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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손홍규 孫洪奎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톰은 톰과 잤다』,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이슬람 정육점』 등이 있음.
아내를 위한 발라드
그는 매립구역을 빠져나왔다. 흙이 튀어 더러워진 방균복을 벗고 마스크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격리구역 출입문을 나서자 동료인 김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김의 까맣고 볼품없이 주름진 얼굴이 창백했다.
한잔하지.
생각 없네.
알았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매립구역 위로 희석된 핏물 같은 노을이 번졌다. 그는 김에게 돌아갔다. 쭈그려 앉은 김은 헛구역질을 하다 그를 올려다보았다. 김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다 늙은 사내자식이 울기는.
한잔하는 거야?
알았네.
그들은 관용 미니버스에 올랐다. 운전기사인 정은 핸들에 이마를 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갑시다. 누군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버스는 조용히 달렸다. 그들은 퇴근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보건소에 도착해 일과를 보고한 뒤 퇴근했다. 주차장 앞에서 김이 그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니버스 뒤편에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고개를 깊이 숙인 정이 나왔다. 그와 김이 정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으나 정은 고개를 저었다. 정은 헐벗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 쪽문을 통해 사라졌다. 그와 김은 오래전부터 단골이었으나 최근에는 한번도 간 적이 없던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주인 여자가 사라진 자리는 그 여자와 남매라 해도 좋을 늙수그레한 사내가 지켰다. 그들은 사내가 내온 김치찌개에서 돼지고기를 피해 숟가락질을 했다.
휴가를 냈더군.
고향에 다녀오려네.
정기사도 휴가를 냈던가.
그건 모르겠네.
그들은 소주 세병을 나눠 마셨다. 술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술기운이 실려 있었다. 김은 어눌한 목소리로 정이 부럽다고 말했다. 그가 부러워할 것 없다고 말하자 김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아내가 살아 있잖는가. 사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두시간이 흘렀으나 그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버너의 불이 꺼지자 소리 없이 다가와 부탄가스를 새것으로 교체했을 뿐이다. 취한 김이 자울자울 윗몸을 건들거렸다. 그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한잔하시죠.
생각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김의 눈은 어느 한곳을 오래도록 노려본 사람처럼 달아올라 붉었다.
전 아닙니다.
………
전 아니에요.
이 사람 취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그는 김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부축해 일으켰다. 버스정류장에서 김은 술을 더 마시겠다며 버텼다. 벤치에 앉아 허리를 꺾은 채 김은 몇대의 버스를 그냥 보냈다.
감쪽같이 속여 넘겼네.
자네는 그런 재주가 없어.
그 작자가 내 말을 믿는 눈치였어.
거짓말은 아니잖은가.
거짓말이라네.
김이 웃었다. 치석으로 뒤덮인 아랫니가 보였다. 김이 팔뚝을 걷어올렸다. 그는 김의 그런 모습을 몇번 보았다. 김의 팔뚝 안쪽에는 생긴 지 얼마 안된 흉터가 있었다. 김은 이제 그것으로밖에는 아내를 추억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더 쓸쓸해질 터였다. 이미 그렇게 되었다. 상처는 더럽혀져서도 안되었고 사라져서도 안되었다. 김은 작은 생채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결코 새로운 상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사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수록 그 흉터는 견고해질 것이며 스스로 증식하여 김을 점령하게 될 터였다. 김은 기꺼이 흉터에 자신을 내줄 것이므로 머지않아 김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버스에 오른 김이 창가 쪽에 앉았다. 김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가 보건소에서 근무한 뒤 처음으로 맞는 기나긴 휴가의 첫날이었다. 그는 현관에 의자를 내놓고 앉아 마당에 뿌려지는 차가운 햇살을 바라보았다. 휴일이 아니어서 오래된 주택가의 대낮은 평온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싸이렌 소리마저 답답할 만큼 느슨했다. 그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번째로 걸었을 때에야 제 어미를 닮은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빠…… 아무 일 없지? 응. 그래, 알았다. 지루했던 낮의 등을 떠밀며 어둠이 닥쳐왔다. 통행금지는 해제되었으나 밤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낡은 대문이 삐걱댔다. 아버지였다. 그는 아버지의 모자를 건네받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가 빈손으로 거두었다. 꾹 다문 노인의 입술은 단호한 성격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곧았다. 소파에 앉은 노인은 밭은기침을 한 뒤 며느리가 있는 곳을 물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지하실로 내려갔다. 손전등으로 접이식 철제침대에 쇠사슬로 묶인 아내를 비추었다. 며느리에게 다가간 노인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갈이 물린 그의 아내는 증오에 찬 눈으로 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몸을 비틀며 버둥거렸다. 그는 아내의 눈에 안대를 씌운 뒤 재갈을 물린 입 위로 마스크를 덧씌웠다. 십오년 전 부서 가운데 하나였던 보건진료소를 폐쇄할 무렵 회계 담당이었던 김에게 부탁해 가져온 철제침대는 낡았지만 여전히 튼튼했다. 삐걱대는 소리마저 내력이 깊게 들렸다. 그는 아내의 머리맡에 섰다. 노인은 반대편에 섰다. 그가 앞장을 섰고 노인이 뒤를 받쳤다.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선 그들은 침대를 내려놓았다. 비에 젖은 개가 몸을 흔들어 물기를 떨어내듯 침대가 부르르 몸을 털었다. 그는 침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팔에 전해진 떨림은 어깨 아래서 더는 올라오지 못했다.
