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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신예작가 5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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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영 奇俊英

1972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가 있음. ariel_1@naver.com

 

 

 

이상한 정열

 

 

그녀에게 그는 스물일곱 생일에 소개받아 칠개월을 사귄 남자였다. 서른살 그 남자는 이름이 무헌이었다. 그는 때로 아무 데서나 연인을 치켜세우며 자랑스러워했다. 있지, 넌 뭔가 신이 나서 말할 때 열살은 어려 보여. 그때 네 눈은 반짝 빛이 나. 많이 먹어. 살 빼지 마. 그대로가 좋아. 주황색이 잘 어울려. 긴 머리칼 자르지 마. 샴푸도 채소도 내가 사주는 유기농 제품만 써. 내 예쁜 별님.

그녀의 본명은 말희였다. 어떤 여자들이 옷장 저 깊숙한 데다 한두벌쯤 처박아둔 유행 지난 주름치마 같은 이름. 물론 정감 어린 데가 없진 않았지만 그녀는 자기 이름을 소개해야 하는 자리에서 ‘말희’ 대신 ‘마리’라고 흘려 쓰거나 말하곤 했다.

무헌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에 대해 초가을부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말희는 좀처럼 입을 다물 줄 모르고 떠벌리며 들떠 있는 그가 신기해서 때로 손뼉을 쳐가면서 화답해줬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그래, 그것도 좋겠다. 그는 일관되게 서툴렀다. 그와 키스하던 때마다 말희는 그와 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자자고 하지 않았다. “지켜줄게” 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때로 불타올랐다가 얼음창고에 갇히곤 하는 벌받은 인형 같았다.

그러다 그들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지 못하고 관계를 정리하게 된다. 늦가을 무렵이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꼭 집어 말할 필요가 있는가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내 탓이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희는 친구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사월부터 구월까지 그녀는 그와 이것저것 함께했지만, 시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만사에 시들해져서 맥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십일월이 되자 혼자 시간을 갖겠다며 화를 냈고, 간혹 슬픈 표정으로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호소했다. 그는 그녀와 아직 해보지 못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그녀가 그를 다시 받아줄 수 있을지 묻고 되뇌며 괴로워했다. 그녀는 세련되고 성숙한 이별의 방식에 관한 책들을 서너 권 찾아 읽었지만 실전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비겁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고, 어쩌다 연락이 닿게 되면 새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꾸며댔다. 그 무렵 무헌은 프랑크푸르트 지사로 발령이 나 있었다. 최소한 일년 반 정도 해외로 나가 있게 된 마당에 결혼 계획을 꺼내놓지 않아서 그녀가 마음을 정리한 것 아닌가 지레짐작하여 다급히 청혼을 해 그녀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냉담했다.

 

이듬해 무헌은 직속 상사와 몇차례 불화를 겪으면서 탈모가 진행됐다. 머리털이 일찌감치 하얗게 세기 시작한 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지만 머리가 벗어지기까지 하는 데는 초연하기 힘들었다. 식이요법, 두피마사지,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을 가리지 않았으나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인내심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반추하기도 했고, 예고 없이 일어난 사사로운 일들에 과민해지며 괴팍하게 굴었다. 현지에 남을 것인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왔을 때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재회한 대학 동창과 이년을 사귀다 결혼했다.

결혼 오년 차에 접어들면서 무헌은 아담한 전원주택을 지었다. 좋은 시절이었다,라고 그의 아내는 회고했다. 그가 다니던 바이오산업체에서는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약초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찜질팩과 한방화장품을 개발하여 매출 기록을 갱신했고, 그가 사놓은 땅은 도로 개발로 값이 뛰었다. 무헌의 형은 그즈음 원목 수입과 인테리어 사업에 손대고 있던 친구와 어울려 다녔는데, 형의 친구가 무헌이 집을 짓는 데 이런저런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폐간된 『행복을 부르는 집』이라는 월간지에는 무헌의 이 전원주택 사진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때 집 안 이곳저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던 사진기자는 안방 벽에 걸어놓은 커다란 결혼사진 속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배가 불룩한 것을 보았다. 무헌은 신부의 배 속에 그때 이미 육개월 된 아기가 있었다고 기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아기의 태명은 별님이었다. 무헌의 아버지가 곧 태어날 손녀를 위해 ‘현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부부는 딸아이가 여섯살이 되기까지 현서보다는 별님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를 즐겼다.

