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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박솔뫼
1985년 광주 출생.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을』 『백행을 쓰고 싶다』가 있음. songbook1123@gmail.com
겨울의 눈빛
해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K시이다. 나는 K시 출신으로 3년 전 해만으로 오기 전까지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줄곧. 그러니까 나는 K시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의무교육을 마쳤으며 버스를 타고 한시간이 걸리는 인근 도시의 대학을 다닐 때조차도 K시에서 통학을 했다. 정말로 나는 줄곧 K시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랬으나 해만으로 온 이후로 마치 나는 그간 K시가 넌덜머리가 났다는 듯이 꼭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집에 가지 않았고 특히 해만에 온 첫해에는 1년간 K시에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가볼 만한 무수한 이유가 있었으나 그것들이 가야만 하는 이유로 바뀌지는 않았다.
줄곧 K시를 잊고 있다 떠올리게 된 것은, 아니 그러니까 K시라기보다는 K시의 극장과 거기서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된 것은 글쎄 별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았다.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잊고 지냈던 노래를 듣게 되기도 했으며 그 곡은 지난 한 순간을 환기시키는 중요한 음악이었다. 며칠 전 흔하지 않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났고 그 이름은 내게 어떤 시간을 상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이 우연히 마주친 어떤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순간을 돌이키는 중요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거기에 아무런 우연도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고, 아니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가라앉아 있던 것은 떠오를 때가 되어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은 것이다.
K시에는 어떤 극장이 있다. 그 극장은 내가 극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머리에 그리는 근원적인 형태의 극장이다. 내게 유일하며 처음인 극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내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일곱살 때 처음 간 극장이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아주 멀리 그러나 분명하게 자리잡은 최초의 기억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곳이 최초의 극장인 이유는 극장이라는 공간이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갖는지 처음 인지하게 된 곳이라서다. 내가 그 극장에 처음 간 것은 십대 후반의 일로 한동안 나는 매주 그 극장에 들렀다. 정말로 매주 영화를 보았을지도, 아니 어쩌면 극장에 그저 들러 잠시 서성이다 온 것 같기도 하다.
그 극장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는 극장이 서 있는 거리에서 시작하여 그 반대편 극장까지 머릿속으로 한발씩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수십걸음을 뒷걸음질 쳐 바라본 극장의 위치는 이러했다. 이차선 도로와 한개의 블록을 사이에 두고 극장 두개가 마주 보고 있다. 도로변에 있는 극장은 회색의 낮은 건물이고 도로를 지나 있는 극장은 갈색의 좀더 높은 건물이다. 좀더 먼 곳에서 바라다보면 이차선 도로와 두개의 블록을 사이에 두고 세개의 극장이 서 있다. 두개의 극장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하나의 극장은 하나의 극장 뒤에 서 있다. 즉 이차선 도로의 오른쪽으로는 두개의 극장이 왼쪽으로는 한개의 극장이 서 있는 것이다. 그런 형태로 극장들은 서 있었다. 세개의 극장 중 영화를 상영하는 곳은 가운데 극장이다. 그 극장이 바로 내게 유일한 극장이었다. 하나의 극장을 마주 보고 또다른 극장 앞에 서 있는 바로 그 극장이 내가 가는 곳이었다. K시의 극장에 대해 말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쳐야 하는 이유는 한때 어떤 거리에는 극장들이 많이 있었고 이제 그것들은 없으며 나의 유일한 극장은 K시의 다른 몇몇 사람들에게도 유일한 극장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뒷걸음질하던 발을 멈췄다 다시 가운데 극장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그렇게 나는 가운데 극장으로 가곤 했다. 이제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텅 빈 극장들을 순례하듯 지난 후에야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무수한 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계절과 바람이 선명했고 나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던 가을 오후의 익은 햇살과 늦여름의 쓸쓸한 바람과 장마의 시작을 말이다. 그러나 멀리서 나를 바라본다면 그러니까 극장을 바라보듯이 뒷걸음질 쳐 멀리서 의자와 탁자와 사람들과 함께 나를 바라본다면 내게서 나를 지나간 무수한 순간들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움직임과 표정을 어딘가에 조금씩 떼어놓고 와 표정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얼굴로 나는 극장에서 시간을 났다. 이차선 도로를 지나 하나의 블록을 지나 극장 간판 앞에서 잠시 서성이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손등을 덮는 길고 큰 옷에 파묻혀 움츠린 채로, 그러다 소매 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지폐를 떨어뜨리듯이 내밀고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소매가 움직이는 것 같겠지? 소매만이 움직여 돈을 내는 것 같아 보일 거야. 극장 안에서는 언제나 지겨운 표정으로 낡은 옷을 걸친 채 서 있었다. 가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소매에서는 연하게 흙과 창고 냄새가 섞인 냄새가 났다. 여름에는 원피스의 목 부분에서 서랍 냄새가 날 때가 있었다. 어느 계절이건 늘 그런 식이었다. 마치 극장의 벽이나 의자나 벽지나 천장의 등, 복도의 액자 같은 것이 되고 싶은 것처럼.
