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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모험하는 언어와 서정시

하재연과 김중일의 새 시집에 대해

 

 

황현산 黃鉉産

문학평론가, 고려대 명예교수. 저서로 『얼굴 없는 희망』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등이 있음. dasungumi@gmail.com

 

 

‘미래파’가 등장한 것은 지난 2000년대 중반이었지만, 그 선언이 발표된 것도 아니었고 그 윤곽이 정확하게 그려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어떤 유파가 결성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한번의 명명이 있었을 뿐인데, 그 일은 작은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권혁웅(權赫雄)의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문예중앙』 2005년 봄호)은 지극히 전략적인 글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자기 세대 젊은 시인들이 시쓰기에 바치는 열정과 그 독특한 언어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그 노력과 결실이 우리 시에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것이라고까지 말하였지만, 정작 ‘미래파’라는 말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교묘하게 비워두었다. 이 때문에 공공연히 미래파를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름에 연루될 만한 여러 젊은 시인들은 거의 모두 그 이름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거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시전문지에서 ‘미래파 특집’ 같은 것을 꾸밀 때에도, 경향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젊은 시인들이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시를 보냈다. 대부분 70년대 전반기에 태어나 저 불행했던 70년대와 80년대의 처절한 전투 속에 뛰어들거나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확인할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이 세대는, 이 명명 뒤에서 자신의 문학적 모험을 차별화하면서도 거기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이 여유는 또 하나의 여유로 이어졌다. 그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문화적・정치적 환경에서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벌여야 하는 자신들의 언어적 모험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오랜 대립 구도를 넘어서서 양쪽의 외연을 넓히고 그 내용을 확충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했다. ‘창비파’나 ‘문지파’가 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튼튼한 문학적 입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용기도 거기서 생겨났다. 이 점에서 미래파의 명명은 유파의 성립이 아니라 그 해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시가 아무개 시인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는 말은 전략적인 표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지만, 미래파 이후 한국 시단의 지형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시와 비정치적 시의 구분을 무효화한 용산의 젊은 시인들이나, 바로 그들에게서 제기된 ‘문학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가 그 달라진 지형을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내용 없는 명명이라도 이름은 내용을 만든다. 미래파라고 지목된 시인들은 미래파가 되려고 애썼다. 그 이름을 굴레로 여기는 시인들 곁에는 그 이름을 부적으로 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현실도 미래도 믿지 않으며, 결국은 시조차도 믿지 않는 이 알리바이의 부적은 현실을 현실 그대로 남겨놓을 뿐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할 현실로 만들지 않는다. 시의 새로운 언어, 또는 모험하는 언어가 늘 우연에 기대를 거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우연이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우연이 경이에 이를 때, 더 많은 우연은 그 지리멸렬한 상태를 끝내 벗어버리지 못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 지닌 온갖 가능성에 대한 시인의 믿음이며, 언어가 현실과 만나는 온갖 층위와 다양한 접점에 대한 그의 끈질긴 탐구일 터인데, 결국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나는 올해 출간된 젊은 시인들의 여러 시집 가운데 완전히 다른 외양을 지닌 두 시집, 하재연(河在姸)의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문학과지성사 2012)과 김중일(金重一)의 『아무튼 씨 미안해요』(창비 2012)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는데, 저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예증을 찾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 믿음이 어떻게 다른 힘으로 유지되고 그 끈질긴 탐구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말하고 싶지만, 그것도 아마 에둘러서 말하게 될 터이다.

