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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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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成碩濟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로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인간적이다』, 장편소설 『왕을 찾아서』 『위풍당당』 『단 한 번의 연애』 등이 있음. songsokze@hanmail.net

 

 

 

장편연재 3

투명인간

 

 

서울에도 아까시나무가 있었다. 학교 안에도 학교 밖 거리에도 공터에도 도로변에도. 식목일에 많이 심었던 아까시나무는 어린싹도 먹지만 꽃이 제일 먹기 좋았다. 아이들은 생으로 꽃을 먹기도 했는데 꿀이 있어서 달콤했다. 절반 정도 핀 꽃이 향이 제일 좋았고 다 피면 향이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서울로 전학 간 봄철에는 아직 아까시꽃은 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축대처럼 높은 학교 담장을 따라 운동장에 줄지어 심어진 아까시나무들은 커다란 가시를 바닥에 뿌려놓고 지나가는 아이들이 발바닥이라도 찔리기를 기다리며 심술궂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꽃이 매달린다 한들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팠다. 아까시나무 가지에서 윙윙 바람 소리가 나고 운동장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날아오를 때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팠고 외로웠다.

중학교 이학년이 되던 해 삼월말에 한 학년이 다섯개 반인 시골 중학교에서 열두개 반인 서울 변두리 중학교로 전학을 갔는데 그때 내 번호가 69번이었다. 교실 하나에 예순명이 정원이고 열다섯줄의 네개 분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달 사이 아홉명이 전학을 온 셈이었다. 일년 뒤 한 학년당 반의 개수는 열여덟개로 1.5배 늘어났다.

전학 온 아이들은 각 분단의 뒤쪽에 복도에 쌓여 있던 책상과 의자를 들여 앉게 했다. 그다음 한달 동안 연달아 아이들이 전학을 와서 결국 교실 뒤로는 통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은 분단과 분단 사이의 통로를 통해 교실 앞쪽으로 가서 앞문으로만 다녔다. 화장실은 3개 학년 54개 반에 하나밖에 없었다. 매점 하나, 수도시설도 하나였다. 어디를 가나 아이들이 넘쳤다. 흔한 건 아이들뿐이었다.

새로 전학 온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깔보이게 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전학 온 아이들이 쓰는 사투리 때문이었다.

니주가리 씹창 내기 전에 아가리 닫고 있어라. 네 곱창에서 올라오는 똥 냄새 때문에 내 해골이 진동해서 오바이트 나올라고 하거든.

내가 아직 구하지 못한 국사책 표지를 살짝만 보자고 하자 내 옆에 있던 아이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자 내 앞에서 샤프로 머리의 비듬을 긁어서 내 책상으로 날려보내던 아이가 몸을 돌렸다.

쪼다 머저리 해삼 멍게 말미잘 해파리 같은 놈아. 거머리가 책 본다고 용가리 되냐.

그들은 모두 나처럼 60번대 번호를 받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보다 좀더 일찍 시골서 전학 온 아이들이었는데 벌써 표준말을 썼다. 생소한 단어로 만들어진 욕을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또박또박 쏴붙이니 머리털이 곤두서고 살이 떨릴 만큼 무서웠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자 표준말을 배우는 게 더 어려워졌다. 알고 보니 시골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표정도 없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 평상에 누워 있거나 걷거나 쓰레기를 뒤지거나 길바닥에서 뭔가를 늘어놓고 노는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말이 없었다. 아침마다 군대처럼 제복을 입고 줄을 지어 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청년과 처녀들 역시 몸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떼 지어 몰려다니는 사람들은 언제든 잡아먹힐 수 있는 가축이나 물고기떼 같았다.

야, 너 우리 십이반이지? 나는 십이번 김만수라고 한다. 집이 이 근처냐? 나도 이 동네 사는데 우리 반에서 이 근처 골목 사는 게 너하고 나뿐인 거 같다. 삼반, 칠반에는 몇명 있어. 너는 어디서 전학 온 거야?

어느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굴과 몸이 둥글넙적한 아이가 한 손에는 책가방,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든 채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뛰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정말로 눈물이 난 걸 보면.

난, 나는 종태, 이종태.

종태? 동태눈깔 할 때 동태, 그거는 아니지? 나는 동태는 좋은데 눈깔 먹으라고 하면 싫더라. 너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들어봤냐? 시골에서도 라디오는 나오잖아. 파란해골 십삼호 웃음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무서운지…… 아, 말만 해도 등때기가 다 뜨셔.

만수가 총알처럼 빠르게 말하면 할수록 마음이 편해졌다. 바보처럼 웃음이 자꾸 터져나왔다. 하지만 쉽게 대꾸할 수는 없었다. 고향의 거름 냄새 같은 내 사투리가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느 골목 앞에서 만수는 내 가방을 잡아끌었다.

여기 우리집이다. 아버지 자전거가 안 보이는 거 보니까 지금은 집에 아무도 없어. 왔다 갈래?

우리집은 만수의 집에서 오백 미터쯤 떨어진 뚝방 바로 아래에 있었다. 해마다 장마철만 되면 뚝방 위로 물이 넘치거나 터진 틈 사이로 물이 밀려들어와 집들이 물에, 그것도 몇백명이 같이 쓰는 공동변소에서 토해낸 똥이 둥둥 떠다니는 똥물에 잠긴다고 했다. 판자나 시멘트 블록 같은 싸구려 재료로 대충 뚝딱뚝딱 지어 집값이 싸기 때문에 시골서 막 올라온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긴 했지만 누구도 거기서 터를 잡고 오래 살 생각이 없는 그런 동네였다. 똑같은 재료,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집 수백채가 장기판처럼 구획된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그나마 그 집도 우리의 소유가 아니고 빌린 것이었다. 방은 세개나 되었지만 제대로 된 부엌도, 거실도 없었다. 변소, 수도, 빨랫줄을 걸 마당이 없어서 아침마다 공동수도, 공동변소 앞에는 수백 대 일의 경쟁이 벌어졌다. 새치기하지 말라는 고함이 시골 살 때의 닭 울음소리처럼 아침잠을 깨우는 자명종 역할을 했다.

그런 우리집에 비하면 만수네 집은 천국 같았다. 만수네 여섯 식구가 빌려 쓰고 있는 두 방은 쪽마루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방마다 연탄아궁이와 작은 부엌이 딸려 있었다. 마당이 있었고 마당 한켠에는 가죽나무가 한그루 서 있어서 빨랫줄을 걸 수 있었다. 물기가 남아 있는 차가운 빨래가 얼굴을 스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하수를 모터로 퍼올려 쓰도록 만든 공동수도와 철대문 기둥에 붙여 지은 간이 목욕탕, 연탄광까지 있었다.

목욕탕은 요새는 못 써. 빨래하고 세수만 해. 몇년 전만 해도 지하수가 여름에는 진짜 샘물처럼 차가웠대. 겨울에는 따뜻하고. 요새는 공장이 생겨서 오염이 돼서 그런가 물에서 약 냄새가 나고 기름이 뜨더라. 좋긴 뭐가 좋아. 어차피 세 들어서 사는 건데.

재봉틀이 방의 사분의 일쯤 차지하고 있는 방에는 만수의 큰누나와 작은누나, 막내여동생이 기거하고 옆방에선 만수의 아버지와 동생 석수가 잔다고 했다. 누나들은 공장에 갔거나 일감을 받으러 갔고 여동생은 소꿉장난을 하고 있을 것이며 남동생은 도서관에, 아버지는 밖에 나가셨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는 술집에는 절대 안 가셔. 집에서만 술을 드시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절약을 많이 하시지. 동생 석수는 나하고 한 학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 걔는 공부를 무지 잘해서 공부방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아버지가 한방에 석수를 데리고 있는 거야. 아버지 술 드시고 주무시면 석수가 그 상에서 공부를 하니까. 나는 뭐 공부도 잘 못하고 하니까 방해 안하려고 누나들 방에 딸린 다락에서 자.

만수는 나를 옥상으로 데리고 갔다. 텔레비전 안테나가 삐죽삐죽 서 있는 다른 집 옥상들이 바라다보였다. 전깃줄이 어지럽게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만수 아버지가 주인집에 이야기해서 옥상 한켠에 흙을 가져다 작은 밭을 만들었다. 만수는 시골에서처럼 아버지를 도와 고추, 토마토, 상추 같은 채소를 심고 고구마와 무도 심고 가꾼다고 했다. 수확물은 집주인과 절반씩 나누는데 그래도 거기서 나오는 채소로 반찬값이 거의 안 든다는 이야기였다. 가끔 연탄불에 고구마와 감자도 구워 먹는다니 정말 부러웠다.

시골 우리집은 여기보다 훨씬 더 마당이 넓었어. 하늘은 산으로 똥그랗게 막혀 있었고 그 안에 밤마다 별이 꽃밭의 꽃처럼 반짝반짝 피어났어. 그때 우리가 그렇게 부자였다는 걸 서울에 와서 알게 됐어. 집도 있고 마구간도 있고 헛간도 있고 마당도 있고 담도 있었다. 여름에는 옥상에서 자는 게 훨씬 더 시원해. 여기도 서울인데 별이 보인다. 서울서 제일 변두리라서 그런가봐. 아버지? 뚝방 밑의 들마루에서 장기 두는 사람들한테 가셨을 거야. 맨날 속아서 돈을 잃지만 않았으면 이 집 샀겠다고 그러셔.

만수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만수에게 서울에 언제 왔느냐고 물었다.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전학 왔지.

그런데 어떻게 사투리를 거의 안 써?

우리 할아버지가 서울에 유학을 하셨대. 할아버지한테서 어릴 때부터 서울말 배웠거든.

만수의 진지한 눈을 보면 거짓말 같지는 않았지만 믿을 수도 없었다. 그날 만수에게서 장기를 배웠다. 만수 아버지가 배터리와 라디오를 고무줄로 동여매고 벽에 못을 박아 걸어놓은 라디오를 틀자 정말로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라는 연속극이 흘러나왔다. 등골에 땀이 흐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장기를 배운 지 몇판 되지 않아 내가 만수에게 이겼다. 만수는 내가 실력이 대단하다면서 학교 특별활동반에 바둑반만 있고 장기반이 없는 게 아쉽다고, 그게 있었으면 내가 학교 대표가 됐을 거라고 했다.

문제는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이야기고 장기고 연속극이고 간에 배고픔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 정도가 아니라 하수구에 물이 빠질 때처럼 ‘쿠루루루루루루루룩’ 하는 소리가 나자 만수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더니 선반 위에 있는 비닐봉지를 내렸다. 거기에는 소주가 한병, 그리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크림빵과 단팥빵, 소보루빵이 들어 있었다. 만수는 한참을 고민하다 크림빵을 집었다. 또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꼼꼼하게 절반으로 나누더니 하얀 크림이 많이 들어 있는 쪽을 내게 주었다.

한번 먹어봐. 누가 오면 국물도 없으니까 빨리.

뱃가죽이 등에 붙을 듯하던 참에 달콤한 크림이 입속에 들어가자 귀 아래쪽이 찌르르했다. 나는 최대한 천천히 맛을 보려고 했지만 입안의 근육이며 혓바닥, 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각각 제멋대로 날뛰는 야생동물 같았다. 결국 어금니가 입속의 살을 씹어버렸다. 피가 나고 비릿한 맛이 났다. 그래도 씹고 돌리고 맛보고 삼키는 동작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마지막 빵조각을 배로 내려보내고 나서는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예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만수가 손톱만한 크기로 조각을 내가며 먹던 자신의 반쪼가리 빵에서 남은 절반을 내게 내밀었다. 내 혀는 고맙다고 말하기보다는 빵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목이 메어 컥컥대자 만수는 수도로 가서 물을 떠왔다. 물을 담아온 병에는 빨간 글씨로 ‘우유’라고 적혀 있었고 소독약 냄새가 났다.

너 정말 좋은 집에 산다. 변소에서도 좋은 냄새가 나고. 아버지도 누나들도 동생들도 다 좋은 사람일 거야. 너를 보면 알 수 있어.

나는 만수에게 서울로 전학 온 이후 가장 긴 말을 했다.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맛, 그립고 아련하고 유혹적인 크림빵에 대해서도.

 

담임은 자신이 ‘교육봉’이라고 이름 지은 몽둥이로 교탁을 두드렸다.

지금부터 아버지 직업에 대해 조사를 하기로 한다. 내가 직업을 호명하면 손을 들지 말고 해당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버지가 공무원인 사람? 일어서! 앞에서부터 번호!

대여섯명의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얌전하게 번호를 세었다. 이어 아버지가 회사원인 아이들이 일어서서 번호를 외쳤고 아버지가 공장에 다니는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절반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남았다. 담임은 칠판에 백묵으로 공무원, 회사원, 공업 하는 식으로 써나갔다.

자아, 이번에는 상업이다. 집에서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거나 가게를 하시는 분, 일어선다.

