 맞추기 위해 상조회사가 갖다놓았을 국화의 알싸한 향으로까지 안의 상상은 뻗어가는 중이었다. 상상 속 그곳은 그동안 안이 다녀봤던 빈소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분위기였고 안은 그 평범함이 언짢았다. 그렇다면 휴대폰을 들고 외진 구석자리를 찾아가 친척이나 지인들에게 부고를 전하게 될 사람은 두살 터울의 형일까, 세살 아래 여동생일까. 형이나 여동생도 전화를 반복하는 사이 슬픔이나 회한이 희석된 목소리로 한 사람의 완벽한 소멸을 전할 것인가, 홍의 오빠처럼? 안은 뼛속까지 번지는 얼음처럼 차가운 통증을 느꼈고, 동시에 이 모든 상상이 마음의 연약한 부분을 자극하는 쓸데없는 자기연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은 콘솔에서 약통 하나를 집어 거칠게 뚜껑을 열고는 알약 하나를 입에 넣은 뒤 벽에 기대섰다. 잠시 동안이라도 200밀리그램짜리 알약이 품고 있는 둥글고 작은 위로를 받고 싶었다. 알약에는 어쩌면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비밀스럽게 포장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가령 초여름의 어느 산행에서 연둣빛 나뭇잎 사이로 내리비치던 햇살의 반짝임에 자신도 모르게 한쪽 눈을 찡그렸던 순간 같은. 뒤를 돌아보면 Y대 산악써클 멤버들이 옹기종기 서 있을 터이고 주의를 기울여 살핀다면 그들 사이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홍의 모습도 포착될지 모른다. 안은 더, 더, 깊이 상상하고 싶었지만 식도를 넘어간 알약은 기대와 달리 둥글고 작은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가슴속 어딘가에 내려앉았다. 벽의 서늘함을 조금 더 느끼다가 안은 화장실로 들어갔고 오래오래 오줌을 누었다.

 

 

2

 

현이 열어준 현관문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맥주캔과 양념치킨, 불은 컵라면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다탁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 쪽으로 걸어가 검은색 슈트 재킷을 벗으며 엉거주춤 앉는데 현이 새 맥주캔 하나를 내밀었다. 사양했지만 현은 막무가내였고 안은 어쩔 수 없이 맥주캔을 받아든 뒤 뚜껑을 땄다.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선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는 중이었다. 연쇄살인사건이라면 안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벌써 몇주째 온갖 매체가 이 사건을 다루었고, 사무실이든 식당이든 사람들은 두셋만 모여도 요란하게 떠들어대며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소모품처럼 나누어가졌다. 살인범들의 수법 자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순했다. 남자든 여자든 일단 표적이 되면 인적 드문 곳으로 끌고 가 각목과 쇠파이프로 무작정 패는 것, 그게 다였다. 살점이 너덜거리고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훼손되어 마침내 희생자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아마도 끈적끈적한 침을 흘리기도 하면서. 대여섯명의 건장한 남자들로 알려진 이들은 개인적 원한이나 사회에 대한 불만을 비치지도 않는데다가 그 수법 또한 잔인하고 비전문적이어서 일부 범죄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일종의 취미처럼 살인을 즐기는 거라고 진단합니다. YTN 뉴스, 최……

개떼 같군.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며 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개떼라는 비유에 간밤의 꿈이 떠오르면서 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참, 아까 전화로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현이 물었다. 그, 그게, 시, 실은…… 말하는 중에도 안은 자신이 당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했다. 퇴근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장례식장에 가는 문제를 결정하지 못해 망설이다가 현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물론 현이라면 홍을 알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현이 뜻밖의 질문을 한 것도 아니고 대답이 준비되어 있는데도, 왜. 안은 생각했다. 그런데도 왜 말의 조각들은 적당히 조립되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이렇듯 혀끝에서 뭉개지고만 있는가. 하긴, 현이 어떤 대답을 내놓든 아침부터 이어진 이 답답함이 해소되진 않을 터였다. 현이 홍을 안다면 자신의 기억을 계속해서 의심해야 하고, 모른다고 답한다면 그녀의 존재를 변함없이 미스터리로 남겨둬야 하는데, 안은 그 두개의 가능한 상황 모두가 달갑지 않았다. 치매냐, 그새 까먹게? 그나저나 저녁 안했으면 해. 현이 새 나무젓가락을 건네며 퉁명스레 말했다. 젓가락을 받긴 했지만 도통 식욕이 일지 않는 저녁상이었다. 현은 이미 치킨 조각 하나를 집어 입 주변에 붉은 양념을 묻혀가며 물어뜯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나마 남아 있던 시장기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지난봄 이혼을 하면서 현은 이전보다 확연히 몸이 불었다. 허리선이 무너지고 뱃살도 축 늘어진 저 상태로 투신이든 실수든 한강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물속을 드나들 수나 있는 건지, 아니 몸에 맞는 잠수복이 남아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현은 한강구조대원이었다.

