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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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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파씨의 입문』, 장편소설 『百의 그림자』가 있음. aamudo@empal.com

 

 

 

장편연재 3(마지막 회)

소라나나나기

 

 

 

전생(前生)을 믿어?

나는 믿지 않아.

 

전생에 한번은 폭사(爆死)했다.

믿지 않는데 그렇게 믿고 있어.

 

때때로 꿈을 꾼다.

꿈을 꾼다기보다는 폭음을 듣고 꿈에서 깨어날 때가 있다. 폭음과 더불어 한토막으로 가볍게 공중을 날아 이윽고 바닥에 달라붙은 순간. 왼쪽 뺨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마도 그 한토막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태어나 금생(今生)에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반복해보는 것이겠지.

그렇게 믿고 있어.

전생의 흔적을 금생에도 간직하고 있는 나는 끈질긴 사람.

끈질기고 집요한 사람.

끈질기고 집요하게 너를 기다리는 사람.

 

왼쪽 뺨이었을 것이다.

뺨이라기보다는 얼굴에 가까웠다고 말할까.

왼쪽 귀와 왼쪽 눈꺼풀과 눈썹을 포함한 왼쪽 얼굴. 공중으로 떠올랐을 때 그 얼굴은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고 황홀감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비참하게 한토막이었으나 감은 눈꺼풀 덕분에 너무도 평온하게 정지된 표정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라기보다는 내 눈으로 목격한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인지도 모르겠어.

아마도 그것은 너의 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너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너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

 

금생에도 이토록 집요하고 끈질기게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너의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

 

밤에 바닥이 흔들렸다.

너울에 실린 듯한 진동이었다. 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하철 노선이 있었으나 전철은 이미 끊긴 시각이었다. 늦은 밤 지하의 선로를 오가는 빈 전차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지만 진원은 그보다 깊은 지점에 있었다. 잠에서 깬 뒤로도 몇차례 미미한 진동이 이어졌다. 아마도 날이 밝고 난 뒤엔 지난밤 어디쯤에서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올 것이다. 낮의 더위가 고스란히 남은 어둠 속에 드러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고 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눈에 덮인 오두막.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눈밭인 풍경이다.

 

나의 어머니는 어렸을 때 전쟁을 겪었다.

피난길에 가족을 잃고 마찬가지로 피난 중이던 친척을 따라다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오지에 사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을 때가 일곱살 때였다고 한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사람들과 떨어져서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조그만 분지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의 오두막에서 서너해를 보냈다.

몇해를 보냈으므로 다른 기억도 있을 법한데 어째선지 겨울의 기억만 남아 있다고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일주일이고 보름이고 말 한마디 없는 겨울이 이어졌다고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방문을 열면 눈 덮인 풍경을 보았고 기온과 고도 때문에 늘 귓속이 멍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서 나무를 때 밥을 하고 솥에서 긁어낸 누룽지를 조그만 사발에 담아 그녀의 머리맡에 두었다. 눈을 뜨자마자 몸을 뒤집어보면 노란 누룽지를 담은 사발이 매일 머리맡에 있었고 그게 기뻤다고 어머니는 말하곤 했다. 사람의 희로애락마저 모조리 덮어버린 듯한 눈 속에서 유일하게 기쁜 일이었으므로 더 기뻤다는 것이었다.

봄이 되자 어머니는 거기까지 그녀를 데리러 온 숙모에게 이끌려 도시에 있는 시장으로 나왔다. 숙모는 그녀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고 좋은 남자를 골라 시집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한 모양이었으나 실제 어머니가 겪은 것은 책 한권 읽어볼 짬도 없이 집안일을 하며 숙모의 갓난아이를 돌보는 식모살이였다. 아이가 어느정도 자란 뒤로는 숙모의 가게에서 국밥 파는 일을 도왔다. 숙모는 지출을 줄이려고 사람을 고용하지 않고 세 끼니와 머물 장소와 약간의 용돈으로 그녀를 부리다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이십대 중반이 되어서야 시장에서 알고 지낸 사람에게 신접살이용 이불 한채를 얹어 시집보내주었다고 한다. 가족끼리 사정을 봐주어야 한다는 말이 숙모의 입장에서는 꽤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 숙모와 여태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찌됐든 숙모가 아니었다면 할아버지와 그 산골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삶밖에 몰랐을 거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하루는, 하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녀에게 이따금 듣는다.

시장에 할아버지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숙모의 손에 잡혀 분지를 떠나온 이듬해인가 그 다음해의 일로 그가 방한복을 잔뜩 차려입은 촌로의 모습으로 국밥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조카를 빼앗아가려 왔다고 여긴 숙모는 국밥 한그릇 대접하지 않고 그를 모르는 척 내버려두었다. 사람 북적이는 장소를 고집스럽게 피해온 그가 무슨 이유로 그곳을 방문했는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그 일을 두고두고 안타깝게 여긴 듯 그 조그맣고 마른 노인이 마루 끝에 앉아 있다가 빈속으로 먼 길을 돌아갔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살던 곳에서 홀로 살다가 죽었다. 군사분계선 부근에 무덤이 있다. 평소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성묘를 하러 오르려면 출입허가를 받고 총기를 소지한 군인과 동행해야 들어갈 수 있는 산속 비탈에, 무언가를 기다리듯 북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놓여 있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는 어포와 과일 몇가지와 술을 조금 챙겨 그곳을 방문한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고 조그만 짐승들만 오가는 곳이라 작년에 덤불을 잘라가며 낸 길이 올해는 감쪽같이 사라져 다시 방향을 가늠하고 길을 내며 올라야 하는 산비탈이다. 제사에 쓸 음식이 든 작은 꾸러미를 쥐고 햇빛도 들지 않는 비탈을 미끄러져가며 올라서 마침내 묘를 만나면 순자 왔습니다, 할아버지,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멧돼지가 엄니를 비비고 발굽으로 파낸 흔적으로 움푹움푹 팬 무덤 경사면을 정리하며 나도 이제는 할머니라서 못 온다, 힘들어서 내년엔 못 온다고 무덤을 향해 매년 불평한다. 작년에도 다녀왔고 가지 말자는 말이 없었으니 올해도 갈 것이다. 최근 두어해는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가지 말자고 말려보았는데 자신이 죽고 나면 아무도 찾지 않을 무덤이므로 살아 있는 동안엔 어떻게든 가보고 싶다는 것이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오두막은 지금쯤 흔적만 남았을 것이다.

나는 그 집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사과와 배와 어포를 올리고 무덤에 술을 뿌려 약식으로 제사를 지낸 뒤 거기까지 동행한 군인에게 몸을 좀 덥히라고 술을 나누어주었다. 근무 중이라며 끝내 받지 않는 군인도 있었으나 대개는 받았고 마찬가지로 대개는 구석진 곳에서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나누어받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그가 먹고 마시는 동안 어머니와 나는 무덤을 등지고 앉은 채로 건너편 산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가을 산이었다. 나뭇가지에 달린 잎들은 바싹 마른 채로 바람에 흔들렸고 공기는 싸늘했다. 어머니는 몇겹으로 이어진 능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가 저기 어디쯤에 그 집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 적이 없는데도 마치 본 것처럼 그 집에 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어머니에게 들은 그대로 눈으로 덮인 풍경이다.

분지 바닥에 조그만 집이 있다.

들어간 사람의 자취도 나간 사람의 자취도 모조리 눈이 덮어버렸다. 눈뿐인 바닥은 흐린 하늘과 구분되지 않고 집 뒤쪽으로 흐릿하게 솟은 능선도 하늘이나 바닥과 구분되지 않아서, 이 집은 푸르스름한 백지를 뚫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의 할아버지, 나의 증조부가 살던 오두막이다.

그 집에 관해 생각해볼 때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그가 여태도 그 집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밤이고 낮이고 그는 검은 오두막에 불을 밝혀두었다.

기다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이렇게 한밤에 눈을 뜨게 될 때 나는 그것을 깨닫는다. 문득 손님이 끊기고 가게가 조용해질 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쉴 때, 방금 손질한 양파 껍질이 쌓인 쓰레기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지러울 정도로 뜨거운 햇볕 속에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때,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느낄 때, 말하자면 너를 향한 나의 바람이 가망 없다고 여겨질 때, 나는 이 집을 생각한다.

지붕에 쌓인 눈이 바람에 솟구쳐오른다.

그 광경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늙어버렸다.

 

밤이 무더워.

지진이 가고 난 뒤의 감쪽같은 적막에 잠겨 생각한다. 오늘 밤은 특히 무덥다.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거실에 놓인 만두는 이 밤이 가는 동안 쉬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거실에 마련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부엌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는다. 잡다한 사물이 바깥에서 들어온 가로등 빛에 모서리들을 드러내고 있다. 잠든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침대가 놓인 방에서 소라와 나나가 잠자고 있다. 그녀들은 어제 이 집에서 잠들었다. 어머니의 털양말을 빌려 신은 나나의 발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나는 어제 처음으로 모세라는 남자를 보았다. 소란을 듣고 나가보았더니 소라, 나나, 그 남자가 얽혀 기묘하게 서툰 몸짓으로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세라는 남자는 키가 작았고 무거워 보이는 검은 머리에 안쓰러울 정도로 답답해 보이는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다. 입고 있는 셔츠에도 구두에도 땀이 배어 있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허탈한 듯 보였고 오히려 상처받은 것처럼도 보였다. 나나가 가라고 말하자 갔다. 그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

나나의 목엔 붉은 자국이 남았다. 눈과 코가 빨개진 채로 나나는 부들부들 떨었으나 금세 침착해져서 소라를 달랬다. 나나보다도 소란스러웠던 소라는 침대 모서리에 앉은 채로 딸꾹질을 하다가 잠잠해졌다. 어머니는 나나의 아기를 걱정했다. 아기도 나나도 괜찮다. 모두 잠들었다. 어머니도 잠들었다.

기름병과 소금단지와 고무줄로 묶인 밀가루봉지가 놓인 식탁에 어머니의 담뱃갑이 놓여 있다. 한개비를 빌려 현관을 나서고 보니 바깥은 실내만큼 어둡지 않다. 여름이므로 한두시간 뒤에는 해가 뜰 것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골목 아래쪽을 바라보다가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집 앞 길바닥에 계란 깨진 흔적이 남아 있다. 노른자나 껍질은 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길에서 사는 고양이가 핥아먹었을 것이다. 끈끈하게 남은 얼룩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빨아들인다. 이가 없는 자리에 건조하고 매운 연기가 둥글게 고이는 것을 느낀다.

너는 내가 담배 피울 줄 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나는 네 곁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담배를 피우면 입맛이 쓰고 혀가 둔해져 조리에 영향을 받게 된다. 흡연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자주 피우지는 않도록 주의한다. 오래 피우면 몸에 냄새가 배게 되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좋지 않다. 담뱃진이 밴 손가락으로 식재료를 만지면 고기나 야채에 쓴 냄새가 밴다.