담임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촌지라도 들고 올 수 있는, 과외라도 받을 수 있는 집안이 유복한 아이들을 미리 파악해두자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지 않고는 일어서 있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어디서 하는지 물을 이유는 없었다.

예전에는 사농공상이라고 해서 장사하는 사람을 제일 낮게 쳤지만 지금은 장사하는 사람이 제일 빨리 부자 되고 자식들 교육도 잘 시킨다.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흥복이 아버지가 쌀집을 한다고? 좋다. 정훈이 아버지는 집을 지어서 판다고? 지금은 뭐든 건설을 하는 시대이니까 건설업은 아주 전망이 밝다.

담임은 세경이 자신의 아버지가 금은방 겸 시계포를 운영한다고 했을 때 시계의 종주국 스위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국 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가느다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굵기의 철사를 만들어서 독일에 보냈다. 너희들이 이런 걸 만들 수 있느냐고. 그러자 독일 사람들이 거기에 귀를 뚫어서 바늘로 만들어가지고 미국에 돌려보냈다. 미국 사람들이 그 바늘을 다시 스위스에 보내봤다. 스위스 사람들이 그 바늘의 처음부터 끝까지 구멍을 뚫어서 파이프로 만들어 도로 보냈다고 한다. 스위스는 그만큼 시계처럼 정밀한 과학기술이 발전한 나라라는 것이다. 용수는 전파사? 그것도 좋다. 성규 아버지는 빵집? 야, 올해 우리 반에는 가정형편이 좋은 우수한 학생들이 많구나.

담임은 신이 났다. 자신의 꿈이 공군 비행사였다는 것까지 말했다. 어릴 때 입은 상처 때문에 생긴 흉터로 비행사가 될 자격을 잃어버렸다고도. 높은 고도에 올라가면 흉터로 피가 터져나와서 출혈과다로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비행사가 될 수 없다고 했다.

부반장이자 솜털이 보송보송한 게 계집애처럼 예쁜 안재현은 아버지가 종합건재상을 운영한다고 말하고는 재빨리 앉아버렸다. 재현의 아버지는 우리 학교가 생기기 전부터 큰 과수원을 해왔고 가지고 있는 땅만으로도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학부형이었다. 거기다 공단이 생기면서 부동산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는 주변 상황에 맞춰 여러가지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담임 역시 학교 앞에 있는, 재현의 이름을 딴 엄청난 규모의 종합건재상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도록 서 있던 만수 차례가 되었다. 만수는 재현이 자신의 몸이 닿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것을 알고 재현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줄기가 휜 소나무처럼 비뚜름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릎이 달달 떨리는 게 보였다.

만수는 아버지 직업이 농사라고? 농사? 그건 사업이 아니다.

만수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농사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사업이라고 가르쳐주었다고 말했다. 담임은 웃었다.

시골 분이라 뭘 오해하신 것 같은데 농사는 농업이다. 현재 우리 삼천삼백만 국민의 칠십 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그걸 사업이라고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만수는 축산업이라고 정정했다. 그러면서 자꾸 히죽히죽 웃어 보였다. 약자들의 비굴한 웃음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말을 바꾸고 변명을 해서 시간을 끄는 게 짜증스러웠다.

소? 돼지? 닭? 뭘 키우시나?

만수는 집에서 소, 돼지, 닭을 모두 키웠다고 대답했다. 말할 때 웃으면 덜 맞나? 웃다 맞으면 덜 아픈가? 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는 격언이 적힌 영어공책의 뒷면에 샤프펜슬로 썼다 지웠다. 자연도태는 왜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나쁘진 않다. 목장이 어디 있나? 양계장은? 축사는? 시내엔 없을 거고. 서울 근교도 땅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으니까.

만수는 가족이 살던 동네 이름을 말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등신 같은 놈.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자연환경이 악화되면 한 집단에 속한 누 가운데 약한 개체는 맹수들에게 사냥당해 죽고 만다. 그럼으로써 전체 집단의 안전과 건강함이 유지된다. 생물시간에 배우고 티브이에서도 본 내용이었다. 만수는 약하거나 어린 누였다.

개운리라니 무슨 동네 이름이 그따위냐. 리 단위는 서울 바깥 시골에나 있는 거지. 이놈의 자식, 거짓말하는 거 아냐? 선생님한테 거짓말하는 건 최고 악질의 거짓말이다.

만수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다. 무릎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내 짝인 희철이 손을 들고 일러바쳤다.

만수 아버지는 남의 집 옥상에 코딱지만한 밭 만들어서 농사짓는답니다. 소, 돼지, 닭이 한마리도 없습니다.

담임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희철은 자신의 아버지가 싸우디아라비아에 산업역군으로 가서 번 돈을 매달 꼬박꼬박 부쳐온 덕분에 자신의 어머니가 슈퍼마켓을 차렸으며 그 가게에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소주를 사러 오는 게 만수라고 했다. 며칠에 한번은 빵과 우유를 사가는데 그게 만수 아버지의 간식이라는 것도. 그리고 만수의 아버지에 대해 자신의 어머니가 한 말을 그대로 아이들 앞에서 인용해 보였다.

암만 손님이라고는 해도 저런 인간은 사내도 아니다. 식구들 피 빨아먹는 거머리다. 기생충이지.

만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하필 그게 재현의 무릎 위였다. 재현은 비명을 질렀다. 만수가 일어나자 재현은 붉고 작은 입술로 조그맣게, 인간에 대한 최악의 경멸을 담은 말을 내뱉었다.

더러워, 증말.

그 말을 듣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학교 건물 계단 통로의 삼층 베란다에 걸터앉게 된 것은 실험 때문이었다. 화학, 물상, 생물시간의 실험이 아니라 마음의 실험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꿀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 나란히 베란다 끝에 앉은 아이들은 실험실의 흰쥐였을 뿐이었다. 실험실의 흰쥐와 다른 점은 그들이 실험을 해 보겠다고 자원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념과 강한 의지만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우리는 도덕시간에 배웠다. 해외토픽에 보니까 교통사고가 나서 자기 애가 차에 깔려 죽게 되자 엄마가 트럭을 번쩍 들어올려서 애가 살아났다고 하더라. 우리집 아랫집에 사는 아저씨는 양잿물에 발을 담가서 병원에서도 포기한 무좀을 고쳤다. 옆집 아저씨가 그러는데 좀 있으면 세상이 불과 물과 기름의 심판으로 망할 거란다. 그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하느님한테 바치고 하느님이 지정해놓은 장소에 모여 있으면 천국으로 가는 양탄자가 내려온단다.

삼학년이 되면서 지겹게 또 같은 반이 되고 옆자리에 앉게 된 이종태라는 녀석이 누런 이똥이 낀 이에서 썩은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댔다. 평소 같으면 상관도 하지 않을 나였지만 그날따라 무식한 아이들을 깨우쳐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친 소리 하지 마라. 그럼 네가 네 의지로 사투리를 안 쓸 수도 있냐?

종태는 수업시간에 자신이 제대로만 잠들면 잠꼬대를 할 것인데 거기서 바로 표준말이 나올 테니 즉각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졸립다고 생각만 하면 칠판지우개가 날아와서 아직까지 잠꼬대를 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그보다 훨씬 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꾼 사례가 자신이 최근에 축구부에 들어간 일이라고 했다.

네가 축구부에 들어가? 우리 학교 대표로?

그래. 맞다.

뒤에 앉아 있던 만수가 나섰다. 하나는 길쭉하고 하나는 동글동글해서 생김새는 안 닮았는데 어째 둘이 친형제같이 느껴지는 건 번갈아가며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동태가 집에서 학교까지 나하고 같이 다녔는데, 내가 체력장 오래달리기 연습도 할 겸 집에서부터 학교까지 달려서 다니자고 했거든.

동태가 누군데?

어, 우리끼리는 동태하고 만두, 이렇게 부른다.

그래, 참 끼리끼리 가지가지 하며 논다.

고맙다, 좋게 생각해줘서. 동태하고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년을 뛰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덥거나 춥거나 간에 하루도 안 빠지고. 동태는 처음 뛸 때는 옆구리 아프다고 두세번은 쉬고 가자고 했는데 지금은 한번도 안 쉬고 나보다 훨씬 빨리 뛴다. 지금 동태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빠를 거다. 백 미터 기록이 십이초다. 체력장 만점 기록보다 훨씬 더 빠르다. 며칠 전에 체육선생이 동태를 축구부에 데리고 가서 시험을 봤는데 한번에 합격했다. 이제 동태는 공부 안하고 축구만 해도 된단다.

콧등에 땀까지 흘리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만수를 보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종태는 정말 동태처럼 눈이 튀어나왔고 만수는 만두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겼다.

호빵, 너는 달리기가 왜 안 늘었어?

나 만둔데? 만두라고 불러주면 정말 고맙겠다.

싫은데? 싫다고. 찐빵이라면 몰라도.

나는 시골서 국민학교 입학하면서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안 빼고 집까지 왕복 사십리를 뛰어댕겼다. 그때 이후로는 기록이 더 안 늘더라.

사십리라고? 십육 킬로미터를? 하루에?

응. 절반은 산길이고 나머지는 논둑길, 밭둑길하고 신작로였다. 고무신 닳을까봐 양손에 들고 맨발로 뛰었어.

지금 나한테 아베베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에티오피아 마라톤 선수, 맨발로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종태가 끼어들었다.

그게 누군데?

아베베를 몰라? 마라톤 영웅을?

나는 운동선수는 레슬링의 김일, 권투의 조지 포먼, 축구의 차범근밖에 모른다.

축구 하면 축구황제 펠레지. 득점왕은 서독의 갈색 폭격기 게르트 뮐러고. 한국 국가대표에도 아시아의 황금다리 이회택이 있고 드리블의 명수 김진국, 중거리슛의 정강지, 헤딩의 김재한, 수비의 김정남……

축구를 좋아한 아버지는 축구잡지를 정기구독했다. 대통령컵 대회가 열리는 동대문운동장에 나를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때 얻은 정보로 무식한 애들을 좀 깨우쳐주려고 했는데 이상한 소리만 해대는 것이었다.

팰래는 권투선수 아니야? 잘 패니까 팰래 아니고?

이번에는 만수가 나섰다.

동태가 보여줬다. 사람이 정말 절실하고 열렬하고 간절하게 소망하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런 게 바로 텔레파시다. 텔레파시는 거북이도 아베베로 바꿔놓는다.

아버지는 심령학에도 심취했다. 집에는 관련된 책이 수십권은 꽂혀 있었다.

정말 웃기고 자빠졌네. 텔레파시가 뭔 줄이나 아냐? 그런 걸 염력이라고 하는 거다.

맞다, 염력. 재현이는 정말 천재다. 인간은 염력으로 피라미드도 세우고 신대륙도 발견했다. 투명인간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다.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들어서 이래. 별꼴이 세쪽이야.

별이 세쪽이 나면 붙이기 정말 힘든데. 두쪽이 나면 모르지.

두쪽이 잘 나는 건 하늘이야.

두 녀석은 정말로 인간의 의지라는 것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확연해 보였다. 겨우 일년 동안 달리기로 학교를 다닌 걸 가지고는 광신적인 환상에 빠진 것이었다. 그들은 간절히 믿으면 믿는 대로 되게 해주는 염력의 힘을 입증해 보이겠다고 하면서 학교 건물 가운데 통로에 있는 베란다로 가자고 했다. 그날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가지고 온 아이들이 많았다. 종태처럼 만수 역시 까만 우산을 든 채 동행했다.

어떻게 증명할 건데?

창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 뒤 나는 물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던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는 멈춰섰다. 종태는 대답 대신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방향 저 방향 인사를 보내듯 손을 흔들어대자 아이들이 응답했다. “뭐냐, 저 새끼들?”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바로 옆에 있는 교실에서도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주시했다. 만수가 말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화단으로 뛰어내릴 거다. 그래도 우리는 전혀 다치지 않을 거다. 우리는 의지에 따라 공기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는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흙과 시멘트 콘크리트가 뒤섞인 바닥이 어서 오라는 듯 빛나고 있었다.

너희 재수없으면 목이 부러져 죽는다.

더이상은 저주가 될 것 같아서 입을 다물려고 했다. 만수가 대꾸했다.

우리도 바보가 아니거든. 그냥 뛰어내리는 건 아니다. 이 우산이 낙하산처럼 떨어질 때 위험성을 줄여줄 거다. 라이트 형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 바보들아,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만들었어. 낙하산 만든 게 아니라고.

거봐. 넌 공부를 진짜 잘하잖아. 그러니까 물상시간에 배운 대로 우리 떨어질 때 속도와 무게를 계산해주면 좋겠다.

왜, 내가 왜?

둘 다 멋쩍게 웃었다. 종태가 입을 열었다.

우리 솔직히 너를 참 좋아하거든.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언제 나 좋아하라고 했냐?

