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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오늘, 세계문학을 다시 읽다

 

발자끄와 리얼리즘

‘리얼리즘의 승리’를 다시 생각한다

 

 

김동수 金仝洙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길은 끝났는데 여행은 시작되었다: 가라따니 코오진의 『세계공화국』」 「아름다운 것들의 사라짐 혹은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역서로 『아미엥에서의 주장』 등이 있음. donnard@hanmail.net

 

 

1. 엥겔스의 발자끄 비평과 ‘리얼리즘의 승리’

 

발자끄(Honoré de Balzac, 1799~1850)에게 리얼리즘은 사후적인 개념이다. 그의 생전에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이 용어는 발자끄가 죽은 후인 1855년에야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Gustave Courbet)가 연 ‘레알리슴(Réalisme)’ 전시회를 기점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미술에서 시작된 이 조류는 문학으로 전파되었고 후대의 자칭 리얼리즘 작가들은 발자끄를 자신의 전범으로 삼았으며, 문학사가들은 발자끄를 리얼리즘이라는 사조 아래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리얼리즘은 특정한 시대의 예술사조나 양식을 가리키는 데 국한되지 않고 예술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된다. 이처럼 리얼리즘이 일반성을 획득하게 된 데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명제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엥겔스가 이 명제를 내세우게 된 계기는 잘 알려져 있다. 1884년에 마거릿 하크니스(Margaret Harkness)라는 영국 여성 소설가의 작품 『도시의 처녀』(A City Girl)를 읽은 엥겔스가 그녀에게 작품에 나타난 리얼리즘적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리얼리즘의 모범적인 예로 발자끄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는 리얼리즘을 ‘전형적 상황에서 전형적인 인물들을 진실하게 묘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발자끄의 작품이 지닌 리얼리즘적인 장점을 열거한다.

 

이처럼 발자끄가 자신의 계급적 공감과 정치적 편견에 역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자신이 애착을 가진 귀족들의 몰락의 필연성을 그가 실제로 보았고, 그들을 몰락해 마땅한 족속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진정한 미래의 인간들을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그들이 존재했던 그러한 곳에서 그가 실제로 보았다는 점—이것이야말로 나는 리얼리즘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 발자끄 선생의 가장 멋들어진 특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1)

 

엥겔스의 테제는 여러가지 면에서 재고를 요한다. 우선 작가와 작품이 서로 상반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하는 소박한 질문을 떨치기 힘들다. 작품에는 작가의 의식적인 통제를 벗어나는 무수히 많은 요소가 담겨 있다는 점을 아무리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배반하는 일이 가능한가? 단지 그렇게 읽힐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읽히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런데 여기에는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발자끄의 정치적 편견이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흔히 발자끄는 정통왕조파라는 이유로 반동적인 정치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평가되곤 한다. 알다시피 발자끄는 그의 유명한 『인간극』(La Comédie Humaine) 「서문」(“Avant-propos,” 1842)에서 자신은 “왕정과 종교라는 두가지 영원한 ‘진리’의 빛 아래에서 글을 쓴다”2)고 주장했으며, 여러 작품에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공공연하게 표명했다. 심지어 발자끄는 1830년대초에 정통왕조파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이로써 발자끄가 반동적인 정치사상을 가졌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입증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겉보기처럼 단순하지 않다. 발자끄는 젊은 시절에 공화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정통왕조파로 ‘전향’한 이후에도 그의 정치적인 신념은 정통왕조파의 일반적인 생각과 그리 부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은 발자끄가 겉으로 내세우는 정치적 입장과 달리 자유주의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발자끄 스스로도 그의 오랜 친우이자 공화주의자인 쥘마 까로(Zulma Carraud)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우리 당파에서 내 정치적 견해를 알게 된다면 분개할 것”3)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여기에서 발자끄의 정치사상에 대해 본격적인 해명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발자끄의 정치적 견해를 단순하게 반동이라고 취급하는 것은 성급한 일임을 지적하는 데 만족하기로 하자.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이 그의 정치적 견해에 반하는 것인지도 따져볼 여지가 있다. 엥겔스가 ‘리얼리즘의 승리’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발자끄가 자신의 왕당파적인 신념과 달리 귀족계급 몰락의 필연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담당할 인물을 왕당파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공화주의자 중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귀족계급 몰락의 필연성을 그려냈다고 해서 왕당파적인 신념에 반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농민들』(Les Paysans, 1844)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대영지()로 은퇴한 백작에게 농민들이 반발하자 통찰력이 있는 사제 브로세뜨는 백작 부부에게 그들의 풍속을 바꾸어 상황에 긴급하고 단호하게 대처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자신의 향락을 포기하기 싫었던 백작부인은 이에 대해 “두고 보죠”라며 문제를 회피한다. 백작부인의 반응에 실망한 사제는 자리에서 물러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하느님, 만일 당신의 거룩한 뜻이 빈자들의 봇물을 풀어 사회를 바꾸는 것이라면, 저는 당신이 부자들을 눈멀게 하심을 이해하겠나이다.”4) 냉철한 지성의 소유자인 브로세뜨는 자신이 지지하는 세력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현실을 혼동하지 않고 그 세력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로세뜨의 태도야말로 귀족계급을 바라보는 발자끄의 시각과 거의 일치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의 명제에서 좀더 문제가 되는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발자끄가 자신과 정치적으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인물들에게서 미래의 인간상을 찾아냈다는 주장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리얼리즘의 승리론은 상당한 근거를 가진다고 인정할 만하다. 엥겔스의 구체적인 발언을 들어보자.

