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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한국문학, 다시 현실을 묻는다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타원형 감옥의 외부: 『목화밭 엽기전』과 그 맥락」이 있음.

netka@hanmail.net

 

 

1. 빈곤의 문학사회학

 

2000년대 들어 괄목할 만한 문학적 변모를 보여준 바 있는 작가 배수아(裵琇亞)는 장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자기 문학의 새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런 사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는 작가의 직접 기술처럼 보이는 에쎄이 한편이 종작없이 나타나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데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라는 제목의 이 장은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는 이렇게 썼다. “원래 처음 내 생각은 사람들의 초상화, 인간의 백서였다. 그러나 (…) 내가 느낀 것은 결국 빈곤에 의한 존재의 확인이었다. (…) 나는 빈곤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한 것들의 종말이라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260면) 그뿐 아니라 이어지는 문장들 속에는 이런 대목도 눈에 띈다. “그들(가난한 사람인용자)이 당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굶주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이 이제 이 사회에서 더 이상의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였다. (…) 빈곤은 문화적인 소외를 유발시키는데 그래서 몰락하여 예전의 자신의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세습된 빈곤층보다 훨씬 더 절망에 빠지게 된다.”(261면) 여기까지 쓰고 나서 작가는 비로소 의문을 품는다. “빈곤의 문제에 집착하여 몇년 동안이나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과연 ‘공동체’라는 것은 진정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민족이나 국가 말이다.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단 한가지, 오직 외부의 위협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같은 면)

민족이나 국가를 둘러싼 난제들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배수아가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한 것들의 종말”이라고 쓴 것을 동시대의 다른 작가가 “모든 것의 석양”으로 변주한 것 또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언어와 함께 희랍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한강(韓江)의 장편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에 등장하는 희랍어 강사의 대사다. 이 작품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닌 채 자폐적이고 고독한 삶을 살아온 두 남녀(시력을 잃어버린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가 가까스로 사랑의 연대에 이르는 이야기를 통해 타자와의 찰나적 만남과 영원한 어긋남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모든 가시적인 것, 발화 가능한 것들을 소실점의 검은 심연으로 데려가 침묵하게 만드는 작가의 정념이 문명사적 전환기의 감각으로 과잉 추상화되고 있긴 하지만 개별자들의 정신적 빈곤1)을 공동체의 위기에 접속시키고 있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배수아의 선례와 유사하다. 그런데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가 취하고 있는 현실인식의 구도는 우연찮게도 폴란드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그것과 공명한다. 배수아가 “공동체를 하나로 구속하는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빈곤의 문제는 초공동체적 성격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그동안 소시민들이 흔히 가지는 세속적인 부자에 대한 경멸이나 증오, 주입되거나 의도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온갖 종류의 편견들을 만나고 다닌 것”(배수아, 앞의 책 261면)이라고 쓴 것을 바우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빈곤이라는 현상은 물질적 결핍과 신체적 고통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가난은 사회적이면서 심리학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 실존의 적절성이 그 사회가 정의하는 남부럽잖은 생활수준에 따라 측정될 때, 그 수준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은 그 자체로 괴로움과 고통, 굴욕의 원인이다. 그것은 ‘정상의 삶’이라고 인정되는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 결과 분노와 적의가 생기고, 그것은 폭력행위나 자기경멸의 형태로, 또는 둘 다로 배출된다. (…) 소비자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행복한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의 삶에 다가갈 수 없는 이들이다. (그것인용자) 결함있는 소비자가 된다는 뜻이다.2)

 

바우만의 자상한 분석이 도달하고 있는 지점은 배수아가 “문화적 소외”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한다. 결함있는 소비자란 결국 문화적으로 소외된 자, 삶을 향유할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거나 기회를 박탈당한 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결함있는 소비자의 탄생 경로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윤리에서 소비미학으로’라는 명쾌한 구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생산자사회를 지배하던 윤리적 가치, 즉 “모든 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높였고, 모든 노동은 도덕적 올바름과 영적 구원의 발단”(바우만, 같은 책 65면)이라는 생각이 소비자사회에 들어서면서 미학적 가치로 전환되었다는 주장이 그 핵심이다. “삶의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노동은 이제 우선적으로 미적 감독 아래에 놓인다. 그 가치는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따라 평가된다.”(같은 책 64면)

