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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해자 金海慈
1961년 전남 신안 출생. 1998년『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으로 『무화과는 없다』『축제』가 있음. seabori@yahoo.co.kr
이제 됐습니다
멋진 사랑시 한번 써보고 싶다, 더 늙기 전에
가시의 기억보다 시방 막 벙글어지는 장미꽃 봉오리 같은
향내 나는 시를 꿈꾸며 햇살 아래 서성이던 어느 오전이었다
꿈은 죄가 없나니, 언감생심 애인의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고
세상 근심 없이 취하고 싶은 정오였다
내일까지 재직증명서 제출하지 않으면 대출 연장이 취소된다,는 전화가 왔다 엊그제 서류 다 냈는데 그런 중요한 말을 이제사 하느냐, 항의했더니 또박또박 당연히 며칠 전에 말씀드렸다,는 그에게 전화국에 요청해 이전 통화를 확인이라도 해주고 싶은 순간 거두절미하고 나 실업자다, 했더니 숫제 내놓고 죄인 취급하기 시작하는 그에게 무슨 놈의 영세민 전세대출이 그러냐 직장 못 다니면 전셋집을 내놔야 하느냐, 부들부들 떨다 나도 모르게 울먹임이 새어나가는데 시종 예의바르게 뼈아픈 지도 모르고 고압적으로 설명하는 은행원과 말을 섞다(45억년이나 되었다는 지구에서 대체 몇십년밖에 안 살고도 어찌 우리는 이따위 세상에 익숙해질 수 있는가?)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화내는 게 아니라 저는 지금 당신들의 씨스템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 좀 가라앉히고 겨우 한마디 했더니 무슨 그 정도 일 가지고 우세요, 너무나 냉정하고 교양있는 비아냥에 다시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친 나는 당장 눈앞에 있으면 싸대기라도 붙일 생각과 말로 당장 갚겠다 언제까지 갚으면 되느냐, 대책도 없으면서 길길이 날뛰다 전화를 끊은 나는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어 하와이 섬에서 아픈 자들에게 외워준다는 의사 모르나의 기도문을 읽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자식이 하나로 존재하는 신성한 창조주여…… 만일 내가, 내 가족이, 내 피붙이, 조상이 당신과 당신 가족, 피붙이, 조상에게 태초부터 현재까지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다면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모든 암울한 기억과 장애물, 에너지, 불안들을 씻어내고, 정화하고 해방하여 이 원치 않은 에너지들을 순결한 빛으로 변형하소서…… 이제 됐습니다.”
이 순간 내가 겪는 일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내가 오늘 경험하는 일은 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밖으로 나온 것,
내가 하지 않은 생각이 대체 어찌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생명이 생명을 죽이는 생각을 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하고
폭탄과 화염 속에서 죽이고 죽어가는 오늘 이 세상에서
대체 누구에게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합니까
이런 세상을 만든 저를 용서하세요
제발 저 짓은 내가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지 않게 해주세요
부탁드리나니 부디 제가 이런 저를 용서하게 하세요
내가 잠든 사이에
몸 끝마다 고드름이 달릴 듯
살얼음 같은 몸속으로 열꽃 들락날락하던 밤새
누가 다녀가셨나 흥건히 젖은 이불 속
방울방울한 생각들이 떨어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프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살얼음 동동 떠 있는 희뿌윰한 식혜 같은 말
비몽사몽 들이켜니 그렁그렁한 언어의 끝자락이
겨우 잡은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느니,
생각은 어디서 오는가
밤새 끊긴 길 어디를 뚫고 마음은 갑자기 들이닥치는가
눈뜨지 않은 어둠 속에서 생각의 불은 누가 밝히는가
내가 나이기를 멈추었을 때 찾아주시는 저이는 누구신가
사건과 문제를 먹고 사는 생시의 나를 지우고
밤새 존재의 물동이를 부어 찰방찰방 채워주시는 그는,
돛 달고 달리기에 바쁜 나를 세워 뻘밭 깊이 닻을 내려주시고
내가 적어질수록 많아지고 나를 잊을수록 자주 찾아오는 당신은,
내가 한 생각은 여태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