 

그리고 그(발자끄인용자)가 항상 조금도 아낌없이 예찬하는 유일한 인간은 그의 가장 철저한 정치적 반대파인 쌩-메리 수도원의 공화주의자 영웅들인데, 이들은 당시에 실제로 인민대중의 대변자였습니다.5)

 

실제로 발자끄의 소설 속에서 1832년 공화주의자들의 봉기과정에서 죽은 미셸 크레띠앵은 매우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발자끄 소설세계의 중심 인물 중 한명인 다니엘 다르떼즈의 절친한 친구이다. 1839년에 발표된 「까디냥 공작부인의 비밀」(“Les Secrets de la Princesse Cadignan”)에서 주인공 다르떼즈는 죽은 친구를 위대한 인물로 묘사한다. “미셸 크레띠앵은 천사였습니다, 부인. (…) 저는 고대 영웅들 중에 그보다 우월한 인물을 알지 못합니다.”6) 이보다 후에 집필되지만 훨씬 앞선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잃어버린 환상』(Illusions perdues) 제2(1843)에서 크레띠앵은 실력을 키우고 있는 건실한 젊은이들 모임인 ‘쎄나끌’의 일원이자, 세상의 면모를 바꿀 수도 있었을 위대한 정치인으로 소개된다.

하지만 발자끄가 크레띠앵을 극히 높이 평가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엥겔스가 말하듯이 쌩-메리의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까디냥 공작부인의 비밀」에서 다르떼즈는 크레띠앵을 “협소한 사상을 가진 공화주의자들”과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미셸 크레띠앵의 핵심사상은 유럽연방에 관한 것으로, 단지 공화주의자 중에서 자신의 생각과 가장 유사한 부류를 발견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환상』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미셸 크레띠앵은 자신의 것이 아닌 교리를 위해 죽었다. (…) 그의 연방은 국민공회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는 젊은 미치광이들이 주장하는 무한한 자유라는 끔찍한 생각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덜 터무니없는 것이었다.”7) 그러므로 발자끄가 쌩-메리 수도원의 바리케이드에서 투쟁한 공화주의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보는 엥겔스의 시각은 이러한 반복된 지적을 간과한 탓일 것이다.

