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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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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용 吳成龍

1984년 광주 출생. 2007년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foooooo@naver.com

 

 

 

여기, 왓슨이 간다

 

 

왓슨,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모든 고통과 폭력과 불행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이 사건에는 어떤 존재 이유가 있을 걸세. 그렇지 않다면 이 세계는 우연이 지배한다는 것인데, 그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하지만 그 목적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답하기 힘든 문제일세.

 

*

 

그의 기억이 제멋대로 19956월쯤으로 거슬러올라가버린다. 모든 기억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그가 살았던 집이 떠오른다. 아니 그보다 먼저 자신이 살갗을 드러내고 누웠던 자그만 침대와, 푸른빛의 문양이 유일한 장점이지만 꼭 푸른빛일 필요는 없던 천장과, 그런 천장이 있던 방 안의 풍경이 생각난다. 기억은 그가 머물렀던 작은 방에서 방문을 열고 나온 다음, 다시 현관문을 열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또다시 제멋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그보다는 빠른 속도로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며, 지금 그가 필요하다고 자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필요한 것이 분명한 무언가를 찾아내 통로를 연결한다. 입구가 열리자 보이는 것은 굿모닝문방구의 간판이다. 기억은 아무렇지도 않게 굿모닝문방구를 재생한다. 19956월의 그가 움직인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그의 친구 철록도 초등학교 3학년이다.

 

초록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전부인 간판을 달고 있는 굿모닝문방구는, 단출한 간판과 달리 실로 어수선하다. 갖가지 그럴싸한 사진들로 장식했으나 실상 백원짜리 동전을 꽂아넣으면 그럴싸하지 않은 것만 토해내는 캡슐뽑기 기계, 한껏 쪼그려앉아야 화면이 보이고 힘껏 눌러야 조작이 가능한 버튼을 가진 간이용 오락기, 붉은색 테두리의 주먹 가위 보가 교차되며 동전을 삼킨 후 이따금 이상한 무늬의 동전을 뱉어내는 국적을 알 수 없는 환전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커피땅콩을 배급하는 것이 장기인 완전수동식 자판기, 구석진 곳에서 어디 가 이리 와봐 여보세요 나 잡아봐, 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시비를 걸다가 인정머리 없는 초등학생에게 걸려 흠씬 두들겨맞는 대머리 두더지 열두마리, 인적이 뜸한 곳에 자리잡고 부위별로 몸을 파는 종이뽑기에, 굿모닝문방구의 최대 재원임은 분명하나 출신성분이 불분명해 불량한 성정을 가진 각양각색의 사탕, 젤리, 껌, 엿, 초콜릿, 쿠키, 음료수, 아이스크림 따위가 안팎으로 진열된 탓도 있지만, 어수선한 느낌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그와 철록을 포함한 초등학생들의 의미없는 분주함이다.

 

그는 이 굿모닝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먹고 뽑기와 오락은 한 적이 있어도, 샤프심 한통 구입해본 기억이 없다. 때문에 그는 그곳을 ‘문방구’라 발음할 때마다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또 굿모닝문방구에서 어머니에게 얻어맞은 친구를 다섯명 이상 기억하고 있는데, 이는 그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초등학생들이 어수선한 문방구에 혼을 잃어 학원이나 집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심신미약 상태에 빠진 초등학생들은 어머니의 애정 어린 손길이 그들의 등짝을 따스하게 덥혀야 잃어버린 혼을 되찾곤 했는데, 아이들은 이러한 과정을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여하튼 그와 철록은 이곳에서 서성인 지 오래로, 둘 다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굿모닝문방구 앞에서 보기 좋게 혼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참이다.

그와 철록의 풀린 눈은 한 점으로 모아져 있다. 유리창 너머의 그곳엔 상자에 담긴 장난감총이 놓여 있는데, 그의 키 정도는 될 법한 상자에는 탐정 복장을 한 근육질의 서양 남자가 붉은색 그림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내용물인 장난감총이 확실히 보일 수 있도록 총의 윤곽대로 도려진 상자의 구멍 위로 투명한 비닐이 씌워져 있다. 햇빛이 비칠 때마다 반짝거리는 투명한 비닐은 마치 안쪽에 누워 있는 장남감총이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것 같은 착각을 줬다.

