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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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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金衍洙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장편소설 『7번국도』 『꾿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등이 있음. writerKYS@gmail.com

 

 

 

벚꽃 새해

 

 

경주 남산의 사계를 촬영하는 화보집을 의뢰받았을 때만 해도 성진은 거기에 그토록 많은 불상들이, 그것도 목이 잘린 채 남아 있을 줄이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난 4월,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에 봄 풍경을 촬영하러 남산을 찾아갔다가 목이 잘린 채로 앉아 있는 석불을 보고서야 성진은 ‘맞아, 이런 게 바로 폐허의 풍경이었지’라고 새삼 느꼈다. 그렇게 중턱에 있는 상선암까지 올라가 귀부인의 하얀 양산처럼 암자 기와 위로 드리워진 벚나무 꽃그늘을 촬영하는데 메시지가 들어왔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LCD 창으로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꺼내보니 알 만한 이름 옆에 ‘점심은 먹었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새벽에 올라와 그때까지 일하고 있던 터라 밥도 못 챙겨먹은 거 뻔히 알면서 묻는 것 같아 괜히 심술이 났다. 메시지는 성진이 상선암의 풍경을 마저 촬영할 때까지 두번 더 들어왔다. ‘바빠?’와 ‘전화로 말할까?’ 마지막 문자를 보고 얼른 카카오톡을 열어서 ‘무슨 일?’이라고 썼다. 보내자마자 답장이 돌아왔다. 화면을 보니 ‘내가 예전에 선물한 그 태그호이어, 다시 돌려받았으면 해. 주소 보낼 테니까 착불 택배로 부쳐줘^^’라고 돼 있었다. 보낸 사람은 서정연. 그러니까 요즘 말로 성진의 ‘구여친’. 그렇다면 이런 짓을 ‘진상’이라고 하는 거지. 성진은 중얼거렸다.

그 태그호이어 이야기를 좀 해보자. 그 시계는 지난겨울, 어느 깊은 밤에 멈췄다. 바로 전날은 대통령선거일이라 함께 모여서 개표방송을 보자며 친구들을 만나 저녁 7시부터 생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면 밤새 축배를 들 계획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았고 주종도 막걸리에서 소주로, 소주에서 위스키로 점점 더 독해지기만 했다. 그리하여 그 시계가 멈출 무렵에는 만취했던 탓에 성진으로서는 무엇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다음날 깨어서 시계를 보니, 검정색 다이얼 위에 세개의 침이 예각을 이루며 자정 무렵에 몰려 있었다. 날짜판의 숫자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20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계가 멈춘 정확한 시각은 대선이 끝나고 난 다음 날, 새벽 125449초였다. 오토매틱이라 그간에도 가끔 시간을 다시 맞추거나 용두를 돌려 태엽을 감는 수고가 필요했지만, 이번에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초침이 움직이지 않았다. 5년도 넘었으니 분해소제를 한번쯤 해야 하지 않겠는가는 생각이 들었지만, 싫증도 나고 귀찮기도 해서 한동안 시계 없이 다녔다. 그러다 옆동네를 지나오는 길에 시계수리점이 있는 걸 보고 찾아갔다가 30만원에 팔라기에 냉큼 팔아치웠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정이 그렇게 돌아가긴 했지만, 성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정연에게 그 시계를 선물받은 건 2007년이었으니까 그게 벌써 6년 가까이 묵은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도 그는 여자친구가 사준 즉석복권을 동전으로 긁어 5억원에 당첨된 행운아가 그녀와 이별한 뒤 전액을 꿀꺽하는 바람에 소송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5억원에 비하자면 그깐 시계쯤이야…… 하는 마음이 성진에게 없지 않았다. 그렇게 정연과의 옛일을 추억하는데 갑자기 6년 전, 그러니까 우연히 방콕에서 만난 두 사람이 충동적으로 찾아간 고도(古都) 아유타야의 폐사지인 왓 마하탓이 떠올랐다. 그건 아무래도 낮에 남산에서 본 목 잘린 석불 때문이리라. 성진은 목 잘린 석불들을 왓 마하탓에서 처음 봤으니까. 폐허가 된 사원의 한쪽 벽에 일렬로 석불들이 앉아 있었는데, 모두 목이 잘려 있었다. 신경주역에서 서울행 KTX에 올라탄 성진은 그때 방콕 웨스틴호텔 앞에서 만났을 때, 정연이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자신도 빠이와 치앙마이를 다녀오면 그렇게 맑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기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설핏 잠들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려 성진은 화들짝 놀라며 깼다. 짐작했던 대로 정연이었다. 수면실처럼 고요한 밤기차 객실을 그는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창밖을 보니 어둠 속에서 가까운 빛들은 빨리, 먼 빛들은 느리게 지나가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정연이 물었다. 성진은 통로 한쪽에 있는 의자를 내리고 앉았다.