그는 승합차의 뒷문을 열었다. 침대 다리를 접어 짐칸에 실었다. 미리 준비해둔 스티로폼 박스를 아내 주변에 쌓았다. 그는 시동을 걸고 전조등을 켜지 않은 채 골목 끝까지 차를 몰았다. 히터에서 찬바람이 나왔다. 조금 뒤 문단속을 마치고 온 그의 아버지가 조수석에 올랐다. 그는 전조등을 켰다. 불빛이 늙은 아버지와 늙어가는 아들의 앞을 가로막은 혼야(昏夜)의 옆구리를 갉아먹었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며느리 쪽을 보았다.
아가…… 집으로 가자.
그는 불현듯이 아버지를 향한 적개심이 솟았다.
어머니는요?
좋아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여전히 내 말은 믿지 않는구나.
그의 아버지는 안전띠를 매고 눈을 감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과속방지턱을 지날 때면 신중하게 속도를 줄였고 오른쪽으로 혹은 왼쪽으로 회전을 할 때마다 클러치를 밟아 적절하게 기어를 조절했다. 히터에서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잔뜩 긴장했던 그의 어깨가 나른해졌다. 주택단지를 벗어나 한산한 지방도를 달리다 첫번째 검문을 받았다. 귀마개와 철모 탓에 얼굴의 반쯤만 드러난 군인들이 무심한 눈으로 승합차를 바라보았다. 일병 계급장을 단 앳된 얼굴의 군인은 그가 내민 보건소 직원증을 힐끔 보고는 통과시켜주었다. 젊은 군인의 얼굴에 깃든 권태가 한동안 그를 따라왔다.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한번 더 검문을 받았다. 일병보다 권태로운 표정의 병장이었다. 병장이 그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으나 정말 궁금해서도 의심스러워서도 아닌 듯했다. 병장은 장갑을 벗지 않은 채 손바닥에 그의 신분증을 올려놓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감염병 예방팀이시군요.
그렇다네.
……정말 전염이 되지 않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염시키지 않는다는 말씀이시죠?
전염시키지 않지.
그럼 이 병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휴게소에 들를 때까지 그의 귓가에 병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가 오래전에 포기한 질문을 저 젊은 병사는 여전히 품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했다. 그 젊은 병사에게 아내가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내가 없다는 것과 아내를 잃는다는 건 비교가 불가능한 전혀 다른 두 영역에 속한 문제들임을 처음 깨달은 기분이었다. 휴게소 건물과 멀리 떨어진 어두운 곳에 주차를 한 뒤 그는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성큼성큼 걸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기 앞에 선 아버지를 지나치면서 힐끗 보니 음모가 하얗게 세었다. 그는 마지막 칸에 들어가 바지를 내리고 요실금팬티 안쪽의 패드를 살폈다. 축축했다. 아내를 침대에 결박했던 날부터 오줌을 지렸다. 아내의 신음에 익숙해질 즈음 비뇨기과를 찾은 그는 전립선염 진단을 받았다. 치골이 아프시죠? 아니요. 사정할 때 통증을 느끼지 못했나요? 사정을 해본 지 오래되었습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식당으로 오너라.
예.
그의 아버지는 소고기국밥을 주문했다. 그는 우동을 주문했다. 부자는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자정 즈음이었다. 방금 물걸레질을 마친 식당 바닥에서 익숙한 군내가 피어올랐다. 그는 몇 젓가락 먹지 못했다. 욕지기가 치솟았다.
아범 자네는 입이 짧아서 탈이야.
소식이 건강에 좋습니다.
좋아서 그 모양이구나.