서구자본주의 사회의 삶에 대한 바우만의 통찰이 2000년대 한국작가의 그것과 닮은꼴이라는 사실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그것은 우선 한국사회가 도달한 현대자본주의의 내면화 단계를 지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스스로 범위를 확장해나가고 점점 빈곤 아닌 다른 것의 이름을 차용하거나 데카당한 가면을 쓰고 있기도 하면서 그 모습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배수아, 앞의 책 267~68면) 요컨대 소비미학의 시대에 빈곤의 바깥은 없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노동윤리가 차지하던 영역을 소비미학이 본격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시점은 언제쯤일까. 혹자는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의 한 대목으로부터 성급하게 1997년의 IMF외환위기 사태를 유추해낼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순간의 위기에도 처절하게 무너지는 아슬아슬한 소시민 계층의 삶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이다.”(같은 책 266면) 게다가 「작가의 말」을 통해 직접 밝힌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의 집필기간 또한 하필이면 IMF관리체제(1997~2001)의 후반기부터 2003년 초입까지다. 그러나 작가 자신이 직접적 언급을 회피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빈곤에 의한 존재의 확인”이라는 표현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그는 외재적 계기보다 그 구조적 배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가.

 

 

2. 예비적 서문—‘1987년’과 ‘1997년’

 

2000년대 이후 뚜렷하게 나타난 한국소설의 현상적 변화들, 예컨대 고시원과 반지하 셋방을 전전하는 박민규(朴玟奎)와 김애란(金愛爛), 김미월(金美月)의 주인공, 빈번하게 등장하는 실업자, 불안에 시달리는 신경증자 혹은 ‘무중력 공간의 글쓰기’(이광호)나 ‘무력한 자아’(김영찬) 들이 집단적으로 출현한 결정적 원인을 IMF외환위기 체험으로 볼 것인지의 여부는 상당한 논란거리이고 아직도 일정한 합의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정치사회학적 차원에서 빚어진 ‘97년체제’의 위상 논쟁이 문학사 버전으로도 나타났던 셈인데 여기에 한국소설의 탈()국경화 현상을 배경으로 제출된 ‘615시대의 문학’(한기욱) 논의까지 더해져 상황은 한층 복잡해져 있다. 그러나 배수아와 바우만의 시야를 참조하건대 노동윤리(그것이 비록 집단가상의 형태였을지라도)를 기본원리로 하는 생산자사회에서 문화적 척도의 지배를 받는 소비자사회로의 이동에는 정치적 민주화와 시장자율화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저 ‘1987년’이 훨씬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만큼, ‘1997년’의 위상은 87년체제의 자기실현 절차의 하나로 하향조정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아래로부터의 6월항쟁과 위로부터의 629선언의 합작품인 87년체제는 알다시피 계급연합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의지를 온전히 담아낼 그릇으로는 충분치 못한 것이었다. 바로 이 출생의 한계로부터 파생된 내부개혁의 불철저성(군부세력과의 타협으로 출발한 문민정부나 그 정부와 유착한 재벌경제의 구태)이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의 타율적 강제를 불러들인 화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북관계에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변모를 가져온 2000년의 615공동선언이 증명하듯 ‘1987년’을 탄생시킨 시민적 역량은 그 발현을 가로막는 온갖 힘들의 건재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지속해왔다. 