 

기억은 색인이 생략된 기록물처럼 원하는 대목을 찾아내기 위해 역행하고 목적지에 도달해 다시 순행하며 검토를 반복한다. 최종적인 기억의 시점에 의존하는 과거의 기억은 저마다의 날짜와 내역으로 선을 그으며 개별적인 기억으로 분절되는데, 지금 그가 떠올리고 있는 기억 또한 이에 해당된다. 기억의 외양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고정되고, 그 속에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의 기억들이 머문다. 1995년의 그가 어떻게 움직였었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는 그는, 무리 없이 어떤 것을 기억해낸 당시의 그를 떠올렸다.

 

굿모닝문방구의 주인 아줌마는 사실 장님이래. 멀거니 상자 속을 응시하고 있던 그는, 어째서인지 모르게 그가 기억해낸 것을 옆에 있던 철록에게 소리 내어 말했다. 철록은 장난감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나도 알고 있어. 철록은 주머니를 뒤적거려 한 손 가득 사탕을 꺼내들고 말했다. 이게 그 결정적인 증거지. 그는 조금 놀랐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바와 철록의 사탕을 조합해보면 철록은 주인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사탕을 취득한 것이었고, 이것은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바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절도 행위를 향한 놀람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는데, 하나 먹어,라는 철록의 말에 입안으로 욱여넣은 사탕의 굉장한 크기와 달콤함 때문이었다.

 

기억은 간혹 앞과 뒤를 혼동하고 이를 임의로 재배치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능상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역순으로 작동하는 기억의 속성으로 인해, 정리하는 과정 혹은 반대로 꺼내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소한 오류에 가깝다. 지금 그가 철록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실상 그는 이 장면의 기억을 되새기는 시점에선 철록이란 이름을 알지 못해야 한다. 그럼에도 자꾸만 철록이란 이름이 덧씌워지는 것은, 이것들에 대한 기억 스스로가 철록이란 카테고리로 묶여 보관된 탓일 수도 있고, 이 기억을 시작한 계기가 철록에게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굿모닝문방구를 배회하는 그의 입안에서는 커다란 사탕 하나가 온몸을 바쳐 봉사하고 있다. 턱을 잔뜩 벌려야 머금을 수 있는 크기를 자랑하는 사탕은 자신의 달콤한 향을 반쯤은 목으로, 반쯤은 코끝을 향해 뿜어낸다. 그는 비어져나오는 향긋함이 코끝을 잠식하는 것을 음미한다. 그때, 마찬가지로 똑같은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던 철록은 불명확한 발음으로 어떤 말을 했고, 그의 귀는 그것을 이렇게 듣는다. 내 이름은 셜록이야, 너는?

 

기억이 이 부분을 지나자마자 철록이던 친구는 금세 셜록이 된다. 당시의 그가 철록을 셜록으로 기억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기억에 해당했다. 진짜 이름이 셜록이야? 의식하지 않기엔 너무 큰 사탕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불확실한 발음으로 그가 되물었다. 철록은 응,이라고 대답했고, 결국 셜록이 되었다. 그는 셜록에게 말했다. 저 총, 진짜 총 같지 않냐? 그는 진짜 총은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진짜 총을 언급했고, 셜록은 어 진짜 총같이 생겼네,라고 답했다. 그 대답은 둘 모두에게 진짜 총을 본 적이 있는 초등학생 같은 느낌을 줬다. 다시 그가 말했다. 저거 얼마나 하는 걸까? 셜록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만오천팔백원.