노인은 천천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입이 벌어질 때마다 튼튼한 이빨이 엿보였다.
운동을 해야 한다.
하고 있어요.
겨우 한시간 산책하듯 슬슬 다녀서는 안돼.
무리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그는 아버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방금 나눈 대화를 복기라도 하듯 곱씹었다.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듣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우동그릇에 젓가락을 넣고 휘저어댔다. 불어터진 우동 면발이 툭툭 끊어졌다. 구더기떼 같았다.
어멈은?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지.
노인은 편의점에 들어가 빵과 우유를 샀다. 그는 노인 뒤에서 기다렸다가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이거라도 먹여라.
먹지 않을 거예요.
자네 어머니는 잘 먹어.
아내가 빵과 우유를 먹지 않는 것이 그의 책임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노인에게 건네받은 봉지를 짐칸에 넣은 뒤 승합차 옆에 선 채 담배를 피웠다. 바람 한점 없었다. 하늘에는 싸락눈 같은 별이 떴다.
담배 안 끊었나?
끊었지요.
다시 피울 거 시늉이나 하지 말 것을.
끊을 겁니다.
가자.
그는 담배꽁초를 으깬 뒤 운전석 문을 열었다. 익숙한 아내의 체취가 미지근한 공기에 섞여 흘러나왔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아내의 가느다란 신음이 분절된 음표처럼 떠다니는 짐칸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안전띠를 매고 눈을 감았다. 휴게소를 빠져나가기 전에 주유소 앞에서 속력을 늦추자 실눈을 뜬 노인이 그냥 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참선에 들어간 고승처럼 다시 눈을 감았다.
드문드문 달리는 화물차를 추월하며 두개의 터널을 지났다. 노인은 꾸벅꾸벅 졸았다. 잠들지 못한 아내는 여전히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으나 그 소리는 차체에서 생겨난 소음에 섞여 그의 귀에 닿았다 말았다 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뒤 검문을 받았다. 새벽 두시였다. 그를 검문한 상병은 방금 야식이라도 먹은 듯 입에서 단내를 풍겼다. 짐칸에는 뭐가 있습니까? ……아내가 있다네. ……농담하지 마십시오. 지루한 새벽이잖은가. 정말 뭐가 있습니까? 별거 아니지만 직접 보겠나? …… 철모를 고쳐 쓴 상병은 철제 바리케이드 옆에 선 군인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어두컴컴한 이차선 국도에 접어들자 그의 아버지가 끌탕을 했다. 자네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어. 긴장한 것뿐이에요. 죄라도 지었나? 죄라면 죄지요.
십분 뒤 승합차는 낮은 담장 너머로 괴괴한 운동장이 보이는 초등학교 앞을 지났다. 텅 빈 주차장을 혀처럼 빼문 농협을 지나자 도로 양쪽으로 낡은 단층 건물이 이어졌다. 가로등마저 드물어 스산하리만큼 고요한 면소재지였다. 이십 미터 간격으로 과속방지턱이 있어 속력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누런 고양이 한마리가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 앞에서 뛰어나와 도로에 서더니 그와 노인을 바라보았다. 전조등에 비친 눈알이 섬뜩하게 빛났다. 매립구역에도 그런 게 흔하게 널렸다. 압력에 의해 튀어나온 눈알들이 신경과 핏줄을 매단 채 방금 캐낸 양파처럼 뒹굴었다. 안락사에 필요한 약물이 부족하고 처리해야 할 사체가 적체된 화장터에서 반송되어온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으되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매립구역 관리인력으로 분류되어 파견을 나온 보건소 직원들은 그들을 그저 아내들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의 아내였을 그들이므로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아내라는 낱말에 깃든 어떤 신성을 모욕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내라는 말은 발음할수록 낯설었다. 애정을 담아 말하거나 증오를 담아 말하거나 상관없이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말에 담긴 의미와 이별하는 듯한 기분이었고 그 말이 가리키던 관계마저 버성기게 되는 듯했다. 아내라는 말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그가 속력을 높이자 고양이가 쏜살같이 반대편 인도로 달려갔다. 승합차는 덜컹거리며 과속방지턱을 넘었고 그의 결기를 나무라는 듯한 노인의 불편한 신음이 아내의 고통스런 신음과 뒤엉켰다. 그는 이발소 앞에 차를 세웠다. 승합차의 뒷문을 열고 아내를 살폈다. 결박된 쇠사슬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불안했다. 출근하기 전과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뿐 아니라 선잠에 들었다 깨면 외투를 입고 지하실에 내려가 아내가 무사한지를 살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쇠사슬이 단단히 조여져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뿐이었으나 그 일에 마치 인생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라도 숨겨져 있는 것처럼 신중하고 끈질기게 수행했다.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날인가 그는 인기척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고 옆자리에 잠들었다가 목이 말라 깨어난 것처럼 윗몸을 일으킨 채 두리번거리는 아내를 보기도 했다. 그건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었거나 그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가당치 않은 환영이었을 테지만 따뜻하게 데워진 바로 옆 이부자리를 쓸어본 뒤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많은 나날들이 모두 헛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그의 곁을 떠나버린 듯했고 여태 아내라고 믿으며 살아왔던 사람은 아내가 남긴 잔영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은 그가 아내라고 믿었던 사람이 정말 아내였는지조차 의문이 들게 했으며 삼십년 가까이 그와 아내가 부부로서 이룩한 일은 서로에게서 조금씩 멀어져 완벽하게 타인이 되는 것이었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했다. 그는 태연하게 물그릇을 찾아 아내에게 건네줄 수 있을 만큼 담백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아내가 사라지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아내가 사라졌다는 확신이 생기자 그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쓸어보았고 손바닥에 닿은 온기에 놀라 소리 없이 소스라쳤던 거였다.