공화주의자에 대한 반감에도 공화주의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발견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한 청년에게 부여했다는 것은 발자끄의 뛰어난 균형감각을 보여주는 점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상반됨에도 긴밀한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크레띠앵과 다르떼즈의 관계는 공화주의와 왕정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정치질서의 상징과도 같다 할 것이다. 그러나 크레띠앵의 죽음이 암시하듯이 발자끄는 이상적 공화주의가 현실화될 가능성을 크게 믿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야를 조금 넓혀보면 발자끄의 작품에서 자꼬뱅 공화주의자가 높이 평가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발자끄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기본적으로 그 정직성과 순수함을 존중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판단력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농민들』에 등장하는 니즈롱 영감에 대한 화자의 평가이다. 니즈롱 영감은 왕년의 열렬한 공화주의자로 여전히 그 청렴함과 강직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사도와 같은 인품을 지니고 있으며 강철처럼 굳세고 황금처럼 순수하다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의 공화주의는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인민의 변호사인 그는 당위로서의 공화국을 믿었다. 사상보다 훨씬 무시무시할 이 이름이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이다. 그는 장-자끄 루쏘의 공화국을 믿었고, 인류의 박애, 아름다운 감정의 교환, 미덕의 선언, 술책 없는 선택, 요컨대 스파르타처럼 작은 범위에서라면 가능했겠지만 제국의 수준에서는 공상에 불과한 모든 것을 믿었다.8)

 

2. 전사(前事): 졸라의 발자끄 비평

 

그런데 엥겔스의 명제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또다른 계기는 그 논리가 순전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알고 보면 발자끄 사후에 반대파에서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시도는 여러번 있었다.9) 발자끄 장례식에서 빅또르 위고(Victor Marie Hugo)가 읽은 추도사는 유명한데, 공화주의자인 위고는 발자끄를 기리며 그가 “자신도 모르게” ‘혁명적 작가’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도 중에서도 1870년경 졸라(Émile Zola)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발자끄 전집 간행을 계기로 쓴 두편의 평론10)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비록 ‘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졸라의 평론은 엥겔스의 편지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1)

졸라는 “발자끄가 그토록 소리 높여 외쳤던 자신의 모든 믿음들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어디까지 나아갔는지”12)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발자끄는 “귀족계급이 위대하고 정당하고 유용하다고 생각”(279면)하지만 사실상 “거기에는 우스꽝스러운 자들이나 탐욕스런 인간들 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290면) 반대로 발자끄의 견해와 달리 그의 소설 속에서 위대한 인물로 형상화되는 것은 민중이다. 발자끄는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위대한 면모”(283면)를 꾸밈없이 보여줄 수 있었던가? “왜냐하면 그것이 현실이고 그는 현실의 화가이기 때문이다.”(283면)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제외한다면 이는 엥겔스가 ‘리얼리즘의 승리’론에서 주장한 바와 거의 같지 않은가?

엥겔스가 졸라의 글을 직접 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그 논리를 접했을 개연성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엥겔스와 긴밀하게 교류했던 맑스의 둘째 사위 뽈 라파르그(Paul Lafargue)가 졸라에 대한 평을 쓸 정도로 졸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3)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일치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엥겔스가 하크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발자끄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졸라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얼리즘의 대가”14)로 본다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은 인물의 논리를 원용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 지적인 부정직성이나 학문적 도용의 문제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엥겔스는 졸라처럼 공식적으로 글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편지에서 상대방에게 실용적인 지침을 제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구도를 도입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기본적인 논리구조의 유사성 속에서 양자의 맥락과 뉘앙스의 차이를 섬세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졸라가 발자끄를 민주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발자끄 작품의 유용성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또한 발자끄를 통해 민중의 진출이라는 자신의 역사관이 올바름을 확인받고자 하기 위함이다. “위대한 지성치고 현대의 도도한 민주주의운동에 복종하지 않은 인물은 없다. 금세기 이래 우리의 가장 저명한 작가들은 민중의 편에 서왔다. (…) 저도 모르는 민주주의자들인 이 후자의 인물들이야말로 민중의 논리적이고 결정적인 출현과 관련하여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고백인 것이다.”(278면) 그에 반해 엥겔스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지닌 작가에게 현실에 대한 객관적 묘사를 통해 달성되는 경향성이 예술작품에 더 유리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발자끄를 끌어들인다. 졸라에게는 위대한 문학이 민주주의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일반론이 중요한 반면, 엥겔스에게서는 작가의 반동적인 견해조차도 극복할 수 있게 만드는 구체적인 예술적 방법이 강조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자신의 역사관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을까? 졸라는 발자끄에게서 민중 자체에 대한 은밀한 이상화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는 『골동품 진열실 』(Le Cabinet des Antiques, 1839)에서 데그리뇽 가문에 헌신하는 공증인 셰넬을 “자신의 힘을 알게 되고 지성과 활력과 생명력을 재정복한 민중”(281면)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런데 실제 작품을 보면 셰넬을 민중의 대변자로 내세우는 졸라의 해석은 상당히 자의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아버지가 데그리뇽 집안의 하인 출신이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셰넬은 직업으로 보나 역할로 보나 쁘띠부르주아 내지 부르주아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졸라는 발자끄가 “사회적 사다리를 단박에 뛰어오르는 노동자들과 토지의 영주들이 되는 농민들에 대한 찬탄”(282면)을 보여준다고 일반화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발자끄가 『농민들』에서 보여주는 인식과 전혀 다르다. 『농민들』의 서문에서 발자끄는 농민으로 대변되는 민중의 위협을 경고한 바 있다. “대혁명이 만들어낸 이 반사회적 요소는 언젠가 부르주아지를 집어삼킬 것이다. 마치 부르주아지가 귀족계급을 먹어치웠듯이 말이다.”15)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반사회적’이라는 수식어다. 발자끄에게 민중은 사회 전체를 통제하고 지배할 지적도덕적 능력이 결여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권력을 향한 민중의 쇄도가 사회를 무정부상태로 빠뜨릴 것이라고 우려했다.16)

