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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자본주의 생태계에서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살아가기
김소연 金素延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등이 있음.
함민복 咸敏復
1962년 충북 충주 출생.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우울氏의 一日』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등이 있음.
누군가는 그가 남긴 업적이 부각되면서 뒤따라 그의 삶이 조명되고, 누군가는 그의 삶이 부각되면서 뒤이어 그가 남긴 업적이 조명된다. 그렇게 한 시대의 한 인물이 우리에게 온다. 업적과 삶이 한통속일 때는 순결한 영혼을 보는 듯 경외감이 들지만, 서로 아주 많이 달라도 이상한 수수께끼가 끼어드니 묘한 경외감을 또한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좀 특별한 경우가 있다. 그의 삶이 그의 업적을 견인해 삶과 업적이 동시에 부각되는 사람. 그런 삶은 삶 자체가 업적이고 경이다. 모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애가 타도록 가파른 삶. 진짜 몇 안되는 영웅들이 그런 삶을 산다. 결의와 도전으로 똘똘 뭉친 듯한 그 단단함을 우리는 존경해오곤 했다. 그런데 어떤 당위도 명분도 내세우지 않은 채로 무던하게 그렇게 사는 이들이 아주 드물게 있다. 그들은 도무지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말한다. 자신이 어떤 귀감이 되고 있는지를 전해주어봤자 손사래나 친다.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살아왔다고만 말한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서는 시인 함민복 이야기가 이런 손사래를 치는 삶이지 싶다. 자연스럽게, 삶이 시를 견인하며 살아온. 자연스럽게 그리되기. 자연스럽게 살아가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죽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함민복은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게다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모두가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그 가난 속에서. 나는 함민복에게 씌워진 ‘가난’이라는 대명사에 대해 오래 생각하다 이렇게 표현하기로 결정했다. 가난을 노래하며 견딘 시인이 아니라, 가난을 지켜낸 시인. 자본주의의 산업화된 살풍경과 한때는 치열하게 싸웠고 그 통속성에 대해 통쾌한 위트를 제시했던, 절반은 모더니스트였던 시인 함민복은 일찍이 가난에 대해 당당했고 지금껏 가난을 지켜내고 있다. 그런데 그 지켜냄은 도무지 억지스러움이 없고 자연스럽기만 하다. 그 자연스러움이 특히나 함민복을 자본주의의 생태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인이 되게 한 것 같다. 그가 살았던 곳이 어떤 곳이기에 그의 시가 점점 더 무공해・무가공의 절창들로 이어져갔을까. 나는 멸종 위기에 놓인 고귀한 생명체를 마주한 양, 그가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생태계에 대해 정리해보기로 했다.
바다가 보이는 그 집, 빈 농가
김소연 함민복의 시를 읽고 자란 후배 시인이나 독자 들은 ‘강화도와 함민복’에 대해 제일 궁금해해요. 강화도에서 어떻게 살고 있길래 이런 시가 가능했는가 하는 감동이 호기심으로 옮겨간 것 같아요. 저는 ‘시인 함민복’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빈 농가’에 대한 에피소드입니다. 예전 문예진흥기금 신청양식에 재산의 정도를 낱낱이 적도록 되어 있던 시절에, 주거형태를 ‘빈 농가’라고 적어 신청서를 내셨다고 들었어요. 강화도의 빈 농가를 찾아가게 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어요.
함민복 1994년 버팀목이라는 출판사에 일하던 때였어요. 아는 사람이 장편소설을 출간하기로 했고 발문을 꼭 써달라 부탁하더군요. 발문을 맡고 보니 그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했어요. 어떤 ‘민족적 차원’의 일이라 설명하면서 강화도 마니산에 한밤중에 올라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글 쓴 사람의 행로를 쫓아가, 글의 태동장소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때 강화도를 처음 가봤어요. 새벽 2시에 마니산에 올라갔어요. 오가는 사람 하나 없고 무섭더라고요. 새벽의 강화 풍경을 그때 처음 맛봤지요. 그후 2년이 지나고, 시 쓰는 친구 김완수와 금호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조태일(趙泰一) 선생한테 공부를 더 배우기 위해 광주로 간다고 했어요. 그 친구한테 얹혀서 오래 살았는데 갈 데가 없어졌어요. 그때 떠오른 게 강화도에서 봤던 풍경들이었어요. 강화에 방을 구해보자 싶어 마니산에서 내려다보았던 바닷가로 가 동막리 쪽에 있는 빈 농가를 찾았습니다. 한 아저씨가 풀을 베고 있길래 빈집이 있는가 물었더니 동네에 한채가 있다면서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군요. 그냥 공부한다고 말했어요. 강화도가 고향인 친구 하나가 있긴 한데 어디인지는 모른다고 했더니 이름을 대보래요, 해서 댔더니 내 조카인데 어떻게 아느냐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동창이고 발전소 같이 다녔다고 했더니, 걔도 발전소 다니면서 늦게 공부하던데 자네도 공부하는 거 맞구만, 그러더니 본인 집에 들어가 여기저기 전화를 건 끝에 집을 얻어주셨어요. 그게 96년의 일입니다.
