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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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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위풍당당』 『단 한 번의 연애』 등이 있음. songsokze@hanmail.net

 

 

 

장편연재1

투명인간

 

 

투명인간이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세상에 존재하긴 하지만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사람을 사람들은 투명인간이라고 한다. 당신은 아닌가? 축하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묵직한, 휘황찬란한 존재감이 있는 불투명한 인간인지를. 그게 욕인지 영예인지를.

당신이 투명인간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가. 간단하다. 전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 앞에 알몸으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된다. 자신이 투명인간이 아니라 해서 투명인간이라는 게 있을 수 없는 개소리라고 떠들어대지는 말기 바란다. 지구상에 현존하는 70억 인류 중에는 별의별 인간이 있게 마련이니까. 무한한 우주와 자연의 신비한 세부에 대해 철두철미 무지몽매한 인간, 자신의 무식과 편견을 반드시 입증하고 마는 인간, 투명인간, 투명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인간, 투명인간이란 불가능하다고 증명하기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인간, 평생 거울 한번 안 보는 인간 등등이 있다. ‘투명’이며 ‘인간’이며 ‘본다’는 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다. ‘보인다’는 것 역시.

인간의 감각은 착각의 연속이며 오해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감지하는 사물의 색상은 대상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대상에서 반사되는 빛의 파장에 의해 주어진다. 빛, 그리고 반사가 없으면 형태, 움직임, 배치도 알 수 없다. 당신이 거울 속의 당신을 보는 것은 실은 빛의 반사의 반사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눈으로 본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뇌가 보았다고 믿는 것을 본다. 눈으로 본 것을 뇌가 제대로 해석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못 본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못 본 게 맞다. 결론적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영원히 볼 수 없다. 당신이 당신을 볼 수 없다면 당신은 투명인간이라도 된단 말인가? 당신이 투명인간이라는 데 나와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데 당신은 동의하는가? 이쯤 해두자. 나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니까.

어쨌든 나는 투명인간이다. 내가 투명인간이니 지구상의 절반쯤 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면 절대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나 소나 다 투명인간이면 나는 투명인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게 문제다. 당신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 당신의 문제로 만들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투명인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무색, 무미, 무취한 순수한 물 같지만 주위의 빛이나 온도, 먼지농도에 따라 샥스핀 수프처럼 멀겋게 보이기도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여성들이 갖기를 희망하는 아른아른하게 투명한, 아주 얇게 거죽을 깎아내고 ‘물광’을 낸 것 같은 도자기 피부와는 다르다. 어떤 고명한 외과의의 손길에 의해, 첨단 과학기술이며 유전자 조작이나 줄기세포 이식 따위에 의해 피부가 유리처럼 투명해지고 피부 아래의 선명한 생체조직과 핏물을 보여주게 된다면 제 꼬라지를 본 사람은 모두 발광해버릴 것이다. 그건 확실하다.

콩밥을 먹어보았는가. 실제 콩밥에는 콩이 기껏 일이십 퍼센트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밥의 재료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위주로 이름 짓는다면 콩 십 퍼센트짜리 밥은 쌀밥이나 보리밥이어야 한다. 옛적의 꽁보리밥이 아닌 요즘 보리밥에는 보리보다 쌀이 훨씬 많다. 보리밥은 사실상 쌀밥이다. 어쨌든 투명인간에도 나처럼 백 퍼센트 순수한 투명인간에서 김밥을 둘러싼 김처럼 얇은 거죽만 투명하고 시커먼 속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간까지 골고루, 가지가지 다 있다. 콩밥·보리밥의 사례처럼 일 퍼센트 투명인간도 투명인간이라고 하다보니 투명인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잡스러운 투명인간이다.

누가 뭐라건 간에 나는 투명인간이다. 지구상에는 평생 단 한번 투명인간을 생각해본 적도 없이 살다 죽는 사람이 태반이다. 거기에는 이미 자신도 모르는 새 상당 수준 ‘투명인간화’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투명인간이 될 소질, 운명을 타고난 아기가 일찌감치 완벽한 투명인간이 되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면(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에도 한동안 울음소리나 냄새는 날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영구 미제의 영유아 유괴사건으로 처리되는 게 보통이다. 또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 겨우 손톱이나 머리카락, 귀지 같은 피가 통하지 않는 죽은 세포만 투명화하는 경우도 있다. 투명화에는 심적, 물적, 인간적, 자연적인 것, 궁극적으로 삼라만상이 모두 포함된다. 투명화 정도에 따라 일반, 고속, 초고속, 정체, 지체, 지연, 부분정체 등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투명인간이 되는 결정적인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하긴 흔하디흔한 감기를 치료하는 약도 없는 세상이니 이상할 건 없다. 제대로 된 감기약이 없는 건 감기 바이러스 종류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부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바이러스까지 워낙 다양한데다 감기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투명인간이 되는 원인 역시 감기 바이러스처럼 다양하고 사람마다 다른 방식의 변이를 보인다. 유전, 우주선(宇宙線), 바이러스, 날벼락(청천벽력이라고도 한다), 외계인, 선택진화론, 숙명론 등등 갖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투명인간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

내게는 투명인간이 아닌 사람, 곧 ‘비투명인간’이나 ‘불완전한 투명인간’ ‘반 투명인간’ ‘투명해지고 있는 인간’이 모두 보인다. 반면에 나처럼 완전한 투명인간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나 같은 완전한 투명인간뿐이다. 투명해지고 있는 인간, 반투명인간들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데 오래전부터 그런 존재를 두고 신선이니 혼령, 도깨비, 귀신, 천사, 악마, 외계지성체, 나그네, 이방인, 유랑의 무리니 뭐니 하고 불러왔다. 당신이 잘 알던 사람이 어느날 잘 안 보인다고 해서 투명인간이 되었다고 속단할 건 없다. 어디에 입원했거나 여행을 갔거나 당신이 꼴도 보기 싫게 지긋지긋해졌을 확률이 훨씬 높으니까.

나처럼 완전하고 순수한 투명인간이라고 해서 무슨 특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눈에 몸이 안 보이는 것뿐이다. 정상적인 생활, 아니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누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투명인간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의 장애가 당사자와 그의 가족에게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불편한지, 세상이 어떤 편견으로 장애인들을 대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처럼 비투명인간들 또한 우리의 고충을 모른다. ‘투명인간이면 아무 때나 은행을 털 수 있지 않느냐, 아무 목욕탕이나 골라잡아 들어갈 수 있지 않느냐, 남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얼간이가 꼭 있다. 내 대답은 “그러면 뭐하는데?”이다.

단지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은행 금고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적절한 도구나 권한이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다. 문이 열리는 것, 돈이 든 자루가 공중을 오가는 것은 일반인의 눈에도 잘 뜨인다. 또 만난을 무릅쓰고 은행을 털어서 돈을 가지게 되었다 한들 쓸데가 별로 없다. 성형수술을 할 것도 아니고 명품을 온몸에 휘감을 이유도 없고. 옛 애인에게 돈다발을 집어던진다든지 무슨 의적처럼 가난한 사람이 사는 집의 문간에 쌀가마니를 갖다놓는다든가 할 수는 있겠다. 정말 그러고 싶다면. 나는 스스로가 투명인간임을 지각하게 된 이후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통속적이고 뻔한 사고, 가치관이 나처럼 완전한 투명인간에게는 없다. 투명인간이 되면 가치관 역시 세속적 기준으로 볼 때는 투명해진다고 할지, 수도자처럼 성욕이며 인간사의 희로애락에 초연해진다고나 할지. 하여튼 그렇다.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다, 알고 싶다고? 그건 굳이 투명인간이 될 필요 없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투명인간과 상관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월급 받아가며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경찰·검찰·세무서·법원 등의 공무원, 수많은 고객정보를 관리하는 금융기관, 통신사, 유통회사, 인터넷 업체, 보안전문가, 해커, 기자, 술집 종업원, 의사,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비서, 개인운전기사 등등 몇천년의 역사를 가진 직업이 있다.

단언컨대 일상생활에서 비투명인간이 투명인간보다 못할 게 없다. 투명인간은 가능하고 비투명인간은 불가능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양자가 다 불가능한 일은 자신의 의지로 투명인간이 되는 것, 또 투명인간으로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만 한 우연성의 성채를 필연성이라는 비루먹은 말을 탄 기사가 혼자 힘으로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 말이 많았다. 나는 말이 많은 유형의 완전한 투명인간이다.

5월 초순이 되면 자전거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투명인간도 더러 있다. 우선 나부터 그러니까. 내가 입는 일상적인 의복은 일반 사람들 눈에 보이지만 옷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 그러니까 손이나 목이나 얼굴이나 머리칼이나 귀때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웬 반바지와 티셔츠가 조깅을 하는 사람과 같은 속도와 높이로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다면 그건 어떤 부주의한 투명인간의 것이기 쉽다. 나는 그런 너절한 방식으로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투명인간이 사람들 눈에 띄기 위해 자신이 투명인간임을 과시한다는 건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낯모를 행인에게 다가가서 모자를 벗겨 날려보내고는 무슨 엄청난 장관이라도 연출한 듯이 만족스럽게 낄낄대는 투명인간을 보고는 한심해하다 못해 아침에 먹은 라면을 토해버린 적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바람과 찬 공기, 비, 햇빛 등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걷거나 뛰는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한 복장을 갖춘다. 자전거는 빠른 속도로 인도와 차도를 달리기 때문에 사고 위험이 높아,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은 필수품이다. 손에는 장갑을 끼어야 한다. 거기다 자외선과 날벌레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고글, 마스크와 버프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릴 수 있게 된다. 나는 자전거 인구의 급증에 대해 고마워하는 사람, 투명인간 중 하나다. 일반인처럼 보이기가 쉬워졌고 나 자신이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말이 난 김에 좀더 하자면 자전거는 자칭 지혜롭다는 인류가 발명한 것 가운데 지성과 감성이 제대로 발현된 최고의 도구다. 경제적이고 건강에 도움이 되고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이며 아름답다.

나는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좀 타는 사람들이라면 약간의 질투심을 느낄 정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복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저녁에는 사실상 필요 없는 자외선 차단 크림까지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자전거로 한강 다리를 통행할 때는 인도로 가야 하는데 인도가 좁은 경우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보행자, 특히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성가신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주 쥔 손을 놓고 일렬로 서서 자전거를 피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끼리 서로 지나갈 때도 혹 부딪칠까, 만에 하나 자전거가 쓰러지며 난간을 너머 차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차도나 까마득한 강으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싶어 불안하고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남의 주목을 끌기 쉽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인도가 넓은 마포대교나 한강대교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마포대교는 한강 서른한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투신자가 많아 ‘자살대교’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 민간 생명보험회사와 함께 마련한 ‘생명의 다리’라는 이름의 자살예방 캠페인이 펼쳐지고 있다. 다리 한가운데 ‘한번 더’ 동상이라는 게 있는데 ‘(자살을 하기 전에)한번만 더 생각해보자’는 취지의 글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다리 남단과 북단 양방향 시작 지점에서 각 두개씩 총 네 구간에 보행자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쎈서를 설치하고 보행자의 움직임에 따라 조명과 메시지가 밝혀지게 만든 장치다. ‘한강 다리에서의 투신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여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희망 메시지’로 ‘세계 최초의 쌍방향 스토리텔링 교각을 조성하여 서울의 대표적인 힐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앞장선다’는 훌륭한 취지란다. 메시지에는 배우, 스포츠 스타나 종교인 같은 유명 인사가 쓴 것도 있고 일반인들이 올린 글이나 사연, 사진을 모집해 실은 것도 있었다. 예컨대 긴 띠처럼 다리를 따라가며 글자가 나타나는 대화형 메시지는 이런 식이다.

—밥은 먹었어? 잘 지내지? 별일 없지? 무슨 고민 있어? 음… 3년 전에, 제일 힘들었던 게 뭐였는지 기억나?

이외에도 다리 양방향에 각각 네개씩 여덟개의 폴에 지능형 감시 카메라와 열 감지 카메라, 비상호출 벨과 언제든 상담원과 통화 가능한 ‘생명의 전화’를 설치해두기도 했다. 감시 씨스템은 다리에서 보행자가 난간 앞에 오랫동안 머무르거나 차량이 주행 중 갑자기 난간 옆에 정차하는 등의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자동으로 가장 가까운 수난구조대에 일차 경고신호를 보내고, 실제로 투신하면 구조대가 3분 안에 긴급 출동하도록 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본 모자 쓴 남자는 마포대교 남단 초입, ‘양보’라는 교통표지판 아래에서 출발해 다리 길이 구백여 미터의 절반을 넘어 걸어가면서 자살예방 캠페인의 문구 앞에서 한참씩 지체했다. 다리 한가운데 있는 ‘한번 더’ 동상과 거기 붙은 문구를 살폈다. 옛일을 회상하는 것처럼 멍하니 서서 강물을 보기도 하고 망설이듯 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감시 카메라와 비상호출 벨, 스피커가 달린 폴 앞에서는 중간에 매달린 ‘CCTV 설치 안내’의 내용이 뭔지 자세히 알아보려는 듯 한참을 서서 읽었다. 누가 봐도 저 사람 혹시 저러다 투신자살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일단 그게 내 시선을 끌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미안하지만 나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신봉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우물에 빠져 죽든 홍수에 집이 떠내려가든 구경거리가 있으면 재미있어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 남자에 대해서 지능형 감시 카메라와 ‘생명의 다리’ 캠페인의 보행자 감지 쎈서 같은 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머리는 평균보다 상당히 큰 편이어서 쓰고 있는 야구 모자가 초등학생용 모자를 가져다 살짝 얹어놓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 큰 머리를 쎈서, 지능형 카메라, 열 감지 카메라가 식별하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동태를 살피면서 뒤를 따라가다 그가 아예 걸음을 멈추면 추월해서 앞으로 가 그가 다시 몸을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여름 저녁처럼 날씨는 푸근했다. 성급한 사람은 반소매의 옷을 입고 나왔고 바람막이 재킷을 걸친 사람이 간간이 보였다. 그는 겨울에 입는 긴소매의 점퍼까지 걸치고 있던 터였고 몸피도 평균 이상으로 컸다. 그럼에도 그의 존재는 그의 곁을 스쳐간 행인이며 자전거를 탄 사람, 차량 운전자 수천명에게 있으나 마나 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가 보이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두워지는 다리 위를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자동차 운전자 중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 세상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다리를 완전히 건너가서 자전거를 반대방향으로 돌렸다. 그런 뒤에 마치 처음으로 다리에 올라온 사람처럼 천천히 페달을 밟아 그가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최대한 천천히 그에게 접근한 나는 쎈서등이 켜지면서 드러난 흰 아크릴판의 ‘다 그런 거지 뭐’라는 문구와 하얀 접시 위의 빈대떡 사진을 유심히 보고 있는 그의 곁에 가서 자전거를 완전히 세웠다. 하지만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 봐야 내가 걸치고 있는 복장과 장비밖에는 볼 수 없었을 것이지만. 자세히 보니 그의 나이는 쉰살이 넘어 보였으나 막 산골에서 걸어내려온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내가 투명인간이 되기 전에 알던 사람이었다. 김만수라는 이름이 섬광처럼 떠올랐으니.

나는 알았다. 그 또한 투명인간이라는 것을.

나는 모른다. 그가 왜, 어떻게, 언제부터 투명인간이 되었는지를.