그는 흐트러진 스티로폼 상자를 바로 겹쳐놓은 뒤 뒷문을 닫았다. 아내의 신음이 들렸다. 그는 다시 문을 열었다. 먼 데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는 문을 닫고 승합차 뒤쪽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적에 짓눌린 시골 마을의 새벽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의 아내임이 분명한 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은 이 새벽에 먼 길을 떠나온 늙은 부자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잠자리에 누운 채 신음에 귀를 기울이며 낯선 승합차의 엔진소리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탄성을 잃은 완충장치에서 나는 쇳소리마저 헤아려 들을 것만 같았다. 운전석에 오르자 그의 아버지가 비밀을 폭로하듯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안다.
뭘요?
이 병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서 왔나요?
아범은 말해줘도 몰라.
그럼 말씀하지 마세요.
오래전에도 이 병이 온 적이 있다.
착각이에요.
자네 어머니는 그때도 이겨냈어.
그는 솟구치는 조바심을 억누르기 위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아버지의 말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기우는 건 믿음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지금 겪는 일이 과거에 누군가 겪었던 일이 아니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으므로, 설령 아버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역시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른 뒤에 오늘 이 순간을 착오 없이 분명하게 기억하게 되리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므로. 쇠락한 면소재지를 지나자 주유소가 나타났다. 사무실에는 백열등이 켜져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주유기 옆에 차를 세웠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승합차에서 내린 그는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얼굴에 졸음기가 가득한 중년의 사내가 문을 슬그머니 열고 그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가 주유를 원한다고 하자 중년의 사내는 투덜거리면서 문을 닫았다. 외투를 걸쳐 입고 나온 사내는 주유를 하는 내내 하품을 하며 눈가에 배어나온 눈물을 목장갑을 낀 손등으로 닦아냈다. 주유기 계기판의 숫자마저 하품이라도 하듯 천천히 넘어갔다. 주유를 마친 사내가 운전석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가 카드를 내밀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이주 전부터 단말기가 고장 났다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건네자 사내가 머뭇거렸다.
조금 더 주시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겨울 새벽에 주유라니.
장사 그만두고 싶어요?
그만두고 싶지요.
주유소 사내는 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한손으로는 짐칸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 모를 줄 압니까? 사내는 처음 포르노를 보는 사춘기 소년처럼 음탕한 신음을 흉내냈다. 조금 더 드리죠. 그는 방금 건넨 금액만큼의 현금을 지갑에서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는 가래를 끌어올려 칵 소리를 내며 뱉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노인이 헛웃음을 흘렸다. 자네는 물러터져서 탈이야. 내가 아범만큼만 젊었어도 저런 녀석은 멱살을 잡아 던져버렸을 거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시비를 가리는 일에 신물이 났다. 아마도 아내와의 사이가 버성기게 되었을 무렵, 그가 더는 전도유망한 청년도 아닐뿐더러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면 부러 잠든 딸아이를 깨워 옆에 앉혀둔 아내가 투정으로 시작한 말에 대꾸하다 살림살이를 던지고 부수며 대판 싸워 새벽녘에야 씨근거리며 고단한 몸을 뉠 수 있었던 어느날부터였을 것이다. 그렇게 간신히 잠자리에 들어 뒤척이면 아내는 방금까지도 날선 말을 내뱉던 사람답지 않게 처연한 목소리로 우리는 아이 때문에 사는 게 맞아,라며 감탄이라도 하듯 혼잣말을 했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이렇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다보면 어느새 동살이 잡혀 창밖이 뿌예졌다. 겨우 하룻밤을 새웠을 뿐인데 인생을 허비한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으며 그걸 영영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힌 채 한두시간 눈을 붙이고 출근길에 나서면 무릎이 절로 푹푹 꺾였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다투는 동안 그의 반생이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다.