 

그의 기억이 한차례 도두뛴다. 무언가를 생략하는 데 능한 기억은 무책임한 면이 없지 않아, 지나간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충분했죠? 하고 말하는 불친절한 가이드처럼 바쁜 걸음으로 뻔뻔하게 다음 코스 또 다음 코스로 기억은 그를 끌고 간다. 기억이 이끈 이번 코스에선 그와 셜록이 장난감총을 바라보고 있다. 방금 전의 기억과 다른 것이라곤 그 장난감총을 유리창을 통해 보고 있느냐 아니냐 정도뿐이지만, 셜록과 그의 상태는 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의 눈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안구와 눈 밑살 사이에 약간의 물도 고여 있으며, 몸뚱아리는 밑바닥에서부터 잘게잘게 떨리고 있다. 함께 있는 셜록도 그보다 조금 덜하긴 했지만 엇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

셜록의 목젖이 위아래로 격철 소리를 내며 오르내린다. 셜록이 말한다. 가자. 고개를 끄덕인 그는 장난감총이 담긴 상자의 윗부분을 거칠게 잡아챈다. 굿모닝문방구의 안쪽은 언제나처럼 어수선하고, 주인아줌마는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잔돈을 짤랑거리고 있다. 주인아줌마의 시선을 살핀 셜록과 그는 기차놀이를 하듯 둘의 몸을 포갠다. 그보다 키가 큰 셜록이 앞에 선다. 그 상태로 둘은 장난감총이 담긴 상자를 일으켜세워 각자의 겨드랑이에 끼워넣는다. 상자의 왼쪽 귀퉁이는 셜록의 겨드랑이에, 오른쪽 귀퉁이는 그의 겨드랑이에 한 몸처럼 달라붙는다. 주인아줌마는 여전히 손안의 동전을 짤랑거리며 아이들을 상대하고 있다. 셜록이 출발하자는 신호를 주자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너무 밀착된 까닭에 그의 무릎이 셜록의 오금을 툭툭 때렸지만 기차는 탈선하는 일 없이 잘 움직였다. 주인아줌마는 이상하게 걷는 두 아이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흔들리는 동전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사이 셜록과 그가 운행하던 기차는 바깥이라는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다. 입구에서 바람이 살짝 불어와 장남감총이 든 상자를 휘돌아, 셜록과 그를 스쳐 주인아줌마에게 닿는다. 셜록과 그는 그 자리에서 각자의 왼쪽 다리를 옆으로 뻗는다. 그리고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완벽한 호흡으로 게걸음을 치기 시작한다. 당연히 옆구리에 매달린 상자도 걸음과 함께 옆으로 옆으로 딸려왔다. 게걸음은 굿모닝문방구의 간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이로써 주인아줌마는 장님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졌으며, 진짜 총처럼 생긴 만오천팔백원짜리 장난감총은 셜록과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게걸음 와중에, 주인아줌마는 장난감총 하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셜록과 그는 입안의 사탕을 우물거리며 장난감총을 나눠 들고 씨익 마주 웃었다.

 

*

 

그런 그들을 비웃듯 기억이 열었던 입을 다물어간다. 장난감총과 초등학교 3학년인 그와 셜록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침대에 홀로 앉아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겹친다. 그는 웃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 비슷하게 어떤 말을 내뱉는다. 셜록.

 

*

 

입을 다물어가던 기억은 그의 말이 채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부릅떠 어디론가 가파르게 짓쳐올라간다. 기억이 제멋대로 찾아낸 것은 20029월쯤의 그다. 대부분의 기억은 인상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의 기억 또한 당시의 그에게 인상적이었던 어떤 것을 견인해온다. 기억이 끌어와 그에게 비춘 것은 어딘가에 적혀 있는 글씨다.

신철록은 이 글을 보는 즉시 진학실로 올

초록색 바탕에 하얀색 글씨로 쓰여 있어서 단출한 느낌을 주지만, 막상 이 문구 앞에 서 있는 그와 셜록은 마음이 어수선하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3반이고, 그의 친구 셜록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저 초록색 바탕이 3학년 3반의 칠판이라는 것이고, 하얀색 글씨를 쓴 사람이 3학년 3반의 담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3반의 셜록과 그는 망했군, 망했네,라는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옆에서 한숨을 짓고 있는 셜록의 본명이 신철록임을 알게 된 것은 꽤나 오래전의 일이라고 고등학교 3학년의 그가 기억한다. 잠시 동안이지만 정말로 이름이 셜록인 줄 알았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그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고, 그 순박함에 놀라움을 갖게도 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그가, 그의 친구 신철록을 지금도 셜록 혹은 홈스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홈스, 괜찮겠나?