 

어머니가 아기에 관해 말할 때 나는 조금 괴롭다.

예전엔 원망이 섞인 어조로 너는 만나는 여자도 없느냐고 이따금 물어왔고 그럴 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가족을 잃고 쓸쓸하게 자란 어머니는 손주가 많은 시끌벅적한 가족을 소망하지만 그 소망이 덧없을 거라는 것을 아는 나는 씁쓸하고, 쓸쓸하다. 최근에 어머니는 손주를 언급하지 않는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며느리는 바라지도 않을 테니 어딘가에서 아기를 만들어 데려만 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제는 말조차 꺼내지 않는다. 벌써 단념했는지도 모르고, 아직 단념하지 않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후자로 일말의 소망 정도는 남겨두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정도의 소망조차 이루지 못하고 늙어가는 것이 서글프다.

 

내가 자란 집에 관해 말해볼까.

이 집에 관해 제대로 말하려면 말보다도 그림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의 너 역시 세상에 그런 집이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잘 상상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런 집이었어. 벽을 사이에 둔 둘이자 하나의 공간. 활짝 펼쳐진 나비 날개처럼 혹은 어두운 데칼코마니처럼 좌우로 나뉘었으나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좌우가 뒤바뀌는 각각의 반지하. 완전한 지하가 아닌데도 현관 근처나 밝을 뿐 한낮에도 불을 켜두어야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있는 이 어두운 집에서 나는 말없이 이것저것을 상상하며 조용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내가 그 집에서 사는 동안 벽 건너편엔 이사가 잦았다. 사는 사람이 자주 바뀌었고 한동안 혹은 오랫동안 비어 있기도 했다. 그쪽으로 이사 들어온 사람은 종일 집을 비우거나 종일 집에 머물렀다. 어느 쪽이든 말이 별로 없었고 현관에서 마주쳐도 사람을 보았다는 기색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 사람들이 화장실을 남의 것으로 여기고 지저분하게 사용한다며 불평하고는 했다.

나는 이 집에서 소라를 만났고 나나를 만났고 그녀들의 어머니인 애자 아주머니를 알게 되었다.

애자 아주머니에 관한 어머니의 생각은 어머니가 곧잘 만들곤 하는 조각보처럼 다양한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하다. 어미로서는 몹쓸 지경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안됐다. 사람으로서는 안됐으나 어미로서는 몹쓸 지경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감정으로 뒤집히곤 하는 두가지 경우로 요약해볼 수 있지 않을까. 애자 아주머니는 소라와 나나가 어렸을 적엔 내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나가보거나 목욕탕에 가거나 별다른 말은 없어도 둘러앉은 자리에 앉아 있곤 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과 관계를 거절하고 점차 그리고 조용히 망가져갔다. 망가져갔다는 말은 그녀의 지금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그보다는 완성되었다거나 완전해졌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까. 이렇게 말해볼까. 오랜 세월 점차로 그리고 조용히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고 완전해졌다, 껍데기처럼 그것을 그녀는 뒤집어썼다.

그녀에 관해 언제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딸들에게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나타났던 것처럼 조만간 벽 건너편에서 문득 사라질 것이고 그 넓고 기묘한 공간에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 앞에서 불편하거나 불쾌하거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스쳐가고는 했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도깨비.

나는 그들을 그렇게 여겼다.

말 한마디 없이 발소리를 내며 걸어다니다가 어느날 문득 반대쪽 공간을 비우고 사라지는 사람들.

한밤에 홀로 잠에서 깰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 나는 내 방을 빠져나온 뒤 어머니의 방 앞을 지나 벽 반대편으로 건너가곤 했다. 어느 계절이든 자는 동안 배어나온 땀으로 등이 약간은 젖어 있었다. 그 땀이 다 마를 때까지 반대쪽 벽에 등을 대고 서 있다가 내 잠자리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즐거웠다거나 색다른 모험을 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벽 건너편은 비어 있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약간은 무서웠다. 내버려두면 더 무서워지니까. 무섭다고 생각할수록 그것은 더욱 무서워져서 어머니와 내가 잠든 공간으로까지 꾸역꾸역 넘어올지도 모르니까. 소라와 나나와 애자 아주머니가 들어온 뒤로도 그런 밤은 몇차례 있었다.

소라와 나나에게는 짐이 거의 없었다.

그들이 워낙 기척 없이 그 집에 들어왔으므로 어느날이고 사라질 때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자매는 여태도 근처에 있고 이제 내게는 그 편이 자연스럽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를 따져보는 것도 새삼스러울 만큼 자연스럽게 되었다.

소라와 나나, 그녀들은 이미 다 자란 모습이지만 지금도 나는 어렸을 때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는 한다. 어떤 순간의 모습이다. 애자 아주머니가 나의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나가곤 했던 시절의 일이었다. 내 어머니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았다. 이차선 도로를 따라 길쭉한 포도송이 모양으로 자란 재래시장 끄트머리에 가게가 있었다. 도로를 등지고 파라솔 세개를 잇댄 좌판이 놓인 자리였다. 이 자리에 이끌려 나간 날에 애자 아주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라솔 아래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거나 과일을 파는 내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소라와 나나와 나는 그런 오후에 그녀들을 보러 거기까지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시장을 통과해 어머니의 가게로 가는 길엔 여러개의 좌판과 상점을 지나야 했는데 중간쯤의 모퉁이에 딱 한 사람이 앉을 만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재봉틀처럼 생긴 묵직한 기계로 고추와 마늘과 생강을 갈아 팔았다. 그 기묘하게 생긴 기계의 꼭대기엔 금속 깔때기가 솟아 있었고 측면엔 청록색 바퀴가 달려 있었다. 깔때기에 마늘이든 뭐든 담은 뒤 아래쪽의 페달을 밟으면, 바퀴가 스륵 돌면서 깔때기에 담긴 내용물이 몸체로 빨려들었다가, 전면에 달린 혓바닥 모양의 배관을 통해 바닥에 놓인 고무그릇으로, 반액 상태가 되어 흘러내리는 구조였다.

어느날 소라와 나나와 나는 그 작은 모퉁이에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의 상인인 할머니가 노랗게 질린 얼굴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붙들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왼손에 수건을 둘둘 감는 참이었고 수건엔 순식간에 검붉은 얼룩이 번졌다. 소라와 나나와 나는 사람들 뒤쪽에서 그것을 보았다. 나중에 당도한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며 상황을 물었고 누군가 그 말에 이렇게 답했다.

갈렸다.

고추를 갈다가 깔때기 속으로 손을 너무 깊숙하게 넣었다는 것이었다. 근처의 상인들이 그녀를 부축해 병원으로 떠난 뒤에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건 이제 못 쓰게 되었다며 빨간 것이 고인 고무그릇 속을 흥미롭다는 듯 끔찍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곁에서 생선을 파는 상인이 범포를 펼쳐 그릇과 기계를 덮어버리자 그제야 하나둘 흩어졌다. 짧은 당근 모양으로 묶인 생강 봉지들이 좌판에서 무너져 바닥을 뒹굴었다. 공기에서 금방 갈아내린 고추 냄새가 났다.

 

나는 얼떨떨해서 나와 동행한 자매를 돌아보았다.

소라가 서 있었고 그보다 조금 뒤쪽에 나나가 서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놀랐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나는 놀랐고 그녀들도 놀란 모습이었으나 나는 그녀들을 보고 다시 놀랐다. 사람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으니까. 특히 소라, 그녀는 내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밋밋했는데 일그러져 보였다. 말라 보였고 납작해 보였다. 금방 소리를 지를 것 같았는데 금방 소리를 지르고 난 것처럼도 보였다. 자매는 이상한 싹처럼 우뚝 솟은 채로 정지되어 있었다. 그녀들의 놀람과 내 놀람은 다른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알았고 그러나 그게 뭔지는 몰랐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바지 주머니에 어색하게 손을 넣고 서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녀들의 아버지 금주씨의 죽음에 관한 일을 들은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었다.

갈렸다, 소라는 그 말에 관해 말했다. 친척들과 아버지의 회사 동료들이 모인 거실에서 다투듯 오가던 말 가운데 어린 그녀들이 듣기에 가장 무서운 말이었고 막다른 말이었고 더는 상상되지 않았던 그 말에 관해 그녀는 말했다. 그 말이 마침내 눈앞의 광경으로 풀리고 쏟아져내린 순간에 관해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 말에 관해서.

 

어머니는 시장이 가장 쇠락해가는 시기에 장사를 접었다.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전철과 연결된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면서 시장은 빠르게 쇠락했다.

삯을 낼 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때 들른 적이 있다.

토요일이었는데 대부분의 좌판은 먼지 덮인 방수포로 묶여 있었고 예전에 건어물, 젓갈, 과일, 생선, 야채, 이불을 팔던 가게들은 벽을 다 드러낸 시멘트 공간을 남긴 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 어머니가 여름이고 겨울이고 볼이 빨갛게 터지고 무른 채로 서서 장사를 하던 자리와, 그녀에게 받은 동전이나 닳은 지폐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며 지나곤 했던 옛 통로들과, 시장통에서 요란하게 뛰어다니는 사내아이들을 꾸짖으려고 먼지떨이를 휘두르던 상인들의 가게 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쇠락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상인조합에서 설치했던 아케이드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널엔 검은 먼지가 쌓여 그 아래 공간도 예전 길도 그리고 그 모퉁이도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좁은 모퉁이는 예전보다도 좁아 보였고 벽은 갈라진 채로 더럽혀져 있었다.

기묘한 죽순처럼 서서 그 방향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자매는 자랐고 이제 몇달 뒤엔 그녀들 가운데 누군가를 닮은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담배를 버리고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얼핏 좁다란 골목으로 보이는 입구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간다. 길고 가파른 이 계단은 지붕 없이 바깥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비가 오면 빗물이 흐르고 눈이 내리면 눈이 쌓여 얼어붙는다. 올겨울에도 눈이 내리면 얼 것이다. 소금을 몇줌 뿌리면 최소한 얼지는 않을 텐데 어머니는 소금을 아낀다.

나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뒤로 어머니는 나나의 안부를 자주 묻고 이것저것을 걱정한다. 애아버지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그처럼 눈치보는 아이로 자라게 만들었다며 애자 아주머니를 원망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살짝 닫고 보니 나나가 자리를 옮겨 거실에 누워 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잠든 것 같지는 않다. 담배 냄새,라고 말한다.

깼냐.

어.

왜 거기 누워 있냐.

여기가 시원해.

물 줄까.

오라버니.

………

이거 봐라.

이렇게 누워 있으면 심장 소리가 들려, 하고 나나는 눈을 감은 채로 말한다.

 

있잖아.

………

이기적인가 나는.

왜?

