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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은일(隱逸)의 시학

김영승 시집 『화창』

 

 

함성호 咸成浩

시인, 건축가. 시집 『56억 7천만년의 고독』 『聖 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등이 있음. haamxo@gmail.com

 

 

초점_김영승_화창

“그러므로 내 시는 다 진실하다. 그러면 됐다.”(「자서」)

 

공자는 은나라부터 춘추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해오는 약 5백년 동안의 시 3천여수 중에서 305편을 골라 『시경(詩經)』이라는 앤솔로지를 만들었다. 출판기념회 같은 자리에서 아마 제자들이 물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시들 중 305편을 골랐는데 기준이 뭐냐고. 공자는 한마디 말로써 그 기준을 밝혔다.‘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말을‘솔직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시는 솔직해야 한다. 공자가 말한 사악하다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고 말을 꾸미며, 치장하고, 일부러 좋게 한다는 것이다. 김영승(金榮承)의 시는 다 솔직하다. 그러면 됐다.

그래서 김영승의 시에서는 천박한 현실들이 낱낱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부끄러운 것, 창피한 것, 뻔뻔스러운 것, 야비한 것들이 더하거나 빼지 않고 민망하게 드러나 있다. 정말 야비하게, 그런 말들을 잘도 주워섬기는 김영승의 시를 보고 있으면 나는 부끄러워진다. 나의 부끄러움 그리고 김영승의 야비함은 그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천박함이다. 이 비몽(非夢)의 천박함.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 어쩔 수 없는 천박함. 그것은 그대로‘내 가엾은 생각’(「내 생각……」)이 된다. 이 비몽의 비루함을 건드리는 김영승의 솜씨는 가히 천재적이다. 도저히 시가 되지 않는 넋두리 같은 얘기도 김영승이 만지면 훌륭한 시적 발화를 이룬다. 훌륭하다는 것은 그것이 교묘한 고답적 향기를 지닌 성취를 이루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김영승의 넋두리는 내용으로만 보자면 분명 시정잡배의 치기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시로 말해질 때면 저 초야에 묻힌 은일(隱逸)의 처사(處士)가 뱉는 성깔로 변모된다.

 

朱子十悔건 酒煎子

모듬膾건 다

 

近墨者黑을

미리 경계하고

후회하는 놈들 틈에서

 

이쁜 말

구사하기도 싫다 오늘

-「후회」 부분

 

유가(儒家)적인 은일은 노장(老莊)적인 은둔과 달리 대단히 현실적이다. 노장의 은둔이 현실을 부정하는 데 반해서 유가의 은일은 끊임없이 현실을 주시한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은둔, 그것이 은일이고, 비몽과 사몽이다. 김영승의 『화창』(세계사 2008)이 그의 이전 시집과 다른 점은 이 은일의 성깔/정서가 더 짙어지고 농익었다는 것이다. 이 은일의 정서가 바로 김영승의 사몽(似夢)이다. 그것은 꿈이 아니라 꿈같은 것이기에 더 절박하다. 비몽과 사몽의 사이가 아니라 비몽에서 사몽으로 혹은 사몽에서 비몽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결기야말로 김영승 시를 관통하고 있는 정서다. 그리고, 김영승이, 드문드문, 그리고 알맞게 인용하고 있는 고전들과 이젠 다른 시인들은 잘 쓰지 않는 한자들 그리고 짧은 시행과 짧은 연들이 뜬금없는 연상들과 이 결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장치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결기가 바로 김영승 시의 부분과 전체이다. 부분과 전체라는 말은 김영승이 비몽과 사몽 간에 위치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김영승은 비몽과 사몽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며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비몽은 비몽이고, 사몽은 사몽이다. 비몽은 그가 경멸하는 현실이며, 사몽은 그가 바라 마지않는 고답적인 세계, 철학과 생활이 어우러지는, 관념과 현실이 하나로 짜여 있는 세계이다. 그는 결코 이 두 세계를 왕복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 두 세계는 절대로 조화되지 않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김영승의 시가‘비몽과 사몽의 긴장’이라고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적대적인 완고한 관계를 두고 일컫는 것이다.

흔히 한 시인에게 상반된 두 세계가 있다고 하면 그 두 세계가 서로 보완적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김영승은 그 두 세계가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리고 이 적대적인 세계가 한편의 시에서 교차한다는 점도 특이하다. 앞서 얘기했듯이 짧은 시행, 짧은 연들은 이런 적대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한 시인이 자기의 시에서 보이는 이런 적대적인 관계는 분명 자기부정적인 인식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은일의 시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즉 자기부정을 통과한 시인의 인식이 스스로를 유폐시켰다는 것이다. 그 유폐는 타자에 의한 유폐인 동시에 스스로에 의한 유폐라서 더 복잡하다. 더군다나 그래서, 완전히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그 유폐에서 혹은 은둔지에서 바깥을 향해 끊임없이 눈을 떼지 못하는 자의 인식. 그 은일의 시학을 김영승은 이번 시집 『화창』으로 완성하고 있다. 전편에서 이러한 은일의 시선이 느껴지는 이 시집은, 그래서 노여워하지만 상처를 주지 않고, 천박하지만 경멸할 수 없고, 야비하지만 미워할 수 없으며, 고답적이지만 고루하지 않다. 공자는 즐기되 음란하지 말라고 했지만 김영승의 시는 음란하지만 유쾌하다. 비관적인 생각인 것 같지만 타고난 낙천성이 배어 있다. 시를 이리저리 자유롭게 운영하고 갖고 놀다 팽개치기도 하지만 팽개친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시다. 천재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김영승은 천재다.

나는 우연히 그가 이번 시집을 내고 연 출판기념회의 동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 은일답지 않은 화려한 출판기념회였다. 그 스스로도 이런 화려한 출판기념회를 갖는 게 정당한지에 대한 자문이 있었나 보다. “과연 나는 정당한가?” 그 답은 “나는 정당하다”였다. 이 당당함. 그 정당함이 없이 어떻게 은일을 꿈꾸겠는가? “내 시는 다 진실하다.”-김영승 시인이여, 그러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