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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증인석이 가득 찰 때까지
김일란・홍지유 다큐멘터리 「두개의 문」, 연분홍치마 2012
김소영 金昭榮
창비 어린이출판부 편집자 soho@changbi.com
「두 개의 문」은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용산참사’를 영화로, 그것도 다큐멘터리로 봐야 한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포스터에는 “당신을 이 사건의 증인으로 소환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본 게 무엇이고, 나는 어떤 증언을 할 수 있을까.
2009년 1월 20일 이른 아침, 서울 한복판 8차선 대로변에서 여섯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현실적인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철거민 다섯명과 그들을 진압하던 경찰 한명이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이 참혹한 일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집회를 비롯해 희생자를 위로하고 유족을 돕기 위한 행사들이 이어졌다. 나 역시 추모미사에 가고 성금을 냈다. 그리고 나 역시 많은 사람들처럼, 사건 조사와 재판과정을 함께 지켜보지는 못했다. 일상적으로 되새기기에는 너무 무거운 일이었다. 이명박정부는 나날이 사람들의 삶을 피로하게 만들었고, 그해 여름에는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사건의 증인’으로 소환받아 극장을 찾았을 때,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비슷한 무게의 억울함도 밀려왔다. 숙제가 많아 일기가 밀렸을 뿐인데, 그래도 혼날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화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꼭 쥐게 했다.
「두 개의 문」은 철거민들이 남일당 건물에서 농성을 시작한 뒤 주검이 되어 내려오기까지 25시간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과 이후의 재판과정에 집중한 다큐멘터리다. 으레 철거민의 주장과 유족의 눈물, 대중의 분노가 그려질 거라 예상하게 되지만, 영화는 과감하게 다른 화법을 택했다.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철거민의 목소리를 배제하는 대신, 인터넷방송의 기록영상과 기자 및 변호인단의 증언,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경찰특공대의 진술로 사건을 복원한다. 특히 그간 가해자로만 인식되어온 경찰특공대의 증언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어느정도 안다고 생각했던 사건의 뜻밖의 면을 보게 한다. 그것은 철거민의 적이 경찰특공대인 것이 아니라, 철거민과 경찰특공대의 적이 무자비한 국가폭력이라는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다.
영화는 101분 내내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사건 당일 새벽, 몇시간 뒤 참극이 일어날 것임을 관객은 알고 있다. 그러나 농성을 시작하고 겨우 하루,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이들은 망루를 지어올리고, ‘누군가의 전화 한통’에 갑자기 버스에 오른 경찰특공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현장으로 향한다. 두 장면을 번갈아 보는 관객은 긴장이 점점 높아진다. 절제된 듯하다가 갑자기 커지고 빨라지는 음악, 그 사이 삽입되는 “생지옥”을 경험한 사람들의 자필 진술서는 ‘공포’라는 영화적 쾌감마저 준다. 흔한 표현이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인 것이다.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연민이나 자책감은 잠시 접어두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산참사의 진실, 사건의 진면목을 차분히 살피게 된다. 그것은 농성자들과 대화할 의지가 조금도 없는 공권력이 어이없을 만큼 성급하고 무리하게 작전을 강행했으며, 그래서 경찰특공대는 옥상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어디로 들어가야 망루로 진입할 수 있는지, 망루의 구조는 어떤지, 현장에 인화물질은 얼마나 있는지 등 기본적인 정보조차 제공받지 못한 채 허술한 장비에 의지해 공포 속에서 망루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검찰이 유족의 동의 없이 희생자를 부검하고 수사기록의 상당 부분을 은폐한 상태에서 “개똥” 같은 재판을 진행한 뒤 판사가 “국가 법질서의 근본을 유린한” 철거민들에게 담담하게 실형을 선고하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분노는 3년 전 뉴스영상으로 사고장면을 보았을 때의 공포와 달리 이상하게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었다.
그때는 못 본 것을 보게 하는 것. 어쩌면 「두 개의 문」이 하고 싶었던 일은 그것일지 모르겠다. 두 감독은 참사 당시에는 현장에 있지 않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고영상은 인터넷매체가 기록한 것이고,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특공대 버스 안 풍경은 연출된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우리에게 용산의 진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리는 데 성공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발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늦었다고 해서 목격자의 의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용산참사는 국가폭력의 문제이고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누구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잘 보고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친구가 있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간 뒤 짧은 침묵을 공유한 극장 안의 관객들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끼리’ 보면 뭐하느냐고 자조한다. 그런데 ‘우리끼리’가 나쁜가? 모여야 출석을 부르고 출발도 할 수 있다. 모일 때 친구를 데려오라고 할 수도 있다. 「두 개의 문」은 6월 21일 개봉할 때만 해도 상영관을 잡기 어려웠고 상영시간대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관객이 1만명을 넘어섰을 때 구좌당 3만원씩을 후원한 834명의 배급위원단이 기적이라며 자축했다고 하는데, 개봉 한달여 만에 총 관객수는 6만을 넘어섰다. 정치・문화계 인사들이 ‘같이 보기’ 운동을 펼친 덕도 있겠지만,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직접 상영관을 빌려 단체관람을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두 개의 문」 제작자가 성적 소수자 문화운동단체인 ‘연분홍치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영화를 ‘같이’ 보는 일이 더 의미있게 느껴진다. 파주출판단지에서는 돌베개, 보리, 사계절, 창비 등의 출판사 노조가 모여 상영회를 열어 지역주민들과 함께 영화를 보았다. 그후 상영회의 영향인지 이 영화관에서 일주일간 「두 개의 문」을 정식 상영하기도 했다. 덕분에 한명이라도 더 이 사건의 ‘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찾아낸 증인들이 올겨울 함께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