피곤해 보이네. 응급상황이라도 있었어? 의례적으로 묻자 어젯밤에, 현은 짧게 대답했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는데도 강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구나. 항상 있는 일인걸, 뭐. 근데 어젯밤의 그 사람은 왜 죽으려고 했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들의 속을! 현이 돌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며 아직 살점이 남은 닭뼈를 다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연체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전화했을 뿐인데도 욕부터 지껄이는 자들과 통화할 때처럼 안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 모르지, 너한테 독촉전화 받고 홧김에 그랬는지. 순간이었지만, 안은 현의 입가에 떠오르는 한줌의 조소를 읽었다. 이봐, 나, 난 사, 사채업자도 아니고 부, 불법 대출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 아냐. 저, 정당하게…… 알아, 안다고. 넌 꼭 별것도 아닌 농담에만 발끈하더라. 현은 재빨리 안의 말을 막으며 멍청하게 웃었다. 안은, 웃지 않았다. 그저 궁금했다. 현이 그 사건을 알고 있는지, 알면서 그동안 모른 척했던 것인지, 알고 있다면 저 무심함을 가장한 질 낮은 유도심문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의도는 무엇인지.

1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생활고에 시달려오던 중견배우가 신용카드 연체대금 때문에 채권추심을 받던 중 한강에 투신했다. 뒤늦게 도착한 구조대원이 어두운 강바닥을 더듬어 찾아낸 건 이미 형편없이 물에 불은 시신이었다. 당시 구조대원에 현도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 배우의 채권추심을 담당한 직원이 자신이었다는 것도 안은 밝힌 적이 없다. 그러니 조롱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저 화법에 대고 그 일은 회사가 직원에게 지시한 업무일 뿐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으며 그 배우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채무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항변하는 건 무의미했다. 시스템 안에서는 그 누구도 사적인 원한이나 악의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개인의 죄란 성립되지 않으며 죄의식 또한 무의미하다는 말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안은 지금 와서 그 사건을 들추어낼 마음이 없었고 현이 보일 반응도 알고 싶지 않았다. 안의 불편한 표정을 읽었는지 현이 미적미적 곁에 다가와 앉더니 어제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40대 여자가 마포대교 위에서 한시간가량 울부짖으며 신세타령을 하다가 그대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전기보트에서 잠수복을 챙겨입고 대기하고 있던 현과 또다른 구조대원은 곧바로 산소통을 메고 강 속으로 들어갔다. 강이란 밖에서 보면 아름답고 고요하지만 그 속은 어둡고 더러우며 물살은 미친 듯이 빠르게 흐른다. 매일 엄청난 양의 오물이 유입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몰된 곳이다. 교각의 온화한 조명이 반사되는 한강을 등지고 선 채 사랑을 속삭이고 낭만을 노래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현은 토하고 싶을 지경이다. 여하튼 40대 여자는 물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구조대원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죽겠다고, 제발 죽게 내버려달라고 외치던 물밖에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해주었다면 다소나마 구조가 손쉬워질 텐데 여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는 악착같이 현의 몸에 들러붙었다. 악귀 같다고, 현은 생각했다. 죽겠다는 일념 하나로 감행한 검은 강으로의 투신과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구조대원의 위험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그 맹렬한 몸부림은 명백하게 모순적이면서도 똑같은 분량으로 절실했으므로, 현으로선 그중 무엇이 여자의 진심에 가까운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은데 왜 하필 남들 보란 듯이 한강을 택하는지도 현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은 투신자의 목을 물속으로 더 깊이 내리누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매번. 그 은밀한 상상을 애써 모른 척하며 여느 때처럼 온몸의 에너지가 소진될 정도로 힘겹게 여자를 보트 위로 올려놓자 잠시 넋이 빠진 모습으로 앉아 있던 여자는 이내 서럽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왜지? 안이 묻자 현은 한껏 느슨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자기를 살렸느냐는 거지, 왜긴.