며칠 전 방에서 발견한 노트 속 일기는 어느 해의 겨울과 그때 만났던 사람에 대해 적혀 있다. 그때는 아마도 겨울의 초입이었고 그 겨울의 어느날 나는 한국 감독이 만든 그해 주목받은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다.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그저 극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습관처럼 극장에 갔고 그 시간에 하는 영화를 본다. 그게 그 다큐멘터리였다. 그날은 상영이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가 준비되어 있었고 영화에 삽입된 곡을 부른 그리 유명하지 않은 포크 뮤지션의 짧은 공연도 예정되어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영화는 3년 전 부산에서 일어난 어떤 사고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3년 전이라고 입을 떼면, 3년 전 봄의 어느 날짜를 대면 사람들은 어딘가 아픈 표정을 짓거나 지친 얼굴을 하거나 지겹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그 이야기를 하는구나 같은 표정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고리핵단지의 정확한 주소는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고리로 해운대와 약 22km 떨어져 있었다. 아마 3년 전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뉴스에서 듣던 고리핵단지와 해운대를 연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고리핵단지는 혹은 고리발전소는 뭐랄까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뉴스에서 나오는 말 같은 것이고 지난 정권의 금융정책이나 무역지수, 여야결의안 같은 그런 말 있잖아.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알아야 할 것 같지만 영영 알지 못하는 그런 수많은 말들 있잖아. 나는 그런 말들을 쉬지 않고 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서너개를 부르고 나면 이어지지 않는다. 해운대는 경포대나 낙산이나 아니면 서해안 어디 같기도 하면서 어느 대도시의 번화가 같기도 하면서 동시에 경주 안압지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음 그래 나도 그랬지라고 생각하며 해운대에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를 멍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영화는 감독을 포함하여 해운대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기억하는 해운대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몇십년 전 해운대는 아주 넓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모래밭이. 그럴 땐 아주 쉬운 말로 걷고 걸어도 끝이 안 보인다고 해. 해운대에서 오래 살았다는 어떤 사진작가는 학교에서 단체로 해운대를 청소하기 위해 새벽부터 안개를 헤치며 걸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오는 날 아이들이 손을 잡고 새벽길을 걷는다. 청소를 해야지. 모두들 걷는다. 모래밭을 걷는다. 하나둘. 그 모래밭이 얼마나 길었는지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이고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프고 너무 힘들면 쉬었다 가며 옆에 보이던 파라솔에서 색소가 가득 든 주스를 사 마셨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길이 어린애한테는 얼마나 걷기 힘들었던지 울고 싶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웨스틴조선도 하얏트도 파라다이스와 노보텔은 물론 토요코인과 기타 등등도 없었을 때, 안개 낀 바닷가는 끝이 없이 펼쳐진 바닷가는 적막하며 막막하고 조용하여 어쩐지 무서웠다고 나는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의 해운대를 나는 모르고. 오래전의 한국영화들. 여자가 머리를 스카프로 감싼 채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고 남자는 멀리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런 영화의 배경이었던 바다의 모습과 비슷하겠지 생각해보다 말았다. 그 시간이 지나 해운대에는 모든 것이 들어섰는데 모든 것이 무어냐면 부동산 투기자와 부유층과 아시아에서 제일 큰 백화점과 외국 투자자본과 주소지가 서울인 집주인과 체인형 식당과 극장과 까페와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까지 포함한 모든 것들. 그때는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딘가 앉을 데를 찾아 들어가 빵을 사고 커피를 사고 창밖을 바라보며 산 것들을 입에 가져가면 주변의 사람들은 명백한 외국인이거나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이거나 했고 어떤 사람들이건 고운 얼굴에 좋은 것들을 입고 걸치고 외국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운대는 이제 갈 수 없는 땅이 되었고 그때의 해운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마치 폼페이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아주 찬란한 최정점에 있던 어떤 것이 파묻혀버린 이야기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감독은 화려했던 해운대를 이야기하며 그때 자신이 느꼈던 환멸에 대해 친구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감독은 환멸이라고 여러번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확실히 환멸이지요. 다른 말로 이야기할 수 없어요. 해운대에 못사는 사람들도 많이 살았거든요. 아니 그냥 보통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이 다 떠나게 된 거지요. 그리고 그밖의 것들을 이야기했다. 호텔과 백화점과 아파트가 아닌 해운대에 관해. 예를 들어 요트 경기장 인근에 있던 작고 오래된 극장. 나는 K시의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아 저 오래된 극장은 저것대로 해운대의 유일한 극장이었겠구나 생각했다. 극장의 상영관 앞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면 멀리 바다가 보였다고 했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보며 컵라면을 먹었어요. 아마 다들 한번쯤은 그랬을 거예요. 그밖에 오래된 고가 아래를 걸을 때의 기분이라든가 바다와 오래된 시멘트 고가가 함께 있는 풍경이라든가 십대 폭주족이 시도 때도 없이 깨부수던 버스 정류장의 유리와 밤의 불빛. 젖어 있는 길과 공기 사이로 퍼지던 웃음과 비명. 오래된 가구상가의 특이한 구조, 외국인이 드물던 시절 해운대의 몇 안되는 외국인들이 자주 가던 골목의 까페와 술집, 허름한 포장마차들. 끊임없이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부분들에 대해 말했다. 그 모든 부분들, 골목들, 단면들, 부속들, 내장들에 관해서. 해운대를 이루는, 아니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있어 해운대에 짙은 선과 색을 그려주던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영화는 사고가 난 고리원전 1호기에 대해서보다는 해운대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려가고 있었다. 해운대, 이제는 갈 수 없는 곳. 그런데 거기가 어떤 곳이었냐면. 그것에 관해 사람들은 담담히 말하다가 분노를 표하다가 체념하는 듯했지만 결국에 다시 화를 냈다.