그래. 네가 우리의 실험을 봐주고 증언해줬으면 좋겠지만 네가 싫으면 지금 가도 돼. 하여튼 우리 둘 다 너를 좋아한다는 것만 알아둬. 당장 우리가 떨어져 죽는다 해도 그건 진심이야.

그때 아이들이 베란다 안쪽 창에서 물었다.

재현아, 쟤들 확실히 뛴대? 안 뛸 거면 매점 가서 보름달빵 사 먹고 오게.

난 몰라.

야, 니들 교무실서 꼰대들 올라오기 전에 빨리 뛰어라. 걸려서 작살나지 말고.

걱정해줘서 눈물 나게 고맙다.

두 아이가 삼층 베란다에서 아래로 우산 하나에 의지해 뛸 거라는 소식은 음속보다 빨리 학교 전체에 퍼졌다.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침을 삼키면서 실험동물들이 학교 교무실 바로 위 삼층에서 뛰어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먼저 간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산을 들고 베란다 끝에 서 있는 만수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하던 갈릴레이처럼 멋있어 보였다는 것을. 그 순간 만수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눈을 감았기 때문에.

이런 미친놈의 새끼들 좀 봐!

축구부 지도교사이기도 한 체육선생이 가장 먼저 추락현장에 도착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만수는 키가 이층 높이까지 닿는 히말라야시다 가지에 몸이 걸리며 비스듬하게 옆으로 떨어졌다. 그 바람에 허리와 어깨를 쓸리고 체육선생에게 사타구니를 호되게 걷어차여서 퉁퉁 부어오르기는 했지만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산을 손에 쥔 채 똑바로 떨어져 체조선수처럼 멋지게 착지하는 걸 보여주려던 종태는 발과 다리에 금이 가서 몇달 동안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다. 당연히 학교 축구대표로 뛸 수 없었고 축구대회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올린 뒤 명문 축구부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리라던 계획은 완전히 망가졌다. 우산은 두사람이 뛰어내리는 순간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든 궁녀들 치마처럼 힘없이 훌러덩 위로 젖혀졌고 그나마 고쳐 쓸 수도 없게 박살이 났다. 나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두 미친놈들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수는 중학교 다니는 내내 성적이 반에서 중간밖에 되지 않았다. 석수는 중학교에서 본 첫 시험만 3등을 하고 이후에는 계속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나나 명희, 막내 옥희까지 아무리 시골일망정 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성적이 반에서 3등 이하인 적은 없었다. 라디오로 방송통신학교 중고등부 과정을 이수할 때조차, 산업체 부설 야간여상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에서 석차가 10등 이하, 그러니까 두 자릿수라는 기록은 우리집 형제들 중에서는 만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공부만 가지고 따진다면 만수가 다른 형제들과 같은 핏줄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장남이라는 것, 오빠가 살아 있을 때 가장 아꼈던 남동생이라는 게 오빠를 생각나게 하지 않았다면 할아버지가 그리하라 했다 해서 만수를 ‘집안의 기둥’으로 여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수가 고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되자 아버지는 만수에게 되지도 않을 공부는 때려치우고 공단 주변의 철공소나 시장의 가게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기술을 배우면 식구들을 잘살게는 못해도 굶기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나, 만수가 연합고사에서 떨어져서 고등학교 못 가면 간호전문학교 시험 볼 거야. 간호전문학교가 힘들면 간호학원에라도 갈 거야. 흰 가운 입고 의사 선생님을 도와서 아픈 사람들 치료해주는 게 내 소원이었어. 우리는 지금 애급 땅에서 탈출해 나와서 젖과 꿀이 가나안으로 가는 사막을 헤매고 있는 중이야. 물이 나오지도 않을 우물을 팔 여유가 없잖아. 나는 언니처럼 내 인생을 양보하면서 살지 않을 거야.

매달 월급을 타와서 아이들 학비에 보태는 명희가 그렇게 선언했다. 석수는 만수가 어떤 학교에 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진로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 말은 하지 않아도 만수가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장녀라서 그런지 장남인 만수 편으로 자꾸 기울었다. 실력만 된다면 할 수 있는 한 뒤를 밀어주고 싶었다. 어쨌든 고입 연합고사는 잘 보고 볼 일이었다.

연합고사 점수는 총점이 200점이었다. 그중 체력장에 배정된 점수가 20점으로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체력장에서 점수를 잃지 않기 위해 과외까지 받는다고 했다. 만수는 다른 건 몰라도 몸 하나는 튼튼했다. 체력장 검정을 받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몸살 한번 앓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체력장 대비한다고 아침저녁으로 학교를 오갈 때 한번도 쉬지 않고 내처 뛰어다니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체력장에서는 만점을 받을 걸로 알았다.

큰누나, 배가 아프다.

체력장 시험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은 어느날 오후였다. 재봉실을 사가지고 돌아오자 만수가 방에 엎드려 있다가 말했다. 재봉 재료와 옷감을 파는 가게 옆에 자주 가는 약국이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남자가 자꾸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신경이 쓰였는데 뒤를 따라오기까지 해서 뛰어오는 바람에 나 역시 숨이 차고 옆구리가 아프던 참이었다.

뭘 잘못 먹었냐? 잘못 먹을 거라도 있으면 좋겠다. 배고픈 거보다는 아픈 게 낫다.

석수가 쏘아댔다. 석수에게 어릴 적부터 따라다녔던 반항기가 사춘기가 되면서 형과 관련된 건 뭐든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거는 식으로 나타났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럴 때는 성격이 무던하고 잘 참는 만수가 확실히 나았다.

어디가 아픈데? 달리기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면 쉬면 되지.

아니다. 옆구리가 아픈 게 아니고 여기 배 한가운데가 너무 아프다. 꽉 막힌 것 같다.

석수 말대로 뭘 잘못 먹고 체한 거 아니니?

오전수업부터 배가 아파서 도시락도 못 먹었어.

그래? 그럼 체한 것 같으니까 따보자. 아파도 참아.

바늘을 소독하고 만수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냈다. 체한 사람의 피는 시커멓다는데 만수의 피는 맑은지 탁한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계속 아프다고 하길래 손을 뒤집게 해서 양손의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위를 모두 찔렀다.

어때? 시원해? 안 아프냐?

만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큰누나가 손가락 따주니까 고맙고 안 아프다. 하나도 안 아프다.

석수의 비수가 가차없이 날아와 꽂혔다.

간신. 아양쟁이. 비겁자.

소처럼 크고 맑은 만수의 눈을 보니 마음이 울컥했다. 아버지 술심부름을 못했다고 걱정하는 만수를 데리고 같이 잤다. 다음 날 아침, 야근하고 들어온 명희가 만수를 두들겨 깨워서 제 잠자리인 다락으로 올려보내려고 했는데 만수는 일어서지도 못했다. 가시 돋친 명희의 등쌀에 만수는 결국 두꺼비처럼 쪽마루를 엉금엉금 기어서 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학교 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니냐고 머리를 몇대 쥐어박더니 나가버렸다. 일단은 학교 가지 말고 쉬라고 했다. 흰죽을 끓여서 줬는데 제대로 넘기지도 못했다. 나도 밀린 일이 많아서 더이상 만수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나 약국에서 쬐끄만 병에 담아서 파는 소화멀미약, 먹으면 까스 나오는 그거 먹고 싶은데. 그거 먹으면 까스가 나오고 금방 나을 것 같은데.

이튿날 아침에 만수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눈을 감아버렸다. 속눈썹으로 눈물이 밀려나왔다. 약국에 갔더니 그 남자가 또 와 있었다. 잿빛 트렌치코트에 양복을 입고 코가 반짝거리는 검정색 구두를 신었으며 서류가방을 든 남자는 약국을 돌아다니는 영업사원처럼 보였다.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유심히 나를 살피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허구한 날 방구석에 처박혀 재봉틀이나 돌리다가 후줄근한 운동복에 스웨터를 걸치고 다니는 여자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는가 싶었다. 사는 김에 소화제를 액체로 된 것 말고도 정제를 여러 종류 사고 진통제와 명희가 먹고 석수까지 밤샘공부 한다고 이따금 먹는 각성제 ‘타이밍’도 샀다. 역시 남자가 따라왔지만 이번에는 뛰지 않았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될 때까지 애를 방치한 겁니까? 부모 어디 있어요? 까딱하면 애 잡을 뻔했잖아요.

소화제 세병을 마시고도 만수는 트림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진땀을 흘리고 신음 소리를 내며 앓다가 종내는 방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이웃집에서 리어카를 빌려와서 이불에 둘둘 만 만수를 실었다. 내가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옥희가 뒤에서 밀고 해 겨우 병원까지 데리고 갔다. 의사는 맹장염이 악화되어서 복막염이 됐다고, 긴급하게 수술을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의사에게 혼이 나면서 수술동의서를 작성했다.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다.

문제는 돈이었다. 맹장염 수술이 호미라면 복막염은 가래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이 들었다. 일주일은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체력장 시험도 못 보게 생겼다. 만수가 다니는 학교 교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질병이나 입원 같은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체력장 시험을 못 보게 되면 진단서 첨부해서 제출하세요. 기본점수는 나갈 겁니다.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별다른 감정이 실려 있을 리 없는데도 어쩐지 매정하게 들려서 눈물이 났다. 어디를 가나 돈 없고 실력 없으면 이런 대접을 받게 되어 있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동생들 다니는 학교에 단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뜻밖에도 하루 뒤에 만수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회장이자 반장이라는 덩치가 커다란 학생과 여학생처럼 아주 예쁘게 생긴 학생이 학교 대표로 위문을 하러 왔다며 병원으로 찾아왔다. 담임에게서 만수의 딱한 사연을 듣고 학생회장이 3개 학년 모든 반을 돌며 모금을 했고 그걸 모아 가져왔다고 했다.

사실은 모금이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연설을 하면서 다니는 걸 보고 담임선생님께서 교무실에서 모금을 해서 도와주셨습니다. 여기 있는 안재현이가 병원 오는 길에 자기 집에 가서 아버님께 사정을 잘 말씀드렸더니 재현이 아버님께서 수술비를 전부 부담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쓰고 있는 모자가 아기 모자처럼 작아 보일 정도로 큰 얼굴에 여드름이 더덕더덕 난 학생회장은 부동자세로 서서 이야기했다. 나도 모르게 재현이라는 아이의 손을 쥐었다. 손까지 예뻤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데가…… 한번도 본 적 없는 만수를, 친구를 도와주신다니 아버님은 어떤 분이시냐. 내가 가서 무릎을 꿇고 감사인사라도 드려야겠다.

속눈썹이 긴 재현은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돌리더니 아이처럼 작고 부드러운 손을 빼려고 애를 썼다.

네가 만수하고 아침저녁으로 학교 다니면서 뛰었다는 그 친구는 아니지? 나도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동생 말이 비쩍 마르고 눈 크고 한 애라는데……

재현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학생회장이 먼저 말을 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아, 이종태 그놈요? 그놈은 모금할 때도 한푼도 안 냈어요.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성의만 있으면 버스표라도 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반 대표로 만수 병원에 위문 간다고 갈 사람 손들라고 했을 때도 모른 척하고 딴짓하면서 가만히 있더라고요. 만수하고 안 친하던 애들도 열명이나 가겠다고 했거든요. 담임선생님께서 너무 많이 가면 오히려 환자나 가족한테 부담된다고 말리셔서 우리 둘만 왔지만 말입니다. 제가 봤을 때 만수는 교우관계를 바꿔야 합니다. 만수도 이번 기회에 많이 깨달을 겁니다. 누가 진정한 친구고 아닌지.

학생회장은 만수의 진정한 친구가 아닌 게 확실했다. 병실에 들어가서는 핏기 없이 잠들어 있는 만수의 얼굴을 보면서 학생회장은 손도 내밀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한 손에는 책가방을 들고 한 손은 옆구리에 딱 붙인 게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했다.

재현은 진정한 친구가 맞았다. 만수의 손을 잡고 입을 귀 근처까지 갖다댄 뒤에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따뜻하고 정다운지 고마워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둘이 가고 난 뒤에 만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만수야, 미안해. 정말 미안. 병문안 못 가서. 크림빵 단팥빵 소보루빵 찐빵 호빵 다 사가고 싶었는데 돈이 하나도 없구나. 너에게 빈손으로 갈 수 없어서 못 갔어. 하지만 맹세할게. 영원한 우정을 너에게 바칠 거라고. 지금 우리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부자겠지? 빨리 나아서 학교에서 만나자. 영원히 마음으로 너를 사랑하는 친구, 종태가.

만수의 손안에 들어 있던 쪽지에 쓰인 글귀였다.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학교라면 내 몸이 일을 하다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만수를 학교에 꼭 보내야겠다고 나 또한 맹세했다.