 

현서는 어릴 적에는 얌전하고 총명해서 부모의 행복이었다가 사춘기에 접어들자 공부에 별 뜻이 없는 사고뭉치로 변하면서 골칫거리가 되어갔다. 공부가 아니면 다른 재능이라도 키워주겠다며 이것저것 레슨을 받게 했는데, 간신히 첼로에 재미를 붙이는가 싶더니 이내 싫증을 냈다. 늘지 않는 실력을 툭하면 악기나 선생 탓으로 돌리며 자기 미래를 한탄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숨이 막혀서 있기 싫다면서 뉴욕에 있는 막내이모한테나 가서 살려고 하니 보내달라고 떼를 쓰는가 하면, 아빠는 젊었을 때 왜 프랑크푸르트에, 아니면 빠리나 밀라노 같은 데 정착하지 못했는지 따져물었다. 자신이 진득하지 못한 것이 제 탓만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무헌의 아내는 네 이모도 타국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만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아느냐 하며 혼쭐을 내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 부부의 영화 같은 재회를 읊어대기도, 오래된 잡지를 펼쳐 보이며 집을 꾸미면서 품었던 꿈을 이야기해보기도 했다. 현서는 알아듣는 것처럼 잠잠해졌다가도 심사가 꼬이면 소리를 지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방 안에 틀어박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방법으로 부모의 복장을 터지게 했다.

현서가 열여섯살 되던 해 여름날에 무헌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무헌의 형은 벌여놓은 사업이 수습되지 않자 여기저기 돈을 융통하러 다니며 수시로 혈압을 체크했다. 여동생은 그해 겨울 아버지 장례식에나 얼굴을 들이밀었는데, 비쩍 마르고 퀭한 눈으로 그에게 이렇게 대충 조언해주었다. 현서를 그냥 몇달 내보내보지그래, 실제로 겪어보면 아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어. 여동생은 친구들 두명과 출자해 가게를 하나 낼 생각으로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데 세상에 믿을 놈이 별로 없다고 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한달 후, 무헌은 이혼을 했다. 현서는 제 엄마가 키우기로 했다.

 

무헌은 진돗개 새끼 한마리를 분양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개보다는 낚시에 취미를 붙여보는 편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커다란 참돔을 잡아올린 자기 사진을 스마트폰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친구는 대구에 있는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왔다가 재미있는 모임에 참석하게 됐다면서 거기서 만난 부부가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에 동석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무헌은 사람 두루 알고 지내서 나쁠 일이 없다는 비즈니스 차원에서가 아니라 혼자 저녁을 먹는 일이 번거로웠는데 잘되었다 싶은 생각에 친구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거기서 말희를 만났다. 말희는 무릎까지 오는 회색 치마를 입고 그 집의 주방 한쪽에 앉아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서 무헌은 그녀를 알아봤다.

“아, 너 여기서 뭐 해?”

그도 마치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홀쭉하니 말랐고 머리칼도 머리통에 착 붙을 만큼 짧았다. 목소리는 약간 허스키해진 것 같았다. 회색 치마 위에는 하얀 앞치마를 둘렀다. 손가락은 여전히 가늘고 길었으나 마디에 굵은 주름이 졌고 피부는 윤기가 없이 거칠었다.

“남편은 어디 있어?”

“여기 없어.”

“이 집 식구 아니야?”

“아니야.”

무헌은 그럼 왜 여기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가 묻고 싶었지만, 그때 안주인이 주방으로 들어와 말희에게 음식이 식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질문할 기회를 놓쳤다. 안주인은 무헌에게 왜 주방에서 서성대고 있는지, 혹시 뭘 찾는 건 아닌지 물었다. 그는 다 괜찮다고 하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음료수를 들어 한모금 마셨다. 안주인이 거실로 나가자 그도 따라나서려 했다. 말희가 그때 테이블보에 가려져 있던 다리 한쪽을 드러내며 일어섰다. 다리에 세로로 길게 흉이 져 있었다.

“다쳤나봐.”

그가 중얼거렸다.

“꽤 됐어, 뭐.”

말희가 짧게 대꾸하면서 뒤돌아섰다.