감독은 해운대에서 태어나 사고 며칠 후까지 해운대에서 살았다. 사고 당시 개 한마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개의 이름은 모자였다. 머리에 동그란 얼룩이 있어서 모자. 나는 그 말이 좋아서 다시 따라해본다. 개 이름은 모자. 모자야 이리 와. 모자야 앉아, 모자! 앉아! 모자! 손! 모자야 잘했어. 감독은 모자를 데리고 부산 중구의 친구 집으로 대피했다.
〔그때 사람들은 처음으로 대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리와 부산 시내의 거리는 약 30km〕
〔핵발전소 사고에서 주요 위험지역이면서 가장 먼저 주민 대피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반경 30km이다〕
친구는 중앙동 근처의 오래된 집을 빌려 살고 있었다. 작업실을 겸하고 있던 그 집은 꽤 넓었는데 감독은 친구의 침실에서 모자와 함께 묵기 시작했다. 친구는 작업실 쏘파에서 잠을 잤다. 두 남자와 개 한마리는 채널을 바꿔가며 뉴스를 보았고 인터넷 창을 수시로 새로고침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없나 우리를 안심시켜줄 그런 이야기가 없나 보고 또 보았다. 이미 사둔 쌀은 괜찮아.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산을 쓰지 않니? 우리 짜장면을 먹자. 두 남자는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자갈치시장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상인들이 모여 담배를 피웠다. 커피를 마셨다. 방송국 카메라는 상인들이 모여 한숨을 쉬는 자갈치시장을 찍어 갔다.
그때 모자는 평소보다 잠꼬대가 심해졌다. 모자야 내가 여기 있어. 감독은 모자의 배를 쓰다듬어준다. 개는 끙끙거리고 헛발질을 하고 자다 벌떡 일어나 컹컹 짖다 다시 잠들고 네 다리를 축 늘어뜨리거나 온몸을 긁는다. 나는 그 모습을 빼먹지 않고 하나씩 그려보았다. 자다가 끙끙거리는 개. 끙끙거리는 개는 꼭 껴안고 세상의 안심이라는 안심을 모두 모아다 주고 싶어진다. 여기 안심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마 껴안은 채로 속삭이고 싶다. 뭐가 있는 것처럼 헛발질을 하는 개,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문을 향해 짖는 개, 자면서 턱을 긁는 개, 그렇게 잠꼬대를 하는 모든 개. 감독은, 모자는 마치…… 마치 무언가를 잊고 싶다는 것처럼 자다가 고개를 흔들었어요 하고 말했고 나는 그 대사가 좀 웃긴다고 생각했고 이건 뭔가 좀 뻔하잖아 싶어서 웃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웃지 않는 그 장면을 혼자서 곱씹었다. 개가 사고에 대한 공포로 악몽을 꾸는 것이라 모두들 생각하고 싶어했다. 나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개의 꿈을, 개가 꾸는 꿈을 하고 입에 올리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바로 웃음이 나왔다. 개가 무슨 꿈을 꾸든 개의 꿈, 나의 개, 나와 함께 사는 개의 꿈, 그 개가 꾸는 꿈 하고 중얼거려보면 왠지 좋을 거야. 웃긴 생각이 들거든. 네가 개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개에게 큰 도움을 받기만 하겠지만 말이야. 그런 개에 관한 생각들을 했다. 내 생각에 모자는 이런 꿈을 꾸었을 것 같은데. 창밖을 보니 주인이 울고 화내고 불안해하는 얼굴이 보였는데 그 모습에 무작정 반가워하며 꼬리를 흔들며 달려가기는 어려워서, 그러니까 화난 얼굴은 모자를 어쩔 줄 모르게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몇초간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싶었지만 이미 꼬리는 흔들고 있네? 에이 모르겠네 모르겠어, 꼬리를 마구 흔들며 창으로 향하지만 주인의 화난 얼굴은 점점 커져 창을 뚫고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집마저 뚫고 나가는 것이다. 모자가 일어나 컹컹 짖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을 것이다.
