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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로랑 조프랭 『캐비어 좌파의 역사』, 워드앤코드 2012

모호한 좌파를 위한 변명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donnard@hanmail.net

 

 

10828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에 출몰하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유령이.” 유령이라서 그런 걸까? 강남좌파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다. 강남구에 사는 야권 지지자들이 강남좌파로 분류되는가 하면, 잘생기고 옷 잘 입고 진보적인 대학교수가 강남좌파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유명 사립학교에 자식을 보낸 야당 정치인이 강남좌파라고 매도당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강남좌파란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을 가리킨다지만, 한국의 야당 정도를 과연 ‘좌파’라고 불러도 좋은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도대체 강남좌파가 욕인지 칭찬인지 그것부터 아리송하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한국 언론에서 강남좌파를 비판할 경우, 부유한 생활을 빌미로 그들의 진보적인 언행을 비난하는 우파적 비판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강남좌파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캐비어 좌파’(gauche caviar)의 경우엔 어떨까? 프랑스의 유명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뙤르』(Nouvel Observateur)의 편집장 로랑 조프랭(Laurent Joffrin)이 묘사하는 캐비어 좌파의 실정은 우리의 경우와 닮았으면서도 같지 않다. 고급스러운 요리로 손에 꼽히는 캐비어를 먹을 만큼 충분히 부유하지만 좌파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프랑스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한국과 달리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야말로 명실공이 ‘좌파’라는 이름에 걸맞다 할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프랑스의 주요 언론들을 통해 여론을 이끌고 있는데, 한국의 주요 언론들이 하나같이 보수주의 일색인 상황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하물며 일부 거대 기업의 사장들까지 사회당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아마도 한국과 프랑스의 가장 큰 차이는 캐비어 좌파에 대한 우파적인 비판 대신 좌파적인 비판이 중요한 쟁점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캐비어 좌파는 종종 비판을 받는다.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양심적이라고 간주하는 사이비 좌파, 입으로 정의를 말하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는 좌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않는 좌파”(7면)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러한 비판에 동조하여 ‘모호한 좌파’의 위선적인 행태를 폭로하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라리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볼떼르, 에밀 졸라, 미떼랑 대통령 등 화려한 계보를 되짚으면서 조프랭은 캐비어 좌파의 역사적인 정당성을 옹호한다. 자신의 고급스런 생활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들은 시대적인 불의에 맞서 양심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노선을 취함으로써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해왔다.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인 이들을 배제하고서는 어떤 실제적인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부자와 빈자를 연결해주는 존재로,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사회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집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자신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지켰으며 사회를 개혁했고 덕분에 민중의 지위는 향상되었다.”(161~62면)

캐비어 좌파와 사회당 중도파의 노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흥미롭게도 또다른 좌파 전통과 날카로운 각을 세운다. 이는 맑스주의와 공산당을 비롯한 ‘극좌파’ 노선이다. 만일 캐비어 좌파가 자신의 계급을 배신한 엘리트의 한 분파라고 한다면, 이들은 왜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는가? 조프랭은 이 현상에 대해 맑스주의 계열의 사회학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 개인의 행동 동기를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찾고, 최종적으로는 경제적인 계급관계로 소급하는 환경결정론은 캐비어 좌파의 이타적인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의 행동은 순수한 정의감과 박애정신 등에 기초한 사상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프랭은 공산당을 비롯한 극좌파의 논리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체제전복적인 행동을 지지하고 폭력과 은둔의 세계에 칩거한 극좌파의 눈에, 부르주아의 품을 떠나지 않는 캐비어 좌파가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리하여 캐비어 좌파가 이러저러한 사안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제시하면, 극좌파는 덮어놓고 그런 태도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다고 공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선이 틀렸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데, “실제적인 공산주의, 곧 프랑스 공산당이 창당 이래 줄곧 준거로 삼아온 그 공산주의는 1989년에 자멸했다. 이제 그 공산주의자들에 관해서는 무덤과 그들이 토해낸 거짓말만 남았다.”(159면)

무엇이 조프랭으로 하여금 그토록 극좌파에 대해 격렬한 비난을 퍼붓게 하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출판된 2006년경 프랑스 사회의 정치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 사회당의 처지는 만만치 않았다. 1980년대 선거연합을 통해서 두차례 대통령을 배출했고 1995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내각을 차지했지만 점차 지지율이 떨어졌고, 급기야 2002년 대선에서는 총리 리오넬 조스뺑(Lionel Jospin)이 극우파 후보 르(J. Le Pen)에게 밀려 결선투표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사회당의 패배의 한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극좌파 정당들의 난립으로 인한 표의 분산이었다. 극좌파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반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점이다. 조프랭은 대선을 앞두고 사회당의 전통적인 가치를 옹호하고 간접적으로 극좌파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조프랭이 책의 후반부에서 좌파적 비판을 일부 수용하면서 캐비어 좌파의 반성을 촉구한다는 점에 있다. 만일 이 대목이 없었다면 이 책은 사회당 중도파를 옹호하는 변변찮은 자화자찬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왜 프랑스의 민중은 캐비어 좌파로부터 등을 돌렸는가? 사실은 캐비어 좌파가 민중에게 먼저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조프랭에 따르면 1990년대에 캐비어 좌파가 ‘역사적인 실책’을 저지름으로써 민중과 거리가 멀어졌고, 그 민중의 일부가 극좌파나 극우파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캐비어 좌파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던가? 그들은 과거의 계급주의적인 노선을 비판하는 데 지나치게 몰두했다. 좌파 지식인들은 정치경제적인 요인보다는 사회문화적인 요인에 주로 관심을 두었고, 이 과정에서 인종차별 문제를 부각하다보니, 정작 치안문제같이 프랑스 민중의 생활과 직결된 사안에 둔감하거나 무기력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의 유입으로 인해 캐비어 좌파 일부가 대부르주아로 변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복지국가 전통이 강한 프랑스 사회에서 예전에는 회사 경영진의 급여가 사원보다 터무니없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엔 어떠한가? 경영자들은 소유주들, 다시 말해서 주주들의 용병에 불과하다. 주주들은 경영자에게 천문학적인 월급을 주는 대가로 절대복종과 최대치의 배당금을 요구한다. 이렇게 되자 경영자 계급은 사회적 관심사나 도덕적인 문제 따위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237면) 결국 캐비어 좌파가 벼락부자들과 어울리면서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바로 캐비어 좌파에 대한 좌파적 비판의 핵심내용이었다. 어쩌면 조프랭이 극좌파에 대해 그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비판이 캐비어 좌파의 가장 아픈 지점을 건드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야를 좀더 확대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캐비어 좌파는 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우클릭’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1990년대 캐비어 좌파나 사회당의 우경화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의 쇠락과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프랑스 사회당이 상대적으로 민중과 긴밀하게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당이 좌측에서 그들을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산당이라는 축이 사라지자 사회당은 힘관계에 따라 급속하게 우측으로 쏠리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비단 맑스주의의 위기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유주의’ 혹은 캐비어 좌파의 위기였던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2006년말에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매력은 급속하게 사라졌고, 우클릭을 감행했던 프랑스의 사회당도 다시금 노선을 수정했다. 그리고 사회당은 2007년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2012년에 마침내 집권에 성공한다. 민중과의 연대, 그리고 확고한 철학과 정책방침이 없다면 건강한 중도와 타협 노선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 캐비어 좌파의 경험이 오늘날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