긴 이야기를 마친 현은 격앙됐던 표정을 풀며 다시 맥주캔을 집어들었다. 적막이 흘렀다. 한모금에 맥주캔을 다 비운 현이 문득 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현의 얼굴은 공허해 보였다. 애초부터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던 이 세계의 동그란 구멍 같기도 했다. 홍이 죽었대. 안은 얼떨결에 말했다.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구멍에 대고 말한 것처럼 안은 자신의 목소리가 몇겹으로 파동치는 걸 느꼈다. 누구? 홍, 홍 말이야. 같은 산악써클 멤버였잖아, 몰라? 심문하듯 다그쳐 묻자 현은 그제야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 작게 신음했다. 근데, 홍이 왜? 그건 나도 몰라. 오늘 아침 홍의 오빠라는 사람한테서 연락이 왔어. 근데 걔가, 무슨 과였지? 약학과 아니었나? 그렇게 되묻는 현을 안은 미심쩍게 쳐다봤다. 안의 기억 속엔 산악써클 멤버였던 약대 출신 여학생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왜, 시답잖은 농담에도 곧잘 웃어주곤 하던 한학년 후배, 걔가 홍이었잖아. 덧붙여 설명하는 현에게 안은 미끼를 던지는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 혹시 칼을 무서워하던 그 후배? 맞아, 걔! 아, 생각난다. 북한산이었나, 도봉산이었나. 산 중턱에서 누가 사과 좀 깎으라고 시키니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과도를 쥐더니 바로 손가락 베어서 막 피 흘리고, 난리도 아니었잖냐. 현의 말을 듣는 동안 안은 터져나오려는 헛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어야 했다. 현이 지금 회상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안 자신이었다. 그 산은 관악산이었다고 정정해주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안은 침착하게 이어 말했다. 발꿈치가 매끈하고 분홍빛이었지, 홍 말이야. 그랬나? 하긴, 홍이 얼굴은 평범했지만 종아리에서 발꿈치까지의 라인은 봐줄 만했지. 여름에 홍이 짧은 치마 입고 나타나면 남자애들 여럿 침 흘리기도 했으니까. 야, 근데 너 별걸 다 기억한다. 말하며, 현은 가상의 여자가 눈앞에 나타나 하체를 다 보여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음흉하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안은 혼란스러웠다. 혹시 현의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니라 내 기억의 어느 부분이 오려진 건 아닐까. 어쩌면 나와 쌍생아처럼 닮은 홍은 정말로 실재했는지도 모르는 일이고, 내 성적 취향이란 것도 홍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의심이 시작되자 이상하게 몸이 간지러웠다. 마치 홍이라는 후배가 머릿속으로 스며들어와 스러진 성곽 같은 불완전한 기억의 테두리를 사뿐사뿐 걸어다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그녀는 정말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맨발이었고 분홍빛 발꿈치 외에는 모든 것이 희미했다. 안이 다가가려 할수록 그녀는 멀어져갔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소실점을 향해 나아가던 그녀는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바로 그때 그녀와 안 사이의 수평적 거리가 수직적 깊이로 뒤바뀌면서 안은 가파른 절벽 위에 서 있게 되었다. 기억과 기억의 틈새는 질리는 어둠뿐,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기에 두려웠다. 안은 공포에 가까운 현기증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현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입 안 역시 아주 까맸다. 그 안으로 깊이 손을 집어넣으면 한 인간의 뼈와 내장이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끔찍한 기억들이 밀봉된 차가운 자루 같은 게 만져질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저자는 누구인가. 저 지방덩어리 사내가 내가 안다고 여겨왔던 현이 맞는 것일까. 안은 현에게 홍에 대해 물은 것을, 아니 그를 찾아온 것 자체를 후회했지만 이내 그 후회조차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은 벗어놓은 재킷과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어서 장례식장에 가서 홍의 영정사진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부지런히 이동해야 보통 때의 취침시간인 자정까지 귀가할 수 있을 터였다. 어, 가게? 현이 안을 따라 일어나며 물었다. 장례식장에 가봐야지. 너도…… 갈래? 나? 나야 홍과는 친분도 없었고 연락도 못 받았는걸. 납작한 뒤통수를 긁적이며 뻔한 대답을 내놓는 현에게 안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현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혼자 가기 멋쩍으면 민을 데려가지그래? 등뒤에서 현이 말했다. 민이야 홍과는 절친이었으니 분명 갈 텐데 말이야. 민? 민이 저 아래 지하철역 앞 사거리에서 약국 하잖아. 야, 근데 걔는 어쩜 그렇게 여전히 촌스럽냐. 아스피린 사러 우연히 그 약국 들렀다가 바로 알아봤다, 내가. 수다쟁이인 것도 그대로고 말이야. 날 붙들고 한시간이나 수다를 떨더라니까, 10년 만에 만났으면서! 민은 또 누구인가. 안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이상 그 무엇도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참, 너, 조심해라. 현관문을 나선 뒤 구두를 고쳐신는데 현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두 귀를 스쳤다. 뒤를 돌아봤지만 그새 쎈서등이 꺼져 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도 아까 봤잖아, 요즘 서울이 어떤 덴지. 되도록 혼자 다니지 말고. 개떼…… 안이 속삭였다. 뭐? 개떼 같은 그 자식들 말하는 거야? 그래, 개떼, 정말 개떼인지도 모르지. 현은 무심하게 말했고 안은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현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쎈서등이 켜졌다. 주황의 조명 속에 드러나는 현의 얼굴은 어쩐지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쎈서등이 다시 꺼지자 안은 현이 정말 거기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순간 찰칵, 현관문은 서늘한 금속음을 내며 닫혔다.