벌써 여러차례 지적된 바 있듯이 그렇지 않고서야 촛불문화의 등장 경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IMF관리체제 또한 87년체제가 드러내고 있던 자기실현의 방향과 본질적으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었다. 87년체제는 어차피 ‘자본주의 이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615공동선언 또한 획기적 사건이긴 하되 그 역시 87년체제의 하위 프로그램의 하나다. IMF외환위기보다 615공동선언이 더욱 중요한 사회적 계기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반도 남녘 사람의 일상생활에 직격탄을 날린 쪽은 전자이지만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더 결정적인 사건은 후자”3)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자가 개혁프로그램의 자기주도성과 역량의 결여를 드러낸 ‘사태’인 데 비해 후자가 그 내발성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증명해낸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전자가 87년체제의 음지라면 후자는 그 양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000년대 문학’에 변별적 개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계기가 IMF외환위기냐 615공동선언이냐를 선택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현상에 치우쳐 본질을 흐리는 일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더 나쁜 경우에는 평단의 이러한 논란 자체가 동시대 창작의 흐름을 일정하게 왜곡할 위험마저 떠안게 될지 모른다. 10년 단위로 탄생과 종언을 반복하는 ‘문학사’는 소재주의적 접근에 의해 상상된 것일 뿐 2000년대 이후 문학은 ‘1987년’ 이래의 90년대 문학과 연속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당분간은 ‘새 시대’를 성급히 선포하기보다 87년체제의 전후, 그리고 그 실현단계들을 좀더 큰 시야에 담아 분별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오히려 그 편이 동시대 문학의 실상에도 충실히 부합하는 길일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의 대표적 작가 박민규도 단편 「갑을고시원 체류기」(『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에서 이렇게 쓴다. “변화의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튼 1991년은—일용직 노무자들이나 유흥업소의 종업원들이 갓 고시원을 숙소로 쓰기 시작한 무렵이자, 그런 고시원에서 아직도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던 마지막 시기였다. 그러니까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도, 또 <고시원>으로서도 조금은 쑥스럽고 애매한 시기였던 셈이다.”(278면)4) 김연수(金衍洙)의 근작 장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자음과모음 2012)은 이에 대해 한층 의식적인 경우인데 주인공 카밀라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는 이 작품의 기본 플롯은 결국 카밀라가 태어난 해인 ‘1987년’의 원심력과 구심력을 탐사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박민규의 체험적 인식과 김연수의 관념적 접근 모두에 있어 ‘1987년’은 ‘1997년’에 선행한다.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테니 이제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로 돌아가 미뤄둔 질문을 던질 차례다. “빈곤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며 동시에 모든 가능한 것들의 종말”이라는 깨달음이 “문화적 소외”를 일으키는 소비미학 시대의 산물이고 한국사회에서 그 결정적 분기가 ‘1987년’이라고 할 때, 그것은 왜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의식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런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이 야기하는 좌절을 통해서만 의식에 개시된다.”(하이데거)1987년’이 스스로에 가한 좌절, 즉 빈곤이라 불리는 “모든 것의 석양” 말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발한 발상이나 차별화된 수식으로 완화 혹은 전환되지 않는 바로 그대로의 억압과 고통을 직시하는 방식으로 ‘문학의 정치’를 감행”5)하는 작가와 작품들이 출현하고 있다. 현실은 지금, 어떻게 귀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3. ‘현실의 귀환’ 너머의 것—『실수하는 인간』과 『나쁜 피』

