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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 제20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통각의 회복, ‘이름’의 기원을 재구성하다

권여선의 『레가토』와 『비자나무숲』

 

 

류수연 柳受延

1977년생. 인하대 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iamcat@inha.ac.kr

 

 

1. 잘못된 ‘이름’, 기원을 향한 추리들

 

프로이트(S. Freud)의 「늑대인간」(1918)은 유아 신경증에 대한 독보적인 저작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이 논문은 내러티브의 권위에 대한 의미있는 이중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늑대인간」에서 이야기하는 주체는 분명 늑대인간(러시아 청년)이지만 그것을 유의미한 담화로 이끌어내는 주체, 즉 내러티브의 권위를 가지는 것은 프로이트이다. 피터 브룩스(Petet Brooks)에 따르면 “내러티브의 권위는 기원을 종착점과 관련하여 말할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늑대 인간의 허구들」, 『플롯 찾아 읽기』, 박혜란 옮김, 강 2011, 400면) 그는 「늑대인간」에서 프로이트가 내러티브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만이 이 이야기의 출발점, 즉 신경증의 기원인 “최초 장면”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탐정의 역할을 담당한다.

기억의 서사로서 권여선(權汝宣) 『레가토』(창비 2012)는 바로 이 「늑대인간」이 지닌 내러티브의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기억’에 대한 서사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등장인물들의 기억을 조정하는 서술자의 권위는 기억의 현재화를 통해 “최초 장면”을 추적해 들어가지만, 거기에 다다를수록 그 권위는 오히려 약화되어가는 이중의 구조를 가진다. 여기서 기억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함으로써 서술화자에게 절대적인 내러티브의 권위를 제공하는 것, 동시에 기억의 기원을 향한 여정의 끝에서 그 권위의 필연적 몰락을 예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름’이다.

“하연이라. 이뿌긴 헌디 정연이 하연이, 니 해허고 딸 해허고 성 동생 안 같냐?”(261면) 한 사람의 이름은 새롭게 탄생한 한 생명에게 부여되는 최초의 선물이며, 출산의 고통을 이겨내며 그 생명을 탄생시킨 모성의 노고에 대한 인정이다. 『레가토』는 바로 이러한 이름에 대한 서사이며, 그것은 이름의 기원이 왜곡된 현재를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아버지 박인하의 존재가 은폐된 채 정연의 동생이 되어버린 하연의 갈등이 왜곡된 이름의 기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면, 죽음의 문턱에서 ‘아델’이 되어버린 정연은 자신의 이름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정연이, 하연이, 이름은 씨스터즈”(87면)라는 진태의 말처럼 『레가토』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서사적 증식의 기반이 된다. 박인하와 오정연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상 『레가토』의 서사는 하연의 이름을 둘러싼 오해가 해소되고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를 가진다. 따라서 하연의 등장과 함께 플롯을 생성하는 내러티브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하연에게로 기울어진다. 하연은 이 작품 안에서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자신의 이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열정적인 탐정이기 때문이다. 끊어진 정연의 스토리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하연이야말로 이 작품의 플롯을 만들어나가는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하연의 등장을 출발점으로 조각난 전통연구회 구성원들의 기억은 조금씩 맞추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정연의 스토리는 인과관계 속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하연의 플롯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서사의 한 축이 아버지의 이름은 은폐된 채 정연의 동생이 되어버린 하연의 왜곡된 이름의 기원을 복원하는 것이라면, 다른 한 축은 아델이 되어버린 정연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그런데 탐정으로서 하연의 추적은 그 출발점부터 모순적이다. 하연은 분명 탐정이지만, 그녀 자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비밀을 드러낼 결정적인 제보자가 곧 탐정이 되어버리는 구조로 인해, 하연이 만들어가는 플롯은 오히려 진실의 발견을 늦추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하연은 정연의 스토리를 추적하고 재구성해 끊임없이 그것들을 겹쳐지게 만든다. 그러나 여러 인물들의 회상을 통해 겹치는 정연의 스토리는 완결되지 못한 플롯이며, 모두의 기억은 ‘정연의 실종’에 대한 기원으로 거슬러올라가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시키기 위한 동인이 된다. 결국 하연의 추적은 정연이 남긴 미완성의 스토리를 완성시켜 ‘정연의 실종’이라는 부재의 기원을 현존시키기 위한 노력들이다. 하연의 플롯 안에 정연의 이야기가 들어오고, 다시 정연의 이야기가 하연의 플롯으로 완성되는 구조가 바로 『레가토』인 것이다.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를 완결시키는 것이 플롯이기에 그것은 결말에 이르기 전까지 완성되어서는 안되며, 이야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레가토』에서 하연의 플롯을 완성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반복하는 정연의 스토리는, 오히려 이름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을 지연시키는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미완성된 플롯에 대한 독자의 기대야말로 독서를 이끄는 본질적인 힘이다.