모세씨가 어제 나더러 그랬어. 이기적인 사람이래. 아이가 받을 사회적인 데미지라나 그런 걸 왜 생각해보지 않느냐고 했는데 나는 정말 그런 걸 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자신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생각을 덜 해서 자신있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자다 말고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왜냐하면 아기가 나만 보고 자라는 건 아니잖아.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받을 텐데 나는 그런 걸 충분히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각오를 했다지만 아이는 어떨까. 내가 무언가를 각오했다는 이유로 애까지 그것을 감당해야 하나…… 나는 그것까지 각오하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뭔가 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모르겠어. 모르는 게 늘어가. 아기는 자꾸 자라는데 나는 이대로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들어서 불안해.

………

오라버니.

지금 웃었지, 하고 나나는 말한다.

오라버니가 웃으면 나 그거 다 들리거든, 짜증나.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간 뒤로 골목이 조용해졌다.

이거 봐, 하고 나나는 말한다.

자그자그자그.

………

들린다니까.

 

*

 

자그자그자그.

나나는 아기의 심장이 그렇게 움직인다고 말한다.

듣는다기보다는 척추 끝 부분에서 가쁘게 움직이는 근육을 감각한다고 말한다. 자그자그자그자그.

그 말을 들은 뒤로 그 조그만 덩어리에 관해 생각해보는 일이 늘어났다.

자그자그자그자그.

나나가 그랬던 것처럼 속삭이듯 입으로 소리를 내보는 일이 생겼다. 몸속에서 그런 소리를 감각해볼 수 있는 몸에 관해 생각하는 일이 늘었다. 어림해볼수록 그것은 내가 어림할 수 없는 영역. 가늠해볼수록 실은 가늠할 수 없는 영역. 나나는 스스로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머물러 있지 않다는 증거로 여겨지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나나가 되어가고 있고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로 여겨지니까.

불안해.

나나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괜찮다거나 어떻게든 잘될 거라는 대꾸를 바랐을 것이다. 이 자매를 향해서는 그렇게 말할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그렇게 대꾸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며 웃어 보일 수 없었다. 낙관도 비관도 내놓지 못하고, 난처해서 웃을 뿐이다.

나야말로 머물고 있으므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으므로.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최근엔 너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적지 않다. 너를 기다리는지 너의 죽음을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너의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나의 죽음을, 세계의 끝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전제를 품고 있으면서 다른 무엇도 아닌 아기를, 미래를 염두에 둔 고민을, 괜찮을 거라며 간단하게 웃어넘길 수는 없었어.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삯에선 오늘의 특선으로 가지 튀김을 내놓을 것이다.

물을 뿌려 가게 앞을 닦고 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환기를 시키며 물기를 말리는 동안 밥을 해두고 여러가지 요리에 베이스로 사용될 육수를 불에 올려두고 식초를 섞은 따뜻한 물로 행주를 적셔 조리대를 닦는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오이를 베어먹으며 신문을 읽는다. 수년 전 내가 머물던 도시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렸다. 진앙이 해안에서 떨어진 바닷속이었으므로 그리 큰 타격은 받지 않은 듯했지만 그 정도의 지진이라면 육지도 꽤 흔들렸을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천둥처럼 허공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겠지. 천장에 달린 조명이 출렁거리고 편의점 선반에 얹힌 물건들 가운데 가벼운 것들은 바닥으로 쏟아졌을 것이다. 벌써 수년 전부터 몇백년 주기로 닥친다는 대지진이 임박했다는 예측이 있었으므로 그곳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여진이 이어지는 동안엔 대지진의 전조가 아닐까 두려워하며 몸을 구부렸겠지만 이윽고 침착하게 일상으로, 별다른 수가 없다는 듯 돌아갔을 것이다.

그 작은 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연안의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을 우려하는 기사를 읽으며 생각한다.

불이 들어오지 않던 방.

찌꺼기가 끼고 뭔지 모를 얼룩이 번져 시큼하게 썩어가는 다다미가 깔린 방이었다. 그런 방이 종으로는 둘, 횡으로는 열여섯개가 있는 목조 건물이었어. 그곳을 관리하는 여자는 말할 때마다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아주머니였는데 그녀는 그 나라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신의 세입자들을 경계했다.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세입자의 다수를 구성하는 이 외국인들이 불을 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는 실내에서 음식을 해먹는 것을 금지했다.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밖을 서성이거나 창을 두드려 안부를 묻는 척하며 방에서 화기를 사용하는지 감시했다. 형광등과 난방시설이 없었으므로 여름엔 조그만 등을 켜고 살았고 겨울엔 전기난로의 불빛으로 조명을 겸했다. 겨울도 여름도 혹독했던 방이었다. 그 나라에 머무는 동안 나는 그와 비슷한 조건의 방을 몇군데 거쳤으나 그 방은 특별했다.

네가 그 방을 방문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 방에서 보름 동안 머물고 갔다.

 

너는……

너는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고 납득하게 만드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온순할 때도, 가장 난폭할 때도, 이런 눈을 한 사람이니 이럴 법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이상한 눈이었다.

열네살 때 나는 너를 만났다. 나보다 몸이 작았고 또래 집단에서 말도 행동도 별다르게 튀는 일이 없는 소년이었던 너는, 자주 멍든 채로 등교하는 동급생이었다.

너의 부모는 둘 다 교육자로 너의 아버지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너는 네 어머니가 담임을 맡고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으므로 육년 내내 너의 담임은 그녀의 동료였다. 너는 네 자신이라기보다는 선생의 자식이었다. 네가 다니는 학교에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네가 인근의 중학교로 진학한 뒤에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너를 아는 사람이라면 너의 부모를 알았고 그런 이유로 너는 항상 이상하게 고요한 주목을 받았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다가도 네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저 녀석의 엄마가 선생이었지, 아버지가 선생이었어, 하고 새삼스럽게 주목을 받게 되는 패턴이었다.

나는 네가 백미터를 달릴 때 속도를 조절하는 것을 눈치챈 적이 있다.

너는 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조용히 무리에 섞여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고 공부나 운동을 잘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못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국어선생이 수업 중에 농담을 하다가 치약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중학교에 진학하고서야 영문법을 접하고 영어를 배우던 시절이었다. 무심결인 듯 “toothpaste”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내가 그 공허하고 퉁명스러운 발음에 놀라 돌아보았듯 다른 동급생들도 너를 돌아보았다. 너는 당황한 듯 고개를 숙인 뒤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았다.

 

너의 아버지는 자상하지 않은 선생이었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식 이상으로 자식을 사납게 교육시킨다는 소문이 공공연했다. 소문을 증명하듯 너는 잊을 만하면 턱, 턱 모서리, 눈썹 뼈 부근이나 손, 손목, 귓바퀴 같은 곳에 멍이 든 채로 학교에 나타나고는 했다.

학기초의 짧은 겨울이 끝날 무렵이었다.

매주 월요일이 되면 복잡한 방식으로 자리를 바꿔 앉게 되어 있는 교실에서 너와 내가 앞뒤로 앉을 차례였다. 너는 필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네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생물 과목을 담당하는 선생이 커다란 벼꽃을 그린 종이를 칠판에 붙여두고 벼의 수분(受粉)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풍매화(風媒花). 바람에 실려 날아다니는 화분. 꿀도 향도 없이 가볍고 담백하게 바람을 타고 이루어지는 가루받이.

너의 목덜미가 보라색이었다.

왼쪽 귀 뒤에서 맨드라미 모양으로 번져나간 보라색 멍이 목덜미에서 옷깃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녀석 또 멍들었네.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게 그것을 보고 있을 때 문득 네가 왼손으로 목을 긁었다. 손톱으로 천천히 두번을 긁고 손으로 방금 긁은 피부를 덮었다. 약지와 소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이 접힌 옷깃 속으로 쏙 들어가 있었다. 그 손끝에 닿은 멍은 어디까지 이어졌을까. 손가락 틈으로 보이는 멍과 살갗의 대비가 또렷했고 가느다란 약지가 그 경계를 더듬듯 누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그것을 보고 있다가 얼굴을 붉혔다.

예쁘다고 느꼈고 외설적이라고 느꼈다.

당시엔 외설이라는 어휘도 몰랐으므로 뭐라 표현할 말이 없어 다짜고짜 안타까웠다.

옷깃 속으로 숨어들어간 멍을 마저 보고 싶었고 너의 등을 만져보고 싶었다.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 기묘한 집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해볼까.

벽을 경계로 트인 집.

소라와 나나의 이웃으로 살던 집.

너를 만나기 두해 전에 나는 그 집으로 동급생들을 데려간 적이 있었다. 사내아이들끼리 무슨 과제를 하려고 몰려갔는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공용화장실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소라와 나나를 발견했다. 사내아이들이 문을 두드리며 나와보라고 놀려대는 통에 소라와 나나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어른이 없는 집에서 흥분해버린 아이들은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도깨비처럼 굴고 있었다. 가까스로 그들을 방으로 몰아넣은 뒤 소라와 나나를 화장실 밖으로 내보냈으나 그들은 몰래 방에서 빠져나와 현관 쪽으로 벽을 돌아 나타났다. 소라와 나나는 반 벌거벗은 채로 이번엔 자기들 부엌에 갇혔다. 사내아이들은 깔깔 웃으며 술래잡기를 하듯 벽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고 계속해서 벽을 돌아 나타나는 그들 때문에 그녀들은 방으로 이동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말리는 틈을 타서 소라와 나나가 방으로 들어가버린 뒤에도 사내아이들은 몇번이고 벽을 따라 달리며 보지, 자지, 가슴, 가슴, 하고 외치고 있었다. 사태가 진정된 뒤에도 그날 모임의 목적이었던 과제는 뒷전이고 여자의 몸에 관한 어설픈 음담패설이 오갔다. 가장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아이조차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처녀막에 관한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틈에 완전히 질린 채로 무엇보다도 얼떨떨해서 앉아 있었다. 그들을 그렇게 강렬하게 압도하는 몸에 관한 호기심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그녀들의 몸이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궁금했다.

너의 등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어깨뼈는 어떤 모양일까.

다른 곳은 어떨까.

부드러울까.

거칠까 어떨까.

너는 뜨거울까 미지근할까.

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다고 말하면 너는 어떤 얼굴을 할까.

내가 너에게 얼마나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까. 이만큼이라면 괜찮을까. 이만큼?

이만큼 더?

조금 위쪽에서 내려다보이는 네 정수리는 어째서 그런 모양일까.

귀는 왜 저렇게 되어 있을까.

목을 만지는 버릇, 너는 그것을 알까. 그게 얼마나 안타깝고 가련해 보이는지 너는 알까.

그밖에 너의 버릇들, 말하기 전에 허공을 바라본다거나 양팔을 책상에 올리고도 왼쪽 팔꿈치에만 체중을 싣는다거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엄지와 검지로 비벼 소리를 낸다거나 하는 것을 너는 알까. 네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너는 왜 그렇게 할까. 왜 이렇게 할까. 묻고 싶었고 듣고 싶었고 닿고 싶었다.