십분 뒤에 그들은 갈림길에 이르렀다. 오른쪽은 도시로 가는 길이었고 왼쪽은 그의 고향 마을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가 경적을 울리자 불 꺼진 검문소의 문이 열리더니 경사 계급장을 단 경찰이 나왔다. 그는 경찰과 악수를 나눴다. 경찰은 모자를 벗어 그의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노인은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경찰이 그에게 얼마나 머물 거냐고 물었다. 그는 하루나 이틀 정도라고 말했다. 경찰은 내일 비번이니 괜찮다면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그는 그러마고 했다. 경찰은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 했다. 그는 명함을 한장 건넸다. 그 역시 경찰의 번호를 받았다. 젊은 순경이 뒤늦게 검문소에서 나오더니 철제 바리케이드를 옮겼다.
이 시간엔 오가는 차가 한대도 없다네.
나 때문에 괜히 번거로워졌네.
새벽에 고향을 찾는 심사가 더 복잡하고 번거롭겠지.
춥지는 않은가?
춥네.
고생이 많네그려.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동창인 경찰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가 출발하기 전에 경찰이 물었다.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한가? 그렇다네. 그럼 대체 이 병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잘 모르겠네.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건 어찌 아는가? 사실 그것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네. 괜한 질문을 했군. 괜찮네. 조심해서 가게. 고맙네. 어르신,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는 왼쪽 길로 차를 몰았다. 짐칸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 모른 척했는지 정말 몰라서 묻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길은 산자락과 들판의 경계를 따라 이어졌다. 저수지를 끼고 달리다 가파른 길을 오를 때 승합차가 숨이 막힌 듯 몇차례 쿨럭거렸다. 그는 낚시꾼들이 다져놓은 공터에 차를 세웠다. 타이어 문제는 아닌 듯했다. 엔진룸을 열고 살펴보아도 차량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그로서는 어디에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아래 저수지 쪽에서 손전등 불빛이 사납게 흔들렸다. 아침 일찍 낚시를 하려고 야영을 하는 낚시꾼인 듯했다.
두주 전 주말 그와 김과 정은 북한산을 오르려다 포기하고 포천의 어느 저수지로 갔다. 낚시도구는 정이 준비했고 야영장비는 김이 준비했다. 그들은 각자 얼음을 깨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목소리를 채가는 바람에 간단한 말을 건네려 해도 목청을 높여야 했고 추위에 시달리다 못해 텐트 안으로 기어들어갈 무렵에는 다들 목이 쉬었다. 그와 김에 비교하자면 정은 유쾌했다. 홀로 유쾌하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정은 자상한 가장처럼 자청해서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였다. 소주를 나눠 마시고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했으나 누구 하나 잠들지 못했다. 오십대의 사내 셋이 비좁은 텐트 안에서 침낭을 부딪쳐가며 입김을 내뿜는 밤이 특별히 쓸쓸하지는 않았으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그들이 악착같이 견디는 시간을 무위로 만들어버리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두어 시간 눈을 붙였다 일어난 그는 정이 텐트에 없는 걸 알았다. 정은 붕어 한마리도 낚지 못했던 자신의 구덩이 앞에서 저수지 바닥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접이식 의자를 끌어와 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이 담배를 권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정이 아니라 그와 김이었으나 그 순간의 정은 그와 김이 지닌 상실감 너머의 어떤 참혹한 감정에 익사하기 직전인 것 같았다.
아내에게 남자가 있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이혼하기 전부터 그랬다네.
이혼하자고 할 때 눈치채지 못했나?
짐작은 했지.
노여워 말게.
노엽지 않네.