부산은 가만히 생각해보아도 너무 커다랗지. 너무 커다래서 커다랗다고 말하는 게 어색할 정도로 커다랗지. 당시 해운대에는 약 42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자막은 말했다. 사람들은 회사를 다녀야 하고 가게는 장사를 해야 하고 어디에 있건 사람들은 밥을 먹고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요, 그런데 당장 이사를, 아니 대피를 가거나 어딘가로, 어디로? 대체 어디로? 고리핵발전소에서 서울까지는 고작 300km 거리인데요, 서울로 가면 우리는 안전합니까? 서울은 안전하다고 누군가는 정말로 믿고 있습니까? 당장 해운대를 빠져나가는 외국인들이 보도되고 그 사람들은 부산을 죽음의 땅이라고 말했는데 외신기자가 부산 이즈 랜드 오브……라고 말해도 아 부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해운대가 있고 자갈치시장이 있고 시끄럽고 커다란 도시인데요라는 식으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우리는 부산 사람들의 질린 표정을 뉴스에서 매일같이 보았지만 한달쯤 지나자 그것도 끝이었다.
겨울의 초입. 사람들은 외투를 벗어 무릎을 덮은 채로 영화를 보고 있다. 나는 어깨까지 외투를 끌어올려 얼굴만 내민 채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는 눈이 펑펑 내렸고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오갔다. 눈을 맞지 말라고 했지. 나는 방에 누워 창에서 나는 물 냄새를 맡으며 물을 끓였다. 차를 마시려고. 극장에 앉은 우리는 K시는 K시니까 부산이 아니니까 생각하다가 우울해했다. 우리의 우울함으로 극장이 앓을지 몰랐다. 나는 차를 마시려 매일같이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면 극장에 서성거리려 집을 나섰고, 의자에 앉은 모든 관객은 이곳이 부산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다가 넌더리를 내었고, 극장 안 공기는 수증기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이 영화는 그리고 이런 영화는 전국을 돌며 상영한다지. 나는 극장을 빼면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집에만 있고 싶었다. 극장에서 이런 것을 보고 기운 없어하는 동시에 극장을 기운 없게 했다. 화면에는 머리에 큰 점이 있는 모자라는 개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그걸 계속 바라보았다. 모자는 마르고 긴 다리를 가진 털이 짧은 개였다. 이런 걸 뭐라고 하는 것 같다. 이런 걸. 이런 개를 말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생긴 개들을. 무슨무슨 어떤어떤 그런 외국 이름. 그 무슨 종이라고 하지? 무엇과 무엇이 교배해서 나온 그런 긴 이름의 그런 종 말이야. 이런 개들은 뭔가 특이점이 있지? 양을 친다거나 집을 아주 독보적으로 잘 지킨다거나 인내심이 심하게 많다거나 뭐 그런 것 말이야. 그러니까 모자에 관한 그런 말들 말이야. 생각해봐 이름만 들어도 생각나는 것들이 있잖아. 아무튼 모자는 테니스공을 던지면 일어서지도 않고 고개를 몇번 움직이다 잡았다. 그게 굉장한 느낌이었다. 모자야 공! 모자야 잘했어. 공을 좀더 멀리 던지면 말 같은 다리로 겅중거리며 공을 줍기보다는 이빨로 물러 모자는 일어나 움직였다. 집주인이었던 감독의 친구는 석달 후 서울로 이사를 갔다. 감독은 친구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시장의 상인들과 차이나타운 사람들의 일상을 찍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자갈치시장의 상인 한명이 목을 맸다. 감독은 그것이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찍은 영상은 편집을 거쳐 한편의 영화가 되었고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그해 부산영화제는 주요 상영관을 해운대에서 중구로 옮겼으나 국내외 게스트들의 연이은 초청 거절로 영화제다운 분위기는 전혀 나지 않았다. 부산 시내의 전광판에는 유명한 배우와 감독이 손을 흔들며 부산으로 오세요라고 활짝 웃음을 지으며 말했지만 그 사람들도 저걸 찍고 부산을 떠났겠지요. 감독은 그런 이야기를 모자에게 테니스공을 던지며 말했다. 모자야 공! 잡아! 잘했어. 모자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방 안을 걸어다닌다.