 

 

하재연의 반(反)성장서사

 

제법 오래전부터 어떤 비평가들이나 시인들은 본격적인 평문에서건 심사소감 같은 짧은 글에서건, 젊은 시인들의 혼란스럽고 갈피 없는 언어를 질타하는 말로 그 서두를 삼는 것이 현명하고 온당한 일이라고 여겼다. 힘이 실린 말과 무기력한 말이 모두 구분 없이 들리는 귀가 문제라면 하재연의 새 시집이 그 훈련용으로 적합할 것도 같다. 하재연이 시에서 쓰는 문장은 짧고 명료하며, 사태의 서술에 낭비되는 말이 없을뿐더러 화자의 감정이나 의견이 덧붙는 일도 드물어 이른바 ‘기술의 영도(零)’에 가까워진 글의 모범적인 예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서술의 연결고리도 사라진다. 사태를 전하는 문장이 명료하다고 해서 그 사태 자체가 늘 명료한 것은 아니다. 한 사태의 옆과 뒤에 나란히 서 있거나 때로는 그 사태 내부에 잠복해 있는 또 하나의 사태가 서술될 때, 게다가 연이은 사태들이 서로를 지시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닐 때, 독서가 유일하게 의지해야 할 것은 화자의 반응이나 의견일 터인데, 그 사태들과의 관계에서 화자의 거리는 모호하고 화자 자신이 제가 화자인 것조차 자주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의 느와르」에서 시인은 “룰을 이해하기 시작하면/불공평한 것들이 퍼즐처럼/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그 룰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책임을 시인에게 물어서는 안될 이유가 있다. 「콜타르」에서 시인은 길거리에 오래 서 있다보니 “서 있던 발바닥이 나를 까먹고/누군가를 대신 데려왔다”고 쓴다. 망각된 ‘내’가 질 수 없는 책임을 ‘누군가’에게 대신 지게 할 수도 없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그 해결이 아마도 이 체험 주체의 모호함에 걸려 있기도 하겠다.

시집 전체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할뿐더러 가장 눈에 띄는 시들은 존재의 분열과 훼손, 그리고 망실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놀이동산」에서 벌써 어른이 된 화자는, 다시 말해서 “자란 것들”에 속하는 화자는 “자라지 않고 남은 것들”에 해당하는 “단발머리 아이”를 만나 “네 신발은 어디에 두었니?”라고 묻는다. 그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은 물론 어른이 된 화자다. 그러나 아이는 “이상하게도 나와 하나 닮지 않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본다. 「레고 블록」은 “오늘은 배가 아프다./가운데 조각을 하나 빼내야지”로 시작한다. 배가 아픈 날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는 대신, 장난감 블록으로 짓고 있던 어떤 풍경에서 “가운데 조각” 하나를 들어낸다는 것은 한 어린이가 생각해낸 주술일까. 아이는 이어서 개도 만들고 집도 짓고 창문도 뚫고, 거의 세상 하나를 만들었지만 “처음의 한조각은 어디 있을까?” 하고 마침내 묻게 된다. 어느날의 아픔으로 세상의 중심이 그렇게 상실되었다. 「꼬리 달린 이야기들」에서는 “사촌과 이모와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이야기로 “메리-고-라운드”를 돌리는데, 화자는 “그쪽 말을 다 배웠다” 싶은 순간에 제 “머릿속에서 달아난 이야기”가 어디로 간 것인지 찾고 있다. 거꾸로 「인어 이야기 2」에서 시인은 제 목소리를 “대기에 가까워”질 때까지 밀고 나간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다른 상실이 있다. 목소리는 바깥의 목소리와 동화하며 하늘로 떠오르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땅에는 “내가 없”다. 저 안데르센의 인어처럼 그도 그의 목소리와 함께 거품이 되고 말았다. 「도망자」에서 화자는 방에서 방으로, 또는 “우주라는 집”을 이루는 “단 한개의 방들”에서 저 자신을 천천히 풀어헤치면서, “영원히 닫힌 방문” 또는 “영원히 열린 창문”을 통해 어떤 것을, 실은 저 자신을 찾아간다. 그러나 찾는 그것은 “당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뱉어내는 담배연기의 씰루엣으로만 예감된다. 한쪽에서 짜고 있다고 생각되는 존재의 피륙이 다른 한쪽에서 같은 속도로 풀려 도망친다.

