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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민하 李旻河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환상수족』『음악처럼 스캔들처럼』이 있음. poemian25@hanmail.net
풀밭의 율법
바람의 목소리로 속삭여줄게
사라짐과 일요일에 대하여
풀 뜯는 소리와
풀 밟는 소리
저 푸른 초원 위에
늑대들이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서
주섬주섬 양들을 장바구니에 담을 때
목자(牧者)께서 가라사대
그대로 멈추라
양떼 사이에 잔뜩 천사채처럼 깔아놓는 기절염소1들
목장의 오후
늑대들이 엉금엉금 천년을 기어다니며
풀썩풀썩 고꾸라지는 기절염소들의 나무다리를 주워 막대사탕처럼 입에 물 때
장바구니에서 뛰쳐나온 양들은 구름처럼 흩어져
목장의 평화
갓 태어난 목동들은 석양이 뚝뚝 떨어지는 요람에 누워
늑대다 늑대가 온다
까르르까르르 옹알이를 시작하고
뻗정다리로 휘청휘청 어둠의 끝까지 달려도
검게 깔린 늑대밭과 귓가의 지뢰들
그대로 멈추라
몸뚱이에 입력된 목소리는 누구 꺼니
아빠 꺼니 엄마 꺼니
맨발의 늑대들과 양치기 소년
너는 누구니
늑대들이 야금야금 갉아먹어도 피 한방울 나지 않는
사방연속무늬 유리풀밭
멋진 역사야 신기하게 맛있게
무릎이 녹아 거울 속으로
나는 자꾸 사라져
천문학자는 과거를 쇼핑한다
눈앞에 있는 별은 아주 오래전의 별이지요.
수년 전의 별부터 수만년 전의 별들을 보고 있는 거라며
그는 걸음에 잠깐 쉼표를 찍고
나는 아아아 하품을 한다.
우리가 죽은 후에나 당도하는 별빛의 현재 따위는 산책로 옆으로 치우며
우린 나란히 꼬르륵거리며 걷고 있네.
한번씩 부딪칠 때마다 이미
사라진 눈. 사라진 어둠.
골목 입구에 차린 구름약국의 아이들이 전신주에 걸터앉아 전화선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너무 멀리 떨어져 빛이 닿지 못하는 별처럼
아스라한 허기로 잠시 이사를 고민할 즈음
그가 문을 열었고, 난 벼룩시장을 접었다.
물컹물컹 천체망원경으로 짓무른 그의 눈알에 연고를 다 발랐을 때
그가 손짓한 지상으로의 저녁 초대.
어제 낯설게 소매를 스쳤던 마트에서
오늘은 함께 새로운 메뉴를 고른다.
다 안다는 듯 관심 없다는 듯 고향 대신
나의 취향을 당신이 물어보는 사이 나는 똑 딱 똑 딱
빛이 30만킬로를 달리는 1초.
소리가 340미터를 달리는 1초.
그리고 기억이 수십년을 달리는 1초만큼씩 멀어진다.
당신은 이미 사라진 빛 속에 남아
사라진 내 목소리를 듣고 있네.
사라진 이빨. 사라진 키스.
볕 좋은 치과에 모여 쌍둥이 뻐꾸기 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전속력으로 관측되기 위해
수명을 다해 부풀어오르다가 폭발한 초신성의 잔해들. 오천광년을 걸어 잠시 들른 이 별에서
끝없는 불꽃놀이로 꺼지지 못하는 사람들. 믿지 못하겠니, 우리는
잠들지 않는 냉동 수정란처럼 둥둥 탯줄을 끄는 해파리성운.
밤하늘에 목을 맨 모빌이 되어 수수만년
우리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고
편지를 수거해 간 우편배달부는 버즈 두바이2에서 밤마다 참수당하고
진열대에는 저녁에 쓰일 햇반 같은 활자만 남아
쇼핑할 수 없는 엄마가 하나 둘 지나간다.
나는 쇼핑 카트에 잠들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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