김소연 빈집이라면 버려진 집이었나요? 폐가?
함민복 9월 5일에 이사를 했어요. 그날이 우연히도 제 생일이어서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늦여름이었죠. 텃밭이나 마당에 명아줏대가 사람 키 정도로 우거져 있어서, 풀을 뽑아 길을 내며 들어갔어요. 집 빈 지가 2년 됐다고 하더라고요. 집 뒤에 큰 느티나무가 있어서 안마당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어요. ㄱ자 집인데 시멘트 블록 담장이 쳐 있고 양철 대문이 있었으니까 작지만 안마당도 있던 셈이죠. 그 집에서 13년 살았어요.
김소연 그 집에서 첫 시집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을 쓰신 거네요. 어부 비슷한 생활도 그 집에서 시작하셨겠고요.
함민복 거기서 2년 정도 지내고서부터 동네 친구들과도 친해져 고기 잡는 데 쫓아다녔어요. 한 10년 쫓아다니며 배를 탔죠. 겨울에는 김 따고 봄에는 숭어 그물 매서 숭어를 잡았고 병어로 넘어갔다가 여름부턴 참새우를 잡았죠. 가을엔 낙지를 잡았고요. 다음엔 김발 설치하고, 그렇게 한해 한해를 보내죠. 강화 뱃사람의 가장 큰 수입원이 젓새우 잡는 거예요. 우리나라 새우젓의 80퍼센트가 강화에서 나요. 새우젓 배도 잠깐 타봤는데 새우젓 배는 위험해요. 사고도 잦고. 꽁당배라고 고물(배의 뒷쪽)에 50미터도 넘는 긴 그물을 달아요. 배가 물때에 따라서 돌아치니까 그물이 엉키기도 하고요. 물 힘을 많이 받기 때문에 500킬로그램에서 1톤짜리 닻을 조그만 배에 매달아요. 그걸 롤러로 감아올릴 때 배가 빠개지는 소리가 나요. 겁이 나죠. 밤이면 술에 취해 가수면 상태로 눈을 붙이는데, 물이 철렁거리기도 하고 배가 떠내려가는 것 같기도 하여 늘 잠이 얕지요. 그래도 바닷물에 출렁이는 달빛은 아름다웠어요.
김소연 지금은 집을 옮기셨지요?
함민복 DJ정권 들어서면서 북한과의 화해 무드가 조성되자 강화도 땅값이 오르고 서울, 인천 등지에서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정착했어요. 관광객도 늘어나면서 펜션이 즐비하게 들어섰고요. 제가 살던 집도 주인이 바뀌고 조금 지나자 펜션을 짓는다고 하더군요. 그 바닷가 주위의 빈집은 다 펜션 터로 팔려나가 더이상 구할 집이 없어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이웃 길상면 면소재지로 이사를 갔죠. 쌘드위치 패널로 칸을 몇개 나눠놓은 집이었어요. 거기서 1년 반 정도 살다가 지금 사는 감목관이란 동네로 왔어요. 같은 길상면인데, 버스에서 내려 십오분 정도 걸어들어가요. 실록 세종대왕 편에 의하면 길상농장이라고 말을 1400두까지 기르던 곳이래요. 농장을 확대하고 ‘제주도 말을 다 끌어올려라’라고 했다는. 그런데 겨울에 새끼를 낳으면 너무 많이 얼어죽어서 제주도 말을 다 끌어올리지는 못했다는 기록을 봤어요. 말 관리직인 감목관이 있던 곳이겠죠. 가끔 말들이 울며 떼로 내달리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보죠. 그러면 글이 내게 노도처럼 힘차게 와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들기도 하고요.