감독은 서울로 대피한 해운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그들 중 한명은 이제는 못 돌아가요, 기대를 접었어요라고 말했고 부모님이 걱정이라고 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서울 큰형네 집으로 대피를 했고 이제는 서울에서 직장을 새로 구할 생각이지만 그게 쉬울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부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와 정착한 피난민이었다. 아들의 말과 다르게 어머니는 한두달 지나면 부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영화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대피를 하지 않고 남기로 한 사람들을 찍는다. 고리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모두 노인이었다. 해운대는 너무 큰 곳이라 아직 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의외로 해운대를 떠난 사람들의 수는 많지 않다고 부동산 주인은 말했다. 어찌 금방 떠납니까. 안 그렇습니까. 해운대가 이래 큰데. 사람들은 수입식료품을 택배로 주문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택배기사들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없이 고리와 해운대를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썼을 뿐이었다. 택배기사 중 한명은 동료 두명이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죽었지요 뭐. 택배기사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택배기사는 해운대 주민들이 주문한 외국 생수와 씨리얼을 배달하기 위해 트럭에 다시 올라탔다. 카메라는 오래도록 택배기사의 뒷모습을 찍었다.
영화가 끝난 후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다. 나는 영화에 대해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으나 감독의 긴장된 얼굴을 그러니까 남이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조금 재밌고 좋았다. 나는 조금 나쁜 사람인가? 아니 그냥 그런 게 좋은 거야. 누군가 긴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도 살짝 긴장이 되고 그런 기분은 좋거든. 영화를 본 사람은 열명 남짓이었고 감독과의 대화에 참여한 사람은 다 합해야 다섯명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영화는 고리핵발전소 사건 이후 쏟아져나온 고리 영화 중 하나라는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사람들, 고리라는 혹은 해운대나 부산이라는 공간에 남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상처를 이야기한 영화들. 고리핵발전소 사건 이후로 그런 영화는 규모를 가리지 않고 수십개쯤 쏟아져나왔고 당연하다는 듯 각종 해외 영화제에 초대되고 몇은 상을 받기도 했지만 글쎄. 여하튼 그날 본 그 영화도 부분부분 흥미로운 점이 있었지만 어떤 강력한 힘이나 특별한 매력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차라리 한국수력원자력공사를 폭파하고 그곳의 간부들을 납치해서 인질극을 벌이는 말도 안되는 그런 영화를 보고 싶었다. 간부의 머리 하나와 원전 하나씩을 걸고 한시간 동안 대치를 벌이는 뭐 그런 영화. 인질의 집 앞뜰에 우라늄을 묻어버리고 잠옷 차림의 그를 폐기물 처리요원으로 보내버리는 뭐 그런 영화. 갱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뛰어다니는 영화. 나는 그런 게 보고 싶었다. 감독과의 대화를 기다리며 1층과 2층 사이 계단에 앉아 스웨터에 붙은 보풀을 뗐다. 4~5년 전이었을 텐데 부산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부산에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럼 K시에는 사람이 없나, 그러니까 별로 없나, 아니 왠지 굉장히 굉장히 많은 느낌이었지 부산 쪽이.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모습, 아줌마들이 음식을 팔고 있었는데 나도 사먹었지. 팥죽을 여러번 떠주던 아줌마. 나는 입안이 너무 달아 이가 시린 기분이었다. 그곳에서는 계속 팥죽을 팔지 모른다. 아무도 없을 리 없어요. 지금 이곳이 부산이 아니라는 것에 아주 큰 안심을 하고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자 왠지 바보 같아져 보풀을 입에 넣고 굴렸다. 보풀 한개 또 한개. 나는 계단으로 올라오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나의 입안에는 스웨터 보풀이 있다. 내가 그 보풀을 입에 넣은 데는 당신이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국면이 있었으나…… 겨울인데 계단에 앉아 있는 것은 온몸이 점점 각목처럼 뻣뻣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주는데 그것이 갑작스러워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은 아니고 으레 있는 일 같은데 각목 같은 건 각목 같은 거지. 극장에 가는 것은 분명 영화를 보기 위해서지만 보풀을 입에 물고 삼키지 않고 내가 왜 극장 계단에 앉아 있느냐 하면 하고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려보면 아마도 그것은 나 자신을 멀리서 보며 오 그렇군 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조용히 집중한 상태에서 그런 멍청한 행동을 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관객이 객석 중앙에 모여 앉았다. 외투를 손에 들거나 어깨에 걸치고 굳은 표정의 사람들은 여전히 추운 얼굴로 앉아 있다. 자리를 바꾸어도 그 표정으로 말이다. 남아 있는 관객들은 적은 인원 탓인가 왠지 모를 의무감으로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감독에게 있는 것은 책임감이니까 찍는 사람의 책임에 대해 말을 하고 우리에게는 손이 있으니까 손이 있는 사람들이 다였으니까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영화음악을 부른 포크 뮤지션은 고작 몇명을 앞에 두고 영화음악을 다섯곡쯤 부르고 그렇게 어정쩡한 시간이 간신히 지나고, 그 시간이 얼마나 어정쩡했냐면 마지막 질문이 감독님은 올해 나온 영화 중 가장 재미있게 본 게 무엇입니까였는데 그걸 묻는 사람은 하나도 안 궁금하다는 표정이었고 감독은 하하 그게 제 영화라고 해도 될까요라고 말했고 그 시간의 어정쩡함은 그 정도의 어정쩡함. 그 질문을 끝으로 사람들은 영화관을 나섰다. 차가운 밤의 거리로. 극장 문을 열고 몇걸음 뗐을 때 평소 인사 정도를 나누던 얼굴을 아는 극장 직원이 나를 불렀고 나는 왜 거절을 잘하지 않을까. 아니 왜 거절을 잘 못할까. 어색하게 대답을 하고는 감독과 극장 직원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보풀을 삼킨 이후였다.