 

처음에 어떤 말로 시작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상하게 그것은 떠올릴 수 없다. 너무 긴장해서였을지도 몰라, 떠올릴 수 없는데도 그 순간의 기억이 너무 소중하고 너무 익숙하다.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물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내가 한번 더 묻자 너는 잠시 허공을 바라본 뒤 이번엔 그래,라고 대답했다.

거기까지였고 거기부터였다.

어느 순간부터 너는 내 쪽으로 돌아앉아 말하기 시작했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게 기쁘고 벅찼다. 너는 너의 아버지에 관해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너에게 엘리트 계급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자의 인생이라면 판사나 검사나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려면 벌써부터 싹을 보여야 하는데 그가 보기에 너는 틀렸다. 근성부터 이미 틀렸으므로 너는 평생 볼품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너는 퉁명스럽고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네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옮긴 뒤 나의 아버지는 어떠냐고 물었다. 그가 죽은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그의 죽음이 어땠는지를 물었다.

나는 내 아버지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술을 먹지 않은 순간엔 소심하고 술을 먹은 순간엔 용감무쌍해지는 한심한 사람이었다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내가 전해들은 그의 죽음을 너에게 들려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보지는 못한 이야기였다.

나의 아버지는 한겨울에 시장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짐을 나르던 참으로 궤짝을 실은 지게를 등에 진 채였다. 궤짝에서 굴러떨어진 사과와 톱밥 무더기가 한동안 그의 머리를 뒤덮고 있었는데 시장 상인들은 그가 왜 쓰러졌는지를 몰랐고 궤짝에 눌린 그의 목이 어떤 상태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다른 것은 건드리지 못하고 궤짝만 치워두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중에 그를 앰뷸런스에 옮기고 보니 그의 몸 아래 눌렸던 사과가 놀랍게도 따뜻하더라고, 새삼 그 인생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장례식장에 찾아온 시장 상인이 몹시 안타까워하며 내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네가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으므로 나는 세부를 상상하고 덧붙이며 내 아버지의 죽음을 말했다. 네가 특별히 흥미롭게 여긴 부분은 나의 아버지가 만취해 시장 바닥에서 사람들을 괴롭혔다는 사실과 그랬던 그가 문득 넘어져 죽고 이제 없다는 대목인 것 같았다. 죽은 사람에 관한 조심스러움이나 연민이나 슬픔은 없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사정을 짐작하면서도 나는 내 아버지의 죽음을 네게 들려주었다. 밤에는 그가 죽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고단한 얼굴을 보며 죄책감과 울적함을 느꼈으나, 그다음에도 네가 한번 더 말해달라고 요구하면 한번 더 말해주었다.

무엇이든 어느 때든.

네가 원하면 나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것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불가피했다.

 

여름이 지나면서 너는 뒷자리에 앉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딱히 덩치가 있어서 뒷자리에 앉는 것은 아니었고 선생의 눈에 덜 띄려고 그 자리를 차지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무리지어 다니면서 만만한 상대를 찾아냈고 가벼운 장난인 것처럼 동급생의 물건을 빌려가서 망가뜨리거나 다 쓴 다음에야 보란 듯 돌려주었고 과시하듯 서로의 이름을 크게 불렀고 웃을 때는 자기들끼리 책상을 두들기며 비웃듯 웃었다.

그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너는 담배 냄새를 풍겼다. 무리 중에 누군가를 흉내내듯 목소리와 행동이 커졌고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것을 대담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멍든 곳을 드러낸 모습으로 나타나서 가방을 책상에 집어던지며 그 새끼가 또 때렸다고 씩씩거리는 식이었다. 그 새끼는 저도 별것 아닌 새끼가 되고 별것 아닌 새끼는 병신 같은 새끼가 되었다. 너는 너의 새로운 동료들과 부모에 관한 욕을 주고받으며 말을 새롭게 발견해가는 것 같았고 특히나 아버지에 관한 정서를 완고하게 완성해가는 것 같았다. 네 동료들은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를 년과 놈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자신의 부모를 씨발이라고 부를 때 너는 마땅히 동의한다는 듯 신랄한 얼굴을 하고 그들 속에 있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자기 집 냉장고나 벽장에 있던 술을 몰래 꺼내 마시고 학교에 나타나거나 아예 술병을 훔쳐서 가져왔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올라서 아프다고 말하기에 그럴듯한 상태가 되는 것을 편리하게 여기는 듯했다. 머지않아 너도 그렇게 했다.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셔 머리와 귀가 빨개진 채로 조례시간 내내 엎드려 있는 일이 생겼고 점차로 빈번해졌다. 그런 날에 너는 오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조퇴하기를 원했다. 별다른 마찰 없이 교문을 통과하려면 선생의 서명이 적힌 허가증이 필요했는데 너는 나를 담임에게 보내서 네가 아프다고 설명하고 대신 받아오기를 바랐다. 나는 그렇게 했다. 한두번은 거절했지만 네가 다른 동급생을 시켜 시도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괴로워 결국엔 그렇게 했다. 나는 너를 지켜보았고 네가 나를 돌아보고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것을 내주었다.

달리 뭘 해야 좋을지 몰랐으니까.

 

편리한 나기.

그쯤 되지 않았을까.

 

네게는 그쯤이었을지 몰라도 너의 무리에게 나는,이라기보다 내 시선은 아무래도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뭘 보냐.

재밌냐.

재밌냐 우리가.

더 재밌어볼래?

그런 시비를 받은 끝에 건물 뒤편 소각장으로 끌려갔다.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는 은행나무들이 담장을 따라 백오십미터쯤 이어져 있고 그 나무들 가운데 가장 큰 나무가 자란 남쪽 모서리에 담장과 같은 재질의 벽돌을 쌓아 만든 천장이 없는 공간이었다. 쓰레기 소각이 금지된 이후로 버려진 곳이었다. 너와 네 무리가 그 장소에 이따금 모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삼층이나 사층 창가에서 그곳을 내려다보곤 했는데 이제 그 장소에 내가 내려와 있었다. 그을린 내벽 안쪽엔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은행잎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고 제일 안쪽 벽 부근엔 수년 전에 마지막으로 타고 남은 플라스틱과 목재 잔해가 널려 있었다. 아직도 설탕을 태운 듯한 냄새가 났고 바닥은 푹신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그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양손을 짚었고 옆으로 넘어진 채로 침을 흘렸다. 한두명이 내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동안 나머지는 마른 잎이 모인 자리에 앉아 잡지를 넘겨 보고 있었다. 그들은 교대로 그렇게 했다. 가장 공부를 잘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아이들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똑똑했고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예민하게 곤두서 있으면서 남의 고통엔 그토록 무감할 수 있다는 게 당혹스럽다는 것은 그때가 지나고 난 뒤에 든 생각이고 어쨌든 당시의 나는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남에게 그런 방식으로 몸을 맞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꿇려서 무릎을 꿇는, 굴리는 대로 바닥을 구르는, 그런 굴욕의 경험이 그때까지의 내게는 없었다. 그들은 내킬 때 내키는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주먹과 발을 내 몸에 쿡쿡 찔러 넣으면서 자신들에게 맞는 그 몸을 혐오하고 있었다. 혐오하기 때문에 때린다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맞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맞아도 맞아도 그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짓이겨진 낙엽 냄새 때문에 숨이 막혔다. 너는 다른 동료들과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흥미롭다는 듯 그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나를 때리느라고 바짝 다가와 있는 동급생들의 다리와 다리 틈, 주먹을 높이 치켜든 팔과 온전히 가격하기 위해 구부린 허리 사이로 너를 보았다. 엄지와 검지로 종이를 비비며 넘기는 방식, 아래로 눈을 내리뜰 때 예쁘고 더 가련해 보이는 너를. 내가 그 자리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과는 완전하게 무관한 듯한 그 모습을.

전혀 다른 공간에 앉은 듯한 그 모습을.

하지만 너는 알고 있지 않나.

주먹으로 가슴을 얻어맞을 때…… 발로 머리를 짓밟힐 때…… 정강이를 밟힐 때…… 이만큼 아픈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너도 이렇게 아팠을 것이고 고통을 느낄 줄 아는 몸 때문에…… 이만큼이나 수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심지어는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내가 지금 열망하고 있는지 원망하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 다만 마음의 강도만은, 어느 쪽이든 너를 생각하는 마음의 강도만은 어느 때보다도 거셌다. 너는 왜 모를까. 왜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까.

왜 모르려 하고 있을까.

아프냐.

겨우 이게 아프냐. 비아냥거리듯 그렇게 물은 것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보고 있지도 않은 너를 향해 거의 울먹이며 물었다.

어떨 것 같냐.

씨발 새끼야 너라면…… 너라면 어떨 것 같냐.

 

*

 

삯은 오늘 한가하다.

지난주의 특선이었던 가지 튀김에 이어 고등어 초절임을 내보았는데 날이 무더워서인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주방에 선 채로 오늘의 특선을 얹어 밥 한공기를 재빨리 먹었다. 남은 것은 뚜껑이 달린 플라스틱 그릇 두개에 나눠 담는다. 임신 중에는 등 푸른 생선을 주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이것은 나나에게는 금지, 소라에게나 맛을 보라고 조금 나눠주고 나머지는 어머니와 내가 먹을 것이다.

이렇게 삯에서 남은 음식을 가져가면 어머니는 걱정한다. 장사가 잘되지 않는 것 아니냐 요령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이것저것을 묻는다. 시장 장사를 접은 뒤 어머니는 반년 정도를 쉬다가 집에 머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며 이런저런 일을 해왔고 지금은 역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 빌딩을 청소하러 다닌다. 그녀는 요즘 파란 유니폼을 입는데 묘하게도 그걸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나도 벌고 있으니 일은 그만두고 이제는 좀 쉬라고 그녀에게 말하곤 하지만 실은 삯의 벌이가 그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수입을 늘리려면 가게에 들이는 재료의 단가를 낮추는 수밖에 없는데 내게는 타협하고 싶지 않은 문제다. 나는 맛있고 싱싱한 것이 좋다. 좋은 재료를 사용해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으면 기쁘다. 내가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먹이고 싶지는 않다. 그게 기본이다. 지켜가기가 아슬아슬하지만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은 기본. 나나는 이런 고집에 멍청이,라고 반응하고는 한다. 장사잖아 장사.

장사의 본질은 이윤, 남는 게 최고.

그렇게 충고하고 답답하다는 듯 툴툴거리지만 정말 그렇게 장사를 하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그녀에게 비난을 받지 않을까.

열빙어를 뒤적거리며 혼자 맥주를 마시던 아저씨가 계산을 마치고 나간 뒤로 한시간째 손님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이만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조용히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나나가 모세씨라고 부르는 남자. 그는 가게 안에 손님이 없는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반듯하게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는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피로해 보였다. 그는 아무런 장식 없는 갈색 가죽가방을 탁자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온수로 씻어낸 도마를 마른행주로 닦아내고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나씨가 이따금 여기 들르지요?

그는 묻는다.

나나씨가 자주 당신을 만나러 여기 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한다.