 

고등학교 3학년의 그는 스스로를 훌륭한 셜로키언*이라고 자부한다. 물론 그 계기는 옆에서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셜록이 온몸으로 제공했다. 입안에 든 사탕 때문에 잘못 발음되었던 것이라고 하면 김이 빠지는 감도 있지만, 이건 운명이라고 결론짓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장난감총의 소유와 함께 셜록이란 이름을 알게 된 과거의 그는 당연한 수순처럼 자연스럽게, 아서 코넌 도일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셜록 홈스가 겪은 낭만적인 모험을 읽어나가게 되었다. 그 모험들이 기억 속에 늘어날수록 그는 셜록 홈스란 인물에 시나브로 매료되었는데, 언제나 셜록은 강인하고 기품있고 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고 동시에 항상 인간적이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그에게 셜록 홈스는 하나의 신처럼 다가왔고, 그때마다 그는 그런 느낌을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그 느낌은 점차 구체적으로 그를 변화시켰는데, 그가 만일 철록의 이름을 셜록이 아니라 국어나 수학, 영어로 잘못 들었더라면, 성적이 지금처럼 엉망진창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 사이를 셜록 홈스라는 과목만으로 메웠다. 그것은 국어나 수학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셜록을 국어나 수학, 영어와 바꿀 생각 따윈 고등학교 3학년인 그는 물론, 그동안의 그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셜록 지향적인 사고로 셜로키언의 세계에서 안온한 일상을 보냈고, 친구 철록도 과거의 그가 풀어놓은 무언의 전도에 그의 뒤를 따른 지 오래였다. 여하튼 그가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셜로키언이 됨으로써 그와 철록의 관계는 한층 더 끈끈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끈끈함은 셜로키언 놀이의 창시자인 로널드 녹스 신부가 보더라도 참으로 흐뭇해할 정도였다.

셜로키언 놀이에는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 셜록과 그의 친구 왓슨만 있다면 주변의 모든 것이 놀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놀이에 필요한 셜록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는 자처해서 왓슨이 되었다. 셜록과 왓슨은 철록과 그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옆에서 고뇌하던 셜록이 하아 하는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왓슨, 다녀오겠네.

꼭 살아 돌아오게나, 홈스. 그가 이렇게 대답한 까닭은, 진학실에서 담임에게 얻어맞은 친구들을 50명 이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셜록이 그곳에서 이겨내야 할 난관이 꽤나 험난하리라는 것은 진학실 곳곳에 있는 각양각색의 체벌 도구를 상기하면 금세 추리할 수 있다. 셜록이 진학실 쪽으로 사라지자 교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한 사람씩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말들은 그의 귀에 이렇게 들린다. 또냐? 새벽에 나가서 할 일도 없을 텐데 잠이나 자지. 미친놈 아니냐. 도대체 왜 탈출을 하는 거지? 뭐가 불만인 거야. 근데 어떻게 탈출한 거냐, 내가 알기론 방법이 없는데. 소문에는 철록이 사물함에 행글라이더가 있다더라. 아니다, 로프를 이용해서 타고 내려갔을 것이다. 제삼자의 도움이 있었다. 분명 여자 만나러 간 거다, 사랑은 위대하니까. 아버지가 특수부대 출신이라더라. 기숙사 건물이 설계될 때부터 있었던 비밀통로를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학교의 거대한 음모다. 그나저나 기숙사 사감은 확실히 병신이네. 나도 한번 데려가지. 아버지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특수공작원 출신이래.