만수가 태어날 때 난 정말 죽는 줄 알았다. 만수는 머리가 유난히 컸다. 나는 스무살 때 결혼을 해 이듬해에 맏아들을 낳았고 삼년 터울로 두 딸을 낳았다. 애를 셋쯤 낳아보면 뱃속의 태아가 어떤 앤지 대충은 짐작이라도 하는 법이다. 그런데 만수는 하도 커서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결국 무지막지한 산통 끝에 배 속에서 나올 때 머리통이 수세미처럼 길쭉하게 늘어져서 나왔다. 여기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하는 중에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뭔 아가 대가리만 절구통겉이 크고 팔다리는 쇠꼬챙이겉이 빌빌 돌아가고 저카나. 저기 지대로 커서 인간이 될랑가 걱정일따.”

그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던가.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기를 봤다. 사지가 멀쩡하고 눈·코·귀·입이 달릴 데 다 달려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도 열개씩이었다. 아기는 큰 머리에 비해 가느다란 몸통에 유난히 길어 보이는 팔다리를 달고 있었다. 그런 채로 늦여름 모기처럼 애앵애앵 하고 힘없이 울고 있었다. 아무리 아기가 그렇다고는 해도 ‘인간이 안될 바에는 차라리 포기하라’는 식의 말이 사람으로서 할 소린가.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내 눈에서부터 눈물이 나는 게 억울하고 천불이 났다. 미역국이 놓여 있는 밥상을 걷어차버리고 싶었다. 당신들이나 많이 드시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싶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은 평생을 잊지 못한다. 당신은 내 남편 하나 열아홉살에 사대독자로 똑 떨어뜨려놓았더니 시부모가 침모·찬모·유모 다 붙여서 키워주더라고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만, 평생 공자님·부처님같이 훌륭한 시아버지 곁에 붙어서 사랑스러운 마님 노릇을 하느라고 아무리 세상물정 모르고 철이 안 났다 해도 그게 사람 입에서 나올 소리던가.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그런 말은 절대 못한다. 천벌 벼락 맞을 소리다. 아기가 돌 지나고 나서도 안 죽고 그냥 저냥 크니까 나한테 ‘미안타’ 하긴 하더라. 애도 하나밖에 안 낳아본 당신이 뭘 알겠느냐고. 알겠다고는 했다. 그래도 나는 그 말만은 절대로 못 잊는다. 잊고 싶어도 잊히지가 않는다. 말은 안했지만 정말 피눈물 나게 힘들게 만수를 키웠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이상하게 만수를 낳고 나서는 젖이 많이 안 돌았다. 아기가 워낙 허약한 몸을 하고 태어난데다 젖도 다른 아기들처럼 제대로 먹이지 못하니 살이 오르지를 않는 것이었다. 삼칠일도 되기 전에 무릎걸음으로 밖에 벌벌 기어나가 산에서 밤톨도 줍고 추자(楸子, 호두)도 흔들어 따고 멧대추·칡뿌리·고욤 할 거 없이 닥치는 대로 구해서는, 수수·고구마·감자·좁쌀 같은 걸 넣어 암죽 끓여서 먹였다. 남편 모르게 금싸라기 같은 쌀을 씹어 뱉은 걸 죽으로 쒀서 식혀가지고 먹이기도 했다.

그때는 또 아이들 잡는 전염병은 얼마나 많았는지. 큰마마(천연두) 돌면 태반이 죽었고 후유증으로 평생 얽은 얼굴로 사는 사람이 동네에도 수두룩했다. 작은마마(홍역)만 해도 동네서 한 애가 걸리면 금방 그 또래 애들이 다 걸려가지고 앓고 백일해·감기·소아마비·천식, 뭐 해서 애들 낳으면 한 절반은 죽었다. 아기가 돌도 못 넘기고 죽으면 아비가 거적때기로 싸서 지게에 지고 산비탈로 가서는 산짐승 안 타게 나무 위에 올려놓고 오곤 했다. 밤중에 으앙으앙 하고 꼭 늑대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우훙우훙 부엉이 우는 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들리면 나무에 포대기로 걸려 있던 애 중 하나가 황천을 건너갔다가 되살아온 거다. 내 배 아프게 하고 나온 아이 중에 아기 때 제일 황천 가까이 갔다 온 애가 만수였다.

시아버지가 한학에 서울의 대학까지 유학해 모르는 게 없다고 손주들 이름을 다 지어줬는데 맏이는 백살까지 살라고 ‘일백 백()’에 오래 살라고 ‘목숨 수()’를 붙여서 백수고, 맏딸은 천금처럼 귀하고 기쁘다 해 ‘쇠 금(金)’에 ‘기쁠 희()’ 하여 금희고, 둘째 딸이 해와 달처럼 환하다고 명희(明喜)다. 막내는 구슬처럼 예쁘다고 옥희(玉喜)다. 둘째 아들 이름은 무식한 내 소견에 백 다음이 천()이니 천수라 할 줄 알았더니 난데없이 백()의 백배인 ‘만()’을 써서 만수라고 했다. 그게 ‘많다’는 뜻도 된다고 한다. 셋째 아들은 크게 되라고 ‘클 석()’을 썼다는데 세번째라고 ‘석 삼()’을 쓸 걸 그렇게 한 것 같다.

만수 아버지가 관청을 참 무서워한다. 시아버지가 젊을 때 무슨 불온한 사상으로 감옥살이도 하고 패가망신에 집안 들어먹을 일을 저질러 온 가족이 야반도주까지 해서 그렇다고 한다. 읍사무소 공무원이 아기를 낳은 지가 언제인데 왜 이제야 신고를 하느냐고 닦달할까봐 바로 며칠 전에 출생한 것으로 했다 해서 잘했다고 했다.

만수가 출생신고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하고 하니까 바로 다음 애가 섰다. 그래서 만수는 다른 아기 두돌까지 먹는 젖도 다 못 찾아먹었다. 금계랍(金, 말라리아약으로 쓴맛이 남)을 젖꼭지에 발라서 젖을 뗐는데 그때도 야물딱지게 제대로 울지 못하고 맥없이 이히잉이히잉, 했다. 제 할머니가 미안한지 어디서 얻어온 꿀이며 조청을 손가락 끝에 발라 빨리니 쪽쪽 소리 내며 잘 먹었다.

만수하고는 정반대로 두살 아래 석수는 울음소리도 우렁차고 몸은 뽀얗고 포동포동했다. 젖이 잘 나오기도 했지만 젖을 빠는 힘도 대단했다. 기운도 셌다. 만수에 비해 성장속도도 훨씬 빨랐다. 그러니 만수가 동생 젖을 얻어먹을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의 출생신고를 미루지 않아서 형제는 호적상으로는 한살 차이밖에 나지 않게 되었다.

 

며느리가 평생을 두고 나를 원망하는 말이 손자 만수를 낳을 때 내가 인간 안될 거라고 포기하라고 했다는 거다. 그건 며느리가 밤새도록 동네 떠나가라 소리 질러가며 진통을 하다가 새벽에 애를 낳을 때 구경인지 도우러 온 건지 한 이웃의 할망구가 한 말이다. 어떤 할미가 막 나온 손자를, 그것도 손 귀한 집에서 두번째로 본 손주를 두고 인간이 되니 안되니 못 생겼니 말았니 하겠나. 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천벌을 받는다.

만수가 머리는 좀 컸다. 삼칠일도 되지 않아 물동이를 이고 나서는 억센 며느리가 머리 큰 애 낳느라 생고생을 했는지 무슨 헛말을 들은 것 같다. 입만 열면 그 애기를 해대서 할 수 없이 내가 미안하다고 하긴 했다. 그랬더니 그것 보라고, 말을 했으면서 안했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이제 와서 바른말을 한다고, 자기를 등신으로 아느냐고 그렇게 구박을 했다. 그래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 며느리 눈치를 봤다.

만수는 걸음마를 제 동생 석수랑 비슷하게 했다. 어미젖을 많이 못 먹고 배를 곯다가 동생 낳으니 그 젖이라도 얻어먹어야 하는데 며느리가 아무런 대책 없는 내게 만수를 떠안겼다. 만수가 울 때마다 내 마른 젖을 물렸다. 어찌나 세게 빨아대는지 양쪽 젖이 다 헐었다. 아파서 손가락을 입에 물리면 손가락이 퉁퉁 붓도록 빨다가 힘없이 울곤 했다. 만수 먹이려고 땡벌한테 쏘여가며 석청·목청 다 따다가 젖이며 손가락에 묻혀서 먹였는데 그런다고 그런 꿀이 아무 때나 얻어지는 건 아니었다. 먹는 것도 시원찮고 덩치도 작고 하니 만수는 어릴 때부터 동생한테 졌다. 걸핏하면 석수가 만수를 할퀴고 때리고 깨물고 해서 만수 몸이 생채기에 멍으로 성한 데가 없었다.

만수는 어릴 때부터 부스럼이며 버짐, 종기 같은 피부병이 따라다녔다. 거기다가 이와 빈대, 모기에 피를 빨리고 부은 자국에 동생 때문에 생긴 상처가 덧나고 해서 벗겨놓으면 온몸이 울긋불긋한 게 무슨 단풍 든 것 같았다. 내가 보다 못해서 애비한테 장날에 유황을 좀 구해오라 해서 물에 개어가지고 온몸에 발라주었다. 다섯살 땐가 여섯살 땐가 겨울녘에 유황을 바른 노르께한 얼굴로 양지쪽에 앉아서 바람에 몸을 말리다 졸고 있는 만수가 꼭 병든 병아리처럼 보였다. 팔다리는 비쩍 마르고 길고 뼈가 두드러진 머리통에는 숱이 적고 가는 머리카락이 달려 있었다. 관자놀이에 제 할아버지처럼 정맥이 파랗게 불거진 걸 보고 있자니 정말 저러다 인간 되겠나 싶고, 아이의 남은 인생이 보이는 듯 서글퍼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심심산골에 화전 일궈 사는 부모가, 늙은 할미·할애비가 대처의 부잣집 아이처럼 인삼녹용이며 보약을 달여 먹일 형편이 되었겠는가. 만수를 보면 한숨만 나오고 손이 저절로 앞으로 모아졌다. 그저 사람 구실 하도록 살려만 주소서, 하고 빌었다.

백수 할아버지 용식씨는 본디 낙동강 유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들판을 끼고 있는 J군 큰 부잣집 삼대독자였다. 옛날에는 자기 땅에서 쌀이 이삼백석만 나오면 천석지기라고 하고 이삼천석 나오면 만석꾼이라고 하는데 내 시아버지는 못해도 삼천석은 했으니까 진짜 알부자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흉년 들면 이웃들에게 양식도 대주고 해서 나쁜 소리를 듣지 않았다. 남편은 대여섯살 때부터 서당 훈장 출신 독선생한테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개명한 세상에 집안을 이어갈 장자라고 해서 신식 학문도 배웠다.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J군 관내에서는 드물게 서울의 전문학교에 유학까지 했다.

내 친정은 조선 중기에 부자 양대에 대제학을 낸 상산 정씨 집안이다. 병약하고 가난했지만 드높은 긍지를 가지고 살던 내 아버지가 무남독녀인 내가 시집가서 고생이나 하지 말라고 부잣집 도련님한테, 그래도 서울 전문학교로 유학을 가 있다는 용식씨한테서 중매 들어온 것을 받아들였다. 혼례를 올리고 나서 신랑은 얼마 안 있어 곧바로 공부하러 떠나고 나는 시부모 모시고 사대독자 춘석이 키우면서 살았는데 이십대까지는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았다.

남편은 전문학교 시절에 무슨 사상을 가진 친구들과 어울려 독서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독서회 사람 중 하나가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에 협력했다고 그 무서운 왜경에 붙들려가고 남편도 공범으로 오해를 받아 체포되면서 온 집안에 엄청난 풍파가 일었다. 불온사상이 뭔지, 독립운동이 뭔지 도통 알지도 못하고 평생 왜경하고 말 한번 나눠본 적도 없던 시아버지가 서울로 가서 옥바라지를 시작했다. 내가 뭘 알았겠는가. 시어머니하고 서너살 먹은 아기 붙들고 우는 게 일이었다. 소 팔고 땅 팔고 해서 변호를 한 끝에 남편은 이태 만에 풀려나긴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약한 몸으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느라 심신이 다 성치 못한 상태였다. 감옥 밖 집에서는 더 큰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상범이자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독사 같은 조선인 고등계 형사가 시도 때도 없이 집으로 쳐들어와서 남편이 누워 있는 방을 뒤집어엎고 옛날 편지를 다 끄집어내고 여차하면 다시 잡아간다고 을러대는 게 다반사가 되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남편이 이상한 대답이라도 하게 되면 남편은 고사하고 집안이 거덜날 판이라 시아버지가 그때마다 그놈들에게 쥐여주고 안겨준 돈이 수월치 않았다. 그들의 악마 같은 등쌀에 시달리다 못해 남은 재산이 또 사탕처럼 녹아 없어졌다. 결국 누가 봐도 부러워할 부가옹(富家翁)이었던 시아버지가 속병·화병을 앓다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개새끼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옛말대로 장례를 치르는 중에 문상객은 거의 없었다. 자칫 사찰과 감시의 눈에 띌까 친척들까지 잠시 앉아 있다 도망치듯이 가버렸다. 그런데도 빚쟁이들은 어김없이 몰려왔다. 진짜로 시아버지가 그 사람들한테 돈을 빌렸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 인간들이 들고 온 빚문서는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남편이 그 무렵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돈 될 만한 것은 모조리 몰래 팔고 남아 있는 땅은 친척들한테 넘겨 금붙이로 바꾸었다. 장례가 끝나고 나서 백일 탈상도 하지 않은 때였다. 남편은 돈이 든 가방을 메고 늙은 시어머니 모시고 앞장서고 춘석이는 걸리고 나는 우선 입는 데 소용될 옷을 챙기고 옥비녀, 은수저를 옷 안에 넣어 만든 보따리를 이고 하여 온 식구가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얼굴에 숯검댕을 칠하고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어 사람들 눈을 피해 유리걸식하는 거지떼처럼 사흘을 꼬박 낯선 길을 골라 걸었다. 차도 수레도 얻어 타지 못하여 온 식구가 발은 물집이 터지고 발목은 절뚝거리는데 아이는 온몸에 땀띠가 나서 울고 시어머니는 땡볕 아래를 걷다 여러차례 넘어져 거진 숨이 넘어가게 된 겨를에 M군의 경계를 넘었다. M군은 강과 넓은 들을 낀 고향 J군에 비할 수 없는 산골이었는데 그 산골에서도 인적 드문 곳을 찾아 마침내 개운리(開雲里)로 들어갔다. 개운리는 사방이 천길 높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그중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고개의 이름이 운우령(雲雨嶺)이었다. 고개가 하도 높아 구름이 울며 비를 뿌리고는 갠다 하여 개운리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가기 백여년 전에 수십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후 한때 무성한 소나무를 베어 장독, 옹기를 만들어 팔아 살았던 까닭에 독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후손과 화전민이 사는 이십여 가호의 마을에서 남편은 가지고 온 돈과 금붙이, 패물을 흙집과 바꾸고 자리를 잡았다. 농사를 지을 수가 없고 지게질도 못하던 남편은 양식을 팔고 나뭇짐을 사서 살아갔다.

남편이 무위도식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이며 서울서 배운 신학문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당신의 아들, 춘석이부터 공부를 하려 들지 않았다. 누구도 아닌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해 두메산골로 도망치다시피 이사 오게 되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나이였다. 그런 와중에 개운리 깊디깊은 산골짝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부분이 공부를 전혀 안해도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걸 다시 시키려 드는 아버지를 원수 대하듯 했다. 춘석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를 닮았는지 기골이 장사 같고 공부 대신 흙장난이며 돌팔매질, 씨름에 나무칼 들고 뛰어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개운리 산골짜기에서 비탈에 화전을 일궈 좁쌀 심어서 먹고살기에도 바쁜, 또는 목숨과 바꿔가며 지켜온 자기만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유학이며 한문, 학문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어 흐지부지되었다.