자본주의 바깥으로 밀려난 자
김소연 시는 언제 처음 접하셨나요. 고등학교 때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함민복 개포동에 있는 공고에 다닐 때였어요.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살았어요. 1학년 여름방학 때 돈이 3000원 있어서 청계천에서 『현대문학』 등등 문예지 서른권을 사서 고향에 가 읽었는데, 학교친구 이름이 지면에 나오는 거예요. 물어봤더니 자기가 맞다고, 자기가 중학교 때 보던 문학지에 희곡을 응모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주 조숙한 친구였어요. 그 친구와 어울려 다니면서 소설을 쓰고 싶어졌어요. 그 친구는 워낙 책을 많이 읽었고 머리도 비상해서 저는 늘 열등의식에 사로잡혔죠. 이틀이면 단편 하나를 쓰고 나타나 저를 주눅 들게 했죠. 셰익스피어 원전을 읽는다고 셰익스피어 사전을 구해서 보더라고요. 고어(古語)를 알아야겠다며 라틴어 공부도 하고요. 당시 개포동은 개발되지 않아 우리 학교만 섬처럼 있어 외로웠어요. 게다가 한달에 한두번만 외출 외박이 허락되는 학교여서 갇혀 지내다시피 했어요. 할 수 없이 책 읽는 게 낙이 된 셈이죠.
김소연 그때부터 작가 지망생으로 사신 건가요.
함민복 그랬죠. 매년 11월 8일쯤 되면 신춘문예 공고가 나오니까 신문을 사러 몰래 담을 타넘어 무단외출을 했어요. 은마아파트 지나 진명여고 앞까지 가 신문을 샀어요. 문청 시절에 겪는 통과의례적 극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희 학교를 졸업하면 전원이 한국전력에 취직하게 되는데, 저희 과는 모두 발전직군이라 발전소로 가게 되어 있었어요. 저와 글공부를 같이하던 친구는 서로 떨어지기 싫어 제1지망 지원자가 거의 없는 경북 월성원자력을 택했어요. 발령을 받은 후 월부로, 그 당시만 해도 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 책들을 많이 사 월급이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나름 열심이었죠. 그즈음 동기 채상근 시인과 그의 고향 친구 최계선 시인을 만나 더 불이 붙기도 했었지요.
김소연 발전소 생활이 무척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첫 시집 제목이 『우울氏의 一日』(세계사 1990)이어선지 우울증을 앓으셨다는 얘기도 있고요.
함민복 우울증은 나중이고요, 발전소에서는 신경쇠약에 걸렸어요. 발전소에 출근하면 답답했어요. 저는 운전원이었어요. 컨트롤 룸에서 “현장에 누구씨, 몇번 밸브 오픈 하세요”라고 페이징 콜을 하면 가서 하는 거죠. 일이 단순하고 지겨웠어요. 노이로제 비슷하게 직장만 가면 머리가 아프고 먹먹했어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스러웠죠. 4년 남짓 그렇게 살았는데 더이상은 다니기 싫었어요. 직장을 접고 고향에 가서 방위 생활을 했어요. 공부를 해보고 싶었죠. 그런데 고향집에 와서 보니 사정이 안 좋더라고요. 퇴직금으로 집안 빚을 갚고 나니 돈이 없었어요. 그때가 경제적으로 제일 힘든 시절이었어요. 공부를 더 하자는 게 무모한 결심은 아닌지, 집안을 도왔어야 했는데 하며 갈등도 많이 했어요. 부모님은 내가 조금씩 보태주는 돈으로도 살 만하다 하셨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 빚이 많았어요.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셔 낙망하고 있을 때, 발전소에서 시공부를 같이하던 친구 채상근이 최승호(崔勝鎬)의 시집을 보내줬어요. 그 책 『대설주의보』(민음사 1983)에 실린 「인식의 힘」을 보고 용기를 얻었지요. 시가 이렇게 힘이 될 수도 있구나 하고 느꼈고요.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니체//도마뱀의 짧은 다리가/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이렇게 힘든 상황도 시간이 지나면 글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으며 열심히 했는데 잘 안되고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어머니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 서울예대에 들어갔어요. 제가 87학번이에요. 상계동 산꼭대기 전세방 50만원짜리에 살았어요. 그때 등록금이 40만원대였죠. 원하던 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열심히 공부하자는 생각에 처음엔 도서관에 가 책만 읽었어요. 그렇게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명동으로 통학을 하다 상계동 철거민 농성을 접했어요. 학교는 지각할 판인데 그 사람들이 시청으로 가자면서, 지하철을 막고 출발시키지 않으면서 동료들을 기다리는 거예요. 뉴스를 보면서 철거민들의 억울함을 들어오기도 했고요.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혼자 명동성당에도 가보던 시절이었어요. 학생운동 하던 선배를 만나고서부터 도서관보다 집회현장에서 더 많이 지내게 됐어요. 집회 다녀와서 저녁때 술 마시고 남산 무명용사비 근처에서 노숙도 많이 했어요. 그때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기 중에는 이진명(李珍明) 시인, 이정은〔이원(李源)〕 시인이 있었어요. 그들은 점잖은 쪽이었고, 저는 꼬마 대장처럼 나이 어린 남자 동기들과 몰려다녔어요. 돈이 없었지만, 한국전력에 다니는 친구들이 도처에 있으니까 ‘전화위복’이라면서 전화로 친구들 불러내서 술값을 해결하고 그랬네요.
