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참 애터지게 느리게
문인수 시집 『배꼽』
고봉준 高奉準
문학평론가. 저서로 『모더니티의 이면』,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등이 있다. bj0611@hanmail.net
이집트의 왕 투탕카멘(Tutankhamen)은 한 손에 채찍을, 또 한 손에는 갈고리를 쥐고 영면(永眠)에 들었다. 채찍은 전차를 가속할 때, 갈고리는 전차의 속도를 늦출 때 사용하는 도구였다. 무덤 속에서 발굴된 그의 조상(彫像)은 아득한 옛날부터 속도가 권력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속도는 권력을 넘어 신성(神聖)의 대상이 되었다.‘속도’는 현대라는 시간의 종교이다. 쉬는 자는 녹슬고 만다는, 정지는 곧 죽음이라는 이 세속도시의 생존전략은‘속도’에 대한 물신숭배의 동의어이다. 우리는 고속철도, 속성 사진, 패스트푸드처럼 질주하는 시간의 생산물들조차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둘 이상의 직업을 갖는 것도 모자라 밥을 먹으면서도 눈으로는 새로운 정보를 검색하는 고액 연봉자들, 100분의 1초를 앞당기기 위해 수년간 자신의 육체를 단련하는 선수들과 그들의 기록갱신에 환호하는 관중들,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기어코 선거결과를 당일에 확인시키려고 작정하는 개표방송들, 현대는 이 모든 시간의 강박증에‘경쟁력’과‘효율’이라는 훈장을 달아준다.
문인수(文仁洙) 시집 『배꼽』(창비 2008)은‘느림’의 가락과‘침묵’의 언어로 빚은 한편의 절창이다. 그는 현대의 속도를 정면으로 거스르기로 작정한 것 같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느림’과‘침묵’의 풍경들은 문명의 경쾌한 리듬을 외면하고 오래된 세계에, 인적 없는 자연의 절경보다는 “연민의 저 어둡고 습한 바닥”(「시인의 말」)이 상징하는 후락한 삶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태초에 느림이 있었다’같은 느림에 대한 전도된 숭배의지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만 모든 후락한 것들, 사라져가는 것들에서 삶의 절반에 해당하는‘그늘’을 캐낼 따름이다. 시인은 이 발견을‘연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수직적인 관계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시선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 노출된 모든 것들이 운명적으로 간직한 쇠락의 밑바닥에 조심스레 가닿는 일이고, 숱한 상처로 점철된 삶의 시간을 따뜻하게 보듬는 숙명적인 연대의 몸짓이기 때문이다.
시집 『배꼽』이 보여주는 느림과 침묵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연민의 시선이 응시하는 대상들을 주목해야 한다.‘꼭지’라는 이름의 독거노인 할머니(「꼭지」), “삶이 몸소 긋는 자심한 선”을 그으며 개펄을 빠져나오는 여인네들(「만금이 절창이다」), 아코디언처럼 등을 웅크리고 울음 우는 시인(「서정춘」), “씨멘트 반죽을 바르는 조용한 사내”(「벽화」), 평생 농사만 짓다 죽음을 맞이하는 농사꾼 할아버지(「경운기 소리」),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母法)”으로 법의 흑백논리와 속도의 상징을 지우는 느린 걸음의 할머니(「얼룩말 가죽」), “긴 화차 같은 일생”을 몸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노점상(「파냄새」),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는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 씨”(「이것이 날개다」)…… 그뿐인가? 사람이 버리고 간‘흉가’, 수족관 속에 웅크리고 있는‘도다리’, 장맛비를 맞고 있는 식당앞‘의자’, 돌아오는 이 없는 도심 속 오지 고모역(「고모역의 낮달」) 같은 사물에까지 시인의 연민어린 시선은 축복처럼 골고루 비춰진다.
문인수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대상들은 공간적으로는 자본의 가치법칙에서 소외된 “변두리의 쓸쓸한 취락”(「고모역의 낮달」)이나 폐허에 위치하고, 시간적으로는 현대의 속도전에 진입하지 못한 채 위태로운 순간을 사는 존재들이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은 느리다. 느림이란 이 존재들에서 발견되는 삶의 고유한 속도인 셈이다. 시인은 낡고 느려서 시장적인 가치로는 가늠할 수 없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연민의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그 시선을 통해서 시인이 읽어낸 낡고 후락한 존재들의 실존적 삶은 고통과 상처가 아니다. 가장 시적인 순간은 연민의 대상들에서 상처를 발견하는 순간이 아니라 상처, 그 퇴락한 풍경에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생명의 소리를 발견할 때이다. 가령 낡은 외투처럼 사내의 남루한 생을 감싸는‘폐가’에서 오래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배꼽」)가 그렇다.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의 절망이‘배꼽’이 상징하듯 새로운 생명을 향해 길을 여는 순간, 시인은 이 반전의 순간에서 생명의 냄새를 읽는다.
물론 문인수의 시편들에서 퇴락한 풍경이 생명의 냄새로 채워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의 시편들이 지닌 최대의 미덕은 대책 없는 의지의 낙관주의로 불행한 시간을 봉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라리 그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통음난무(痛飮亂舞)를 침묵의 비명 속에 담고 살아가는 것, 몸에 흉터 같은 것을 잔뜩 짊어지고 살지만 결코 울음을 울지 않는‘견딤’이야말로 삶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울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며, 소리 내지 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문인수의 시편들이 연출하는‘고요’와‘침묵’에서 가장 비극적인, 눈물의 슬픔마저 말라버린 생의 고통과 마주한다. 삶이 무엇이냐고, 삶의 그늘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는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 것(「송산서원에서 묻다」)이고, 흉금이란 “노후에도 노후해도 썩지 않고 영롱하게 글썽이는 것”(「낡은 피아노의 봄밤」)이라고 대답하리라.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이 정지가 곧 죽음이라고 선언한다면, 문인수의 시편들은 그 죽음에 한발 다가선 존재들이 생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절창이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이 속도를 향해 광기의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오늘날, 문인수의 시는 진정 이 시대의 시가 감당해야 할, 아니 끝끝내 맞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소중한 성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