남편은 마음을 다잡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저 일을 하자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개운리에는 높은 산, 깊은 골짜기와 밭, 울창한 숲, 계곡물이 바위를 깎아 만든 커다란 소()도 있었다. 남편은 아침마다 소에 가서 낚시를 했다. 남편은 당신이 낚시를 자주 하던 장소에 조다곡(釣多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일 그 이름은 사람들이 발음하기 쉬운 대로 ‘조타골’로 바뀌었다. 또한 당신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사는 것을 포기하고는 스스로 호를 ‘조다옹(釣多翁)’이라 했다. 만수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나이가 쉰살 언저리였음에도 거의 상노인이나 다름없었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리고 주름은 온 얼굴에 가득했으며 수염까지 희었다.

남편은 오후에는 사냥을 하려 했으나 계곡과 달리 잡히는 게 전혀 없었고 사냥을 하는 방법도 잘 몰랐던 까닭에 방향을 식물로 바꾸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참취·쑥·냉이·칡·머위·곰취·두릅·참나물·원추리·잔대·더덕·도라지·산미나리·돼지감자·산마늘 등등 여자인 나는 물론, 화전민의 딸인 며느리도 모르는 갖가지 초목의 순과 잎과 뿌리가 밥상에 올랐다. 일본어로 된 책으로 약초를 공부하고 간단한 상비약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어느날 남편은 이웃의 송서방과 함께 장에 나가서 송아지를 샀고 지게에 실어 집으로 돌아왔다. 개운리가 생긴 이래 소가 마을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남편은 소를 키우는 방법 또한 일본어로 된 축산전서를 통해 알게 됐다고 했다. 한해쯤 뒤에 남편은 다시 송아지 한마리를 지게에 실어 들여왔고 두마리가 짝을 지어서 송아지가 태어났다. 그때부터 우리집에는 늘 암소 한마리가 있으면서 적어도 이년에 한번은 송아지를 낳았고 송아지가 크면 내다 팔아서 살림을 늘리고 땅을 샀다. 소는 큰 재산이기도 했지만 산골짜기에는 보물이나 다름없는 거름의 원천이었다. 그 거름으로 농사를 지으면 화전과 소출이 달랐다. 그 무렵부터 춘석이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손쉽게 개운리에서 상농사꾼으로 인정받은 것은 남편이 들여온 소 덕분이었다.

가장 가까운 읍내 장터가 운우령 고개 너머 이십리 바깥에 있었고 산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우마차커녕 손수레 하나도 지날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남편의 소는 마을에서 읍내까지 다 큰 소나 소가 끄는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넓고 평탄한 길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길을 통해 마을 아이들이 읍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송서방 지게에 얹혀온 송아지 한마리가 수백년간 변치 않던 마을의 역사를 뒤바꾸어놓은 셈이었다. 남편이 개운리에 들어온 이후 죽기까지 삼십여년 동안 소는 당신에게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당신이 늘 가까이하며 읽고 있는 책에 나온 대로 ‘저녁에는 소를 몰아온다’는 하루 일과를 실천하기 위해 소를 사고 키우기는 했어도 목동은 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다시 남편은 친정아버지처럼 한시를 짓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했다. 무엇이 올바른 삶이고 산간 마을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도인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했다는 것뿐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들은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일하다 지쳐 깊이 잠들었고 밖에서는 늑대가 울었다. 부엉이가 울었다.

남편은 해방이 되면서 고향 읍내로 돌아갈 생각도 했다. 그러나 세상이 자신의 사상을 용납하지 않는데다 자신과 아버지를 매일 찾아와 괴롭히던 경찰이며 관공리, 빚쟁이들이 여전히 힘을 가지고 영화를 누리는 것을 목격하고는 개운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남편은 시어머니의 유해를 개운리 양지 바른 비탈에 고이 묻어드렸다.

화전민 이웃에서 며느리를 맞은 게 6·25 직전이었고 맏손자 백수를 본 게 바깥세상에서는 전쟁 통이던 이듬해 여름이었지만 개운리에는 포성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한 지 여섯달 만에 찾아온 소금장수 덕분에 인민군이 진격해왔다 후퇴한 전말을 알게 됐을 정도였다. 남편은 전쟁의 참화에서 가족들이 손가락 하나 잃지 않고 살아남게 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던지 처음으로 자신이 온 식구를 끌고 개운리로 들어온 선택이 옳았다고 자랑했다.

 

나는 지천명 이후 대부분의 여생을 자리보전하고 누워지냈다. 처음에는 굴피 껍질로 지붕을 하고 흙벽을 한 방 두개짜리 안채에 기거했다. 집에 소를 들여오게 되면서 마구간을 짓게 되었는데 그 참에 명색 사랑방을 안채와 조금 떨어지게 지은 이후 그곳에서 거의 떠나지 않았다. 워낙 약골인데다 젊은 시절 겪은 감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이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는데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면 뼛골이 쑤시고 지나치게 춥거나 더우면 경련으로 시달렸다. 잠을 잘 자지 못해 늘 정신이 맑지 않았으며 기운이 없었다. 『백만인의 의학』이라는 가정상비 의학도서를 사다 읽은 것이 내가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취한 가장 값비싼 처방이었다. 내 병석 주변을 꼬물꼬물 가장 오래도록 기어다니던 게 둘째 손자 만수였다.

—만수야, 나는 점쟁이를 믿지 않고 관상을 보지도 못한다만 그래도 네 얼굴이 유난히 크고 훤해서 멀리서도 잘 보인다는 건 알겠다. 그러니 너는 웃어라.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 웃는 집에 만복이 들어오고 일소일소 일노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라, 한번 웃을 때마다 하루 젊어지고 한번 화낼 때마다 하루씩 늙어지나니 네가 웃음만 잃지 않으면 평생 없는 복도 받아가며 살리라.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 없느니라.

아내가 조밥과 간장, 장아찌에 물이 담긴 개다리소반을 가지고 들어오면 밥상머리에 만수를 앉히고 이런 말도 했다.

—모름지기 양반은 아무리 산해진미가 앞에 있다 한들 입맛을 다시며 상에 다가들지 않으며 맨손으로 음식을 집지 않고 수저를 쓰며 국을 한술 뜬 연후에 밥뚜껑을 열며 씹을 때 소리내지 않으며 뜨겁다고 후후 불지 않는다.

그런데 산해진미를 마주한 적이 한번 없고 밥그릇에 뚜껑이 덮여온 적도 없었다. 아내가 밥을 씹어 만수의 입에 넣어주었으니 만수의 수저는 제 할머니의 입이었다.

—사람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양분은 열여덟에서 스물두가지인데 그중 나물에 열여섯가지가 있느니라. 밥을 비빌 때는 억지로 누르지 말고 살살 돌려서 비빌지니라. 밥은 싱겁고 반찬은 짜게 마련이나 지나치게 맵거나 짜거나 시거나 단 것은 먹지 마라. 밥을 먹는 중에 시끄럽게 떠들거나 밥알을 벌처럼 뿜으며 웃거나 하면 아니된다. 밥을 먹는 중이라도 부형이 부르면 입에 있는 것을 뱉고 공손히 대답하고 그 말씀을 끝까지 잘 듣는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배를 두드리며 트림을 하지 않으며 내생에 소가 되지 않도록 눕지 않으며 파리·모기 같은 벌레가 되지 않도록 밥을 지어준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만수는 손자이지만 나의 유일한 제자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는 것과 흥미를 느낀 것에 대해서 만수에게 가르쳤다. 어느 누구도 내게 무엇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 또한 세사에 무지하면서도 남들보다 아는 게 많다고 오만하여 젊은 시절 집안을 망치고 아버지를 일찍 돌아가시게 했으니 뻔뻔스럽게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 나설 염치가 없었다. 만수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끝까지 듣고 새겨 제 것으로 하려고 애썼다.

—사람은 한달을 굶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이는 일주일도 못 견딘다. 옛적부터 현명한 어른들이 물만 먹고도 살아오셨으니 그것을 백비탕(白沸湯)이라 한다. 신라시대 화랑이나 법사는 호랑이에 물려갔다 돌아온 사람에게 백비탕을 만들어 먹임으로써 정신을 차리게 했다. 먼저 차갑고 깨끗한 샘물을 준비한 뒤 숯불에 물을 팔팔 끓여 달인다. 그 물 삼분의 이를 그릇에 담고 찬 샘물 삼분의 일을 부어 두가지 다른 성질의 물이 섞이기를 기다렸다가 밥 한끼를 먹을 시간 동안 천천히 천천히 마시면 된다. 백비탕은 머리를 맑게 하고 잠을 깨우며 허기와 갈증을 면하게 한다. 하루 한번씩 십년을 꾸준히 마시면 석사·박사보다도 똑똑해질 수 있다.

요점은 물만 가지고도 살 수 있으니 한두끼 굶는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음식을 앞에 두고는 검약과 절제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전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흰 흙을 가지고 밥을 지어 먹음으로써 기아를 면했다. 그러니 미리 걱정하지 마라.

흙 속에는 지렁이·굼벵이 같은 고단백질의 음식이 있다. 걱정 마라. 굶어죽지 않는다.

소나무 껍질 속의 얇은 막도 국수를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국수나무는 국수를 만들어 먹어서 생긴 이름이다. 걱정 마라.

소나무 잎을 가루 내고 꽃가루를 섞어 먹으면 천년을 산다. 걱정 마라.

『동의보감』에 결명자 두되를 찧어 가루를 내고 이를 백일 동안 복용하면 촛불 없이도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다 했다. 건강하고 활기차게 오래 살려면 오미자, 구기자와 함께 결명자를 꼭 기억해두어라.

달걀과 깻잎을 많이 먹어라. 철분이 많으니까. 철분이 충분해야 머리가 좋아지고 정신이 건강하다.

물은 샘, 계곡, 강물 순으로 좋다. 물이 있는 한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물만 있으면 언제든 끓여서 백비탕으로 만들 수 있다.

밥을 먹을 때는 모름지기 한술의 밥을 스무번 이상 씹어서 단맛이 나는 것을 느끼고 나서 삼켜야 소화도 잘되고 씹는 동작이 그 사람의 두뇌를 발달시키고 얼굴 근육이 균형적으로 발달해 용모를 매력적으로 만드니 그 사람의 장래도 밝다. 천한 인간이나 부자는 한술 밥을 열번도 씹지 않지만 농부는 농사에 들어간 피땀과 노고를 생각하기 때문에 열번은 씹는다. 선비는 서른번을 씹으며 벼슬아치라면 어릴 때부터 쉰번은 씹었어야 숭고한 자리에 이를 수 있다. 한 나라의 임금은 백번을 씹는다. 하늘의 명을 받들고 만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밥을 오래 씹을수록 건강해지고 생각이 많아지고 인격이 닦이고 존경을 받게 된다.

—할아버지, 밥이 물이 됐어요. 열다섯번 씹었는데 그냥 삼켜졌어요.

네가 여섯살 되던 해 추석 때 그런 말을 하더구나. 그건 순전히 쌀로만 된 밥일 경우에 그렇단다. 나는 네가 지켜야 할 계명 또한 남겨주었다.

—천지지간 만물지중 인간이 가장 귀한 것은 염치를 알기 때문이다. 염치는 제 것과 남의 것을 분별하는 데서 생긴다. 염치, 이 두 글자를 평생의 문자로 숭상하여라. 그러면 너는 천상천하 어디를 가든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네 천분을 넘어서는 것을 욕심내지 마라. 욕심이 과하면 탐심이 생긴다. 탐심은 남의 것을 훔치게 만든다. 도둑질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된다. 네게 필요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네가 가진 것과 바꾸어라.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빌려라. 먼저 말을 하고 얻어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훔치는 건 안된다. 훔치지 마라. 훔치고 나면 너는 네 것을 모두 도둑맞게 된다. 훔치지 마라. 훔치고 나면 너는 내 손자가 아니다. 누구의 형이 아니고 동생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다.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나는 만석꾼 집안에 귀한 사대독자로 태어났다. 평생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고 살 팔자였다. 그 모든 복을 빼앗긴 것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훌륭한 아버지 덕분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무불통지(通知) 박식하시고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잘살자는 사상도 갖고 있고 소싯적에 독립운동까지 했다는 아버지는 가족들한테만은 못되게 굴고 가족을 우습게 알고 특히 나를 무시했다. 내가 공부를 안했고 무식하다고 말이다. 나는 안다. 내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 이유는 내가 당신과 전혀 닮지 않게 태어났고 자라면서도 당신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골샌님 아버지하고는 다르게 씨름꾼처럼 튼튼한 몸, 큰 손발, 덩치를 타고났다.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늙고 힘없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한밤중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떠나올 때 나 자신은 절대로 아버지처럼 나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인생 망치고 집안 망조 들게 하는 공부·책 따위와는 담을 쌓았다. 개운리에서는 공자왈 맹자왈 하는 아버지가 보라고 일부러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처럼 아이들을 끌고 대장 노릇을 하며 산비탈을 쏘다녔다. 살 데를 고르는 데도 서툴기 짝이 없는 아버지가 온 식구를 데리고 들어온 개운리는 깊은 골짜기에 사철 마르지 않는 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평지가 적고 그늘이 깊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늘 깊은 골짜기에 있는 논은 조금뿐이었고 산중턱에 있는 밭은 비탈이 심했다. 나무 그루터기와 돌이 많아서 개간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개운리는 터는 넓은데 목숨을 의지할 땅은 적으니 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공평한 것은 뼈 빠지게 일을 해봐야 입에 풀칠하기 바쁘다는 것이었다. 나는 열두살 때부터 지게를 졌고 열다섯살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았다. 아무도 살지 않는 안쪽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가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닭과 염소 같은 가축을 길렀다. 아버지의 바람을 정면으로 거역해 화전민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고 처갓집에서 물려받은 밭을 억척스럽게 일궈서 당당히 상농사꾼으로 인정받았다. 나는 이삼년 농사를 지으면 거름기가 사라지는 화전만 바라보고 살지는 않았다. 쟁기로 깊이 밭을 갈고 가축에게서 나온 거름을 내고 타고난 힘과 부지런함으로 땀의 댓가를 얻었다. 산에서 나무와 갖가지 열매와 버섯을 놓치지 않고 거둬들였고 겨울에는 고라니를 잡고 토끼며 꿩, 멧돼지 사냥을 했다. 나는 매일 황소처럼 일했고 늘어나는 식구를 먹여살렸다.

아버지는 개운리 산골짜기에 소를 들여놓기는 했지만 그 소에게 마구간 지어주고 풀을 뜯게 하고 꼴 베어다 쇠죽 끓여준 건 나였고 아내였고 아이들이었다. 그 소 때문에 개운리에서 읍까지 가는 산길이 넓어지고 그 길로 애들이 학교를 다니게 됐다고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달라진 게 뭐 있는가. 아이들이 하루 두끼 조밥, 풀떼기죽에 감자나 얻어먹는 건 변하지 않았다. 나물 아니면 배를 불리지 못하는 건 같았다. 애들이 학교에 다니는 바람에 일을 못하고 허파에 바람이 들어 헛된 꿈을 꾸게 만드는 바람에 살기가 더 힘들어졌다. 한창 일할 나이에 군에 끌려가 억울하게 목숨 바치고 하는 빌미가 됐다.