 

같은 반 아이들이 과시하는 멍청함에 반응한 그의 기억은, 왓슨으로서 셜록의 행보에 대하여 넌지시 풀어내고 싶어졌다. 이 사건은 기숙사 사감선생이 장님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베이커가 221B번지라고 칭하는 학교 기숙사에 머물고 있던 셜록은 굳이 땡땡이를 감행해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가히 셜록적인 모험심과 실험정신은 가정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결론적으로 이에 굴복한 셜록은 빈번이 기숙사를 탈출함으로써, 기숙사 사감선생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밤중의 기숙사는 교도소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폐쇄적이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문에는 자물쇠가 들러붙어 있고, 일자형 복도 구조라서 한밤중에도 누가 오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다가 손바닥만한 창문 하나밖에 없는 셜록의 방은 무려 4층에 위치했고, 특히나 전날 밤에는 매번 셜록을 놓친 기숙사 사감선생이 셜록의 방문만 주시하고 있었다. 사감선생은 셜록의 위대한 다섯번째 탈출을 겪고 나선, 그것도 개라고 집에서 기르던 시추 한마리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셜록은 사감선생이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토록 열성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정 그렇다면 장단을 맞춰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또다른 탈출을 감행했다. 이번 탈출은 이전처럼 3층에서 뛰어내린다든가, 처음부터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는다든가, 화장실 통풍구를 통해 기어나온 것에 비해 싱겁기 그지없었는데, 셜록은 단지 침대 밑에 숨어 있다가 밤중에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감이 지레 호들갑을 떠는 것을 조용히 관람한 후, 나가지도 않은 셜록을 찾아 기숙사 밖으로 자물쇠를 열어젖히며 뛰어나가는 친절한 사감선생의 등 뒤를 바짝 쫓아서 나왔을 뿐이다.

싱겁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기숙사를 탈출해도 딱히 갈 곳이 없는 셜록은 매번 그를 찾아왔고, 어젯밤에도 그는 셜록을 반가이 맞이한 기억이 있다. 왓슨, 오늘도 사감선생이 장님이라는 것을 증명했네. 아, 홈스,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나? 왓슨,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그냥 자려다가도 사감선생만 보면 괜히 이러게 된다네, 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나를 나도 이해할 수가 없네. 그나저나 홈스, 이건 뭐 셜록이 아니라 아르센 뤼뺑**이 하는 짓이 아닌가? 왓슨, 모르면 가만있게나, 이게 다 왓슨은 모르고 셜록만 아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라네. 홈스, 자네가 있기는 개뿔이 뭐가 있나, 갈 데도 없어서 날 찾아온 거면서. 어허, 왓슨, 또 왜 이러나, 하여간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네. 어서 가서 해결해야 될 사건이 있어. 하아, 홈스…… 또 피씨방인가? 왓슨, 알면 어서 움직이게나. 이럴 시간이 없어. 세시간 뒤면 등교해야 한단 말일세. 내가 못 살겠네, 홈스.

 

다시 기억은 세시간 후로 거슬러올라가 칠판을 비추고, 떠들썩한 교실을 구석구석 쓸어내린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하면서 진학실 쪽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 뒤쪽 허벅지를 만지며 절룩거리는 셜록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셜록을 향해 걸어가, 셜록의 한쪽 팔을 그의 어깨에 건다. 바늘 가는 데 실이 없으면 말이 안되듯, 셜록의 곁엔 왓슨인 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셜록이 말한다. 왓슨, 질펀하게 당했네, 감당하기 힘든 사실이군. 홈스, 보기에도 그런 것 같네. 다음엔 기숙사 탈출이 아니라 진학실의 매들을 모두 없애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네, 왓슨. 다 때려치우게나, 일단 살고 봐야지 질질 짜는 것도 한두번이네, 홈스. 셜록이 눈가를 손목으로 훔쳐내고선, 쑥스러운 듯 싱긋 웃는다. 왓슨인 그도 마주 웃는다.

왓슨, 이럴 때 보면 자네는 셜로키언이 아니라 철로키언인 것 같네.

독실한 셜로키언으로서 왓슨의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라네, 홈스. 자넨 추리력이 형편없군.