 

 

2. 틈새가 된 골방의 투사

 

그렇다면 하연의 플롯은 어떻게 완결되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탐정으로서 하연은 자신의 추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다. 하연은 『레가토』의 서사 안에서 내러티브의 권위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가 만들어가던 플롯은 미완으로 남는다. 끊어진 정연의 스토리를 하나의 플롯으로 재구성하는 내러티브의 최종적인 권위를 쟁탈하는 자는 바로 작가 권여선이다. 이렇게 내러티브의 권위를 바꾸어버린 원인, 즉 하연이 생성하는 플롯이 완성되지 못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박인하다. 『레가토』라는 서사적 퍼즐의 마지막 조각. 박인하는 바로 그가 플롯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 작품의 ‘틈새’(피터 브룩스)가 되어버린다.

프롤로그에 등장한 국회의원 박인하, 그리고 1979년 전통연구회의 구심점이었던 박인하. 그는 가장 치열했던 5월세대가 그것을 통해 가장 세속적으로 성공을 거둔 우리 현대사의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전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레가토』가 후일담이라면, 박인하는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걸친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레가토』를 남자들의 죄의식과 한 여자의 투쟁이 겹쳐진 권여선식 후일담(「에도와 우울」, 『문학동네』 2012년 가을호, 513면)이라고 평가한 김영찬(金永贊)의 말처럼, 『레가토』 안에서 박인하는 골방에 유폐된 죄의식의 상징일 뿐이다.

투사에서 은폐된 범죄자로 추락한 박인하는 『레가토』의 서사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소설 초반을 가득 메웠던 카타콤에서의 열렬한 토론이나 ‘피쎄일’, 그리고 ‘반민주 유신독재 타도’라는 구호는, 박인하의 폭력을 축으로 소설의 배경으로 물러나고 만다. 정연을 떠올리는 전통연구회 멤버들의 추억 속에서도 가장 열정적이었던 그들의 청춘은 배경 이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들의 열띤 구호는 “이들의 삶을 둘러싼 하나의 배경일 뿐 그 자체가 심각한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이경재 「하숙집에서의 하룻밤이 가르쳐 준 삶의 윤리」, 『학산문학』 2012년 가을호, 283면)았기에, 『레가토』는 후일담 소설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레가토』가 1979년이라는 정점에 박인하라는 인물을 놓은 순간부터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유명 배우인 어머니와 부유한 아버지, 그리고 차기 대선주자로 부각되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성공까지. 이러한 박인하의 인생에서 청춘을 보낸 하숙방은 오히려 하나의 일탈에 가까웠고, 그 방을 둘러싼 기억은 그곳을 출구 없는 골방으로 만들어버린다. 따라서 박인하의 골방은 가장 열정적인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상징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지식인 운동가의 한계와 한없는 유약성을 상징하는 공간이 된다. 그럼에도 그가 골방에 봉인한 가해의 기억과 그로 인한 죄의식이야말로 정연의 실종과 하연의 이름을 둘러싼 모든 물음에 답하는 “최초 장면”이며, 따라서 마지막까지 지켜져야만 하는 ‘최후의 비밀’이어야 했다. 틈새로서의 박인하, 즉 골방의 가치는 바로 이 간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우연과 필연으로 엮인 하연과 인하의 만남이, 끊어진 정연의 이야기를 완성할 그 어떤 단서로도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는 하연의 플롯이 완성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지만, 또 그만큼 빨리 벗어나야 하는 ‘지연’(피터 브룩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비밀이 공개되는 절정이 지연될 때 플롯은 가장 능동적으로 생성된다. 서사를 이끄는 힘이 결국 플롯에 있다면, 갈등은 그것의 가장 좋은 연료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레가토』에서 끊어진 두 음을 연결해주는 화음으로서의 ‘레가토’는 바로 박인하 자신이다. 박인하는 정연과 하연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고리이며, 박인하의 골방이야말로 끊겨버린 정연의 시간과 그뒤를 이어 열린 하연의 시간을 겹치게 만들어주는 ‘최초’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박인하는 『레가토』의 서사를 결정적으로 추락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 이유는 박인하라는 인물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를 응시하는 작가 권여선의 지독한 연민 때문이다.