나는 장가를 간 스무살 때부터 가장이었다. 식구들이 먹고 살 음식을 제하고 내가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있었다. 나는 매년 아내에게 누룩을 발로 디뎌 만들게 했다. 그 누룩에 내가 수확한 좁쌀로 고두밥을 지어서 섞고 탁주로 걸러서 마셨다. 내가 기른 닭, 내가 잡은 토끼를 지지고 볶고 삶고 쪄서 안주로 먹었다. 그러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차피 술 같은 건 마실 줄도 모르고 마시지도 못한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내가 술에 취해 아버지가 사시사철 밤낮으로 누워 있는 사랑방 쪽에 대고 옛날에 아버지가 집안 들어먹고 야반도주를 한 이야기를 하면 다들 슬금슬금 도망을 가던데 그게 다 잘난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일임을 왜 모르는가. 의지할 일가붙이 하나 없게 만든 아버지라는 사람은 아프다고 누워서 책이나 읽고 있으니 내 한몸 부서지게 일해 온 식구 먹여살리고 옷 사다 입혀 사람 꼴로 살게 하는데 잘한다 고맙다 칭송과 감사는 왜 못하는가. 내가 무식한 원인이 또 잘난 아버지에게 있다는 건 왜 모르는가.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도망을 치니 내가 입은 없고 말은 잘 듣는 밥상과 쪽박하고 이야기할 수밖에 더 있는가. 그런 날은 나를 제외한 식구들이 밥을 굶곤 했다. 내가 종내 대답이 없는 먹통인 밥상을 둘러엎고 그릇을 깨뜨려서다. 그래도 나한테 희망이 돼준 건 맏아들이었다.

아버지 기준으로 보면 무지몽매한 뜨내기 화전민 집안에서 나한테 시집온 마누라는 대대로 손이 귀하던 우리 김씨 집안에 아들 셋, 딸 셋을 쑥쑥 낳아주었다. 애들이 하나도 어디 그른 데 없이 장성했으니 죽고 없는 조상부터 조부모, 부모를 기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특히 내가 장가들고 일년 만에 낳은 맏아들은 생김새부터 나보다는 제 할아버지를 꼭 빼닮았다. 아버지한테 내가 처음으로 부탁을 했는데 그게 당신 손자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대뜸 항렬이 무슨 배울 학이니 무슨 글월 문을 넣어서 이름을 짓는다 하길래 항렬이고 공부고 출세고 다 집어치우고 튼튼하고 오래 살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래서 지어진 이름이 백살까지 살라는 ‘백수(百壽)’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백수가 태어난 뒤로 개·돼지·토끼·소 할 것 없이 집안의 가축이 새끼를 경쟁하듯 많이 낳는 바람에 그 수가 몇 배로 늘었다. 백수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또 여동생을 보고 하던 1950년대는 날씨까지 도와주어서 거의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그래 우리집이 개운리 제일가는 부잣집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백수는 세살 때부터 제 할아버지한테 글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제 할아버지의 책을 줄줄 읽었다. 대여섯살 때부터 나한테 이런저런 일을 따지고 들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저 귀엽고 기특해서 오냐오냐 하고 다 받아주었다. 같은 말도 아버지가 하면 쪽박이라도 집어던져 깨야 속이 가라앉는데 백수가 하면 들어줄 만했다. 나이가 조금 더 들자 말로는 내가 이길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고등학교는 보낼 생각이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제 에미도 매끼마다 좁쌀을 한홉씩 덜어놓았다가 모아 팔아서 학비에 보탰다. 그래서 백수는 잔뼈가 굵기도 전인 중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 유학을 했다.

나무해다 팔고 농사밖에 지을 게 없는 두메산골에서 중학생 하나를 다른 도시에 유학 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탁주를 만드는 일은 절대 그만두지 못하게 했다. 빚을 내서라도 탁주는 빚어 마셔야 했다. 탁주를 마시지 못하면 힘이 나지 않아 일을 할 수가 없고 일을 하지 못하면 아예 온 식구가 굶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백수가 유학을 간 뒤부터 젖먹이를 제외한 온 가족이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고 나무하고 가축 기르는 일에 동원되었다. 백수 하나만을 위해 나머지 다섯 남매는 이웃의 제 친구들과 똑같은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니 만수는 말이 둘째 아들이지 백수에 비하면 보름달 앞의 반딧불만도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머리만 크고 손발이 배배 꼬인 새끼줄처럼 돌아가길래 큰 기대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늦되고 자라면서도 어리숙하고 바보 같은 걸 두고 동네 사람들은 ‘어비’라고 했는데 만수가 바로 그 짝이 났다. 아이가 비실비실 허약하고 주눅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으며 경쟁에 뒤처지는 것을 두고 ‘지실이 든다’고 하는데 만수가 바로 지실이 제대로 든 아이였다. 그래도 젖이 마른 에미 대신 당신의 마른 젖까지 물리던 할머니의 지극정성에 유식한 할아버지 발밑을 기어다니면서 주워들은 게 있어서 그런지 네댓살 되니 애 꼴은 갖춰졌다.

농촌에서 아이들을 여럿 낳는 것은 많이 죽어서이기도 하지만 농사에 사람 힘이 많이 필요해서이기도 하다. 만수는 위로 형은 공부하느라 없고 아래로 동생 석수는 어리니 세 아들 몫을 해야 했다. 몸은 제 할아버지를 닮아 빌빌거리는데 머리는 나를 닮았는지 우둔했고 위아래로 치일 팔자까지 타고났으니 어려서 고생은 좀 했다. 그 덕분에 어디 갔다놔도 제 한 몸 굶어죽지는 않게 일은 많이 배웠다.

백수는 제 할아버지 빼닮아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하고 석수는 나 닮아 덩치가 크고 먹는 건 잘 찾아먹어서 악착같기는 했다. 중간에 낀 만수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쩌겠는가. 저 생긴 대로 생겨난 팔자대로 살아야 하는 것을.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안 내내 성적이 전교 일등이었다는 죄로, 나는 담임선생님의 강권에 의해 집에서 사십 킬로미터쯤 떨어진 C중학교에 시험을 쳤다. 교통요지인 C시와 주변 네댓개 군의 영재들이 응시하는 C중 입시에는 M군 전체를 통틀어 합격생이 한해 다섯명이 나올까 말까 했는데 내가 수석합격을 하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 C중 진학을 포기하고 읍내 공립중학으로 간다니까 교장선생님이 5·6학년 담임선생님들을 전원 대동하고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네가 저지른 일이니 난 모르겠다고 하고는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때 할아버지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나를 앞세워 읍내로 갔다. 빳빳이 풀먹인 두루마기 소매로 바람을 일으키며 읍내를 활보하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기운차고 위엄있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게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읍내 나들이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교장실에서 선생님들과 만나 나를 C중학교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들이 박봉에서 얼마씩을 떼어 입학금을 마련했고 교장선생님 주선으로 함께 합격한 읍내 제재소집 아들 이동훈하고 같이 삼년간 하숙을 공짜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가며 지방 명문 C중학교를 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책과 떨어진 적이 없지만, 실상 과학과 실험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군대에 갈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개운리에서 사람들은 읍내서 석유를 사다가 호롱이며 남포에 담아서 썼다. 송진이나 콩기름, 들기름 같은 식물성 기름은 그을음이 많았고 오래 쓸 수 없었다. 양초는 제사 지낼 때나 가끔 썼을 뿐이었다. 소주병 됫병에 석유 한되를 채워오면 몇달을 쓸 수 있었다. 석유를 사오는 일은 거의 내가 맡았다. 그 무렵 장날마다 장터에 약장수가 와서 묘기를 보이곤 했다. 석유를 사러 간 길에 약장수가 보여주는 공짜 구경을 놓칠 까닭이 없었다. 원숭이에게 재롱을 피우게도 하고 마술도 보여주고 아코디언 반주로 노래도 불렀다. 그중에서도 맨주먹으로 차돌을 깨고 이빨로 쇠사슬에 매단 트럭을 끄는 차력술이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차력술사들이 입에 맹꽁이처럼 잔뜩 석유를 머금었다 화염방사기처럼 불을 뿜는 것이 못 견디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불 뿜는 묘기 공연을 보기를 수십번, 완벽하게 그 기술을 따라할 수 있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느날 나는 석유를 사가지고 오던 길에 산자락 밭두렁 아래에 모여 불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들 가운데서 만수를 발견했다.

—만수야, 추운데 뭐 하고 있냐?

내가 부르자 만수가 얼굴을 돌리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멀찌감치서 금희가 고무줄놀이에, 명희가 소꿉놀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만수를 잡아끌었다.

—너 형아가 멋있는 거 보여줄 테니까 아무한테도 이야기하면 안된다.

만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헤헤 웃으며 나를 따라 마을 뒤에 있는 큰 밤나무 앞으로 왔다. 밤나무는 가운데는 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거기에 귀신이 산다, 동네를 지키는 신령한 뱀들이 떼를 지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밤나무 앞에 석유가 든 됫병과 책가방을 내려놓고 만수의 주머니를 뒤졌다. 땟국물이 조르르 흐르는 만수의 윗도리 주머니에는 부엌의 성냥에서 찢어낸 인이 발린 종잇조각과 성냥개비가 들어 있었다. 만수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여동생 가운데 누군가 집에서 훔쳐낸 것이었다. 불장난을 하다가 어른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애초에 불을 지른 범인을 색출하게 될 테고 가장 강력한 물증을 가장 혐의가 가지 않을 어린 만수에게 숨겨놓은 것이다. 나 자신이 같은 장난을 해봤으므로 그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너 이거 들고 가만히 서 있어보아라.

나는 석유가 든 됫병의 마개를 열어서 만수에게 건넸다. 아무것도 모르는 만수는 헤벌쭉 웃으며 마개를 받아들었다. 나는 먼저 병을 들어서 입에 석유를 한모금 머금었다. 이어 성냥에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성냥개비에 불이 잘 붙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입에 들어 있던 석유를 뱉고 나서야 불을 붙일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 불을 꺼뜨리지 않은 채 다시 석유를 입에 머금고 뿜는 게 난제였다. 약장수며 차력사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을 실감했다. 나는 나뭇가지에 석유를 조금 뱉어서 불을 붙인 뒤 그 나뭇가지를 만수에게 들고 있게 했다. 그러고는 석유를 듬뿍 입속에 집어넣어 볼따구니를 맹꽁이처럼 부풀렸다. 만수는 두려움 반 호기심 반인 표정으로 계속 웃고 있었다. 마침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며 불이 꺼지려 했다. 입가로 석유가 삐져나오려고 한다는 느낌이 왔다. 나는 엎어질 듯 만수가 들고 있는 나뭇가지로 다가가 푸욱, 하고 석유를 내뿜었다. 마침내 인간 화염방사기가 제대로 작동했다. 불이 붙긴 했지만 그 불길은 바람을 타고 만수의 얼굴로 달려들었다. 만수를 감싸안고 뒹굴면서 불을 껐다. 이미 만수의 눈썹은 타버렸고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버린 상태였다. 나는 얼이 나가버린 만수의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비밀을 지키도록 단단히 다짐을 받은 뒤 집에 들어섰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석유가 없어 호롱불을 켜지 못한 채 저녁을 먹던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아, 석유부터 호야에 부어라. 뭐가 보여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지.

재촉을 하던 아버지는 불이 켜지자 이번에는 만수를 보더니 “니 뒤에 있는 가는 누 집 애고? 니 동생은 어데 까마구 집에 놀러갔는동 저물도록 보이지를 않고 웬 새카만 콩알 겉은 기 너를 따라 굼불라 오노?” 하고 물었다. 내가 불장난을 하던 만수를 혼내 데리고 왔노라고 하자 엄마가 부엌에서부터 부지깽이를 들고 내달아 만수를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불장난을 해서 머리를 다 태워먹으니 어쩌겠다는 것이냐고. 만수한테 좀 미안했다. 여동생들도 전부 다 가만히 있었다.

만수가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칼을 가지고 싶어하길래 나는 칼보다 훨씬 유용한 활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활은 대나무를 구부려 양끝에 고무줄을 매면 될 것 같았다. 숲에 흔히 자라는 푸른 대나무의 가운데에 불을 쬐서 굽히자 갈라져버리거나 탄력이 없어져서 쓸 수가 없었다. 변소에 나무로 만든 똥장군이 기대 있었는데 똥장군의 테두리를 싸고 있는 게 잘 마른 넓적한 왕대나무였다. 그걸 떼어내서 적당한 크기로 잘라 고무줄을 매자 냄새는 좀 나지만 훌륭한 활 모양이 되었다. 나는 만수에게 그 활과 산죽 끝에 대못을 박아 만든 화살을 주면서 참새나 토끼를 잡을 수 있지만 사람한테 겨눠서는 안된다고 일러주었다. 만수는 신이 나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얼마 뒤에 아버지가 거름을 내기 위해 똥장군에 변소의 묵은 똥물을 가득 채우고 지게에 얹어 밭으로 향했다. 나무쪽을 잡아주던 왕대나무 테두리가 없고 보니 아버지가 밭에 가는 중간부터 똥물은 새기 시작했다. 결국 아버지가 밭에 도착했을 때에는 똥장군은 어디로 가버리고 나무쪽만 남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버지의 눈에 마침 만수가 활을 들고 참새떼를 쫓아가는 광경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산이 쩌릉 울릴 정도의 호랑이 울음소리로 만수를 불렀고 만수의 활이 똥장군의 부품이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솥뚜껑 같은 손으로 만수의 귓방망이를 올려붙였다. 그 펀치를 맞고 공중에 두 발이 들렸다 떨어지면서 구르기 시작한 만수가 집 뒤꼍까지 굴러왔다. 물론 만수가 활과 화살을 만들 재주가 없다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때도 만수에게 무척 미안했다.

읍에서 파는 비닐우산의 대나무 살대는 연을 만들 때 뼈대로 쓸 수 있었다. 연의 몸체에 쓸 종이로 문창호지를 오려내지는 않았다. 당장 표시가 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무신 포장지로 딸려온 신문지를 잘 펴서 다린 뒤 살대를 붙여 가오리연을 만들었다. 문제는 연실이었다. 하늘 높이 올라갈 연을 잡아줄 긴 실을 사려면 약간의 돈이 필요했는데 그런 돈을 줄 사람은 우리집은 물론 개운리에서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집에는 이불 홑청이며 옷을 꿰맬 때 쓰는 실이 잔뜩 감긴 실패가 있었다. 그 실패를 연에 매달고 만수에게 주면서 바람이 많이 부는 집 맞은편 경사면에서 연을 날리되 연싸움 같은 건 절대로 하지 말고 연이 걸릴 수도 있는 대추나무, 미루나무 근처에 가지 말라고 했다. 한시간쯤 뒤에 만수가 와서 연실이 저절로 끊어져서 연은 실을 달고 산봉우리 너머로 날아가버렸고 실패만 남았다고 말했다. 손자들에게 좀체 손찌검을 하지 않던 할머니가 고무신을 벗어들고 나섰을 정도로 화가 났다. 알고 보니 일반 실과 연실은 꼬는 방식이 달랐다. 일반 실은 연이 뱅뱅 돌면 도는 방향에 따라 풀리기 쉬웠고 풀리면 간단히 끊어졌다. 물론 만수가 연을 만들 능력이 없다거나 일반 실이 연실로 부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만수가 학교를 가기 전에 한글을 가르치려고 해본 적이 있었다. 아침을 먹고 달력 뒷장에 한글 기본 자모음과 숫자를 그리고 따라 쓰게 했다. 만수는 저녁이 다 되도록 달력 한장을 따라 쓰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글자를 그리고 있었다. 소질이 없는 건 할 수 없는 일이나 만수는 성의가 있었다.