 

*

 

침대에 앉아 있는 그는, 더 날뛰려고 하는 기억을 애써 가라앉힌다. 이제 이런 기억들은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셜록이 죽었다. 그의 친구 철록이 죽어버렸다. 이 사실 때문에 그는,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웃게 만든 자신의 기억에 혐오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는 죽은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웃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금까지 자신을 우롱한 기억의 흔적은 자꾸만 그의 입가를 좌우로 당긴다. 좌우로 벌어져 있는 자신의 입술에 대한 불만에 답해 그는 아랫입술을 씹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단 사실을 아는 그는, 다급히 또다른 기억을 잡아채온다.

 

*

 

어떤 기억들은 때론 원하지도 않는데 계속적으로 떠오른다. 보통의 기억들이 쉽게 간소화되고 이내 소멸단계를 밝아가는 것과 다르게, 이런 기억은 사방에 벽을 치고 같은 공간 같은 시간 같은 냄새 같은 소리를 재생하며 생각을 가둬버린다. 또다시 그런 기억이 일주일 전의 그를 재생한다. 일주일 전의 그는 거실에 앉아 발을 까닥거리며 TV에서 방영되는 영화를 보고 있다. 그의 핸드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마이크로프트*** 형이다. 그 번호는 셜록 친형의 것으로, 이따금씩 셜록 일가가 셜록의 부대로 면회를 갔을 때나 셜록이 휴가를 나왔을 때 셜록이 쓰곤 했다. 그는 혹시 셜록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이크로프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예상과 달리 전화기에선 셜록이 아닌, 셜록의 형이기 때문에 졸지에 마이크로프트가 된 형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입안에 커다란 무언가를 머금은 것처럼 마이크로프트 형은 불명확한 발음으로 어떤 말을 전했고, 그의 귀는 그것을 이렇게 듣는다. 셜록이가 죽었단다.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기억으로 승화되는 것일까. 기억은 주관을 갖지 않고, 따라서 의사를 수렴하지 않는다. 취사선택하여 그것을 조율하는 행위도 불가능하다. 기억의 대부분은 시각적인 요소로 이루어지고, 여백은 후각, 미각, 청각, 촉각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기억들의 편린을 재료로 새로이 조합되는 기억이 그러하다. 보통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이러한 기억은, ‘상상’이나 ‘추론’ 등으로 분류되며 내용의 대부분이 기존 기억들의 부산물로 짜기워진다. 간혹 진짜 기억과 같은 비중으로 혼돈을 야기하기도 하는데, 일주일 전에 그가 했던 기억도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생각을 복기하는 그의 기억과 상상이 그의 어깨를 흔든다.

 