 

순간 그는 평생 그녀와 함께 있으면 다시는 아프거나 굶지 않으리라는 걸 확신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다시는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낡고 보드라운 속옷 같고, 닳고 구겨진 책받침 같고, 심심한 국 같고,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는 이 괴상한 통김밥 같은, 어제까지는 그녀 내부에 자신을 넣을 여성적 기관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녀……(79~80면)

 

정연을 폭력으로 범하고 난 이후, 인하는 그녀로 인해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평화를 얻는다. 그것은 마치 정연이 인하를 구원하기 위해 그 장소에 보내지고, 운명적으로 그의 폭력을 감내해야 했던 것 같은 느낌까지 자아낸다. 한 개인이 지닌 정치적 올곧음이 그가 행한 폭력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음에도 권여선은 시종일관 박인하의 폭력을 비판도 반성도 아닌 연민으로 대한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는 필연적으로 하연이 이끄는 내러티브의 권위를 뒤엎게 된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이끌어진 새로운 플롯 안에서 박인하의 죄는 너무도 쉽게 용서된다.

 

사거리 너머 정류장에 하연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저 아이가 정연의 딸이라고? 내 딸이라고?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는 순간 인하는 액셀을 밟았다. 발끝에 힘이 들어갔는지 차가 휙 튕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좌회전하는 트럭에 오른쪽을 들이받혔다. (…)

“살아 계세요?”

하연이 물었다.

“네, 살아 있어요.”

하연이 울기 시작했다. 줄줄 흐르는 눈물 자국을 따라 두 볼의 살갗이 갯지렁이처럼 불게 부풀어올랐다.(396~98면)

 

오하연이 ‘박하연’이 되는 진실의 순간에, 하연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내러티브의 권위를 상실한 채 서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더구나 교통사고를 당한 박인하를 간호하는 하연의 모습은 이미 이 플롯의 완성(혹은 죽음)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정연을 추적하는 하연의 플롯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하연 스스로 정연의 모습에 겹쳐지며 정연이 되어가는 구성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연이 인하와 정연의 딸이라는 진실의 폭로가 지연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정연에 대한 강렬한 죄책감을 그의 골방에 봉인했기 때문에 인하는 이러한 지연을 만드는 틈새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연이 인하의 딸이라는 사실이 폭로되고 그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인하는 지난날의 과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즉 그는 더이상 틈새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곧 『레가토』의 플롯이 완성될 수밖에 없는, 따라서 오직 추락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하나의 서사적 결절(結節)이 되고 만다.

 

 

3. ‘이름’의 귀환과 통각(痛覺)의 회복

 

오정연. 그녀의 이름은 『레가토』의 모든 인물들에게 상처의 기원으로 작용한다. 하연의 등장은 그들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정연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고, 그들 각각이 정연의 이름을 기억에서 봉인한 채 무()통증의 시간을 보내왔음을 자각하게 한다. ‘통닭 한마리와 맥주’는 ‘초밥과 쌜러드와 훈제족발이 차려진 와인파티’로 대체되었지만, 중년의 물질적 풍요는 결코 가난했던 청춘보다 빛나지 않는다. 생을 감각할 수 없는 무통의 일상 속에서, 그들은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연의 등장은 이러한 그들에게 잊고 있던 상처를, 그로 인한 통증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이제 논의는 다시 골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골방이야말로 『레가토』의 모든 갈등을 초래하는 “최초 장면”이며, 그들이 잊었던 통증을 회복해서 그것을 오롯이 감내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골방은 하나가 아니다. 공동 써클룸인 카타콤으로부터 그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중국집 골방을 거쳐 인하의 하숙방에 이르기까지. 불안을 무기 삼아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외치는 청춘들이 유일하게 자기 안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공간은 골방뿐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비극이었지만, 적어도 그 골방은 그들의 순수를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박인하는 폭력의 가해자가 된 순간, 이 골방의 소유권을 사실상 상실한다. 애초 그에게 골방이라는 위장된 가난은 지식인 운동가로서 뒤집어쓴 가면에 불과했다. 이 점에서 본다면, 그는 단 한번도 골방의 진정한 주인인 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그렇다면 박인하가 가질 수 없었지만, 지켜내고자 했던 골방의 순수를 계승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오정연이다. 정연은 폭력의 피해자면서도, 폭력의 가해자를 넉넉히 안아주는 절대적인 ‘평화’를 상징한다. 더구나 그녀는 자기 안에 폭력을 정화시킬 또다른 골방을 확보한 모성적 존재이기도 하다.