추상적 민중의 활력과 선량함에 대한 졸라의 과도한 찬사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단순화된 논리와 연결된다. 졸라에 따르면 19세기는 ‘혁명’의 숨결이 지배하는 시기였으며, 대혁명이 개시한 역사의 진행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현실의 화가’인 작가를 민중의 편으로 만드는 일도 사실상 역사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이 인물은 다른 뛰어난 지성들도 굴복했던 ‘혁명’의 숨결의 노리개였다. 물론 그는 저항했고 자신의 발을 땅에 붙이려 했고 자신이 숨결을 이겨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숨결은 그를 실어날랐고, 그를 미래의 인간, 혁명가로 만들어버렸다.(288면)

 

졸라에게 사실에 대한 숭배와 정치적 진보에 대한 믿음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것은 역사는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는 진화론적인 관점을 그가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그는 공화주의를 옹호하면서 ‘사실의 전능한 힘’을 운위할 수 있는 것이다. “18년에 걸친 제2제정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실의 전능한 힘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임시방편이자 진정제로서 환영받았던 제2제정은 스스로 힘을 잃어갔고, 오히려 공화국에 대한 바람을 확산시켰다. 제2제정이 무너졌을 때 결정적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것은 사실들이었다.”17) 실증주의적 진화론에 입각한 이러한 낙관주의는 기실 졸라 자신의 작품활동과 그리 부합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졸라의 주장이 갖는 이점은 통속적인 리얼리즘론의 기본논리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서른 즈음의 공화주의자 저널리스트였던 졸라의 투박한 역사관과 달리 노년의 엥겔스는 이처럼 단순화된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민중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을 신격화하는 대신 공화주의자라는 당시의 진보적인 정치적 분파를 거론하고 있으며, 또한 ‘혁명의 숨결’과 같은 숙명론적인 표현을 채택하지도, 사실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를 공유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졸라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지점인 ‘전형적인 환경에서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라는 구체적인 리얼리즘의 방법을 강조한다.

우리는 졸라와 엥겔스 사이에 공존하는 기이한 수렴과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를 진화주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엥겔스의 이중적 관계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에띠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는 ‘유물변증법’에 대한 엥겔스의 정식화와 진화주의 사이의 모순적인 관계에 주목하면서, 엥겔스는 “진화주의의 무기를 이용하여 고정론과 투쟁한 후, 그 비판을 헤겔에 준거함으로써 이 진화주의가 형이상학 혹은 체계로 전화하는 것에 대한 투쟁에 들어간다”18)고 말한 바 있다. 아마 마찬가지의 논리가 그의 리얼리즘론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엥겔스는 ‘리얼리즘 승리’론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졸라의 논리가 하크니스의 문제점을 교정하는 데는 유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원용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섬세한 차이를 통해 졸라와 구별되는 리얼리즘의 이론이 필요함을 실천적으로 입증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엥겔스가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부르주아적 낙관주의의 어떤 요소를 보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미셸 크레띠앵을 공화파 일반과 혼동하는 오독이야말로 저 결정론적인 역사관의 흔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3. 후사(後事): 루카치의 발자끄 비평