기억을 가장한 그의 상상은 초록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무슨 무슨 부대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을 지나, 셜록의 부대에 자리잡는다. 촌스러운 벽돌의 허름한 건물 뒤로 거대한 운동장이 있었다. 뜬금없이 그는 그런 부대에서 이유 없이 얻어맞은 사람들이 500명은 넘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둑한 붉은색 건물의 구석진 한편으로 셜록이 보인다. 셜록의 주변엔 철모를 쓴 인정머리 없게 생긴 군인이 열두명쯤 서 있다. 그들의 손이 셜록이 쓴 철모를 두더지 잡듯이 내려친다. 셜록은 그들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앉았다 일어서며, 이병 신철록 이병 신철록 이병 신철록 이병 신철록 이병신 철록 이병신 철록 이병신 철록 이병신철 록 이병신철 록 이병신철 록 이병신철록 이 병신철록 하고 소리를 낸다. 셜록의 마지막 목소리에 맞춰 또다른 생각이 이어진다. 셜록이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주변이 온통 어둡다. 셜록이 침상에서 소리 없이 일어선다. 셜록이 누워 있는 곳은 어쩐지 베이커가 221B번지 기숙사를 닮았고, 셜록은 무슨 까닭인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모습이다. 셜록이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문을 열자마자 간이의자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 누군가는 눈꺼풀과 눈 밑살이 붉은색 실로 꿰매져 있었고, 품 안에 시추 한마리를 안고 있다. 날카로운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교복을 입은 셜록은 조용히 발을 놀려 어디론가 향한다. 몇걸음 채 걷지도 않았는데 셜록은 유리창에 부딪힌다. 이마를 어루만지는 셜록의 모습은 방금 전보다 더 어린 모습이다. 그 모습은 마치 셜록의 초등학교 3학년 때를 보는 것 같다. 셜록이 마주한 유리창 너머에는 하얀 상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셜록은 유리창 너머로 건너가 그것을 움켜쥔다. 상자를 들어내자 그 아래 누군가의 얼굴이 보인다. 그 누군가는 두 눈이 꿰매진 채로 한 손에 든 동전을 쩔그럭거리고 있다. 셜록은 그 얼굴을 의식하며 오른쪽 겨드랑이에 상자를 끼운 채 게걸음으로 한발짝 한발짝 나간다. 어둑한 붉은색 건물 구석진 곳으로 절룩거리며 걸어나간 셜록은 자리에 멈춰서 하얀 상자 안에 담긴 것을 꺼내든다. 그것은 장난감총처럼 생긴 진짜 총이다. 어린 셜록은 그 총을 능숙하게 꺼내들고, 어딘가를 만진다. 셜록의 목젖이 위아래로 격철 소리를 내며 오르내린다. 오른손을 방아쇠에 올려놓은 셜록은 총구를 입안에 밀어넣는다. 셜록의 한쪽 볼이 둥그렇게 부풀어오른다. 셜록이 무슨 말을 한다. 하지만 입안에 머금은 총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셜록은 계속해서 무슨 말을 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순간 마주칠 리 없는 그와 셜록의 눈이 마주치고, 팡 하며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셜록이 있던 자리에 서양 남자를 닯은 붉은색 그림자가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다. 그제야 그는 셜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왓슨. 왓슨. 그리고 또 왓슨. 그의 기억 속에서, 셜록이 왓슨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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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의 웃음은 지워낸 얼굴로 그가 앉아 있다. 웃음을 지워내기 위해 불려나온 기억이 제 효능을 다했기 때문이다. 다시 얼굴을 굳힌 그는 악물고 있던 턱의 힘을 뺐다. 하지만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 기억과 한 덩어리로 이어져 있던 또다른 기억이 뒤따라온 것이다. 웃음을 짓던 그의 뒤로, 아랫입술을 깨물던 그의 뒤로, 눈가가 젖은 그의 너머로, 셜록에 대한 또다른 기억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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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기대는 상상의 속성에 따라, 그때그때 제 살점들을 제공하는 기억은 상호협력적인 면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무슨 까닭인지 꿈이란 것에 대해서는 비협조적이다. 기억은 논리체계가 상이하며, 질료를 얻는 경로와 비약의 자유로움이 이질적인 꿈과 양립하지 않는다. 현실의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기억은 체계 없이 부유하는 꿈을 휘발시키고, 어렴풋이 한때 그것이 있었다는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하지만 간혹, 정말로 이따금씩, 꿈이 기억을 파고들어갈 때가 있다. 깨고 나서도 기억되는 꿈이 바로 그 경우이며,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기억이 그런 현실 같은 꿈에 대한 것이다. 꺼진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곡조에 춤을 추듯, 없는 기억이 그의 손을 붙잡는다.

 