무헌은 거실로 나와서 손님들 속에 다시 섞였다. 치과의사, 섬유산업 종사자, 변호사, 수입차 쎄일즈맨, 작가가 동석한 자리였다. 어느 대학의 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라 했다. 작가는 지난달에 두번 거기서 특강을 한 적 있는, 베스트쎌러 『낙원의 저편』의 저자라고 전해 들었다. 무헌의 친구는 안주인이 자리를 잠시 떴을 때 무헌의 귀에 대고 안주인이 보기와는 다르게 남편보다 다섯살 연상이라고 넌지시 일러줬다. 그녀가 이번 모임을 이 집에서 갖자고 했단다. 아주 샤프한 여자야. 친구가 말했다. 무헌은 중간에 잠깐 진돗개 이야기로 주목을 끌었으나 곧 사람들에게 잊혔다. 무헌이 다시 주방 쪽으로 걸어들어갔을 때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말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냉장고에 기대선 채 앞치마 어깨끈을 매만졌다.

“애는?”

그가 물었다.

“하나 있어.”

그녀가 대답했다.

“너는?”

그녀가 물었다.

“난 혼자야.”

그가 대답했다.

 

무헌은 이튿날 병가를 내고 쉬었다. 열이 나고 목구멍이 뜨거웠지만 한시간 정도 개를 데리고 산책했다. 횡단보도에서 누군가 그에게 개가 크면 팔 거냐고 물었다. 그는 마당이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려면 집이 팔려야 될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전원주택 주변의 전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집은 낡았으며 혼자 살기에는 휑하니 넓었다. 그는 진돗개의 발을 닦고 그릇에 물을 채워준 뒤 작은방에 들여넣었다. 그리고 자기는 바나나를 잘라넣은 씨리얼에 우유를 부어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전원을 켜지 않은 채로 캄캄한 텔레비전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서 진돗개에게 사료를 주었고, 자기도 해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실내화에 두 발을 꿰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체중을 재보았더니 하루 사이에 삼 킬로그램이나 줄었다. 거울 앞에 섰다. 약간 구부정했던 자세가 펴지면서 키가 조금 커진 듯했고, 벗어진 정수리 부분에 검은 잔털들이 솟아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를 만져보았다. 열은 그대로였다. 그는 회사로 나가서 휴가신청서를 써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화장실에서 마주친 다른 부서의 동료 하나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내 눈을 못 믿겠어. 뭘 한 거야?”

무헌은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료가 그의 등허리를 살짝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너 너무 무리했어. 몰골이 이게 뭐야. 좀 쉬어가는 것도 필요해.”

무헌은 안 그래도 휴가를 신청했다고, 열흘간 쉴 것이라고 대답했다.

“어떡하냐.”

동료는 회사 분위기가 요즘처럼 침체되고 동종 산업이 모두 악재를 타고 있는 때 휴가가 떨어졌다는 건 다음에는 목이 떨어질 신호라고 했다.

“이런 말, 우리 사이엔 할 수 있는 거잖아. 쉬쉬할 일만은 아니잖아. 하지만 인간적으로다가……”

청소부 아주머니가 들어와서 그들 발밑을 걸레질하려 했으므로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잰 발걸음으로 비켜섰다. 무헌의 동료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무헌은 거울 앞에서 잠시 더 어정거리며 자기 모습을 살펴봤다. 몸매가 호리호리해 보이는 게 괜찮았다. 수척해졌다는 동료의 표현은 잘못됐다. 그는 화장실 밖으로 나가서 동료에게 너무 컴퓨터만 들여다보지 말라고, 눈을 혹사시키면 나중에 고생한다고 톤을 높여 말했다. 동료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별다른 대꾸 없이 발걸음을 재촉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회사에서 나와서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모임에서 건네받은 치과의사의 명함을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간호사가 오후 네시에 환자 하나가 예약을 취소해서 검진 정도면 받을 수 있겠다고 하면서 친절하게 찾아오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는 자꾸 따라나서려는 개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개를 차 뒷자리에 태우고 논현동에 있는 치과로 향했다.

그는 개를 데리고 병원에 들어섰다. 간호사가 개는 들일 수 없다고 정색하며 주의를 주어서 되돌아갈까도 싶었지만, 의사가 나와서 알은체를 하자 간단히 문제가 수습되었다. 그는 가지고 온 입마개를 개의 주둥이에 채운 뒤 검진대에 올랐다. 그가 누워 있는 동안 다른 간호사 한명이 개의 목줄을 잡고 그 옆에 서 있었다. 의사는 그의 입속을 이쪽저쪽 면밀히 들여다보았고, 여기저기 건드려보면서 아프거나 시리지 않은지 물었다. 그는 검진을 마친 뒤 입안을 헹구어내고서 될 수 있는 한 자신의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신경 쓰며 물었다.