 

빈곤이라는 현상이 물질적 결핍이나 신체적 고통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동시에 심리학적인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견해(바우만)에 가장 잘 부합하는 문학적 사례로 정소현(鄭昭峴)의 첫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문학과지성사 2012)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6) 이 소설집은 방향을 달리하는 두개의 충동이 상쟁하는 각축장이다. 그 한축은 은폐충동이고 다른 한축은 폭로를 목적으로 하는 사실충동이다. 그것은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나타난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수많은 이야기를 지어냈다.”(「폐쇄되는 도시」 120면) “기록을 시작한다.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잊혀질 테지만 기억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지금 이 시간을 기록한다.”(「빛나는 상처」 280면) 그런데 이 자기은폐/폭로의 복합심리가 일종의 죄의식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죄의식의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메커니즘을 밝히는 작업이 관건이다.

표제작 「실수하는 인간」에는 실수를 가장한 고의로 아버지를 살해한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쓴다. “그는 2년이 넘도록 같은 문장을 반복해 써내려갔다. ‘아버지를 죽였다. 실수였다. 아니다 실수가 아니었다. 아니다 실수였다……’ 문장을 쓰다 보면 자신이 저지른 일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문장으로만 존재하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48면) 죄의식의 진원지는 역시 “자신이 저지른 일”, 그러니까 부친살해다. 그런데 ‘실수하는 인간’들의 ‘실수’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제각각 부여돼 있어 작품 말미로 갈수록 이 죄의식은 무의식의 지층 아래로 잠적해버리고 만다. 「양장 제본서 전기」의 화자는 엄마를 버리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앉은 것처럼 편안”(38면)해졌다고 말하길 서슴지 않으며, 「너를 닮은 사람」의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밝히려드는 지인을 자동차 사고로 가장해 치어죽인 뒤 섬뜩하게 묻는다. “정말 이게 당신들 눈에 보이나요?”(113면) 이쯤 되면 「실수하는 인간」의 화자가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이 결말에 가서 밝혀진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들의 반사회적 실수담은 대개 그들이 버려진 존재(아이들)였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물론 모든 버림받은 존재들이 반사회적 일탈자가 되는 것은 아닐 테니 그 도식적 일면을 문제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버림받게 된 배경에 사회적 빈곤—소비미학 시대의 문화적 소외가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또 그로부터 유래한 병리현상을 잘 짜인 플롯에 담아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집은 일단 성공적이다. 해설자인 김형중(金亨中)도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예의 죄의식의 출처에 관해 중요한 실마리를 던진다.7) 그는 프로이트, 라깡, 지젝의 정신분석 이론에 기대어 정소현의 작품이 “전도된 형태의 가족로망스”(283면)임을 명석한 필치로 해명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가 말한다. “실수하는 인간들의 기원에는 실은 너무도 철저해서 실수라고는 모르는 초자아의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287면) 그에 따르면 작가에게 이 실수를 모르는 초자아는 마치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Psycho, 1960)에서처럼 모성이다. 그리고 이는 “IMF 이후의(실은 지젝이 말한 후기자본주의 시기 전체의) 점증하는 폭력과 광기의 분출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을 제공한다.”(297면) 과연 정소현의 소설에는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상징되는 모성적 초자아의 비난 때문에 죄의식에 사로잡혔다가 그들의 죽음에 의해 상징적 질서가 붕괴되고 나면 정신증 속으로 도피하는 인물들이 상당수다. 그러나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점증하는 폭력과 광기의 분출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을 듣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보다 더 명료하고 깊이있는 책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전도된 가족로망스’란 분리불안으로부터 심리적 보상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는 고귀한 신분의 친부모가 따로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일반적인 가족로망스를 뒤집은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항상 이미 유기된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만 출생의 비밀을 찾아 떠나는 자들처럼 보인다.”(283면) 이는 『실수하는 인간』의 수록작 여덟편에 두루 해당하고 있어 그것이 애초부터 작가의 의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 면에서 해설자의 분석은 작가나 작품의 무의식을 분석한 게 아니라 의도를 해명한 것에 가깝다. 만약 정신분석비평이라면 여기서 한번 더 물었을 것이다. ‘전도된 가족로망스’는 무엇을 억압하고 있는가.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한 「양장 제본서 전기」에는 정신증에 시달리던 엄마가 딸에게 버림받은 뒤 ‘집’으로 변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얼마 후 창문이 슬그머니 닫히더니 집이 조금씩 흐느끼듯 진동하는 것 같았다. 집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지만 나는 엄마가 이미 집이 되었으리라 짐작했다.”(36면) 아버지가 모자로 변하는 일8)도 있는 법이니 엄마가 집으로 변한들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은 없겠다. 그런데 엄마는 왜 흐느끼는가. 그것은 혹 버림받은 자의 슬픔이 아니라 버린 자의 죄의식이 아닐까.

엄마가 이야기꾼의 이미지를 덧입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단서다. “엄마는 밤이면 편지를 읽어주거나 아빠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들려주었다.”(30면) 「실수하는 인간」의 화자는 왜 글쓰기에 매달렸던 걸까. 작품집 뒤에 실린 「작가의 말」에도 “만성적인 불안”이나 “다정한 것들이 모두 내 곁에 있어줘 안심”이라는 작가 자신의 고백이 인상적으로 등장하거니와 이는 고질적 분리불안을 앓고 있는 ‘실수하는 인간’형이 실은 ‘소설가’의 페르소나임을 나타내는 증좌일 것이다. 아이를 유기하고 싶은 충동과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초자아의 명령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의 무의식이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을 낳고, 전도된 가족로망스라는 서사전략 뒤로 자신의 충동을 은폐하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도된 가족로망스’란 자녀를 유기하고 싶은 엄마의 충동을 은폐하기 위해 자녀 스스로 엄마를 삭제할 수밖에 없도록 꾸며낸 엄마—소설가의 서사다.

따라서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은 ‘모성적 초자아’의 비난에 상처받은 ‘아이들’의 그럴듯한 복수담에 그치지 않는다. 부도덕한 모성을 비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동정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엄마나 할머니로 등장하는 그녀들의 자학적 슬픔, 그 사회적 기원을 탐사하는 작업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작가는 아마도 이 소설집의 수록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일 「돌아오다」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은 할머니가 세상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준 구심점 같은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어느 밤 돌아온 가족들과 함께 먼 길을 떠난 그날까지 어떤 마음으로 집을 지켰는지, 수를 놓으며 무엇을 견뎌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도 이 집과 함께 늙어갈 것이다. 한없이 삐걱거리다가 언젠가는 부서질 것이다.(183면)

 