“회사 잘렸어? 뭐야, 갑자기. 돈 땡겨 쓸 일이라도 생겼나?”

그가 말했다.

“노총각으로 늙어가니까 촉만 발달하나부지? 내가 준 시계니까 돌려달라는데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니가 돈이 필요하다면 내가 주겠는데, 니가 준 시계니까 돌려달라면 좀 곤란해.”

“왜 곤란해?”

정연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왜냐하면 그건 법적으로 황당한 얘기거든. 민법에 보면 증여라는 게 있어요. 증여도 계약이기 때문에 일단 선물하고 나면, 소유권이 넘어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성진이 목소리를 깔면서 얘기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니가 그렇게 말할 줄 내가 알고 있었지. 그게 무슨 말이냐면, 니가 나한테 선물한 순간부터 그 시계는 법적으로 내 거란 말이야. 돌려달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돌려줄 수가 없어. 민법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한번 찾아봐라. 난 이만 바빠서.”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는데, 정연이 소리쳤다.

“그 잘난 민법에 내가 죽는다는 얘기는 안 나온대?”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잘난 민법에 내가 죽는다는 얘기는 안 나오느냐고?”

두번이나 같은 설명을 들었건만 성진으로서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전화해서는 과거의 자신은 죽었다는 둥,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둥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는 바람에 시계를 당장 돌려주겠노라고 호언하긴 했지만, 그새 다른 사람에게 판 것은 아닐까는 불안이 없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계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성진의 느낌이 별로 안 좋았다. 바깥세상에서는 막 벚꽃이며 개나리며 목련이 터져나고 있는데, 5평도 안되는 시계방 안은 어둠침침한데다가 싸늘하기만 했고, 토요일이라 늦도록 침대에서 뒤척거리다가 겨우 나온 터라 배도 고팠다. 그래서인지 시계방 어디에선가 먹다 남은 김치찌개 냄새도 나는 것 같았는데, 곧 성진은 그 냄새가 실내에 잔뜩 쌓인 전자제품이며 잡동사니 골동품에서 나는 찌든 냄새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군데군데 새치가 보이는 덥수룩한 머리에 검정색 국산 등산복 상의를 입은 시계방 주인은 경상도 억양이 밴 목소리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둘러대기 바빴다. 처음에는 그런 시계를 산 적도 없다고 우기더니 성진이 스마트폰을 꺼내 그 사람이 시계 대금으로 입금한 내역을 보여주자 이번에는 시계를 산 건 맞지만 다음날 다른 시계상에게 팔았단다.

“그런데 왜 안 샀다고 거짓말했어요?”

성진이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등산복 사내는 대뜸 삿대질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먼저 거짓말한 건 당신이지. 당신, 그 시계 짝퉁인 거 알면서 나한테 판 거 아니오? 그래서 나도 다시 팔았소.”

예상치 못한 발언에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성진도 혼자 덤터기를 다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짝퉁이라니? 그, 그게 왜 짝퉁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사람이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다니 정말 짝퉁이 아니었을까는 의심이 성진에게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성진은 말을 좀 더듬거렸는데, 그게 신호인 양 시계상이 표정을 바꿨다.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네. 짝퉁 팔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이나 알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3년 이상의 징역형이라구.”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반박할 속셈으로 입을 열었는데, 거기서 더 말이 이어지지 않자 성진의 꼴이 좀 우습게 됐다. 시계상은 5평 시계방 안에서 천하를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냐면 짝퉁을 매매하는 건 법으로 금지돼 있다고.”

그 시계가 가짜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시계방 주인이 그런 식으로 다그치니, 성진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일단 위기를 모면해야겠다는 마음에 이런 말을 불쑥 내뱉었다.

“그 잘난 법에 내가 죽는다는 소리는 안 나오던가요?”

그런데 그 말이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도무지 말의 진의를 파악하기 어려웠던지 이번에는 시계상이 머뭇거렸던 것이다.