“그때 식사가 참 맛있었는데 어디서 그렇게 음식 솜씨 좋은 사람을 구하시는지! 집안 행사 때마다 저희 집사람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의사는 자기네는 일주일에 두번, 아마도 월요일과 목요일에 아주머니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와서 음식 몇가지를 만들어놓고 간다고, 연락처는 부인이 알 거라고 했다. 의사는 친절하게도 부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무헌에게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무헌은 개를 끌고 접수대로 가서 진료비를 치렀다. 후속조치로 병원에서 제시한 치료법을 모두 따르려면 예상보다 많은 비용을 치러야 했다. 치아미백까지 포함하면 약간은 디스카운트가 가능하다면서 간호사가 탁상용 달력을 들췄다. 그는 스케줄을 확인한 뒤 전화로 다음 예약을 잡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무헌은 말희에게 세번 전화를 걸었다. 말희는 한번은 받더니 서둘러 끊었고, 이후 두번은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말희야.

 

그는 그 장을 찢어낸 뒤 다음 장에 다시 고쳐 썼다.

 

마리야.

 

그는 거기까지 적고 더는 아무 말도 쓰지 못했다. 그러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고, 나간 김에 다섯 정거장을 더 걷고 걸어서 서점을 찾아 들어갔다. 베스트쎌러 『낙원의 저편』을 구입해서 집에 돌아와 삼십 페이지까지 읽었는데 편지에 써먹을 만한 구절은 없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책을 사서 읽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책을 집어던지고 다시 펜을 들었다. 그는 두 줄을 적고 난 뒤 이부자리를 펴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에 그는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었다. 젊은 남자 트레이너가 가벼운 스트레칭부터 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지만 무헌은 아주 빠른 음악을 들으며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빠져버려, 너의 매력. 정신 차려, 나의 한숨. 그대는 핫, 핫, 핫. 나는 우후후후후.

“그만하세요.”

트레이너가 그를 끌어내렸다. 그는 심장에 손을 얹고 벽에 기대섰다가 바닥으로 주르륵 미끄러져내렸고 사람들이 그를 매트에 눕히고 팔다리를 주물렀다.

샤워를 하고 나니 몸속의 노폐물이 싹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는 트레이너에게서 앞으로는 지시한 대로 따라야 운동 효과가 있다는 설교조의 잔소리를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노파심이 많아, 귀엽군, 하고 생각하며 미소로 응대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개도 씻겼다. 진돗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탄, 이리 와. 탄, 가만있어. 그러다 그는 말희의 전화를 받았고, 두어시간 뒤에 자신의 차에 말희를 태워 드라이브를 했다. 목이 말라. 말희가 말해서 까페에 데려갔다. 말희는 배가 고프다는 말은 안했는데, 그도 밥 생각은 나지 않았다.

말희는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미니스커트 입으면 봐줄 만한 게 각선미는 아직 삼십대 같다는 농담도 했다. 말희는 명랑했다. 결혼하자마자 살림에만 매달려서 이제는 할 줄 아는 게 살림뿐이라고, 사는 게 참 웃기고도 단순하다며 미소 지었다. 그는 그 말, 참 웃기고 단순하다는 게 전혀 새로운 말이 아닌데도 듣기에 새롭고 좋았다.

 