나나씨는 요즘 나하고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간절한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회사에서도 다가갈 수가 없어요. 그날 이후로 저는……

그는 탁자 모서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를 훌쩍인 뒤 다시 나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나나씨를 사랑합니까.

난처해서 웃자 표정이 바뀌며 나나씨가 당신을 사랑합니까,라고 그는 재차 물어왔다.

 

당신은 나나씨를 사랑합니까.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아닐 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어떤 사랑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게 어떤 사랑인지를 내가 당신에게 대답해야 해?

이상한 방식으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쪽을 보고 있는데도 보고 있는지 의심이 들어 그 눈을 자꾸 바라보게 된다. 나나하고는 어땠을까. 나나는 이런 사람과 어떤 장소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그는 자신을 보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흔든다.

남녀 사이에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닌 사랑은 없습니다. 지금 그렇지 않더라도 나중에라도, 남녀 사이는.

그게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저씨, 하고 다시 난처해서 웃으며 말한다.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삯을 닫고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온 새벽, 집 앞에서 개를 발견했다. 개는 깡마르고 털이 거의 없고 대체로 검었다. 집 앞이 어두운데다 털색이 그래서 어둠에 섞여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몇발짝 앞둔 지점에서야 개를 발견하고 놀라 멈춰섰다. 어둠 속에서 개의 눈이 납작한 자개단추처럼 반짝거렸다. 얇고 넓은 귀가 아래로 늘어져 있다. 도베르만 잡종으로 보인다. 다가서자 엉덩이를 오므리고 달아난다. 오랜만에 떠도는 개를 보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세면대 앞에서였다. 수도꼭지에서 개수구멍 쪽으로 길고 붉은 녹 자국이 있는 세면대에 비누거품이 고이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닦았다. 개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내가 너를 만난 무렵엔 좀더 많은 개들이 거리를 떠돌아다니곤 했는데.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나는 내 고통 때문에, 너에게 집착하는 내 마음 때문에 나나를 때린 적이 있다. 너와 네 무리가 그 버려진 소각장에서 깊은 지하의 오락실 구석으로 개똥이 뒹구는 골목 안쪽으로 나를 끌고 다니며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주먹질을 하는 일이 서너번 반복된 무렵이었다. 금붕어가 담긴 수족관 속을 아무렇게나 휘젓고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를 때렸다. 심정적으로는 너를 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풀이를 했다고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지금의 나나를 보아도 이따금 그 시절의 나나가 생각나고 얻어맞은 얼굴을 붉힌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우와, 하고 울어버린 순간의 나나가 생각난다. 그러면 나는 부끄럽다.

나나는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운다.

당신은 나나씨를 사랑합니까.

잠자리에 누워서 오늘 내게 그 질문을 던진 남자를 생각한다. 그는 난폭하게 굴지 않고 풀 죽어 돌아갔다. 그는 그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간절한 듯 보였는데 그의 간절함은 왜 나나에게 폭력이 되었을까. 나나는 이제 어쩔 셈일까. 그 남자가 있는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인 걸까. 괜찮을까.

나나씨는 당신을 사랑합니까.

 

나는 교활하다.

그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나는 내 등 뒤에서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그녀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으로 그때는 이미 다 자란 아가씨였는데 손에 쥐고 있던 동전을 내 등을 향해 던져놓고 우와, 울고 있었다. 그녀가 준 조그만 막대사탕을 그냥 받아먹을 수가 없어 마침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잔돈을 건넨 뒤였다. 이 나쁜 놈아. 나나는 그렇게 말하며 울었다. 평소의 새침한 모습은 사라지고 예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었다.

조금도 몰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나의 경우는 알에서 갓 깨어나 무언가를 목격한 오리새끼 같은 거라고 믿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설득하려고 하자 그녀는 화를 냈다. 마침내 앨범을 펼치고 네 얼굴이 찍힌 사진을 짚어 보일 때까지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게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나나는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는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나나는 물었고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는 코를 훌쩍이며 나를 바라보더니 사진을 한번 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더 예뻐,라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세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답할 수 없는데도 그녀의 마음이 사랑스러웠다.

너는 어땠을까.

나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은 있었을까.

 

운 좋게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은 했으나 너는 나를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너와 어울려 다녔던 여섯명의 동급생 가운데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사람은 둘뿐이었다. 너를 포함해 셋만 남아버려 맥이 빠진 듯 그들은 내게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이제 학교 안에 더는 흥미로운 것이 없는 듯 방과 후엔 곧장 어디론가 사라졌다. 너의 무리가 어디선가 오토바이를 두대 구해서 번갈아가며 그것을 타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번은 거리에서 헬멧도 쓰지 않은 채로 사마귀처럼 안장을 높이 올린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소년을 보았고, 나는 지금도 그게 너였다고 믿는다. 여름방학 직전엔 학교식당에서 지도를 펼쳐두고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새로운 멤버인 듯 전에는 보지 못한 얼굴도 둘이나 섞여 있었다. 너와 네 무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어딘가로 가볼 작정인 듯했다. 근처를 지나며 흘끔 보는 것으로는 어느 장소의 지도인지 알 수 없었다. 불규칙한 격자로 나뉜 노란 면들과 그 틈을 가로지르는 붉은 띠들을 분간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지도의 남쪽으로 깨끗한 파란 면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니 바다 근처인 것 같았다. 너무 멀었다. 너는 그들과 그곳으로 가는 걸까. 나보다 나중에 알게 된 그들과도? 부당하고 불쾌했다.

너는 전처럼 심하게 멍든 채로 학교에 나타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상황이 좋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네 아버지에 관한 소문이 여전했다.

한번은 겨울 운동장에서 너를 보았다. 체육수업으로 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다른 학급의 학생들이 운동복이 아닌 교복 차림으로 운동장으로 밀려나왔다. 그들 가운데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을 통해 네가 속한 학급이라는 걸 알아챈 뒤로 나는 네 모습을 찾아보았다. 나란히 선 뒷모습만으로는 얼른 찾아낼 수 없었다. 당구 스틱을 든 선생이 학생들 앞을 오가고 있었다. 쪼그려 뛰다가 멈췄다가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다시 쪼그려 뛰기 시작한 학생들 틈에서 그가 누군가를 불러냈고 그게 너였다. 그가 너에게 뭔가를 묻는 것 같았는데 네가 대답을 했는지는 거리가 멀어 잘 알 수 없었다. 선생은 당구 스틱으로 바닥을 꾹꾹 누르며 서 있다가 어느 순간 스틱을 내던지고 너를 향해 발을 날렸다. 너는 바닥에 쓰러졌다.

너덜너덜한 네트를 넘어온 배구공이 내 어깨를 때렸다.

너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약해 보였고 하찮아 보였다.

나는 부끄러웠다. 누군가 순식간에 너를 그렇게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너는 엉덩이와 머리를 툭툭 털며 일어나더니 그대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담장을 넘었다.

 

나는 배구 코트를 떠나 너를 따라갔다.

너는 교복 위에 점퍼를 입었고 납작한 단화를 신고 있었다. 점퍼 등판엔 모래가 묻었고 단화 한쪽의 끈이 풀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네 발등을 때리거나 질질 끌리거나 밟히고 있었다. 불러 세워서 끈을 제대로 매어주고 싶었는데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너를 따라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너는 가장 먼저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다른 승객은 출구 근처에 앉은 할머니뿐이었다. 너는 맨 뒷좌석으로 가서 앉았고 나도 그렇게 했다. 운전기사가 요금을 내지 않고 버스에 올라탄 고교생인 너와 나를 불러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뒷좌석 끄트머리에 앉아서 반대쪽 끄트머리에 앉은 너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반환점을 돌아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 너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서 너와 내 사이에 앉았다 내리고는 했다. 버스가 긴 거리를 달릴수록 나는 진정되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 그들의 옷깃이 서로 쓸리는 소리,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몸을 뒤척일 때 내는 소리, 무관해 보이지만 닮은 듯한 얼굴들, 끊임없이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고…… 때론 소란스럽고 때론 적막한, 직진과 커브…… 모퉁이를 돌 때 버스는 틀림없이 한쪽으로 기울었고 그러면 나는 그 긴 좌석이 시소와 같다고 생각했다. 네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내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그러다 어느 순간 한쪽이 나머지 한쪽으로 시소를 타고 흘러내려 바짝 다가앉게 되는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에 잠겨 창밖을 보았다. 얇은 성에로 덮인 유리창에 이따금 네가 비쳤다. 너는 버스에 탈 때보다 편하고 멍해 보이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종점에 다다른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나는 너를 따라 텅 빈 버스에서 내렸다. 너는 저녁별이 뜬 불그스름한 하늘을 향해 입김을 뿜으며 고개를 젖히고 있다가 문득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너 나 따라다니지 마라, 너는 왠지 시원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다시는 따라다니지 마 개새끼야.

 

개새끼야.

말 자체로는 다정하거나 친절하다고 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그 흔하고 보잘것없는 욕 한마디가 내게는 결정적이었다. 결정적이었다,라고 이제 와 생각한다. 희망이라고 해도 좋다. 무척 조심스러운 말이니까 가능성, 정도로 불러볼까. 여지,라고 해도 좋다. 다정했으니까.

어떤 말보다도 그 욕 한마디에 그때까지 내가 너로부터 접해본 적 없는 상냥함이 담겨 있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는 너의 소식을 들었다.

첫번째 입시를 실패하고 집에 머문다는 소식,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두번이나 대답해 재검 평가를 받고 두번째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 한밤에 집안의 유리창과 아버지의 차를 야구방망이로 두드려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든 뒤 떠났다는 소식, 등등을 전해 들었고 이따금 나는 너를 잊거나 하며 살았다.

 

*

 

요즘은 자주 꿈을 꾼다.

고요하고 적막한 꿈인데 이상하게 악몽으로 여겨지는 꿈.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어머니는 최근에 나나에게 줄 조각이불을 완성했다. 나나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틈틈이 만들어서 완성한 것이다. 다채로운 색의 공단과 좋은 면으로 만들어진 옛날 이불을 여러채 자르고 잇대어서 나도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이불을 만들어냈다. 나나에게 준다기보다는 아기에게 주는 것이므로 아직은 비밀,이라면서 그녀는 그것을 서랍에 개켜두었다. 나나는 올겨울과 내년 봄 사이에 예쁜 조각이불을 한채 받을 것이다.

흐르는 땀 때문에 문득문득 잠에서 깨곤 하는 밤이 이어졌는데 어느 틈에 그런 밤은 사라졌다. 나뭇잎들의 색이 변했고 무엇보다도 밤 기온이 변했다. 밤에는 공기가 차가워 이제는 창을 열어둔 채로 잠들지 못한다. 삯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따뜻한 것을 주문해 먹고 가는 손님이 늘었다. 어머니는 가을이 조금 더 깊어지면 작년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의 무덤을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계획이 있다고 말하자 나나가 올해는 동행하겠다고 졸랐다. 삯에서 저녁으로 국수를 먹는 참이었다. 안돼, 하고 소라와 나는 동시에 말했다.