 

토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양손에 먹을 것을 틀어쥐고 있었다. 장떡을 움켜쥔 왼손은 붉은 기름에 물들어 있었고, 오른손엔 토한 직후에 베어문 쑥개떡이 잇자국을 보인 채 비죽이 나와 있었다.(222면)

 

권여선은 모성적 존재로서 정연이 갖는 생에 대한 강렬한 본능을 식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강박적인 금욕에 사로잡혔던 전통연구회의 동년배들에게 그것은 탐욕으로 비쳤고(이경재, 앞의 글 참조), 이는 정연이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연구회 구성원들의 무지한 폭력은, 결과적으로 인하의 폭력에 대한 일차적 면죄부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수태한 그녀의 몸에서 탐식과 게으름을 읽었고, 새끼를 감싸는 예민한 정신에서 비굴과 타협을 보았다. (…) 왜 임신한 그녀가 마지막 닭날개 한 조각도 다 먹고 가지 못하도록 매섭게 다그쳤는가. 통닭집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떠날 때 그녀의 눈빛에 담긴 비애와 슬픔을 왜 일제히 외면했는가. 왜 그들은 그토록 메마르고 무지한 정신으로, 왜 그렇게 근본적인 단절의 포즈를 고수했나. 왜 그렇게 동화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을 품었으며 왜 그렇게 자신들의 무효성을 앞당기기 위해 날뛰었는가. 그녀의 조각배가 죽음의 해협을 지날 때 그들의 배는 어디쯤 항해하고 있었나. 모든 시대의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디서건 제 운명을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광적인 과잉에 사로잡힌 영혼으로 한 시절을 살아냈을 따름인데, 신진태, 그를 구성하는 기억의 허구는 무엇인가.(391면)

 

『레가토』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하연의 이름을 둘러싼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아니라, 진태가 자신들이 저지른 또다른 폭력을 자각하는 이 지점에 있다.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그들의 과잉된 도덕성이야말로 정연에게 가해진 또다른 폭력이었음이 분명해졌다. 그런데 『레가토』의 서사는 이러한 진태의 자각으로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전통연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정연의 실종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는 이 자각은, 역설적으로 박인하의 폭력이 용서될 수 있는 지점을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연의 플롯은 시작되기도 전에 서둘러 마감되고 만다. 그녀는 정연의 실종을 추적할 수 있었지만, 정연의 귀환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플롯을 만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이미 진실의 키는 하연의 손에서 너무 멀어져버린 것이다.

이제 정연의 이야기는 다시 그녀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이름의 상실로 인해 그녀는 ‘아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정연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우리의 질문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왜 정연은 자신의 이름을 잃어야 했을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정연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주기 위한 작가의 마지막 장치라고 보아야 한다. 기억의 상실은 아델로서의 삶이 정연으로서의 삶을 대체할 수 없도록 만든 방편이다. 그 때문에 정연은 한국을 떠나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새로운 삶을 살았음에도 마지막까지 ‘아델’이 아닌 ‘정연’으로서 남겨질 수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오랜 생활을 했던 은수가 한국에 돌아와 알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것과 대비된다. 은수와 달리, 정연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길고 긴 투쟁의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끊어진 정연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바통은 다시 작가 권여선에게로 넘겨진다.

과연 정연은 아무런 혼란 없이 귀환되었는가? 작가는 봉인된 기억을 되찾는 것만으로 정연이 고향에서 부재했던 자신의 시간과 화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이름’의 의미를 환기해야 한다. 한 인간에게 이름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호명보다 훨씬 크다. 그것은 그의 탄생에 부여된 첫번째 사회적인 의미이며, 그가 존재로서 첫 관문을 통과했음에 대한 선언이기도 하다. 정연에게 ‘아델’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는 순간, 이미 그녀의 존재는 뒤틀릴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 정연이라는 존재를 규명해주었던 이름은 지워졌고, 그녀는 ‘아델’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가 아델을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녀를 빠리까지 데려오게 되었는지, 그녀가 모든 고통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희망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더 품을 가치가 있다는 진실을, 저 부서지기 쉬운 그녀의 육체가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입증해왔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428면)

