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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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吳銀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현대시』로 등단. wimwenders@naver.com

 

 

 

라이터1

 

 

순순히 단번에 불 켜지지 않는 라이터가

돈 끼호떼의 손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엄지를 뉘어

자신들의 지문이 안전한지 확인했다

 

돈 끼호떼가 담배를 무찌르기 위해

야심차게 라이터를 당겼을 때,

바닥에 닿기 직전의 별똥별처럼

사람들은 극도로 위태로워져

소원을 빌듯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라이터의 휠이 자꾸만 겉돌아

돈 끼호떼의 엄지에 몇개의 스키드 마크가 그어졌을 때,

한물간 수사학처럼

사람들은 맥이 빠질 대로 빠져

페이지 뒤로 몸을 숨겼다

 

라이터의 고집을 꺾고

돈 끼호떼가 불붙은 담배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을 때,

사람들의 성기는 이미 두근거리고

심장은 의미심장함을 잃어버렸으며

입에서는 불투명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돈 끼호떼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주머니 속 라이터는 빛이 들기만을 기다리고

태양이 머리 위에 있을 때의 그림자처럼

사람들은 활자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승리를 만끽한 돈 끼호떼가

전리품이 된 라이터를 바닥에 던져버렸을 때,

사람들은 왼쪽 손목을 들어

자신들이 지금 안전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확인했다

 

두번째 담배를 꺼내 문 돈 끼호떼가

박살난 라이터를 바라보며

급기야 반성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사람들은 페이지 귀퉁이를 접고

담뱃재가 폴폴 날리는 풍경을 박차고 나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실 라이터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듯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어떤 덩어리를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모던 타임스

 

 

큰오빠는 팔굽혀펴기를 천구백개째 하고 있었다 팔을 굽힐 때마다 땀방울 몇톨이 자랑스럽게 돋아났다 네가 격투기를 하면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을 거다/그게 돈벌이가 더 돼? 아빠와 엄마는 항상 논쟁을 벌였지만 큰오빠는 근육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선반의 트로피를 바라보며 오직 양질의 고깃덩이가 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저 훤칠한 총각은 누구냐 할머니는 사람들의 이름을 자꾸만 잊어버리셨다 갑자기 통닭이 먹고 싶구나 할머니가 큰오빠의 등짝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잘 드시면 몸이 나을지도 몰라/하루에 열 끼나 드시는데? 아빠는 이상을 굽힐 줄 몰랐고 엄마는 현실이 펴지기만을 기다렸다 큰오빠는 팔굽혀펴기를 그만둘 수 없었다

 

통닭이 배달되자, 할머니는 날렵하게 날개를 낚아채 덥석 입에 물었다 미각은 여전하셔/이제 가실 때가 된 거지 엄마가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빠가 가슴살을 뜯어 큰오빠에게 가져다주었다 큰오빠는 쟁반에 입을 대고 개처럼 그것을 씹어 먹었다 샹들리에가 위태롭게 껌벅였지만, 모두들 그저 자기 자신이 눈을 감았다 뜬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감뉴스를 틀었지만, 아무도 미도리의 실종이나 제인의 망명, 철수의 죽음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정이었고, 에너지 보충을 이유로 다들 잠자리에 들고 싶어했다 철수는 할머니가 진작 잊어버린, 이제는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는 작은오빠의 이름이었다 할머니가 그 이름을 떠올리려는 찰나, 화이트 노이즈가 모두의 머릿속을 하얗게, 어지럽게 만들었다 결국 내일의 날씨 코너는 내일로 방영이 미뤄졌다

 

큰오빠는 이천번 팔을 굽히고 천구백구십구번 팔을 펴는 데 성공했다 굽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오직 생각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입맛을 다시며 큰오빠의 이름을 다시 물어왔다 아빠와 엄마가 하품을 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선반의 트로피가 떨어졌지만 엔트로피를 떨어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큰오빠가 팔을 이천번째 펴자, 큰오빠의 항문에서 방전된 에너자이저 하나가 툭 떨어졌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비가 오지 않는다면

큰오빠에 이어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차례로 눈을 감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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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ighter혹은 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