점심을 먹기 전에 김이 손바닥만한 붕어를 한마리 낚았다. 김은 붕어를 오랫동안 지그시 바라보다 구덩이에 던졌다. 그들은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은 뒤 텐트를 접고 도구를 챙겨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정의 집에 들러 먼저 정을 내려준 뒤 김의 집으로 향했다. 정은 그들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길가에 선 채 눈길로 배웅했다. 김의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김이 기침처럼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그만두려네. 살아 있는 게 치욕이야. 난 다만 아내를 잃었을 뿐인데 모든 걸 잃은 기분이네.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겠지. 사실이 무언지 장담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가 두눈을 뜬 채 목격하는 이 일을 자네는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음에도 버젓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수치스럽네. 자네 탓이 아니잖은가. 그럼 누구 탓인가? 누구의 탓도 아니지. 그래서 우리 탓이네. 누구의 탓인지 알 수 없는 일은 모두 우리 탓이야.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희미한 태양이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었다. 그는 지하실에 내려가 의자를 당겨 아내 옆에 앉았다. 등산용 스틱이 부러져 예감이 좋지 않다며 예정된 산행을 포기하게끔 그들을 종용했던 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포천으로 가는 길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위를 불어오던 바람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 바람이 노래 같았다는 말을 덧붙이자 아내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다른 곡을 휘파람으로 연주하는 것 같다고 했다. 숙련된 연주가마저 쉽지 않은 난해한 교향곡이 울려퍼지던 그곳에서 당신이 그리웠다고 말했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여보, 기억나요?
뭐가?
당신이 즐겨 부르던 노래.
잊었어.
어둡고 쓸쓸한 밤 귀를 기울이면.
기울이면.
당신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술주정이야.
당신은 골목 어귀에 이르렀고.
이르렀고.
당신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면.
흥얼거리면.
우리 아이가 눈을 뜨고 일어나.
……일어나.
아빠냐고 물었지요.
기억나.
아니, 잊었어요.
무얼?
우리가 언제 사랑을 했는지.
기억하지 않아도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사위는 고요했다. 새벽 세시였다. 바람이 그의 푸석한 뺨을 날카롭게 써레질하며 지나갔다. 노인은 뒷짐을 진 채 저수지 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조수석의 잡물함에서 목장갑 두켤레를 꺼내 아버지와 나눠 꼈다. 승합차의 뒷문을 열고 침대를 꺼냈다. 아가, 답답하지?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의 입에서 재갈을 벗긴 뒤 마스크만 다시 씌웠다. 안대를 벗기자 아내는 눈을 감았다. 늙은 아비와 아들은 침대를 들고 비탈길을 걸어 올라갔다. 누군가의 아내이면서 며느리이기도 한 오십대 여자가 덜덜 떨면서 이를 맞부딪치며 내는 딱딱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온 것처럼 아련했다. 노인의 숨이 가빠졌다. 그는 모른 척했다. 고개에 이르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가 잠시 쉬자고 했다. 그들은 침대를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어둠은 한층 깊어졌다. 그는 외투를 벗어 아내에게 덮어주었다. 달아올랐던 그의 몸이 재빠르게 식어갔다. 안경을 고쳐 쓴 노인이 침대의 다리를 펴라고 말했다. 바퀴가 약해서 부서질지 모른다고 했으나 노인은 고집을 부렸다. 그들은 다리를 편 침대를 밀며 언덕길을 올랐다. 시멘트로 포장된 길은 세월 탓에 울퉁불퉁해진 터라 침대가 덜컹거렸다. 고개를 넘어가자 바퀴 두개가 부서졌다. 그들은 침대의 다리를 접었다. 그가 앞을 들고 그의 아버지가 뒤를 들었다.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걸어가면서 부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이따금 고개를 돌려 침대에 결박된 아내를 보았다. 침대에 결박된 오십대 여자는 그의 아내가 아니었으나 아내가 아닌 다른 누구일 수도 없었다. 아내이면서 아내가 아닌 그이가 영위했던 삶마저 삶이면서 삶이 아닌 듯했다. 그는 침대의 무게에 보태어진 아내의 무게를 따로 가늠할 수 없었다. 아내는 이미 침대와 하나가 된 듯했고, 아니 어쩌면 이처럼 눈에 보이는 육신이야말로 무게가 없으며 그 육신에 깃들었던 과거만이 무게를 지닌 것인지도 몰랐다. 아내가 더이상 아내가 아니게 되었을 무렵 아내는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린 것이었고 그때 아내는 그와 함께 겪었던 모든 과거마저 쓸어담아 가버린 거였다. 산바람이 거세졌다. 노인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그는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침대를 내려놓아야 했다. 바람소리를 뚝뚝 분지르며 흥분한 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집에 정기사가 와 있다네.
이 새벽에 무슨 일인가.
손이며 옷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찾아왔어.
다친 데는 없던가.
아내를 죽였다고 횡설수설한다네.
그랬다면 그런 거겠지.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게나.