김소연 공짜로 주는 단무지를 ‘파인애플’이라 부르면서 후배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고 들었어요.(웃음) 입학하시고 그 이듬해에 데뷔하셨죠?
함민복 『세계의 문학』 1988년 가을호에 시를 처음 발표했어요. 『실천문학』으로 데뷔하고 싶어 2학년 1학기 때 ‘함성’이라는 필명으로 투고하고 기다릴 때였어요. 시간도 있고 해서 짧은 시들을 백여편 몰아 써 민음사에 보냈는데 연락이 왔지요.
재개발 직전의 동네에서 시 쓰기
김소연 그후 ‘21세기 전망’으로 활동하셨죠?
함민복 홍능시장 안 창고에 딸린 작은 방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 때니까, 첫 시집 나오기 전 88, 89년이었어요. 발전소 다닐 때 같이 동인을 했던 최계선이 세계사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일거리를 줬어요. 출근해서 윤문하는 일을 했죠. 허수경(許秀卿)시인하고 유하 시인이 세계사에 놀러 왔더라고요. 그날 술자리에서, 유하가 작품을 보여달라고 하더라고요. 후에 진이정 선배하고 같이 동인을 하자면서 청량리로 찾아왔어요. 허수경・차창룡(車昌龍)・윤제림(尹堤林)・함성호(咸成浩)・이선영(李宣姈)・김중식(金重植) 이렇게 같이 활동을 했죠. 그러면서 신도시로 개발되기 전의 일산 마두리로 이사 가서 살면서 첫 시집을 냈고, 둘째 시집은 문산에서 살 때 냈고요.
김소연 그때 마두리는 전형적인 농촌이었지요?
함민복 그래서 글 쓰는 친구들이 많이 모여 살았어요. 시나리오 쓰는 친구, 드라마 쓰는 친구, 소설 쓰는 친구. 그때는 서울에 거의 안 나갔죠. 그 친구들과 서울 근교로 막일을 다니며 생활을 해결했고요. 여러명이 공동으로 밥을 해먹으며 자취를 했죠. 반찬은 초근목피였지만 꿈은 진수성찬이라 즐거운 고난의 시기였죠.
김소연 그땐 특히나 도시 공간에서 비롯된 시편들이 많으셨죠?
함민복 그렇죠. 옛날 기억들, 고향이나 상계동 시절, 청량리 시절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죠. 『자본주의의 약속』(세계사 1993)은 일산의 옛 마을들이 다 철거될 때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김소연 항상 재개발 직전의 동네를 옮겨다니며 사셨어요.
함민복 철거 직전 동네가 집값은 싸고 자연환경은 괜찮으니까요.
김소연 재개발 반대와 강제철거에 토착민들이 투쟁을 하던 곳이었을 텐데.
함민복 개발이 들어오면 ‘딱지’ 같은 게 있잖아요. 저는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아예 주소지를 옮기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세입자 농성에 나가보기도 했어요. 남자들은 하루 끼니 때문에 다 일을 나갔다고, 모인 할머니 아줌마들이 말하더군요. 서울에서 집회 경험이 많은 우리가 머리띠 두르고 전경들과 맞서 버티고 서면, 든든하다고 할머니와 아줌마 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 기억이 나네요.
김소연 마두리 생활을 접으시고는요?
함민복 문산 가서도 1년 반 정도 김완수 시인과 살았죠. 문산에서 쓴 시와 일산 살 때 쓴 시를 합쳐서 『자본주의의 약속』을 냈고,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 1996)는 주로 금호동에서 썼죠. 강화도로 거처를 옮긴 9월에 나온 시집이라 후기에 “강화에 와서 시집을 묶는다”라 썼지요. 강화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적었고요.
김소연 금호동 풍경은 어땠나요?
함민복 개발이 안된 상태였죠. 그때는 산동네였고 아파트 하나 없었어요. 아파트는 강 건너 압구정동에만 있었지요. 동네 뒷산 개나리봉에 올라 강 건너 훤히 보이는 아파트촌을 바라다보며 겸재가 그린 금호동 풍경을 떠올려보기도 했었지요. 장마가 져서 흙탕물이 흐를 때면 강남과 강북이 물로 나뉜 게 아니라 흙으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져요. 둘 사이의 거리도 가깝게 다가왔고요. 봄에 뒷산 정자에 올라갔는데 유치원생들이 압구정동 아파트를 그리고 있어요. “야, 뒤로 돌아보고 너희 사는 동네를 그려야지, 강 건너 남의 아파트를 왜 그리냐” 했더니, 아이들이 “아녜요, 우리 저기 사는데 우리 동네 그리려고 넘어온 거예요” 해서 무안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김소연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이 문장, 대표작 「꽃」에 들어 있는 시구지요? 이 시구는 무릎을 탁 치게 해요. 아주 소박하지만 정말 위대한 발견이 담겨 있어 사람들이 몹시 좋아합니다. 발견으로써 저절로 얻은 구절일 텐데요.