내가 정말 잘하는 게 있다면, 누구보다 자신있는 게 있다면 이런 자리에선 절대 금물이지 하는 이야기도 떳떳하게 한다는 것. 나의 가장 보기 사나운 점은 그런 자신에게 자긍심을 갖는다는 것. 나는 명절에 술에 취해 큰형수의 외도나 집을 나가 몇십년째 연락이 없는 동생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꺼내는, 모두가 싫어하는 친척 아저씨의 자세로 저 영화가 어떠셨나요 하고 수줍게 묻는 감독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 할 수 있는 대답들 그러나 누구도 하지 않는 대답을 성실하게 하고 또 멈춤 없이 계속해서 하는데. 감독은 말이 없어지고 나는 맥주 한잔만 비우고 아무도 붙잡지 않는 술자리를 떴다. 사실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선가 다시는 누구도 안 볼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 극장을 너무 좋아하는데 그런데도 아무 생각 없이 이건 이렇지 않아요 저렇지 않아요 실컷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줏집 앞에는 노래 부르던 남자가 서 있고 그제야 뭔가 부끄러워진 나는 남자에게 담배를 빌려서 아 저기 죄송해요 제가 저 자리에서 실수를 많이 했거든요? 그니까 막 영화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 많이 했어요 담배를 두대나 빌려서 그런 이야기를 토해내듯이 했다.
“저 사람 좀 너무 곱지요?”
“에? 아 좀 그런 것도 같은데 그래도 제가.”
“저는 저 사람 너무 고운 것 같아요.”
“아니 전 막 싫은 건 아닌데 싫은 것도 아닌데 제가.”
남자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맥줏집에서 기타와 가방을 챙겨 나왔다. 남자와 나는 편의점을 찾아 걷다가 담배와 캔커피를 사서 좀더 걷다가 좀더 외진 곳으로 향해 걷다가 아무도 없는 좀더 더러운 술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마시고 또 마시고 내가 또 잘하는 게 있다면 뭐래도 상관없겠지 생각하는 것인데 술을 마시며 또 그런 속삭임을 들었다. 뭐래도 상관없겠지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 말이야. 나는 그 목소리에 대답하듯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아요 하는 웃음을 짓는다. 무엇인가 거절하고 거부하고 전부 마음에 들지 않네요 하고 선택하지 않는 것보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나? 하고 그래요 그래요 승낙하는 것들을 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들 사이를 춤추며 사뿐히 건너갈 것처럼. 춤을 추자고 하면 네 하고 손을 내밀 생각으로 네 손으로 내 볼을 감싸면 눈을 피하지 않을 작정으로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웃고 또 웃고 나는 고리에 대한 영화를 만들 거라면, 꼭 그렇게 만들어야 하겠다면 갱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말했다. 죄책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저어함이라는 것을 원래부터 모르는 사람들인 것처럼 뭔가를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뭔가를 그렇게 꼭 찍어야겠다면 말예요. 찍지 않을 수 없다면 말예요. 남자는 네모가 쌓여서 더 커다란 네모가 되고 그것은 다시 또 큰 네모가 되는데 네모와 네모가 만날 때는 비눗방울이 한번씩 터지고 그렇게 네모가 점점 커지고 비눗방울이 연이어 터지는데 그게 지루하지 않고 흐물흐물하고 즐거운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자는 그런 걸 보고 싶다고 했다. 아아 나는 그럼 뭐지 난 말이에요 나는 인질극으로 시작해서 삼각관계로 끝나는 영화, 패싸움으로 시작해서 불륜으로 끝나는 영화, 사내 연애로 시작해 사제 관계로 끝나는 영화. 그런 게 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보고 싶은 건 미스터리로 시작해서 미스터리로 끝나는 영화. 시작된 물음표가 끝나지 않는 영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는 영화. 밀실살인으로 시작해서 탐정과 경찰과 그들의 친구이자 애인인 추리의 천재와 수사의 귀재가 밀실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 그것이 정말로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밀실살인으로 시작해서 밀실살인으로 끝나는 영화. 우리는 보고 싶은 것들을 자꾸자꾸 이야기했고 그리고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다시 조금 웃고 또 음 또 보고 싶은 게 있다면, 정말로 보고 싶은 게 있다면, 꼭 봐야 할 게 있다면 하고 각자 생각했다. 생각해보았다. 음음 하고.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핵발전소 사고 복구사업에 지원했다가 죽었다고 했고 또다른 예술가 친구는 개인작업을 위해 고리로 갔다고 했다. 그외 다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남자는 그 모두와 한번씩 같은 방을 쓴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죽은 사람은 없고 모두 살아 있었고 신기하게도 지저분한 사람 없이 모두 청소를 열심히 했다고 했다. 신기하다. 나의 친구들은 대학을 다니거나 회사를 다녀요.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고요.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회사를 다니다가 요즘에는 아무것도 안해요. 그저 극장에 가지요. 그리고 나도 들었어 그런 이야기. 