 

나는 유물론자다. 내생이나 전생, 영혼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는다. 생로병사에 연연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십대에 뜻을 펴보기도 전에 큰 좌절을 겪었다. 스스로를 던져 내 가족과 가정, 주변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내 평생에 가장 한스러운 일은 맏손자 백수가 머나먼 이역 월남에서 비명횡사한 것이다. 나는 백수를 죽게 만든 나라들과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증오한다. 백수처럼 무고한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보낸 권력자들, 동족의 목숨과 피땀으로 제 배를 불린 더러운 장사치들, 죽음의 독약을 만들어 뿌린 제약회사며 군수산업체며 무기상이며 군 지휘자며 비행기 조종사며 죽음의 시공간을 만들어낸 모든 존재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백수가 이역만리의 병원에서 맞은 절체절명의 고독한 일순간, 영문도 모르고 가족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둔 그 시공간을 생각하면 애가 끊어지고 간장이 녹는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십대에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던 벗들이 옆에 있다면 내게 물을지도 모른다. 개체의 생물학적 연장인 핏줄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이 세계를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바꿔나갈 책무를 지닌 유물론자로서 온당한가.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영세불멸의 것으로 하려는 동물적인 욕망이며 봉건적인 세계관의 발로가 아닌가. 예전이라면 내 속내가 훤히 드러난 것을 부끄러워했겠지만 이제 나는 바로 그게 우리가 바꿔나갈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답고 뜨겁던 마음을 지녔던 벗들은 이 누차하고 타락한 세상에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느낀다.

내가 일평생 가장 잘한 일은 식구들을 데리고 개운리 산골짜기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두번째로 잘한 일은 개운리 산골짜기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다. 나갔다면 내 벗들이 그랬던 것처럼 옳은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훼절하고 백색 테러에 목숨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소심한 자의 우연한 선택으로 일신을 지키고 자손을 얻는 기쁨을 누렸으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악랄한 이빨과 주구의 발톱에 백수를 잃었다. 실로 통분하다. 억울하다. 나의 무력함이 뼈에 사무친다.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 아들은 내 곁에 없다. 서운하지 않다. 미안할 뿐이다. 나는 한때나마 착하고 순결한 아내를 의심했다. 아내에게 발설한 적도 내색한 적도 없지만 아내와 아들은 그것을 알았다. 그 의심이 어처구니없는 것임을 환하게 보여준 게 백수였다. 하찮은 내 목숨 열개와 바꾸어도 아깝지 않을 백수, 젊고 아름다운 그 아이의 죽음은 그 부당한 의심에 대한 벌이었다. 아, 평생의 후회로도 그 죄를 씻을 수 없구나. 슬프다. 슬프구나.

평생토록 내가 궁금해했던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죽을 때 등잔에 기름이 다해 불이 꺼지듯, 방 안의 전등이 꺼져 암흑에 잠기는 것처럼 의식이 스러지면 모든 것이 그만인 것인가. 그럴 것이다. 내가 유물론자였음을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내게 입증해줄 것이다.

자 그럼, 사소하고 지루하게 길었던 나의 삶이여, 이만 안녕히.

 

떠난 지 삼년 만에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를 집에서 떠나게 한 사람은 아버지였고 돌아오게 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떠나게 할 때 아버지는 살아 있으면서 내게 아이들 데리고 떠나라고 말했고 돌아왔을 때는 남긴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이 저세상으로 떠난 뒤였다.

서울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금희가 제 오빠가 월남에서 보내준 재봉틀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굶지는 않았다. 명희는 푼돈이라도 월급을 타와서 동생들 학비로 보탰다. 딸 농사는 잘 지은 셈이다. 딸들 덕분에 술도 마실 수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아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향집에서 도망쳐왔지만 서울에서도 죽은 아들 생각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맨정신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누에는 뽕잎을 먹고 산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서울은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좁아터진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면서 아귀다툼을 벌이는 데가 서울이었다. 없는 놈들끼리 더 훔치고 못살수록 더 싸우고 서로 안된 처지에 서로를 욕하고 아프고 주리고 외롭고 힘들게 살았다. 서울은 무식한 내게도 너무도 노골적으로 느껴지도록 ‘물질이 주인인 세상’이었다.

마음에 드는 건 막걸리보다 훨씬 쉽게 취할 수 있는 소주뿐이었다. 고향에서는 농사일을 해서 몸이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술을 마셨는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술 마시는 게 일이 되어 술은 점점 더 늘었다. 내 나름대로는 덜 마시기 위해 술심부름시킬 때 소주를 한병씩만 사오게 했는데 다음날 술이 깨면 몇번이나 술심부름을 시켰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은 아들의 목숨값으로 얻은 재봉틀에서 나온 돈으로 술이나 처먹는다는 생각을 안한 건 아니다. 사지육신 멀쩡한 인간이, 고향에서는 상농사꾼으로 알려진 사내놈이 매일 술이나 처먹고 자빠져 자다가 동네 건달들 내기장기 구경이나 하면서 길거리에 앉아 허송세월하는 게 한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어쩌다 장기를 둬서 고물 자전거를 하나 딴 적이 있었는데 그 자전거를 타고 낯선 길을 이러저리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 보고 개소리도 듣고 사는 거도 보고 웃기도 울기도 하고 그랬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군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마음의 공부 같은 거였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보려고 한 거였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삼년을 매일 술 처먹고 공부 비슷한 걸 하다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부를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갔다. 서울에서는 사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 큰일이었다.

공부를 못하는 놈은 일이라도 배우고 기술이라도 있어야 먹고산다. 공부는 어지간히 잘해서도 안된다. 아버지나 백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등을 해야 공부를 계속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공부하고는 영 담을 쌓은 것 같던 만수 그 녀석이 나한테는 말도 안하고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봤다고 했다. 금희가 뭐가 잘못 씌었는지 만수 공부는 제가 두배 세배로 일을 하더라도 꼭 시키겠다고 바락바락 고집을 세웠다. 원래 만수 성적이 나쁜데다 시험 보기 전에 무슨 맹장수술에 입원까지 하는 바람에 일차 지원한 공고에 떨어지고 이차 인문계에도 떨어졌다. 그런데 금희가 만수하고 날 잡아서 같이 어디를 가더니 집에서 버스를 두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곳에 있는 공업전문학교에서 합격증을 받아왔다. 일반 고등학교처럼 삼년도 아니고 고등학교 과정 삼년에 전문학교 과정 이년 해서 오년이나 다녀야 졸업하는 학교라고 했다. 이것들이 다 미쳤나 싶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오지 않았으면 절대로 그 망할 놈의 학교는 못 가게 했을 것이다.

장례 치르러 고향집에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쪼르르 앉아 있는 오남매를 보니 내가 무능력하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아버지 장례가 끝나고 나면 내가 다시 서울 가서 살 것 같지도 않았다. 만수가 오년제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학생이 셋인데 서울서 좀 사는 집도 감당하기 버거울 것이 뻔했다. 어떻게 감당을 하려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너희 인생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나는 모르겠다.

집에 돌아왔더니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그대로 병석에 누워 있었다. 내가 와야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고 어머니가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시골에 살면서도 방 안에서만 생활을 했으니 얼굴이며 손발이 언제나 희었다. 백발에 수염까지 하얀 아버지는 생각보다 자그마했다. 내 손발을 내려다보니 몇년간 농사와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도 곰 발바닥처럼 시커멓고 커다랬다. 결국 나와 아버지는 평생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사람들이 멍석이며 병풍, 그릇 같은 걸 들고 모여들어 포장을 치고 고복을 하는 식으로 도와주고 해서 비로소 초상집 모양을 갖추었을 때도 나는 그런 절차가 물이라면 난 그 위에 떠 있는 기름방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문상객들 사이에 앉아 술이나 마시고 그리 덤덤하게 있으니 마누라도 아이들도 내 눈치를 볼 뿐 크게 소리 내 통곡도 하지 못했다. 허리가 구십도로 굽은 어머니만 아버지가 불쌍한 양반이라고 되뇌면서 내내 눈물을 훔쳤다.

입관을 하기 전에 찬바람이 코와 입으로 밀려들고 머리 꼭대기가 쭈뼛쭈뼛하더니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취기가 싹 달아났다. 마치 저승차사나 귀신이 집 안에 들어서기라도 한 것처럼 냉기가 돌았다. 해골이나 다름없이 비쩍 마른 아버지의 얼굴에서 감긴 눈 주변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그것 말고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눈에 띌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땅처럼 솟고 꺼지고 평평하고 갈라지고 합쳐진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일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글자 하나 배우지 않은 내게도 ‘없을 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없을 무, 없을 무, 없을 무…… 한때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것. 무, 무, 무, 무, 무. 무슨 주문처럼 ‘무’라는 한 글자가 내 입속에 가득 찼다. 쇠죽 끓는 가마솥처럼 입속에서 무의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이제 없는 나의 아버지, 이제 없는 나의 아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와 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맏이였다. 그리고 맏이를 잃었다. 아버지와 나는 같았다. 황소울음 같은 소리가 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죽은 아들이 내 몸속에서 같이 우엉우엉 우는 것 같았다. 옆에서 엎드리고 있던 만수가 송아지가 엄마를 찾아 울듯이 따라 울기 시작했다. 만수의 울음은 온 식구가 소리 높여 울게 하는 신호가 되었다. 울음과 눈물로 집이 떠나갈 듯했다.

 

사건이 일어난 건 복도에 놓인 고무나무 화분 때문이었다. 그 화분이 복도의 창틀에 놓여 있었던 게 얼마나 되었는지, 왜 가져다놨는지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 복도를 지나가면서 연필 깎는 칼의 날 끝으로 고무나무의 넓적한 잎사귀에 줄 서너개를 그어놓았다. 생명체인 고무나무는 표면이 벌어지며 다친 부위를 치유하기 위해 끈끈한 즙액을 분비했고 거기에 묻은 먼지 때문에 원래 그어진 실금보다 더 눈에 띄었다. 자극을 받은 다른 누군가가 그보다 더 굵은 금을 그었다. 고무나무는 더 큰 상처로 반응했다. 그런 식으로 십여번의 칼질이 고무나무 잎사귀에 가해졌다. 그 모습이 마침내 복도를 지나던 담임의 눈에 띄었다. 종례시간에 종일 광을 낸 군화를 신고, 빳빳이 줄을 세운 군복을 입고 다이아몬드 세개가 달린 계급장을 단 채, 광량에 따라 렌즈의 빛깔이 변하는 첨단기술이 적용된 시커먼 안경을 쓰고 교실로 들어온 그는 처음에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복도 창틀에 있는 죄 없는 고무나무에 누가 칼질을 해댔다. 고무나무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 없는 악랄함에 대해 나는 선생으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이런 놈이 있다는 게 수치스럽다. 하지만 나는 교육자다. 왜 그랬는지 동기에 대해 알고 싶고 어떻게 그렇게 마음보가 비뚤어질 수 있는지 이해를 해보고 싶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다. 누가 그랬나. 나와라. 열 셀 때까지 나오면 용서해주겠다.

담임은 우리를 죽 둘러본 뒤에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을 셀 때까지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담임은 다시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월남전 소대장 출신이다. 바로 너희처럼 제가 한 일에 책임을 지지 않는 비겁한 놈들이 월남을 공산도배의 손에 넘겨준 것이다. 미군의 최신식 화기로 이만발을 쏴서 베트콩 한명을 잡았다는 통계가 있다. 총알 이만발에 베트콩 하나라는 얘기다. 대가리를 꿩처럼 밀림 바닥에 처박고 하늘로 총질을 해댔다는 거지. 그게 바로 너희의 형, 아저씨들이 월남 가서 한 짓이다. 내가 권총을 뽑아들고 돌격 앞으로, 하면 삼분의 일은 겁에 질려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나는 그런 놈들 엉덩이에 불이 붙도록 기관총을 쏴붙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니까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앞으로 기어나가더구만. 그게 인간이더라 이 말이다. 너희들은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사춘기에는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나도 겪어봐서 다 안다. 나는 너희를 제자로, 내가 담임하는 반의 제자로 사랑한다. 일시적인 욕구불만이 너희를 그렇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잘못을 알고도 같은 일을 저지르면 그건 교정이 필요하다. 댓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니 모르고 처음 그랬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 손을 들어라. 누가 그러는 걸 본 사람도 마찬가지다. 손을 들어라. 손을 들어서 말하면 용서해주겠다. 다들 눈을 감는다. 이번에는 일곱을 세겠다. 손을 들어라. 눈 감는다. 하나, 둘, 셋……

복도는 누구나 지나갈 수 있었고 고무나무에 상처를 낼 수 있는 건 전교생 누구나 가능했다. 담임이 왜 하필 우리 반에 범인이 있다고 생각해 자수를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아이들을 믿고 사랑한다면 오히려 다른 반에서 범인을 찾는 게 맞지 않을까.