 

*

 

홍요? 홍이라…… 아, 홍요?

맞아요, 저와는 Y대 동창이에요. 고등학교도 같이 다녔고요. 근데 뭘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홍은 약학과가 아니라 화학과 학생이었어요. 그리고 전 산악써클에 가입한 적이 없고요. 저는 등산이라면 질색인 사람인걸요. 그러고 보니 홍은 산을 좋아했던 게 기억나네요. 고등학교 때 학교 뒤편에 제법 큰 야산이 있었는데 가슴이 답답하면 곧잘 그 산에 올라가곤 했죠. 그것도 혼자서 말이에요. 걘 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홍이 산악써클에서 활동했다는 건 처음 듣는데요? 하긴, 어떤 일이 있은 후로는 우리는 서로에게 전화조차 안했으니까 내가 걔 써클을 모르는 건 당연하달 수도 있겠네요. 홍과 멀어진 계기요? 그 일이 뭐냐면…… 하, 근데 10년도 더 지난 얘기를 막상 하려니까 좀 쑥스럽네요. 돌아보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란 생각도 들고요.

그러니까 그게……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을 거예요. 홍이 갑자기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됐다고 전화로 알려온 적이 있죠. 난 정말 서운했어요. 비상금을 탈탈 털어 달러로 환전해서 걔 손에 쥐여주며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였다니까요. 근데 다음 학기에 학교식당에서 홍을 본 거 있죠? 홍은 날 못 봤지만 난 봤죠. 그후에도 캠퍼스 구석구석에서 자주 그앨 목격했어요. 화가 났다기보단 어이가 없더군요. 절교의 방식치고는 너무 유치해서 상대도 하기 싫었죠. 솔직히 난 걔한테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다고요. 실은 지금도 몰라요. 아무튼 그 일 이후로 저 역시 홍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쳐도 못 본 척했어요. 졸업할 때까지, 아니 그후에도요. 현 선배요? 현 선배야 제가 수강하던 수영과목 조교여서 알게 됐죠. 네에? 현 선배가 홍과 내가 절친이라고 했다고요? 하긴, 현 선배는 그애랑 내가 멀어진 과정을 모를 테니 그리 착각할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현 선배한테 홍을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저였으니까요. 홍과 내가 교내에서 얘기하는 걸 보고, 물론 그땐 멀어지기 전이었죠, 현 선배가 같이 술 좀 마시자고 몇번이나 졸랐거든요. 홍한테는 애인이 있다고 밝혔는데도 말이에요.

근데 참 신기하네요. 그러지 않아도 오늘 하루 종일 홍이 생각났는데…… 이 잡지 때문이었나봐요. 제가 즐겨 보는 잡진데, 여기 이 사람 보이죠? J구에 자기 이름으로 사무실을 열었다는 인권변호사, 이 사람이 바로 홍의 애인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했어요, 얘네 커플. 둘 다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출중하고 집안도 부유했으니까요. 일종의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나저나 홍에 대해서는 왜 물으시는 건가요? 혹시 형사세요? 아님, 흥신소 직원? 홍이 무슨 사기 사건에라도 휘말렸나요? 설마 불륜은 아니겠죠? 네? 홍이…… 홍이 죽었다고요?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홍이 뾰족한 걸 병적으로 무서워했느냐니, 그건 또 무슨 말이세요? 어쩌자고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말만 하느냐고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해해주세요. 근데요, 홍은 아무런 이상이 없는 아이였어요. 건강했죠. 그래요, 걘 늘 건강했어요, 몸도 정신도 다.