복구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하청업체 직원이었고 몇몇은 죽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또다른 몇몇은 병원에. 몇몇은 이제는 집에 돌아갔다고 해. 너의 친구는 죽은 쪽이었구나. 그리고 또다른 너의 친구는 영화인지 연극인지 무용인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만들러 고리에 갔구나. 고리에 가서 텅 빈 고리를 보는 것은 중요하지. 사람들이 모두 떠나서 폐허가 되었구나 하고 제 눈으로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해. 이곳이 고리구나 생각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야. 텅 빈 고리에 다녀왔어 정말 텅 비었더군이라고 말하면 무언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 나는 지금 일어나는 그 사건, 바로 그 일을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 피로와 기만을 느꼈다. 그런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애써 기분을 바꾸려고 개 이야기를, 개 이야기는 언제 해도 분위기가 좋아지니까요 하기 시작했는데 개는 내가 이러는 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가 좋아요. 그런 큰 개들 좋아요.”
“나 실제로 봤어요.”
“실제로 보면 어때요?”
“커요. 굉장히.”
모자라는 개,라고 말하면 뭔가 모자란 개 같은 기분이 드는 모자라는 이름을 가진 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다. 우리는 잊을 만하면 또다시 이런 걸 보고 싶어요, 개에서 시작해서 영영 끝나지 않는 것. 개에서 개로, 개로 개로 개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 모자로 시작하여 모자 속 모자로 모자 밖 모자로 이어지다가 찰리 채플린의 모자로 끝나는 것. K시에는 뭔가 의외로 많군요. 뭔가 없는 듯이 있군요. 남자는 추워서 코트를 여미며 말했고 기타를 메고 가방을 들고 코트를 여미다니 뭔가 아주 바빠 보였다. 나는 왠지 화가 치밀어 아니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당신 내일 뭐 해 이제 뭐 해 다음주는 뭐 해 소리를 질렀고 남자는 내 어깨를 흔들었다. 나는 앞뒤로 흔들거렸다. 힘이 없어서 서 있는 힘만 있는 사람처럼. 내가 뭘 하는지 보고 싶어? 지금 이제 앞으로 내일 모레 그리고 그다음 또 다음 뭐 하는지 보고 싶어? 당신이 보고 싶은 게 그거야? 남자는 소리를 지를 것처럼 시작했지만 큰 소리는 하나도 내지 않고 가만가만 묻는다. 나를 앞뒤로 흔들면서. 당신이 보고 싶은 게 그럼 무어야 하며 흔들며 물었다. 나는 나는 내가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나는 흔들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누구가 또 누구누구가 지금 무얼 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토록 모멸감이 드는 이유는 무어야. 우리가 개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렇게 허무해져야 하는 것은 또 무어야. 마치 태어나서 처음 개를 만져본 사람들처럼. 너는 그렇게 살았구나. 너의 친구는 그리고 또다른 친구는 그렇게 살고 있구나. 지금 우리는 K시에 있다. 그렇지? 고리가 아닌 K시에 있지. 그러므로 우리는 괜찮으며 괜찮겠지?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질문이란 질문은 모두 고개를 젓게 만든다. 질문 앞에 서지 못할 사람으로 간신히 어딘가에 서 있다. 그러니까 K시에. 고리와 70km쯤 떨어진 K시에. 남자는 내 침대에 누워 있고 나는 등을 돌리고 눈물을 흘린다. 내가 입고 있던 검은색 바탕의 흰 물방울무늬 원피스는 아주 낡아버린 옷. 나는 이 옷 어딘가에 이 질문을 기억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어. 왜 나는 모든 질문 앞에서 비틀거리나? 나의 이 모든 이유들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나? 이 두 질문을 말이야. 나는 내가 손에 쥔 이 감정을 마음을 잊지 않는다. 눈물을 닦았다. 우리는 의외로 가벼운 포옹만 하고 잠이 든다. 우리는 옷을 벗지 않고 나는 이 원피스를 벗지 않고 눈물을 흘린다. 남자의 친구는 빚을 갚으러 고리에 갔고 나의 친구는 회사에 매일같이 지각을 하고 나는 이 K시에서 태어나 줄곧 여기서 살고 있는데 어쩐지 이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나는 자다 깨 토하고 다시 잠들며 이 모든 것이 하고 중얼거려본다. 물을 한모금 마시고 잠이 들어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남자와 나는 등을 맞대고 꼿꼿하게 일자로 누워 있었다. 공기가 차가웠고 목이 말랐다.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고 스타킹을 벗고 원피스만 입은 채로 잠시 누워 있었다. 너는 나의 옷을 벗기지 않았고 나의 옷은 내가 벗고 너의 옷도 내가 벗기지 않았고 너는 코트를 잠옷처럼 입은 채로 입을 벌리고 잠을 잤다. 무엇인가 변하는 것 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창에 코를 대고 물 냄새를 맡고 차를 마시려 물을 끓이고 그저 서성거리려 극장에 가고 관객은 한숨으로 극장을 시무룩하게 하고 우리의 친구 중 누구는 앓고 또다른 누구는 우리를 이제 만나주지 않는다. 침대에서 내려와 물을 가져와 끓인다. 차를 마시고 나서 씻고 남자와 등을 맞대고 눕는다. 남자는 조용히 일어나 내가 마시다 남긴 차를 마시고 다시 눕는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어.”
