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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폴 우드러프 『최초의 민주주의』, 돌베개 2012

2500년을 이어온 민주주의의 꿈

 

 

나종석 羅鍾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platona@yonsei.ac.kr

 

 

8910미국 고전학자 폴 우드러프(Paul Woodruff)의 『최초의 민주주의: 오래된 이상과 도전』(First Democracy: The Challenge of an Ancient Idea, 이윤철 옮김)은 고대 아테네에서 탄생한 민주주의에 관한 책이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위기가 병존하는 오늘날, 민주주의를 최초로 실험해본 고대 아테네 시민의 영광과 좌절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독자를 사로잡는다. 이 책에는 민주주의의 이념에 대한 기본적 통찰과 그에 반대하는 논거, 그리고 아테네 시민이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추구했던 일곱가지 이념이 소개되어 있다. 본론에 해당하는 제3장부터 9장까지의 내용인 민주주의의 일곱가지 이념은 일반 시민이 공공의 삶을 결정하는 주체이고 그런 결정을 내릴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근본이념을 올바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따른 자연적 평등성, 시민 지혜, 지식 없는 상태로부터 이루어지는 추론, 그리고 일반교양교육”(41~42면)이다.

아테네 시민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이념에 눈을 뜨게 되는지, 또 그 이념을 실현하는 험난했던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좌절, 실패 그리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이루어낸 역사적 성취에 대한 장구한 이야기를 모두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평자가 여기에서 소개하고 싶은 점은 대략 네가지다.

우선 민주주의의 대역(代役)에 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민주주의의 대역은 민주주의와 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모조품이다. 저자가 말하는 세가지 유사 민주주의는 투표, 다수결 원칙, 그리고 대표선출제이다(제1장 「서론: 민주주의의와 그 대역들」). 이는 오늘날에 참다운 민주주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들이다. 이같은 모조품에 대한 저자의 강조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로 아테네인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얻었던 성공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아테네 시민은 어느 누구도 가난이라는 이유로 혹은 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에서 배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인 사회, 즉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가난한 이조차 공정한 혹은 평등한 몫”을 지닌 사회라고 믿었다. 그래서 아테네인은 공적 사안을 논의와 숙고를 통해 결정하는 과정에 평등하게 참여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예를 들어 더 많은 시민이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민회(assembly)에 참석하는 시민에게 일정한 보수(기본적인 하루 임금의 절반 정도)를 지불했다. 또한 전문적인 판사나 검사 없이도 모든 시민이 소송할 권리를 가졌으며, 배심원은 매수되거나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추첨을 통해 구성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배심원으로 활동하면 역시 보수를 지급받을 수 있었다. 아테네인은 더 정의롭고 합당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공공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이런 방법들은 오늘날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개혁하기 위해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

셋째로 아테네인의 실패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이다. 이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을 고민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려 애쓰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저자의 화두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민주주의를 ‘참주정에 반대하는 정치체제’로 믿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다수’(그리스어로는 ‘호이 폴로이’[hoi polloi])에 의한 참주적 정치체제’와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아끼는 시민이라면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비판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반대자들은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들춰내어 약화시키면 그만이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은 그런 비판을 경청하고 실패를 거울삼아 더 나은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참여하는 모든 이의 좋은 재능과 자질에 의존하는 정치체제”기에 신중하고 사려깊은 시민을 요청한다. 물론 민주주의의 주체인 일반 시민 역시 불완전한 존재기에 무지와 공포에 휩싸여 혹은 지나친 야망이나 물질적 재화에 눈멀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시민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교육”이다. 그런데 이때의 교육은 “전문적인 직업훈련”이 아니라 “일반교양 교육”이다. 즉 민주시민 교육은 효율성 위주의 전문적인 교육이나 ‘스펙 쌓기’ 훈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태를 더욱 넓고 깊게 볼 줄 아는 능력을 고양”시켜주는 교육이다. 그런데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실수는 교육의 장을 모든 사람들에게로까지 확장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280면).

마지막으로 조화에 관한 강조이다. 저자는 이 책을 구상했을 때 조화를 민주주의 원칙으로 생각하지 못했으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실패는 결국 사회를 내부의 불화나 내전으로 치닫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양한 차이와 갈등의 분출을 허용하면서도 이것이 사회의 심각한 분열이나 내전으로까지 치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동료로 이해하는 연대의식의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불신하고 상대방을 증오와 적대감으로 대하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우리 사회도 저자가 걱정하는 미국 못지않게 정파적인 이해관계와 진영논리에 크게 영향받고 있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민주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미덕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반대파(들로 보이는 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만으로 민주주의가 잘 운영될 수는 없다. 정당한 분노도 때로는 도를 넘기가 쉬운데다가, 적개심과 분노는 선동가에 의해 동원되고 조작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정당한 분노가 신중하고도 사려있는 분별력과 판단, 즉 시민의 지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민주시민의 모습임을 아테네 시민은 그들의 실패를 통해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