그들은 무헌의 휴가기간에 두번 더 약속을 잡아 만났다. 한번은 진돗개 탄을 데려갔다. 말희는 개를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탄이 영리한 것 같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다음번 만남에는 개를 데려가지 않았는데, 그날은 집을 나서기 전에 딸이 들이닥쳐 경황이 없었다. 딸은 무헌에게 엄마가 우울한 것 같다고, 아빠가 가서 위로를 하라고, 둘이 어떻게 좀 잘해보면 안되느냐고 하더니 바닥을 뒹굴며 엉엉 울었다. 탄이 짖으며 그 주위를 맴돌았다. 개와 사람의 혼돈과 소요가 공기를 덥혔다. 끝내는 한방에 있는 그들 모두가 질식할 것 같은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중이었다. 그는 딸을 달래고 나서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켰다. 현서야, 뭐 좀 시켜 먹고 있어. 개는 축 늘어져서 그의 발끝을 두어번 핥았다. 개랑도 좀 같이 있어주고. 이 녀석도 놀랐나보다. 물지 않아. 좀 안아줘봐. 그는 그래놓고 말희를 만나러 갔다. 말희는 이날 가슴과 허리의 선이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나왔지만 그가 ‘너랑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때 못한 건 지금도 못한다’며 거절했다. ‘뭘 하고 싶은지 묻지도 않냐?’고 그가 말하니 ‘말 안해도 안다’며 자기는 그 부분에 관해서라면 흥이 떨어졌다고 대답했다. 말희는 그에게 종교를 가져보라고 권유했다.

“너, 너무 피곤하고 지쳐 보여. 불안하고 우울해 보여.”

말희는 고개를 설핏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가 너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물었을 때, 그녀는 자기에겐 종교가 없다고 대꾸했다.

“사고 당하고 나서 복잡한 생각들 다 버렸어. 인생에서 일곱달은 별 게 아니야. 너도 참 너다. 우리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는 자신이 한 말과 그녀가 한 말을 되뇌고 곱씹어보았다. 그러다 딸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향했다. 딸은 전화로 엄마랑 대판 싸웠기 때문에 오늘은 아빠 집에서 자고 가려고 한다고 통보하듯 말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딸이 닭튀김을 만진 기름진 손으로 탁자에 얼룩을 남기면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때는 주요 보도는 끝나고 날씨 예보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기상캐스터가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펴면서 내일은 날이 화창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 나들이하기 좋은 날이라고 하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딸이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중얼거렸다. 기분도 썩고 날씨도 썩었어. 그리고 물었다.

“내가 아빠 닮았어?”

 

밤새 딸은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방과 방 사이를 오갔다. 그는 어린아이가 잠자리에서 양을 헤아리듯이 절이나 교회의 입구, 화려하거나 고아한 신전들을 떠올리며 거기에 상상으로 자신을 세워보았지만, 그때마다 딸의 발소리가 그 장면을 툭, 차듯이 밀고 들어왔고 이미지는 흩어졌다. 믿음,이라는 단어는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보지 못한 말이었기에 그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그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따라잡기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소리 없이 사그라져가는 많은 것들을 호명해보아야 했다. 손전등에 의지해 기억의 창고를 뒤지듯이 조심스럽게. 먼지 쌓인 바닥에서 빛바래고 해진 블라우스나 셔츠를 주워올리며 그걸 입었던 사람의 육체를 불러일으켜보듯이 집중력과 에너지를 한데 모으면서. 청춘의 어느 밤 헤맸던 거리, ‘다시는’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던 어떤 약속이나 맹세, 사절까지 욀 수 있었던 동요, 아버지의 발, 어머니의 배, 아이의 볼, 단내 나는 숨결, 입맞춤과 감탄, 한숨과 밀어들. 바깥의 소리들이 희미해지면서 내면의 소리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고, 그는 그것을 지속시켜보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입을 벌린 채 두 눈을 깜박이며 땀을 흘렸고, 그러다 선잠이 들었다. 그는 밤새 무언가를 아다니는 꿈을 꾸었는데, 새벽녘에 눈을 뜨자 조금 열어뒀던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들어와 얇은 커튼 자락이 하늘거리는 게 보였다. 꿈의 이미지들이 빠르게 소멸되는 자리에서, 그는 알 만한 여자의 치맛자락을 떠올렸다.

아침이 되어 그는 주방으로 나와 식탁에 앉았다. 물 한잔을 아끼듯 천천히 한모금씩 우물거리다 목으로 넘겼다. 얼마 있다가 딸이 산발한 채 걸어나와 냉장고에서 막 꺼내온 차가운 풋사과를 한입 사각 베어 물고는, 아작아작 소리내 씹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비밀을 품은 사람처럼 표정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이 익은 과일처럼 붉었다. 딸이 그의 팔을 살살 건드렸다.

“아빠 오늘 집에 있게?”

 

주말이었지만, 그는 딱히 갈 데가 없었다. 집은 잠시 딸과 딸의 친구들에게 내주기로 했다. 탄은 그가 데리고 나왔다. 딸과는 화해를 했다.