교련교사인 담임은 원래 지방 중학교에서, 나이 때문인지는 모르나, 갑자기 만들어진 한문 과목도 같이 가르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지루한 교련시간에 공고생들에게 자신의 한문 실력을 자랑하고 아이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데 힘을 쏟음으로써 일주일에 주야간 공통 세시간짜리 교련시간을 서른시간인 것처럼 만들기도 했다. 가령 학교가 있는 언덕 가리산동(加里山洞)은 그의 가늘고 마른 손가락에 쥐어진 분필에 의해 ‘痂痢疝洞’으로 표기되고 “동네가 워낙 더럽고 비위생적이라서 옴, 설사, 허리앓이 같은 질병이 만연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해졌다. 주번이던 김만수의 이름에 대해서는 “네 이름을 지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정말로 단순무식하거나 무성의하구나. 만수무강(萬壽無疆)에서 앞 두 글자를 땄으니까. 네 동생 이름은 무강이냐, 요강이냐. 이름 때문에 네 팔자에 걱정이 많겠으니 네 호를 만가지 근심 걱정이라는 萬愁로 하여라” 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웬 고무나무 하나 가지고 그렇게 유난을 떠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온갖 콤플렉스를 다 가지고 있는 그에게 무슨 다른 기분 나쁜 일이 있었고 고무나무는 그의 눈에 우연히 띈 화풀이용 연료였을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나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들 생각하느라 바빠서 그런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눈 떠라.

눈을 뜨자 담임은 군모를 벗어서 교탁에 팽개치고 있었다.

나는 너희를 믿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면 그냥 지나갔을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인간적으로 배신감을 이길 수가 없다. 오늘 범인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집에 못 간다. 반장, 문 잠가라.

담임은 의자를 가져와 앉더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싹수가 노란 인간들은 교육만으로 고칠 수 없다. 지금 같은 뒤틀린 심성에서 나온 사건을 보면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가정교육 개판, 학교 개판, 사회 개판이니 선생이 아무리 애를 써서 가르쳐봐야 학생이 개보다 좀 낫기나 하면 다행이다. 사실 교사들 역시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 군 장교 출신인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볼 때 후진국인 우리나라는 최상의 교육을 받은 군인들이 국가의 엘리트로서 국민과 자라나는 세대의 교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우리 군인들만이 신라 화랑과 이충무공을 이어 호국 선무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경제를 건설하면서 썩어빠진 정치와 사회의 환부를 도려내왔다. 단적인 예로 지금의 교원양성 시스템은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서울 등 대도시 교원충원 방식도 이랬다 저랬다 하며 믿을 수가 없다. 도대체, 도대체는 한자로 都大體로 쓴다마는, 교무실에서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못 봤다. 그런 교사들한테 교육을 받으니 너희 수준도 어차피, 어차피 또한 한자이니 於此彼로 쓴다, 개판을 못 벗어나는 것이다. 변두리 삼류 똥개들의 난장판 말이다. 너희가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고등학교 출신, 아니 그냥 이 동네 아닌 데에 있는 공고, 상고 출신만 만나봐도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을 하게 될 거다.

아이들은 몸을 뒤틀면서도 어찌할 수 없이 늘 하던 것처럼 개소리・잡소리・잔소리 종합세트를 듣고 있었다. 다른 반 아이들이 수업 끝나고 우리 반을 들여다보고는 실실 쪼개면서 지나갔다. 억울했다. 게다가 나는 과외학원을 가야 했으므로 마음이 급했다. 그 과외학원은 근처의 실력있는 교사들이 비밀스럽게 만든 것으로 공고, 상고에서 상위 십 퍼센트 이내의 아이들을 모아 국・영・수 세 과목을 집중지도했다. 동일계 전형으로 사년제 명문대학에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는 아이들은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는 만큼이나 시간도 엄수했다. 담임은 그런 학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알게 되어서 기분이 나빠 고무나무를 걸고넘어지면서 학원에 못 가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 정말 개떡 같네. 학원 한시간에 돈이 얼만데.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나왔다. 두줄 앞에 앉은 김상태가 손을 들었다.

뭐야, 너였어?

상태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오줌이 겁나게 마려워서라. 터질라 한당께요” 했다. 담임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쳐갔다.

뭐, 오줌? 또 오줌 마려운 사람?

그러자 몇몇이 자신없게 손을 들었다. 담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자리에서 싸도 좋다. 범인이 나오기 전에는 못 간다.

“아, 정말” 하고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나왔다. 하나는 범인 색출을 한답시고 억지를 쓰는 담임에게 향한 것이었고 하나는 누군지 모를 범인을 향한 것이었다.

나는 너희들의 담임선생으로서 종례시간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불만이 있으면 내 반을 떠나라. 단 한번 저 문을 나가면 나간 사람 마음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바이다. 나는 또한 담임으로서 너희들이 올바른 심성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줄 의무도 있다. 누구도 내 권한과 의무를 침해할 수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수를 하면 이 시간부로 모든 상황은 끝이다. 군인은 한번 입에 담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킨다. 너희도 학생 신분이긴 하지만 교련을 받고 있으니만큼 나라가 위급하면 언제든 최전방으로 불려나가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현역군인이나 똑같다. 자, 군인답게 나와라.

마침내 아이들 사이에서는 “네가 그랬잖아” “너 나가” 하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음 소리가 났다. 임경수였다.

아 씨, 나 쌀 것 같애. 싸겠어.

내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앉아서 싸래잖아.

다시 신음이 들렸다.

민호야, 이건 진짜라고. 오부지게 큰 거야. 무지 굵은 놈이 밀고 내려온다. 지금 당장 가라고 해도 가다가 쌀 거 같다. 못 참겠어. 정말.

그때 만수가 손을 번쩍 쳐들었다. 담임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예 손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만사가 걱정인 놈.

선생님, 사실은 내가 그랬습니다.

뭐야? 선생님한테 말을 할 때는 내가가 아니라 제가라고 하는 거다, 이놈아. 다시 해!

만수는 떠듬떠듬 말했다. 웃으면서.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

뭘?

제가 고무나무에 커터로 금을 그었습니다.

왜 그랬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나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나와, 개자식아.

예?

나오라고, 이 개새끼야. 사람 말이 말로 안 들려?

하지만 담임은 만수가 나오기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만수가 있는 자리까지 군홧발을 쿵쾅대며 달려왔다. 엉거주춤 서 있던 만수의 배를 담임의 정권이 강타했다. 헉, 하고 쓰러지는 만수의 턱에 강력한 어퍼컷이 꽂혔다. 고개가 공중으로 들어올려졌다가 풀썩 주저앉는 만수의 등짝에 팔꿈치 가격에 이어 발뒤꿈치 공격이 가해졌다. 그런 동작을 할 때마다 담임은 말을 한마디씩 절도 있게 끊어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나오라고, 했잖아, 새꺄, 좋은 말로 할 때, 용서해준다고, 용서해준다고,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고, 개놈의, 새, 끼.

만수는 교실 바닥에 완전히 뻗어 의식을 잃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지의 허벅지 부위가 제주도 크기만하게 잿빛으로 물들더니 이어 한반도 모양으로 젖은 부분이 넓어져갔다. 그날부터 만수는 한동안 ‘미친 교련선생한테 물려서 오줌을 싼 개’로 불리게 되었다.

며칠 뒤 고무나무 화분은 누군가에 의해 잎이 조각조각 잘려 토막이 나고 창 너머로 내던져진 뒤 교무실 뒤편 시멘트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만수의 짓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담임은 난도질을 당한 채 뿌리째 뽑힌 고무나무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새벽에 깼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아랫도리가 척척했다. 오줌을 싼 것이었다. 부끄러움도 혼날 걱정도 머리 아픈 것 때문에 날아가버렸다. 머리에 금이 가고 그 금 사이로 가시 달린 철조망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울었다. 엄마, 언니, 할머니를 찾고 할아버지, 부처님, 하느님을 다 찾았다. 아파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래도록 울었는지 몰랐다. 내 울음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만수오빠가 다락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옥희야, 왜 우니? 언니들이 잠을 자야 일하러 가고 오빠들도 학교 가서 공부한다. 아기야, 이쁘고 귀여운 네가 울면 쥐도 새도 잠을 못 잔다.

오빠가 나를 달래려 했지만 나는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누군가 사금파리로 내 머릿속을 사각사각 긁어대고 있었다.

너 맞고 싶어? 빨리 뚝 그쳐, 그치라고.

석수오빠까지 내려와서 내 눈앞에 주먹을 들이댔다. 그러더니 부엌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가다가 계단에서 바닥으로 굴러 넘어졌다. 냄비 뚜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날았다. 석수오빠는 “이이 쒸” 하고는 부엌에서 바깥 복도로 향한 문을 열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상하다. 일어나봐라, 옥희야. 일어나.

만수오빠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낙지 같은 연체동물이 된 것 같았다. 팔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만수오빠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나를 일으켜세웠다. 부엌문을 발로 차서 틈을 벌린 뒤 밖으로 나갔다. 만수오빠는 내게 어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라고 말했다. 나는 가죽나무 아래 맨드라미 줄기가 남아 있는 화단 옆에 앉아서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했다. 살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백번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만수오빠는 석수오빠를 향해 괜찮으냐고 물었다. 석수오빠는 자신에게 신경 쓸 거 없다고 욕하며 화를 냈다. 석수오빠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바지에 똥을 쌌는지 냄새가 진동했다. 만수오빠는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소리를 쳤다.

가스다. 연탄가스다. 가스! 가스! 아, 누나들, 누나들!

만수오빠는 다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빨간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먼저 굴러나왔다. 이어 만수오빠가 속옷만 입은 큰언니를 들쳐업고 나왔다.

석수야, 석수야!

만수오빠가 작은언니를 업고 나오라고 석수오빠에게 시켰지만 석수오빠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만수오빠는 내 발밑에 큰언니를 눕히고는 다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축 늘어진 작은언니가 만수오빠의 등에 업혀 나왔다. 작은언니는 간간이 신음 소리라도 내고 있었지만 큰언니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 언니의 얼굴은 백지처럼 하다. 그때 주인집의 마루 불이 켜지더니 주인 남자가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

허이구, 또 가스를 먹었구만. 병원에 빨리 데리고 가야지. 학생, 들고 뛰어, 빨리. 살리고 싶거든.

만수오빠는 주인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하고는 작은언니를 업은 채 철대문을 지나 밖으로 달려갔다. 나는 주인 남자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아저씨, 우리 언니 좀 살려주세요! 언니 좀 병원에 데려다주세요!

주인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만한 처녀를 어떻게 업고 가라고. 나는 군대 시절에 허리를 다쳐서 디스크가 있어. 여기서 십분만 가면 병원 있으니까 병원 가서 조수라도 불러와. 하도 가스를 많이들 먹으니까 새벽에도 병원은 돌아가지. 근데 왜 벌써 방에 불을 넣은 거야? 그렇게 춥지도 않은데. 돈들이 썩어나나. 연탄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석수오빠는 작은언니가 전날 연탄불이 꺼졌다고 번개탄을 사오게 했다고 대답했다. 공장 가기 전에 머리를 감아야 한다면서 물이 든 큰 냄비를 연탄 화덕에 올려놓았다고도.

냄비의 물이 끓어서 넘쳐가지고 연탄불이 꺼진 거야. 다 꺼지지는 않고 반만 꺼지면 가스가 무지하게 나오지. 그렇게 목숨을 걸어가면서 머리를 꼭 감아야 되나?

그렇게 말하는 주인 남자의 눈이 이상했다. 속옷 바람인 큰언니를 음흉하게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석수오빠를 향해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를 질렀다. 석수오빠는 자기가 뭘 어떻게 하느냐고 마주 소리쳤다. 주인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무슨 구경이 났느냐고 하면서 남편의 등을 밀어서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고는 입고 있던 스웨터를 여미며 말했다.

다 큰 계집애들이 어떻게 그렇게 부끄러운 걸 몰라? 홑이불이라도 씌워주지 않고.

내가 홑이불을 꺼내와서 큰언니에게 덮어주고 나서 조금 있다가 철대문에서 덜커덩덜커덩 소리가 났다. 문이 잠긴 것이었다. 문을 열자 땀투성이가 된 만수오빠가 뛰어들어왔다.

옥희야, 석수야! 너희도 나 따라와!

만수오빠는 힘겹게 큰언니를 들쳐업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힘이 없이 팔다리를 출렁대며 자꾸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큰언니를 떠받치며 뒤따라갔다. 석수오빠도 징징 울면서 따라왔다. 새벽부터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많이 보아온 일이라는 듯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병원 입구에는 ‘가스중독 전문 치료 고압산소통 보유 24시간 운영 중’이라는 붉은 글자가 적힌 간판이 형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섯개의 계단을 올라가야만 병원 문에 닿을 수 있었다. 만수오빠는 힘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큰언니를 놓치는 바람에 두사람 모두 계단에서 굴렀다. 큰언니는 계단에 부딪쳐 얼굴이 까지고 멍이 들었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병원 안에서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와서 큰언니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고압산소통이 들어 있는 방 앞에 긴 나무의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 작은언니가 기대져 있었다.

오빠, 명희언니 왜 아직 저기 있어? 왜 안 들어갔어?