이 “할머니가 남겨준 오래된 집”(182면)은 그녀의 부유했던 출신계급과 성장기, 불운했던 가족사뿐 아니라 “30년 경력의 동양자수가로 (…) 순탄치 않은 삶을 극복한 훌륭한 어머니이자 살림꾼이면서 동시에 직업적으로도 성공한 슈퍼우먼”(151면)으로서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압축상징이다. 따라서 이 집의 몰락은 할머니의 삶이 대변하는 자수성가의 시대, 그러니까 앞에서 바우만을 인용해 말한 생산자사회—노동윤리 시대의 몰락이다. 그러고 보면 남편을 코리언드림의 상징이었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보낸 뒤 홀로 딸을 키워낸 「양장 제본서 전기」의 엄마나 전쟁을 겪고 고리대금업으로 가계를 일으킨 「지나간 미래」의 억척어멈도 하나같이 노동윤리에 입각한 자수성가와 고도성장시대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돌아오다」의 화자가 “나도 이 집과 함께 늙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노동윤리 시대의 마지막 계승자로 남을 것임을 천명하는 선언으로 우선 읽힌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과거에 대한 계승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부정에 가까운 무엇이다. 할머니의 죽음과 ‘집’의 쇠락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듯이 과거는 이미 소멸한 것이어서 계승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들은 소비미학 시대에 맞선 저항주체일까? 혹시 이 ‘실수하는 인간’들의 존재는 전락의 공포와 불안을 조장함으로써 거꾸로 소비미학 시대의 문화이념을 재생산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정소현 소설의 장처로 거론되곤 하는 ‘잘 짜인 플롯’은 양날의 칼이다. 그것은 현재의 파국에 충분한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미학적 완성도에 기여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의 그럴듯함을 ‘그럴 수밖에 없음’으로 하향평준화함으로써 이 ‘실수하는 인간’들의 현실을 가두어 길들이는 울타리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반전형식으로 패턴화한 정소현의 플롯은 소비미학의 집단서식지로 안성맞춤이 아닌가.

그런데 노동윤리 시대의 몰락과 가족의 해체를 마주보는 거울처럼 묘사하거나 이를 격대유전(할머니에서 손녀로)의 틀로 관찰함으로써 ‘현실의 귀환’을 유도하고 있는 작가는 정소현 혼자만이 아니다. “기발한 발상이나 차별화된 수식으로 완화 혹은 전환되지 않는 바로 그대로의 억압과 고통을 직시하는 방식”(황정아)으로 치자면 아마 김이설(金異設)만큼 잘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없을 것인데, 김영찬(金永贊)의 다음과 같은 발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특정 형식이나 기법 같은 모종의 미학적 필터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현실의 재현이 ‘문학적인 것’과 거리가 먼 낡은 수법(그럴 리 있겠는가!)이라 생각하는 오해가 그것인데, 김이설의 『환영』(자음과모음 2011)은 바로 이 오해의 지점을 단신으로 돌파해나간 중요한 성취다.”9)

한 노숙 소녀의 생태를 냉정한 필치로 그린 단편 「열세살」(2006)로 데뷔한 이래 그는 ‘신()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는 수사적 명명을 불러들일 만큼 우리 시대의 밑바닥 삶에 유난히 몰두하고 있는 작가다. 그의 장편 『나쁜 피』(민음사 2009)는 제목부터 가계유전에 관계되어 있거니와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시작한다. “죽었어? 나는 할머니의 옆구리를 툭, 찼다. 할머니가 꿈틀댔다. 왔냐. 할머니가 느리게 일어나 불을 켰다. 푸두둑, 바퀴벌레 두어마리가 어두운 구석으로 도망쳤다.”(9면) 이 짧은 문단 하나로 인물들의 성격과 관계, 배경을 압축 제시하는 작가의 기량은 사실 “미학적 필터의 가공을 거치지 않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판단을 무색케 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관심사가 대체로 미학보다는 현실에 기울어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 보인다.