「그림일기」에는 이 상실의 간략한 역사라고 불러야 할 것이 있다. 전문을 적는다.

 

맨발로 공중 화장실을 서성이는

나를 못 본 척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등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다.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마신 물이

흘러나와 꿈속을 적셨다.

 

그래서

할머니의 장례식 사진은

아주 흐리고 얇았다.

 

할머니가 키운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하늘로 하늘로만 자랐다.

 

내가 신은 양말이 짝짝이라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 죽은 거야,

아무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와 아이의 유령은 분리되어 있다. 아마도 유령은 “등에 멘 가방”을 영원히 내려놓지 못할 것이며,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영원히 먹지 못할 것이다. ‘그림일기’를 쓰는 쪽은 아이지만, 또한 아이의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가 “신은 양말이 짝짝이”여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거들떠보기 이전에 유령인 아이는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와 유령의 분리, 또는 겹침은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돌봐주는 손길이 없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분리된 자아를 종합하여 바라볼 줄 아는 유일한 시선이 사라진 것이다. 아이는 그날 죽었지만, “그날 죽은 거야”라고 말해줄 입도 물론 사라졌다. 아이는 콩나물처럼 성장할 뿐인데 그것은 성장이 아니다. 죽은 아이는 분리될 뿐 성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하재연의 새 시집은 반()성장서사라고 부를 만도 하다.

그러나 분리되고 망실된 것들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것들」은 “뜨거운 다리미”가 지나간 “하얀 셔츠에는 자국이” 남는 것처럼, “열여섯살에 팔아 치운 우드피아노가 어디선가”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고 “내가 좋아하는 발목은/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모든 최소한의 고요를 위해”. 이 고요는 분리된 존재들 사이의 거리이다. 분리되어 망실된 것들은 내가 간여할 수 없는 곳에서, 그 음악이 들리지 않고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악과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잔여물들」에서는 잔여물의 하나인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서/아무렇게나 자란 열매의 씨가/나의 소식이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진다”. 어떤 억압도 없이 자유롭게 “아무렇게나 자란 열매”에게는 더이상 분열이 없을 것이다. 사라진 것은 망실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완전하게 성장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지구의 뒷면’에서만 성장한다. 「지구의 뒷면」은 ‘그것은 당신의 사정’이라고 늘 면박받는 사소한 진실을 지닌 존재들, “아주 작은 고민거리를 가진 생물들이 모여서” 나라 하나를 구성하는 꿈을 소개한다. 그 나라는 여러 층위의 억압 아래 없는 것으로 치부된 자아의 크고작은 덩어리들이 침묵 속에서 말을 하는 세계, 하재연이 탐구하는 시의 세계이다. 권혁웅은 이 시집에 붙인 해설의 끝부분에 이렇게 썼다. “이 잔여물들은 기호의 무능을 표시하고, 흔적이나 사라짐으로 현존을 표시하며, 있는 그대로의 타자가 우리의 현존에 구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표시한다. 상징화, 기표화가 불가능한 지점이 세계의 모든 해변이다.” 그리고 맨 끝에 “이제 세계의 모든 해변에서 상륙작전이 시작된다”고 선언했다. 이 명징하면서도 과격한 말을 좀더 온건하게 바꾸자면, 그러니까 보수적인 인생론의 형식을 빌리자면, 닳아지고 파편화하여 졸아들기만 하는 아이가 그 닳아진 것, 조각난 것, 졸아든 것을 모두 끌어안고, 저 자신인 아이를 문득 끌어안고 어머니로 탄생한다는 뜻이 될 것 같다. 하재연은 어머니가 되고 죽은 할머니의 시선을 회복할 태세다.