내가 묻자 만수오빠는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산소통이 하나밖에 없단다. 두사람 중에 가스를 많이 마신 사람을 먼저 넣어야 한다고 해서 일단 놔뒀다.

그때 가운 입은 남자가 와서 말했다.

부모님은 없어? 시골? 거긴 전화도 전혀 안돼? 너 몇살이야? 고등학생이야? 둘 다 네 누나들 맞지? 누구를 먼저 집어넣을래?

만수오빠는 남자에게 물었다. 둘 다 치료할 수는 없는 거냐고. 남자는 고압산소 탱크가 두개 있는데 이미 다른 사람이 하나 들어가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한사람은 넣고 남은 사람은 다른 병원에라도 데려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연락을 해봤는데 근처에 있는 병원은 다 찼다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가스중독 환자가 많다, 병원 근처 다른 집에서도 가스중독 환자가 발생했다고 연락이 왔는데 데리고 갈 수가 없다고 했다.

빨리 결정해. 가스 먹고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로 오래 가면 깨어나도 후유증 때문에 사람 구실 못하니까.

만수오빠는 나와 석수오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큰언니는 마음씨가 착하고 제일 어른이었다. 엄마처럼 우리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보살펴주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재봉일을 해서 번 돈으로 살림을 꾸려나갔다. 작은언니는 똑똑해서 내게 공부도 잘 가르쳐주고 공장에 나가 우리 학비를 벌어왔다. 큰언니는 시집을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작은언니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시험에 합격하면 나를 대학에까지 보내줄 거라고 말했다. 큰언니는 형부가 될 사람이 외동아들이라서 결혼을 하면 형부가 우리를 잘 돌봐줄 것 같았다.

빨리 정하라니까. 지금 너희 뒤에도 사람들 줄 섰어.

석수오빠는 작은언니를 먼저 넣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한테 잘해줬으니까. 나는 큰언니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만수오빠가 울면서 큰언니를 선택했다. 그래서 고압산소 치료 탱크에 늦게 들어가게 된 작은언니는 평생 침을 흘리고 숫자도 제대로 못 세는 바보로 살게 되었다. 그렇게 똑똑하던 명희언니, 해와 달처럼 빛나던 작은언니가.

작은누나야, 미안하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명희누나, 누나, 누나.

만수오빠는 큰언니가 고압산소 탱크에 들어가고 난 뒤 석고상처럼 하얗게 굳어버린 작은언니를 붙들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솔직히 남자 고등학생이 어릴 때부터 한번도 가지 않던 교회나 성당의 주일학교에 간다고 할 때는 한가지 목적밖에 없는 거다. 남학생, 여학생이 떳떳하게 일주일에 한번 이상 만나고 가끔 산이나 들로 야유회도 가고 방학 때면 하계수련회 같은 걸 갈 수 있어서다. ‘남녀칠세부동석’이 금과옥조처럼 적용되던 조선시대도 아닌데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육년 동안 남자 여자 따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주일학교는 그나마 숨을 쉴 수 있게 이성교제라는 숨구멍을 열어놓은 것 같았다. 안 그랬다가는 욕구불만인 아이들이 어떤 식으로라도 터져버릴 테니까. 특히 남자 놈들이 한때의 충동을 이기지 못해 인생 망치고 변태가 되는 일이 그나마 줄어드는 것은 종교기관의 주일학교 때문인 것이다.

그래도 혼자서 교회 문을 밀고 들어가 합창연습을 하는 찬양대에 가서 주일학교가 어딘지 물어보고 주일학교 교실까지 들어가서 신청을 하기까지는 직접적이고 강력한 동기가 필요했다. 내게는 그게 박인혜라는 여자아이, 같은 나이의 여고생이었다.

인혜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새마을금고 이사장 딸이었다. 이사장은 그전에 공단 배후지인 우리 동네에 없어서는 안될 ‘벌집’을 지어서 파는 ‘집장사’를 했다. 벌집으로 동네가 거의 꽉 차게 되자 알짜배기 벌집 십여채에서 나오는 수입을 바탕으로 나중에 새마을금고가 들어가는 오층짜리 빌딩을 지었다. 마침내 그는 우리 동네에서 손꼽히는 부자이자 유지가 되었고 마침내 새마을금고의 이사장까지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물려받은 땅의 지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졸부가 된 사람들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났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동네를 쏘다니지도 않았고 유흥과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남들에게 날림으로 지어서 팔아먹은, 지은 지 일년도 되지 않아서 줄줄이 금이 가서 위로는 비가 새고 아래로는 연탄가스 중독자가 속출하는 ‘단기속성 주택’이 아닌, 튼튼하고 아름다운 이층 벽돌집을 제대로 지었다. 거실에서 인혜가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연주하는 「언덕 위의 하얀 집」 같은 곡에 어울리는 행복한 가정을 건설했다. 일요일이면 앙증맞은 양복을 입고 머리를 기름으로 발라넘긴 아들, 공주처럼 성장한 딸을 차에 태워서 교회에 갔다. 교회 맨 앞줄에서 온 가족이 소리 높여 찬송가를 불렀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서 목사님의 축복을 받았다.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달걀과 우유, 빵, 과자를 나눠 가져갈 수 있도록 특별헌금을 했다. 소문이 나서 많은 신도가 몰려왔다. 인혜 또한 교회에 남학생들을 몰려오게 만들었으므로 부녀가 교회의 부흥에 지대한 역할을 한 셈이었다.

인혜 때문에 교회에 온 남학생 가운데 그 누구도 철옹성처럼 단단한 그 가족끼리의 결속을 뛰어넘어 인혜에게 말을 건네보지 못했다. 인혜의 남동생 인철은 복싱 도장에 나가서 권투를 배웠는데 웬만한 동네 깡패가 설설 길 정도로 싸움 실력을 갖춘 채 어설픈 도전자가 자신의 누나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인혜 자신도 이성(異性)이라면 목사라 할지라도 최대한 거리를 두었고 고고한 아름다움과 냉철한 지성을 강력한 방어벽으로 삼고 있어서 우리로서는 그저 인혜를 가끔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를 고마워할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완벽한 박인혜와 멍텅구리 김만수가 오누이처럼 다정한 사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일학교에 들어가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에 나는 교회 내부의 성탄목에 솜과 별, 초를 장식하기 위해 만수가 잡고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인혜를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감히 근처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긴 교복 치마에 스타킹을 신었을망정 자칫하면 무릎 위쪽이 들여다보일 수 있는 인혜를 올려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사람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하하하, 호호호 하면서 볶은 깨가 쏟아지는 소리를 내가며 성탄목 장식을 도맡아 해냈다.

만수는 같은 동네에 살고 같은 중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 한번 나눌 가치가 없는 멍청한 놈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만수는 제 성적에 맞춰서 오년제 공전으로 가고 나는 서울 시내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갔으니 더이상 만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만수에게는 그놈과 전혀 안 어울리게 예쁜 누나가 있었다. 연탄가스를 먹고 돌고래 수준인 아이큐 80의 바보가 된 명희누나. 헤픈 웃음에 콧물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뻗정다리로 동네를 다닌다고 해도 예쁜 건 예쁜 거였다. 그 누나가 하루아침에 바보가 된 뒤로도 교회는 계속 다녔는데 거기에 남동생 만수가 동행했다. 인혜를 만나기 위해 나는 녀석에게 접근했고 몇번 만나지 않아서 세상에서 제일 친한 사이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었다. 나는 만수에게 어떻게 인혜와 그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는지 물었다.

인혜는 몇년 전에 작은누나하고 교회에서 만나서 친해졌어. 지금도 일요일마다 집에 와서 놀고 가곤 한다.

만수에게서 직접 확인한 사실은 나를 더 큰 충격에 빠뜨렸다. 인혜는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거의 반드시 만수의 집에 들렀다 가는데 갈 때는 그냥 가는 법이 없이 꼭 교회 앞에 있는 빵집에서 귤, 호빵, 카스테라 등등을 사들고 가서 나눠 먹는다고 했다.

만수 큰누나의 분석에 따르면 인혜는 원래 외로운 아이였다. 부모 잘 만나 행복한 가정에서 그늘 하나 없이 성장했고 공부 잘하고 책을 많이 접해 교양이 넘치고 똑똑하며 누구보다 예쁘기까지 한데 실은 그렇게 완벽하다는 게 그녀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교회 주일학교에 나간 것도 사실 다른 아이들과 교회라는 건전한 울타리 안에서 사귀어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친해질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녀의 부모와 가족이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위상이 오히려 일반적인 아이들과 인혜 사이를 더 갈라놓았다. 그런 인혜에게 스스럼없이 접근해 말을 걸고 솔직하게 예쁘다, 귀엽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만수의 작은누나였다. 명희누나와 인혜는 곧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명희누나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하다 깨어난 뒤부터 명희누나가 교회에 모습을 나타내면 인혜가 함께 집으로 갔다. 그들 셋은 친한 오누이처럼 방 안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인혜가 사간 빵이며 음료수를 나눠 먹고 큰 냄비에 수제비나 라면도 함께 끓여 먹곤 한다는 것이었다. 수제비나 라면을 끓일 때는 양을 늘리기 위해 마른 국수를 두주먹 집어넣는데 국수 때문에 라면이 짜져서 훨씬 더 맛있다는 것이었다. 인혜는 자신의 집에서는 구경조차 한 적 없는 일반 사람들의 음식을 너무도 좋아했다.

야, 너희 집에 나 놀러 가면 안되겠냐. 솔직히 네 방에 한번도 못 가봐서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했다.

내가 말하자 만수는 자신의 방은 보여줄 만한 데가 아니라고 했다. 세 자매가 기거하는 방에 딸린 다락방에서 자신과 남동생 석수가 자는데 빈대와 벼룩이 들끓고 가끔 쥐가 발을 타넘고 다니며 앉아 있기조차 힘들게 천장이 낮다는 것이었다. 다락방은 여름에는 슬라브 지붕에서 내려오는 열로 참을 수 없이 무덥고 겨울에는 떠다놓은 물에 얼음이 얼게 추워서 이불을 턱까지 덮고 부들부들 떨다보면 날이 밝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도 했다.

야, 이 자식아, 친구가 뭐냐. 서로 숨기는 게 없는 게 친구 아니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의리있고 가까운 친구가 너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솔직히 슬프다.

하지만 만수는 쉽사리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나는 새벽에 만수가 신문배달을 할 때 같이 거들기도 하고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일요일날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도 해주었다. 먼저 우리집으로 초대해서 냉면을 배달시켜 함께 먹기도 했다. 내가 학교 아이들끼리 모여 만든 그룹싸운드의 보컬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중고 앰프 기타로 레드 제플린, 블랙 싸바스의 음악도 연주해주었으며 카세트에 녹음해서 집에 가서 다 같이 들어보라고 주었다. 그렇게 애를 쓰고 공을 들인 끝에 드디어 만수의 큰누나한테서 고마워서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한번 놀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만수의 집은, 아니 만수가 세 들어 있는 집은 우리 동네에 흔한 벌집이 아니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가정집이었다. 주인집이 있는 본채는 방 세개, 부엌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두가구였는데 만수 식구들은 방 하나와 부엌 하나를 빌려서 살고 있었다. 마당에는 세 가족을 위해 수도가 설치되어 있었고 맨드라미와 백일홍 같은 꽃이 핀 화단에, 대문간에는 그 집의 모든 사람들이 같이 사용하는 화장실과 목욕탕, 연탄광이 만들어져 있었다. 소금장수 막내아들로 서울에 올라와 버는 족족 아끼고 저축해서 장가도 가기 전에 자기 집을 살 정도로 자수성가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아버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살고 싶은 집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집. 가난하더라도 정갈하고 소박하게, 정감이 가게 꾸미면서 살아가는 그런 집.

내가 떨리는 가슴으로 앰프 기타를 메고 스피커를 든 채 만수의 집 녹색 철대문을 들어섰을 때 안에서 여자들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만수보다 여섯살 적은 옥희만이 아이 같았을 뿐 세 여학생, 아니 세 처녀, 아니 세 여자는 전부 어른 같았다. 나는 세 여자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쩔쩔맸다. 만수가 나를 소개했다.

아이 우드 라이크 투 인트로듀스 마이 베스트 프렌드 한구 초이……

벽돌로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공부를 하도 못해 서울 외곽 후진 공전에나 들어간 미래의 공돌이가 어디서 저런 영어를 배웠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모두 나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영어 하나 못하는 옥희까지.

예스, 예스, 아이 엠 한구 초이. 아이 엠 어 스튜던트, 어…… 하, 하이스쿨. 하이스쿨 보이.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잘 구운 적벽돌처럼 단단하게 생긴 석수가 건방진 어조로 내게 물었다. 물론 영어로.

당신은 어떤 과목을 좋아합니까?

다시 머리가 띵했다. 나는 그저 예스, 예스 하면서 고개만 끄덕거렸다.