난 지금 정기사를 죽여버리고 싶다네.
그만두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
그는 전화를 끊고 쭈그려 앉았다. 노인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보건소의 관용버스를 운전하는 동료가 이혼한 지 일년 된 아내를 죽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못난 것들. 노인은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이렇게 내뱉었다. 그는 수치스러웠으나 아버지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가 해야 했으나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고 그가 앞으로도 괴로워하면서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살해하기 전에 그의 아내는 이미 살해당했으며 아내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에 남은 생애에 걸쳐 그는 아내를 살해해버린 듯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그의 등 뒤에 선 채 안경알 안쪽에서 침침한 눈을 깜박이는 저 볼품없는 늙은이처럼.
그는 고향 마을 들머리에서 침대를 내려놓고 아내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다섯시였다. 부지런한 누군가가 운동 삼아 벌써 마을을 한바퀴 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왔으니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며 못마땅해 했다. 그의 고향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이었기에 뭇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십여년 전 옛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단층 양옥집은 어둠에 짓눌린 듯 납작해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섰다. 당신이 없는 동안에도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지켰음을 확인한 뒤 되돌아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자못 정겹게 들리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른 새벽만 아니라면 한바탕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것 같은 들뜬 목소리였다.
어멈은 자네 어머니가 잘 보살펴줄 걸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눈으로 봐야 믿겠나?
보아도 믿을 수 없어요.
그의 부정에도 노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철없는 강아지라도 보듯 입가에 부드러운 주름을 잡으며 다가왔다. 노인은 그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자네 어머니는 이제 거의…… 사람이라네.
그는 고개를 저었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두려움이 치솟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장담이 사실이라면 그게 사실이 아닌 경우보다 혼란스러울 거였다. 그는 질투가 생겼다.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아내였다. 만약 당신들이 이 세계의 혼란에서 한걸음 물러나 현명하게 처신하며 여생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누구 하나 당신들을 부러워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기회가 온다면 마찬가지로 누구 하나 거부하지는 않을 테니. 그와 노인은 침대를 거실로 옮겼다. 노인은 거실의 불을 켰다. 그의 고향집은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일년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벽에 걸린 달력마저 지난해 그가 보았던 그대로인 듯했다. 아내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아내의 눈에 안대를 씌워주고 부엌에 들어가 물을 마시는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지 않은 채 혼자 침대를 끌어 작은방에 들여놓았다. 그가 내려오면 아내와 함께 머물던 방이었다. 그리 자주 머문 편은 아니었으나 이 방에 머물 때마다 그와 아내는 서로에게 치솟는 분노와 증오를 안으로 갈무리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쓰며 불편한 잠을 이루었던가. 그는 예전처럼, 그러니까 어느해 명절이나 제삿날처럼 불도 켜지 않은 채 아내 옆에 누워 방을 채운 맥빠진 어둠을 노려보았다. 아내의 숨소리가 해일처럼 그의 귓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아내가 몸을 돌려 그와 등진 채 무릎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한숨 같은 끙끙거림 뒤에 알아듣기 힘든 중얼거림도 들려왔다. 그는 손을 뻗어 안대를 벗기려다 그만두었다. 침대에 결박된 아내가 몸부림을 쳤다. 쇠사슬이 기이하게 끼익 소리를 냈고 앙상하게 마른 몸속의 뼈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내도 여기가 어딘지 아는 듯했다. 여기가 어딘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삶의 비밀을 아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아내의 몸부림은 예의 바르게 절박했다.
아빠, 어디예요? 집이야. 내가 집인데. ……할아버지 댁이야. 죽으러 간 건 아니지? ……응. 그래, 알았어. 얘야…… 왜, 아빠. 다시 들어도 네 목소리는 엄마와 판박이구나. 내가 물려받은 게 겨우 그거야? 노래를 불러주겠니? 무슨 일 있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엄마를 위해서 말이다. 엄마는 없어. 엄마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렴. 엄마는 아빠가 안락사 신청을 해서 화장터로 보냈잖아. 그건…… 그래, 맞다, 이 아빠가 그랬지.