만수는 남보다 머리가 커서 뇌세포도 남보다 많은 줄 알았더니 공부는 잘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만수는 열심히 했다. 착했다. 순했다. 순진했다. 손재주가 있었다. 남의 말을 잘 들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려 애썼다. 나를 믿었다. 나는 만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만수야, 너는 아직 재주가 다 드러나지 않은 망아지, 덜 벼려진 칼과 같구나.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가지만 돈 끼호떼의 로신안떼처럼 비루먹고 약한 말도 열흘을 부지런히 가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또 천리마의 꼬랑지에 붙어 있는 쇠파리 또한 천리를 간단다. 네가 쇠를 흙 베듯 하는 명검이 아니고, 네가 하루 천리를 가는 명마가 아니라고, 말꼬리의 쇠파리가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라. 뭐든지 잘 보고 기술을 배워 하루하루 열심히 하면 너는 전기기사, 시계수리공, 운전사 등등의 기술자가 될 수 있다. 구두닦이, 지게꾼도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했으니 너는 귀를 크게 열고 입은 꼭 다물고 네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나의 유일한 오빠, 여섯살 많던 오빠는 공부도 누구보다 잘했지만 그림도 잘 그렸고 노래도 잘했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던가 여름방학에 오빠가 다니던 중학교 앞 하숙집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길쭉한 종이갑에서 노란 비로드천에 싸인 이상한 물건을 꺼냈다. 천을 벗기자 고래의 이빨처럼 길다랗고 번쩍거리는 물건이 나왔다. 오빠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들고 옥수수를 먹을 때처럼 훑었다. “우루루루룻” 하고 엄마가 아기를 어를 때 나는 소리가 났다. 오빠는 그 물건의 구멍난 부분을 손바닥에 탁탁 치고 나서 다시 비로드천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더니 갑에 다시 집어넣었다.

—하모니카는 피아노나 기타처럼 반주악기이면서 연주도 된다. 아주 작다. 가볍다. 들고 다니기에도 좋다. 소를 모는 목동, 나무하는 사람, 낚시꾼, 외로운 방랑자, 전장의 군인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 하모니카를 부는 동안 하모니카 속에 침이 많이 고인다. 여러 사람이 불면 여러 사람의 침이 고이겠지. 그러니 하모니카는 혼자만 불거나 아주 친한 사이에만, 그러니까 입을 맞춰도 될 사이에만 빌려주어야 한다. 하모니카를 자주 털어서 침을 빼주는 게 좋다. 그래야 결핵 같은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는다.

오빠는 자신이 아는 노래 가운데 좋은 노래를 우리에게 불러주기도 하고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 여름 나와 언니, 만수가 나란히 나물바구니를 옆에 끼고 집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오빠가 가르쳐준 노래를 잊을 수 없다. 제목은 모르겠다. 작곡, 작사가 누구인지도.

 

바구니 끼고서 도라지 캐러 간

누나는 웬일로 안 오실까요.

바둑이 데리고 찾아갈까.

 

은하수 별들이 물결을 치는데

마을 간 언니는 왜 안 올까요.

큰언니 손 잡고 찾아갈까.

오빠가 먼저 노래를 하모니카로 연주했다. 나물 캘 때 쓰는 창칼을 양철 쟁반에 문지르는 것 같은 하모니카 소리가 이국적이고 아름다웠다. 하모니카를 부는 오빠의 옆모습은 신을 위해 찬송가를 연주하는 천사, 그리스신화의 오르페우스 같았다. 멜로디를 익히고 난 뒤에 오빠가 노래를 한 소절씩 하면 우리가 따라 불렀다. 노래가 참 쉬웠다. 세 남매를 나란히 앉혀놓고 오빠가 앞에서 지휘를 했다. 어쩐지 슬펐다. 슬픈 내용이 아닌데. 우리가 금방 헤어질 것도 아닌데.

—어디 보자, 우리 만수 도령이 일절, 명희 아가씨가 이절의 주인공이네. 도라지 캐러간 누나는 웬일로 안 올까. 마을 간 언니는 왜 아니올까.

오빠는 내 단발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한 소절씩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다섯살배기 석수도 마루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고 옥희도 언니의 등에 업혀 노래를 들었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도 잦아들었다. 엄마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부엌 바닥에 앉았다. 할머니는 벌레 먹은 콩을 골라내면서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만이 지게 지고 장에 가고 없었다.

—오빠, 우리 노래 말고 오빠 노래를 듣고 싶어요. 오빠가 중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주셔요. 어려워도 괜찮아요.

우리가 조르자 오빠는 내 공책을 가지고 오게 해서 맨 뒷장에 ‘아 목동아’라고 제목을 쓰고 가사를 적었다. 그 뒤에 영어로 ‘Oh Danny boy’라고 쓰고 영어 가사를 썼다. 영어를 모르는 우리를 위해 영어 가사 바로 아래에는 한글 발음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하모니카를 입에 댔다. 「아 목동아」가 평생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된 건 바로 그때 오빠가 그 노래를 직접 부르고 내용이 뭔지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오, 대니야. 전쟁을 알리는 파이프 소리가 들려오는구나.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산꼭대기에서 저 산비탈 아래로. 여름이 지나고 장미꽃이 다 지는구나. 너는 전쟁터로 출정해야 하고 나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초원에 여름이 오면 그때는 돌아오너라. 아니면 골짜기가 입을 다물고 고요해지거나 흰 눈에 덮일 때에. 햇빛이 비치거나 그늘이 지거나 난 언제나 여기에 있을 거다. 오, 대니야.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네가 돌아올 때쯤 모든 꽃이 떨어져 죽고 나 또한 죽어 땅속에 묻혀 있을 수 있겠구나. 네가 집에 돌아와 나 묻힌 자리를 발견하면 땅에 무릎을 꿇을 거다. 나를 위해 기도하며 절을 할 게다. 나는 땅 밑에서 네 발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다. 내 무덤조차 따뜻하고 아늑해질 거다. 너는 몸을 숙여 나에게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겠구나. 그러면 나는 평화로운 잠에 빠져들게 될 게다. 네가 언젠가 내게 올 때까지. 오, 대니야 대니야. 나는 너를 너무도 사랑한단다.

오빠의 얼굴, 오빠의 목소리, 오빠의 표정, 오빠의 눈, 오빠의 떨리던 입술과 속눈썹이 모두 영원히 내게 남았다.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오, 오빠 오빠. 나는 오빠를 너무도 사랑합니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만수는 오빠가 가르쳐준 가사 때문에 한글을 배우려고 애썼다. 나중에는 영어로 적어준 가사를 익히려다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오빠가 가르쳐준 노래, 불러준 노래를 정말 좋아했다. 오빠, 아니 형처럼 형의 노래를, 함께 노래하던 때를 사랑했다.

이처럼 오빠는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늘 우러러보던 사람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고 훌륭한 오빠는 그러나 유리잔처럼 몸이 약했다. 몸이 자주 아파서 집에서 방학 때면 누워 있을 때가 많았다.

겨울방학 때였다. 오빠는 몸살감기에 걸려 누워 있었고 언니·나·만수 세 남매는 오빠에게 뭐든 캐고 잡고 따서 가져다주려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산과 골짜기와 밭을 돌아다녔다. 우리 세 남매가 잘하는 건 나물을 캐는 것인데 겨울에는 나물이 거의 없었다. 칡이나 더덕, 돼지감자를 캐려면 언 땅을 파야 했는데 줄기는 보이지 않고 눈 덮인 언 땅을 팔 힘도 없어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언니가 처마에 달린 고드름을 보고는 그걸 따다가 깨끗한 접시에 얹어서 오빠 머리맡에 가져다두고는 말했다.

—오빠, 오빠한테 드릴 게 이거밖에 없어요. 미안합니다.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고드름을 따느라고 얼마나 손이 시려웠겠느냐고 언니의 빨간 손을 잡아주었다. 만수가 그 광경을 보고는 밖에 나가서 대나무 아래의 깨끗한 눈을 스테인레스 그릇에 가득 담아왔다. 만수의 얼어터진 손 이곳저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오빠는 만수의 손을 쥐어 이불 속에 넣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큰일 아니면 절대로 꺼내는 일이 없는 귀한 설탕을 가져왔다. 고드름과 눈 위에 설탕을 살살 뿌려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스바와 빙수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울다 웃다 했었다.

그날 저녁 오빠는 할머니의 낡은 스웨터를 얻어서 실을 풀고 주전자의 뜨거운 김에 쐰 뒤 뭉쳐가지고는 털장갑을 뜨기 시작했다. 오빠는 벙어리장갑이 아닌, 손가락이 있는 털장갑을 세개 떠서 나와 언니, 만수에게 주었다. 나물 찾을 때 손 시리게 다니지 말라고. 겨울에 손 트지 말라고.

나는 아직도 그 장갑을 가지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개운리 소녀들은 학교에 가기도 전에 저마다 바구니를 하나씩 가지게 되었다. 장난감을 담아두라는 게 아니고 소꿉놀이를 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집 바깥에 있는 먹을 것, 특히 산나물과 열매며 추수하고 남은 감자나 고구마, 콩이나 밀 이삭 등속을 주워오라는 의미에서였다. 우리집 자매들은 어릴 때부터 나물 캐는 선수로 유명했다. 막내인 옥희가 나와 열두살이나 차이가 나서 세 자매가 다함께 실력 발휘를 할 기회는 없었다. 나와 세살 아래인 명희에, 명희의 세살 아래인 만수가 나물을 캘 때 자매처럼 바구니 대신 소쿠리를 메고 따라다녔다. 한때 소쿠리가 보이면 만수가 있었고 만수가 있으면 소쿠리를 메고 있어서 만수를 “소쿨아, 소쿨아” 하고 불렀다. 엄마는 ‘소쿨네’로 불렸다.

나물 캐는 법은 엄마한테 배웠지만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온 나물이 뭔지 엄마가 모르는 게 있으면 할아버지에게 갔다.

—봐라. 그건 미나리하고 비슷하게 생겼어도 독미나리다. 독미나리는 미나리에 없는 대나무 같은 뿌리가 있어. 잘 모르겠으면 뿌리 부분을 들어올려보면 알 수 있다. 미나리하고 독미나리하고 같은 물에 자라는 경우가 많아서 같이 채취하는 수가 있다. 미나리는 봄철에 제일 맛있는 나물이지만 독미나리는 잘못 먹으면 구토, 복통에 정신머리가 없어지고 숨을 못 쉬게 된다. 그러다 결국 죽지. 사마귀 대가리 같은 잎이 있는 이 천남성은 흉악하게도 생겼지만 입에 대기만 하면 화상이 걸릴 것처럼 따갑고 심각한 염증이 생긴다. 옥수수처럼 달리는 열매도 독이 강하고 뿌리는 씁쓸한 맛이 나는데 또한 많이 먹으면 죽고 만다.

할아버지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독성은 끓는 물에 데친 뒤에 잘 헹구면 사라진다고 했다. 그래서 나물을 캐오면 대부분 데쳐서 말려 먹곤 했다. 할아버지는 독초와 뿌리, 열매를 따로 모아두었다가 토사곽란과 배앓이, 감기, 머리 아픈 데, 기침하는 데 쓰게 했다.

피부가 좋지 않은 만수에게는 잎이 종지 모양으로 생겨서 종지나물로 불렸던 풀의 잎을 많이 썼다. 종기며 피부가 헐어 생긴 발진, 살갗이 벌겋게 되면서 화끈거리고 열이 나는 병에 풀 전체를 찧어서 붙이면 효과가 있었다.

피마자는 기름을 내서 만수의 버짐, 종아리 헌데, 허벅지 종기, 옴에 발랐다. 어린 잎은 데쳐서 찬물에 헹구고 말렸다가 나물로 먹었는데 각기병·가래·기침에 효과가 있고 만수 같은 사내아이들 고추가 붓고 아픈 데도 쓰인다고 했다.

만수는 풀과 버섯, 약초, 독초, 곤충, 열매, 식물, 동물, 구름, 별, 자연에 관한 이야기라면 덮어놓고 좋아했다.

—뭔데? 왜 그런데? 어떻게 해서?

만수는 할머니, 엄마, 누나들의 치마만 잡으면 묻곤 했다. 할아버지와 형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또 졸랐다. 궁금한 건 많은데 가르쳐줘도 잘 잊어버렸기 때문에 열번 스무번 되풀이해줘야 했다. 산천초목과 동식물에 대한 문제가 학교 시험에 나왔다면 만수가 전교 일등을 도맡아했을 것이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같은 콩으로 담은 장이라도 엄마가 담은 간장·된장·고추장은 온 마을에서 맛있기로 소문났다. 우리가 캐간 나물을 그 장으로 무치거나 고추장 발라 굽거나 된장을 넣어 국으로 끓이거나 간장·고추장에 넣어 장아찌를 만들거나 해서 반찬으로 먹으면 어떤 부잣집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게 맛있었다. 김장을 할 때 우리집은 무를 넣은 독을 땅에 여럿 묻었다. 동치미가 아니라 짠지였다. 무를 깨끗이 씻고 소금 간을 했을 뿐인데 그게 잘 익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무를 쫑쫑 채 썰어 양푼에 담고 밥에 고추장을 넣어 썩썩 비벼서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으면 어떤 고생도 같이 견뎌나갈 만한 것처럼 생각되곤 했다. 처마 밑 그늘에 매달아 겨울 찬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하며 잘 마른 무시래기에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은 겨울 저녁의 추위를 달래주었다. 김치를 잘게 썰고 참기름에 살짝 볶은 뒤 묵은 밥을 넣고 끓인 뜨끈한 김치죽은 겨울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별미였다.

땅속에 묻은 김장독 김치에서 군내가 나기 시작하고 골마지가 끼면 늦봄이었다. 엄마는 독에 남은 짠지를 꺼내 물에 살살 씻었다. 아껴먹으려고 워낙 짜게 김장을 담가서 배추는 원형이 거의 남아 있었다. 그걸 도마에 얹고 대충 썰었다. 연말에 온 마을 사람들이 추렴을 해 돼지를 잡았을 때 남은 비계를 녹여 만들어둔 돼지기름을 가마솥에 넣고 짠지를 달달 볶았다. 그리고 묵은 밥을 넣고 소금 간을 더해 주걱으로 헤쳐가며 볶으면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만수는 그 볶음밥 냄새를 십리 밖에서도 맡았다. 허겁지겁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주걱에 붙은 밥알부터 먼저 핥아먹고는 부뚜막에 올라앉았다. 쪼그려 앉아서 솥에 곧 빠질 듯 말 듯 하면서 볶음밥을 먹었다. 이십년 뒤, 삼십년 뒤에 다른 건 몰라도 김치볶음밥은 아무리 좋은 재료를 쓰고 잘 만들어도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만수는 말하곤 했다.

먹을 게 귀한 봄철에 우리집 남매들을 키워준 건 쑥이었다. 엄마는 쑥은 흉년에도 쑥쑥 잘 커서 쑥이라고 했다. 쑥을 몇 바구니 캐오면 삶든지 뜨거운 물에 담가뒀다가 국거리로 썼다. 쑥떡을 만들 때는 좁쌀·피·수수에 쑥을 넣고 절구에 찧어서 가루를 내서 썼다. 밀가루·보릿가루를 내고 남은 속껍질을 반죽해 쑥을 푹 삶아 찧은 것과 함께 다시 삶아서 개떡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게 얼마나 귀하고 맛있었는지, 요즘도 누가 ‘개떡 같다’고 하면 욕을 듣는 기분이 드는 게 아니라 침이 고인다. 밀가루와 함께 쑥을 쪄먹을 때도 있는데 그건 범벅이라고 했다.