당신의 취미는 뭡니까? 본인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잘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침 만수가 나를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집을 뛰쳐나갔을지도 몰랐다. 앰프고 스피커고 다 팽개치고.

나의 친구는 기타를 아주 잘 연주합니다. 기타는 음, 바로 이 일렉트릭 기타입니다. 그의 취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록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때 인혜가 물었다. “신청곡도 할 수 있나요?” 나는 콧등의 진땀을 닦으면서 “예스, 예스” 하고 대답했다. “난 영어로 안 물었는데” 하고 인혜는 높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복음성가인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만 했다.

내가 기타 줄을 튜닝하고 선을 연결하고 볼륨을 맞추는 동안 그들은 ‘원 카드’라는 카드게임을 멈추고 상을 치웠다. 일요일에 함께 점심을 먹고 난 뒤 늘 하던 대로 만수 다섯 남매와 인혜가 한이불을 덮고 빙 둘러앉은 것이다. 이불 위 쟁반에는 인혜가 사온 귤이 그득 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 귤을 까 먹으며 이게 달다 저게 시다 하면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기도 하며 놀았다. 가끔 이불 속에서 그들끼리 다리가, 살이 닿기도 했으리라.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살이 떨렸다. 그 와중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내가 그때까지 부른 노래 가운데 가장 열심히, 정성스럽게 부른 노래였다.

내 영이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나님, 내 영이 주를 찬양하리니 크시도다 주 하나님.

맹인가수 이용복의 노래 「줄리아」, 윤형주의 「조개껍질 묶어」, 쌘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 은희의 「꽃반지 끼고」, 폴리네시아 민요 「비니비니」 등등 내가 대중도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신청곡을 목이 쉬도록 부르는 내내 그들은 한이불 속에 있었다. 그들은 음악다방에서 디제이가 틀어놓은 음악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열중하는 손님들 같았다.

 

큰언니는 꼭 결혼을 해야 했을까. 나는 서둘러 결혼을 한 큰언니가 원망스러웠다. 큰언니가 결혼을 하고 나자 남은 우리 남매들은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먼저 작은언니를 시골집으로 보냈다. 우리와 떨어지기 싫다고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차디찬 대문을 붙잡고 버티던 명희언니, 언니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많이 울었다. 만수오빠가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같이 하고 있는데도 수입이 반 이하로 줄었다. 석수오빠도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신문배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수오빠는 수업을 야간으로 옮기고 오후에도 신문을 돌렸다. 신문지 사이에 광고를 넣는 가게에 가서 배달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혹시 배달사고라도 나면 수업을 빼먹어야 했다. 만수오빠가 학교에 내는 등록금은 늘 한 학기씩 밀렸다. 언제 퇴학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만수오빠는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을 찾아서 산과 들을 종일 쏘다니다 밤이 이슥해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도 빈손으로 온 적이 없었다. 돌아가신 큰오빠가 만수오빠를 칭찬한 것도 늘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먹을 게 생기면 입에 집어넣기보다는 집으로 가지고 오는 태도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먹을 것 대신 돈, 돈을 찾아가지고 들어와야 했다. 아버지가 주고 간 고물 자전거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미웠다. 정말 미웠다.

큰언니가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면서 결혼을 할 바에는 큰언니를 그렇게 좋아하던 이명수 씨와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큰 회사에 다니는 이명수 씨라면 최소한 오빠들의 학교 등록금 정도는 내주었을 터였다.

아버지는 이명수 씨가 큰언니와 결혼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고 막았다. 인사를 하러 시골집까지 오는 것조차 못하게 했고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하고 싶은 대로 하려거든 큰언니더러 호적을 파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우리 세 남매를 뒷바라지한다고 큰오빠의 유물이자 유산인 재봉틀로 재봉일과 삯바느질을 하던 큰언니가, 교복부터 실내화 주머니까지 우리 남매들 입을 옷은 죄다 원단 떠다가 만들어서 입히느라 눈코 뜰 새 없다던 큰언니가, 동생들 챙기고 밥 짓고 도시락 싸주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씻기고 재우고 하며 정신없이 살아야 했던 큰언니가 사실은 멀끔한 사내놈들과 연애질이나 하러 다닌 게 아니냐고, 그러지 않고서는 방송통신과정으로 고등학교 학력 인증을 받았을 뿐인 큰언니가 번듯한 대학을 나온 이명수 씨 같은 사람을 어떻게 꼬셨겠느냐고 했다. 아버지 입장이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을 책임지기 싫었고 그래서 최대한 큰언니가 늦게 결혼하기를, 아니 우리가 자립할 때까지 아예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큰언니에게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거나 두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열렬했는가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알게 된 이명수 씨의 부모도 이명수 씨에게 큰언니를 만나지 말라고 했고 또 그 사실을 알게 된 큰언니는 이명수 씨가 찾아와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주인집으로 큰언니를 바꿔달라는 이명수 씨의 전화가 와도 큰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인집 아저씨에게 혼이 날까 눈치를 보느라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누르지도 못하던 이명수 씨는 우리 방 뒤창에 모래보다 조금 더 큰 돌을 던져 내가 창을 열게 만들었다. 큰언니는 이명수 씨가 온 걸 알고도 계속 재봉질을 할 뿐, 고개 한번 들지 않고 눈 한번 돌리지 않았다. 석수오빠는 완전히 아버지 편이어서, 아니 자신의 편이어서 이명수 씨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아버지한테 편지를 쓸 때도 바람둥이 건달이라고 나쁘게 썼다.

만수오빠와 내가 나가서 이명수 씨를 만났다. 푸른 양복에 붉은 넥타이를 매고 청회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온 이명수 씨는 주황색 공중전화기가 달려 있는 구멍가게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동네 어른들이 간이 파라솔 밑에서 김치찌개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명수 씨는 제발 언니를 한번만 보게 해달라고 만수오빠에게 부탁했다. 만수오빠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권유했다.

이명수 씨는 아주 잘생겼고 성격도 좋고 집안도 훌륭하시고 좋은 직장에도 다니고 계시니까 큰누나보다 더 좋은 신붓감을 금방 만나실 거라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큰누나를 최대한 빨리 잊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큰누나가 이명수 씨에게 정말 고마워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만수오빠가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이명수 씨는 내 손을 잡고 앉아서 울었다.

이 작고 고운 손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막내 여동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소중하고 귀여운 막내 처제의 손일 수도 있었는데. 왜 이런 시련을 우리에게 내리십니까. 하늘이시여, 제발 이 운명의 잔을 거두어주십시오.

이명수 씨의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 손등을 적셨다. 여름에는 내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여주었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군밤이 든 봉지를 건네주기도 했었다. 한 손에는 내 손을, 한 손에는 큰언니의 손을 잡고 「목장길 따라」 같은 노래를 부르며 포도밭 옆 흙길을 따라 걸어간 적도 있었다. 이명수 씨의 손은 언제나 따뜻했고 정다웠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그의 손은 차갑다 못해 얼음처럼 딱딱했다. 만수오빠도 동네 어른이 일어서고 남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짓고 있었다. 뚱뚱한 구멍가게 주인아줌마가 연탄난로에 손을 쬐면서 우리가 뭘 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명수 씨는 구멍가게에서 귤을 샀다. 하나씩 예쁘고 큰 것을 골라 종이봉지에 담으며 만수오빠에게 말했다.

귤은 껍질을 벗기면 여러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지. 그 방을 싸고 있는 껍질을 다시 벗기면 아주 작은 방들이 수천개가 들어 있다. 이 봉지에 든 귤 속의 수많은 방보다 더 많은 금희씨와의 추억을 내가 영원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해다오. 내가 살아서 숨을 쉬는 한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비록 떨어져서 각자 살아갈지라도 내내 그리워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그러면 우리는 헤어져도 헤어지는 게 아니라고.

이명수 씨는 귤이 든 봉지를 내 가슴에 안겨주었고 만수오빠와는 악수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이명수 씨의 말을 큰언니에게 전하자 큰언니는 피식, 하고 웃었다.

끝까지 개폼을 잡는구나. 누가 문학청년 아니랄까봐.

그로부터 한달 뒤 큰언니는 화물트럭 조수인 남자와 함께 시골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얼굴이 가무잡잡해서 내가 보는 즉시 ‘깜씨’라고 부르기 시작한 그 남자는 고등학교 중퇴 학력에 월세방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래로 동생 셋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읍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집 앞에까지 온 두사람을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미래의 형부가 될 그 남자는 집 밖에서 마당에 있는 아버지에게 큰절을 했다고 한다. 큰언니는 아버지에게서 턱도 없는 개소리 하지 말고 썩 꺼지라는 말을 듣고는 남자의 몸을 돌려세워 걸어서 읍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조카 영국이가 생겼다. 큰언니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임신 육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 아버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 형부 쪽이나 하객이 많지 않아서 부조금으로 겨우 예식장비를 냈다.

큰언니는 영국이를 낳자마자 자수나 인형 만들기 같은 부업을 하기 시작했고 형부는 월부로 트럭을 사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두사람 다 누구보다 힘들고 오래도록 많은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는 있었지만 오빠들의 등록금을 내줄 처지는 되지 않았다. 그 집에도 동생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많았다. 무엇보다 영국이 할머니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한푼이라도 며느리의 친정으로 가면 당장 쫓아내버리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할머니는 자신의 귀한 자식이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산골까지 가서 마당 앞 길바닥에 꿇어앉아서 절을 하고도 미래의 장인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큰언니가 결혼을 하고 난 이후 단 한푼의 돈도 한톨의 쌀도 우리에게 보내주지 않음으로써 남은 우리 세 남매가 서로를 부양하고 책임지게 만들었다. 우리가 자신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하면 아버지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도 통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아가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굶은 지 이틀이 되자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팠다고 했다. 세달째 밀린 월세 중 한달 치 월세를 가지고 왔던 그놈은 현관문을 두드렸는데 문이 그냥 열리더라고 했다. 그놈의 눈에 우리집 부엌에 놓인 석유풍로가 보였더란다. 그 위에 하필 밥이 든 냄비가 얹혀 있었다. 그때 우리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놈은 다 떨어진 운동화를 벗고 조심스럽게 우리집 마루에 발을 들여놓았다. 거실 구석에 있는 아이 책상에 한달 치 월세가 든 봉투와 곧 나머지 월세도 갚겠다는 내용의 쪽지를 놓고 가려고 했었단다.

그놈은 그전에 우리집 마루에 올라온 적도 없었다. 마루에는 노란 바니스가 칠해져 있었고 유리처럼 미끄러웠다. 아내가 매일같이 쓸고 닦고 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러닝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아내와 마주 누워서 오렌지 음료 분말을 찬물에 타고 얼음을 띄워서 나눠 마시기도 했다. 그곳은 나만의 영토였다. 내 허락 없이는 어떤 인간도 우리 가족만의 사적인 공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세입자는, 그것도 월세를 세달씩이나 밀리는 세입자는 내 눈에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달이 밀리면 그냥 쫓아내도 되는 게 법이었다.

우리집 부엌은 안방과 건넌방 사이 마루 안쪽에 움푹 파인 두평쯤 되는 공간이었다. 거기에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서 상을 차리면 거실에서 식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놈은 부엌에 들어선 이유가 거기 있는 밥을 훔쳐 먹자는 게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그저 냄비에 든 게 뭔지 보고 싶었고 냄비 속에 그득한 밥을 보자 냄새만 맡아보기만 해도 위안이 될 것 같았다고 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도둑질 같은 범죄라는 생각도 없었다. 도둑놈 심보는 그렇게 생겨먹었다.

냄비에 들어 있는 밥은 아내가 점심 전에 지은 것이라 미지근했다. 그놈은 밥의 온기를 가늠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밥알을 살짝 만졌다고 했다. 그랬는데도 자석에 딸려오는 쇳가루처럼 밥알이 손에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그 밥알을 떼어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했지만 이미 밥알에는 그놈 손가락의 더러운 때가 묻었다고, 냄비 가운데 시커메진 밥알이 몇개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아내가 이게 뭔 조화인가 의심을 할 것 같았단다. 밥알을 씻어서 원래의 색깔로 회복한 뒤에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순서였다. 그런데 손가락이 제멋대로 밥알을 입술 속에 밀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밥알 몇개가 녀석의 입속에 들어갔다.

제 생각과는 상관없이 혀가 밥알을 안으로 당겼단다. 이가 움직이며 밥알을 토막냈더란다. 이제는 영영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글러버렸단다. 밥알 하나하나가 그렇게 달 수 없었단다. 밥알이 설탕 알갱이 같았단다.

냄비에 있는 밥을 절반 가까이 먹고서야 녀석은 제 행동을 멈출 수 있었다. 밥도둑은 내 집에서 허둥지둥 도망쳐서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새로 쪽지를 썼다고 한다.