 

엥겔스의 ‘리얼리즘의 승리’론이 졸라 식의 사실에 대한 숭배와 구분되는 리얼리즘론을 요청한다고 할 때,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 후대의 비평가로는 단연 루카치(György Lukác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엥겔스의 리얼리즘 승리론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작가의 편견과 작품이 대립할 가능성을 거론한다.

 

엥겔스가 발자끄에 대해 말하면서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부른 것은 리얼리즘적인 예술창작의 근원을 건드리고 있다. 이 개념은 진정한 리얼리즘의 의미를 보여준다. 위대한 예술가에게서 보이는 현실에 대한 갈망과 심취, 그리고 그 도덕적 측면으로서 작가의 정직성이 그것이다. 만일 발자끄, 스땅달, 똘스또이처럼 뛰어난 리얼리스트들에게서, 그들이 상상한 상황이나 인물의 내적인 예술적 진화가 그들이 가장 애호하는 편견이나 심지어 신성한 신념과 모순관계에 들어선다면, 그들은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편견과 신념을 벗어던지고 그들이 실제로 본 바를 묘사할 것이다.19)

 

루카치에게 리얼리즘이란 “시대의 거대한 문제들에 뿌리내리고 현실의 진정한 본질을 가차없이 재현하는 것”(17면)이지만, 그것은 사실에 대한 숭배나 숙명론적 역사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루카치가 말하는 현실의 본질이란 어떤 정태적인 사물이나 사태로서의 ‘사실’이 아니다. 의식의 물화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사회 속에서 ‘순수한 사실’이란 오히려 파편화되고 왜곡된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작가는 사회의 총체를 인식하기 위해서 지배적인 세계관과 근본적으로 단절해야 한다. 루카치에 따르면 올바른 세계관 없이 훌륭한 리얼리즘 작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세계관은 작가의 이런저런 이론적 표명과 같지 않다. 심지어 루카치는 발자끄의 모순을 세계관 내부의 모순으로 전환시키기까지 한다. 그에 따르면 발자끄와 관련한 진정한 모순은 세계관과 현실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세계관의 표층과 심층’의 대립에 있다는 것이다.(15면)

세계관의 표층과 심층이라는 모호한 비유를 통해서 루카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관찰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이다. 오직 세계와의 실천적인 결부 속에서만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전면적이고 진지한 관계를 수립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인 관계는 비록 정확히 의식화되지 않을지라도 세계에 대한 작가의 기본적인 태도를 구성한다. 얼핏 보기에 유사한 리얼리즘과 자연주의를 루카치가 한사코 구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자가 사회에 실제로 참여한 작가들의 체험을 반영한다면, 후자는 사회를 단지 관찰하는 데 만족하는 작가들의 태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천적 연루 속에서 인간 자신과 세계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포착하는 리얼리즘만이 오늘날 인간의 총체성을 회복하려는 예술의 고유한 시적 정신과 일치한다는 것이 루카치의 생각이다.20)