그런데 정소현의 「돌아오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또한 할머니와 손녀를 등장시킬 뿐 엄마의 현실적 지위가 현저히 약화되어 있다. 전자의 엄마가 유령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간질을 앓는 정신지체자다. 정소현의 엄마나 할머니들이 이따금 모성적 초자아로 군림하며 히스테릭한 폭력을 일삼곤 하는 데 비해 『나쁜 피』의 할머니나 엄마는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 불행한 엄마는 자신의 친오빠에게 맞아 세상을 떠난다. 게다가 그녀의 살아생전은 죽음보다 더한 참상 그 자체였다. “할머니마저 고물상에서 작업을 했던 탓에 누구든지 예사로 들락거릴 수 있는 집이었다. 사내들은 내가 잠잠해져야 기어나왔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 그들의 면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웃 고물상 김씨, 박씨 아저씨들이 바지춤을 추스르며 나왔다. (…) 얼굴도 모르는 남자들도 심심치 않게 들락거렸다. 내 아비도 저런 놈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었다.”(47면) 무능한 남편 대신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환영』의 주인공은 그나마 나은 경우인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제목의 ‘나쁜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엄마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져야 할까. 이러한 설정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실에 눈감고 싶은 우리의 집합적 위선 때문일까? 폭력은 돌고 돈다. 엄마가 외삼촌에게 폭행을 당하면 화자는 그 외삼촌의 딸이자 자신의 외사촌인 수연에게 복수한다. 이 순환하는 폭력의 생태계가 어느 도시의 천변 어귀 고물상 밀집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것이 이 작품의 외연이다. 이 폭력의 정점에는 외삼촌이 있고, 패륜의 가족사와 윤리의 통제를 받지 않는 타락한 노동이 있다. 이곳의 이름은 “부흥 고물상”이다.

“외삼촌의 부흥 고물상은 천변을 낀 고물상 동네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22면) ‘부흥’이라는 간판명이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외삼촌 또한 고도성장기를 배경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정소현의 「돌아오다」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집과 동일한 의미의 장소다. 따라서 늙어가는 외삼촌이나 술로 세월을 보내는 할머니, 자살한 수연의 사연들은 생산자사회의 소멸을 고지하는 삽화이기도 하다. 이 직계유전의 실패는 단지 어느 한 가족사의 몰락을 의미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사회가 노동의 재생산을 위해 유포한 가족이데올로기 일반의 동요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천변 반대편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52면)이 펼쳐져 있어 천변 이쪽을 더욱 비루한 시대착오의 장소로 만든다. 천변 건너의 “알록달록한 불빛”(같은 면)은 천변 이쪽의 삶이 비참할수록 강한 유혹이 되어 인물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반대로 그 유혹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천변 이쪽의 삶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중심고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악순환의 회로가 표상하는 세계는 계층이동의 기회가 막힌 유사 신분제 사회에 가깝다. 이곳에서 나쁜 피는 나쁜 피로 성장하여 겨우, 나쁜 피를 낳는다.

 

못생기고 살집 많던 여고생은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가 되었다. (…) 그렇게 나이를 먹었는데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천변 둑에 서서 휘황찬란한 건너편을 바라보면 내가 저기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었다는 절망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밤 늦게까지,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일을 했다. 내가 할 줄 아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53면)

 

이 “뚱뚱하고 키 작은 노처녀”에게 저 “휘황찬란한 건너편”은 평균적 삶에 대한 가상의 기준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이나 그런 자신을 낳은 가족사는 분노와 자기모멸의 원인이 된다. 할 줄 아는 게 하루 종일 일하는 것밖에 없다는 고백은 언뜻 체념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사실 자학을 통한 적의의 표출에 가깝다. 그러므로 작품에 편재한 주인공의 위악은 실상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는 계층장벽을 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의식을 휘감고 있는 것은 정작 그 장벽에 도전하려는 욕망이나 성공에 대한 기대, 혹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엄마를 닮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하자면 전락의 공포다. 그는 상승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상유지를 위해서만 투쟁한다. 이는 『환영』의 주인공이 현실체험의 여정 끝에 ‘왕백숙집’으로 돌아가고 마는 결말과도 통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나쁜 피』의 엄마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져야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얼마간의 불편함을 낳을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 묻는다면 대답은 조금 달라질 것이다. 엄마의 삶에 대한 묘사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기보다 주인공의 현상유지 욕망(추락에 대한 공포와 짝을 이루는)을 ‘그럴 수밖에 없음’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작가의 작위, 과잉투사의 소산이 아닐까. 이 작품에 임리(淋)한 ‘현실주의’는 따라서 주관적이다. 천변 건너편을 막연한 동경의 대상으로 괄호 치는 순간 천변 이쪽의 살풍경조차 일정한 추상화를 면키 어려워지는데 이러한 이중의 추상화 뒤에 남는 것은 주인공의 불안으로부터 초래된 위악과 분노의 전경화 그 자체다. 김이설이 그리고 있는 ‘불행의 세계’가 어딘지 모르게 알레고리적인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나와 어린 조카, 그리고 조카의 의붓어미가 된 이웃의 친구 진순이 결말에서 만들어낸 대안가족도 새로운 파국의 음울한 전조처럼 보인다.