함민복 금호동 살 때 골목을 오가며 보면 담장 위에 꽃을 많이 기르더라고요. 공간이 없어서 그런지 시멘트 대문 위 같은 곳에도 그렇고. 꽃이 공중에서 피어나는구나, 그것도 경계에 이렇게 피어 있구나 하고, 물리적 경계에서 피는 꽃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죠.
강화 사람-되기
김소연 금호동 시절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돌고 돌아 제자리로 왔네요. 선배님의 50년 이야기는 대략 정리가 됐고요. 지금 사시는 그 집은 결혼해서 함께 사시기 위해 얻으셨죠?
함민복 네. 옛날 집이에요. 일자로 생긴 집인데, 슬레이트 지붕에 양철을 한 겹 더 올렸어요. 집주인이 농가를 사서 좀 고친 거예요. 텃밭이 있었다는데 잔디를 심어놨어요. 텃밭이 더 좋은데. 외벽에는 흙을 칠했어요. 집을 보수하며 마당을 돋워서, 지붕이 너무 낮아 보여 언뜻 보면 흙으로 지어놓은 창고 같아요.
김소연 부인께서 경영하신다는 인삼가게는요?
함민복 가게까지는 걸어서 한시간, 차로는 6분 정도 걸려요. 장사가 잘될 때는 저도 매일 나가는데 요새는 주말이나 아는 사람이 온다는 연락이 있을 때만 나갑니다. 집에서 글을 쓰든가, 옛날 살던 바닷가 동네 가서 뱃사람들이 뭘 잡나도 보고, 농사일하는 사람들도 조금 거들어주다 집에 들어오는 게 일과입니다.
김소연 동네 사람들이 선배님이 시인인 건 이제 다 알겠네요.
함민복 지금은 그렇게 됐죠. 강화도를 소개하는 방송에 한두번 나왔거든요. 문학 프로그램에도 출연은 했었지만 그건 시골 사람들이 잘 안 보잖아요?(웃음) 그렇지만 강화도를 소개하는 프로가 나오면 채널을 급히 고정하죠. 다른 사람에게 보라고 전화도 걸고요. 어? 저 사람이 강화도 길 걷는 것 좋아한다고 TV에 나왔던 길상면 사람 아냐? 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김소연 외지 사람들에 대해 배타적인 동네일 텐데요.
함민복 섬이라는 특징도 있고, 섬 중에서도 강화도는 전쟁을 많이 치러낸 곳이니까. 강화의 씨티슬로건이 ‘비타민 강화’인데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서운했던 마음을 담아 농으로 ‘배타민(排他民) 강화’냐,고까지 해요. 좀 특이한 게 있어요. 왜 집집마다 밭에 수수를 다 기르는지 그게 신기했어요. 우리 고장에서는 한 집이 수수를 기르면 다른 집은 조를 길러서 서로 바꿔가며 살았었는데. 곡식을 조금씩이라도 구색을 갖춰 자기 밭에 심는 거죠. 섬사람들의 특징이 이런 데 있나 싶었어요. 자기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 자기 세계가 견고한 거죠. 외지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도 않고. 그렇지만 마음을 열면 아주 친절해요.
김소연 새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에 강화 이웃들이 등장합니다. 「흥왕리 방앗간」의 ‘설희씨네’, 「흔들린다」의 ‘익선이 형’. 오랜 세월 옆에서 같이 겪지 않았으면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어요.