독일 고전철학과 고전주의 미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루카치는 이러한 설명방식을 통해 실증주의에 근거한 투박한 리얼리즘론 대신 훨씬 입체적이고 풍부한 리얼리즘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리얼리즘의 승리론과 관련해서도 추상적인 역사결정론과 달리 작가의 태도와 방법 등 훨씬 진전된 논거를 제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루카치가 발자끄의 정치적 입장과 작품 사이의 괴리에 대해 나름의 일관된 설명을 하고 있음에도 엥겔스가 말한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 가진 진보적 성격을 충분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도 일반 이론의 차원에서 ‘쌩-메리 수도원의 바리케이드 순교자들’을 거론하긴 하지만 실제 발자끄의 작품에서 민중이나 그들의 대변자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발자끄에게서 루카치가 발견하는 것은 주로 민중을 고통에 빠뜨리는 원인에 대한 고발이다. 예를 들어 루카치는 발자끄의 『농민들』에 대한 비평에서, 사회에 대한 농민의 위협을 그리겠다는 작가의 포부와 달리, 실제로 대영지를 분할하는 힘은 부르주아지에게 있다는 것, 그리고 작품에서는 이 부르주아지에게 종속되는 농민의 비극이 그려진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 바 있다.21) 그러나 여기서도 자본주의나 부르주아의 파괴적인 역할에 대한 비판은 확인될지언정, 농민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일어설 가능성은 암시되지 않는다.

 

 

4. 우리시대의 리얼리즘

 

리얼리즘의 승리론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그것이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는 해묵은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 리얼리스트—즉 진짜 진실의 참다운 벗입니다”22)라는 꾸르베의 말이 시사하듯이 리얼리즘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진보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출현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특정한 시대적 상황을 떠나서도 리얼리즘이 정치적 진보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더구나 발자끄처럼 사후에 리얼리스트로 평가되지만 스스로는 반동적인 정파를 공공연하게 옹호한 작가에게도 이 기준이 적용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리얼리즘의 승리’론의 원형이라 할 졸라의 비평이 실증주의적 진화론에 입각하여 발자끄를 자의적으로 읽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확인했고, 엥겔스의 논리는 이와 분명하게 구분되면서도 어떤 대목에서는 같은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지적했다. 루카치는 발자끄에게서 자본주의적 질서의 비인간성에 대한 고발을 읽어내지만 그것이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까지 이어짐을 입증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때문에 루카치는 과거 ‘사회주의 리얼리즘’ 진영으로부터 ‘비판적 리얼리즘’에 불과한 19세기의 작가들을 지나치게 선호한다고 비난받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야말로 역사적 진화론에 외삽(外揷)적인 당파성을 결부시키는 수준에서 얼마나 벗어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적어도 이들에 대해서만은 ‘리얼리즘의 승리’론에 대한 루카치의 새삼스러운 강조가 적절한 대응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서구의 논의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려 한 기왕의 국내 리얼리즘론에서도 엥겔스에 의한 리얼리즘 승리론을 너무 일반화하는 경향을 경계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백낙청()은 ‘리얼리즘의 승리’론이 ‘객관적 당파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성을 가진다고 보면서도, 발자끄를 리얼리즘의 전범으로 간주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엄밀히 따지면 발자끄 문학의 독특한 한계는 ‘리얼리즘의 승리’라는 말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이 ‘승리’에 따라 패배한 당사자가 바로 정치적 반동주의자이며 종교적사회적 수구주의자인 발자끄 자신일진대, 당자가 쓴 작품에 그 패배의 흔적이 남지 않을 리 없다.”23)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생생하고도 가차 없는 묘사,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변증법적인 시각의 탁월함을 인정하더라도, 고매한 인격이 무력하게 스러져가는 발자끄 소설의 비관적 면모가 현실에 대한 일면적 파악일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백낙청은 이를 다른 리얼리즘 작가들의 장점과 대비시킨다. “적어도 스땅달, 디킨즈, 똘스또이 들이 비록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각기 당대 진보세력의 편에 섰기 때문에 발자끄에게는 없는 낙천성과 훈훈한 인간미를 지닌 것은 쉽게 느껴지는 사실이다.”24)

한국의 대표적인 리얼리즘 이론가인 백낙청의 이러한 평가는 아마도 작가의 삶과 분리된 리얼리즘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적 상상력과 삶 양자를 아우르는 리얼리즘의 경지가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터이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다른 작가들에게서 찾기 힘든 발자끄의 극도로 냉철한 면모가 이 비관주의 내지 비극적 세계관과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도 있는 것 같다.25) 연관하여 생각해보면 루카치 이론의 진정한 문제는 단지 선진적인 계급의식을 제대로 강조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기보다 총체성을 매개로 인간적 잠재력의 발전을 정치적 진보성과 연결시키려 한 구도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치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독일 고전주의가 근대의 찬란한 걸작들을 남겼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인간의 성숙 내지 완성을 지향하는 암묵적 경향이 현실에 존재하는 ‘타자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에 장애가 될 위험은 없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근래에 많이 논의되는 랑씨에르(Jacques Rancière)의 ‘미학적 체제’이론은 적어도 고전주의적인 ‘재현적 체제’의 발본적인 극복을 전제하면서도 독특한 의미의 정치적 진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참고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럴 경우 그것이 리얼리즘의 확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지반의 근본적인 변경을 요구하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단정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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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낙청 『현대문학을 보는 시각』, 솔 1991, 192면에서 재인용.