만수가 제일 좋아한 건 쑥이 들어간 콩죽이었다. 생콩을 물에 담가두었다가 절구로 찧고 물을 부었다. 거기다가 있는 대로 곡식가루를 넣고 흔한 쑥을 넣어 죽을 끓였다. 콩의 구수한 맛에 쑥의 향긋한 맛이 어울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만수는 콩죽 끓인 솥을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먹을 정도로 좋아했다. 그래서 만수는 어릴 때 별명이 쑥맥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한 간식은 술빵이었다. 밥 짓는 가마솥에 밀가루에 소다수를 부어 반죽한 것을 안치고 살짝 불을 때서 구워냈다. 가마솥 반쯤 되게 부풀어오른 것을 부엌칼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내놓으면 학교에 다녀온 만수·석수는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별말 없이 잘 먹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장날 지게 지고 나가면 밀가루 한 포대 사오는 걸 잊지 말라고 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엄마가 나한테 말하도록 시키면 아버지 기분 좋아 보일 때를 보아 조심스레 부탁하곤 했다.

밥을 지어 먹을 때는 좁쌀과 보리가 떨어질 것을 늘 걱정했지만 밀가루는 밀농사를 지어도 안 지어도 장에 가서 싸게 사올 수 있으니까 그런 걱정이 훨씬 덜했다. 하루 세끼 중에 점심·저녁으로는 대개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 밀가루는 수제비로, 칼국수로도 많이 끓여 먹었다. 풋나물과 채소만 나면 뜯어다 씻어가지고 솥에 던져넣고 물을 끓인 뒤 밀가루를 반죽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너도나도 둘러앉아 뚝뚝 떼서 물 끓는 솥에 집어던지면 수제비가 완성되었다. 간장과 고춧가루, 마늘로 양념간장을 만들어서 놓으면 다들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양푼 그득히 칼국수를 퍼놓고 아버지와 할머니, 할아버지를 제외한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벌겋게 고추장을 풀고 간장을 넣은 뒤에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도 맛있었다. 밀가루 음식을 자주 먹으면 생목이 오르고 신트림이 나며 소화가 잘 안됐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숟가락에 소다가루를 가지고 와서 먹였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모두 소다가루를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 평소에는 묵묵히 일만 하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아버지 이상의 가부장이 되었고 취하면 폭군으로 변했다.

—너희들이 솥과 밥그릇과 수저를 하늘에서 받아가지고 태어난 게 아닌 이상은, 내가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곡식이 너희 입에 들어갈 때 고마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짐승이다. 개돼지도 제 밥그릇 채워주는 주인한테 고마워하는 법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꿀밤 먹고 농사짓는 고구마나 훔쳐 캐먹는 무도한 멧돼지 같은 것이나 사람한테 덤벼든다. 너희가 일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도 없다. 일하지 않으면서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몸에 옷을 걸치려는 건 도둑질이다. 도둑은 내 집에서 키우지 않는다.

밖에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든, 집에서 엄마가 사철 만드는 탁주를 마시든 간에 아버지는 살림을 때려부수고 엄마를 때리고 마굿간에 붙은 사랑방의 할아버지한테 고함을 치지 않으면 우리를 몽땅 불러모아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그게 살림 부서지는 것보다, 엄마가 맞고 이리저리 소리도 없이 구르는 것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깊고 긴 침묵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가 술 취한 목소리로 부르기만 하면 앞다투어 아버지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면 잔소리인지 가르침인지 잠꼬대인지 주정인지 모를 아버지의 이야기는 두시간도 좋고 세시간도 좋게 이어졌다. 우리는 아버지가 어서 잠이 들거나 지쳐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기를 기도했다. 이야기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만수마저 술 취한 아버지 앞에서는 졸았다. 그러다가 그 큰 머리통이 아버지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의 호된 꿀밤에 만수의 머리통이 동네북처럼 쿵쿵 소리를 낼 때마다 당사자는 물론 우리도 깜짝 놀라 잠에서 깨곤 했다.

—적어도 적어도 적어도 너희 한몸은 너희가 책임지는 거다. 너희 먹을 건 너희가 구해야 한다. 사나이라면 제 식구, 형제를 책임진다. 굶기지 않는다.

아버지는 고릴라처럼 가슴을 쾅쾅 치며 말했다.

—나를 봐라. 내가 사나이 대장부다. 사내가 되어가지고 사철 구들장 지고 누워서 식구들을 굶길 것이라면 나가 죽어라. 처음부터 고추를 떼버려라.

만수가 고추가 여물기도 전에 아버지한테 제일 자주 들은 말이 그걸 떼라는 말이었다. 우리집에서 만수의 고추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나다. 어린 시절 만수의 목욕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종일 불장난하다 연기 냄새를 풍기며 만수가 곁에 오면 나는 찢어진 옷을 꿰매야 한다면서 바늘에 실을 꿰고 만수를 앞에 세웠다.

—만수야. 너 헌 옷을 입은 채로 옷 째진 데를 꿰매면 나중에 새 옷 못 얻어 입는다.

그러면 만수는 옷을 벗으려고 고개를 자라처럼 옷 속으로 집어넣고 팔을 빼느라 “오옹오옹” 소리를 내가며 용을 썼다.

—오늘 장날에 가서 삼월 삼일에 만수가 학교 입학할 때 입고 갈 새 옷을 아버지가 사올 거니까 바지도 마저 벗어라.

만수는 구멍이 숭숭 난 바지를 벗고 내복 차림으로 앉았다.

—큰누나, 그 말 정말이다?

—그럼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만수한테 내가 왜 거짓말을 할꼬.

만수는 콧물을 후루룩 들이마시고 있고 오빠는 영어로 된 소설을 중얼중얼 소리 내어 읽었다.

—거짓말 하면 우리 형님한테 일러준다. 형님이 큰누나 혼꾸멍내줄 거다.

—아이고, 무섭다. 내가 우리 만수가 무서워 거짓말 못하겠네.

마굿간에 딸린 사랑방 부엌의 아궁이에는 장작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쇠죽 끓이는 가마솥에는 김이 올랐다. 나는 물의 온도가 알맞게 올라갔을 즈음에 만수를 마구간으로 끌어넣었다.

—싫어 싫어. 춥다. 목욕 안한다.

—너 지나가던 까마귀가 형님아 인마, 같이 우리집 가자, 나하고 살자 하고 네 쑥대머리를 입으로 꼭 물어가지고 공중을 훨훨 날아 데려가버린다. 개미들이 형님아 하면서 때가 켜로 낀 등짝에 집을 짓는다. 너 아버지가 오늘 설 대목 장 봐가지고 오실 건데 그때 이렇게 새카만 검둥이 꼬라지를 하고 있으면 강정 안 준다. 새 옷 안 준다.

위협과 설득에 만수는 알몸으로 가마솥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았다. 가마솥에는 빨래판으로 쓰는 넓적한 판대기가 가로로 걸쳐져 있었다.

—앗 뜨거워, 뜨거워, 뜨거워!

나는 미리 가져다놓은 찬물을 가마솥에 부어 온도를 맞추었다.

—뜨겁긴 뭐가 그렇게 뜨겁다고? 안 뜨거우면 때가 안 붇는다. 그러게 그렇게 놀기만 하고 씻지는 않으니까 그렇지.

소가 되새김질을 하면서 우리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젖히고 웃는지 소 목에 달린 워낭이 떨그렁 소리를 냈다. 가마솥 아래 아궁이에서 소나무 장작이 타며 이따금 한숨처럼 내는 쉬잇, 하는 소리와 향긋한 송진 냄새가 났다. 밖으로 나와 닭을 불러모아 철사망을 한 닭장에 들여놓았다. 양동이에 찬물을 담아 들어가면 만수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와라, 빨리. 큰누나야, 무섭다. 나 울 거다. 운다.

마구간에 고개를 들이밀고 보면 김이 서린 공기 속에 희미한 남포불이 비치고 만수는 가마솥 위에 앉아 고추를 가리고 있었다.

—아이구, 누가 그 고추 떼간다고. 우리 도련님.

마구간 부엌 안은 후끈한 김과 만수가 뜨겁다고 물을 튀기는 소리, 아프다고 살살 밀라고 애원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숨차, 숨차! 숨을 못 쉬겠어!

한번은 하도 만수가 법석을 부리는 바람에 가장 살이 많은 엉덩짝을 쳤는데도 뼈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손이 아팠다. 눈물이 다 나오려고 했다.

—하이구, 일년에 한번이나 씻으나 말까 하니 껍데기가 꼭 미륵돼지 비계같이 두껍구나.

목욕을 마친 후에 만수는 수건으로 대충 몸을 말린 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으로 눈 쌓인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가서 안방 이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호롱불 심지를 돋우고 만수에게서 벗긴 옷의 솔기를 불에 갖다댔다. 이와 서캐가 타며 빠지지직, 하고 소리를 냈다. 매캐하고 기름진 연기에 재채기를 하면서도 만수는 몸을 배배 꼬아댔다.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서 이를 잡아냈다. 이 사냥을 하는 식구들과 그 사이에 피어오르는 연기로 방 안은 전운이 가득했다. 밖에서는 몇년 묵은 이처럼 굵은 별들이 빛났고 사시나무에 바람이 슬슬 불었다.

 

—너희들 한눈팔면 놔두고 우리끼리 가버린다. 학교 정문까지 갈 때까지 형님 누나들 놓치지 말고 뛰어.

개운리에서 읍내 남쪽 외곽에 있는 학교까지 가는 등굣길은 절반이 산길이고 나머지 절반은 신작로와 들길이었다. 개운리 입구에 모인 학생은 서른명이 넘었다. 석유 냄새가 나는 새 옷을 입고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새 고무신을 신은 만수처럼 처음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가 남자 셋, 여자 둘이고 중학생 셋은 모두 남자였다.

학교에서는 교실 수가 적고 아이들은 많아서 2부제 수업을 했다. 오전수업만 하는 1·2학년이 쓰던 교실을 3·4·5학년이 물려서 쓰는 식이었다. 6학년만 입시 준비를 하느라 교실을 종일 독차지했다. 모두 차림새는 비슷했다. 저학년은 자신의 몸에 비해 큰 옷을 입고, 큰 고무신을 신었으며 광목이며 무명으로 만든 책보를 허리에 맸다. 고학년은 몸에 비해 작은 옷을 입고 찢어져서 실로 꿰맨 고무신을 신었다. 삼분의 일은 맨발이었다. 처음부터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다. 지루함과 추위를 이기려면 뛰는 편이 나았다. 1학년이 간신히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속도였다. 그러면서도 챙길 것은 다 챙겼다.

—여기 쑥이다. 저기 냉이다. 저기가 달래다. 씀바귀다.

여자아이들의 대장인 6학년 성자가 계속 뛰며 말했다.

—계집애들, 그거 계속 붙잡고 있으면 지각이다. 지각생은 놔두고 간다.

남자 대장 상호는 여자들을 무시했다. 저는 계곡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기까지 하면서. 아이들은 뛰고 뛰었다. 살피고 뽑고 먹어보고 건드려보고 꺾었다.

—아직 개구리는 안 보인다. 개구리알은 있다.

내가 말하자 4학년 철영이가 대꾸했다.

—알도 먹을 수는 있다.

—어딜? 그러다가 배 속에 올챙이가 생기면 배 아파 죽고 난리 난다.

한해 뒤에 대장이 될 5학년 달수가 반박했다.

—배가 아픈 건 다이아찡 먹으면 낫는다.

—아니다. 소다가루가 최고다. 소다가루 먹고 물 먹고 누워 있으면 깨렉, 트림이 나고 다 넘어간다.

—배에다 아까징끼 바르니까 직빵이더라.

남자아이들은 서너살 차이까지는 서로 반말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신작로에 내려서자 상호가 책보에서 칡을 꺼냈다. 봄방학 때 산에서 아이들과 같이 캐와서 작두로 썰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것이었다. 너도나도 손을 내밀었으나 학년별로 제 마음에 드는 아이에게 하나씩 주고 마지막으로 1학년을 훑어보다가 만수에게 절반을 쪼개서 내밀었다. 그러고는 시범을 보이듯 껍질을 앞니로 물어뜯은 뒤 드러난 속줄기를 찢어서 씹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도 따라했다. 칡 한토막을 혼자만 먹는 건 아니었고 하나가 먹을 만큼 찢어서 먹고 나면 옆으로 돌아갔다. 개운리의 아이들은 모두 껌처럼 칡을 씹으며 신작로를 걸어갔다. 처음에는 씁쓸하지만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게 칡이었다. 칡을 먹는 아이들은 입부터 옷까지 칡색깔로 물이 들어 바둑이처럼 얼룩덜룩했다.

학교의 담은 측백나무 울타리와 기울어져가는 철조망이었고 벽돌 담장은 높은 철대문을 중심으로 조금만 쌓여 있었다. 운동장은 우리 동네 모든 마당을 합친 것처럼 넓었으며 만국기가 바람에 연처럼 날리며 푸르륵 푸르륵 소리내며 떨었다. 등교하는 아이들과 입학식에 참관하러 오는 학부형을 맞는 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여럿이 함께 부르는 휘파람 소리가 들어 있는 행진곡이 나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었다. 그 모든 것이 처음 학교에 오는 아이들의 넋을 빼놓았다.

개학식과 입학식을 겸하는 자리라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다리가 꼬이다 못해 부러지도록 길었다. 난생처음 ‘앞으로 나란히’라는 구령에 따라 줄을 맞춰선 신입생들의 코에서 콧물이 흘러내렸다. 4학년 옆줄에 있는 1학년 아이들의 가슴에는 콧물을 닦으라고 손수건이 달려 있었다. 아이들은 짭짤한 콧물을 혀로 핥을 뿐 손수건을 거의 쓰지 않았다. 아예 손수건을 달지 않은 만수의 콧구멍에서는 시퍼렇고 끈적한 코가 코 아래로 나왔다. 입 위를 슬쩍 지나 바람에 흔들흔들 끊어질 듯 말 듯한 여행을 계속한 뒤 턱 아래에 고드름처럼 매달렸다. 잠시 뒤 믿을 수 없게도 기다란 그 콧물이 한꺼번에 신속히 출발한 자리로 되돌아갔다. 곧이어 다시 슬금슬금 시퍼런 코가 콧구멍에서 기어나왔다.

아이들 엄마가 있었으면 줄 안으로 들어가 엄지와 검지로 가래떡처럼 긴 콧물을 싹둑 자르고 치마로 닦아주었을 것이지만 개운리에서는 학부형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때까지 온 적이 없었다. 개운리 아이들이 개운리 아이들의 학부형이었다. 만수가 코를 열번째쯤 들이마셨을 때 1학기 개학식 겸 입학식은 끝났다. 1학년은 교실까지 담임선생님을 따라갔다 집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같은 반인 명희가 만수를 따라가야 해서 나도 같이 갔다.