함민복 방앗간에 저보다 나이 어린 친구가 있어서 저녁에 자주 놀러 갔어요. 방앗간집 사람들은 기침을 자주 하죠. 음료를 자주 마시고요. 마실 장소로는 좋은 곳이죠. 그런데 시골도 이제 모든 것이 대형화되고 있어요. 벼를 찧는 방앗간도 예외에는 아니어서, 농협에서 운영하는 방앗간으로 거의 일원화되었지요. 콤바인으로 벼를 추수하는 날, 논까지 큰 차를 지원해 방앗간으로 벼 낟알을 직접 싣고 가는 써비스도 제공하잖아요. 그러니 영세한 개인 방앗간이 밀릴 수밖에 없죠. 기계 끄고 문 닫을 수밖에요. 방앗간 설희씨 얘기는 그런 거고, 익선이 형님은 옛날 사람, 특히 바닷가 사람 이야기를 많이 해줍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를 타서 바닷가 사람들의 풍속 얘기를 많이 알고 있어요. 이번 시집에도 이 형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네군데 정도 있습니다. 흔들린다는 이야기(「흔들린다」), 조개껍데기로 나비를 잡아서 귀로 듣는다는 이야기(「파씨 두서너알」), 절 보수 때 나온 나무를 마당에서 태우는 이야기(「합장의 힘」) 등. 이웃은 내가 사는 공간의 확장이고 그곳에 사는 이웃 사람은 나의 확장이죠. 그러니까 이웃 사람은 나의 일부이이기도 한 셈이죠. 자연히 시에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나봐요.
물질성의 시편들
김소연 줄자, 수평기, 직각자, 나침반, 앉은뱅이저울…… 2부 시의 목차들에 시선이 가는데요.
함민복 이전 시집을 내고 8년이 흐르는 동안 이번 시집은 뭘 중심으로 써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여러번 바뀌었어요. 근래에는 도량형기에 관심이 갔어요. 이런 도구만 가지고 시집을 한권 써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사는 세계는 자본주의의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고 하죠. 자본주의사회의 극점을 향한 벡터가 극대화되어 있는 상황인데, 이 움직임의 주체는 너무 크고 견고한 덩어리죠. 추진력에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고 있고요. 그래서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 이것들에게 방향성을 제공하고 있는 상징물은 무엇인가, 이 거대하고 탄탄한 자본주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어요. 우리에게, 교환과 축척을 가능하게 하는, 단위를 선사하는 도량형기, 방향성의 화살표,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상징광고물 등이 자본주의의 굄돌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것들을 개별적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인간과의 관계성을 설정해보고 싶었어요. 세계를 일관되게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화살표나 도량형을 인간의 삶과 연결해보면서, 제 나름대로 물질화되어가고 있는 세계를, 소우주론적 접근을 통해 짚어보자는 의도지요. 이런 작업이 거대한 흐름에 별 영향은 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잠깐만이라도 걸음을 멈춰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소박한 바람에서 출발한 거죠. 많이 쓰진 못했고요, 앞으로 작업을 더 해볼 생각입니다.
김소연 혹시 다음 시집은 이런 것들을 주제로 만들어질 확률이 높나요?
함민복 그렇죠. 제 개인적 삶을 배제한 채 어떤 구체적 사물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마음들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비(非)시적 외피에 찔러넣는 상상력
김소연 선배님 시를 한꺼번에 통독해보니, 초기에는 주로 자본주의를 통렬하게 비꼬는 씨니컬한 상상력으로 시를 쓰셨는데, 대략 『말랑말랑한 힘』(문학세계사 2005) 정도부터 서정적인 발견의 시가 주가 되었어요. 도시 공간, 즉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아래 쓰인 시가 많이 줄기 시작했고요. 두 종류의 시편이 따로따로 시집에 낯설게 공존하고 있어요. 물론 이문재(李文宰) 시인이 뒷표지에서 지적했듯 서정시편이든 문명비판 시편이든 간에 함민복 시의 중핵은 ‘아이러니’에 있고요. 저는 이번 시집에서 재미난 발견을 했습니다. 서정적 시편들에선 오직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겸손하게 받아적듯 담백함으로 시를 쓰신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야기를 다룬 「이가탄」, 지하철의 삽화를 그린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장애인 전용주차장을 통찰한 「외바퀴 휠체어」나 「영구차를 타고 가며」 「농약상회에서」 등 자본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생겨난 시적 정황에서는 위트있는 상상력 혹은 전복적인 상상력이 불쑥 들어와요. 그 상상력으로 촌철살인을 하시던데요. 저는 언제나 도시 공간에 있는 시인으로서의 선배님을 만나와서인지, 제 이미지 속의 함민복은 그런 재치와 위트로 똘똘 뭉친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이거든요. 물론 두가지 모습 모두 함민복의 모습이겠지만, 왜 유독 상상력이 자본주의의 속성 아래에서 발휘되는지 그게 수수께끼 같아요.
함민복 담겨봄과 담아봄이라 할까요. 자연이나 제가 살고 있는 공간에는 제가 늘 담겨 살고 있잖아요. 저보다 더 크고 깊은 틀이라서 감히 제 생각을 개입시킬 엄두를 못 내나봐요. 또 개입해봤자 그 자체가 이미 내포하고 축적한 서정성을 넘어서기 힘드니까요. 지적하신 것처럼 지하철 같은 인공적인 공간, 도시화된 공간에서는 제가 그것들을 내 속에 담아보며, 감각을 투사해 나름대로 읽어보는 것이죠. 좀 교만한가요.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그것들을 제도하고 평가하려는 자세가. 꼭 그렇지는 않겠죠. 어쩜 그것도 사랑의 한 방법일 테니까요. ‘사물을 보는 것이 자신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저 자신을 풍자하고 비판해보는 것도 될 테니까요. 이런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어요.