저는 좀, 앉아 있을게요.

그놈도 이 사실을 알고 있겠죠? 하긴, 그놈은 홍이 죽었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위인이긴 하지.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동창이니까 홍의 소식을 전해듣긴 했어요. 그 자식이 홍한테 한 짓거리도 다 알고 있었다고요. 정말 입에 담기도 불쾌한 일화가 한두개가 아니더군요. 뭐, 인권변호사? 인권 좋아하시네, 파렴치한 이중인격자 주제에!

홍의 사진요? 우리가 무슨 애틋한 사이였다고 내가 걔 사진을 갖고 있겠어요. 장례식장엔, 글쎄, 아무래도 전…… 못 갈 것 같아요.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준비도 못했고 내가 가봤자 홍은, 아니 홍의 영혼은 날 불편해할 텐데요, 뭐. 저 대신 조의금이나 좀 부탁드려요. 여기요. 봉투는 알아서, 예, 예.

근데요,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어디가 좀 불편하세요? 아니,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요.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 혹시 이 약요, 한알 드셔보시지 않을래요? 저도 가끔 먹는 항불안젠데,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을 때 확실히 도움이 되거든요. 약사는 이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처방전이 필요한 약도 그냥 먹을 수 있다는 거. 물론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빼돌려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요. 정말, 필요 없으세요? 이거 구하기 힘든 약인데…… 약을 잘 모르시는구나. 어떤 약은요, 사람 같아요.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고 게다가 말도 없는 사람. 그래서 위로를 주면서도 생색내는 법이 없죠. 진정한 친구처럼요. 아, 이런, 제가 괜한 얘길 한 것 같네요. 예, 어서 가세요, 어서, 빈소가 문을 닫기 전에. 맞다, 빈소는 밤새 문을 열어놓지. 하하, 내가 이렇게 맹하다니까. 참, 밤길 조심하시고요.

알다시피, 요즘 서울이 그렇잖아요.

 

*

 

약국을 나온 안은 몇발자국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안에게 주려 했던 알약 하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민이 마침 고개를 들면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안이 먼저 가볍게 목례를 했지만 그녀는 인사도 받지 않은 채 그저 뚫어지게 안을 건너다봤고, 손안의 알약을 주저없이 입안으로 털어넣으면서도 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안이 건조하게 웃자 민의 입가도 부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렇게 잠시,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차고 쓰게 웃었다. 약 때문인지 민의 눈동자는 흐릿해 보였고 텅 빈 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항불안제로 제거되지 않는 불안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더 불안하다는 듯이. 안은 아침에 복용한 둥글고 작은 알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알약은 지금도 치유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몸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터였다. 날 닮은 건 홍이 아니라 민일지도 모르겠군. 안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전, 상대방이 아니라 약국 유리에 비친 각자의 희미한 씰루엣을 건너다보며 조소하듯 웃었던 걸까. 안은 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섰다. 도로 쪽으로 걸어가 택시를 잡을 때까지 안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목적지를 묻는 기사에게 안은 K구 대신 J구를 말했다. 민의 말대로 빈소는 밤새 문을 열어놓는 곳이니 잠시 J구에 들러 홍의 옛 애인을 만난 후에 출발한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변호사라면 홍의 사진 한장 정도는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택시 안에서 안은 가슴이 뛰었다.