“애인한테 선물받은 시계인데 몰래 팔았다가 내가 지금 죽게 생겼다고요. 짝퉁이든 뭐든 내가 다시 사면 되잖아요. 돈 돌려줄 테니까 시계 다시 파세요.”

오는 길에 은행의 자동인출기에서 찾아온 30만원이 든 지갑을 꺼내면서 성진이 말했다. 그러자 시계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미 밝힌 대로 다음날 그 시계를 팔았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이제 돌려줄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어디에다 팔았느냐고 캐묻자, 남대문 지하상가랬다가 또 용산 전자상가라는 둥 시내 나가면 한바퀴 쭉 도는 게 일이니 도대체 어디서 팔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둥 둘러대는 걸, 그렇다면 일련번호를 알고 있으니 경찰서에 분실신고를 내겠다고 성진이 말하자 그를 미친 사람인 양 쳐다보면서 헛헛거리고는 마침내 황학동의 정시당이라는 가게 이름을 댔다.

두더지굴 같던 시계방에서 나와 막 피어나는 벚나무 환한 그늘 아래를 걸어가면서 성진은 2009년을 떠올렸다. 그해 5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낮고 어두운 골짜기였달까.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불행한 사건도 어느정도 영향은 미쳤겠지만, 그가 그 시기를 인생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골짜기였다고 말하는 주된 이유는 그해 4월에 정연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20058월, 두 사람이 시네마테크의 계단 옆에서 처음 키스를 한 것을 기점으로 하면 4년 만이고, 20074월 방콕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아유타야까지 간 것을 기점으로 하면 2년 만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애 기간 동안 나름 사랑할 만큼 사랑했으니 원도 한도 없는데다가 슬슬 다른 사람이 궁금해지던 터라 성진 쪽에서 먼저 시간을 두고 두 사람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던 것인데 정연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운명인 양 선뜻 이별을 받아들이자 어째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다. 언제나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고, 본인은 스물아홉살이라고 우기건만 가족이나 친구들 모두 서른으로 알고 있던 2009년의 봄, 그는 매일 술에 절어서 지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서른 무렵의 찌질함이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다. 무슨 비련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멀쩡한 애인에게 자기가 먼저 이별을 고하고는 밤마다 비애에 젖은 몰골로 술을 퍼마시는 꼴이라니. 그 정점은 술에 취해서는 바로 그 태그호이어를 부여잡고 절규할 때였으리라.

“배신도 이런 배신이 있을까나. 나는 청춘의 순정을 다 바쳤는데, 그게 짝퉁이었다네.”

그러니 정연에게 전화한 성진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대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가 말하는 짝퉁이라는 게 혹시 내가 홍콩 면세점에서 3000달러를 주고 산 태그호이어 카레라 칼리버 16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연이 물었다.

“왜 아니겠니? 시계방에서 확인한 결과, 짝퉁이란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5년 동안 열심히 차고 다녔네. 스물일곱살에서 서른두살까지 이 소중한 청춘을 말이야.”

성진의 말에 정연은 대꾸가 없었다. 그게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그는 계속 말했다.

“사실은 작년 연말에 그 시계가 고장났어. 그래서 동네 시계방에 맡겼더니 고치는 값이 더 나온다며 중고로 넘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팔았는데, 네가 과거의 너는 이제 죽었느니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느니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다시 돌려달라고 가봤더니 벌써 다른 사람한테 팔아버렸단다. 그러니까 너도 이제 포기해라. 양심상 시계 판 돈은 보내줄 테니까.”

그러고도 정연은 대꾸가 없었다. 뭐지, 이 폭풍전야의 고요는? 성진은 궁금했다.

“얼마 받았어?”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정연이 물었다.

20만원.”

성진이 대답했다.

“오빠!”

“아, 다시 생각하니 30만원이다.”

“지금, 죽고 싶어?”

여전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연이 말했다. 성진은 하늘을 올려봤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벚나무 가지가 뻗어 있고, 그 가지들마다 하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서 있는데 외롭지가 않다니 신기하다고 성진은 생각했다. 뷰파인더로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마다 외로움을 느꼈는데 말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말하자면 오늘은 벚꽃 새해. 이토록 아름다운 날 죽을 수는 없었다.

“돈 받고 팔았다는 건 농담이고, 전문수리점에 맡겼다니까 거기 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 사실은 거기 같이 가자고 전화한 거야.”

성진이 말했다.