김소연 의미가 있고말고요.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가는 듯한데. 「농약상회에서」의 경우도 유전자 조작을 해서라도 식량을 대량 공급하겠다는 이 자본주의의 시대상에 “슈퍼 옥수수/슈퍼 콩/슈퍼 소//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차라리/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라 하셨지요. 그러면 “겸손해질 수 있겠지”라면서요. 상상력이 어찌나 능청스럽고 사랑스러운지 혼자 읽다 한참을 웃었네요. 인류애적인 시각 안에서 나온 발상이라서, 전복적인 시선이 따뜻하고 반성적이었어요.
함민복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도덕성 같아요. 장애인 전용주차장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았어요. 조금 넓게 그리고 주차하기 제일 편한 곳에 장애인 주차장을 배려했다는 도덕성의 두터운 외피 때문에 더이상 생각의 진척이 없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한 종교시설에서 보았는데 거기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장애인 통로가 따로 없더라고요. 아예 계단을 없애, 발상을 크게 전환해 모든 사람이 같이 한 길을 오르게 되어 있더군요. 아무튼 제가 장사하는 상가 앞에 커다란 주차장이 있어요. 매일 바닥에 그려진 장애인 전용주차장과 그 안에 그려진 상징마크를 보죠. 하루에도 수없이 보면서 그것에 대해 글을 안 쓰고 있다는 채무감이 들더라고요. 왜 저것에 대해선 글이 안 써지는가를 생각해보았죠. 뭔가 약자를 위해 베풀고 있다는, 그러면 되었다는 생각에 갇혀 안 써지는 것은 아닌가 싶더라고요. 매일 평면으로 텅 빈 바닥만 봐왔는데, 여기에 장애인 차가 외바퀴 휠체어 타고 있는 상징마크를 치며, 주차하는 것을 의식하고 입체적으로 바라본 적은 있는가 하는 반성을 던지자 시가 한편 써지더라고요. 문명이 우리에게 베풀어주고 있는 것들에게는 분명 틈이 있죠. 상상력으로 그것을 극복 개선할 수 있는 틈 말이에요.
마음경제
김소연 시집 맨 앞에 「명함」이라는 시가 있어서 한번 여쭙고 싶어요. ‘강화 시인’ ‘가난의 시인’이라 불리고 계시지만, 함민복의 진짜 명함은 뭘까요?
함민복 글쎄, 명함에도 ‘함’자가 들어가네.(웃음) 함민복의 명함은, 그래도 제 시가 제 삶을 조금이라도 그려놓고 있다면 제 어설픈 명함일 수 있겠네요. 그 시를 쓰면서 명함에 대해 이런저런 메타포를 떠올려보았어요. 그중 하나가 ‘삶은 죽음의 명함이다’였어요. 시상이 너무 커서 배제했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죽음의 명함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 표제작인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에서처럼 “뜨겁고 깊고/단호하게/순간순간을 사랑하며/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바로 실천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무엇을 실천하지 않고 살 때예요. 실천하고 사는 사람들은 죽음을 의연하게 맞잖아요.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면 죽음의 명함인 이 삶이 더 평화로워지고 아름다워지겠죠. 어쨌든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죽음의 명함인 것 같아요.
김소연 시인 함민복은 무엇을 실천하고 싶은가요?
함민복 시골에 산다는 둥 여러 핑계를 대면서 게으름 피웠던 것들이 많지요. 사회적인, 수평적인 연대를 넓혀가는 게 제가 살면서 해야 할 일 아닐까 싶어요. 요즘 저는 ‘한 숨통’이란 말을 자주 떠올려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의 숨통으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죠. 죽은 것과 산 것,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서로 오가지요. 살아 있던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흙이 되고, 움직이지 않던 것이 다시 생명체가 되어 움직이고, 이렇게 전체가 한 숨통으로 엮여 있다는 깨달음이죠. 나만을 위한 것만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지요. 내가 넓어지면 실천하면서 살아야 할 것도 많아지겠죠. 사람들 마음의 꽃인 평화를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어요. 조금씩 실천도 하고 있고요.