택시에서 내린 뒤엔 휴대폰의 길찾기 프로그램을 실행해놓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안은 휴대폰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변호사 사무실은 안이 이주에 한번씩 상담을 받는 담당의의 진료실과 불과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이다. 담당의와 그의 진료실을 떠올리자 안은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고, 그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진료실에 찾아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하면 그는 분명 반갑게 맞아줄 터였다. 어쩌면 가볍게 술 한잔을 마시며 오랜 친구처럼 다정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담당의의 진료실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던 안은 돌연 제자리에 멈춰섰다. 돌이켜보니 진료시간이 아닌 때에 담당의를 만난 적이 없었고, 더욱이 안이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그의 직업이 의사라는 것뿐이었다. 이 늦은 밤에 담당의와 진료실이 아닌 곳에서 술을 마시는 상황이 불가능할 건 없겠지만 그 술자리는 지루하고 어색할 게 뻔했다. 안은 돌아섰다. 걸음이 빨라졌다. 어차피 이틀 후면 담당의를 만나 이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 조급해할 이유가 없다고 안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변호사 사무실은 제법 현대적인 건물의 9층에 자리하고 있었다. 9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마침 사무실을 막 나서는 변호사를 안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 애매하게 말을 붙이자 안을 지나쳐가던 변호사가 천천히 돌아섰다. 저요? 저, 혹시 저쪽 사무실에서 일 보시는 변호사분 아니신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아, 법률상담 받으러 오셨군요. 근데 제가 지금 급히 갈 곳이 있어서요. 내일 다시 오시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변호사는 의아하다는 듯 안을 쳐다봤고, 안은 홍에 대한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꺼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변호사는 안처럼 검은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가 홍의 빈소로 가는 길일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닌 셈이다. 안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저, 홍이라고 아시죠? Y대 화학과를 나온. 예? 예. 근데, 누구시죠? 홍의 동창한테서 들었습니다, 홍과 각별한 관계였다고. 변호사가 한발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경계의 빛을 띠었으므로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긴 했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안은 잘 알고 있었다. 대체 누구시죠? 누군데 제 아내를 찾습니까? 아내……라고요? 그러니까 호, 홍이 당신의 혀, 현재 아내라고요? 그렇다니까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그럼 홍이…… 사, 살아 있다는 거, 겁니까? 뭐요? 변호사의 눈빛이 싸늘하게 안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훑기 시작했다. 당신 뭔데 남의 아내가 살아 있느냐니 하는 괴상한 질문을 하는 거야? 진심으로 화가 난 듯한 변호사를 보며 안은 굵은 침을 크게 한번 삼켰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또다시 말을 더듬는다면 모자란 사람 취급만 받다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이 혼란을 그대로 떠안고 돌아서야 할 터였다. 실은 오늘 아침에 홍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저는 홍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Y대 산악써클에서 활동했다고,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홍의 오빠라는 사람이 말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이봐요, 뭘 잘못 알고 온 게 분명하군. 산악써클이라니. 아내는 나와 같은 봉사 동아리 멤버였소. 우리는 그곳에서 만났고요. 그럼,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게 아니란 겁니까? 아니, 이자가 아까부터 왜 되도 않는 소리야! 여하튼 죽었다는 그 홍은 딴 데 가서 알아보슈. 난 지금 살아 있는 내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말이오. 변호사는 홱 돌아섰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가는 변호사를, 안은 쫓기 시작했다. 저기요! 또 뭡니까? 혹시 아내분 사진을 갖고 있다면 좀 보여줄 수 있습니까? 사진이 없다면 지금 가시는 약속장소에 제가 잠시 따라가면 안될까요? 아내분 얼굴만 확인하면 됩니다. 뭐야? 저는 단지, 이 상황이 납득이 안돼서…… 변호사가 돌연 안의 멱살을 잡더니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당신 상황이 뭔지는 내 알 바 아냐. 근데 이 자식, 너 누구야? 누가 널 고용했어? 경찰이야? 검찰이야? 강 변호사가 지 와이프 때린다는 제보 들어왔으니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오라고 시켰나, 어? 변호사의 얼굴은 적의로 붉게 물들어갔고 목소리는 빈 복도에 울릴 만큼 커지고 있었지만 안은 잔잔한 물속에서 변호사를 올려다보고 있는 듯 눈앞은 뿌옇고 두 귀는 먹먹했다. 저 사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면 난 거짓이겠지. 하지만 반대로 저 사내가 거짓을 말하는 거라 해도 난 진실이 아니라 허상이 될 뿐이란 게 재미있군. 생각하며, 안은 두 손으로 변호사의 손목을 잡고는 힘껏 뿌리쳤다. 안의 행동에 놀랐는지 변호사는 급히 뒤로 물러났다. 거짓이나 허상만을 반사하는 혼탁한 물에 잠긴 쪽은 안이 아니라 변호사라는 듯 그에게서는 이내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안은 설명할 길 없는 무력감에 젖어들었다. 일직선의 긴 복도가, 아니 오늘 하루 걸어온 모든 길들이 미로처럼 느껴졌고 지금껏 출구의 위치가 아니라 출구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짓 실타래를 쫓아온 기분이었다. 또다른 누군가의 미로 안에서는 자신 역시 이미 죽은 사람이거나 처음부터 없던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니 안은 이 미로 게임이 지겨워졌다. 이제 안에게 홍은 오늘 알게 된 홍, 그 홍이 진짜였고 전부였다. 홍은 말입니다. 안은 변호사를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별것도 아닌 말에도 잘 웃어주고, 과도 하나 제대로 못 쥘 정도로 겁도 많던 후배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산을 좋아했고 미래의 변호사와 연애했다가 호되게 실연을 당하기도 했죠. 그리고 홍은, 죽었습니다, 어젯밤에. 말을 마친 후 안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바로하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갔다.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고소와 소송 등의 단어가 섞인 변호사의 성난 말들이 쏟아져들어왔다. 이 미친 개새끼야! 변호사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홍의 부고를 들은 이후 처음으로, 안은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나서자 짙은 어둠 사이로 찬바람이 두 팔을 휘휘 내저으면서 달려들었다. 도로 쪽으로 서둘러 걷던 안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외로 틀었다. 집요하게 한곳만 바라보는 동안 두 눈이 시리듯 아파왔다.