끝으로 논리의 선에 집착한 나머지 언급하지 못한 하재연의 시 한편을 더 읽어보자. 두 연으로 되어 있는 「안녕, 드라큘라」는 그 두 연이 각기 “당신이 나를 당신의 안으로 들여보내준다면”과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준다면”으로 시작한다. 두번째 연만 적는다.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버리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연시다. 사랑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다만 이 고백을 듣는 상대방이 ‘드라큘라’인 것이 문제다. 사랑은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전에 피를 말린다. 피를 말리는 것은 드라큘라의 일이다. “상징화, 기표화가 불가능한 지점”이 또 거기 있다. 시인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할 때도 제 존재를 분리한다.

 

 

김중일의 언어전쟁

 

내가 쓴 평문 「잘 표현된 불행」(『문예중앙』 2010년 겨울호)에는 김중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실은 그 제목을 결정할 때 나는 그의 시 「국경꽃집의 일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다급한 내용을 다급하게 쓴 글에서, 다급하게 인용하기에는 그 시가 너무 길었다. 이 시가 실린 그의 첫 시집 『국경꽃집』(창비 2007)을 읽은 독자들은 한 나라의 “포클레인에 힘없이 구겨지던”, 또 한 나라의 문턱에 서서 “두근거리며 온몸 구석구석 무수히 붉은 꽃을 매단 가지를 뻗어올린” 그 “한그루 국경꽃집”(「나는 국경꽃집이 되었다」)의 안부를 당연히 묻게 된다. 새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에서도 시인은 어떤 경계에(또는 경계들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무엇과 무엇의 경계인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첫 시집에 시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고 한다면, 새 시집은 시 쓰는 사람의 밤과 낮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할 터인데, 두 시집에 걸쳐 경계의 성격이 그만큼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모험하는 시쓰기건 온건한 시쓰기건 시쓰기는 늘 상상력의 경계와 말의 경계를 비롯한 온갖 것의 경계에 부딪치기 마련이지만, 진지하고 용감한 젊은 시인은 제 손으로 쓰는 시가 바로 그 시쓰기에 가장 나쁜 장벽이 되고 말았다고 고백하게도 된다. 그는 “무중력 속에서의 가벼운 핑퐁처럼 무한정 반복되는”(「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시집이 읽기에 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난해함의 실상과 효과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 한 구절을 벌써 인용했으니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자. 시집의 마지막 시이기도 한 이 시의 첫 연은 다음과 같다.

 

우연히

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

일만삼천사십번째로 간이 진료실을 방문했을 때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수련의의 피곤한 눈꺼풀을 열고 손 흔들었건만

내 손에 만져지고, 내 손을 붙잡아 흔드는 건

단지 비바람뿐이었습니다

 

우선 “일만삼천사십번째”는 ‘여러번째’라는 말의 시적 변형일 뿐이고, 화자가 앓고 있는 병이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이라는 점에 대한 암시일 뿐이니 크게 신경 쓸 것이 없다. “커튼”의 찢어짐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우연히” 제공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전망을 가리기도 하고 열어놓기도 하는 폭우가 커튼의 역할과 찢어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그런데 폭우의 다른 말인 “비바람”은 마지막 시구에서 거의 부정적으로 서술된다. 화자는 그의 병을 진단하고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련의”의 ‘손’을 만나려 했으나 비바람을 만날 뿐이었다. 이 폭우 또는 비바람은 책임질 사람도 없이 늘 반복해서 쏟아지는, “인류가 동시에 뱉어놓은 가래침” 같은 말들이며, “진료실의 두꺼운 전공서들”에서 빠져나와 “배고픈 환자처럼 식판을 들고 도열해 있”는 “활자들”임이 나중에 (물론 주의 깊은 독자에게) 밝혀진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는 문장은 괄호 안에 들어 있다. 그날 그는 새로운 탄생을 꿈꾸었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한 괄호 안의 잠재현실이 되었다. 이 폭우는 시의 중간을 넘어서면 “폭설”로 바뀐다. 천지를 눈으로 가득 채워 수련의와 화자가 있는 진료실을 “심해 속의 기포처럼/우주 속의 작은 공기주머니처럼/한 점 공기보다 작은 소형 우주선처럼 먼지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떠돌게 하는 이 폭설은 물론 이 세상에 미만(彌滿)한 폭력과 억압이다. 김중일은 시를 이렇게 끝맺는다.