 

정연은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실종되었지만, 하연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밝혀진 순간 순식간에 귀환된다. 에르베의 마지막 말은 기적에 가까운 정연의 귀환에 담긴 간절한 희망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귀환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허구의 산물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정연의 생일상은 차리지만 제사상은 차리지 않는 두 보살의 희망을 완성하는 것이며, 정연이 어딘가에 살아 있는 걸로 소설을 쓰겠다는 하연의 다짐을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다.(308면) 아델에게 봉인된 정연의 기억은, 그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자의 기억을 통해 해방되었다. 그녀의 실종처럼 그녀의 귀환 안에서도 정연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에르베의 말처럼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던 희망의 현재화이다. 그러나 봉인된 정연의 기억이 해제된 순간부터 그녀가 마주해야만 하는 삼십년이라는 세월의 혼란은 『레가토』의 결말이 보여주지 않는 진실이다.

그것은 작가 권여선의 지독한 연민이 정연이라는 인물이 가진 강인함까지 봉인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연은 골방의 폭력을 가장 아프게 겪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골방의 순수를 강렬하게 자각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녀는 전통연구회 구성원 중에서 유일하게 그들의 청춘을 사로잡았던 골방의 진실을 두 눈으로 지켜볼 용기를 가졌던 인물이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 안에 골방을 만들어 한 생명을 지켜낸 강인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모성이었기에 강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아픔을 들여다볼 줄 아는 강한 인간이기에 모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억상실로 인해 정연은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역사의 폭력을 충분히 아파하고 이겨내야 했던 시간을 빼앗긴다. 그 때문에 『레가토』의 서사를 마감하는 에필로그는 독자에게 가장 눈부신 귀환을 선사하지만, 결국 정연의 진정한 귀환은 사실상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지고 만다.

가장 매력적인 플롯은 늘 미완성되고자 한다. 플롯의 완성은 작가와 독자를 안심시킬 수 있지만, 그것은 독자의 가장 간절한 카타르시스를 희생시킨다. 플롯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더이상 반복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며, 이는 곧 이야기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가토』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델의 등장은 ‘정연의 실종’이라는 플롯을 완성시켰지만, 그 순간 작품을 이끌어온 가장 큰 매력으로서 이야기는 영원한 죽음을 맞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레가토』의 서사는 1980년 이후 우리의 현대사가 봉인했던 5월의 아픔을 다시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권여선은 오늘의 현재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이 골방의 시간을, 그리고 골방을 벗어나기 위한 고통의 시간을 제대로 살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권여선의 이러한 제안이 뜨거운 진정성으로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 역시도 아직 그 시간을 완벽하게 살아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더 나아가 권여선은 자기 자신이이야말로, 그리고 소설 속의 수많은 자아들이야말로 골방에 스스로를 봉인한 무통증의 투사였음을 인정한다.

 

 

4.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까?

 

통각의 상실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기억의 서사로서 『레가토』가 잃어버린 통각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아픔의 기원을 거슬러올라가는 시도였다면, 소설집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 2013)에는 그런 과정을 통해 현재화된 통증을 다시 느껴야 하는 작가 자신의 망설임과 두려움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비자나무 숲』에서 권여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전과는 달라져 있다. 통각의 회복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기억의 서사가 가진 최종 목표가 과거의 통증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이었다면, 그 서사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현재’이다. 『비자나무 숲』은 작가 권여선이 기억의 여정으로부터 돌아와서 비로소 마주한 ‘오늘’을 담아내고 있다. 봉인이 풀려버린 과거의 통증과 함께, 눈앞에 다가온 현재는 복합적인 병증으로 드러난다. 기억을 망각시켰던 통증의 근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간헐적인 고통으로 되새김질된다. 그럼에도 현재의 시간은 새롭게 생성되는 또다른 통증의 향연이다. 『비자나무 숲』은 이러한 현실 앞에 선 작가 권여선의 두려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그러한 머뭇거림을 가감 없이 드러내줌으로써 기억의 서사가 완료되었음을 선언하는 듯하다.