마루가 깔린 넓은 교실에 만수의 담임선생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고 예쁜 선생님이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만수는 담임선생님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고 웃었다 찌푸렸다 하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만수는 화장하고 양장을 한 여자는 처음 봤을 것이었다. 삼년 전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도 그랬으니까. 선생님한테서는 꽃향기 같은 좋은 냄새가 났다. 다 끝났는데도 가기 싫다고 버티는 만수의 목덜미를 잡고 끌고 나오자 개운리의 아이들이 학교 정문 곁에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에서 나오자 문방구와 구멍가게, 노점상이 진을 치고 있었다. 번데기 장수가 뺑뺑이판을 돌리면서 송곳을 들고 염소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불러댔다. 시멘트 냄새가 배어 있는 푸대종이를 잘라 고깔 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번데기를 담아 팔았다. 읍내 아이들은 그걸 사서 쪽쪽 소리 내며 빨아먹었다. 알사탕이 줄줄이 비닐에 담겨 가게 앞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월남방망이’라고 불리는, 알사탕에 손잡이가 달린 걸 입에 넣고 볼을 부풀린 채 다른 아이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풍선껌을 사서 입에 맹꽁이처럼 큰 풍선을 만들었다 터뜨리곤 했다. 전에 못 보던 ‘쫀드기’라는 것도 있었다. 삘기처럼 길쭉한 걸 갈라서 먹는데 껌처럼 질겼고 달았다. 오렌지·파인애플처럼 구경한 적도 없는 과일의 맛이 나는 분말이 담긴 비닐 막대도 있었다. 물에 타먹을 수도 그냥 빨아먹을 수도 있었다. 내가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은 ‘뽑기’였다. 돈을 내면 1에서 100까지 쓰인 동전만 한 종이를 떼낼 수 있는 권리가 생겼고 종이 뒤에 적힌 내용에 따라서 큰 풍선도 작은 풍선도 탈 수 있었는데 그건 위험해 보이면서도 유혹적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설탕을 녹여서 만든 칼이며 물고기에 당첨되면 그것을 가질 수도 있고 돈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도 ‘뽑기’였다. 아무것도 당첨되지 않는 ‘꽝’ 또는 ‘다음 기회에’ 표시가 나오면 망하는 것이었다. 양지 쪽에서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설탕을 작은 국자에 넣고 연탄불 위에서 녹이다가 소다를 넣어주고 부풀게 한 다음 납작한 별 모양의 판에 부어 만든 ‘또뽑기’를 사먹고 있었다. 침을 발라가며 살살 떼내고 조심스럽게 자르고 핀으로 찔러서 별 모양 그대로 가져가면 또 하나를 공짜로 준다고 했다. 엿장수가 목판에 가래엿을 가득 담고는 가위를 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개운리 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돈이 한푼도 없었으니까. 개운리 아이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며 침을 꿀떡꿀떡 삼키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돈은 고사하고 엿장수가 받는 빈 병이며 철사줄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나마 돈으로 쳐주는 게 달걀이지만 이십리나 떨어진 집의 뒤꼍, 닭이 알을 낳는 곳에나 있었다.

상호는 아이들의 관심을 오일장이 열리는 장터로 돌렸다.

—저기에서 독립군하고 왜놈 무라까미 순사 나오는 연극을 한다. 노래도 하고 마술도 보여주고 차력도 한다. 장풍으로 촛불을 끄고 손가락으로 자갈을 쪼갠다. 공짜다.

하지만 그날은 장날이 아니어서 공연도 마술도 약장수도 보이지 않았다.

—저런 건 가까이하면 입하고 눈만 버린다. 우리는 출발한다. 뛰어!

아이들은 다시 오던 때처럼 신작로를 뛰기 시작했다. 명희가 내 앞에서 단발머리를 날리며 뛰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그 아래로 무릎이 튀어나온 붉은색 내복을 입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그랬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쉬지 않고 일해요.

돌림노래는 노래를 모르는 아이들도 금방 따라 배웠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고무줄놀이 할 때 부르는 노래도 나왔다.

—월남의 하늘 아래 대한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청룡은 간다

형이나 삼촌이 맹호부대에 가 있는 아이들은 더 큰 소리로 맹호부대 노래를 불렀다.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의 땅 하늘은 멀더라도

내가 맹호부대를 ‘맹꽁이부대’로 바꿔 부르자 해병대가 센지 육군이 센지를 가지고 말싸움이 붙었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자기들끼리 노래를 불렀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주변 풍경이 바뀌면 거기에 어울리는 노래가 나왔다.

—시냇물은 졸졸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

—산 산 산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들 들 들에는 곡식들이 자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보를 풀어 집어던졌다. 남자아이들은 동네 마당에 모여 비석치기, 자치기, 제기차기를 하거나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고 여자아이들은 나물을 캐러 갔다. 놀든 나무를 하든 배가 고팠다. 새들이 알을 낳기 전, 찔레 순도 나오기 전, 열매가 달리지 않고 곡식은 아직 싹밖에 나지 않은 봄은 언제나 허기졌다. 토끼와 고라니는 보이지 않고 겨울 눈 속에서는 쉽게 잡히던 꿩이 숲에서 “꿩꿩” 하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달걀은 병아리를 까기 위해 모아야 해서 먹을 수 없었다. 여전히 얼음장 같은 물속에 들어가봤자 메기·붕어·미꾸라지는 가을·겨울에 다 잡아먹어 없고 맛이 하도 없어 똥고기라고 부르는 중고기밖에 남지 않았다. 먹지도 못하는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봄, 하늘이 노래 보이고 어지러웠다. 배가 아팠다. 말간 침이 나오고 구역질이 났다.

 

학교에서 제일 무서웠던 건 예방주사를 맞는 일이었다. 우두·소아마비·디프테리아·콜레라·장티푸스·뇌염 예방주사를 수시로 맞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와서 주사를 놔줬는데 그들이 오기도 전부터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중에서도 불주사라고 부르는 결핵 예방주사를 맞을 때는 반 아이들이 거의 다 울었다.

주사로 치료나 예방이 안되는 것도 있었다. 이나 벼룩 같은 기생충이었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나서 쉬는 시간이 되면 나무로 지어진 교사 벽에 기대어서서 아이들은 몸을 긁다 말고 옷을 벗어서 이를 잡기도 했다. 옷 솔기를 잘 펴보면 희거나 잿빛에 가까운 이가 기어가는 게 보였다. 손가락으로 그걸 튕겨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면 땅바닥에는 먹을 게 없으니 굶어죽을 것이었다. 큰 이는 느려서 잘 잡혔다. 특별히 큰 놈은 특별히 큰 형벌을 주어야 했으므로 잡아서 두 손 엄지손톱 사이에 끼워 눌렀다. 어떤 녀석은 딱 소리가 나면서 피가 튀기도 했다. 그래도 이는 한없이 나왔다. 몸이 작고 마른 아이, 집이 가난한 아이, 시골 아이일수록 이가 많았다. 먹을 게 뭐 있다고.

내 짝이었던 만수는 이보다는 빈대가 더 징그럽고 빈대보다 벼룩이 더 귀찮다고 말했다.

—빈대는 캄캄한 밤중에 나온다. 밤중에 호롱불을 켜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사이 빈대가 사라져버려서 잡을 수가 없다. 할머니는 빈대가 넓적한 게 사람 얼굴을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엄마는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빈대가 지독하다고 한다. 더 귀찮은 건 벼룩이다. 잡을 수가 없으니까. 벼룩 사촌에 쥐벼룩이라고 있다.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벼룩보다 몇배 더 가렵다.

만수는 옷을 벗고 빈대한테 물린 자국을 보여주기도 했다. 빈대가 문 자국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가 잇달아 있어서 빈대가 단체행동을 잘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집처럼 읍내에 있는 집들에는 빈대·벼룩은 별로 없었다. 집 안이고 마당이고 수채구멍이고 도랑이고 할 것 없이 벌레가 발생할 수 있는 데는 모두 DDT라고 부르는 하얀 가루를 뿌려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모기·파리 같은 기생충도 훨씬 적었다. 구더기도 기생충인지 변소에도 DDT를 허옇게 뿌렸다. 아이들은 길에서 옷을 벗게 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DDT 가루를 뿌려줬다. 옷에도 골고루 뿌리고 나서 막대기로 털었다. 그러면 한동안은 이가 생기지 않았다.

기생충은 몸속에도 있었다. 채변검사를 해야 어떤 기생충이 몸속에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한국사람 열명 가운데 아홉명이 기생충에 감염돼 있다. 간디스토마, 폐디스토마, 회충, 요충, 편충, 십이지장충, 촌충 등등. 그러니까 기생충 검사를 반드시 해서 약을 먹어야 기생충을 박멸할 수 있다. 기생충을 그냥 놔두면 영양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기생충이 뇌로 올라가서 사람이 죽는 수도 있다.

채변검사를 하기 전날 담임선생님은 그런 설명을 하고 작은 비닐봉투하고 면봉, 종이봉투를 나눠주었다. 다음날까지 각자의 대변에서 면봉으로 일부를 채취한 뒤 비닐봉투에 넣고 종이봉투로 싸서 풀로 붙여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만수는 평소에도 얼굴색이 누렇고 군데군데 허연 버짐이 피었는데 그게 다 기생충에게 영양을 빼앗겨서 그런 것 같았다.

엄마한테 채변검사 이야기하자 신문지를 주면서 변소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거기다 변을 보라고 했다. 변소에는 빨간 보자기 파란 보자기를 골라주는 귀신까지 있다는데 똥이 잘 나오지 않아서 혼났다. 엄마가 변을 비닐봉투에 담아주었다. 종이봉투에 반, 번호, 이름을 쓰고 풀로 붙였다.

선생님은 아침 수업 시작 전에 채변봉투를 내라고 했다. 아이들이 채변봉투를 꺼내니까 교실에는 똥 냄새가 가득 찼다. 속이 메슥거렸다. 주변에 있는 아이들 몇이 코를 막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창문을 열어도 소용이 없었다. 만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리 반 오십명 중 다섯명 빼고는 다 회충이 있다. 요충도 열세명. 내일 약을 먹어야 하니까 아침은 굶고 와라.

며칠 뒤 담임선생님이 결과를 알려주었다. 왜 아침을 굶고 와야 되느냐 하면, 배 속에 있는 회충이 밥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밥을 못 훔쳐먹고 허기져 있을 때 약을 먹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은 선생님이 서 있는 교단 앞으로 나가서 싼토닌이라는 약을 두 손으로 받아서 먹었다.

—약을 먹은 사람들은 회충이 몸 밖으로 나올 거다. 똥을 눌 때 바닥이 깊은 변소에다 누지 말고 변 속에 회충이 몇마리 있는지 셀 수 있게 바깥에 누도록. 숫자를 세어서 내일 선생님한테 알려줘야 한다. 그게 숙제다.

약을 먹고 나서 만수는 하늘이 노래 보이고 어지럽다고 했다. 수업시간에도 침을 질질 흘리며 졸았다. 볼록 나온 배 속에 회충이 단체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배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노란 물과 옥수수 같은 걸 한 숟가락쯤 토했다.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폭탄이 터진 것처럼 달아났다.

—선생님, 만수가 토했어요.

선생님은 만수의 머리를 짚어보고는 조퇴를 하라며 가방을 싸게 했다. 만수에게는 가방이 없고 책보뿐이어서 책보를 허리에 묶을 줄 아는 오영수가 매줬다. 한시간 더 수업을 하고 나서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길가의 키 큰 아카시아꽃 그늘에 누군가 책보를 머리에 베고 누워 있었다.

말갛게 씻긴 아기 얼굴처럼 세상은 햇빛에 빛나고 있는데 아이는 잠결에 입에서 무언가 길쭉한 것을 뽑아내고 있었다. 길고 질긴 쫀드기 같은 것을 자꾸만 뽑아올리고 있었다. 먼 데서도 나는 그게 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내 배 속에서도 무엇인가 치밀어올랐다. 토해버렸다. 토하고 또 토했다. 초보다 신 시큼한 물이 나오고 이어 더이상 쓸 수 없는 노란 물이 나올 때까지. 더이상 올라오는 게 없어 헛구역질만 나왔다.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팠다. 눈물이 났다.

만수가 학교에 갈 때가 되었을 때 나는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나는 C중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C고에 수석 입학한 오빠처럼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못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집애들은 국민학교만 나와도 집안일 거들고 살림 배웠다가 나중에 시집가서 애 낳고 키우고 살림하는 데 아무 문제 없다, 돈이 썩어나가도 중학교는 보내지 않는다’고 단칼에 뜻을 꺾는 바람에 중학교 진학을 단념하고 동생들 키우는 것부터 살림과 농사일을 거들거나 도맡게 되었다. 엄마의 일을 나눠서 해보니 몸은 둘째치고 마음이 너무 고달팠다. 해주고 싶은데 못 해주는 것도 가슴이 아팠다.

개운리에서는 제일 잘산다고 했지만 우리집에서도 쌀로만 지은 하얀 밥을 먹는 일은 드물었다. 산에서 나무를 지게 높이의 두배는 더 되게 해가지고 걸어서 이십리 넘는 장터까지 나가서 팔면 쌀 두되 정도 받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쌀은 그만큼 비쌌다. 논에서 나는 쌀 삼년치를 모으면 논을 살 수 있다고 했을 정도였다. 개운리 산골짝에는 논이 많지 않았고 계곡물이 차고 그늘이 깊어서 벼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을에 가장 늦게 들어온 우리집에 돌아올 논은 한뼘도 없었다. 송아지를 키워 팔아서 논을 사고 그때부터 쌀밥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축산전서를 보고 마당에 굴을 파고 그 속에 토관을 설치한 뒤 추수하고 논에서 나온 볏짚을 차곡차곡 쌓아서 잘 덮어두었다가 풀이 귀한 겨울철에 소의 사료로 쓰게 했다. ‘사일로’라고 하는 그 저장시설은 읍내에도 없던 것이라고 했다. 볏짚은 지붕을 이고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는 데도 썼으므로 연료로 쓰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예전에는 그렇게 나무가 흔하던 개운리에서도 해가 갈수록 나무가 점점 귀해져서 산등성이 높은 곳까지 멀리 가야 했다. 아버지는 나무하러 갈 때 꼭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갔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해본 적도 없고 하지도 못하니 제외하고 오빠는 유학 중이니 빠지고 결국 아버지를 따라가는 건 만수였다. 꿈지럭거린다, 걸음이 늦다, 힘이 그것뿐이냐 하는 식으로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알밤을 맞으면서 나무하러 다녀올 때마다 만수는 제 몫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만수의 지게에 딸려온 상수리나무 가지나 솔가지, 솔방울, 솔가리 같은 걸 어머니는 부엌에 들여놓았다.

안방 부엌에는 무쇠솥이 두개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아궁이도 둘이었다. 부엌 바닥은 마당보다 두 걸음쯤 내려오게 낮았고 컴컴한 구석에 수숫단이며 나뭇단이 쌓여 있었다. 벽에는 얇은 판자로 만든 찬장이 매달려 있었다. 떡판 넓이 선반이 가로로 길게 걸려 있고 거기에 자주 소용되는 부엌 물건들 —칼·도마·바가지·양념통·행주 등이 놓였다. 박혀 있는 못에 냄비·국자 등속이 걸렸다. 아궁이에서 날아오른 연기와 그을음, 먼지와 재로 선반이고 찬장이고 간에 부엌이 깨끗해질 날이 없었다. 밖에서 길어온 물에 쌀과 보리, 좁쌀을 씻어서 안치고 불을 땠다. 쌀 씻은 물은 버리지 않고 국물로 쓰거나 하다못해 쇠죽에라도 넣어서 약간의 영양분이라도 아끼려 했다. 밥을 지을 때 장작으로 불을 때면 불 조절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아까워서 쉽게 쓰지를 못했다. 그러니 아궁이 연료는 북데기나 검불, 솔가지처럼 매운 연기가 많이 나는 것이기 쉬웠다. 내가 부엌에서 연기에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짓다보면 방 안에서는 갈라진 구들 사이로 연기가 솟아올라 동생들이 울고 굴뚝에서 나온 연기에 무슨 밥 냄새라도 숨어 있는지 소와 돼지가 밥 달라고 울었다.