“그래도 아빠, 아빠 집도 있고 엄마 집도 있고 그러니까 좋은 거 같아. 친구들이 좋아할 거야. 요즘 기분이 되게 다 시시해져 있거든. 아빠도 기분전환 하고 와. 내가 내일 아침에 해장국 끓여줄게, 술 먹고 늦게 와도 돼. 나 국 끓이는 거 잘해. 엄마보다 잘할걸.”

그는 집을 나서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엊저녁 딸의 서러움과 울분으로 집의 벽이 휜 것 같았다. 밖에서 보니까 집은 조금 부풀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집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딸 정도 나이의 소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영원히 돌아갈 데가 없는 사람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점점 자유로워졌다. 그는 어린 날 보았던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개와 함께 뛰었다.

“이봐요, 조심해요!”

그와 부딪친 행인이 뒤에서 욕을 해댔지만 그는 미안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의 동료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와 다음주에 회사에 나오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서로 몸조심들 하자고 했지만, 그는 숨이 차서 대꾸하지 못하고 헉헉 입 바람만 불어댔다. 아직도 아픈 거야? 동료가 근심했고, 그는 날씨가 정말 좋다고 숨을 몰아쉬며 대꾸했다. 동료는 뭐라고 말을 더 하려는 듯했지만 무헌은 전화를 끊었다. 소형차 한대가 길을 비켜달라며 클랙슨을 울렸기 때문이다.

무헌은 말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희는 받지 않았다. 그는 전화를 걸고, 걸고, 걸고, 또 걸었다. 음성 메시지도 남겼다. 문자 메시지도 보냈다. 그러자 얼마 후 말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그는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발신자를 다시 확인했다. 말희가 맞았다. 그런데 말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년과 성년의 중간 목소리가 그에게 물었다.

“누군데요? 뭔데, 어딘데요?”

 

무헌의 휴가는 끝났다. 아픈 데는 딱히 없었는데, 열이 내리지 않았다. 어딘가 염증이 생긴 모양이라고 걱정하면서도 병원에 갈까 말까 고민만 했지 정작 가보지 못했다. 출근해서 몇군데 전화를 돌리고, 미팅을 잡고, 보고서를 검토했다. 회사는 새로운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고, 예산 일부를 지자체에서 지원받게 될 것이다. 신문 지상에 향후 사업전망에 관한 보도도 나갈 것이다. 동료들이 그에게 잘 쉬었느냐고, 좋은 타이밍에 에너지를 충전하고 온 것 같다며 부럽다고 인사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일인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으냐고 그에게 물었다.

탄이 장염에 걸려서 동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현서가 친구들과 개를 보러 왔다. 다시 평범한 시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익숙해지는 시간. 숨 쉬어야 하는 시간.

무헌은 이후 어느 월요일에 말희를 만났다. 둘은 할 게 별로 없었다. 그는 슬퍼했고, 그 바보 같은 슬픔이 말희에게는 옛 일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같이 잤다. 별일은 없었다. 뭘 했다고도 안했다고도 할 수 없이, 그는 서툴렀다. 너무 성급했고, 금세 낙담했다.

말희는 그때 그를 쓰다듬는 대신 잠이 깬 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헌이 텔레비전을 켜자, 첫사랑을 만나 불륜으로 빠진 남녀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공교로운 일은 아니었다. 흔하게 재연되는 이야기가 그때도 그들 주변에서 재연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놀라는 척하지만 실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고 남들의 생은 어떠한지 쳐다보게 되는 그런 민낯의 이야기들. 무헌과 말희는 서로의 유일한, 유일했던 사랑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다른 것도 확인했다. 텔레비전을 끄자 말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전에 그에게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기운 내. 말 안해도 알아. 종교를 가져봐. 너 너무 피곤하고 지쳐 보여.”

그러자 그는 웃었다.

“너 말 참 웃기게 하네. 내가 너 때문에 웃네. 나 좀 웃고 싶네.”