『비자나무 숲』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과거형이던 문체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이다. 그것은 권여선이 이전의 서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서사적 발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한다. 사실 그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늘 ‘무엇을 할까?’보다 ‘무엇을 했던가?’를 고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미래형이 없는 일기를 썼고 그로 인해 기억은 늘 진행 중이었다. 때로 그것은 오히려 기억을 충분히 반성할 수 없게 만드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다. 기억으로부터 오는 통증은 충분히 앓지 못한 채 봉인되었고, 그로 인해 인물들의 현재는 상처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두려운 무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과거를 살아내기 위해 현재를 지워내는 모순을 감내했던 것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연상하게 하는 「팔도기획」은 ‘바틀비라는 인물이 가진 불가해성과 애매성’(한기욱 「근대체제와 애매성」, 『안과밖』 제34호, 영미문학연구회 2013, 316면 참조)을 ‘작가적 자존감’이라는 좀더 해석 가능한 것으로 구체화시킨다. 이러한 시도는 다소 거칠지만, 작가로서 권여선 자신이 겪는 현실적인 고민들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 권여선은 두명의 분신을 등장시킨다.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는 닭발집 사장의 지독한 외로움을 예민하게 발견하는 윤작가와 그러한 자존감을 동경하지만 늘 자신의 지향에 다다를 수 없어 ‘매문(賣文)’해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나’.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은 소설가로서 권여선이 겪는 ‘오늘’의 고통이다. 그럼에도 「팔도기획」은 대단한 긍정성을 보이는데, 그것은 작가 자신이 궁항매문(窮巷賣文)의 현실로 인해 좌절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윤작가가 떠나고 그녀를 닮은 또다른 미지의 방문객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에는 자신을 둘러싼 두개의 정체성을 그대로 긍정하겠다는 권여선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로부터 『비자나무 숲』의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기억의 서사를 마치고 나온 그가 새롭게 쓸 서사는 이러한 현실적 갈등 속에서 고군분투하리라는 것.

 

 그러나 나는 양손에 상자를 들고 걸어가는 상미의 둔한 등허리와 부은 종아리와 닳은 샌들 굽을 보는 순간 쏜살같이 상가 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다시 교회 쪽에서 한 번 더 꺾었다.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전속력으로 길모퉁이를 꺾으며 달렸다. 3년 전 이미 나는 올림머리 신부화장 쪽에서 길모퉁이를 돌아 녹은 머리 탄 머리의 세상으로 옮겨왔다. 재생이라니, 그건 간단한 만큼 불가능한 개소리였다.(「길모퉁이」, 148면)

 

기억의 여정으로부터 돌아와 마주한 현재는 과거와는 다른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길모퉁이」의 ‘나’는 『레가토』와는 전혀 달라진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레가토』의 모든 인물들이 철저하게 과거를 살았다면, 「길모퉁이」의 ‘나’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현재를 살고자 한다. 하지만 다단계라는 단 한번 잘못 돈 길모퉁이로 인해 망가진 ‘나’의 현재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 ‘나’는 새로운 길모퉁이를 마주할 때마다 늘 과거가 아닌 현재를 선택하지만, 여전히 과거는 끊임없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그 과거 때문에 그녀는 늘 더 좁고 초라한 자리로 내몰린다. 고시원이라는 골방조차도 사치일 수밖에 없는 ‘나’의 현재는 기억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 권여선의 현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가 느끼는 두려움은 곧 권여선이 마주한 현실적인 두려움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현재라는 시간에서 마주한 골방의 의미는 『레가토』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그 어떤 열정도 남겨지지 않은 골방이란, 그저 고통스러운 현재의 상징물일 뿐이다.

『비자나무 숲』의 서사는 이렇게 기억이라는 골방으로부터 인물들을 끌어내 다시 누추하고 남루한 현실의 골방 앞에 서게 한다. 그들 앞에 놓인 현재는, 기억의 여정이 고통의 회복이 아닌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였다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그리고 권여선의 인물들은 또다른 과거가 되어버릴지 모를 혹독한 현재를 살아내야 한다. 이러한 현재의 아픔을 온전히 앓기 위해서 과거의 상처는 드러나야 한다. 때로 그것이 스스로 은폐시킨 가식(假飾)을 만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두 남녀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호재가 모퉁이를 돌았고 보이지 않는 끈에 묶인 듯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모퉁이를 돌았다. 묶은 머리가 한 포기 상추처럼 까딱거리다 사라지는 걸 본 순간 그녀는 지독한 경멸과 쓰라린 그리움이 결합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달고 쓰고 시고 떫은, 아주 기묘하면서도 익숙한 감정이었다.(「꽃잎 속 응달」, 228면)