밥을 짓는 한편 남는 솥에는 국도 끓여야 했으니 그때그때 나는 나물을 넣어 끓인 된장국이 대부분이었다. 밥상을 방에 들여보내고 나면 엄마와 나는 부엌 바닥에 앉아서 그릇도 아닌 바가지에다 밥과 국을 한데 넣고 말아서 퍼먹곤 했다.

음식을 먹고 나면 설거지를 했다. 저녁나절에는 캄캄해서 손가락도 안 보이는 부엌에서 질그릇 함지에 그릇을 부시고 솥을 헹군 개숫물을 담아서 끙끙거리면서 마당 바깥까지 들고 나와서 버려야 했다. 가축도 거둬먹여야 하고 네댓명이나 되는 애들 중에 없는 애는 없는지 수를 세고, 아픈 애는 없는지 살피고 나서는 어두운 호롱불에 대고 찢어진 옷 꿰매고 장갑도 뜨고 양말도 만들고 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이불 홑청을 빨고 솜을 새로 타고 모자라는 솜을 채워넣고 하는 일도 엄마와 내가 할 일이었다. 도배를 하고 문에 창호지와 문풍지를 붙이고 하는 일 역시 여자들의 일이었다. 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물을 길어다 식수로 쓰고 빨래를 했다. 겨울에 얼음을 깨고 한 빨래를 광주리에 넣고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중에 빨래가 다시 얼음덩어리가 되었다. 길은 왜 그리 미끄럽고 춥고 가파른지 몰랐다. 그래도 나는 다른 세상으로 시집가면 그런 일을 모면할 희망이라도 있다지만 우리 엄마는 무슨 팔자를 타고났길래, 무슨 큰 죄를 졌길래 죽을 때까지 살림에 농사에 애들 키우는 일까지 일만 죽도록 하며 짐승처럼 힘들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눈물이 났다. 눈물이 얼어서 뺨 위로 굴러내렸다.

그나마 신통한 것은 바로 아래 여동생 명희도 아니고 여섯살 어린 남동생 만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요강이라도 부시고 할아버지한테 가서 잘 주무셨는지 인사라도 하고 와서 돼지며 닭이 제 먹을 것 찾아 밖으로 가도록 문도 열어주고 제 손으로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는 설거지물 버리는 것도 도와주고 비 오면 빨래도 같이 걷었다. 같이 나물도 캐러 다니고 아버지 따라다니며 나무도 하고 농사도 거들고 심부름도 하고 소 끌고 나가 풀을 뜯기고 뱀이든 개구리든 잡아다 돼지우리에 던져넣었다. 나보다 더 나물을 잘 알고 잘 찾고 잘 캐고 했다. 삘기·망개·깨곰(개암)·산딸기·머루·으름·밤·도토리·더덕·도라지 등등 만수가 집으로 가지고 오는 건 누구보다, 심지어 아버지보다 더 다양했다. 그게 타고난 건가 싶지만 누구한테 타고난 건지는 모르겠다. 만수는 손재주도 좋아서 동생들한테 새총이나 제기, 팽이 같은 장난감도 많이 만들어주고 그랬다. 마음이 착하고 순하고 무슨 일에든 제 역할을 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신통할 수가 없었다. 힘들어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어린 만수가 가느다란 목으로 큰 머리를 가눠가며 철사 같은 몸뚱이를 놀려 무슨 일을 하는 걸 보면, 넓은 이마에 쪼륵쪼륵 땀이 흘러내리는 걸 보면 내가 지금 무슨 팔자 좋은 소리를, 생각을 하나 싶어 없던 힘도 생겼다. 하지만 그러는 저나 나나 엄마나 일복만 타고났지 싶었다. 이름이 만수인데 그 많은 복, 그래서 만복이라고 하는 복이 다 어디로 가고 만분의 일인 ‘일복’ 하나만 터졌느냐 말이다.

 

—개운리·향교동·말티동 이 세 동네서 학교 다니는 사람은 남아라. 선생님이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

개운리와 말티동은 학교에서 가장 멀리 있는 동네였죠. 가을의 운동회 때 가장 인기있는 종목이 이어달리기인데 동네별로 학부모와 학생까지 모두 참가하는 이 시합에서 우승을 다투는 두 동네가 개운리와 말티동이라는 촌동네였거든요. 이름에 달리기를 잘하는 개, 말이 들어 있어서라기보다 그 동네 사는 아이들은 지각하지 않으려고 죽어라 달려서 등하교를 했기 때문이었어요. 선생님이 왜 그 두 시골 동네와 학교에서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향교동 아이들까지 수업 끝나고 남으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개운리와 말티동에서 온 아이들한테서는 언제나 무슨 냄새가 났어요. 뛰어다니니 땀 냄새는 기본이었구요. 땀에는 개운리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들어가는 양념 냄새가 종합 세트로 들어 있었지요. 파·마늘·양파·고춧가루·들깨·된장·고추장·간장 등등이 그런 거지요. 군내 나는 김치, 짠지, 소금에 전 장아찌 냄새도요. 보리·무·감자·고구마를 먹고 내뿜는 방귀 냄새도 안 빠졌지요. 자기들끼리는 구수하다는 두엄 냄새, 구린 변소 냄새, 종기에 붙인 고약 냄새, 염소 같은 가축 누린내도 났어요. 학교를 오가며 먹는 오디·깜부기·아카시아꽃의 냄새도 물론 있었지요. 그리고 이상한 비린내가 있었어요.

그 비린내는 특히 내 짝인 만수한테서 많이 났어요. 만수는 원래 그런 지독한 냄새를 가지고 태어난 것 같았어요. 난 냄새 때문에라도 만수를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어요. 가까이 오는 것조차 싫었지요. 하지만 짝이니까 그 냄새를 피할 수가 없었어요.

2학년 올라가니까 학교에서 제일 예쁜 여자 선생님이 담임이 됐어요. 서울말을 쓰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투피스 양장이 너무 잘 어울리는 선생님이라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요. 그런데 그 담임선생님이 남자·여자가 짝을 지어 자리에 앉도록 한 거예요. 여자아이들이 싫다고 울고불고했지만 담임선생님은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제일 먼 촌동네 개운리의 김만수가 내 짝이 된 거죠. 만수의 그 비린내는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나는 수업시간에 입으로만 숨을 쉬었어요. 쉬는 시간에는 밖으로 뛰쳐나와 기차 화통처럼 숨을 내뿜고 들이마셨지요.

수업이 끝나고 난 뒤 세 동네의 아이들이 모였어요. 만수도 끼어 있었죠. 공주처럼 아름다운 담임선생님이 사뿐사뿐 걸어왔어요. 담임선생님도 나처럼 학교에서 가까운 읍내 향교동 양옥집에 살았지요.

—이건 오늘 교무실에서 교장선생님이 특별히 말씀하신 사항이다. 개운리·말티동 두 동네에 사는 사람, 손들어봐요!

모여 있던 열댓명의 아이들 중 삼분의 이가 넘는 아이들이 손을 들었어요. 손만 드는데도 독한 시골 냄새가 진동했어요. 난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여서 냄새의 공격을 피했죠. 그러자 아이들의 발이 눈에 들어왔어요. 읍내 사는 아이들만 운동화를 신고 있고, 나머지는 까만 고무신 아니면 맨발이었어요. 그중 몇몇의 발등에는 까마귀조차 부러워할 만큼 새까맣게 때가 끼어 있었죠.

—향교동 빼고 다른 두 동네 사는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저수지나 냇가, 계곡, 웅덩이를 몇개나 지나가지? 먼저 말티동.

말티동 아이들이 저수지 하나, 웅덩이 셋을 지난다고 했어요. 개운리 아이들은 크고 작은 소와 폭포가 여러개 있는 계곡 하나, 웅덩이 둘, 시냇물 하나를 지나는 것으로 판명났지요.

—향교동 사는 학생들, 여러분은 학교에서 동천 시내를 넘어야 집에 갈 수 있지요? 자, 이제부터 선생님 이야기를 잘 들어요. 하절기에 날이 더워지고 학교를 다니면서 덥고 하니까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 웅덩이나 저수지, 냇가, 계곡에 들어가서 멱을 감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착한 어린이 여러분, 그러면 될까요 안될까요?

아이들은 일제히 “안됩니다” 하고 외쳤어요. 나만 빼고요. 나는 동천교 다리 아래, 아이들이 툭하면 뛰어들어 개헤엄을 치는 곳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어요. 홍수라도 나면 그곳으로 온갖 더럽고 무서운 것들이 다 떠내려왔어요. 뿌리째 떠내려온 나무, 동물 사체, 마루, 옷가지, 호박, 심지어 집까지. 사람들이 장마철에 매일 다리 위로 가서 물구경을 한다고 서 있는 것조차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요새 우리 학교뿐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더위를 피해 물에 들어갔다가 물에 빠져 죽는 익사사고가 많이 나고 있어요. 깊은 웅덩이나 저수지, 계곡의 소, 냇물에는 절대로 들어가면 안돼요. 여러분이 그런 데서 무슨 사고라도 당하면 선생님이 아주아주 곤란해져요. 알겠지요, 여러분? 물속에는 물귀신부터 우리 착하고 귀여운 어린이들을 한입에 삼키는 괴물 물고기까지 있으니까 절대로 들어가면 안돼요. 약속할 사람은 선생님 손에 손을 붙여요. 약속할 사람은 여기 여기 붙어요!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절대로 학교를 오가는 중에 멱을 감으러 물에 들어가는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했어요.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하면서 일일이 확인할 테니 절대로 물에 들어가면 안된다고, 적발되면 가만두지 않겠다, 원수처럼 미워할 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갈 것이니 나와 향교동 사는 아이들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어요. 청소검사를 받은 뒤 백설공주가 그려진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어요. 향교동 사는 아이들 다섯명과 함께 자전거를 끌고 가는 선생님을 따라 걸었어요. 자전거 짐받이에는 눈부시게 하얀 손수건에 싸인 도시락과 수첩이 실려 있었어요.

—우리 귀여운 희순이는 아버지가 철도역에서 일하시지?

나는 “네, 선생님” 하고 서울말로 대답했어요.

—나도 아버지가 공무원이시란다. 나도 커서 공무원이 되려고 했었지. 시집도 공무원한테 가게 될 거란다.

선생님은 입을 가리고 웃었어요. 어깨가 부푼 푸른 블라우스에 달린 커다란 나비 리본이 참 예뻤어요.

—어머나, 저 애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갑자기 선생님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향당이라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남자아이들이 연못 속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헤엄을 치고 있었어요. 나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면서 손가락 사이로 상황을 살폈어요.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읍내를 통과하는 개울이 만나는 쪽에도 아이들이 있었어요. 거기서는 연기까지 나고 있었어요. 선생님은 서둘러 자전거를 끌고 그곳으로 향했어요.

연못 안에서 헤엄을 치는 아이들은 낯설었어요. 우리 반이 아니었구요. 학년도 다른 것 같았어요. 선생님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손나발을 한 채 소리쳤어요.

—얘들아, 위험해! 거기서 빨리 나와, 나오라고!

연못 입구에 있던 바지만 입은 아이들이 벌떡 일어섰어요. 선생님이 누구인 줄 알아차린 것 같았어요. 하지만 연못 속의 아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너희들 거기서 뭐 하니?

불을 피우던 아이가 대답했어요.

—물고기를 잡습니다.

—물고기를? 어떻게 잡아?

—여기서 여기까지 흙으로 이렇게 막고요. 물을 퍼내면 잡혀요. 메기도 있고 미꾸라지도 있고 붕어도 있고 피라미도 있어요. 물을 한번 풀 때마다 한 냄비씩 잡아요.

—잡으면?

그때 냄비를 들고 있던 아이가 대답했어요. 만수였어요. “고기 잡으마요, 마카 이 머요. 큰 고기는 창시 빼고 꾸머요.” 선생님은 어리둥절해서 나를 바라봤어요.

—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통역을 해야 했어요. 너무도 하기 싫었지만, 짝이라는 죄로.

—고기를 잡아서 끓여먹습니다. 큰 놈은 창자를 빼고 구워먹습니다.

연못 속에 있던 아이들이 송장헤엄을 치면서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하고 노래를 불렀어요. 선생님이 만수에게 물었어요.

—저기서 헤엄치는 아이들은 누구야?

“우리 개우이리 동네 시야들이라요.”

나는 다시 통역했어요.

—우리 개운리 동네 형들입니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일부러 너희를 모아놓고 등하교 중에나 일요일, 방학 때 덥다고 웅덩이나 저수지, 계곡, 냇가에서 멱을 감으면 위험하다고,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선생님 말을 안 들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미워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여기서 멱을 감아?

만수는 고개와 손발과 몸을 배배 꼬며 대답했어요.

“나는 한개도 물에를 안 들어갔는 거를요. 여 시야들하고 미기 잡아먹는 기 백분 나사요. 개구리를요, 강아지풀에 춤 발라 오요오요 하마 확 달기들거등요. 태기쳐서 잡아 같이 너 푹 이요. 뒷다리가 젤이라요.”

—저는 물에 안 들어갔는데요. 여기 있는 형들과 메기를 잡아먹는 게 훨씬 더 실속이 있습니다. 개구리는 강아지풀에 침을 발라 낚시질할 때처럼 유혹하면 확 덤벼듭니다. 내동댕이쳐서 잡아 같이 넣고 푹 끓입니다. 개구리는 뒷다리가 제일 맛있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어요. 만수의 그 이상한 냄새는 메기, 미꾸라지 같은 민물고기나 땅강아지·메뚜기·방아깨비·개구리·잠자리를 포함한 만수가 먹는 야생동물들에게서 온 것이었어요. 나는 죽을 때까지 그런 야만스러운 음식을 먹을 일은 없을 것이고요. 선생님은 수첩을 꺼내들고 만년필을 꺼냈어요.

—저 헤엄치는 아이들 몇 학년 몇 반이야? 이름 대봐.

그러자 만수는 고개를 도리질했어요. 통역할 필요도 없었죠.

—몰라? 몰라? 모른다고? 한 동네 형들이라면서?

—몇 학년 몇 반인지, 이름이 뭔지 잘 모릅니다.

선생님은 자전거를 끌고 연못에 바싹 다가갔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이름 못 대?

그때 맨 처음 선생님에게 대답했던 아이가 만수에게서 냄비를 빼앗아들더니 뛰기 시작했어요. 나머지 아이들도 연못 속에 있는 아이들의 옷가지며 책가방 따위를 들고 우루루 따라갔죠. 만수를 꼬리로 한 무리는 순식간에 연못 둑 너머로 사라졌어요.

선생님은 우리를 향해 기다리라고 한 뒤 자전거를 타고 연못 가까이로 달려갔어요. 그러고는 멱 감는 아이들을 향해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죠. 아이들이 발로 일제히 물장구를 치며 반대편 둑 쪽으로 도망갔어요. 선생님은 자전거를 둑 위에 올린 다음 부지런히 반대편 둑까지 페달을 밟아 따라갔어요. 선생님이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니까 아이들은 또 물장구를 치면서 돌고래처럼 떼를 지어 반대편 둑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고집 센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둑에 나 있는 풀에 자전거 바퀴가 걸려 비틀비틀하는 게 넘어지지나 않을지 아슬아슬했어요. 그런 식으로 대여섯번을 왔다 갔다 하다보니 선생님은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버렸지요.

—너희들 잡히기만 해봐! 전부 퇴학이야!

선생님이 한껏 화가 나서 쉰 목소리로 소리치니까 돌고래들의 합창이 대답으로 돌아왔어요.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잖아요. 퇴학 없다는 거 우리는 다 알아요!

결국 선생님은 돌고래 쫓기를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날의 가정방문 또한.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