그는 거리를 걷고 있다. 햇빛은 강하고, 바람은 뜨겁다. 그는 덥구나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로, 어딘가를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갈 뿐이다. 막연하지만 그는 이 거리의 끝에 자신이 살갗을 드러내고 누웠던 자그맣던 침대와, 푸른빛의 문양이 유일한 장점이지만 꼭 푸른빛일 필요는 없던 천장과, 그런 천장이 있던 집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런 그를 누군가가 불러 세운다. 오랜만이네, 왓슨. 돌아선 그는 너무나 놀라 입을 벌린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를 부른 사람은 분명히 죽었다고 들은 셜록이기 때문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셜록이 그를 부른 것도 모자라 붉은색 체크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멀쩡하게 서 있다. 그는 너무나 놀라서 어, 어, 하는 소리만 되풀이하며 뒷걸음질한다. 셜록이 그의 손을 붙잡는다. 셜록의 손이 주는 감촉을 느끼자, 그는 와아 하는 환호성을 지르며 셜록을 부둥켜안는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셜록의 윗옷은 축축하게 땀에 젖어 있고, 맞댄 그의 볼에 습기를 보탠다. 그는 셜록, 셜록 하면서 그를 안은 채 등짝을 몇대 후려치고는 셜록의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한쪽 볼을 늘어지게 잡힌 채로 셜록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나 맞네, 왓슨. 왜 그리 호들갑인가? 그는 거의 만세를 부르다시피 대답한다. 오, 제길, 셜록! 철록!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지! 진짜 죽은 줄 알았다고! 그는 결코 예상치 못했던 셜록과의 재회에 기뻐 허우적거린다. 그런 그를 보며 셜록은 내가 죽긴 왜 죽어 인마, 하며 넉살좋게 웃는다. 아, 진짜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살아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나갈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머리에 떠오른 모든 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야, 이건 완전히 셜록 홈스 ‘마지막 사건’에서 모리어티 교수와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결투하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셜록 홈스가 다시 살아온 것 같아! 마이크로프트 형을 이용해 난 깜빡 속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느냐. 하여간 나는 기쁘다. 네가 살아 있어서 너무 좋다. 우리 동네에 아서 코넌 도일이 살았더라면 런던의 중년 부인으로 분장해 찾아가서 셜록 홈스를 살려내라고 우산으로, 아니 양산으로 그를 때렸을 거다. 네가 죽었다는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서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 내가 어떤 끔찍한 상상을 했는지 아냐고? 왓슨만 남겨놓고 셜록이 사라지면 말이 안되지. 말이 안돼.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기쁨을 토한다. 셜록은 그의 말을 한참 동안 듣고 있다가 말한다. 하여간 난 안 죽었으니까 그만 정신 차리게나, 존 에이치 왓슨 박사. 셜록의 말에 약간 진정하고 다시 대답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자네가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말이네, 살아 있어서 진짜 고맙네, 홈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그의 친구 셜록이 말한다. 셜록 홈스가 왓슨을 두고 어떻게 죽나. 난 절대 죽지 않을 거라네,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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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뒤적거려봐도 그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이다음 기억은 푸른빛의 천장과, 그의 방 안과, 그가 누워 있던 침대로 이어질 뿐이다. 억지로 뒤적거려진 기억은 침대에 이어서 그를 비춘다. 그는 너무나 현실 같았던 셜록과의 재회가 꿈이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휴대폰을 집어 마이크로프트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철록이 있나요.

 

그는 그가 기억하는 이 꿈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사실 구분하기가 망설여졌다. 그가 꾸었던 행복한 악몽 속에서 셜록은 그리고 철록은 자신이 죽지 않았다고,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현실과 기억은 그것이 참이 아님을 부연하고 있었다.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지는 명확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암시하는 뭔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다는 끈적한 기대와 의문이 뒤따랐다. 진실이 무엇인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무엇인지 누군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줬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그는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자 그 혼란스러움의 틈새를 넓혀가며, 발밑에서 또다시 어떤 기억이 비집고 올라왔다. 셜록은 그런 그의 귀에, 어떤 말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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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rlockian. 아서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 주인공인 셜록 홈스의 추종자를 뜻한다. 초기에는 소설 속 인물인 셜록 홈스를 실존 인물로 믿고, 홈스 이야기를 자세히 아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지금은 셜록 홈스에게 애정이 있는 골수팬 모두를 포괄하는 말로 쓰인다.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 속 인물. ‘괴도 신사’라는 콘셉트로 천재적인 두뇌를 홈스와 달리 범죄에 이용하며 반() 홈스적 성향을 갖고 있다. 작가가 1907년에 발표한 책의 제목 역시 ‘아르센 뤼뺑 대 셜록 홈스’이다.

***아서 코넌 도일의 추리소설에서 셜록 홈스의 형으로 등장한다. 홈스 못지않게 키가 크고 기억력이 뛰어나며 놀라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가졌으나 병적으로 무기력한 지적 초인으로 묘사된다. ‘마지막 사건’ 편에서 셜록 홈스가 죽었다고 모두 생각했을 때,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던 유일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