 

이곳에선

물구나무를 선다면 당장이라도 하늘에 가득한 적설을 밟을 수 있습니다

여긴 희박하고 어둑하고 아늑하고 어지럽습니다

 

선생님, 멀미가 심합니다!

 

기적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적막

 

.

 

하늘은 눈으로 가득 차서 거꾸로 서면 발이 닿을 만큼 낮아져 있다. 삶은 오직 뚜껑 덮인 솥 안에서 영위된다. 그곳에서는 모든 열망을 포기해야 하기에 차라리 편안하다. 그러나 어지럽다. 화자도 모든 사람과 똑같이 어지럽고 멀미를 느끼기에 이미 치료된 것이나 같다. 무슨 말이 뒤따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내린다. 아니, 막은 처음부터 내려져 있다. 우연히 커튼이 찢어지는 일도 없고 폭우조차도 없다.

언어의 무능인 “폭우”는 세상의 억압과 폭력인 “폭설”을 불러오고 또 그것을 용인한다. 말에 모든 희망을 걸고, “가래침”의 언어보다는 더 나은 말을 만나기 위해 모든 말들과 그 모든 조짐에 기를 쓰고 덤벼들어야 할 이유도 거기 있고, 낡은 말들을 증오에 가깝도록 불신해야 할 이유도 거기 있다. 그러나 벽을 뚫기 위해 모색 끝에 만나는 말들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벽이 되고 만다. 「완벽한 원」에서 완벽한 원을 그리려는 화자는 고삐에 매여 “밤마다 마당 한가운데 원을” 그리는 “측량사이자 마을의 촌로인 염소”와 함께 손을 맞잡고 “서로를 빙글빙글 돌린다 고요하고 팽팽하게”. 그리고 “그 파지들로 밤의 마당은 온통 하얗다”. 시인은 완벽한 원 대신 “폐곡선”을 그리는 데서 그치고, 염소는 제가 그리는 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서울 2009’라는 부제가 붙은 두편의 시 「구름의 곁」과 「잘 지내고 있어요」는 20091월의 용산참사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모두 소년이 등장한다. 앞의 시에서 “지상도 천상도 아닌 옥상은 끓는 피죽처럼 뜨겁게 용솟음치고, 소년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태운 열기구가 구름의 가장 근접한 곁으로 멀어져갈 시각”, 소년은 시험지의 “틀린 정답을 아흔아홉번 썼고, 한번을 마저 쓰다가 잠들어버렸다”. 뒤의 시에서 화자 소년은 “무릎을 인형처럼” 껴안아 “심장에 파묻”으며 “몇바퀴 구르면 어제로도 돌아갈 수 있”게 “둥글어지길 즐기는 아이”가 된다. 한 시대의 비극을 한 소년의 감정에 의탁할 수 없다는 생각에만 집착한다면 소년의 등장은 이 두 시의 약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년이 미처 다 쓰지 못한 “틀린 정답”은 시인이 제 언어의 결핍을 탓해야 하는 한 시대의 비분일 것이며, 소년이 제 몸으로 만드는 원은 시인이 어떤 수단을 다해도 폐곡선에 그칠 뿐 이루지 못하는 그 완벽한 원일 것이다. 「구름의 곁」에는 불에 타 숨져가는 아버지의 말 가운데 “나는 결국 아들에게 수수께끼에 가까운 숙제만을 남겨주고 말았다”는 구절이 있다. 시인은 그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사람이 자신인 것을 안다. 시인은 “잠에서 깨면 바야흐로 점성술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라는 시구로 시를 끝내지만, 마지막까지 팔자소관에 넘겨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 언어의 운명인 것을 안다. 그는 언어의, 언어에 의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전쟁의 실제 내용은 번역이다. 형언할 수 없는 것 앞에서 ‘그것은 형언할 수 없다’는 말만 남겨놓고 돌아서는 것은 시가 아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것이 더구나 이 삶의 결론일 때, 그 결론이 없는 것처럼 입 다물고 거꾸로 그 밑에 웅크리고 들어갈 것인가. 비록 오차를 무릅쓰고라도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번역하려 하지 않는다면 시가 무슨 소용인가. 다음은 「거짓된 눈물의 역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잠보다 길고 어둡던 꿈에서 깨어났을 때