 

「꽃잎 속 응달」은 기억 속에서 되새김질하는 “최초 장면”이 너무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 유약한 것임을 분명히한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그것이 끝없이 재생산될 수 있는 현재적 위력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달고 쓰고 시고 떫은” 또다른 ‘그녀’의 악몽이 시작되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양숙현이 느끼는 감정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후회와 고통 속에 반복되었던 한교수와의 악연은 지나버린 과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지속되는 것이었다. “캑 소리”(201면)조차 내지 못한 채 봉인시켜버린 기억은 아픔의 시간을 지연시킬 수는 있었지만, 아픔을 치유할 수도 아픔의 근원을 제거할 수도 없게 만들었음이 명확해진다. 자신이 움켜쥔 것을 놓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망설임은, 한교수에게 또다시 “원래 역사는 이런 귀퉁이에서 이뤄지는 거야”(217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억의 삭제를 선사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지연이 만들어내는 또다른 ‘반복’이다. 숙현의 눈앞에서 목격되는 또다른 ‘그녀’, 이호재의 뒤를 따라가는 여학생에겐 한교수의 뒤를 따라가던 숙현 자신의 기억이 덧씌워진다. 그것은 기억의 여정을 통해서도 완결시킬 수 없던 고통스러운 “최초”가 또다시 재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 자신이 침묵하는 한 그 “최초 장면”은 영원히 분석되지 않은 채,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으로만 실감될 것이다.

 

 그 애가 어리석은 꼼수만 쓰지 않았더라도 뜨거운 물을 퍼붓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 애가 발작을 일으키지만 않았더라도 화분으로 내려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책임은 저 악마에게 있다. 그녀 자신은 결백하다. 그녀도 죽은 그 애와 똑같이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애는 그녀의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

그렇다.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그분께서 이런 시련을 통해 그녀에게 이런 소명을 주신 것이다.

오, 주여! 은혜는 수난을 당하는 성녀(聖女)처럼 공포와 희열에 휩싸인 채 알몸을 달달 떨면서 거울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소녀의 기도」, 193~94면)

 

기억은 어쩌면 인간이 가진 최고의 면죄부일지도 모른다.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기억을 왜곡함으로써, 죄악으로부터 스스로를 가장 먼 곳에 위치시킨다. 가해의 기억을 피해의 기억으로 왜곡하는 은혜의 모습에는 『레가토』에서 인하의 변명이 오버랩된다.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변질될 수 있는지를 통해서, 권여선은 자신이 이어왔던 기억의 서사가 가진 모순을 그 스스로 가장 절박하게 토로한다. 이 지점에서 『레가토』에서 서사적 추락을 야기했던, 박인하에 대한 작가 권여선의 연민 역시 반성되고 있다. 이를 통해 가장 끔찍한 범죄의 기록으로서 「소녀의 기도」는, 이제 비로소 작가 권여선이 새로운 출발점 위에 서게 되었음을 방증하는 서사가 된다.

이미 통각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비자나무 숲』에서 권여선은 통증의 기억을 회복한 것이 결코 현실의 통증을 이겨낼 백신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더구나 정연의 실종에서 촉발된 상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날카롭게 드러난다. 두 단편 「은반지」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은 기억의 오류가 만들어낸 또다른 ‘실종’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레가토』의 서사와 직접적인 연계를 갖는다.

 

 이건 꼭 잊지 마세요…… 우린 다 죽어요…… 그게 여기…… 규칙이에요…… 평생 비루먹은 말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한밤중에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앉았어요…… 머리 검은 짐승은…… 어서어서…… 준비를…… 하세요……

흠칫 놀란 오 여사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왼손 약지에서 은반지가 반짝, 거렸다.(은반지, 85~86면)

 