 

산이라서, 힘들어.

천천히 오르면 되지.

배도 부른데 어떻게 오르려고.

산, 산, 산에 가고 싶다아.

안된다니까.

그럼 나 맥주.

맥주같이 생겨가지고 맥주 같은 소리 하네.

쳇.

나나는 삯의 의자에 달랑 앉아서 입을 비쭉 내민다. 기분은 좋아 보이지만 입술이 말랐고 안색이 탁하다. 배가 더 부르면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오늘은 소라가 나나의 회사 앞까지 갔다가 함께 퇴근했다. 최근엔 소라가 그렇게 마중을 갈 때가 많다. 나나는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다. 회사에서는 괜찮을까, 동료들 틈에서 애매하지는 않을까, 그런 걸 물으면 괜찮아,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지만 퇴사의 이유가 임신일 경우 실업급여에서 제외된다는 둥 말하는 것을 보면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모세라는 사람에게 놀란 소라는 위험하니 그만두라고 틈날 때마다 달래고 조르는 모양이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나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괜찮아?

별로 괜찮지 않아.

안 괜찮아?

얼마 전까지도 임신한 줄 모르고 살이 쪘다거나 몸이 너무 좋아졌다고 말해오던 사람들이 최근엔 뒤에서 수군거린다고 나나는 말한다. 혹시라도 모세라는 사람하고 더 얘기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나나보다도 소라가 먼저 반응한다.

얘기할 게 뭐 있냐.

다치게 했잖아 나쁜 놈, 그걸로 끝, 얘기도 하지 마,라고 단숨에 덧붙인 뒤 한참 전에 따라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나나가 눈을 굴려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소라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실은, 하며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라고 나나는 말했다.

나 말이야 모세씨하고 싸워본 적이 없어.

싸울 거야?

싸운다기보다는…… 나 요즘에 알았어. 내가 모세씨에게 모세씨는 어떠냐고 묻고 대답을 들은 뒤에 그 대답을 두고 대립해보려고 한 적이 없다는 거. 싸워본 적이 없는 거야.

싸우겠다는 이야기?

달라……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조금 달라. 더 얘기를 해보고 싶어. 모세씨하고 나는 다르니까, 그 다른 점에 관해 더 얘기해보고 싶어. 나는 지금의 모세씨를 신뢰할 수 없지만 모세씨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하는 것뿐인지도 모르잖아. 살아오면서 자기가 당연하다고 여긴 것 말고 다른 것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던 것뿐인지도 몰라. 그래서 얘기해보려고. 맞춰갈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모세씨에게 그럴 여지가 있는지, 그걸 알아보고 싶고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게……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그럼 여기로 데려와.

어?

여기서 얘기해.

이 좁은 데서…… 다 들릴걸, 싫다.

안 들을게 여기서 해.

화장실에 다녀온 소라가 미닫이문을 닫으며 비가 올 것 같다고 말한다. 삯엔 우산이 네자루 있다. 긴 것이 세자루. 짧은 것이 한자루. 한개는 비상용으로 내가 가져다 둔 것이고 나머지 세개는 손님이 잊고 간 것이다. 우산이 충분하다고 말하자 소라는 마음을 놓은 기색으로 맥주를 마신다.

고구마를 더 튀겨서 넘겨주고 종지에 간장을 따르는데 몇 방울이 탁자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앗.

소라가 탁자를 가리키며 붉게 상기된 얼굴을 들었다. 나나 방울 소라 방울 나기 방울, 하고 말하고, 술이었나 간장이었나, 머리를 갸웃한다. 나나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라가 그걸 여태 기억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너는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본래 너에게 들었다.

십년이나 된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나는 동창의 부고를 접했다. 출국을 한달 앞둔 날이었고 혹시나 몰라 가입해두었던 동창 네트워크를 통해서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바로 기억해냈다. 아버지가 목수인 목공소네 아들. 고교 때 얼굴 형태가 바뀔 정도의 오토바이 사고를 낸 적이 있는 동급생.

너와 어울려 다녔던 무리에 그가 있었다.

장례식장은 택시를 타고 이십여분 걸리는 거리였다. 일부러 늦은 시간을 택해 갔다는 것은 작은 기만이었다고 해두자. 동창의 죽음보다도, 어쨌거나 한시절 얼굴을 보고 지낸 사람의 죽음보다도, 나는 네가 궁금했다. 너는 그 자리에 있을까…… 내가 그 자리에 가면 너를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박동이 달라졌다. 한동안 너를 떠올리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의 부고로 감정이 돌아왔다.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너를 향한 감정을 되살려냈다. 장례식장의 위치를 따져보면서 죽은 사람에 관한 애도보다도 너를 만나야겠다는 갈망이 있었고 그것에 관하여 나는 지금도 자책하고 싶지 않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모조리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너에 관해서라면 그게 내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까지를 깨달았으니까. 간단히 말하자. 나는 너를 보러 그곳에 갔다.

이틀째 되는 날이었으므로 사람이 많았다.

너는 다른 세명과 함께 제일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중에 두명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네 곁에 앉았다. 순환하는 상차림을 수월하게 하려고 넓은 전지를 펼친 상 위에 떡과 고기를 담은 접시들이 있었고 빈 술병이 벌써 여러개 놓인 자리였다. 너는 나를 알아본 듯했으나 다른 이들은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동창이라고 말하자 이미 불콰해질 대로 불콰해진 그들은 두 팔을 벌리며 내 어깨를 안으려 들었고 근처의 빈 잔을 끌어당겨 내 몫의 잔을 만들었다. 비웃듯 뚫어지게 관찰하는 너의 시선을 느끼며 나는 묵묵히 소주를 받아먹었다. 학원강사, 주차요원, 상점 판매원, 나의 동창생들은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변변찮은 일이라고 칭하며 씨발, 좆도, 말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만취한 이들은 다른 조문객과 유족에게 눈총을 받고 있었다. 한눈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더 떠들썩하게 구는 것처럼도 보였다.

내가 앉은 자리는 몇개의 상을 사이에 두고 영정을 마주보는 자리였다. 국화로 둘러싸인 동창의 얼굴이 보였다. 너는 말했다.

너 저 새끼랑 친했냐.

아니.

저 새끼가 너 되게 싫어했어.

어.

……왜 왔어?

너 보러.

너는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잠자코 잔으로 눈을 돌리고 소주를 들이켰다. 놀라지도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잔을 들었다가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도로 내렸다. 나는 동창이 어떻게 죽었느냐고 물었다. 너는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나를 보다가 들고 있던 소주잔을 전지로 덮인 상에 내렸다. 나는 너의 손가락이 맑은 술에 담겼다가 전지로 옮겨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지에 술 한 방울이 얹혔다. 이윽고 한 방울 더.

하나 더.

하나 더.

다섯개까지 알코올 방울을 상 위에 얹은 뒤 너는 각각을 짚어가며 이게 나, 이게 너, 이게 저 새끼, 이건 누군지 몰라, 이것도 누군지 몰라,라고 말했다. 다 다르지. 다 다른데 끝은 결국 다르지 않지. 모두 증발이다. 어떻게 죽은 게 무슨 상관이야. 죽고 나면 없어. 저 새끼도 없어. 저 새끼와 같은 것은 이제 없어. 모두 그렇게 죽는다. 멸종이야. 어느날 문득, 저렇게 멸종, 하고 덧붙이며 너는 영정을 향해 턱을 들어보였다. 일행 가운데 하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제짝이 아닌 듯한 신발을 신고 화장실 방향으로 갔다. 나머지 둘은 서로를 향해 머리를 들이대는 듯한 자세로 툴툴거리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아버지는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너는 눈을 빛내며 잔을 들어올렸다. 아버지는 멀쩡하다. 쌩쌩하다. 왕성하고 정력적이다. 정력도 쎄. 망하지도 않고…… 잘 지내고…… 아주 나를 한심하게…… 볼록하게 부풀어 있던 알코올 방울이 전지로 스며들었다. 나는 가깝게 찍힌 두개의 방울이 종이에 먹혀 한개의 엷은 영역으로 번져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너는 장지(葬地)에 동행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얼마 뒤에 일본으로 떠나서 한동안 머물 거라고 말했다. 거기서 연락해도 되느냐고 묻자 너는 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더듬어 집었다.

나는 주소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엽서를 보낼 테니까. 허깨비처럼 공중으로 흩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메일이나 전파 같은 것 말고, 물질적으로 당도할 수 있는 번지수가 필요하다고 말하자 너는 다시 웃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하나뿐인 부족도 있는 거지 세상엔.

소라에게는 그렇게 말했으나 그것은 거의 자조에 가까운 나의 이야기.

 

나는 일본에서 이년을 머물다 돌아왔다.

소라와 나나는 한동안 그곳에서의 생활을 내게 물어왔다.

어떤 집에서 머물렀나.

다다미가 있는 방이었나. 다다미를 밟아봤나. 음식은 어땠나. 번화가는 어땠나. 사람들은 어땠나. 지진을 겪어봤나. 그 도시에서는 뭐가 아름다웠고 뭐가 무서웠나.

다다미가 있는 방이었다. 다다미를 밟아보았다. 음식은 대체로 짜서 내게는 맞지 않았다. 번화가엔 사람이 많았다. 이따금 지진으로 흔들리면서…… 나는 일하고 먹고 잤고, 영양부족이나 스트레스로 한동안 피부병에 시달렸다.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국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채면 표정이 싸늘해졌다. 속임수를 쓰는 브로커가 있었고 터무니없는 급료에 항의하자 불법 노동과 거주를 관계당국에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던 한국식 식당의 한국인 부부가 있었다.

아름답다고 여겼던 광경은 한밤의 번화가에서.

그때 나는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는데…… 넓은 도로를 건넌 곳에 고성(古城)을 둘러싼 검은 담벼락이 이어져 있었고 그 담벼락 앞에 드럼을 두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도로를 건넌 곳이라서인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박자를 타는 듯 상체와 머리를 앞뒤로 크게 꺾어가며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기보다는 행위예술을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 곁에 선 사람들은 무뚝뚝하게 선 채로 그쪽을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장소에 이상한 방식으로 드럼 세트를 구비해두고 그는 혼자서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다.

무섭다고 여겼던 것도 같은 광경.

몹시 격렬하게 두드리고 있는데도 들리지는 않았던 그의 드럼.

아무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듯한 그 기묘한 발광.

 

당시엔 입이 닫혀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나는 너를 잃어버린 뒤라서, 네가 증발해버린 장소에 관한 이야기는 도무지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으니까.

삯을 닫고 이제 집으로 간다. 소라는 오늘 취했다. 사무실에서 이사라는 남자가 자꾸 치근거린다며 한번만 더 그러면 때려줄 테다, 눈앞에 있는 것처럼 주먹을 흔들어 보인다. 나나는 배가 불러서 빠르게 걷지 못하겠다며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말한다. 밤공기가 차갑다. 셋이서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라가 내게 묻는다.