 

옛 애인을 다시 만나서는 그녀가 그토록 예뻤을 줄이야 미처 몰랐다며 속으로 후회를 삼키는 일은 영화에나 나오는 판타지일 뿐이라는 게 평소 성진의 지론이었다. 그간 사랑했던 여자들을 여전히 그는 사랑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원히 사랑할 테지만 그건 ‘다시’ 사랑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한번 우려낸 국화차에다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 짓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기다려봐야 처음의 차맛은 우러나지 않는다. 뜨거운 물은 새로 꺼낸 차에다만. 그게 인생의 모든 차를 맛있게 음미하는 방법이다. 마찬가지였다. 봄날의 거리에서 재회하니 그런 식으로 정연은 예뻤다. 그에게 예뻤던 여자들은 여전히 예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원히 예쁘겠지만 ‘다시’ 예쁠 수는 없었다.

“올해 서른이지?”

정연을 보자마자 성진이 물었다.

“몰라. 그런 거 따위.”

그녀가 대답했다.

“딱 415일쯤 되는 나이네. 산마다 꽃이 핀다.”

“광복절이라니까. 새 인생을 찾고 싶어.”

“그래, 이리로 가면 정시당이 있다니까 거기에 너의 새 인생도 있을 거야.”

성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브라더미싱기에, 마라톤타자기에, 못난이인형에, 돌하르방과 빨간색 공중전화기까지 놓인 주말 벼룩시장의 풍경을 가리키며 정연이 말했다.

“그런데 새 인생으로 가는 초입이 상당히 을씨년스럽네.”

그 두 연인의 관계를 지탱한 건 이런 종류의 재담이었다. 돌이켜보면 성진이 자신만은 아직 스물아홉이라고 부득부득 우기던 2009년이 시작되면서 둘 사이에서 이런 재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건 관계의 지진을 예고하는 두꺼비떼의 엑소더스 같은 것이었달까. 그런데 예전처럼 서로 대화하는 맛이 살아나니 거기 지금은 잊힌 물건들이 즐비한 황학동 뒷골목을 걷는 기분도 가히 나쁘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레코드점과 빈티지오디오점과 중고카메라 상점을 지나 그 뒷골목의 끝에서 청계천 방향으로 꺾어서 조금 더 걷다보니 ‘명품시계 정시당’이라는 빨간색 세로 간판이 보였다. 성진이 그 간판을 가리켰다.

그러나 막상 명품시계 정시당의 쇼윈도 앞에 서자 정연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겼다.

“이 넓고 넓은 서울 천지에서 내가 오빠한테 선물한 시계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곳을 찾으라면, 바로 여기야. 정확하게 이 집, 명품시계 정시당. 지금 여기가 전문수리점이라는 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나를 이딴 곳으로 데려온 저의가 뭐야?”

“원래 이런 곳에 숨은 장인이 있는 법이야.”

“숨은 장물들이 있겠지. 맞아, 그새 내가 까먹고 있었네. 원래 오빠는 이런 사람이었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변죽만 울리며 내 인생을 축냈었지. 오뎅은 안 먹고 국물만 홀짝이는 학생들처럼.”

“아니, 오뎅도 아니고 국물이라니. 아무렴 내가 너한테……”

그녀의 말에 화는 나는데, 2009년 봄의 성진처럼 니가 뭔데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말이 많냐고, 자기는 살고 싶은 대로 살 것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자신은 없었다. 지난 4년 사이에 성진은 많이 바뀌었다. 그 4년 동안 그는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다. 경영자가 사진부를 외주로 돌리는 바람에 쫓겨나다시피 잡지사에서 나와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는데, 그건 동네 공원을 산보하는 것 같았던 평이한 삶이 백운대 절벽 끝을 디디고 걸어가는 묘기로 둔갑했다는 뜻이었다. 이 사회에는 프리랜서를 위한 난간 같은 건 없으니 어떤 경우에도 그는 곡예사의 침착을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들어가서 알아볼 테니까. 만약 여기에 그 시계 없으면 내가 사서라도 돌려줄 거야, 알았어?”