2) Honoré de Balzac, La Comédie Humaine, nouvelle édition publiées sous direction de Pierre-Georges Castex,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Gallimard 1976~81 (이하 PL로 줄임), t. I, 13면.

3) Honoré de Balzac, Correspondance I (1809~35), édition établie pas Roger Pierrot, Gallimard 2006, 646면(1832년 9월 23일 쥘마 까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4) PL, t. XI, 220면.

5) 백낙청, 같은 책 192면에서 재인용.

6) PL. t. VI, 970면.

7) PL, t. V, 317~18면.

8) PL, t. IX, 221면.

9) 발자끄가 사망한 1850년 당시 “발자끄의 작품 혹은 그의 이름을 정치적으로 전유”하려는 좌파 저널리스트들의 시도가 있었다(David Bellos, “Du nouveau sur Balzac: “Écrivain révolutionnaire””, Année Balzacienne 1969년 참고).

10) 에밀 졸라 「한담/발자끄」, 김태훈 옮김, 『크리티카』 6호, 올 2013, 277~97면. 우리가 아는 한 이 비평들은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는 졸라와 맑스주의의 관계사에 대한 매우 상세한 옮긴이 해제가 첨부되어 있다.

11) 이 문제를 지적한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하우저만큼은 졸라의 비평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발자끄와 관련하여 ‘리얼리즘의 승리’를 논하는 대목에서 졸라가 “맑스적 해석에 앞질러 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의식적인 확신과 상반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라고 적고 있다(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백낙청・염무웅 옮김, 창비 1999, 66면). 하지만 그는 이어서 “그러나 이 상반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여 정의내린 최초의 인물은 엥겔스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양자 간의 유사성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지는 않는다.

12) 에밀 졸라, 앞의 글 279면. (이하에서는 본문에 면수를 병기한다.)

13) 김태훈 「「한담/발자끄」 옮긴이 해제」, 『크리티카』 6호, 259면 이하 참고.

14) 백낙청, 앞의 책 191면.

15) PL, t. IX, 49면.

16) 물론 발자끄는 하층 민중의 실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깊이 공감하면서 그들의 생각과 말에 귀를 기울인 드문 작가에 속한다. 농민에 대한 그의 모순적인 생각은 “따라서 농민은 이중적으로 가난하다. 비록 정치적으로 그 도발은 가차 없이 진압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농민은 신성하다”(같은 책 65면)라는 『농민들』의 수수께끼 같은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에 관한 한 발자끄는 농민의 참여를 전혀 용인하려 하지 않았다.

17) 에밀 졸라 『실험소설 외』, 유기환 옮김, 책세상 2007, 155면.

18) 에띠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최원 옮김, 도서출판 b 2007, 248면.

19) G. Lukács, Balzac et le réalisme français, Éditions La Découverte & Syros 1999, 14면. (이하에서는 본문에 이 책의 면수를 병기한다.)

20) 그러므로 루카치의 몇몇 구절을 근거로 그를 인식론주의자라고 읽는 것은 그의 전체 논지를 간과한 피상적인 독법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1) 같은 책 “Les Paysans”장 참고.

22) 아르놀트 하우저, 앞의 책 85면에서 재인용.

23) 백낙청, 앞의 책 203면.

24) 같은 책 204면.

25) 발자끄가 오를레앙파가 지배하는 현실정치와의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과 가장 첨예한 대립관계에 있던 정통왕조파를 의도적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을 지적하는 일부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발자끄의 근원적인 비판정신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