힘들었어?

뭐가.

거기서…… 일본에서.

아.

뭐가 제일 힘들었어?

잘 몰라.

몰라?

몰라 잘……

………

……얘기해줄까.

어.

한번은…… 인도네시아 사람 둘이 옆방에 살았는데…… 이십대 연인이었는데 피부색이 예뻤고 둘 다 눈은 이렇게 크고…… 이름은 미야 그리고 와얀.

와얀.

나도 너처럼 와얀에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은 적이 있었어.

그래?

그랬어.

뭐랬는데 와얀이.

사람들이 자기를 어린애처럼 다룰 때. 지적으로 모자란 존재처럼 다룰 때. 약한 사람처럼 다룰 때. 그런데 그럴 때, 정작 본인이 적극적으로 모자란 존재이고 싶을 때. 진심으로 열등하게 기고 싶을 때. 모자라고 약한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싶을 때. 그 마음과 다툴 때. 하지만 그것보다도, 소중한 연인이 혐오스럽고 지저분하고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을 목격할 때. 그렇게 낯선 세계에서 둘이 함께 그렇게 취급될 때…… 그보다도 연인이 그렇게 취급되는 것을 목격할 때.

………

………

 

그런데 그 사람 말을 용케 알아들었네.

어.

일본어로 했어?

아니.

그럼 영어?

아니.

……한국어?

인도네시안.

그런데 그 말을 다 알아들었다고?

그냥 알겠던데.

뭐냐!

하하.

사기꾼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는 언제?

 

나는…… 와얀과 미야를 볼 때. 와얀은 밤. 미야는 낮. 걔네는 그렇게 교대로 일을 다녔는데 둘 가운데 하나가 출근할 때는 나머지 하나가 배웅하러 나왔거든. 와얀은 미야를…… 미야는 와얀을…… 그걸 볼 때 가장…… 쓸쓸했지. 힘들다기보다는 쓸쓸했고 그게 내가 가장……

 

머물 곳을 구하고 주소를 얻은 뒤로 나는 네게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적지 않을 때도 있었고 간단하게 한 문장이나 두 문장을 적을 때도 있었다.

비 내린다.

도쿄는 오늘 흔들렸다.

여기선 곱창요리를 호르몬이라고 불러. 나는 호르몬을 나른다.

불량배들이 오늘 내게 깡통을 던지며 오니처럼 웃었다. 오니란 도깨비라는 뜻.

화분 주웠다.

지난번 화분에 꽃이 피었다.

감기 걸렸다.

오늘도 비. 일본의 비는 미지근하고 끈끈하다.

조금 긴 이야기를 적을 때도 있었다.

밤에 버스를 타려고 서 있다가 일곱살쯤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걸어가는 여자를 보았어. 바쁜 볼일이 있는 것처럼 빠르게 걷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의 가방이 그녀의 팔뚝에 닿았고 그러자 그 남자가 화를 냈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중년남자였어. 여자가 죄송하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화를 내면서 욕을 하고 있었어. 여자는 처음엔 사과하다가 나중엔 맞서서 화를 내기 시작했고 남자는 그녀를 향해 바바,라고 부르면서 시네, 하고 외쳤어. 쿳소 바바, 시네. 그러자 여자아이가, 여자보다도 한발 앞으로 나서면서 따지고 드는 거야. 귀여운 후드가 달린 빨간 점퍼를 입은 모습으로 그 남자와 마찬가지로 시네, 시네, 하고 날카롭게 외치고 있었어.

시네, 시네.

 

어느 쪽이든 너는 답장하지 않았다.

답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거처를 옮긴 뒤 휴일이 되면 나는 이전에 살던 곳까지 걸어가서 우편물을 뒤져 확인하고는 했다. 그러다 들키면 나도 모르게 뛰어 달아났는데 한번은 그렇게 달아나면서 스또오까, 스또오까,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비탈을 구르듯 달려 내려올 때까지도 그 소리는 내 뒤통수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왠지 나는 웃음이 터졌다. 방으로 돌아와서도 스또오까, 스또오까,라고 생각하며 배가 아플 정도로 웃고, 배가 너무 아파 엎드려서 볼을 바닥에 대고 헐떡거리다가, 다시 웃었다.

정작 네 엽서를 받아보았을 때는 웃을 수 없었다.

너는 조만간 이쪽으로 건너올 테고 당분간 내 방에 머물고 싶다고 적었다. 서둘러서 대강 적은 글씨체였다. 보낸 날짜를 확인하니 열흘 전에 보낸 것으로 네가 당도한다는 날짜는 그로부터 한달 뒤였다.

너는 그날 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 이맘때였을 것이다.

백팩을 맨 모습으로 너는 내 초라한 방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짧게 구부러진 전선이 두개 튀어나온 것을 유심히 바라본 뒤 흐음, 하며 너는 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바닥에 널린 것 몇가지를 치웠다. 너는 출입구 근처에 가방을 툭 내리고 나를 향해 말했다. 잠깐이면 돼. 여행을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고 다른 볼일이 있는데 그때까지 머물 곳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잠깐만 머물다 갈 거야. 너는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나는 어판장에서 얼어붙은 생선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내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면 목욕탕에 들러 목욕을 하고 귀가했다. 네가 머무는 동안 그것은 빠뜨릴 수 없는 일과가 되었다. 조바심에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방으로 돌아가고 보면 너는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이미 나간 뒤였다. 그런 밤엔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네가 너무 어둡다고 여기지 않도록 조그만 등을 켜두고 잤다.

너는 낮 동안엔 자는 듯했고 주로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이나 아침에 돌아왔다. 나는 네가 어디를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밤에도 그 방에 머무는 일이 있었고 그럴 때는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냉장고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때그때 근처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갔다. 너를 기다리는 다른 밤과 마찬가지로 등을 켜두고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들었고 너는 말했다.

너 우리 아버지가 선생인 거 알지? 우리 엄마도 선생이다. 이제는 둘 다 교감이야. 아주 잘나간다. 4학년 때 담임은 우리 엄마가 선생이라고 점심때마다 나를 불러내서 같이 밥을 먹었다. 애들 다 자기 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나만 자기 책상 앞으로 불러내서 자기랑 마주보면서 밥을 먹게 하는 거야. 그게 얼마나 재수없었는지 아냐. 난 정말 싫었다. 혐오스러웠어. 고상한 척하는 년이 밥을 어찌나 추잡하게 먹던지. 먹는 모습, 먹는 소리,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밥을 추잡하게 먹는지 난 그때 다 알았다. 재수없고 싫었는데 말을 못했다. 혼날까봐. 그래서 집에 가서 혼자 울었는데 생각해보면 진짜 병신이었지. 그 말 한마디를 못해서.

너는 내가 알고 있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한번은…… 하고 나는 시작했다.

한번은 교실에서…… 네가 곤란해하는 걸 본 적이 있어. 필통을 들여다보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보니까 필통 지퍼에 풍선이 낀 거였어. 필통 안에 들어 있던 녹색 풍선이…… 지퍼에 끼어서 그것 때문에 너는 지퍼를 닫지도 못하고 열지도 못하고 애를 먹고 있었어. 얼굴이 빨개져서…… 그냥 열면 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가 그 지퍼를 열어버렸어. 지퍼는 죽, 하고 단번에 열렸어. 너는 으앗, 하고 소리를 냈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어. 아픔을 생각하는 것처럼. 풍선이 찢어질 때 풍선이 아팠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너는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흐음, 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워서 그랬을걸. 찢어지면 못 쓰게 되니까. 풍선이 아까워서.

………

너 나 좋아하지.

………

그래서 좋아했냐.

………

그런데 깨지. 이제 어쩌냐.

………

나하고 자고 싶냐.

………

섹스 말이다. 섹스.

깔깔 웃은 뒤 너는 맥주를 더 마셨고 그러다 얼굴과 목을 붉힌 채로 쓰러져 잠들었다.

 

너는 돈을 벌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먼 친척뻘 되는 사람으로 젊었을 때부터 온갖 말썽을 일으키다가 함께 살던 여자가 자살한 뒤로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자세히는 물을 수 없었는데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서 그를 찾기는 했으나 일이 잘되어가지 않는지 너는 부루퉁한 얼굴로 돌아올 때가 많았다. 짜증이 늘었고 예민하게 신경이 곤두서서 그 방에 관해 거칠게 불평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돌아온 너는 방을 밝히고 있던 등을 넘어뜨렸다.

나는 그 기척에 잠이 깨였다. 바닥에 쓰러진 등불을 일으키고 보니 너는 다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왼쪽 눈꺼풀이 자주색으로 부어올라서 눈이 닫혀 있었고 눈썹 부근에 손톱으로 누른 것처럼 빨갛게 벌어진 상처도 있었다. 입술도 부었고 턱에도 거뭇한 반점이 점점이 올라와 있었다. 얼굴에 든 멍 상태를 봤을 때 옷에 가려진 부위에도 멍이나 상처가 있을지 몰랐다. 제대로 벌어지지 않는 눈꺼풀 틈으로 붉게 충혈된 눈이 보였다. 들여다보려는 나를 자꾸 쳐내는 너에게 실명할지도 모른다고 설득하고 연고를 발랐다. 실명할지도 모른다. 겁이 났다. 눈 주위에 발라도 되나 의심하며 일단은 그것밖에 처치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므로 연고를 상처에 발랐다. 언 생선의 주둥이나 지느러미에 찔리고 긁힌 채로 방에 돌아왔을 때 내가 사용하는 연고였다. 너는 잠자코 눈을 내리뜨고 있었다.

손가락에 연고가 남았다.

더 바를 곳은 없을까 살피다가 붓기 때문에 살짝 벌어진 네 입술을 보았다. 나는 그곳에도 연고를 얹으려다가 네게 입을 맞췄다. 너는 흠칫 놀라서 뒤로 주저앉았다. 나를 바라보며 동요하는 너를 향해 나는 다가갔다. 다시 입술이 닿자 너는 나를 밀쳐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붙잡아 휘둘렀다. 딱, 하는 충격이 있었고 윗입술이 얼얼했다.

야, 이 새끼야.

너는 말했다.

어디를 건드려. 누가 건드리래. 씨발 새끼야 기분 더럽게.

나는 엎드린 채로 이상하게 진하고 검은 빛깔을 띤 핏방울이 다다미로 떨어지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손에 들고 있던 머그를 바닥에 내던져 박살을 낸 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프냐 개새끼야.

두려워서인지 분해서인지 너는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대답하는 거 봐라 뻔뻔한 새끼. 아프라고 때렸다 이 새끼야. 만만하냐 내가. 만만하냐고. 내가 아무리 바닥에 떨어져도 너 같은 새끼하고 그렇게…… 내가 그렇게까지는…… 아프냐 이 새끼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니가 아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너의 발이 다다미를 스치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바닥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고,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나서서, 문을 열어둔 채로, 철판을 덧댄 목조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것을, 그 소리를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눈조차 들 수 없었다. 너무 아파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전부였다. 심장이 한번 뛸 때마다 눈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저려왔다. 가장 얼얼한 부분을 혀로 건드리자 툭, 하고 움직였다. 눈을 감자 눈 속에서 별이 터진 듯했다. 어금니 쪽으로 고였던 피가 입술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이웃한 어느 방에선가 어느 일본인이 시끄럽다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너는 그렇게 사라졌고 그 방엔 내가 남았다.