통각을 회복하고 현재로 돌아온 권여선의 인물들이 마주한 현실은 『레가토』의 그것보다 훨씬 가혹했다. 기억은 늘 시간의 왜곡 속에서 자신만의 변명을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시간의 왜곡이 사라진 현재는 기억보다 더 잔인하고 고통스럽다. 오년이나 함께 의지하고 살던 심여사가 갑자기 떠나버린 후 외로움을 느끼던 오여사는, 문득 심여사가 있는 요양원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오여사가 만난 심여사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오여사가 우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던 은반지는 심여사에게는 비루한 삶에 대한 낙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를 통해 권여선은 회상이라는 기억의 여정이 오히려 달콤했음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마주한 고통은 죄책감보다 더 아프고 흉물스러운 것임을 직시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모든 이의 기억은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에서 끝나고 만다. 아무리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결국 우리의 기억은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기억의 여정을 통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통증의 “최초 장면”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천년의 시간을 산 비자나무의 ‘최초’는 그저 작은 씨앗일 뿐이다. 비자나무 숲에 가더라도, 혹은 가지 못하더라도 그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 깨달음을 통해 권여선은 비로소 기억과 기원에 대한 오랜 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억은 멈춤이 아니라 나아감이다. 기억의 서사는 과거에 묶인 인간들에 대한 초상이 아니라 그 기억을 통해 현재를 더 강하게 살아갈 인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숨을 쉬게 될 것이고 그때쯤이면 비자나무 숲 한가운데에 있을 것이다. 가을 저녁처럼 어둑하고 선선한 그 숲에서 나는 도우와 함께 어머니의 꿈 얘기를 들을 것이다.(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숲, 117면)

 

기억은 어쩌면 환각이다. 통각을 회복했다 해도 기억 속의 통증을 다시 앓을 수는 없다.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에서 권여선은 비자나무 숲에 가지 못해도,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현재에서 수많은 기원을 마주친다고 말한다. 완벽하게 보존되는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기억하는 정우와, 도우가 기억하는 정우, 정우의 어머니가 기억하는 정우가 각기 다른 것처럼, 기억은 늘 각자의 현재에서 왜곡되고 서로 조금씩 어긋난다. 따라서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의 플롯이 완성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작가는 정우 어머니의 꿈 얘기를 듣게 하기 위해 ‘나’를 제주도까지 오게 했으면서도,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게 만든다. 어머니의 꿈이어야 할 소설의 마지막은 ‘나’의 환각으로 대치됨으로써 영원히 순환하는 미완의 플롯을 완성한다. 이것은 마치 정연의 귀환으로 인해 죽음을 선언받은 『레가토』의 서사에 대한 반성문과 같은 느낌을 준다. 정연의 귀환이라는 『레가토』 플롯의 묘비명은 사라지고, 플롯은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5. 귀환하지 않은 기억들

 

권여선은 우리의 시대를, 부재를 생성하는 시대로 진단한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가 격렬하게 투쟁하면서 성취한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는 ‘오늘’을 살고 있다. 이처럼 기억에서 ‘실종’되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기억의 왜곡을 자각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비자나무 숲’의 의미는 다시 환기되어야 한다. 비자나무 숲은 천년의 시간이, 오늘의 땅을 뚫고 돋아나는 새순의 힘겨운 투쟁과 공존하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공간인 것이다. 그곳은 세월의 인고 속에서 고통이 무뎌지는 공간이며, 새로운 천년의 고통이 시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왜 권여선은 비자나무 숲 앞에 독자를 끌어왔는가. 이 물음이야말로 『레가토』를 통해 기억의 여정을 끝내고, 이제 다시 독자 앞에 돌아온 권여선의 새로운 방향전환에 대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그 답은 『비자나무 숲』의 마지막 작품, 「진짜 진짜 좋아해」에서 내려진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262)

 

기억이란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 또한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 것인가. ‘나’가 수개월을 함께 산 경은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것, 그것은 수많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 감정적 무통증이 되어버린 우리의 자화상을 반영한다. ‘나’가 기억하지 않음으로 인해 경은과 함께한 시간의 토막은 사라지고, 경은은 ‘나’의 안에서 실종된다. 이것은 『레가토』에서 정연의 실종과 겹쳐진다. 정연과 경은은 모두 누군가의 기억에서 삭제됨으로써 ‘실종’되고 말았다. 그 실종의 범위가 한국이라는 국가 안이든, ‘나’라는 한 개인의 내면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을 삭제함으로써 혹은 왜곡함으로써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삶을 누락시키고, 그로써 우리를 둘러싼 타자를 ‘실종’시킨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사적 인간’이라고 지칭(『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112면)했던 그들은 바로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 생겨났고, 우리는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졌어야 할 자리를 박탈한 것이다.

이제 기억의 서사는 『레가토』를 통해 하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말줄임표였다. 『비자나무 숲』은 이러한 기억의 서사가 또다른 당위 속에서 새롭게 시작될 것을 예감하게 한다. 권여선의 서사는 여전히 귀환하지 않은 채,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기억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