김소연 그럼 더이상 강화도에 ‘은둔’하는 시인이 아니네요. 뭔가 대단히 반갑기도 하고 새롭기도 합니다. 기대할게요. 다른 한편으로 함민복은 ‘가난을 노래하는 시인’ ‘가난한 시인’이라 흔히 이야기되죠. 실은 약간 염려되기도 해요. 함민복 시인은 그것보다 크고 다양한데 자꾸 그쪽에 갇히는 느낌이 저는 듭니다.
함민복 근래 18년 동안 시집을 두권 냈는데요. 거기에 가난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요. 그전에 쓴 시의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겠죠. 그후에 쓴 시들이 재미가 없어서 사람들이 안 읽었나봐요. 제가 처음에 썼던 시들의 인상을 벗어날 만한 작품을 못 썼던 탓이 크겠죠.
김소연 그건 아닐 테죠. 사람들이 시인에 대해 갖는 향수나 낭만일 수도 있고요. 예전에 김종삼(金宗三), 천상병(千祥炳) 같은 시인이 있었다면 그걸 요즘엔 함민복 시인에게 투사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선배님은 ‘가난’이라는 말에 대해 어떤 것을 떠올리시는지요.
함민복 물질적인 가난을 얘기하는 건 별 의미가 없겠죠. 문학은 마음의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죠. 마음의 빈부를 재는 척도는 무엇일까요. 수직적으로 바라는 것이 많을수록 가난한 것은 아닐까, 수평적으로 나누는 마음이 많을수록 부자이고. 원하지 않으면 부족한 게 없어 다 부자지요. 그래서 물질경제 말고 ‘마음경제’가, 제가 만든 말인데, 중요한 것이겠죠.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수평을 지향하는 연대의식 같은. 이런 마음경제의 세계에서는 부정축재도 아름답겠지요.
김소연 시집 맨 뒤 ‘시인의 말’에 “지피지기여도 백전백패/이 이상한 전투가 아름답기도 한 것은/내 육체의 텃밭인 턱에/수염이 끈덕지게 자라듯/내 마음의 비탈이 차차/늙어왔음 때문일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을 읽었어요.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여서인지 ‘아’ 하는 탄성을 뱉었네요. 선배님은 젊은 시절에도 시 쓰기가 이렇게 백전백패일 거라 예상하셨나요?
함민복 젊은 시절에는, 어떤 여건이 되면 이것보다 더 잘 쓸 수 있어 하고 핑계와 구실을 대며 작업을 계속 이어왔잖아요. 그런데 더이상 핑계를 댈 게 없죠. 핑계 자체가 구차스러워지죠.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쫓겨날 곳도 없는 나이가 됐고요. 나이 들면서 얻는 것은 자기가 욕심을 내서 소유하려 하는 태도가 틀렸음을 알게 되는 거죠. 「씨앗」이라는 시가 그런 내용이에요. 복숭아 씨앗이 자기 살을 가져봤자 그만큼밖에 더 갖겠어요? 하지만 그 살을 버렸을 때 우주 전체가 자기의 살이 되는 것이지요. 나는 죽음의 씨앗을 잉태한 채로 태어난 유한존재잖아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이게 돼, 욕심 같은 것들이 많이 누그러지니까요.
김소연 더이상 핑계될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들어 욕심이 없어지고 난 다음, 그다음에는 혜안이 우리를 기다리는군요.(인문까페 창비2013.4.3)
예전에 가난은 멍에로만 취급됐지만 지금은 멍에인 동시에 사회적 계급으로 취급된다. 멍에여서 탈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지만, 계급이어서 가난은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가난한 자는 더이상 계급상승을 꿈꿀 수 없다. 계급의 질서를 이탈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의 데뷔작 중 하나인 「라면을 먹는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신문지를 쫙 펼쳐 놓고/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라면을 먹는 아침”(『우울氏의 一日』). 그는 자신의 가난과 거리를 두고 호연하게 가난을 풍자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는 가난을 가장 아름다운 시적 생태계로 치환했다. 함민복의 시에서 ‘가난’을 추출하여 우리가 많은 위로를 받는 동안, 그는 가난을 단련했다. 늘 뒷덜미를 긁적이며 수줍은 미소를 띠는 그이지만, 아무나 견디지 못했을 혹독함이 매우 자주 그를 엄습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에게 가난은 업적이 되어갔다. 나는 가난이 많은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 우리는 시인이니까.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이 자리에서 또 새로 배웠다. 백전백패를 자인하는 자만이 여전히 염치를 알고 미안함을 연신 느낄 줄 알며 그래서 반성의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 자본주의의 변방으로 밀려난 자는 그 밀려남을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지각하여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돌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지각은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아주 작은 단호함에서 번번이 시작된다는 것. 그것은 환멸로 치닫는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반역이고 또한 삶의 가장 온전한 실천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