 

 

4. 따로 하는 이야기, 함께 부르는 노래—결론으로서의 『百의 그림자』

 

다시 배수아의 글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로 돌아가 마지막으로 두 문장만 빌려오기로 하자. “10대의 시절에 빈곤을 경험한 예민한 인간은 역작용으로 극도로 반정치적이고 몽환적인 인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262면) 그리고 “3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나는 스스로를 공부하였다.”(263면) 이들은 우선 작가 자신이 수행해온 내면편력의 여정을 압축한 문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문장의 주어를 황정은(黃貞殷)으로 바꾼다고 해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특히 그의 첫 장편이자 대표작이 되다시피 한 『백의 그림자』(2010)는 마치 현실의 중력으로부터 약간은 동떨어진 듯한 인물들이 차차 세계의 불행과 대면하면서 그 어두운 핵심에 다가서는 모험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주목할 만한 그의 단편 「上行(『문학과사회』 2012년 봄호) 또한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과 구성을 보이고 있다. 어느 외딴 시골마을에 다녀오는 중인 젊은 남녀의 짧은 여정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뜻밖에 어떤 한 ‘세계의 밤’이다. “톨게이트 불빛이 보일 때쯤이었다. 오늘밤에 월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오제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작품의 마지막 두 문장은 『백의 그림자』의 마지막 대목과 공명한다. “불빛의 조그만 언저리 바깥은 대부분 어둠에 잠겨서, 공중에 떠 있는 길을 둥실둥실 가는 듯했다. 귀신일까요, 우리는, 귀신일지도 모르죠, 이 밤에, 또다른 귀신을 만나고자 하는 귀신, 하고 말을 나누며 탁하게 번진 달의 밑을 걸었다.”(168면) 그들은 모두 ‘사람들이 사는 곳’을 향해 간다.

 

무재 씨.

걸어갈까요?

라고 말하자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나루터로.

……이렇게 어두운데 누굴 만날 줄 알고요.

만나면 좋죠. 그러려고 가는 거잖아요.

만나더라도 무재 씨, 그쪽도 놀라지 않을까요, 우리도 누구라서,라고 말하자 무재 씨가 고개를 기울이고 나를 바라보았다.

배가 없을 텐데요.

배가 없더라도 나루터 부근엔 사람들이 살잖아요.(167면)

 

높은 밀도로 정제된 그 문체가 이미 말해주고 있듯이 『백의 그림자』에는 죄의식에 지핀 정소현의 자학이나 계층장벽에 대한 김이설 식의 적의가 거의 소거되어 있다. 그것은 앞의 두 작가들처럼 사회적 빈곤의 문제와 대결하되 그로부터 파생하는 자학과 적의에는 거리를 두겠다는 태도로 읽힌다. 제목이 이미 ‘백()의 그림자’다. ‘’은 만인만상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그림자는 정소현, 김이설의 자기경멸과 분노를 포함한 개별적 고통들의 표지일 것이다. 그림자라는 이 탁월한 의장으로 그것을 외화・격리한 덕분에 우리는 고통의 표면에 호도되지 않은 채 그 근원에 직핍하는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지 않았다면 작가는 이 시적 함축들의 여백에 더 많은 고통의 표정을 그려넣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작품은 『실수하는 인간』이나 『나쁜 피』가 애써 이룩한 성취를 전혀 다른 경지로 호흡하면서 예의 ‘현실의 귀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부채로 몰락한 무재 일가의 내력(17~19면)이라든가 정신지체자로 등장하는 유곤의 트라우마적 회고 속에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과 ‘명령하는 어머니’(69면)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요정 호스티스 출신의 가출한 어머니를 둔 은교의 가족사(81면)가 펼쳐질 때 작가는 늘 그들 스스로 입을 열게 한다. 전달자의 개입을 막음으로써 그는 “‘불행의 평범화’에 맞서서 ‘불행의 단독성’을 지켜”10)낸다. 개별자들의 체험에 접근하는 작가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이 작품의 미학적 성취를 구성하는 핵심이 된다. 존중받지 못한 만인만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이 고도의 민주주의는 그것을 내면화하는 고통스런 절차 없인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황정은 소설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거론되곤 하는 시적인 대사에 대해 재론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지 압축적 형식미나 대안적 공동체론으로 곧장 비약하게 마련인 “윤리적 거리”(신형철)와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의 존립기반을 흔드는 불안, 앞에서 말한 고통의 표정들이 소거된 ‘현실의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소비미학 시대의 사회적 빈곤이 야기하는 관계 또는 유대의 (불)가능성과 맥락을 함께한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상대의 목소리를 반복해 확인하거나 그것이 진심인지 진짜인지를 반문하는 방식, 또는 딴청으로 전개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작품은 무재와 은교의 불안한 만남으로부터 시작해 만상의 고통을 편력하는 이행기를 지나 사랑의 유대에 이르는 축소판 오뒷세이아다. 무재는 무재의 이야기를 하고 은교는 은교의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노래는 함께 부른다. “노래할까요.”(169면)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이다. 만약 노래에서 시를 연상할 수 있다면 이 작품의 시적 문체라는 것도 내용화된 형식이자 형식화된 내용의 일부가 아닐까.