하지만 문을 열고 정시당으로 들어간 순간, 아니 더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모퉁이를 돌고 나서 그 빨간 간판을 가리키던 그 순간, 성진은 거기에 자신의 태그호이어는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양팔에 토시를 끼고 백열등을 환하게 밝힌 작업대에 앉아서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늙은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늙은 남자도 고개를 돌려 성진을 쳐다봤다. 성진은 그냥 돌아서 나가려다가 밖에 정연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그 늙은 남자에게 최근에 검정색 다이얼의 태그호이어를 구입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혹시 중고라도, 아니 짝퉁이든 뭐든 좋으니 그 메이커의 시계를 구할 수 있느냐고 성진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읽던 책을 작업대에 내려놓고 의자를 돌렸다. 그가 뭔가 말하려고 하는데, 정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를 한번 쳐다본 뒤, 성진은 다시 노인을 쳐다봤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성진은 정연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 아까 3천불이라고 그랬나?”

뒤가 켕기니 성진이 더듬거렸다. 그러자 정연이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거, 기억 안 나?”

 

동네 공원을 산보하듯, 눈을 감고도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었던 시절, 그러니까 2004년의 일이다. 제대한 뒤 사진학도로서 영화를 좀더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에 그는 대학로에 있는 한 시네마테크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툭하면 눈을 감고는 “때로는 귀가 눈보다 사물을 더 잘 봐” 같은, 영화 「해피 투게더」의 대사나 199741일 콘서트에서 「월량대표아적심」을 부르기 전에 장국영이 한 말인, “오늘은 새해 첫날처럼 특별한 저녁이야” 따위의 말들을 중얼거리는, 갓 스무살을 넘긴 정연을 거기서 그는 처음 만났다. 애정의 척도를 허세로 측정하던 스무살 무렵이니 그런 모습이 성진에게는 영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보여 기특했다. 그런 허세 중 하나가 서울 시내의 비디오방을 순례하면서 남들은 잘 모르는 영화를 찾아서 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둘이서 본 영화 중에 주윤발과 임청하가 스물여덟살의 청춘남녀로 등장하는 「몽중인(夢中人)」이 있었다. 명품시계 정시당에 들어와 정연이 가리킨 게 바로 그 영화 「몽중인」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토용(土俑)과 비슷한 중국 인형이라는 건 그녀가 그 시절의 일들을 상기시켜준 뒤에야 알았다.

“토용을 다 보네. 정말 이 동네엔 없는 게 없나봐. 그 시계만 빼고.”

정연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성진은 주위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길게 놓인 진열대와 한쪽의 소파 세트, 진열대 너머 오른쪽 벽에 붙은 작업대. 진열대에는 시계가 많지 않았고, 검정색 소파는 한쪽이 꺼져 있었다. 전반적으로 쇠락해가는 분위기였는데, 작업대 위쪽에 부착된 화이트보드에 ‘鴻鵠之志’라는 글자가 검정색 매직으로 적혀 있는 게 성진의 눈에 띄었다. 성진은 읽을 수도 없는 그 한자 덕분에 양팔에 토시를 끼고 앉아서 두꺼운 책을 읽던 그 60대 초반의 노인이 꼬장꼬장한 유학자처럼 느껴졌다. 작업대 옆 책꽂이에는 『신장의 역사』 『동방견문록』 『돈황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두꺼운 양장본이 꽂혀 있어 그 느낌이 더했다. 정연이 말하는 토용은 그 책들 앞에 서 있었다.

“이젠 더이상 중고시계를 매입하지 않습니다. 다만 남은 걸 팔 뿐인데, 태그호이어는 없어요.”

그가 성진에게 말했다.

“그 작자한테 또 속은 거야. 저글링하듯이 여러 사람의 금쪽같은 시간을 갖고 노는구나. 나한테는 짝퉁이라고 둘러대고서는 다른 데다 고가에 팔았겠지, 진품이라면 굳이 이런 곳까지 와서……”

성진이 거기까지 말하는데, 정연이 그 말을 막았다.

“시곈 됐고. 대신에 저거 살 수 있을까요? 저 토용.”

그녀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이 고개를 돌려서 그 인형을 바라봤다.

“저건 토용이 아니라 병마용(兵馬俑)인데, 파는 게 아닙니다.”

“중국에서 사신 건가요?”

“아니오. 아직 한번도 중국에는 가본 일이 없어요. 십수년 전에 시안(西安)에 관광을 다녀온 사람한테 선물로 받은 거예요.”

“선물이라시니 어쩔 수가 없네요.”

정연이 말했다.

“하지만 선물로서의 의미는 이미 퇴색한 지 오래예요. 그런데 이게 갖고 싶어요?”