 

무헌은 말희의 아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가끔 그날에 대해 생각했다. 말희가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날, 현서가 그의 집에 친구들을 불러들이고 신나게 놀아볼 요량으로 들떴던 그날, 그가 미친 듯 말희에게 끝까지 전화를 해보려고 했던 그 주말. 그는 어린 날 보았던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개와 함께 뛰고 난 참이었고, 이봐요, 조심해요! 그와 부딪친 행인이 뒤에서 욕을 해댔고, 그래도 미안하지도 아프지도 않았던 그날. 정말 아무렇지 않았던 날. 누구세요? 뭔데, 어딘데요? 말희의 휴대폰으로 그에게 묻던 변성기의 소년은 이름이 군도라고 했다. 한강고수부지에서 두 사람은 강을 보고 앉았다.

“그러니까.”

군도가 먼저 운을 떼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엄마 친구라고요? 군도가 마저 말했다. 무헌은 군도에게서 말희와 닮은 점을 찾아냈다. 매끈하게 뻗은 콧날, 긴 손가락, 둥그런 얼굴형과 작은 입. 군도는 강바람을 느끼듯이 가슴을 펴면서 심호흡을 했다. 군도는 열다섯살이라고 했다. 외양만으로는 열세살 로도 보였다. 아무튼 군도는 조심스럽게 그를 뚫어보듯 훑다가, 이내 이것저것 재지 않는 태도로 술술 말을 풀어놓았다.

“우리 엄마도 내 친구들 다 모르는데, 내가 엄마 친구를 어떻게 다 알겠어.”

군도는 그 전전날 밤 엄마의 밍크코트를 몰래 내다 팔아먹을 생각으로 싸가지고 나왔다. 그건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물려준 거였지만 유행에 뒤쳐지는 터라 입을 일 없이 옷장 안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괜찮은 가격에 팔아치울 데를 알아보고, 그 돈으로 친구들하고 기분을 좀 내려고 했을 뿐이다. 자전거 한대를 자기 몫으로 산 뒤에는 남은 돈을 모두 엄마에게 가져다주려 했는데 일이 죄다 꼬여버렸다. 군도의 옆에는 커다란 보라색 보따리가 있었는데, 군도는 그게 바로 밍크코트라고 말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럽혀져서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무헌의 옆에서는 탄이 목줄을 잡아당겼다. 무헌은 탄을 끌어와 옆에 앉히고는 쓰다듬었다. 그러다 강가에서 낚시를 하는 한 남자를 봤고, 어떤 물고기가 이곳에서 잡히는지, 잡히면 그걸로 뭘 할 건지 쓸데없는 궁금증을 품다 버렸다.

“그랬구나. 그래서?”

무헌이 중얼댔다.

“어제 엄마가 나 있는 데를 찾아내서 화를 내며 이런 걸 다 내던지고 갔어요. 내 친구들 보는 앞에서. 다 내 잘못이죠, 뭐.”

군도가 보따리 속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더니 거기서 휴대폰과 작은 거울, 분첩, 립스틱, 손수건을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말희가 던진 손가방에서 쏟아져나온 것들이라고 했다. 손가방과 지갑은 도로 말희가 챙겨갔다는 말도 덧붙였다. 밍크코트와 잡동사니들. 말희의 것이지만 지금 말희의 아들 손에 보따리를 이룬 그것들. 무헌은 자신도 그 어떤 보따리에 속하는 물건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아저씨는 뭘 잘못했는데요?”

군도가 물었다.

“뭘 잘못해서 계속 전화하고 그런 거예요? 아님 우리 엄마가 아저씨한테 뭐 잘못했어요?”

무헌이 망설이니까 군도는 대답을 굳이 듣고 싶지는 않다는 듯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가 개 끌어봐도 돼요?”

보따리를 지키는 소년과 경계하는 개, 자기의 물질성을 헤아리는 초로의 남자가 있는 강가의 풍경.

군도가 탄을 끌었고, 무헌은 군도 대신 보따리를 들었다. 그러다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고, 탄과 커다란 보따리를 불쾌해하지 않는 마음씨 좋은 운전기사를 만난 것을 함께 다행스러워했다.

전화벨이 울리자 군도가 전화를 받았다. 말희였다. 무헌은 군도의 옆자리에 다리를 모으고 앉은 채로 군도와 말희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모자는 오래 대화하지는 않았지만, 무헌은 두 사람 모두 안도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말희는 무헌을 바꿔달라고 하지 않았다. 무헌은 그들 모자에게 결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저기, 좀 기다렸다 엄마 보고 가세요.”