처음 맞닥뜨린, 내 옆에 모로 누운 허공의 어정쩡한 자세

나 어렸을 때 병이 깊어 복수 찬 배를 땅에 질질 끌며

마당 한바퀴 돌고, 집 버리고 나가 죽은

그 작던 강아지만한 눈물 한 방울이

오늘 밤 내 발등에 떨어져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따뜻하고 축축하게 삶은

작은 행주 같은 혀로 내 발등부터 나를 닦아낸다

먹고 살고 죽는 저 높은 식탁 위에 물얼룩처럼 묻은 나를

말끔하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나쁜 꿈에서 깨어나는 화자의 곁에 “어정쩡한 자세”로 누워 있는 “허공”은 거짓된 희망을 내내 눈물로 바꾸어줄 뿐인 ‘역사’이다. 어정쩡하게나마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이 역사는 그러나 힘이 없다. 그가 어린 날에 흘렸던 눈물조차 아직 씻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눈물이 되살아나 나를 씻는다. 나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 세상에서 씻어낸다. 역사가 허무에 떨어지니 그 역사에 모든 것을 바쳤던 나도 이렇게 세상에서 폐지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절망의 극단이다. 김중일은 제 형언할 수 없는 절망을 이렇게 번역한다. 그러나 그가 씻어져 사라지는 “먹고 살고 죽는 저 높은 식탁”은 그 높이에 의해 벌써 성스러운 제단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 번역을 만나 문득 깨어나는 정신들은 저 형언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물러서기를 그치고 이 성스러운 탁자를 둘러싸고 모여들지 않을 수 없다.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새로운 말로 번역한다는 것은 현실의 모든 모서리를 만지고 두드려보는 일과 같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아무튼 씨 미안해요」는 구성이 기이하다. 두 부분으로 나뉜 이 시에서 한 사냥꾼의 모험담인 ‘1’은 주인공의 의식을 통한 삼인칭 서사이며, ‘2’는 그 사냥꾼의 고백서사이다. ‘1’에서 사냥꾼은 자주 성공한다. 그때마다 “하얗게 저물어가는 새벽의 거대한 궁둥이를 향해 할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희미해져가는 어떤 희망에, 이를테면 역사적 희망에 자랑스럽게 보고할 말이 있다. 그는 사냥터인 초원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 그래서 누떼가 냇물을 건너는 것은 그의 손금을 건너는 것이나 같다. 그는 외팔이지만 집중력은 뛰어나다. “엽총을 단단히 틀어잡고, 숨을 멈추고…… 사실 엽총 따윈 없다”—다시 말해서 엽총을 겨누고 쏜다는 생각조차 없다. 그는 어둠을 죽이고 안개에 덮인 새벽에 안부를 전한다. 완전한 사냥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기도 하는 그는 늘 성공할 것인가. “아무튼 웃는다 아무튼 말한다”—그는 말에 의한, 말의 사냥꾼이다. 성공하건 실패하건 ‘아무튼’ 그는 말해야 한다. ‘2’에서 사냥꾼은 사냥이 금지된 코끼리를 한마리 쏘아 맞혔음을 고백한다. ‘아무튼’ 코끼리는 죽었고, 총알이 박힌 엉덩이에서는 자작나무가 한그루 자랐다. 벌써 사냥한 언어, 벌써 파악한 언어는 벌써 죽은 언어이거나 식물의 언어이다. ‘아무튼’ 그는 이 이상한 사냥감 앞에서 “엄청난 고독에 압도당”한다. 현실과 논리의 조건이 어찌되었건 ‘아무튼’ 포획한 언어들이 영원히 참담한 결과에 이를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불러내었던 “아무튼 씨”에게 정중하게 사과한다. 그러나 그가 또다시 사냥에 나갈 것이며, 또다시 “아무튼 씨”에게 협조를 구할 것이며, 또다시 사과할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조강석(趙强石)은 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렇게 썼다. “역사의 맨얼굴에 가위눌리는 대신, 굽은 등을 펼쳐 그것을 곧추세우겠다는 주의주의적 희망을 낙타의 길잡이 등불로 들어 보이는 대신, 우선 곱사등이의 허세를 간파하는 시간, 바로 하얀 자정이 아닌가.” 이 명석한 젊은 비평가의 말을 나는 다시 ‘주의주의적’으로 고쳐 써본다. 역사에 관해, 또는 역사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여기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김중일은 길을 막고 제자리에서 헛돌고 있는 말들을 헤치고, 밤을 새우며 모든 말의 모서리를 더듬어 말길을 트려고 애쓴다. 아마도 이런 말이 될 것 같다. 나는 김중일의 시를 읽으며 자주 놀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 따지기도 한다. 그 말길에 벌써 합류한 것이다.