“아니요, 뭐. 그냥…… 이 사람 말만 듣고 여기까지 왔는데, 시계도 못 찾고, 이래저래 헛된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게 한심해서.”

“헛된 시간이라……”

정연의 말에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노인은 작업대의 불을 끄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꽂이 앞에 있던 병마용 모형을 들고 쏘파 쪽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할 말이 있으니 두 사람에게 쏘파에 앉으라고 했다. 그러더니 탁자 위에 병마용을 세웠다. 성진은 여행잡지에서 한번 그 병마용 사진을 본 일이 있었다. 하지만 머리를 땋은 모양이며 얼굴 표정이며 갑옷의 생김새를 그렇게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성진이 그 인형을 바라보는 동안, 노인이 계속 말했다. 그걸 선물한 사람은 시장에서 친목계를 같이하던 계꾼이었는데, 대학을 나왔다고 으스대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해서 『사기』가 어쩌고, 진시황이 저쩌고 사설을 늘어놓으며 그런 선물을 상인들에게 돌린 것인데, 골동품에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라 그런 게 반가울 리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표면이 매끈하지만, 처음에는 여기에 진흙이 누렇게 묻어 있었단 말이오. 우리 집사람이 그걸 보고는 ‘선물을 하려거든 좀 깨끗한 걸 골라올 것이지’라고 흉보는 소리를 몇번 들었는데, 내가 가게를 비운 틈을 타서 여러번 물로 헹구고 식초에 담그기까지 하면서 진흙을 다 벗기고 윤을 냈어요. 가게에 돌아오니 집사람이 깨끗하게 씻은 걸 보여주는데, 아주 보기 좋습디다. 그래서 잘했다고 칭찬했지요.”

며칠이 지나, 그 사람이 가게에 놀러왔기에 자랑 삼아 깨끗하게 씻은 병마용을 꺼내 보여줬더니 그 인형은 원래 일부러 흙을 묻혀서 파는 건데 무식한 여편네가 헛수고를 했다며 혀를 끌끌 찼다고 노인은 말했다. 너무 심하게 아내 흉을 보기에 아니, 세상천지에 일부러 진흙 묻혀서 파는 인형이 중국 말고 어디 있겠냐며 따지다가 도리어 봉사 개천 나무란다느니, 부창부수라느니, 그런 악담까지 들었고, 결국 그 사람과는 영영 절교했다. 그리고 왜 인형에 흙을 묻혀서 판다는 것인지 알아야 분이 풀릴 것 같아 노인은 시내 서점에 나가 진시황에 대한 책을 한권 사왔다. 그 말에 성진은 병마용에서 시선을 떼고 그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은 진시황이 나오는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진시황을 알고 나니 『사기』가 궁금하고, 『사기』를 알고 나니 수당(隋唐)이 궁금하고, 그렇게 해서 서역도 알게 되고 실크로드도 알게 됐다. 하지만 자기 혼자 알고 싶었다면, 그렇게까지 열심히 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노인은 말했다. 아내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읽은 것이라고. 밤에 불 끄고 누워서 그는 낮 동안 시계방 구석에서 읽은 책의 내용 중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아내에게 들려줬다. “봉사 소리를 또 듣게 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그는 말했다.