이 불안 또는 불안의 극복을 향한 서사적 여정은 어느 퇴락한 전자상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곳이 김이설의 천변 고물상 밀집지역이나 정소현의 “할머니가 남겨준 오래된 집”에 상응하는 노동윤리 시대의 황혼을 상징하는 장소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구를 파는 오래된 상점 ‘오무사’를 찾아가는 경로 묘사를 통해 작가는 이 전자상가의 시대가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 그 버려진 꿈의 잔해들을 마치 성소에 드는 수행자처럼 경건하게 섭수한다. “천구백칠십년대 이후로 손을 본 적이 없는 듯 낡고 어두컴컴한”(102면) 이곳으로 무재와 은교가 구불구불 복잡한 골목을 거슬러들어가는 과정은 우리 시대의 현실, 그 그림자의 시대를 산출한 기원의 탐사 절차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걸까? “노래”에 답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빈곤과 불안의 시간대를 대체하는 대안공동체를 제시하거나, 현실의 폭력성을 히스테리와 분노와 적의로 ‘가공의 필터’ 없이 극화함으로써 이 불행한 세계를 증언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이 세계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명령하지 않는다. 단지 말을 걸고 노래를 청한다.

그러나 침묵하는 만상의 현실 위로 하강하는 이 노래를 듣기 위해 우리는 당분간 더 많은 고통의 절차들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와 있는 미래’라 하더라도 그것을 널리 퍼뜨리는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 아닌가. 이 절묘한 민주주의의 공감주술에 응하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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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빈곤의 문제는 물질적 결핍에 국한되지 않는다. 『희랍어 시간』의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고독과 불안도, 따지고 보면 실존의 위기를 더 높은 차원에서 지양시켜줄 만한 생산공동체의 이상이 실종되어버린 데 따른, 개별자들의 ‘문화적 결핍’에서 비롯된다.

2) 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 이수영 옮김, 천지인 2010, 75~76면 참조. 이 책의 원제는 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로 1998년에 초판이, 2005년에 개정판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0년에 번역 소개되었다. 그러나 배수아와 바우만의 공통점은 배수아가 바우만을 참조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각자의 현실체험이 유사한 데서 빚어진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이 체험의 유사성이 더욱 암시적이다.

3) 한기욱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비 2011, 105면. 물론 문학사 차원에서 6・15시대문학론은 “시대론과 문학론의 차이”에 대한 자기점검 과정에서 저자 스스로 잠정 유보한 바 있다. 같은 책 24~25면.

4) 물론 이 작품은 ‘1987년’이 아니라 ‘1991년’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1991년’은 시기적으로도 ‘1997년’보다 ‘1987년’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1987년’의 후속절차에 가깝다. 한편 그의 데뷔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출판사 2003)이나 근작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는 ‘1987년’의 가까운 전사(前史)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애매한 시기”라는 표현에 주목해볼 것.

5) 황정아 「‘이미 와 있는 미래’의 소설적 주체들」, 『창작과비평』 2012년 겨울호 17면.

6) 이 절에서 정소현의 작품에 대한 견해는 졸고 「정신분석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기획회의』 2013년 342호)을 기초로 보완, 확장한 것임을 밝혀둔다.

7) 김형중 「실수하는 사회, 실수하지 않는 인간」, 정소현 『실수하는 인간』 해설.

8) 황정은 「모자」,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문학동네 2008.

9) 김영찬 「공감과 연대—21세기, 소설의 운명」, 『창작과비평』 2011년 겨울호 307면 주석 참조. 그러나 장편 『환영』은 그보다 앞서 발표된 단편들이나 첫 장편 『나쁜 피』의 세계를 극복함으로써 전에 없던 면모를 보인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10) 신형철 「『의 그림자』에 부치는 다섯개의 주석」, 황정은 『의 그림자』 해설 17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