리모컨 차키를 누르며 고급스러운 검은색 쎄단 쪽으로 걸어가는 담당의를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따라가는 중이었다. 여학생은 지나치게 타이트한 교복치마 때문인지 뒤뚱뒤뚱 걷고 있었고 걸음도 자꾸 뒤처졌다. 담당의는 잠시 여학생을 기다리고 있다가 이내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쎄단 조수석 쪽으로 이끌었다. 담당의는 단신에 왜소한 체격이었고, 그래서인지 여학생의 보호자가 아니라 그녀에게 붙어 있는 정령처럼 보였다. 혹은, 악귀처럼. 차문을 열고 조수석으로 몸을 숙여 들어가려는 여학생의 엉덩이를 담당의가 거칠게 쓰다듬자 여학생이 뒤를 돌아보며 백치처럼 웃었다. 그 순간 담당의는 무슨 이유에선지 조수석 문을 세게 닫았고 그 바람에 여학생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는 뭉텅 잘려나갔다. 쌍년. 초겨울의 대기 속에서 순식간에 결빙된 담당의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날아와 안의 뺨을 세게 쳤다. 통증은 없었지만 안은 저도 모르게 짧게 신음했다. 운전석 쪽으로 걸으며 주위를 살피던 담당의는 그제야 안을 발견하고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당황한 표정일 거라고 안은 믿고 싶었지만 그 믿음은 어둠 속에 있을 뿐이었다. 알 수 없어 불안하긴 하지만 알지 않아도 되기에 편하기도 한 그런 어둠. 담당의의 진료실을 처음으로 찾아간 날이 저절로 떠올랐다. 담당의는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의 원인을 알고 싶어했고 안은 상담 없이 약만 처방받으려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은 분명 환자분만의 잘못은 아니었을 겁니다. 처방전을 쓰며 담당의는 덤덤히 말했다. 아마도 그는 의사로서 보편적인 수준의 조언을 해준 것이었겠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한시적으로만 약에 의존하려 했던 안은 그날 이후 부지런히 담당의를 만나러 갔다. 진료 시간을 어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마침 트럭 한대가 상향등을 밝히며 안과 담당의 곁을 지나갔다. 어둠이 걷힌 자리에서 안은 이제야 진짜 목이 죄어오는 고통을 느꼈다. 그런데, 저런 얼굴의 담당의를 나는 전에도 본 적이 있던가. 사람을 죽인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 않으냐는 듯 서늘하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왜 이렇게 낯익은 걸까.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여학생이 차창을 내리고는 담당의와 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담당의는 끝까지 인사 한마디 하지 않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시동이 걸린 쎄단은 곧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고 몇초 후엔 미등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틀 후면. 안은 중얼거렸다. 이틀 후면, 나는 이 모든 걸 당신에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안은 대로로 나가 택시를 잡은 뒤 뒷좌석으로 들어가 몸을 깊이 기대었다. 피곤했다. 시간은 어느새 밤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목적지를 묻는 기사에게 안은 K구에 있는 S병원이라고 말하고는 이내 잠이 들었다.