노인의 이야기에 푹 빠진 정연이 “어떤 얘기들을 들려줬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다. 병마용의 얼굴은 모두 다르다던데, 또 원래는 색도 칠해졌다던데, 그래서 처음 발굴할 때만 해도 실제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던데, 원래는 진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몇천년이 흐르는 동안 인형으로 모습이 변한 건 아닐까? 뭐, 그런 얘기도 하고. 고비사막에서 한나라 때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와 전쟁을 벌일 때, 병사들이 말을 잘 안 들어 조사해보니 아내들이 수레에 숨어서 따라왔더라, 그래서 이릉이 그 아내들을 끌어내 모두 베어버렸는데 그걸 지켜보던 사내들 심정이 상상이 가느냐, 사막이 뭐냐면 그런 마음이 사막 아니겠느냐, 뭐, 그런 얘기도 하고. 용문석굴의 불상들도 그렇고, 당 고종과 무측천 무덤인 건릉의 사신상도 그렇고, 죄다 목이 잘려나갔다는데 도대체 그 얼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또 뭐 그런 얘기도 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아내는 ‘세상에!’나 ‘어머나!’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맞장구를 쳤다. 때로는 많이 피곤했던지 어느 틈엔가 잠든 아내가 코를 골기도 했는데, 그런 날에도 노인은 혼자서 중얼중얼 마저 얘기를 끝냈다고 했다. 못 배운 설움은 아내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있었으니까. 그건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손을 들어 화이트보드에 적힌 한자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길 한번 보시오. 홍곡지지(鴻鵠之志)라는 건 『사기』 ‘진섭세가’에 나오는 말이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진나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는 진섭(陳涉)이 머슴살이를 하던 젊은 시절, 미래의 부귀를 말하니 다른 머슴들이 그를 비웃었는데 그때 진섭이 한 말입니다. 제비나 참새 같은 작은 새가 기러기나 백조의 뜻을 알겠느냐는 뜻이죠. 내게도 홍곡지지는 있으니 그게 바로 시안과 그 너머의 사막을 여행하는 일이라오.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라 저렇게 적어둔 거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여기 시장에서는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단 한 사람 집사람만 응원을 아끼지 않았소. 10년을 넘게 그 얘기만 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하지만 나 혼자 갈 수 있나? 집사람과 같이 가야지. 그렇게 말하면 집사람은 아주 기겁을 했어요. 평생 고생만 시키더니 기껏 비행기 태워준다는 데가 여자들 베어 죽인 사막이냐는 거지. 그러더니만 작년에야 비로소 같이 가자고 합디다. 그 소원 하나 못 들어준 게 미안하다며.”

“그런데 왜 아직 못 가셨어요?”

정연이 물었다.

“작년에 가려고 비행기표까지 끊었는데, 집사람 몸이 다시 나빠지는 바람에……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다시 통원치료를 받았고, 그러다가 십일월에 입원했는데 다시는 병원에서 못 나왔지. 이젠 나 혼자 남았으니 올여름이 되기 전에 여기 정리하고 중국을 여행할 계획이에요. 그러니 이게 갖고 싶다면 아가씨한테 그냥 드리리다. 지금까지 내 얘기를 잘 들어주니 고맙고, 마지막으로 잔소리를 한마디 하자면, 어쩌다 이런 구석까지 찾아왔대도 그게 둘이서 걸어온 길이라면 절대로 헛된 시간일 수 없는 것이라오.”

병마용을 정연 쪽으로 내밀며 노인이 말했다.

 

작년 1220일 아침에 깼을 때만 해도 시간이 영영 이대로 멈춰버린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시계가 작동을 중단한 것일 뿐 시간은 계속 흘러 새로운 봄도 찾아왔고 꽃들도 피었다. 정시당에서 나와 들어온 반대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 골목을 빠져나오니 청계8가였다. 토요일 오후가 깊어지고 있었다. 버스도 택시도 지하철도 없는 곳이라 둘은 천변을 따라 걸었다. 해는 빌딩들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오는가 싶더니 구름 속으로 숨어버렸다. 처음에는 가까운 정류장이나 지하철역까지만 함께 걸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얘기를 하다보니까 계속 걷게 됐다. 왜 그렇게 됐느냐면, 청계7가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신호를 기다리는데 정연이 성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고 말해줘.”

성진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쳤냐? 내가 왜?”

정연은 실망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다 까먹었구나. 하긴 같이 「몽중인」을 본 것도 몰랐으니까. 오빠는 방콕에서 만났을 때부터라지만, 나는 그때부터였는데. 우리 둘이서 아현동 비디오방에 앉아서 그 대사를 들을 때부터. 왜, 「몽중인」의 첫 장면에서 임청하가 그렇게 말했잖아. 내가 죽으면 같이 죽겠다고 말해줘. 죽음 뒤의 적막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스무살 무렵의 언젠가처럼 정연이 대사를 읊조렸다.

“잠꼬대 같은 소리네.”

“지금 들어보니까 그렇네. 그땐 그런 대사들, 다 내 것 같았는데.”

“그게 그렇더라구. 어릴 때만 해도 인생이란 나만의 것만 남을 때까지 시간을 체로 거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되고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 왜냐하면 서른이 되고 보니 남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 다 남의 것이야. 내 건 하나도 없어.”

그러자 정연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게. 2년을 꼬박 다녔는데, 계약 해지. 내겐 남는 거 하나 없이 다시 빈털터리. 이게 뭐야?”