 

하재연과 김중일의 시는 다른 여러 젊은 시인들의 시와 마찬가지로 읽기에 쉽지 않다. 운문으로 시를 쓰는 하재연의 난해성은 주로 생략어법에서 비롯한다. 설명해야 할 것을 설명하지 않기에 시구와 시구 사이에서 일상의 해묵은 현실이 갑자기 이상한 얼굴을 들고 일어선다. 시인은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묻는 듯 시침을 떼고 있다. 산문시에 익숙한 김중일의 난해성은 주로 알레고리에서부터 은유에 걸치는 복합적인 비유법의 사용에 있다. 이런 말이 그런 뜻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말의 가능성과 현실의 가능성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은 아니 정말 그런 뜻으로 말한 거냐고 묻고 싶은데 그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하던 말을 계속한다.

필경 어떤 사람들은 하재연을 두고 그 서술의 결핍에 대해서, 김중일을 두고 그 언어의 혼란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그리고 서정의 퇴조를 염려할 것이다. 그런데 저 근심 많은 사람들이 서정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려 하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적이 없다. 하재연과 김중일에게서, 그리고 그들 세대의 젊은 시인들에게서 자주 만나게 되는 어떤 체험들—정신이 어떤 감정을 타고 높이 약동하는 체험, 혹은 건조한 현실에서 몽상의 파도에 몸을 적시는 체험, 혹은 의식이 문득 놀라 솟구치는 한순간의 체험—이들 체험이 아니라면 서정을 달리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재연은 잘 정돈된 서정시인이며, 김중일은 힘이 넘치는 서정시인이다.

주제 또는 소재의 관점에서 볼 때, 하재연과 김중일은 젊은 세대 시인들의 양극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재연은 늘 저 자신이 살아온 삶과 언어의 관계에 주목하고, 김중일은 저를 둘러싼 세상과 싸우기 위해 언어와 싸운다. 하재연에게는 제 존재를 분리하여 삶의 온갖 지점에 내려보낸 외톨이 파견병들이 있다. 김중일에게는 현실과 언어의 접점에 숨겨놓은 복병의 군단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시대의 전위이며 언어의 전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젊은 시인들은 제가 전위인지 아닌지를, 제가 벌이는 것이 모험인지 아닌지를 옆 사람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전위가 되어 자신감 넘치게 모험하는 첫번째 세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