 

주인 아저씨, 아주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댁의 부엌에 있는 귀하고 소중한 밥을 훔쳐 먹었습니다. 저는 도둑입니다.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치 말고 꾸짖어주십시오. 무슨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7111525분 세입자 김만수

 

둘째아이를 낳고 도진 빈혈 때문에 아내는 아침에 도시락을 싸지 못했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고 난 뒤에 새로 밥을 지어 도시락을 싸서는 내가 근무하는 은행 지점으로, 아이들 학교로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집에 돌아온 아내는 그놈의 쪽지를 읽었다. 그런데 쪽지 내용이 너무 공손하고 그럴싸한 게 무슨 저의가 있는 것처럼 무섭게 느껴졌다고 했다. 아내는 내게 전화를 걸어 우리집에 세 들어 사는 놈이 아무도 없는 새 구둣발로 집에 들어와 밥을 훔쳐 먹었다고 알렸다. 밥만 훔쳐 먹었겠느냐, 그동안 없어진 패물이나 돈은 없는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 일단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운동구점으로 갔다. 야구 배트를 하나 샀다. 알루미늄으로 된 시합용은 비싸서 나무로 된 걸로 골랐다.

저녁을 든든히 먹고 나서 도둑놈을 불렀다. 마당에 무릎을 꿇게 하고 야구 배트를 휘두르며 도둑질을 한 경위에 대해 물었다. 막상 성질대로 패자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대문 옆 변소에 기대져 있던 대걸레의 자루를 빼들었다.

이 도둑놈 새끼야, 네가 무슨 장발장이냐? 내가 너 같은 쓰레기가 쓴 이런 편지를 보고 신부님처럼 용서를 해줄 줄 알았냐? 에라이, 이 도둑놈의 종자야. 밥버러지 같은 놈아. 내 다시는 네가 이런 도둑질 못하게 만들어주마.

대걸레 자루로 맞으면서 그놈은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어린 여동생이 모기처럼 앵앵 소리 내서 울고 남동생이라는 놈은 주먹을 쥐고는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놈보고도 엎드려뻗치라고 했지만 때리지는 않았다. 한 오십대쯤 패고 났더니 자루가 부러졌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을 보니 그래도 사람이라고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 옆에 있는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광고를 써붙인 게 생각났다. 저렇게 손을 빨리 비빌 수 있다면야.

 

만수에게 덜컥 징집영장이 나와서 군대에 가게 되었을 때 정말 우리는 어쩔 줄 몰랐다.

전문학교 졸업했다고 군대를 꼭 가야 하냐? 연기를 할 수는 없나? 꼭 현역이어야 하나? 남들은 방위로 가서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일해서 돈만 잘 벌더라.

내가 따졌다. 매일 코피를 쏟아가며 죽어라 공부한 끝에 국립대 경영대학에 차석으로 합격해서 일년 동안 등록금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만수가 군대에 간 사이 2학년, 3학년이 될 것인데 그때는 장학금을 받지 않는 한 등록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등록만 한다고 학교를 저절로 다니게 되지는 않는다. 책값, 교통비, 식비를 다 어쩔 것인가. 나는 정부에서 금지한 불법과외를 한다면 그럭저럭 학교를 다닐 수는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옥희는 누가 책임지나.

당장 월세를 못 내 길바닥으로 쫓겨나게 생겼다. 보증금으로 몇달을 버틴다 해도 쌀이 떨어지고 전기료, 수도료 못 내고 연탄이 없어 춥고 캄캄한 방에서 굶어죽고 얼어죽게 생겼다.

내가 휴학을 하고 만수처럼 세차장에서든 뭐든 돈을 벌어 두 남매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울 주요 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은 특별한 사유 없이 휴학을 하면 운동권이라는 의심을 받아 곧바로 영장이 나와 전방으로 끌려간다고 했다. 특별한 사유에는 생계를 책임지던 형이 군대를 가게 되었다는 건 포함되지 않았다. 전방에 끌려가게 되면 몸이 약한 내가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내게 휴학과 입대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잘난 형 만수가 무기력하게 군대에 끌려가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었다.

미안하다. 내가 능력이 없어서 미리 돈을 많이 벌어놓지도 못했어. 그래도 너희를 조금 더 가까이서 자주 보려고 전투경찰에 지원했다. 해안선 같은 데 배치되더라도 전방에 있는 현역보다는 자주 보러 나올 수 있을 거야.

나는 핏대를 세웠다.

전경은 네가 군대생활 편하게 하려고 지원한 거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야. 너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야. 넌 애초부터 너밖에 모르는 인간이야. 형이고 오빠면 동생들이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있고 자립할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몇해 먼저 태어났다고 형이냐. 너는 책임회피의 천재다.

미안하다, 석수야, 옥희야.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너희가 고생이다. 정 힘들면 시골 아버지 집에 가서 있는 것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이고 걸레고 쓰레받기고 할 것 없이 마구 집어던지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죽으면 죽었지 아버지 집으로는 갈 수 없었다. 연탄가스 사고 이후 바보가 되어버린 명희누나가 침을 질질 흘리며 이상한 걸음걸이로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광경이 떠올랐다. 그 뒤를 등이 구십도로 굽은 할머니가 따라다니는 것도. 어머니는 몰라도 아버지는 명희누나에 더해 우리까지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는 제어장치가 전혀 없는 폭발물 같았다. 그런데 나 또한 그런 아버지의 폭군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물론 나는 아버지처럼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았다. 맨정신으로도 아버지처럼 발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게 아버지와 다른 점이었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그래도 조용하게 일을 하고 술을 마시고 미쳐 날뛰고 난 뒤 다시 조용해지는 아버지와 달리 나는 발작 전후에 침착하고 냉정했고 발작의 원인이 된 것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발작 때 보탰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만수는 계속 미안하다고 중얼거렸다. 내가 소리쳤다.

닥쳐, 아가리를 미싱으로 박아버리기 전에.

금희누나가 두고 간 낡은 재봉틀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금희누나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이건 월세 넣어둔 통장이고 도장이다. 이건 쌀하고 된장, 소금이다. 반년은 먹고살 수 있을 거다. 엄마가 보내준 참기름도 있다. 반찬 살 돈은 여기 있다. 떨어지면 간장에 참기름을 넣어서 비벼 먹어. 내가 최대한 빨리 돌아와서 너희가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볼게.

만수는 결국 울면서 집을 떠나갔다. 입영 전야에 머리를 깎고 남들처럼 생맥주 한잔 마시지도 못하고, 나한테 “너는 인간도 아니야!” 하는 욕은 배부르게 듣고. 만수의 대답은 이랬다.

그래, 내일부터 난 군바리다.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간호보조원으로 근무하는 중에 별의별 일을 다 보았다. 부부싸움 끝에 머리에 과도를 꽂고 걸어 들어온 여성 환자를 맞은 적도 있었다. 절묘하게 두개골 사이로 난 틈에 칼날이 꽂히는 바람에 큰 상처도 출혈도 없었다. 교통사고 환자를 맞는 건 세끼 밥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잦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환자는 특별했다. 교통경찰이 환자였다. 나이가 마흔두살, 계급은 경장이었고 신호위반과 과속을 일삼던 승용차를 추적하던 중에 반대편에서 오던 오토바이와 충돌해서 오른쪽 정강이뼈가 골절 됐다고 했다. 교통경찰을 보조하는 전경이 같이 왔다.

엑스레이를 찍고 치료를 해야 하니까 부츠를 벗어주세요.

내가 말했지만 환자는 부러진 다리가 부어서 부츠가 잘 벗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골절 환자의 바지가 벗겨지지 않는 경우에는 가위로 바지를 잘라서 벗기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송경장의 부츠는 가죽이 워낙 두꺼워서 천을 자르는 의료용 가위로는 턱도 없었다. 레지던트 이년차인 송선생은 부츠를 벗기고 나서 연락하라고 다른 환자에게로 가버렸다. 전경에게 환자를 맡기고 관리과에 조경용 전지가위를 빌리러 갔다. 그런데 전지가위는 생각과 달리 둔탁했고 녹까지 슬어 있어서 도저히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총무과로 달려가서 공업용 커터와 가위를 가지고 응급실로 다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환자가 사라졌다. 밖으로 뛰쳐나가보니 송경장이 전경의 부축을 받아 절뚝거리면서 병원 아래쪽으로 가고 있었다.

저기요! 환자 분! 지금 어디 가세요? 뭐 하시는 겁니까?

두사람은 빨리 움직이려고 하고는 있었지만 다리가 부러진 사람과 성한 사람이 이인삼각 경기를 하는 꼴이라 금방 따라잡혔다.

상부 지시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출동해야 됩니다. 미안해요.

송경장은 골절 부위가 자극받아 통증이 극심한지 입을 딱딱 벌리면서도 가봐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이러시면 안되죠. 다리가 부러진 게 분명한데 지금 그걸 치료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내 눈에는 아무래도 두사람이 도망치려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솔직히 얘기할게. 내가 말이야, 아니 우리 교통들이 잘 가는 단골 병원이 있어요. 그리로 가려고 그래. 병원에서 우리 교통을 잘 알거든. 교통사고에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빠삭해.

응급환자를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어요. 최소한 응급조치는 하고 가셔야죠. 지금 출혈도 있으신데. 그 병원이 어딥니까. 차를 타고 가시면 됩니다. 앰뷸런스든 소방서 구급차든 간에.

아, 그,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내가 그냥 알아서 한다니까!

송경장은 시커먼 썬글라스를 약간 젖혀서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을 드러냈다. 눈가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썬글라스와 얼굴이 닿는 부분은 기름때처럼 검은 먼지가 묻어 있었다.

제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까 진찰하신 응급실 담당 선생님 허락이 있어야 돼요. 그분께 말씀드리세요.

웬일인지 나도 그냥 보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맞서 있는데 경찰 순찰차를 앞세운 구급차가 달려왔다. 급한 환자를 태운 구급차는 지나가고 순찰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더니 정복을 입은 경찰관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무궁화를 두개 단 경찰 간부였다. 전경이 경례를 붙였다. 그 바람에 송경장이 비틀하면서 아이구, 하고 신음을 냈다. 경찰 간부는 다시 무슨 일이냐고 전경에게 물었다. 머리가 좀 큰 편에 착해 보이는 인상의 전경은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경찰 간부는 바닥에 주저앉아 에구에구 소리를 지르는 송경장을 보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교통경찰 전문병원? 그런 게 있나? 국립경찰병원 말이야? 여기서 경찰병원이 얼마나 먼데 다리가 부러져가지고 거기까지 가? 그것도 걸어서 갈 건가?

송경장은 한마디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통증이 심한 게 분명했다. 경찰 간부는 마치 병원 간부라도 되는 듯 내게 들것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막 구급차에서 내린 환자들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남는 들것이 없어 휠체어를 가지고 가서 송경장을 태웠다. 송경장은 응급실로 돌아가는 게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처럼 싫은 모양이었다. 경찰 간부가 전경을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속과 계급, 근무지역을 묻고는 수첩에 적었다.

응급실 안으로 들어온 뒤 경찰 간부는 송경장 주위를 커튼으로 둘러치게 하고는 가위를 가져오라고 했다. 침대에 올라앉아 다리를 늘어뜨린 송경장은 체념한 표정이었다. 경찰 간부는 내 손에 든 커터를 건네받고는 전경에게 “네가 해!” 하고 넘겼다. 전경은 송경장에게 “죄송합니다” 하더니 부츠를 자르기 시작했다. 다리는 비스듬히 꺾여 있는 복합골절 상태였다. 기절하지 않고 있는 게 신기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경찰 간부가 말했다. 잘린 부츠 속에서 나온 것은 피 묻은 만원짜리 지폐였다. 꼬깃꼬깃 접힌 것도, 다발도 있었다. 운전자들이 면허증 밑에 넣어서 교통위반 단속을 하는 경찰에게 잘 봐달라며 뇌물로 건네는 돈, 또는 더 큰 사안으로 건넨 돈다발이었다.

한번만 봐주십쇼, 제발 한번만.

송경장은 손바닥에서 싹싹 소리나게 빌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 같아 존경스러워질 정도였다.

너 교통만 몇년 했냐?

경찰 간부는 아예 반말을 해댔다. 송경장은 칠년이라고 했고 전경은 육개월이라고 했다.

집이 몇채야? 어떻게 교통으로만 칠년을 근무하냐? 어떤 놈이 뒤를 봐주는 거야? 욕심 많은 새끼. 딴 사람 생각은 안하냐?

왼쪽 다리를 감싸고 있던 부츠에서는 더 많은 돈이 쏟아져나왔다. 간부는 전경에게 검정 구두를 벗으라고 명령했다. 깔창 아래에서 오천원짜리 두장과 만원짜리 세장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너도 집 샀어?

그러자 전경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월세를 전세로 옮겼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간부는 “미꾸라지 같은 새끼” 하고는 전경에게 부츠를 들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피 묻은 부츠를 순찰차의 트렁크에 넣게 하고 탕, 소리 내 문을 닫은 뒤 나를 향해 느닷없이 윙크를 해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