지난 3월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뒤, 그렇게 한달이 흘렀다고 정연은 말했다. 그 한달이 어떤 한달이었을지 성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어 집에 있으면서 이제나저제나 꽃 피기만을 기다렸건만, 아시다시피 지난 4월은 모두에게 얼마나 추웠던지. 무슨 놈의 겨울이 이다지도 기냐는 탄식이 정연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모처럼 친구 생일이라고 외출했다 자정 너머 술에 취해 귀가한 날이었다. 택시 뒷좌석에 앉아서 정연이 가만히 꼽아보니 그날이 413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욕실로 달려가 옷도 벗지 않은 채 물을 뒤집어썼다. 몇해 전, 스물네살, 꿈 많은 사회초년생이었던 시절, 그녀는 태국 빠이에서 치앙마이로 내려오다가 그렇게 물을 뒤집어쓴 적이 있었다. 쏭끄란, 그러니까 413일의 태국 설날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자신의 새해는 지금부터라고 생각하며 물을 뒤집어쓴 것인데, 물이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다. 얼른 뜨거운 물을 틀었지만, 온수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을 끄고는 서 있는데, 흠뻑 젖은 채로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로 보였다.

“왜 그러고 사니?”

“오빤 왜 그러고 살았어? 4년 전에.”

성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연이 계속 다그쳤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때는 매일 밤 캄캄한 방안에 누워 낮 동안 읽은 재미난 이야기들을 고단한 아내에게 들려주는 노인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라고. 이윽고 가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그 노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걸, 또 그가 들려준 건 꼭 산 사람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병마용과 남편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은 여인들의 사막과 목이 잘린 채 폐허의 사원에 앉아 있는 돌부처들과 설산의 눈 녹은 물로 재배한 포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라고.

“어쨌든 나의 서른살은 누가 뭐래도 이제부터인 거야. 과거의 나는 모두 잊기로 했어. 오빠에게 남은 내 흔적도 다 없애고 싶었고. 그러고 나니까 좀 분하더라. 내가 먼저 서른살이 됐다면, 내 쪽에서 먼저 보기 좋게 오빠를 차버렸을 수도 있었으니까. 제기랄, 이런 식으로 그때 오빠의 마음을 단숨에 이해해버렸다니, 억울하지만.”

“그래서 니가 진상을 부렸구나.”

그 말도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청계3가를 거쳐 종로3가 지하철역까지 걸어간 뒤에야 두 사람은 헤어질 수 있었다. 정연은 5호선을, 성진은 1호선을 타야 했다. 5호선 개찰구 쪽으로 걸어가기 전에 정연은 신문지에 싼 병마용 모형이 든 하얀색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며 “헛된 시간만은 아니겠지?”라고 물었다. 그건 답변이 정해진 질문이어서 성진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런데 아까 그 할아버지가 목 없는 불상 얘기할 때……”

성진이 무슨 얘기인지 알 만하다는 듯 고갯짓을 해 보였다.

“맞지? 오빠도 그 생각 했지? 그 보리수 생각. 부처님 얼굴 생각.”

성진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토요일 오후의 승객들 사이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성진의 머릿속으로 그 보리수의 모습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하늘색 원피스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있던 정연처럼, 성진은 두 눈을 감았다. 그날 호텔 방 안은 서늘했다. 부산영화제 기간이었고, 정연은 낮에 본 뻬루 영화에 대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은 한가롭고, 또 졸리게 들렸다. 이윽고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뭐 해? 그가 물었다. 생각. 그녀가 눈을 계속 감은 채로 대답했다. 무슨 생각? 잠들 때면 이따금 하는 생각. 부처님 얼굴 생각. 무슨 부처님 얼굴? 성진이 물었다. 우리가 아유타야에서 본 부처님 얼굴 말이야. 그 생각만 하면 이 세상이 정말 근사하게 느껴지거든. 그게 그렇게 근사해? 성진도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그녀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유타야를 침략한 버마군이 불상들의 목을 자를 때 떨어진 불상의 머리 중 하나를 보리수의 뿌리가 감싸 안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 머리는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뿌리와 하나가 됐다. 둘은 나란히 서서 그 뿌리 속 부처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얼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성진이 그 얼굴을 떠올리자, 정말 이 세상이 근사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동안, 성진은 정연의 숨소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낮고 고요하게, 쌔근쌔근, 규칙적으로. 성진이 보리수 뿌리에 감싸인 부처님 얼굴을 생각하는 동안, 세상이 근사하게 바뀌는 동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마침내 지하철이 역구내로 들어오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