제 집 앞에 내린 군도가 그렇게 인사한 것을 무헌이 위로의 말처럼 느낀 것은 그 때문인지 몰랐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그때 가슴을 스치며 베고 간 것 같았고, 무헌은 그 말을 조심스럽게 받아안고 싶어졌다. 그는 그 집에 들어섰다. 오래된 연립주택 일층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열린 방문 틈으로 부부의 침실이 보였다. 거실 벽에는 흔한 풍경 사진이 한장 걸려 있었다. 하늘, 산, 꽃, 바람. 탄은 문턱에서 힘을 주면서 들어오지 않으려고 버티더니 무헌이 줄을 놓아버리고 식탁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으니까 순순히 제 발로 다가와 그 밑에 쭈그리고 엎드렸다. 군도가 어디에선가 전단지 몇장을 찾아 들고 와 그걸 바닥에 펼쳐놓고는 그 위에 보따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큰 우유팩을 꺼내 통째로 들고 마시다가 토해냈다.

“웨엑, 상해버렸네.”

군도는 젖은 옷을 벗어들고 바닥에 엎드려 흘린 우유를 닦아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내던지더니 문을 열어놓은 채 수도를 틀고 씻었다. 군도가 그 와중에 무헌에게 뭐라고 소리치고는 계속 중얼댔다. 그러나 물소리에 묻혀 무슨 말인지 정확치 않았다. 잠시 후 찰칵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면서 머리칼이 희끗한 사내가 실내에 들어섰다.

“누구요?”

사내는 허벅지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었고, 불룩 나온 배 밑을 허리띠로 조였다. 키가 컸고, 코도 컸고,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사내는 서둘지 않는 동작으로 바닥에 어질러진 전단지와 커다란 보따리를 주시하면서 그에게로 두 걸음 다가왔다. 탄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길길이 뛰면서 짖어대기 시작했다. 무헌은 목줄을 잡아당기며 진땀을 흘렸고, 군도는 물에 젖은 채 팬티만 걸친 차림새로 화장실에서 뛰어나왔다. 사내는 멈칫했다. 세 사람이 이룬 구도 속에서 탄이 버둥거리며 짖었다. 종래엔 아픈 듯이 짖었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침착하라는 표시로 허공을 다독다독했다. 마치 약한 날갯짓을 하듯이. 탄은 짖는 걸 멈추고는 다리가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무헌은 자기 생이 오래전에 뭔가를 건너뛰었음을, 건너뛴 그 부분에서 뭔가가 다시 시작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선생 개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병원에 좀 데려가지 그래요?”

소란스러운 첫 대면이 끝나고 이런저런 대화가 짧게 오간 뒤에 말희의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말희의 남편은 지금은 가전제품 판매원이지만 과거에는 사냥개를 훈련시켰단다. 그의 무용담이 시작되려는 찰나 말희가 현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무헌이 서툴게 인사말을 떼자마자 군도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엄마.”

무헌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그 옆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을 뻔했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숨을 골랐다. 군도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헌은 막막한 다음번을 기약하고는 개를 끌어안고 뒤돌아서서 밖으로 나왔다.

 

마리야.

 

무헌이 그런 애칭으로 시작해 겨우 두 줄 적다 만 편지는 주어와 술어가 어긋난 채 마침표가 아닌 쉼표에서 멈추었고, 아직 어디에 가닿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끔찍하게 텅 빈 채로 소란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말희의 집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실제로 그곳으로 달려가보기도 했다. 상처 입고 굶주리면서도 옛집을 찾아가는 그 어떤 혈통 좋은 진돗개들처럼 탄도 그를 따라 성실하게 뛰고 또 뛰었다. 그는 오랜 시간 서성이며 그 집의 불이 켜졌다 꺼졌다, 창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았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어느 저녁 무렵에는 그 집 앞을 오가던 이웃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는 턱없이 더 집요해질 때도 있었다. 보라색 꾸러미를 들고 그와 한 택시에 올라탔던 소년, 가전제품과 개에 정통한 사내, 다리에 흉이 진 채로 나타난 옛사랑이 살고 있는 저편, 아니 그가 부재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통과해왔고 이제 여기 당도해서 서걱거리고 부딪치고 신음하고 비틀렸다가, 다시 환한 웃음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밝아오는 아침 해를 함께 맞는 것들에. 모든 것을 친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한순간 너무 뜨거워져 정염과 헷갈렸다. 그는 때로 열이 오르고 야윈 채로 갈팡질팡했다.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