 

 

3

 

소, 손님, 보셨습니까?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안은 잠에서 깼다. 꿈은 꾸지 않았다. 거리에서 보았던 담당의의 얼굴도 기대와 달리 기억 속에서 온전했다. 손님! 안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아서인지 택시기사가 한번 더 목소리를 높였다. 대체 뭘 봤느냐는 겁니까? 안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방금, 방금 지나온 공터에서 그 광경을 못 봤습니까? 저는 이제 막 깨서요. 그놈들입니다. 그놈들이라뇨? 손님은 뉴스도 안 봅니까? 그 연쇄살인범들 말입니다. 또 그 지겨운 연쇄살인범 얘기였다. 개새끼들, 정말 끈질기군. 안은 창밖을 건성으로 훑어보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택시가 통과하는 곳은 여기저기 땅이 파헤쳐지고 건물들이 무너진 한적한 골목이긴 했지만 그래도 몇몇 창문엔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동네 공터에서 살인이라니, 안은 기사의 말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님이 뭘 잘못 본 건 아닐까요? 아닙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각목이랑 쇠파이프로, 뉴스대로 말입니다, 놈들이 누군가를 마구잡이로 패고 있었단 말입니다! 안은 룸미러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안의 반응을 살피던 기사의 형형한 눈동자가 그 룸미러 위를 할퀴듯 스치고 갔다. 다시 거길 지나갈 테니 이번엔 두 눈 크게 뜨고 보십시오! 안이 말릴 새도 없이 택시는 급회전을 했고, 그 탓에 안의 몸은 오른쪽으로 눕듯 기울어졌다. 택시는 금세 멈춰섰다. 저깁니다. 기사가 숨죽인 채 말했다. 안은 창가에 바짝 붙어앉으며 기사의 주문대로 눈을 크게 떠보았다. 20여 미터 떨어진 공터에 몇명의 남자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 있는 게 보이긴 했지만 주변에 조명이 없어서인지 그들이 뭘 하는지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고, 구타의 소음과 신음소리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기사가 착각한 게 분명해 보였지만 안은 더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뭔 사고가 났는지 교통정체가 심해서 나름 지름길 찾겠다고 이 동네로 들어서지 않았겠습니까? 근데 저놈들을 딱 목격하게 될 줄이야! 기사는 마치 보고 싶었던 경기 관람권을 손에 넣은 소년처럼 천진하게 말했다. 그 순간, 안은 깨질 듯 머리가 아파오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손님, 왜 그러십니까? 토할 것 같아요. 잠시 내리겠습니다. 예? 연쇄살인범들이 바로 저기 있는데 차문을 열겠다고요? 미쳤습니까? 안은 기사의 말을 무시한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급하게 뒷문을 열고 나갔다. 쭈그리고 앉아 속을 게워내는데 눈앞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가방이었다. 기사는 창밖으로 안의 가방을 내던지고는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멀어져가는 택시를 보고 나서야 주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남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안의 머리를 둔중하게 내리쳤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아니, 안은 그렇게 느꼈다. 뒤를 돌아볼 자신은 없었다. 잠자코 웅크린 채 숨을 고르고 있던 안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가방도 챙기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등 뒤의 발소리도 간격이 짧아졌고 또 빨라졌다. 한명 같기도 했고 여러명 같기도 했으며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 같기도 했다. 안은 사력을 다해 뛰고 또 뛰었지만 발소리는 계속 안을 따라왔고, 행인도, 자동차도, 불을 켠 상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리막길이 시작된 부근에서 안은 넘어졌고 그대로 몇번인가 굴렀다. 바지는 찢어졌고 손바닥에선 피가 났으며 허리는 뻐근했다. 이제 발소리는 바로 귓등 뒤에 있는 듯했다. 그 소리는 미끌미끌한 침을 질질 흘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로 안의 귀를 덥석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살인중독자의 핏발 선 눈동자로 되돌아왔다. 안은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기어가고 있는데 여자의 날 선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사색이 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안은 그제야 턱을 덜덜 떨며 조심조심 뒤를 돌아봤다. 지나온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안을 지나쳐갔고 안은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절뚝이며 몇발자국 떼지도 않았는데 믿을 수 없게도 8차선 대로가 나왔다. 이곳은 어디일까. 어느 방향으로 가야 K구에 있는 S병원에 갈 수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안은 무작정 앞만 보며 걸었다. 자정이 다 된 거리는 조용했고 밤하늘은 낮게 내려와 있었다. 팔을 쭉 뻗으면 손끝에 닿을 것처럼 아주 가깝게. 안은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상 끝에 도달하여 하늘을 찢고 그 너머로 사라진 방랑자는 어떻게 됐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인생의 모든 진리를 터득한 현자가 되었을 수도 있고, 새까만 어둠 속에서 눈이 먼 것과 다를 바 없이 매 순간을 영원처럼 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의 삶이었든 방랑자의 가슴속에 쌓인 고통과 후회의 총량은 똑같았을 거라고 안은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릴 것이고 안은 홍의 부고를 들으며 잠에서 깰 터였다. 아직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잠시 후, 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