남자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다시 물을 끓였다. 남자는 나의 어깨를 안았고 나는 컵 밑바닥에 남은 차 몇 방울을 손가락에 찍어 하얗게 일어난 남자의 입술을 적시려고 했지만 부족했다. 잘되지 않았다. 잠시 후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리고 나는 다시 창가에 서서 물 냄새를 맡는다. 내가 벗은 옷을 다시 걸쳐입고 차가 든 컵을 손에 들고 책상 위의 바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일어나.”
남자도 일어나 차가 든 컵을 손에 들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우리는 우산을 펴고 계단을 올랐다. 더 선명한 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가 우산을 들어주었고 우리는 우산 안에서 차를 마시며 비 냄새를 맡았다. 빗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비에서 시작해서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고 그저 비를 따라가는 것. 비 내리는 거리에서 비 내리는 밤거리로 그리고 다시 비 오는 아침이 되는 것. 비를 맞지 말라고 하여 여태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차를 마십니다. 바나나를 나눠먹고 내려와 방문을 잠그고 누웠다. 하루 종일 빗소리를 들으며 자다 깨다 다시 잤다.
남자와 나는 며칠을 더 함께 지냈다. 남자는 자신이 부르고 녹음한 씨디를 내게 주었고 나는 그것을 가끔 들었다. 사실 거의 듣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은 나를 지겨워했다.
그 이듬해에 나는 해만으로 갔다. 해만에서 내가 하게 된 일은 아는 언니의 가게를 돕는 일이었다. 그 가게는 해운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마을에 있었고 나는 매일 오후 모여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나누는 해운대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의 이야기를 말이다. 누군가 지난 신문을 뒤져 휴가철의 해운대 모습을 찾아본다고 말했다. 바닷물이 색색의 튜브와 수영복으로 꽉 차 있는 기사 속 사진을 멍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다 나는 가끔 해운대의 오래된 극장에 대해서도 생각하는데 그 극장은 누군가에게는 또 유일한 극장이었겠지. 생각하다보면 K시의 유일한 극장과 그곳에서 보내던 시간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내가 K시의 극장에서 본 영화는 수십편일 텐데 어쩌면 수백편일지도 몰라 나는 그중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루하루 수백편의 영화를 보던 때는 같은 표정을 한 채로 시간을 보냈다. 움츠러든 어깨와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극장의 벽이나 계단, 복도나 복도에 걸린 액자가 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극장의 일부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어디에서건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점심에는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저녁을 먹는다. 대개는 그중 하나를 빠뜨린다. 빠뜨릴 때건 빠뜨리지 않을 때건 오전에는 차를 마시고 오후에도 차를 마신다. 물을 끓여 차를 마신다. 새벽에 잠이 들고 오전에 일어난다. 돈이 들어오면 은행에 넣고 일주일에 한번씩 빼서 쓴다. 국민연금을 내지 않으며 의료보험료는 언니인가 오빠의 회사에서 내준다. 친구들은 결혼을 했거나 회사를 다니거나 못 다니거나 오래도록 못 다니거나 드물게 안 다니거나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아는 누가, 때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내가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어째서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고 그리고 또 언제나 내가 견뎌야 할 모멸감은 나보다 크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겨울에는 눈이 오고 눈이 아무것도 가져다주지도 가져가주지도 않는다. 이 눈을 맞으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때 거리는 텅 비었고 사람들이 창문을 닫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이불을 덮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로 나는 그 모든 것을 반복할 것이며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라고 어디에서 잠을 자든 그렇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