 

나는 계속 일을 다녔다.

잇몸 근처에서 부러진 채로 간신히 매달려 있던 이는 며칠 뒤 뿌리를 남기고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방에 석달을 더 머물렀다가 다른 방으로 옮겨갔다. 더는 한국으로 엽서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휴일이 되면 네가 잠시 머물고 간 목조 건물을 찾아가서 우편함 앞에 섰다. 네게는 소식이 없었다.

일년 뒤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가 엽서를 보내곤 했던 주소지를 찾아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걸어올라간 동네의 낡은 집이었다. 대문에 달린 벨을 누르자 여자가 응답했다. 인터폰으로 네 이름을 묻자 그녀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하다가 얼마 전까지 셋방에 살던 청년이 아니냐고 답했다. 그녀는 네가 일년쯤 전에 셋방을 정리하고 떠났다고 말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너도 돌아왔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곳 어딘가에 남아 있을까.

나는 그뒤로 네 소식을 듣지 못했다.

 

너를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때때로 나는 네가 죽는 순간의 꿈을 꾼다.

꿈에서 깨고 나면 꿈이었다는 것에 안도한다.

하지만 언제고 너는 죽을 것이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렵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너의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언제고 이 엽서가 네게 도착한다면 좋겠어.

 

네가 어딘가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당도할 때까지, 이 엽서를 이어가며 기다린다.

그랬으면 좋겠어.

어딘가에 네가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 있다고 믿으면서.

 

*

 

소라와 나나는 요즘 금주씨의 제사를 고민하고 있다.

격식을 제사의 중요한 조건으로 둔다면 그녀들은 금주씨의 제사를 제대로 지낸 적이 없어. 애자 아주머니의 영향이겠지. 내가 그녀들을 만난 이래로 기일이 되면 그녀들은 북쪽에 가장 가까운 창 아래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몰래 마련해두는 형태로 제사를 지내왔다. 맑은술과 밥 한공기에 사정에 따라 국이 추가될 때가 있었고 어느 때는 국화빵이나 아이스캔디나 바나나푸딩 같은 묘한 것이 함께 놓여 있을 때도 있었어. 애자 아주머니와 함께 살 때 그녀들은 자기네 어머니가 약을 먹고 잠든 밤 시간을 이용해 상을 마련했고 잠깐 내버려둔 뒤 바로 치웠다.

올해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더니 그게 글쎄, 하고 소라가 말한다.

제사를 받아가래.

누가?

할머니가.

듣기로 최근엔 소라 편에 드문드문 왕래가 있는 모양이었다. 금주씨의 기일을 앞두고 할머니가 연락해서 말하기를 그간 집안에서 합동으로 지내왔는데 이제 손녀들이 저희 아버지의 제사를 가져갔으면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진짜 자기들 마음대로, 나나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내밀지만 제사를 주고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비단을 주면 되나, 소라가 말한다.

웬 비단.

비단을 주고 제사를 받았다. 있잖아, 그런 이야기가.

……그건 꿈.

꿈?

꿈을 팔았다,겠지.

그런가.

그런데 말이야, 하고 나나가 말한다.

굳이 그 제사를 받을 필요가 있나. 여태도 우리 나름 지내왔는데.

그래도 그간 아버지가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상이 두개라서. 올해는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하고.

뭔가 얄미워.

할머니에게는 뭐라고 대답했어?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하지만 올해는 우리끼리,라고 나나가 말한다.

 

금주씨의 기일에 나는 일찍 삯을 닫고 자매의 집으로 갔다.

나나가 밀가루 묻은 손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둘이서 월차를 내고 종일 애쓴 듯 집 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올해는 애자 아주머니가 없어서 다른 때보다 넉넉한 상에 음식 가짓수도 늘어났다. 밥과 고깃국과 떡과 사과가 준비되었고 완자를 만들고 조기도 쪘다. 나나가 난생처음 만들어보았다며 산적이 담긴 냄비를 열어 보이는데 간장이 듬뿍 들어가서, 짜 보인다.

밥은 서쪽, 국은 동쪽.

대추와 머리는 동쪽, 밤과 꼬리는 서쪽.

소라와 내가 각자의 주장으로 그릇 위치를 옮겨가며 상을 차리는 동안 나나는 배를 편하게 하느라고 비스듬히 앉아서 붓펜으로 지방문을 적었다. 소라가 그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옛날에도 나나가 이렇게 적었지,라고 혼잣말처럼 말하자 나나는 얼굴을 붉혔다.

상을 차리고 지방문을 붙이고 촛불을 켜고 그 불로 향을 피운 뒤 자매가 술과 절을 올렸고 그뒤로는 밤새 상을 내버려두고 제사상 곁에서 남은 음식을 먹으며 놀기로 했다. 향은 다 타도록 두고 초만 바꿔가며 방을 밝혔다. 똑같은 길이의 초인데도 왼쪽과 오른쪽이 녹아내리는 속도가 달라 왼쪽보다도 오른쪽이 짧았다.

나나는 배가 무겁다며 옆으로 드러누워서 언젠가 들어본 듯한 뉴스를 얘기했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세개의 혜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세개의 혜성이 지구를 향해 오고 있으며 넉달 뒤엔 그중 두개가 지구 대기권을 아슬아슬하게 스쳐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건 상당히 오래된 뉴스가 아니냐고 묻자 나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로 어제 발표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나는 말이지, 하고 나나는 말했다.

예전엔 이런 뉴스를 들으면 아 그래 지구가 망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별다른 감상이 없었는데 요즘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아이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할 것 같은 거야. 아이나 나나 말이지.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리면.

왜 끝난다고 생각해,라고 소라가 꾸짖듯 말한다.

좋은 것만 생각해도 모자랄 시기에 왜 끝날 걸 생각해.

걱정되니까.

왜 그런 걸 걱정하느냐고.

그러니까, 나는 요즘 그런 게 걱정돼.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

멸종했잖아.

………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서 서서히 사라진 거야.

생각보다는 길다.

길지.

………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천만년이면 나나가 십만명.

소라와 나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나를 보았다.

나나가 십만번은 반복되는 정도의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소라와 나나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그런 세계는 징그럽다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십만번 안에 웃는 나나가 있고 우는 나나가 있고 화를 내는 나나가 있고 그리워하는 나나가 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나가 있고 두려워하는 나나가 있고 수줍어하는 나나가 있고 토라진 나나가 있고 기다리는 나나가 있고……

소라도 있고……

나기도 있고……

음식 준비를 하느라 고되었는지 소라와 나나는 드러눕거나 엎드린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어두운 불빛으로 일렁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사상의 동쪽과 서쪽 모서리에 놓인 두개의 촛불이 흔들리는 빛의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촛농이 바직거리며 탔다. 소라와 나나는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고요했다. 불이 꺼지면 공간도 아주 꺼져버릴 것 같은 적막.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와 같은 것을 봐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머물고 갔던 그 방을 생각한다.

그 방은 여태 있을까.

내가 그 방을 알기 전에도 수십년 동안 있어왔으므로 여태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다.

다시 가보게 되는 날도 있을까.

 

너를 본 지 오래되었다.

 

 

娜娜

 

나나, 꿈을 꾸었습니다.

 

잠에서 깨고 보니 창밖에 거대한 달이 떠 있었습니다.

커다란 창인데도 창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달이 떴습니다. 이불 속에 앉은 채로 하얀 달빛을 받으며 달을 바라보다가 달이네,라고 하자 너울너울 달이 움직입니다. 수면에 뜬 달처럼 여러겹의 동심원으로 일렁거리는 것입니다. 간지러워 웃는 것 같고 칭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다가 맑고 잠잠한 달로 돌아옵니다. 희한하네,라고 중얼거린 순간 안쪽에서 배를 주욱 걷어차는 느낌에 정말, 깨고 말았습니다.

방은 어둡고 따뜻합니다.

누군가 덮어준 담요가 몸에 감겨 있습니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던 모양입니다. 아기가 다시 한번 배꼽 아래쪽을 길게 걷어찹니다.

아기는 요즘 밤에 움직입니다.

엄마가 움직이는 낮 동안엔 숨을 죽이고 있다가 밤에 이쪽에서 숨을 죽이면 그때 비로소 움직입니다. 가끔은 너무 움직여서 오늘 밤처럼 나나를 깨우기도 합니다. 그런 날엔 밤새 서너번은 같은 일이 반복되기 때문에 수면이 고르지 않고 몸이 피곤합니다. 요즘엔 그래서 잠들기 전에 배꼽에 손을 올리고 엄마는 졸리다, 이제 자야겠으니 너무 움직이지는 마라,라고 말합니다. 나나는 이제 나나를 엄마라고 칭하는 일이 늘었습니다. 엄마라고 자칭하는 일에 상당히 익숙해졌습니다. 희한합니다. 나나가 나나를 엄마라고 자칭할 때마다 어색함을 느끼는 듯했던 소라도 요즘엔 나나의 배에 손을 올리고 엄마가 이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 니가 잘 다뤄야겠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것도 희한합니다.

아침에 소라에게 달을 보았다고 말하면 태몽을 꾸었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느낌의 꿈입니다.

하지만 소라가 이미 단풍 꿈을 꾸지 않았나.

두개의 태몽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도 있을까, 생각하며 꿈에 본 달을 생각합니다.

수줍은 듯 일렁이던 달을 생각하자 주책없게 가슴이 미어집니다.

 

언젠가 나나는 세상이 끝나는 날에 그런 달을 보게 되는 광경을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런 달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의 끝이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엔 똑같은 것을 두고 그렇게 태평하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라도 세계는 끝나버릴 것 같고 그 순간이 모두에게 처참할 것 같아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을 늘려버린 바람에, 나나는 예전보다 약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라버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천만년이면 나나가 십만명.

나나가 십만번은 반복되는 시간.

 

인간은 공룡이 아니므로 공룡보다는 빠르게 끝나버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룡보다도 느리게 끝나는 경우라는 것도 있을지 모르겠네. 어느 쪽이든 세계가 끝나는 순간이란 천천히 당도할 것이므로 나나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애자는 요즘도 밤에 전화를 걸어옵니다.

가엾게도.

애쓰지 마.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한편 생각합니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

나나와 소라와 나기와 모세씨와 아기까지 모두, 어쩌면 애자의 말마따나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덧없어 무의미한 존재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아기는 이제 잠잠합니다. 소라도 오라버니도 잠을 자느라고 편안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모두 잠든 밤, 어둠 속에서 그들의 기척을 듣습니다.

나나는 날이 밝고 나면 모세씨를 만나러 갑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