스피커를 켜두었기에 그가 딸과 나눈 대화는 아내도 모두 들었을 것이다. 아내가 입을 벌리고 끔찍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방문이 열렸다. 노인이 그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안방으로 갔다. 전기장판에 깔린 요가 흐트러졌고 그 위의 이불도 흐트러졌다. 서둘러 잠자리를 빠져나간 흔적이었다. 그는 차분하게 집안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뿌리 뽑힌 고춧대처럼 기우뚱 앉은 앙상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아버지가 두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는 아버지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는 허깨비처럼 가벼웠다. 아내를 잃은 여느 사내와 마찬가지로 한심해 보였다. 그는 어머니가 잠들었던 자리 옆에 아버지를 누이고 아내에게 돌아갔다. 아내는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입에 귀를 갖다대봐야 들을 수 있는 건 해독할 수 없는 모호한 소리뿐이었으나 그는 끈질기게 아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그는 아내 옆에 누워 눈을 감았다. 창밖이 뿌예졌다.
보험회사의 긴급서비스는 생각보다 일처리가 빨랐다. 정오 무렵 짐칸에 아내 대신 커다란 망치를 싣고 고향집을 떠나 삼거리에 이른 그는 텅 빈 검문소 앞에 차를 세웠다. 경찰은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자는 걸 깨웠나보네. 괜찮네. 오늘 약속은 어렵겠네. 나도 마찬가지야. 감기에 걸렸나? 자네가 가고 난 뒤 얼마 안되어 누군가의 아내를 체포했네. 누구인지 알겠던가? ……자네 어머니 같았다네. 그럼 내 어머니가 맞을 걸세. 관례적으로 안면이 있는 누군가의 아내인 경우 사적인 접촉이 금지된다네. 나도 아네. 미안하네. 처리되었나? 새벽에 이미 화장터로 보냈다네. 알겠네. 다시 내려오면 연락하게나. 그러지. 그는 승합차를 몰고 지난 새벽에 찾았던 주유소에 들렀다. 그는 짐칸에서 망치를 꺼내 쥐고 사무실로 갔다. 문을 두드렸으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의 창을 깨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망치를 휘둘렀다. 그는 이인용 소파에 앉아 식어버린 연탄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주유소를 떠나기 전에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자네…… 어멈을 데리고 갈 수 없겠나? 그의 아버지 역시 아내를 잃은 사내였으므로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아직 휴가가 남았으니 하루이틀 안으로 다시 내려오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는 것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는 승합차에 올라 면소재지를 빠른 속도로 통과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낡은 써스펜션이 삐걱거렸다. 그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소고기 국밥 한그릇을 음복이라도 하듯 먹었다. 집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오후가 기울었다. 승합차를 주차한 뒤 대문을 밀고 마당에 들어서자 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만두었나? 격리구역 출입문일세. 정기사는 살아 있나? 아침에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다네. 사실이었군. 사실이었지. 뉴스에도 나오지 않겠지? 나오지 않겠지. ……그만두게나. 그만두겠네. 무얼 말인가? 무엇이든. 아무것도 그만두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네. 그는 보건소에 전화를 걸었다. 팀장에게 휴가를 취소하고 내일부터 출근하겠노라 말했다. 팀장은 정기사 사건으로 어수선하다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딸이 다녀간 흔적이 남은 집안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처음으로 아내 없이 보낸 밤은 생각처럼 쓸쓸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그는 보건소로 나가 새로 온 기사가 운전하는 미니버스를 타고 격리구역으로 갔다. 격리구역 출입문을 지나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마스크를 쓰고 방균복 차림이 되어 매립구역으로 들어갔다. 불을 피운 드럼통 주위에 몰려 있던 굴착기 기사들이 그를 보자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오후부터 눈이 내렸다. 누군가의 아내들 같은 눈이 하염없이 내려와 매립구역을 뒤덮었다. 작업종료를 알리는 싸이렌이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그는 여전히 매립구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스 위에 선 채 내리는 눈을 어깨와 머리로 고스란히 맞았다. 김이 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헛구역질을 하다 올려다보았다. 김은 눈을 껌벅거렸다. 이제 가지. 기다리겠네. 무얼 기다리나. 나도 모르겠네. 자네도 이미 제수씨를 떠나보내지 않았나. 그는 소매를 걷어올려 김에게 팔뚝을 보여주었다. 흉터가 있나? 없군. 나도 자네와 같아. 자네는 나와 다르지. 여기에 흉터가 생기길 기다리네. 알았네. 언젠가 올 거야. 그때가 되면 너무 늦어. 이미 늦었네. 이미 늦었지. 김은 입안으로 들어온 눈을 삼키며 말했다. 눈이 춤을 추며 내리네. 노래에 맞춰 내리니까. 노래는 누가 부르나. 그들은 어둠이 내려앉은 매립구역을 바라보았다. 눈에 덮인 그곳은 파도가 치는 바다처럼 울퉁불퉁했다. 하나하나가 모두 아내들의 심장 같았다.
눈은 언제까지나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